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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재아 토마스

last modified: 2015-03-27 21:11:32 by Contributors

Contents

1. Isiah Thomas
1.1. 소개
1.2. 초기 생애 및 대학 경력
1.3. 선수 경력: 배드 보이스의 보스
1.4. 흑역사(?)
1.5. 행정가 및 감독 경력
1.5.1. 토론토 랩터스
1.5.2. CBA
1.5.3. 인디애나 페이서스
1.5.4. 뉴욕 닉스
1.6. 이것저것
2. Isaiah Thomas

1. Isiah Thomas

1.1. 소개


선수시절의 토마스.


닉스팬들에게는 혐짤 욕만 처먹던 뉴욕 닉스시절의 그 아이고 머리야.

이름 아이제이아 로드 토머스 3세(Isiah Lord Thomas III)
생년월일 1961년 4월 30일생
185cm (6 ft 1 in)
체중 82kg (180 lb)
출신학교 인디애나 대학교
포지션 포인트가드
드래프트 1981년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지명
등번호 11번
역대 소속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1981~1994)
지도자 경력 인디애나 페이서스 (2000~2003, 감독)
뉴욕 닉스 (2006~2007, 감독)
플로리다 국제대학교 (2009~2012, 감독)
프런트 경력 토론토 랩터스 (1995~1998, 부사장)
뉴욕 닉스 (2003~2008, 단장 겸 사장)
수상내역 NBA Champion 2회
NBA Finals MVP (1990)
NBA All-Star Game MVP 2회 (1984, 1986)
All-NBA First Team 3회 (1984-1986)
All-NBA Second Team 2회 (1983, 1987)
NBA All-Rookie First Team (1982)
NCAA Final Four Most Outstanding Player (1981)
J. Walter Kennedy Citizenship Award (1987)

1990년 NBA 파이널 MVP
조 듀마스아이재아 토마스마이클 조던

1984년 NBA 올스타 MVP
줄리어스 어빙 아이재아 토마스 랄프 샘슨
1986년 NBA 올스타 MVP
랄프 샘슨 아이재아 토마스 톰 챔버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영구결번
No.11

NBA 농구 선수. Zeke[1]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1980년대를 대표하는 포인트가드인 동시에 전직 감독GM. NBA가 선정한 50인의 위대한 농구선수 중 한 명이며 1980년대 말을 주름잡던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스의 리더. 선수시절 활약상은 가히 전설이지만 은퇴 후 행정가로서나 감독으로서는 그리 성공했다고 보기 힘들다. 뉴욕 닉스팬들에게는 스콧 레이든과 함께 금지어공공의 적이다. 현재는 NCAA의 플로리다 국제 대학교(FIU) 농구부 감독이다.

1.2. 초기 생애 및 대학 경력

토마스는 일리노이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고 한다. 실제로 한 대학팀의 코치가 토마스를 스카우트하기 위해서 토마스가 살던 동네로 간 적이 있었는데 거리가 더럽고 무시무시하여 깜짝 놀랐다고 한다.

대학은 인디애나 대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인디애나 대학 농구팀에는 열혈 감독인 밥 나이트가 있었다. 밥 나이트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조직적인 농구로 유명했고 코트 위에서나 밖에서나 다혈질이었다. 그런 나이트도 토마스를 보자마자 한 말이 딱 이랬단다. "토마스, 넌 네가 하고 싶은 플레이를 해라."

감독의 지원 아래 토마스는 2학년 때 학교를 NCAA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고, 자기 자신도 MOP에 선정되었다. 그 후 바로 NBA 드래프트를 신청했다.

1.3. 선수 경력: 배드 보이스의 보스

1981년 1라운드 2순위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지명된 토마스는 전시즌에 21승에 그쳤던 팀을 39승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토마스가 루키였던 시즌과 2년차 시즌에 팀의 전력은 아직 배드 보이스 1기 시절의 그것이 아니었다. 팀은 중하위권 전력이었고 플레이오프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다가 3년차 시즌에 NBA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토마스의 은사 척 데일리보스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팀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토마스도 평균 21.2점 11.1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커리어를 통틀어 첫번째 더블 더블 시즌을 보냈고 팀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뉴욕 닉스에게 패배해 탈락했지만 5차전까지 가는 접전이었다.

