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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쟁쿠르 전투

last modified: 2015-03-29 08:32:53 by Contributors


게임으로 다큐를 만들었다. 화살은 등에만 꽂아두고 활 시위를 당기지도 않은 채 팔만 움직이는데 화살이 날아가는 마법 사실 저정도의 봉건 보병기사대면 그냥 이긴다

1415년, 백년전쟁 중반에 일어난 대규모 전투. 아래 서술된 내용을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명량 해전의 지상군 버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비슷하다.
아쟁쿠르 전투
날짜
1415년 10월 25일(성 크리스핀의 날)
장소
프랑스 아쟁쿠르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지휘관 헨리 5세 샤를 달브레†
병력 약 6000명 약 20000~30000명
피해 규모 최소 112명 전사 4000~10000명의 전사
(3명의 공작)
(5명의 백작)
(90명의 남작)
결과
잉글랜드의 결정적 승리.


영국헨리 5세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이나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장 2세의 미납된 몸값과 프랑스 내 영국령의 영구적인 인정 둘 중의 하나를 내 놓으라고 프랑스 왕실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투다. 영국에서는 국왕이 친정했지만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당시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어서인지 대신 샤를 달브레가 지휘했다.

Contents

1. 배경
2. 전개
3. 참혹한 패배
4. 결과
5. 창작물에서의 아쟁쿠르 전투

1. 배경

헨리 5세는 만여명의 병력으로 8월 프랑스를 침공, 항구도시 아르플뢰르(Harfleur)의 공성전에서 많은 병력과 시간을 들여 9월 22일 항복을 받아내었다. 하지만 이미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영국군은 아르플뢰르를 벗어나 북 프랑스의 영국 거점인 칼레로 퇴각하려 했다.

프랑스는 병력 모집에 시간이 걸려 아르플뢰르 구원에는 실패했으나 영국군보다 우세한 병력으로 그들이 칼레에 들어가기 전에 격파하기 위해 추격했으며, 헨리 5세는 군내 전염병의 만연과 무리한 공성전으로 인한 병력 및 물자, 군량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의 병력이 더 증강되기 전에 추격군을 격퇴하기 위해 아쟁쿠르 근교에서 방어진을 펴고 프랑스군을 맞아 싸웠다.

프랑스군은 소집령에 따라 모여드는 프랑스 기사들을 보강하기 위해 전투를 지연 시키려는 속셈으로 협상을 제의했으나 헨리 5세측에서 거부, 10월 24일 전투가 벌어진다.

2. 전개

양군의 병력차이는 사료마다 제각각 달라 정확한 내역을 알수 없는데, 주로 영국측 자료에서는 최소 3배, 최대 10배까지 프랑스군이 우세였다고 하며, 프랑스측 자료에는 최대 4배, 최소는 약 1.2배로 역시 프랑스군의 우세였다고 한다. 영국측 자료는 어떻게든 프랑스군의 우세를 부풀리고 있으며, 프랑스 측은 어떻게든 프랑스군의 병력을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현대의 역사가들은 아무리 적어도 대략 프랑스군 병력은 최소 2배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영국군은 공성전에서 고전한 탓에 지치고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고, 진영에는 전염병까지 약간 돌고 있었다.[1] 반면 프랑스군은 사기가 충천해서 서로 선봉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전장은 숲으로 둘러싸인 좁은 개활지에서 벌어졌으며, 프랑스의 기사들은 이전세대의 프랑스 기사들이 영국의 활공격에 피해를 입다가 결국 패퇴당한 교훈을 받아들여, 보다 강력한 플레이트 갑옷으로 무장하고, 말이 활 공격에 쓰러져 낙마하는 것을 피하고자 영국 진영을 향해 걸어서 진격했다. 다만 선발대는 기마 상태로 전진.
이러한 전략은 나름 효과를 발휘하여, 영국군의 장궁은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그러나...

