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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대기근

last modified: 2015-03-20 23:37:49 by Contributors

"물론 감자를 망친건 신이였다. 하지만 그걸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영국인들이다."
- 존 미첼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진행과정
4. 결과
5. 부록 : 아일랜드는 왜 옥수수를 심지 않았나

1. 개요

영어로 Irish Great Famine, 아일랜드어로는 An Gorta Mór(대기근) 또는 An Drochshaol(끔찍한 시기).

아일랜드의 기근은 1740 ~ 1741년, 1847 ~ 1852, 1879년으로 총 세 번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아일랜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두 번째 기근을 가리켜 '대기근'이라고 부른다.

2. 배경

The Great Famine - Part 1 of 2 (BBC 1995)
앵글로 색슨족의 침입으로 브리튼 섬에서 축출된 켈트족이 정착해 살고 있던 아일랜드는 잉글랜드가 노르만 왕조에 정복당한 후인 12세기 후반부터 헨리 2세의 주도 하에 잉글랜드의 침입이 계속되어 점차 예속화되어 갔다.

16세기 유럽을 강타한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의 국교가 성공회로 바뀌게 되면서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인에게 성공회를 믿을 것을 강요했고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들은 저항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1세부터 시작하여 올리버 크롬웰에 이르는 잉글랜드 지배층은 아일랜드인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다음 아일랜드 자영농들의 토지를 몰수한 다음에 아일랜드로 건너온 잉글랜드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잉글랜드인이나 성공회로 개종한 일부 아일랜드인들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되었고 나머지 아일랜드인은 소작농으로 전락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개간을 통한 경작지 확대와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아일랜드 내의 농작물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했지만, 대부분의 곡물은 본국인 잉글랜드의 인구 성장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탈되어 실려갔다.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소작농들은 상대적으로 싸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한때 '악마의 작물'로 불리며 거의 먹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널리 식용되던 감자를 대량으로 재배했고, 일년 내내 감자와 우유만으로 버틸 정도로 전적으로 의존했다. 결국 끝내주는 구황효과로 어찌어찌 가난을 견딜 수 있게 된 아일랜드 하층민들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게 되었고, 아일랜드의 인구는 눈에 띄게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경제학자였던 멜서스가 그 유명한 '인구론'에서 '곡물생산량은 산술급수로 늘어나는데 이렇게 기하급수적으로 애들을 낳기만 하면 분명 인류는 망한다'라고 적은 것도 아일랜드의 상황을 보고 적은 것이었다.

1801년, 아일랜드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즉 영국의 일부로 정식 합병이 되었고 대기근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0년대 후반의 아일랜드 인구는 850만 명 정도였는데, 인구의 1/4이 무려 86%의 토지를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 격차는 심각한 상태였고 그만큼 빈민의 수도 많았다.

한마디로 아일랜드는 이 때 영국의 식민지였고, 기본적으로 밀과 소를 키우는 플랜테이션 농업 체제를 갖고 있었다. 아일랜드인 소작농들이 먹는 감자는 주로 텃밭에 심었다.

3. 진행과정

1842년 미국 동부의 감자 재배는 대규모의 감자역병(감자마름병)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이 역병은 순식간에 북미 전역으로 확산된 뒤 다시 배를 통해 전 유럽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감자역병균의 포자는 잎에서 증식하기 시작해 섭씨 10도 이상, 습도 75% 이상인 조건에서 이틀 정도만 있으면 작물 전체로 퍼진다. 만약 이 때 가 내리면 포자가 빗물을 타고 땅에 스며들어 식용으로 쓰이는 덩이줄기 부분까지 퍼지게 되며, 병균포자가 바람을 타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 작물을 전염시키기도 한다. 역병에 걸린 감자는 이파리 끝과 줄기에 짙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하고, 감염된 덩이줄기는 갈색으로 변하면서 다른 세균이 침입하면서 2차 감염으로 썩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 그러니까 1845년 여름의 아일랜드는 유난히 비가 잦았던 탓에 밀과 같은 다른 작물의 작황도 엉망이었을 뿐만 아니라 감자역병이 돌기에 최적인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1845년 가을, 감자 수확이 시작되면서 대재앙이 막을 올렸다.