그 후 배드 보이스 1기 멤버들인 데니스 로드먼, 조 듀마스, 비니 존슨, 릭 마혼, 빌 레임비어 등등 주축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익히 알려진 팀컬러가 완성되었다. 1987-1988 시즌, 마침내 디트로이트는 동부의 강호들을 아작내고 파이널에서 LA 레이커스와 맞붙었다. 당시 레이커스는 매직 존슨, 카림 압둘 자바, 제임스 워디 등이 포진한 최고의 팀이었다. 6차전에서 토마스는 도중에 발목이 나가버리지만 출전을 강행, 3쿼터에만 25점을 넣는 대활약을 보였지만 결국 디트로이트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패배했다. 이 때 토마스는 매우 큰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시즌인 1988-1989 시즌에 두 팀이 다시 맞붙었는데, 이때는 매직 존슨을 비롯한 레이커스의 주축들이 모두 부상을 달고 있었고 복수의 칼을 갈던 토마스와 배드 보이스에게 자비란 없었다. 파이널에 진출하며 토마스가 한 말이 레이커스 외에 다른 팀이 올라오는 건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건 복수다였다. 결국 디트로이트가 4전 전승으로 레이커스를 처참히 발라버리고 우승. 이 시즌은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 불스에게 2패한 거 빼면 전승이었다.그리고 의도치 않게 아래 선수의 이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 다음시즌인 1989-1990시즌에는 같은 동부지구 시카고 불스의 강력한 도전이 있었으나 이겨내고 파이널에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맞이하여 4승 1패로 다시 우승. 2년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토마스는 파이널 MVP에 올랐다.

하지만 1990-1991 시즌 이후로 토마스와 배드 보이스 1기의 번영은 끝이 났다. 시카고 불스에 의해 4전 전패로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무너지고 난 뒤 팀의 성적은 내리막을 걸었다. 1991-1992 시즌을 끝으로 척 데일리도 사임하면서 배드 보이스 1기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토마스는 1993-1994시즌까지 뛴 후 현역에서 은퇴한다.

1.4. 흑역사(?)

토마스는 1980년에 올림픽 국가대표에 뽑혔었는데 하필 그때가 냉전 시대였고 올림픽 개최지가 구 소련모스크바였다. 결국 미국이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하면서 토마스는 결국 국가대표로 뛰지 못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토마스는 간절히 선발되길 원했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드림팀 탈락. 1994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드림팀2에 뽑히긴 했지만 결국 부상으로 뛰지 못하는 등 유독 대표팀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편이었다.

대부분의 전문가와 팬들은 마이클 조던래리 버드의 반대가 대표팀 탈락의 이유로 꼽는다. 토마스도 한 성질 하는지라 조던과의 융화가 불가능했고 조던 룰을 통해 조던을 폭행 수준으로 괴롭혔던 팀의 대장이니... 당시 조던이 원하지 않는 선수는 드림팀에 뽑힐 수 없었다는 소리도 돌았는데 어째 그냥 루머 같지는 않다. 하지만, 사실 조던 뿐만 아니라 버드, 피펜 등 다른 선수들도 모두 토마스를 싫어하고 있었다. 래리 버드가 자서전에서 밝혔다시피, 조던 등 몇몇이 강경하게 토마스의 드림팀 합류를 반대하고 있을 때 다들 이를 묵인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래리 버드는 배드보이즈의 폭력 행위 외에도 토마스의 "버드는 백인이라서 과대평가 받고 있다" 드립으로 인해 이를 갈고 있었고, 칼 말론은 토마스한테 핵팔꿈치 어택 사건으로 인해 사이가 좋진 않았다.[2] 당시 그나마 아이재아와 사적으로 친했던 매직 존슨만 토마스를 옹호하는 식으로 인터뷰했지만, 몇년후 그의 자서전에서 "어느 누구도 아이재아와 플레이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재아가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면 그가 기회를 날려버릴것." 이라고 토마스를 옹호한 것은 단지 립서비스였다고 고백했다.

