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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리 쇼크

last modified: 2015-08-27 12:56:13 by Contributors

언젠가는 이렇게 된 것 처럼 카카오 쇼크가 발생하겠지


1983년 상황은 뭐랄까... 마치 건물이 무너지기 전 비상구로 달려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타리가 덤핑 경쟁에 뛰어들면서 모든 것의 종말이 오기 시작했죠. 이 때부터 게임산업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 짐 레비, 액티비전 회장 -

정말이지 게임 업계에 지독한 세월이었습니다. 너무나 끔찍했지요, 애플 II 게임을 내놓더라도 1만 5,000개를 팔기 힘들습니다. 일렉트로닉 아츠를 시작했을때는 카트리지 게임이나 플로피 디스크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130여곳이나 되었지만 그 중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회사는 불과 6곳 뿐입니다.(1983년 아티리의 몰락이후 상황을 설명)
- 트립 호킨스 -

North American Video game crash of 1983[1]
1983년 북아메리카 비디오 게임 위기

Wintergreen "When I Wake Up" Dir: Keith Schofield (업로드된 날짜: 2006. 3. 9.)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일어난 북미 비디오 게임 산업계의 대규모 경기침체 사건을 일컫는 말로서 당시 시장 수익은 거의 97% 밑으로 떨어졌었다.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었으나 과포화된 시장상황 속에서 무수한 저질게임을 찍어낸 것이 소비자들에게 등을 돌리게 만든 것이 주 원인으로 거론되며, 이후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은 85년 런칭하여 87년에 전미 히트한 닌텐도NES 덕분에 다시 크게 성장했다.

Contents

1. 요약
2. 배경
2.1. 80년대의 최강자 아타리
2.2. 워너브라더스, 그리고 막장화
2.3. 무너지기 시작하는 미국 게임계
2.4. 아타리 너마저
2.5. 이윽고 터진 '아타리 쇼크'
2.6. 아타리 쇼크의 결과: 일본의 세계 게임시장 점령
3. 결론
3.1. 사건 이후
3.1.1. 다큐멘터리 팀의 E.T 팩 발굴
4. 반론
5. 음모론
5.1. 닌텐도 음모론에 대한 반론
6. 관련 항목


1. 요약

Video Game Crash of 1983 - The Gaming Historian

(라이너TV-라라디오) 라라디오 6화 아타리 쇼크 특집과 유재석 나는 남자다 (목요일 - 교양 원코인)

아타리 쇼크의 일련 과정
순서 내용
1 기존 시장의 성장
2 타 업종(영화) 대기업의 인수
3 인수 기업의 분야에 문외한인 경영진 (대기업 낙하산 경영진)
4 개발진에 대한 홀대와 인력 유출, 퇴사
5 획일적인 업무분위기 강요
6 타 업종 기업들이 경쟁 분야에 진출
7 치열해진 시장
8 시장의 포화
9 특정기업의 과점
10 시제품 수준이거나 카피캣 제품이 넘처남.
11 가격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거나 문제가 있는 저급한 제품이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함
12 기업의 윤리의식 실종, 자정능력 상실
13 시장 붕괴

2. 배경

2.1. 80년대의 최강자 아타리

아타리는 1982년 6천만개의 아타리 2600용 카트리지를 판매했고 그들이 최고라는 믿음에 빠져있었다. 실제로 그들의 그러한 생각은 별반 틀리지 않았고 유명 오락실 게임들의 라이선스를 받아 아타리 2600용으로 컨버팅을 시키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타리 2600을 구매하도록 이끌었었다. 실제로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도 내외에 나왔던 게임은 질이 좋았던 게임들이었고 구매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81년 말기부터 그들이 내놓았던 게임들 중 상당수는 그저 그런 게임이었다. 이 당시 아타리 내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난 쓰레기를 카트리지에 넣어서 백만 개를 팔 수도 있어." 실제로 아타리 2600의 인기가 절정이었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시엔 게임 시장이 굉장히 컸기 때문에 이런 사정을 업고 아타리가 자만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는데...