이 때, 영국 정부는 역병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적극적인 구제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문제가 커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 본토에서 정부가 직접 밀을 공급하여 1845년 겨울 동안 70만명을 구제했고, 1846년에는 곡물법을 폐기하여 밀의 수입을 자유화함으로서 식량의 유통량을 늘리는 한편 간접적으로 식량의 가격을 조정하려 했다.

그러나 1845년의 겨울을 넘긴 아일랜드 소작농들에게 이건 그림의 떡이었다. 비록 곡물법의 폐기로 밀 관세가 철폐되었으나, 당시 감자역병으로 농사를 망친 지역은 아일랜드만이 아니었으므로 외국에서 많은 식량을 들여올 수 없었으며, 그로 인해 폭등하는 식량 가격을 안정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식량이 아일랜드로 들어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아일랜드로 들어온 식량 대부분은 항구 도시와 그 인근 지역에서 유통되었다.

사실 아일랜드 내에서도 밀을 비롯한 작물은 1845년의 흉작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심지어 가축의 수출은 대기근 내내 증가하는 중이었다.[1] 문제는 환금작물을 재배하고 남은 자투리 땅에 감자를 심어 식량을 자급자족하던 아일랜드의 빈농들이 밀과 같은 식료품을 구입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아일랜드 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을 휩쓸었던 대기근으로 인해 가격이 폭등했던 상황이었다. 아일랜드 내에는 제 돈 주고 밀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밀과 가축 대부분이 계속 수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기근이 1년차에 그쳤던데다가, 이때까지만 해도 정부가 지속적인 관심과 개입을 펼쳤기 때문에 상황이 양호한 편이었으나, 정권이 교체되고 자유당이 집권하자 자유방임주의적 원칙[2]에 따라 직접적인 개입에 제동이 걸렸다. 정부가 주도했던 밀 공급은 곡물 상인들의 반발로 중단되었고 이제 공권력은 기근에도 불구하고 식량이 어디로 유통되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1845년에 5만명이었던 아일랜드인 이민자 숫자는 1846년 10만명으로 폭증했다.

그나마 1846년에 아일랜드를 탈출한 이들은 이후에 닥쳐올 최악의 사태를 보지 않고 떠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운아였다. 자유당이 집권한 1846년 여름부터 정부는 식량 공급을 포기했으며 아일랜드는 계속 유럽에 식량을 수출했다. 더군다나 씨감자도, 씨감자를 묻을 땅도 잃어버린 빈민들을 1846년의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근 시대 사망자의 대부분이 1846 ~ 1847년의 겨울에 발생했다.

아일랜드인들은 입에 넣어 소화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어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는데, 유럽에서는 거의 식용으로 쓰지 않는 해조류까지 닥치는대로 채취해 먹는 지경까지 갔다. 이 때 많이 먹었다는 적갈색 해조류에는 '아이리쉬 모스(Irish Moss)'라는 별명까지 붙어있고, 지금도 저 해조류로 만드는 젤리나 음료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지금은 구황식품 용도보다는 식품첨가물인 카라기난을 추출하는데 훨씬 많이 사용한다.