물론 조던 뿐만 아니라 디트로이트의 육탄전에 큰 상처를 입었던 피펜 역시 토마스를 싫어했다. 피펜의 턱에 상처를 낸 과격한 파울을 한건 로드맨이지만 피스톤즈의 이러한 분위기를 주도한건 리더 토마스였기 때문. 피펜은 드림팀에 대한 2012년 다큐멘터리에서 "나는 토마스가 합류하는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대놓고 얘기했으며 조던도 마찬가지였나는 질문에 "그를 대변할 수 없지만... 아마 마이클도 바라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조던은 아직까지 공개적으로 이때 자신의 의향에 대해 밝힌 적은 없지만 두 선수가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이나 대표팀 구성위원회가 조던의 눈치를 본 건 사실이다. 또한 대표팀을 구성하기 시작한게 1991년 플레이오프 종료직후였는데 이때 토마스를 필두로 한 피스톤즈 선수 상당수가 게임종료되기 몇초전에 라커룸으로 퇴장, 여론으로부터 격렬하게 까이던 중이었다. 위에 언급된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런 여론도 토마스의 탈락에 크게 적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위의 언급된 이른 퇴장 사건은 토마스의 승부욕을 보여주는 동시에 흑역사로 꼽힐 정도로 비매너 행위이기도 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h_z_68NdbqM (7분 44초부터) 이 장면전에 승부가 기울자 데일리 감독은 주전 멤버들을 모두 뺐고 이들은 홈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으며 코치진과 포옹을 하는 등 훈훈한 분위기였는데, 토마스와 레임비어를 필두로 한 주전 멤버 대부분은 경기 종료 7.9초를 남겨두고 퇴장해버렸다. 이때 불스 벤치 앞을 지나갔는데 조던을 포함한 불스 주전멤버들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걸 감상할 수 있다. 사실 퇴장 자체는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들이 경기 직후 관례로 되어있는 상대팀과의 악수(친한 선수들의 경우 포옹)를 거부한것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피스톤즈에서 매너 좋은 극소수에 꼽혔던 조 듀마스와 존 샐리만 악수를 했다. 이 중 샐리는 훗날 불스에서 뛰기도...)

토마스는 NBA Open Court란 프로에 출연해 이 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조던과 필 잭슨 등 불스 전원이 우리에게 챔피언에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자회견에서 레임비어가 깡패(thug)다, 우리가 (피스톤즈)가 농구 전체에 나쁜 영향을 준다느니 무례하게 굴었다"면서 이런 태도에 화가 나 당시 벤치에 앉아있던 주전선수들이 "그냥 나가자"고 결정을 내렸다고 한 바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lFK82GvfYyc 토마스는 이 사건에 대해 "다시 동일한 상황이 온다면 악수를 하겠다"면서 비록 불스가 자신들에게 무례하게 굴었더라도 똑같이 대해주면 안되었으며 take the high road(번역하기 애매한데 상대방이 유치하거나 무례하게 굴어도 이쪽에서는 품위있거나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했어야 했다고 한 바 있다. 댁들이 할말은 아닌 것 같은데

사실 토마스는 이날 방송에서 옛팀에 대해 좀 지나칠 정도로 쉴드를 쳤는데 피스톤즈가 폭력에 가까운 수비와 부상을 유발하는 비매너 플레이로 악명을 떨친건 엄연한 사실임에도 토마스는 "모든 팀이 거칠게 플레이했음에도 피스톤즈의 경우 이미지가 그렇게 박혀서 욕을 더 먹었다"는 요지로 말하기도 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ozCXf2zH-94

1.5. 행정가 및 감독 경력

1.5.1. 토론토 랩터스

토마스는 딱 1년 후인 1995년 당시 신생팀인 토론토 랩터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해서 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다. 누구도 토마스가 이렇게 현장에 빨리 복귀할 줄 몰랐거니와 감독이 아닌 구단행정가로 돌아올 줄은 더욱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놀라움이 컸다.