2.2. 워너브라더스, 그리고 막장화

1977년 을 통해 비디오 게임을 비즈니스로 성공시킨 인물이자 게임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놀런 부슈널은 아타리라는 회사를 만들고 아타리 2600을 9개의 런칭 게임과 함께 발매했다. 그는 공격적인 경영을 위해서 회사를 워너에 매각했으나 워너와의 불화로 회사를 떠나고 만다[2]. 이후 아타리의 CEO가 된 레이 키사르는 특유의 마케팅으로 아타리 2600을 거대한 괴물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게임은 수백만 장씩 팔려 나갔지만 게임 개발자에게 돌아오는 돈은 너무나도 적었다.[3] 그 이유는 아타리를 인수한 워너의 경영진들은 특이하게도 단 한 명도 게임을 하지 않았기 때문. 경영진들이 게임의 '게' 자도 모르는 문외한이었던지라 당시 게임 개발자들의 가치를 우습게 보았고[4] 자연히 아타리 개발자들을 엄청나게 푸대접한다. 워너에 인수된 뒤로부터 자유분방했던 생활에 일침이 가해져 사내의 기강 단속은 물론 게임 제작자들의 복장과 근무 시간을 철저하게 관리하게 되었고 이전의 자유로운 풍토[5] 속에서 만들어지던 참신한 게임들이 점차 사라지고 구태의연한 졸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창기 개발자였던 엘런 밀러는 게임 크리에이터를 우습게 보는 워너와 협상을 벌였으나 자존심 상할 만한 답변만을 듣게 되고 결국 1980년 4월 아타리를 떠나 액티비전을 설립한다. 하지만 밀러가 퇴사하고 난 뒤에도 아타리, 아니 정확히는 워너 경영진들은 막장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 본인들이 우습게 보던 크리에이터 한 명 나갔다고 눈 깜짝 하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하지만, 이 사건은 바이오 하자드4 플투 이식 후 환멸을 느낀 미카미 신지가 캡콤을 떠나버린 사태와 얼추 비슷하다.

요컨데 레이 키사르와 워너의 경영진은 놀런 부슈널이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도 제대로 얹지 못한, 아니 그 전에 숟가락질도 제대로 못한 꼴이다.

2.3. 무너지기 시작하는 미국 게임계

1970년대 중반 아타리가 처음 발족했을 당시에는 퐁의 급격한 인기몰이 덕분에 이에 대적할 만한 다른 게임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 다른 게임 개발사들이 틀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한다.

아타리 2600의 성공 이후 여러 회사에서 콘솔머신 개발에 뛰어들었고 얼마 안 가서 다양한 콘솔머신들이 줄지어 등장하게 된다. AVGN의 말에 의하면 "지금은 3개(PS, XBOX, Wii) 중에서 하나만 골라도 되는데 그때는 게임기 고르는 데만 1주일 이상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라고 할 정도로 콘솔머신이 많았다. 실제로 당시 발매되었던 게임기만 하더라도 근 10종에 가까웠을 정도. 대표적으로 유명한 게임기는 콜레코비전인텔리비전. 그 외에도 벡트렉스라든가 페어차일드 채널F 등등 게임기는 무수히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6][7]

더군다나 이들이 액티비전같은 소프트웨어 전문 회사와의 제휴를 통해 괜찮은 게임들을 개발해 내면서 지금까지 자신들이 최고라는 신념 하나만으로 밀고 나가며 느긋하게 게임을 제작하던 아타리는 조급해진다. 사실 아타리는 B급 게임들이라도 불려놓아야 하는 시대적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에 워너의 경영진들은 이미 많은 게임 제작자가 회사를 떠나 제대로 된 게임을 내놓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증 안 된 초짜 게임 제작자들을 닦달한다. 그 결과 아타리는 과거와 달리 쓰레기에 가까운 게임들만 계속 남발하게 된다.

당시 아타리와 워너는 뭐든지 게임으로만 만들어 내면 몇 백만 장씩 팔린다는 법칙을 내세웠는데 실제로도 그러했고, 재고마저 그런 방침이었다. 그래도 초기에는 이 전략이 그럭저럭 먹혀 게임기들의 과도한 경쟁 속에서도 아타리는 80년대 초 매출 20억 달러, 게임기 시장의 75%를 차지했다.