3. 참혹한 패배

프랑스의 기사들이 영국군에게 당한 아버지, 할아버지의 복수를 할 생각으로 궁수대는 대충 무시하고 왕을 중심으로 귀족, 기사, 보병으로 구성된 영국군의 중앙으로 몰려 들어 왔던 것. 그나마 컨스터블, 즉 총사령관이던 샤를 달브레가 통제하고 있었으나 헨리 5세는 장궁병대의 일부에게 사격으로 도발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프랑스군은 이 떡밥을 덥썩 문 것이다. 좁은 지역에 과다하게 몰린 프랑스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방해되어 무기를 제대로 휘두르기도 어려울 지경이 되어 버렸다. 더군다나 이렇게 멋대로 돌격했기 때문에 초장부터 프랑스군 궁병대는 무력화됐다.아군의 등에다 대고 사격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선봉이었던 기병들이 집중된 화살비[2]에 이기지 못하고 기수를 돌리자 혼란이 더욱 심각해졌다. 더군다나 장궁병대의 앞쪽에 박힌 나무 말뚝은 장창의 효과를 내어 최전방의 기사들을 무더기로 낙마시켰고 상당수가 거기서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전날 내린 비로 지면이 젖어 있었는데, 여길 프랑스 기사들이 밟고 지나가자 순싯간에 진창이 되어 버렸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의 기사들은 미끄러지거나 넘어지기 시작했고, 과도하게 몰려든 그들은 쓰러진 아군을 그냥 밟고 지나갔다. 심지어 젖은 흙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무게가 늘어나는 바람에 못 일어났다고 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기사들이 입고 있었던 플레이트 아머의 탓도 큰데 편평한 플레이트 갑옷의 표면에 진흙이 들러붙으면 흡착효과의 발생으로 쉽게 떼어내 지지도 않고 기본적으로 물에 젖은 상태기 때문에 거의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무게를 지닌다. 더군다나 진창이 심한 곳은 기사들의 정강이까지 진흙에 푹푹 빠질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예전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프랑스 사학자들과 함께 이 지역에서 실제로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진창을 걸어가는 실험을 해 보았는데 건장한 청년이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자빠진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뻗어버렸다. 망했어요...현재도 아쟁쿠르에 직접 가 보면 넓은 풀밭과 비가 오면 뻘로 변하기 쉬운 토질을 볼 수 있다.

반면, 영국군 측은 일부 하마 기사나 중장보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가죽 갑주나 솜을 누빈 패딩 갑주로 무장한 경무장 집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장궁병 포함) 마찬가지로 디스커버리 채널의 실험결과 가벼운 가죽 부츠나 갑주에는 이러한 진흙의 흡착 효과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당시 영국군 내에 돌던 전염병인 이질대표증상 때문에 백병전의 위험이 적은 궁병대는 오히려 하반신 경무장을 선호했다는 설도 있다.

거기다 더해서 대부분 롱소드폴암류의 장병기로 무장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과도한 밀집으로 인해서 무기휘두를 공간도 확보하지 못해 어버버버하고 있던 반면 오히려 영국군은 단검이나, 손도끼, 망치 등 빈약한(...) 무장의 덕을 톡톡히 보면서 프랑스군을 들쑤셨다. 주 전술로는 여러명이서 둘러싸고 자빠뜨려서 진흙 목욕 좀 시켜준뒤 망치 및 단검 세례. 아 망했어요.

영국군과 싸우기도 전에 이미 많은 기사들이 자기들끼리 밀치다가 넘어져 압사당했으며[3], 프랑스군의 진형은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에 영국의 중보병+기사들과 이 통하지 않자 진지 구축용 망치도끼(...)를 들고 달려든 영국 궁수들에 의해 프랑스 기사들의 도륙이 시작되었다.

이 때 영국군 장궁부대는 개활지의 좌우를 둘러싸고 있는 숲에 배치 된 채 화살을 날리고 있었는데, 프랑스군이 혼란에 빠지자 일부 궁수들이 전리품 확보 및 약탈을 위해 명령도 없이 프랑스 군 대열에 끼어들어서 사시미질(...)을 하기 시작했고, 얼마지나지 않아 양 편 숲에 있던 궁수부대 전체가 프랑스군을 둥글게 감싸는 현태로 포위하고 열심히 털어먹기 시작했다.[4] 망했어요...