같은 캐나다를 연고로 창단된 밴쿠버 그리즐리스가 주로 한물간 노땅들을 확장 드래프트로 선발한 데 반해 토마스의 토론토는 젊고 재능있는 선수 위주로 로스터를 꾸렸다. 물론 로스터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1985-1986 시즌에 수비수상과 기량발전상을 동시 수상했던 33세 노장 가드 앨빈 로버트슨을 데려오기도 했다.

1995년 드래프트에서는 당시 토론토 팬들이 간절히 뽑기를 바랐던, UCLA에이스였고 1995년 NCAA 파이널 MOP 수상자였던 에드 오배넌[3]을 버리고(?) 애리조나 대학교의 단신 가드 데이먼 스타더마이어를 지명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이 때 팬들은 야유를 퍼부었지만 스타더마이어가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대활약하면서 야유가 쏙 들어갔다. 이 해 팀은 21승 61패라는 하위권 성적을 거뒀지만 시카고 불스, 올랜도 매직, 시애틀 슈퍼소닉스, 휴스턴 로키츠 등 강팀들을 한 번씩 제압하는 등 소소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NBA 구단 중 관중동원 3위를 기록하면서 나름대로 흥행에 성공했다.

1997년에는 고등학생 선수인 트레이시 맥그레디를 지명하면서 다시 한 번 팬들을 놀라게 했다. 스타더마이어 때처럼 야유는 없었지만 궁금증을 자아내긴 했다. 토마스는 '맥그레디는 지금 여러 모로 부족하지만 몇 년 뒤에 엄청난 선수로 성장할 것' 이라고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그러나 토마스는 맥그레디의 성장을 지켜보지 못하고 1998년에 구단 부사장직을 사임하고, 잠시 NBC 농구해설위원으로 일했다.

1.5.2. CBA

그 뒤 토마스는 1998년에 미국의 독립 리그인 CBA(Continental Basketball Association)의 커미셔너로 취임해서 세간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비록 독립 리그라고 해도 리그를 경영하는 것과 구단을 경영하는 것은 달랐는지 토론토 랩터스에서처럼 성공적인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2000년에 CBA를 떠났다.

1.5.3. 인디애나 페이서스

CBA의 실패 이후 토마스는 래리 버드가 건강상의 이유로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공석이 된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전임 래리 버드가 3시즌 연속 인디애나를 컨퍼런스 결승, 파이널 1회로 이끌었기 때문에 감독직이 처음이며 전력 약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감독으로 선임된 토마스에게 많은 이들이 기대반 걱정반의 시선을 보냈다. 토마스는 감독으로 있는 동안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서 썩고 있던 저메인 오닐을, 시카고 불스에서 론 아테스트를 트레이드해왔으며 알 해링턴, 자말 틴슬리 등의 젊은 선수들을 발굴하면서 팀 리빌딩을 진행했다. 토마스 재임 3년동안 인디애나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용 팀이 되었고 매년 1라운드 탈락.

인디애나는 그렇게 토마스의 팀이 되고 있었으나 2003년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현장에 돌아오길 원했던 래리 버드가 구단 사장이 되었고, 래리 버드는 자신이 만들었던 레지 밀러 중심의 강력한 조직력과 수비를 내세운 농구와 달리 자유분방하고 공격적인 농구 스타일을 정립한 토마스를 경질하고 릭 칼라일(現 댈러스 매버릭스 감독)을 선택했다.

토마스의 경력은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문제는 그 후였으니...