2.4. 아타리 너마저

그런데 아타리는 여기서 희대의 병크를 저지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소프트웨어의 질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전략을 내세운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라이선스를 거치건 말건 일단 아타리의 이름만 달고 나오면 개나소나 다 팔아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무언가를 만드는 게 쉬울수록 그 질은 낮아지기 쉽다는 점을 간과한 패착이었으며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전략으로 게임의 질이 전체적으로 하락한다.

한편 이때 제대로 된 게임 회사라고는 그나마 액티비전밖에 없었으며 그 외에는 다른 직종에 있다가 게임 분야로 뛰어든 회사가 대부분이었는데 그 예를 들어보자면....

  • 14개의 아타리 2600 게임을 낸 US GAMES는 식품회사인 Quaker Oats[8]의 게임 개발 부서였다.
  • 11개의 아타리 2600 게임을 낸 Apollo는 커리어 컨설턴트용 영상음향 교재를 만들던 회사의 자회사였다.
  • Spieder Maze와 Vulture Attack을 퍼블리싱한 K-tel은 컴필레이션 음반 전문 회사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동서식품, 고려원, 에몬스가구, 에이스침대, 종로학원, 국민서관, 계몽사, 아가월드, 압소바, 산와머니, 재능교육, 오뚜기, 트라이, 샘표식품, 서울음반, 대한통운과 같이 게임과 전혀 상관이 없는 분야의 회사들이 이 분야에 뛰어든 셈. 기업 관련 정보의 거의 모든 기업들이 게임 출시를 했다고 하더라도 과언은 아니다. 그외에도 아동용 완구나 보드게임을 만들던 여러 회사들 혹은 몇몇 영화사들이 이 바닥으로 들어왔고, 이들이 아타리의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전략을 그대로 베끼면서 사태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런데 닌텐도도 원래 보드게임 만들던 곳인데

TWAWFF: Adult Games (Atari 2600) - Part 2

사태는 악화일로로 치달아 마침내 아타리 2600용 저질 포르노 게임까지 등장하게 된다(포르노 게임 자체가 만들어지고 출시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지만). 그런데 이런 게임들의 컨셉들이 현재 일본 귀축물 에로 게임에 크게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심히 괴악해서 게임의 사회적 인식을 크게 깎아먹기도 했다.[9] 물론 이때 서드파티나 세컨드파티 같은 협력 방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악영향이 생겼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지만 이러한 상황을 미연에 차단하지 못한 아타리의 잘못도 크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허접한 물량전술은 소비자로 하여금 게임기 고르는데 1주일, 다시 게임 고르는데 1주일, 게임을 하는데 1시간, 후회하고 욕하는데 1년이라는 테크트리를 타게 하여서 유저들을 제대로 엿먹이면서 안 하느니만 못한 병맛 마케팅이 되었다.

그리하여 위와 같은 문제들이 곪을 대로 곪아서 한방에 폭발한 것이 아타리 쇼크이다.

Weird Video Games - Custer's Revenge (Atari 2600)

앞서 말한 포르노 게임에는 '커스터의 복수'라는 게임이 가장 유명하다. AVGN에서도 대차게 깠던 게임인데, 그 유명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여 화살의 방해를 뚫고 인디언 여자가 있는 자리까지 보내는 것이 주 내용. 물론, 둘이 만난 뒤엔 이하생략. 시기도 시기이지만 그래픽이 조악해서 어른이 '이게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 아이는 '커스터 장군이 춤을 춘다'고 변명할 수 있었다.[10]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 그것도 인디언 전쟁 내내 이어진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전쟁 범죄에 관련된 인물을 가지고 포르노 게임에다 고인드립을 친 탓에 당시 미국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켰으며 오늘날 미국 대학 내의 게임 관련 과목에서도 까야 제맛 정도로 다루고 있다. 그정도로 훌륭한 막장 게임의 반면교사.