1846 ~ 1847년 겨울의 참사 이후, 아일랜드에서는 빈농과 지주가 모두 몰락하기 시작했다. 1847년 2월 뒤늦게 자유당 정권은 구제소를 마련하고 무료 식량 공급을 시작하였으나, 자유주의에 따르자면 정부가 그 책임을 도맡아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 납세자들이 모든 책임을 떠맡도록 6월에 법제화해버렸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전국민이 거지떼로 변한 상황에서 이 말은 토지 소유주들, 즉 지주들이 구제소에 의존해 목숨을 잇고 있던 아일랜드인 300만명의 구호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막대한 구제 비용을 감당해야 했던 아일랜드 지주들은 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기 토지에서 굶어 죽어가는 소작농들을 쫓아내기 시작했지만, 이렇게 쫓겨난 소작농들을 대신해 농사를 짓고 지주들에게 지대를 낼 사람은 이미 아일랜드에 존재하지 않았다. 주 소득원을 자기 손으로 내쫓아버린 지주들은 줄줄이 빚더미에 올라 서로 땅을 떠넘기며 무너졌다. 오히려 이들의 땅과 농장을 영국인들과 친영국파인 아일랜드 신교도들이 헐값에 대거 매입하여 아일랜드의 구교도와 신교도간의 경제적 격차는 더욱 심해졌고 반영감정은 증폭되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술탄 압뒬메지드 1세는 구호를 위해 1만 파운드를 보내려 했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자기는 2천 파운드만 보냈다며 1천 파운드만 기부해 달라고 요구했다. 술탄은 이 요구에 응했지만 그 대신 식료품을 가득 채운 배 3척을 몰래 보냈고, 터키 선원들은 영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에 이를 전달했다고 한다.
출처

4. 결과

'당시 아일랜드 감자의 종이 한 종류 뿐이라서 병이 돌자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는 말이 있고, 실제로 아일랜드 대기근은 식물병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진균류가 식물병을 일으킨다는 최초의 입증인 동시에, 한가지 품종만 심는 것이 어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하지만 아일랜드 대기근의 가장 큰 원인은 종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에서 곡물이란 곡물들은 죄다 뺏어갔기 때문에 아일랜드인들은 감자만 먹을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역병으로 감자가 다 사라지고 구제마저 끊기면서 재앙이 일어난 것이다.

당연히 이 사건은 아일랜드 반영 감정의 기원 중 하나로 당당히 꼽히고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미국으로 가는 이민이 급증, 그리고 도착 후에는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북군에 동원[3],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보스턴에는 이 당시의 이주를 기념하는 공원까지 있다. 전쟁기념관? 참고로 2010년 통계에 의하면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수는 3,467만 명에 달하는 수준으로 아일랜드 공화국 인구의 7배를 넘기는 수준이다[4].

그리고 아일랜드는 이때 인구가 줄어든 이후 현재까지 기근 전의 인구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2010년 기준으로 대기근 직전 900만명에 육박했던 것으로 추산되는 아일랜드 인구는 대기근 쇼크 후 이민으로 인한 인구 감소가 이어진 끝에 아일랜드가 독립하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400만명으로 내려 앉았으며 현대에 이르러서야 600만명까지 회복했다. 참고로 남북 아일랜드를 합친 수치다. 우스개 아닌 우스개로 3분의 1은 죽고 3분의 1은 미국으로 가고 보니 3분의 1만 남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

걸리버 여행기를 쓴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지은 겸손한 제안이 이 기근을 두고 쓰여진 것[5]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100년 전에 쓰인 글이다. 하지만 당시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에 대한 참고자료는 될 것이며, 한편으로 100년이 넘도록 이러한 비참한 현실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자료일 것이다.