1.5.4. 뉴욕 닉스

토마스는 2003년 12월 22일 뉴욕 닉스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당시 뉴욕 팬들은 스콧 레이든의 돌아이짓에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가있었다. 팬들은 '레이든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다. 레이든보다 더 못할 수는 없을 테니. 토마스는 달라보였다. 토론토 랩터스 시절에 데이먼 스타더마이어와 트레이시 맥그레디를 지명했던 선견지명, 인디애나 페이서스 감독 시절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저메인 오닐, 알 해링턴과 같이 재능있고 젊은 선수들을 중용한 점 때문에 뉴욕 팬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토마스 또한 취임 일성으로 팀을 빠르게 재정비해 성적을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고, 발빠른 무브를 보였다.

토마스는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곧장 스테판 마베리를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그러면서 당시 팀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던 안토니오 맥다이스를 처분했다. 비록 마베리를 받아오면서 연봉 먹는 잉여나 다름없었던 페니 하더웨이까지 덤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마베리는 리그 최고의 포인트가드 중 하나였고 뉴욕 브루클린 출신이라는 플러스 요소까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언론은 호평 일색이었고 마베리 또한 고향팀에서 뛴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하며 열정적으로 뛰었다. 또한 돈 체니 감독을 경질하고 명장 레니 윌킨스를 데려왔다. 팀은 비록 1라운드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플레이오프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2004-2005 시즌의 전망을 밝게 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토마스가 뉴욕에 있는 동안 그나마 잘한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도 그나마다.

2004-2005시즌부터 뉴욕은 다시 처절하게 몰락해갔다. 시즌 전 불스로부터 마베리와 포지션이 겹치는 자말 크로포드를 영입한 것부터가 좋지 않은 조짐의 시작이었다. 우려대로 마베리와 크로포드는 눈에 띄는 시너지를 보여주지 못했고 팀은 시즌 초반부터 하위권을 맴돈다. 이 와중에 레니 윌킨스는 중도 경질. 게다가 선수들 사이에도 잡음이 많아 구단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여러 모로 곤란한 상황 속에서 토마스는 2005년에 불스로부터 향후 1라운드 드래프트릭을 2개나 내주는 강수를 두며 에디 커리를 영입했고 명장 래리 브라운을 5년간 5천만 달러라는 최고 대우로 데려오는 무브를 보여줬지만 이미 막장 중의 막장이었던 뉴욕 닉스를 되살리기는 무리였다. 여기에 원래부터 사이가 나빴던 마베리와 브라운 감독 간의 갈등이 나중에는 선수단 전체와의 갈등으로 심화되면서, 결국 래리 브라운은 23승 59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찍고 한 시즌만에 해고당했다.

덤으로 2005년 오프시즌에 전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잠깐 활약상을 펼쳤던 센터 제롬 제임스를 연 600만 달러에 5년 계약으로 모셔와 팬들이 어이를 잃게 했다. 제임스의 2004-2005시즌 성적은 4.9점 3.0 리바운드 수준이고 선수경력 내내 고만고만한 기록만 낸 평범한 선수였다. 단지 2005년 플레이오프에서 대활약했다는 이유만으로 거액을 안긴 것. 제임스는 결국 평범한 성적만 남기고 NBA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4]그리고 제몫을 하지 못하는 페니 하더웨이를 처분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영입한 선수가 스티브 프랜시스. 팬들은 더욱 어이없어했다. 이 둘은 플레이 스타일이 너무 비슷했고 당연히 별다른 교체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뉴욕 닉스의 페이롤 1위 자리만 공고히 했다.(...)[5] [6] 프랜시스에 이어 선수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든 제일런 로즈까지 데려오면서 팀 페이롤은 무려 130M을 초과했다. 팀 구성은 고려하지 않고 그냥 좀 한다싶은 베테랑이면 무조건 수집하고 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브를 보여줬다.