2.5. 이윽고 터진 '아타리 쇼크'

1973년 ~ 2013년, 2012년 기준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미국 게임산업의 통계(단위: 10억 달러)[11]

위에서 계속 설명했다시피 아타리의 자만은 1982년도에 출시된 아타리 2600용의 팩맨의 경우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12] 아타리 팩맨은 아타리 콘솔보다도 많은 수가 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휴가를 가서 즐기기 위해 두 개의 팩맨을 구입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휴가 갈 때 팩맨을 들고 가서 즐길 거라고는 생각 못했나 하지만 이게 희대의 막장 게임이라서 결국 많은 양의 카트리지가 폐기처분되었다.

그래도 팩맨 때의 경우는 훗날 Ms.Pac-man이 퀄리티로 선방을 해준 덕에 어떻게 버텼지만 팩맨 사태는 아타리 쇼크의 예고편이었다.

E.T. Christmas TV Spot - The Shadow - Atari Video Game Commercial - (1982) - Atari 2600/E.T의 크리스마스 TV광고

본격적인 아타리 쇼크의 도화선이 된 것은 1982년 말에 출시된 E.T.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동명의 명작 영화 E.T.를 게임화한 것으로 이론상으로 보면 못해도 중박 정도는 갔어야 되었다. 물론 적어도 제대로 만들었다면이라는 전제가 붙지만.

당시 아타리에서는 다른 회사에서 E.T.의 라이선스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스필버그에게 수많은 돈을 내주면서[13] 재빨리 라이선스를 사왔고 조속히 게임을 제작했어야 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에 발매를 맞추다보니 단 5주 만에 게임을 만들어 발매해야 하는 꼴이 되어버렸고 결국 그 5주만에 졸속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당연스럽게도 형편 없는 완성도와 그래픽, 넘쳐나는 버그, 엉망진창인 게임성 등으로 인해 대부분이 반품되어 돌아와버리고 말았다(그에 따른 자세한 일화는 E.T.의 2번 항목에 더 자세하게 기술되어있다.).

하지만 이때 아타리에서는 현명한 생각을 할 수 있었는데[14] 또 하나의 병크를 저질러 버렸다. 이렇게 반품되거나 안 팔린 카트리지를 싸그리 모아 뉴멕시코 주의 사막에 그대로 파묻어버리고 시멘트를 살살 발라버렸다. 쉽게 말하면 생매장.

이후의 내용은 다큐멘터리팀의 발굴 항목 참조.

E.T.는 'video game crash of 1983', 또는 '아타리 쇼크'를 만든 주범이 되어서 미국 비디오 게임 시장을 한 방에 붕괴시켰다. 30억 달러로 추정되던 당시 미국 게임 시장은 1억 달러로, 한마디로 분쇄되었다.

'그래도 5주 만에 만든 물건 치고는 괜찮았다'는 이 게임의 게임 디자이너 하워드 스콧 워셔의 발언이 전설처럼 내려오는 물건. 사실 이것은 AVGN도 인정하는 점으로, E.T.가 워낙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이어서 그렇지 당시 쓰레기만 넘쳐났던 게임들 중에는 그나마 할 만한 축에 속했다. 하지만 이건 게임 전체의 퀄리티라는 절대적인 기준에서 말하는 것이지, E.T.의 명성이라는 상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크리스마스 시즌을 희생해서라도 걸작으로 제작됐어야 했다. 한마디로 크리스마스 대목 잡아 보겠답시고 무리수 두다가 작품도 시장도 다 말아먹은 꼴이다.

E.T.의 실패 이후 초조해진 아타리는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더욱 저질 게임을 물량으로 찍어내듯이 제작해 시장에 내놓는다. 이때의 아타리 정책은 하나만 걸려라...라는 정신나간 도박같은 정책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타리 말고 다른 회사도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E.T.로 게임 자체에 불신이 생긴 대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E.T. 이후 더 심한 병맛 게임들만 쏟아져 나오는 상황은 대중의 불신을 더더욱 심화시켰고, 아무도 게임을 사지 않게 만들었다. 급기야 업체들은 재고처리를 위해 덤핑 경쟁에 뛰어들었고, 그럴 수록 시장에서 외면받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2.6. 아타리 쇼크의 결과: 일본의 세계 게임시장 점령