프랑스의 궁수대는 혼란에 빠진 아군 탓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고, 아군을 구하기 위해 달려든 말탄 기사들은 아군을 구출해 내기는 개뿔. 역시나 영국의 궁수들의 공격에 말을 잃고 낙마해 쓰러져 갔다. 게다가 퇴각하는 말탄 기사들이 허우적대는 도보기사들의 틈에 섞여 프랑스군의 혼란만 가중 시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나마 후퇴 중이던 후위의 병력을 잇달아 돌격해 온 프랑스군 2진, 3진이 그대로 쌈싸먹었다.(응?)

전투 후반, 일부 프랑스군이 영국 후방으로 난입[5], 군수마차를 불태우고 경비병력[6]을 살해하자, 놀란 헨리 5세는 프랑스 포로들을 학살해 버린다.[7] 이는 후에 프랑스 국내의 반영 분위기를 만들어 결국 백년전쟁에서 영국이 프랑스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만드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당장 상당수의 병력이 여기서 증발했기 때문에 잔다르크의 등장 전까지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의 우세로 흘러간다.

4. 결과

결국 프랑스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최소 4000에서 1만에 달하는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사자의 대부분이 기사였으며 귀족도 많이 죽었다. 심지어 총사령관 샤를 달브레도 전사했으며[8] 공작 3명, 백작 5명, 남작 90명이 사망했다. 이에 반하여 영국군의 전사자는 100명에서 500명 남짓했으며[9] 기사와 귀족의 사망자는 10여명에 불과했다. 앞선 전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여전히 영국군에 대해 병력의 우위에 있었으나 손해가 너무 컸고, 진창에서 굴러다니느라 완전히 지쳐 있었으며, 사기도 땅에 떨어지고 사령관과 주요 귀족들이 전사하여 지휘할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프랑스측은 헨리 5세와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 카트린느 공주의 결혼, 그리고 둘사이에서 나오는 아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왕이 되는 것을 골자로 한 루아 조약에 동의하고, 헨리5세는 승자가 되어 프랑스 공주를 데리고 영국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헨리 5세는 아들인 헨리 6세가 태어난 직후 사망하고 카트린느 왕비도 요절하여 어린 헨리 6세가 영국왕에 오르자 나중에 샤를 7세가 되는 프랑스의 왕세자 샤를과 프랑스 왕실은 조약을 무시하고 헨리 6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을 거부한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이 새로운 영국왕의 섭정을 자처하여 프랑스에 반기를 들었고, 결국 영국-부르고뉴 연합군(섭정파라고도 불린다)의 공격에 프랑스 왕실은 파리를 잃는 등 연패, 잔 다르크의 등장 때까지 수세에 몰리게 된다.

먼나라 이웃나라에 영국군은 쇠뇌를 구사했고 이게 킹왕짱이었다고 기술된 그 유명한 병크가 있으나, 물론 영국의 주력이 장궁이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실제 전투 양상은 프랑스(및 제노바 용병단) 쇠뇌수 vs 영국 장궁수였다. 당연히 그 승패의 여부도 장비 때문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엉망진창인 프랑스군 지휘의 문제가 더 컸다. 그 꼬락서니를 보자면 쇠뇌수들 보고 쏘라고 앞에 내보내 놓고 그 뒤통수에 대고 기사들이 돌격한다거나, 쇠뇌수들이 제대로 진형을 갖추고 궁시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보병들을 내보내서 진형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버린다거나 파비스같은 필수방호장비들도 없이 화살비로 내몰고, 화살에 피해가 급증하자 파비스 챙기러 군장으로 돌아가는데 적전 도주라고 처형하고...개판. 당시 프랑스군이 프랑스 전역에서 소집령을 받고 모여든 군대라 그런지 아니면 기사들끼리의 공명심 때문이어서 그랬는지 다른 전쟁에서 유능하기로 소문한 제노바 용병단을 고용해 놓고도 대부분 그걸 자기편이 쌈싸먹었다. 프랑스의 전력은 사실 지치고 상처투성이인데다가 역병까지 돌았던 영국군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이런 병신짓을 거듭한 덕에 역사에 남는 참패를 당했다. 전쟁 내내 이런 상황이 여러번 반복되었는데, 그들의 맞수였던 영국군 장궁수들만 야 신난다! 게다가 영국의 장궁은 송곳 형상의 특이한 화살을 사용했는데, 이것의 관통력이 매우 좋아 두터운 갑옷을 갖춘 적에게도 큰 효과를 봤다고. 물론 활로 쏘다가 안되겠으니까 근접으로 프랑스 기사들을 털어먹은 점에서도 알겠지만 이 화살촉도 플레이트 아머를 뚫긴 거의 불가능했다.[10] 하지만 그 이외 사슬갑옷이나 가죽갑옷 정도는 펑펑 뚫는게 가능했다고...


