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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last modified: 2015-04-09 20:47:57 by Contributors

청의 역대 황제
초대 태조 천명제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2대 태종 숭덕제 홍

(ɔ) Annonymous Qing Dynasty Court Painter from
묘호 태조(太祖)
시호 만주식 더르기
중국식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한호[1] 거런 구룬버 우지러 겅기연 한[2]
만주어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愛新覺羅 努爾哈赤, 애신각라 노이합적)
© (cc-by-sa-3.0) from

(Aisin-gioro Nurhaci)
연호
(후금)
만주어 압카이 풀링가
중국어 천명(天命)
몽골어 텡그린 술데투
생몰기간 음력 1559년 ~ 1626년 9월 30일(68세)
재위기간 음력 1616년 2월 17일 ~ 1626년 9월 30일(10년 225일)

(淸)의 초대 황제.

Contents

1. 소개
2. 업적
3. 전설


1. 소개

실력도 실력이지만 천운을 타고난 자.하늘이 도운 건국 황제.[3]
누르하치는 후금의 건국자로, 곧 중국 최후의 왕조인 청 제국의 초대 황제다. 그는 또한 1583년부터 건주 여진족을 통솔했다.

그는 건주 여진 출신으로, 조선 초 오돌리족 먼터무(孟特穆)[4]의 6대손이다. 1583년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성량이 이끄는 명군을 도와 반명 성향의 여진족 마을을 치는 과정에서 명군에게 오인 사살된 후, 그 뒤를 이어 푸순 동쪽 지방의 추장이 되었다. 누르하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한 배상으로 명은 특히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상당한 특혜를 베풀어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여진족을 통합하기 시작, 만주 북동부의 여진족 대추장으로 청의 전신인 후금을 세웠으며, 만주어를 위해 골 문자를 이용한 주 문자의 제작을 명했다. 1616년 그는 주위 여진족들을 정복하여 만주 지방의 대부분을 수중에 넣은 후에 랴오양, 묵던(Mukden, 지금의 랴오닝성 선양시)에서 나라를 세워 한으로 즉위하였는데, 예전에 여진족이 세웠던 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국호를 후금(後金)으로 하고, 연호를 압카이 풀링가(天命)라 하였다.

여진을 통합하고 청이 세워지는 과정을 더 자세히 말하자면 명의 이성량을 도운 일부터 올라가야 하는데 이 이성량이라는 인물은 현재 라그베다 위키에 항목조차 작성되어 있지 않지만 당대 제일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았고 요동왕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실제 여진들은 이성량을 두려워했고 누르하치조차 이성량이 좌천되기까지는 아무리 세력을 키웠어도 눈밖에 나지 않게 뇌물을 보냈다.누르하치에게 맡긴 이후 이성량은 타락하기 시작했고 누르하치의 만행을 방임해주었다.그렇게 누르하치가 여진들을 통합하며 힘을 키워나갔고 이소식을 들은 명 본국에서는 이성량을 좌천시키고 새로운 관리를 요동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 선택은 명의 섣부른 선택과 병크였는데 이 당시까지만 해도 타락했다고 해도 이성량은 누르하치를 끝낼수 있을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명은 이성량을 좌천시키고 경험도 없는 사람을 보내버린 것이다.

새로운 인사들도 본국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예상외로 강한 누르하치의 세력에 놀랐고 함부로 제압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서 누르하치의 선택은 대적도 아닌 뇌물이 었다.사전에 이성량과 싸운 여진족들이나 니탕개처럼 힘이 생겼다고 힘으로 대결하거나 경고한 것이 아닌 뇌물과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적대를 하지 않았다.