일단 그 당시 게임을 개발하던 회사들이 전부 자사의 게임 부서를 없애거나 축소를 시켰다. 인텔리비전을 개발하던 마텔도 자사의 마텔 일렉트로닉스를 매각해버렸으며 콜레코비전을 개발하던 콜레코도 자사의 전자기기 부서를 팔아넘겼다. 그 외에 여러 회사들이 게임기 개발을 포기하는 등 엄청나게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이것은 미국 완구 업계에 비디오 게임은 일시적인 유행물일 뿐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게 되어 이후 아무리 좋은 게임기가 들어오더라도 그것을 매장에 진열하는 것을 거부하게 되었다. 기존의 재고품들도 초저가 행사 등으로 곧 전부 처분되었다. 이때문에 이후 닌텐도가 미국에 패미컴을 처음 발매할 때에는 상표명을 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로 바꾸고 로봇인 R.O.B.를 추가하는 등 어디까지나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며 게임은 그 부가적인 요소라는 점을 강조하는 마케팅을 하게 된다.

1973년 ~ 2013년, 2012년 기준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일본 게임산업의 통계(단위: 10억 달러)[15]

17 Best Old Nintendo Commercials

닌텐도의 이 작전이 성공하여 미국에서 닌텐도를 하다는 말 그대로 게임을 하다는 의미가 되었으며 기존의 퍼스트파티들이 떠나간 탓에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엑스박스가 나오기 전까지 미국의 가정용 게임기 시장은 한동안 닌텐도세가를 비롯한 일본 회사들이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아타리는 5200, 7800, 링스, 재규어 등을 내놓으며 연명하려 했지만 이미 아타리에 등을 돌린 게이머와 서드 파티를 복귀시키는 데에는 실패하며 결국 프랑스의 인포그램스에 매각되었고, 이후 여러번의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16]

3. 결론

정확히 말하자면 워너의 인수 이후 아타리 게임들의 전체적인 품질 하락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E.T.를 계기로 한 번에 무너지기는 하였으나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당시의 콘솔 게임시장은 질 나쁜 상품만 넘쳐나는 레드 오션이었고 E.T.는 그 레드 오션의 자폭 스위치였다.

게다가 당시의 콘솔 게임시장은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한 시장이었다. 회사들이 윤리경영과 게임의 본질을 망각한 채 상업성만 좇은 결과, 게임의 질은 갈수록 떨어졌고, 정상적인 윤리의식으로는 나올 수 없었던 게임들(포르노 게임 등)이 남발하기도 해 학부모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만약에 여기서 사정이 더 악화됐다면 미국에서도 게임규제가 진행될 수 있었다. 이렇듯 시장 자체가 이미 비정상적이었던 걸 생각하면, 시장 자체가 리셋된 것이 차라리 잘 된 일.

이 때문에, 아타리 쇼크는 경제학 뿐만 아니라 경영학, 응용윤리학에도 큰 의미가 있다. 경제학에는 시장에 풀린 상품(그것도 대체재가 풍부한 것들)의 전체적인 품질이 지나치게 떨어지면 시장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아주 좋은 사례가 되어주었고, 경영학과 응용윤리학에는 각각 '지속 가능한 경영'과 '윤리경영'의 경각심을 일깨워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게임 업계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사건의 개요를 읽어보는 편이 좋을 듯. 현재 이것에 가장 가까운 사례는 양판소, 대한민국 MMORPG가 아닐까 싶다.