5. 창작물에서의 아쟁쿠르 전투

셰익스피어의 연극에서 이 전투를 앞두고 헨리 5세가 하는 대사가 매우 유명하다. 창작물에 나오는 대사인데 사실인 줄 아는 사람도 많을 정도. 아쟁쿠르와 백년전쟁을 논하면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구절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11]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니,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 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기에 행복한 우리들,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니라.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영국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용기를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다."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미디블2: 토탈 워에서도 역사적 전투로 나온다. 단, 실제 전쟁과 달리 극한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우선 프랑스군의 기병 돌격과 보병의 진군이 진창에 빠져 저지되고 그딴 거 없다. 무시무시한 병력이 1,2,3차 축차투입으로 돌격을 감행해온다. 기병돌격을 막을 병사라곤 하마 영국기사대뿐이고, 거기에 후방의 기습이 정말 치명적인 기습으로 재현되어 있기 때문에 얘네를 막으려면 유일한 기병전력인 하마기사대를 후방으로 빼기까지 해야 한다. 정말 열심히 하다 보면 어찌어찌 이길 수는 있지만, 프랑스군의 병크가 하나도 재현되어 있지 않아서 어이없는 전투. 병력차는 역사와 같이 약 2배인데, 문제는 병과까지 비슷한 레벨이니 이게 머릿수 차이가 아니라 사실상의 전투력 차이라는 거.
하지만 전열만 유지한다면 이기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후방에서 치고 들어오는 기사들은 후방에 배치된 미늘창병대로 어느 정도 저지가 가능하며(미늘창병대는 써있기는 중보병이지만 취급이 창병과 비슷해서 기병에 상성이 좋다) 좌측에 위치한 장궁병대로 그들이 아군의 후방으로 진입할 때에 사격하여 수를 줄이는 것도 가능하다. 제 1파로 전방에서 들어오는 기사들은 양쪽 장궁병대의 화살 세례로 아군 전위에 도달할 때 쯤이면 이미 절반 쯤은 줄어 있다. 그러므로 전열만 유지하고, 헨리 5세만 전사하지 않도록 이리저리 잘만 빼돌린다면 그리 어려운 싸움은 아니다. 무엇보다 기사단은 AI의 한계로인해 어지간해서 장궁병대가 쳐놓은 말뚝을 못넘고 알아서 들이박아 박살나준다. 어찌보면 고증 재현에 충실한 편. 오히려 프랑스의 전 병력이 일거에 들어왔다면 더 어려운 난이도를 보였을 것이다. 당장 전력이 분산되어 축차투입되면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하더라도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다. 이 전투에서도 축차투입되는 프랑스 병력은 아군의 병력보다 항상 열세다. 즉, 끊임없이 들어오는 러시만 잘 막아내면 된다는 뜻.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의 역사적 전투 캠페인에서도 재현된다. 부대를 충원할 수 없고 적지를 주어진 병력만으로 어찌어찌 돌파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임무지만, 위와 달리 장궁병으로 쏙쏙 적병을 점사하면 어이없이 쉽게 이길 수 있다. 기사도 점사 앞엔 장사 없다. 아니면 헨리 5세만 목표지점까지 찍으면 혼자서 적들을 요리조리 쏙쏙 잘 피해서 배까지 간다.(....) 그 뒤에는 배를 태우고 가면 끝. 같이 싸운 병사들보고 형제라면서 두고 튀는 장관이 벌어진다. 위의 대사도 재현되므로 잘 들어보자.