2006년에는 아예 토마스 본인이 감독까지 겸했지만 성적은 더 떨어져갔다. 이 기간중에 역시 평범한 경력을 가진 제러드 제프리스를 또 연 500만 달러에 영입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2007년에는 잭 랜돌프까지 데려오면서 에디 커리와 함께 리그 최고의 골밑 자동문(...) 콤비를 결성케 하면서 다시 한번 팬들이 뒷목을 잡게 했다.

토마스에게 무한신뢰를 보내던 뉴욕 닉스 구단도 잇단 삽질을 참을 수 없었는지 2008년에 토마스를 해고하였다.

그 후 토마스는 플로리다 국제 대학교(FIU) 농구팀의 감독 제의를 수락했고, 2012년까지 그곳의 감독으로 있었지만 별반 성적은 올리지 못했다. 중간에 뉴욕 닉스의 사장으로 복귀하려고 한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닉스 팬들을 식겁하게 했으나 이내 다시 FIU로 돌아갔다. 천만다행이다.

1.6. 이것저것

선수시절에 승부근성 하나만큼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동시대에 활약한 선수가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 등등이었지만 전혀 밀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마이클 조던을 두번이나 좌절시킨 배드 보이스 1기의 리더라는 버프도 있어서 올드팬들에게 사랑도 많이 받았다.

현역시절이나 지금이나 조폭보스다운 리더쉽을 가졌던 선수이다. 그래서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는 선수는 용납하지 않았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유타 재즈에서 득점왕을 3번 했던 스몰포워드 아드리안 댄틀리. 유타에서 대활약하고 피스톤즈에 들어왔을때는 전성기가 약간 지날무렵이었던 댄틀리가 자신에게 공격롤을 더 늘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팀의 보스였던 토마스와는 필연적으로 충돌했고, 이때 토마스는 구단에 댄틀리를 트레이드 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아쉬운 준우승의 다음 시즌인 88~89시즌 중에 댄틀리를 댈러스 매버릭스로 보내고 어렸을때부터 토마스와 절친이었으며 역시 댄틀리에 못지 않은 득점력을 갖춘 스몰포워드 마크 어과이어를 영입했다. 그리고 88~89시즌 우승. 그러나 커리어 최초의 우승기회를 어처구니 없게 트레이드로 날린 댄틀리는 그 시즌 이후 점점 쇠락하여 끝내 우승을 하지 못하고 커리어를 마감했다. 그 때문에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도 13수만에 겨우 헌액되었을 정도.

매직 존슨과 매우 각별한 사이다. 존슨이 초창기 버드가 이끄는 셀틱스에게 우승을 헌납하면서 크게 좌절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많이 위로해주곤 했다. 존슨이 에이즈 감염으로 은퇴한 후, 1992년 올스타전에서 팬들의 성원으로 올스타에 뽑혀서 경기에 나서게 되었을때, 몇몇 선수들은 그의 출전을 내켜하지 않았다. 하지만 토마스는 마이클 조던과 함께 에이즈에 대한 여러가지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주는 등 많이 노력했고, 실제로 코트위에서 매직과 포옹도 하는 등 이런 우려를 불식시켜주었다. 매직이 이 올스타전에서 터트린 마지막 3점슛을 던질때, 그를 막고 있던 선수는 바로 토마스였다.

웃음이 굉장히 매력적인 남자이다. 그가 한번 미소지으면 아무리 화난 사람이라도 그 미소를 보고 화를 풀수있을정도. 미소를 지을때 들어가는 보조개도 포인트. 여기에 잘생긴 외모와 동안도 한몫한다. 실제로 토마스의 선수시절과 은퇴후의 사진을 보면 별 차이가 없다. 거기다가 현재 50세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주름살이 거의 없다. 하지만 닉스팬들은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며 더 부글부글 끓었겠지.