여담으로 이 가뭄을 주제로 'Famine Song(직역:기근 노래)' 곡이 만들어졌는데, 영국 축구 경기장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절대 금지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 내용이 영국에서 잉글랜드와 나머지 3개국(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간의 지역감정을 직접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에, 훌리건들이 난동을 피우며 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 사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기타 2개 지역과의 역사적·지역적 대립은 현재진행형이니... 그 밖에 IRA(아일랜드 해방전선) 쪽에서도 이 노래를 부를 때 잉글랜드와의 역사적 대립을 상기한다. 사실 파고 들어가보면 잉글랜드가 굉장히 자기 중심으로 영국을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웨일즈는 애초에 13세기 중세에 일찍 잉글랜드에 흡수 된 이후 문화적인 시시콜콜한 부분은 대충 놨두고, 정치적으로는 잉글랜드에게 완전히 종속 되었으며, 스코틀랜드는 그렇게 압도적으로 잉글랜드에게 후달리는 건 아니고, 근세에는 개신교 종교 개혁, 근대에는 산업 혁명의 중심지라는 나름의 역량도 있으니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하고 종속 보다는 파트너의 형식으로 통합이 되었다. 이런 반면 카톨릭이라는 너무도 튀어 버리는 독자적 정채성이 강했던 아일랜드는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양쪽에게 핍박 받으면서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착취는 착취대로 다 당하면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6]. 역사학계에서는 훗날 아메리카, 인도, 중동 등에서 대영 제국이 강제한 군사적 정복과 이간질을 통한 현지 정치체 해체 이후 플랜테이션을 쫙 깔아 버리는 영국 제국주의의 첫 실험장이자 희생자로서 아일랜드에 주목한다. 이만큼 영국이 아일랜드에서 한 짓에 한에 맺혀 있으니 이런 노래가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대신 아일랜드 쪽 축구팬들이 많이 부르는 노래는 <The Fields of Athenry>인데, 듣는사람 입장에선 이건 이거대로 눈물바다가 된다. 무슨 노래인고 하니, 아이가 굶어죽게 생기자 절박해진 남성이 높으신 분[7]의 옥수수 창고를 털었다가 붙잡혀서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로 끌려가기 전날에 아내와 생이별하는 노래다. 이건 뭐 레 미제라블이 따로 없다.(...) 대놓고 훌리건짓을 하기에는 가사가 너무 슬프기도 하고 축구장에서 이걸 부르는 사람들도 꽤 얌전하기 때문에 축구장 금지곡은 아니며 오히려 아일랜드의 각종 스포츠 대표팀이나 관련 성향을 가진 팀(셀틱 FC라든가...)이 뛰는 경기에서 단골 메들리로 불리는 노래다. 대신 가사가 너무 슬퍼서 분위기가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간혹가다 Our love was on the wing~ (Sinn Féin![8]) We had dreams and songs to sing (IRA!)처럼 가만히 듣다보면 무서워지는 추임새를 넣기도 한다.

5. 부록 : 아일랜드는 왜 옥수수를 심지 않았나

이런 참상을 보고 있자면 단위면적당 뛰어난 생산력을 자랑하는 옥수수를 왜 키우지 않았냐는 의문이 생길 법도 한데 그 당시 아일랜드 소작농들은 옥수수 종자를 살 자본이 없었을 뿐더러, 아일랜드에서의 생산 효율은 옥수수보다 감자가 높았고, 당시 아일랜드인 사이에 유행했던 부업 중 하나였던 돼지 사육에 필요한 부수물[9]을 낼 수 있는 감자가 월등히 나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기근 중에 영국이 옥수수 가루를 배급했고 아일랜드인들이 이걸 유황 가루로 착각해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아일랜드는 이스터 섬처럼 완전히 고립된 절해고도가 아니어서 부족한 식량은 외부로부터 유입되었다. 이미 많은 아일랜드 인들이 미국에 진출하고 있었고 인도적인 차원에서 많은 곡물들이 아일랜드로 유입되었다. 단, 당시의 수송능력으로는 시기를 제대로 맞출 수 없었고 빈민 구제도 항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일랜드 전역을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알려진 것처럼 옥수수를 유황 가루로 인식해서 사람들이 감자를 찾으며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은 루머에 불과하다. 대다수는 이 옥수수를 멀겋게 끓인 죽조차 먹기 힘들었으며, 정량조차 부족한 이 옥수수는 실제 예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멀겋게 끓은 죽을 먹어야 했다. 이 상황에서 주린 배를 제대로 채워주었던 감자를 떠올리며 폭동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다 구빈법 수준으로 옥수수죽을 나눠주는데 양도 문제고 배급 방식 자체에도 문제가 많아서 폭동이 터졌는데, 여기에 '잉글랜드 놈들이 우리에게 유황을 먹인다'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출처 : #)