새로온 요동으로 발령난 사람으로서는 예상밖에 큰 누르하치의 세력과 구태여 적대하며 싸우기를 꺼렸고 재보를 보내주니 이성량처럼 누르하치의 여진통합 과정을 눈감아 주었다.여기서 누르하치의 능력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뇌물을 보낸다고 해도 이대로라면 결국 명의 본국에 이 일이 들킬수 밖에 없었고 이렇게 되면 명이 본격적으로 누르하치를 막는 것은 불보듯 뻔할수 밖에 없는데...이때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임진왜란은 누르하치에게 있어서는 천재일우로 이후 명의 시선은 전부 조선에 집중되어 누르하치는 안중 밖이 되버렸다.그 이후 명의 시선을 거리끼지 않고 전력으로 여진족들을 통합하기 시작했고 결국 전부 모든 여진족들을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이성량의 요동관리와 누르하치의 여진족 통합 과정은 사르후 전투 항목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여담으로 임진왜란때 원군 지원을 두차례나 제시하기도 했다. 1592년 8월에 "조선 너네 힘들어 보이는데 우리가 원병 보내줄까?"라고 제안을 했고 당시 명나라에서 만력제가 나서기 전이라 원군 지원에 대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라, 조선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지만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거절했다. 이어 임란이 거의 종료될 시점인 1598년 1월에도 "우리가 군대 보내줄까?"라고 제안했었는데 전투보다는 화친에 주력했던 명나라의 모습에 "원군 받아서 왜놈들 때려잡읍시다."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당시 누르하치는 조선을 '조상의 나라'란 존칭까지 써가며 원군 파병을 제안했는데, 물론 누르하치가 순수한 뜻에서 조선을 도우려 했을 리는 없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이 쑥대밭이 된 틈을 타서 원군이란 명목으로 조선 영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에서 나라를 물리치고 요동을 장악하였는데, 이때 명나라에 파견된 강홍립 휘하의 조선군과도 담판을 벌였다. 인조반정 이전에는 광해군의 기미책으로 인해 조선과 후금 간의 충돌은 없었으나, 그 후 인조반정으로 인해 후금에 부정적인 정권이 들어섰음을 알고 조선 배척 정책을 시행하였다. 1626년 영원성 전투 도중 홍이포에 맞아 부상을 입은 뒤에 상태가 호전되지 못하자 사망하였고 뒤를 여덟 번째 아들인 청태종 홍타이지가 이었다. 1636년, 청태종은 후금의 국명을 청으로 개칭하였고 누르하치는 청나라의 태조로 불리게 되었다. 사후 청태종은 누르하치를 복릉(福陵)에 안장하였다.

현재 중국에선 누르하치는 원래 명나라 하급 관리 출신이라는 논리로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하고있으나 당시 누르하치의 관직의 의미는 주변 여진족을 순화시키고 명에 복속시키는 임무고 실질적인 임무를 가진 관료가 아닌 부족장으로서 받은 벼슬이라는걸 감안하면 중국에서 무리수를 띄우는 셈.

2. 업적

여진족 특유의 제도이자 경제&사회 단위 겸 전쟁 당시 분대의 역할에 해당하는 팔기군을 편성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또한 몽골문자의 형태를 빌어서 만주문자를 창제하였다.

3. 전설

야사에 따르면 아버지가 수달이라고 한다. 수달이 누르하치의 어머니를 사모해서 밤에 찾아와 관계를 맺어 누르하치가 태어났다고 한다. 덕분에 누르하치는 수영을 매우 잘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한 도인이 찾아와 천자가 될 명당 자리를 알고 있는데, 물속 깊은 곳이라 자신이 들어 갈 수가 없으니 누르하치에게 묻어달라고 부탁하고 부탁을 들어주면 누르하치에겐 왕이 될 명당자리를 알려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천자의 자리에 자기 조상의 유골을 묻어 결국 누르하치가 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어?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수달이가 연상되는 지렁이 왕도 생각나고 말이지

여담으로 누르하치의 후손인 청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의 황제였던 선통제 아이신기오로 푸이가 피난길에 오를 때 누르하치가 청을 건국한 장소에서 간단한 회의를 소집하고 이 회의에서 만주국의 해산을 선언한다. 만주국을 억지로라도 청의 후신이라고 할 경우 국조가 세운 나라를 후손이 그것도 건국한 장소에서 그 나라를 해산한 세계사에서도 정말 얼마 없는 사례가 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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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만주식 군주 칭호
  • [2] '모든 나라들을 이롭게 하는 지혜로운 군주'라는 의미.
  • [3] 농담이 아니라 그가 청을 건국과 명과의 승전들을 보면 누르하치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이란 요소가 많았다. 뭐 어지간한 창건주들은 천운이 따르는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한고제만 봐도 운빨 죽여준다. 아니면 무시무시할 정도로 야심만만하고 유능한 아들들이 있거나...어?
  • [4] 흔히 몽골식 이름인 몽케 테무르 혹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는 이의 한국식 독음인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로 알려져 있다. 먼터무는 오돌리성에서 밀려나 남만주에 처음 정착한 인물로, 훗날 청나라에 의해 조조(肇祖) 원황제(原皇帝)로 추존되었다.
  • [5] 당장 중국 역사에서만 봐도 그 나라의 후손이 선양을 하고 잘먹고 잘사는(다 그랬던건 아니지만) 사례는 꽤 있지만 선양이 아닌 해산 선언을 한 것은 이 사례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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