간단한 경제학...아니 관리회계적으로 해당 사건을 분석하자면 아타리 쇼크의 원인은 게임산업 구조 자체가 고정비가 너무 컸고 이에 따라 레버리지 효과가 발생한 것에 가깝다. 즉, 게임산업이란 것 자체가 (1) 게임을 개발하고 출시하기 전까지는 비용이 많이 든다(높은 고정비) (2) 게임이 출시된 후 새로운 카피를 찍어내는데는 돈이 별로 들지 않는다(낮은 변동비)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17]. 시장이 호황일때는 이미 투자한 고정비가 조기에 회수되고 패키지 카피를 찍어내는 불티나게 팔려 족족 높은 마진으로 유입되기 때문에 게임회사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주나 시장이 불황일때는 개발에 이미 투입된 고정비가 오히려 회사의 발목을 잡아버리는 케이스다. E.T같은 경우에는 실제 개발기간이 짧았으므로 개발에 따른 고정비는 오히려 적었으나 출시전에 재고를 너무 많이 준비하여 통상적으로는 변동비에 해당하는 부분인 패키지 비용마저 고정비로 돌려버린 까닭에 오히려 화를 자초한 케이스. 여담으로 게임회사들이 DLC를 비롯해서 온라인 다운로드를 적극 권장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디지털 카피는 패키지와 달리 출시전 재고를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고 악성 재고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고정비 부담이 훨씬 적어진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

3.1. 사건 이후

이 사건으로 미국 게임시장은 건전성이 단단해져, 현재는 게임이 발매되면 여러 게임 전문 잡지, 웹진들이 그 게임을 '평가'하는 리뷰 시스템이 매우 잘 되어 있다. 물론 게이머들과 전문 리뷰어들 간 성향이 달라서 마찰이 있는 경우도 많고 아예 엉뚱한 이유로 이상한 점수를 받는(풋볼 매니저 2008이 IGN에서 2점을 때린 사례) 일도 있지만 아타리 당시에는 이런 리뷰 자체가 거의 없어서 어떤 게임들이 재미있고 질 좋은 게임인지 알아내기가 매우 어려웠다. 마니아들끼리 싸워도, 아무도 즐기지 않는 것보단 낫다.

3.1.1. 다큐멘터리 팀의 E.T 팩 발굴

아타리가 사막에 묻어버린 게임팩들은 주변에 사람들이 막 가져가려고 하고 굳어버린 시멘트를 뚫어서 파내기도 하였다. 이 E.T.가 묻어진 곳을 찾으러 가는 영상#도 있다(이 영상에 간단한 사전 정보도 나온다.)...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생매장에서 살아난 E.T.게임에 한정해서 상당히 고가에 거래된다고.[18] 그러나 아무도 실제로 묻혀있는걸 보거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도시전설화가 되어 가고 있었는데...


Excavating the Atari E.T. Video Game Burial Site-Game|Life-WIRED

2014년 4월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지원하는 다큐멘터리 팀이 뉴멕시코에서 30년동안 묻혀있던 E.T.와 팩맨 카트리지를 발굴해 냈다.# 링크 기사에 좀 더 많은 발견당시의 사진이 있다.

4. 반론

여기까지 읽었다면 대체로 흔히 알려진 아타리 쇼크에 대해서 다 알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타리 쇼크에도 비판적인 시각은 있다. 사건이 너무 과장되었다는 것.

일단 워너사가 아타리를 인수한 이후 소위 똥군기를 잡아버리는 바람에 개발 의욕이 떨어졌다는 주장부터가 틀렸다고 볼 수 있다. 어느 회사이건간에 사내 질서를 잡는것은 당연한 상식이며 정장입는다고 창의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물론 워너그룹 경영진들이 부슈넬 시절부터 있던 개발자들을 물로 보는 등 심하게 나갔던 건 사실이지만 마약류나 히피스런 패션에 대한 제재조치는 워너가 아니라 다른 회사가 인수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타리 VCS의 판매량은 1979년 400만 대에서 1980년 280만대, 81년 330만 대, 82년 900만 대, 83년 630만 대, 84년 280만 대로 82년 연말에 갑자기 하드가 팔리지 않게 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82년 말을 기점으로 실제로 게임기를 만들던 여러 회사가 철수하고 소프트를 만들던 회사도 다수 도산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비디오 게임 시장이 지나칠 정도로 과열되면서 급격히 확대되었다는 걸 고려하면 되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시기엔 본 문서 상단에서 언급했듯 게임과는 전혀 관련도 없는 회사들도 업계에 많이 뛰어들었었고, 이들은 아타리 쇼크같은 거창한 사건이 없었더라도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다. 한마디로 말해 망하는게 당연한 회사가 망한것 뿐.