2. Isaiah Thomas

IsaiahThomasCeltics.jpg
[JPG image (52.5 KB)]


보스턴 셀틱스 No.4
아이재아 토마스(Is"a"iah Jamar Thomas)
생년월일 1989년 2월 7일
175cm (5 ft 9 in)
체중 84kg (185 lb)
출신학교 워싱턴 대학교
포지션 포인트가드
드래프트 2011년 드래프트 2라운드 60순위[7]
새크라멘토 킹스 지명
등번호 22번(새크라멘토)
3번(피닉스)
4번(보스턴)
역대 소속팀 새크라멘토 킹스(2011~2014)
피닉스 선즈(2014~2015)
보스턴 셀틱스(2015~ )
수상내역 NBA All-Rookie Second Team (2012)
NBA Rising Star (2013)
NBA 2012년 2월 월간 우수 신인 선정

1.의 인물과 철자 하나빼고 똑같은 이름과 발음, 그리고 같은 직업때문에 닉스 원정경기를 오면 아무 이유없이 야유를 먹는 포인트가드. 공교롭게도 1.의 인물과 포지션도 같다.

사실 이름도 1과 관련이 있는데 LA 레이커스 광팬이 였던 아버지가 1989년 친구와의 내기에서 'LA가 지면 내아들 이름을 아이재아로 짓겠어'라고 했는데, LA가 패배해서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위 아이재아가 스펠링이 다른 이유는 아이재아 어머니가 성경식으로 쓰고 싶어서 그렇다고 한다.

워싱턴주 타코마에서 태어나 워싱턴 대학교에 들어갔으며 워싱턴 허스키스에서 PAC-10 최고의 포인트가드라는 평가를 받던 유망주였다. 이 선수의 NBA진출 직전인 3학년시즌 활약에 대해서는 워싱턴 허스키스 남자농구 2010~11 시즌항목 참조.


너무나 작은 키때문에 드래프트에선 최하위인 60위에 새크라멘토 킹스로 지명되었다. 하지만 꼴찌순번임에도 열심히 하는 플레이와 소속팀 킹스의 포인트가드 사정이 얽히면서 점차 출전시간을 늘려가더니 벤치에서 쏠쏠한 활약을 해주는 식스 맨위치까지 올라갔다. 그러다가 2월 17일,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 선발출전한 이후 시즌종료때까지 쭈욱 주전 포인트가드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3월 28일에는 샌안토니오와의 경기에서 개인최다득점인 28점을 넣었다. 비록 팀은 지긴 했지만.

이후 13-14 시즌에 이르러서는 팀의 2번째 스코어러로 활약했는데. 사실 식스맨인 토마스가 득점 2위라는건 그만큼 킹스 멤버가 막장이라는 반증이다.(…) 올해의 식스맨상을 노려볼 수 있을 정도로 벤치멤버로 최고의 효율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토론토 랩터스에서 루디 게이가 올 때 주전 포인트가드였던 그레비스 바스케스가 떠나게 되어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평균 20득점 6어시스트 이상을 기록하며 드마커스 커즌스, 게이와 함께 최선을 다하기는 했으나 애석하게도 팀 성적은 지지부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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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오프시즌에 피닉스 선즈로 이적했다. 끝까지 자신을 대신할 주전 포인트가드를 구하려고 했던 킹스에게 실망했다고.

선즈에서는 고란 드라기치와 에릭 블레드소를 충실히 보좌해줄 핵심 식스맨을 데려왔다고 생각했지만 주전을 원했다는 말을 본인이 한데다가 블레드소와 본인이 공을 많이 잡아야 하는 타입이다 보니 드라기치가 공개적으로 팀을 떠나겠다라는 선언을 했고 선즈 프론트진이 드라기치를 달랜답시고 토마스를 드라기치보다 더 트레이드하고 싶다라는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까발려서 그랬는진 몰라도 한 시즌도 채 안되어 트레이드 데드라인때 드라기치는 마이애미 히트로, 토마스는 보스턴 셀틱스로 마커스 손튼과 1라운드 지명권을 상대로 트레이드 되었다.