다나카 요시키 소설인 아르슬란 전기에서도 이 전투 여러가지를 쓴 게 나온다. 장 보댕이 이끄는 4만 병력에 맞서싸운 기스카르가 이끄는 2만 8천 병력이 중무장을 벗고 가벼운 무장을 한 채로 전투에 임하는데 이를 본 보댕군은 적은 돈이 없어 갑옷도 없다고 비웃었으나 진흙탕이 가득한 전투에서 오래가지 않아 중무장한 보댕군이 처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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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질과 콜레라 등 설사를 동반한 수인성 전염병이었다고 한다.
  • [2] 인명 피해는 적었을지 몰라도 말의 피해도 크고, 일단 맞으면 갑옷 때문에 죽진 않지만 엄청나게 아프다. 무조건 화살을 씹으면서 전진하는건 여러모로 무리. 방탄복이 총알을 막아낸다하더라도 착용자에게 무지막지한 고통과 멍을 야기하는걸 보면 이해가 갈수도
  • [3] 프랑스군의 고질적인 개판 지휘가 한 몫 단단히 거들었는데, 1진이 진흙탕에서 뒹굴면서 후퇴하려고 악전고투하는 중에 2진이 그대로 돌격해 버렸다. 거기다 다시 또 3진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4] 이게 왠 거지떼냐 하겠지만 중세에 일반 농민이 대부분인 이런 징집병들은 오히려 전투의 승리보다 이런 식의 소소한 약탈이나 전리품 확보를 더 중요시 했다. 주로 값이 되는 물건은 귀족들이나 기사들의 "금이빨" 그 덕에 영국군 궁수들은 불쌍한 프랑스 기사들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후드려 까고 입을...이하 생략.
  • [5] 이 또한 전술적 명령에 따른 행동이 아닌, 일부 하급 기사와 기사들을 따르던 종자들이 전황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영국군 군수품을 털어먹기 위해 우발적으로 저지른 행동이었다. 다만 그 숫자가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적 기병이 후방으로 치고 들어왔다고 생각한 영국군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 [6] 이라기 보단 종군한 하인과 기사의 종자들이 대부분이었다.
  • [7] 이 상황에서 몸값을 부를만한 재력과 여건이 되었던 귀족 포로들은 살 수 있었고, 그렇지 못했던 하급기사나 일반병들은 학살당했다 사실 이 포로 학살 명령은 우발적이었다기 보다 전술적으로 취해진 행동인데 영국군 후방에 포로로잡힌 프랑스군 병력이 오히려 그들을 감시하는 영국군 병력의 수배나 되었기 때문에 난전중에 이들이 들고 일어나서 영국군 후방을 박살내 놓을 위험도 컸고 헨리 5세 또한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참고로 이 명령에 영국 기사들은 그래도 저항도 못하는 포로를 죽이는 건 좀... 머뭇거리자 헨리 5세는 그들을 후방의 적을 상대하라고 보내버리고 일반 병사들에게 어서 죽이라고 명령하여 병사들이 죄다 학살했다고 한다.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를레앙 공작처럼 몸값이 비싼 포로들 뿐이었다고 한다.
  • [8] 그의 차남 샤를 달브레 2세는 잔 다르크의 지휘하에 있었고 백년전쟁 종결에 공을 세웠다.
  • [9] 다만 중세에 일반 병사의 경우에는 전사자가 축소보고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당신의 부하나 동료가 전사했어도 보고가 되지 않는다면, 그의 봉급과 배급은 당신것이다!
  • [10] 대다수의 궁수들은 가난한 하류층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싸구려 화살촉의 강도로는 질좋은 기사들의 플레이트 아머를 뚫기에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 [11] 전투 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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