참고로 아일랜드에서의 생산효율이 옥수수보다 감자가 더 높았던 또 다른 이유는 옥수수가 C4식물이기 때문이다. The bomb has been planted. 쉽게 말하면 강한 빛에서 광합성 효율이 높은 작물이라는 점인데, 아일랜드의 날씨는 영국보다 덜하지만 맑은 날이 적은 편이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기후에서는 옥수수가 감자에 비해서 효율이 크게 높아지지 않았다. 여기에 옥수수는 지력을 소모시키는 경향이 강해 비료의 존재가 없다면 계속해서 농사를 짓는게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시기 유럽에서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은 이들 사이에서는 펠라그라병[10]마저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비싼돈 들여가면서 옥수수를 심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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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러나 곡물 생산량과 수출량은 폭락했다. 농가의 소작농들이 지대를 내지 못하고 토지에서 쫓겨나거나 도망치고 식량을 구할 수 있는 항구나 구빈소가 있는 도시로 향했기 때문에 더 이상 농사를 짓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 [2] 사람이 공짜로 무언가를 얻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게을러진다. 게을러지면 가난해지고 그것은 결코 당사자를 위해서도 좋지 못하다. 따라서 사람을 돕고자 한다면 스스로 재활의지를 갖도록 스스로 일할 수 있는 가장 가난한 사람보다는 못하게 도와야 한다. 쉽게 말해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요약하면 니가 알아서 하세요 자유주의
  • [3] 영화 갱스 오브 뉴욕의 시대적 배경이 된다.
  • [4]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유독 자신들의 혈통을 중시해서 조상 중 한사람만 아일랜드계인 사람도 자신을 아일랜드계라고 당당히 주장해서 유난히 수치가 높게 잡힌다. 반면 스칸다나비아계 이민자들은 숫자가 엄청난데도 딱히 혈통에 집착하지 않는 탓인지 통계에서 수치가 매우 매우 낮게 잡힌다. 참고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혈통에 큰 자부심이 있는 이민자들의 후손은 이탈리아계다.
  • [5] "이럴 바에 다 죽을테니 소수를 희생시켜 다수를 살리자. 아일랜드에서 수출품은 감자뿐이고 감자도 지금 흉작이니, 갓 낳은 아기를 잉글랜드에 수출하는게 어떻겠냐. 진미 좋아하는 귀족들에겐 이만한 고기가 없을테고, 아기 하나 가지고 최소한 3인분의 고기가 나올테니 만찬으론 그만이다. 내가 알기로는 겨울에 아기를 갈라 소금에 절여 눈속에 식히고, 후추를 좀 뿌리면 최고의 진미가 된다더라." - 본문 중.
  • [6] 흔히 스코틀랜드는 특히 현대 들어 '우리도 같은 잉글랜드의 핍박을 받는 켈트족 형제임'하면서 넘어 가려는 경향이 있는데, 애초에 북아일랜드의 친영파 개신교도들 다수는 영국 국교회가 아닌 스코틀랜드 장로회 소속임을 기억하자. 1640년대 킬케니 연맹의 봉기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진압군으로 보낸 언약파 군대가 저지른 만행, 현대 아일랜드계 이주민 노동자들과 현지 장로교 노동자들이 서로 축구장 등지에서 험악하게 싸우는 글래스고의 종파 갈등 등을 볼 때 스코틀랜드 또한 아일랜드 상대로 못살게 군 적이 많다
  • [7] 당연히 잉글랜드인이다. 총독이나 그에 버금가는 매우 높으신 분.
  • [8] 아일랜드 독립주의계 정당이다. Sinn Féin이라는 말 자체가 아일랜드어로 we ourselves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아일랜드에서는 다수당도 종종 차지하는 거대 정당으로 이 정당의 과격파가 바로 IRA와 연결된다.
  • [9] 먹고 남은 감자 찌꺼기, 감자 잎, 감자뿌리-알다시피 우리가 먹는 감자 부위는 뿌리가 아니고 덩이줄기다-를 돼지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 [10] 옥수수에는 필수 아미노산과 비타민 B의 니아신 성분이 부족해서, 옥수수만 주식으로 섭취하는 경우에 발생하는 일종의 영양결핍증이다. 19세기까지 원인도 발견되지 않았고, 특히 187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빈농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유행했다. 아일랜드 대기근이 발생하고 불과 20년 뒤의 이야기다. 참고로 이 병은 하루에 한 줌 정도의 옥수수를 던져주는 게 배식의 전부인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서 흔한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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