플레이스타일은 워싱턴 대학교 선배이며 자신과 같은 초단신 가드인 네이트 로빈슨과 비슷하게 리딩보다 공격에 치중하며 사이즈 문제로 수비가 약점인 타입.

트위터를 하고 있다. 주소는 https://twitter.com/#!/@Isaiah_Thomas2 이름뒤에2를 붙인것으로 보아 1번의 선배님과의 혼동을 막기위해서 그런듯. 지금도 이유없이 뉴욕에서 야유받는데 트위터에서도 욕먹으면 억울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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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조폭 보스. 실제로 성장 과정이나 인물이 조폭 보스에 가깝다.
  • [2] 약간 착오가 있는것 같은데 핵팔꿈치 어택으로 유명한 선수는 칼 말론이다. 말론은 토마스 뿐 아니라 조던, D.로빈슨 같은 빅맨도 골로 보낼뻔한 적이 있는데 이로 인해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더티 플레이어로 악명이 높다. 토마스는 쌈닭기질이 있긴 하지만 팔꿈치 사용으로 악명을 날린적은 없다. 애초에 팔꿈치를 자주 사용하는 선수들은 말론이나 샤킬 오닐 등 주로 빅맨이다. 또한 위의 래리 버드 코멘트를 한 선수는 데니스 로드맨이고 토마스는 옆에서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이와 별개로 배드보이즈의 멤버로서 거친 플레이를 일삼아 거의 리그 전체의 어그로를 끌었던 것은 사실이다.
  • [3] 동생 찰스 오배넌도 농구 선수다. 하지만 둘 다 NBA에서 오래 뛰지 못하고 빨리 사라졌다. 그 후 형제는 외국 리그에서 뛰었다. 형 에드는 은퇴했고 동생 찰스는 현재까지 일본 리그에서 뛰고있다. 이 두 사람은 전 고려대학교 선수이자 이번에 청주 KB국민은행 스타즈에 코치로 부임한 박재헌과는 고교시절 농구팀 동료이자 친구였다고 한다. 두 형제는 박재헌을 Jay라는 애칭으로 자주 불렀다고 한다.
  • [4] 다만 제임스는 훌륭한 체격과 괜찮은 운동능력으로 인해 "포텐이 터진 것 아니냐"고 하는 전문가들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천하의 뻘짓이지만 영입 자체만 보면 당시 기준으로는 그렇게까지 미친짓은 아닌셈. 그러나 계약규모와 기간을 보면 미친짓이 맞다.
  • [5] 더 큰 문제는 공격형 포인트가드인 마베리와 프랜시스의 롤이 겹쳤다는 것이다. 하더웨이의 경우 그나마 키가 커서 sf까지 볼수 있지만 마베리와 프랜시스는 둘다 가드만 볼수 있는데다가 수비가 좋은 편도 아니다. 당시 기준으로 프랜시스가 하더웨이보다 훨씬 좋은 선수긴 했지만 팀 입장에서 보면 별 쓸모가 없던 선수인데다가 계약기간도 하더웨이보다 훨씬 오래 남아있었다. 차라리 하더웨이를 계속 데리고 갔으면 시즌이 끝나고 샐러리캡 비우기라도 할수 있었으니 결국 최악의 병크인셈.
  • [6] 사실 이때 하더웨이는 프랜시스와 스타일이 비슷하지도 않았다. 전성기 시절 공격형 pg로 이름을 날렸으나 계속된 부상으로 기동력과 무릎을 잃은 상태였고 이로 인해 더 이상 pg를 보기 힘든 상태였다. 하더웨이는 커리어 말미에 주로 슈팅가드나 스몰포워드로 출전했다. 게다가 뉴욕에서 그는 전력에 큰 도움이 되지못한채 돈만 잡아먹고 있었으며, 닉스는 이에 "너를 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그의 라커를 빼버리기까지 했다. 하더웨이가 이에 크게 분노하고 트래이드를 요구한건 당연한 처사.
  • [7] 드래프트 제일 꼴찌순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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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7 21: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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