시장의 관점에서 보자면, 게임이 돈이 된다는 걸 알자 자본이 급격히 모여들었다가 생각만큼은 돈이 안 된다는 걸 알자 급격히 빠져나간 것 뿐이다. 즉, 아타리 쇼크는 딱히 아타리 사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고 보기도 힘들고, 사건 자체도 단지 시장 전체에서 거품이 끼었다가 빠지는 과정일 뿐이었다.단순히 거품이 끼고 꺼질 거품이 꺼진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단순히 거품 붕괴라도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거슬러 올라가면 튤립 파동처럼 교과서에 실릴만큼 중요한 경우도 있지만... 이 사건은 80년대 전반기 북미 '콘솔'게임시장에 한정된 이야기일 뿐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스케일이 지극히 작고 협소한 상황이다.

그리고 완구 시장에서는 뭔가 일시적으로 유행을 탔다가 몇 달, 1년 쯤 뒤에는 유행이 사그러드는 일이 흔히 있다. 당시 기준 게임도 완구의 일종으로 보면 아타리 쇼크는 신생 완구 시장에 일어나는 전형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으며 딱히 특수한 사건은 아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결국 과잉 생산인데 경영진들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시장 수요를 잘못 예측한 과잉 생산도 이런 시장에서는 매우 자주 일어난다. 굳이 완구 시장이 아니더라도 수요 예측을 잘못하여 망한 사례는 흔하다. 어째 죄다 경전철이 링크 되어있는 듯 하지만 넘어가자 게다가 콘솔 게임이라는 제품군은 초창기였고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E.T.등 몇몇 제품에서 과잉 생산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이는 하나의 해프닝으로서 물론 기업의 판단 실수이며 손해이기는 하지만 이런 것이 딱히 '광기'나 '시장 전체의 광란'으로 묘사해야 할 정도로 특수한 사례는 아니다.

실제로 IT업계에는 하이프 사이클이라는 개념이 있다. 새로운 기술이 탄생하면 처음에는 대중적으로 엄청난 관심과 거품이 생기지만 실상이 밝혀진 뒤에는 거품이 꺼져 오히려 과장되게 까이고 일시적으로 침체기에 들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해당 기술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받고 점진적으로 사회에 반영된다는 개념인데 당시 비디오게임 역시 거품기에 있었을뿐이며 이는 IT 전반적으로 흔히 있는 현상이라는 것.

아타리 쇼크 후에도 비디오 게임 시장은 여전히 상당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아타리는 재규어에 이르기까지 계속 콘솔 기계를 새로 만들었고.

심지어 게임 시장의 붕괴 자체를 반박하는 견해도 있다. 물론 아타리를 비롯한 콘솔 게임사는 굉장한 타격을 받았지만 일종의 '휴대용 게임기' 로 볼 수 있는 게임&워치는 아타리 쇼크 따위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82년, 83년에 거쳐서 수천만 개씩 팔리고 있었다. 영향을 받았다 쳐도 오히려 더 팔렸지. 실제로 당시 게임을 즐겼던 어린이들은 이런 일에는 관심 조차 없었으며, 성인이 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을 정도였다.(제임스 & 마이크 플레이 아타리 1부 참조)

또한 그 당시만해도 게임기 시장과 인접해있던 PC게임 시장은 전혀 위축되는 징조가 발견되지 않았다. 실적이 저조해진 아타리 VCS와는 정반대로 PC시장에서는 애플 II코모도어64 같은 히트 하드웨어가 연달아 터져나왔다. 물론 PC와 콘솔은 엄밀히 따지면 다른 물건이지만 이 당시에는 홈 PC와 콘솔 게임기는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둘 다 똑같이 TV를 사용하는 물건[19]이었기 때문이고 점점 PC의 성장세가 커짐에 따라[20] 수많은 게임들이 PC 버전으로 제조되어 콘솔이 게임을 독점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아타리 VCS의 판매량이 줄어든 것은 8비트 홈 PC의 약진에 짓눌린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당시 8비트 홈 PC에는 대부분 BASIC이 내장되어 있었기에 당시 게임에는 없던 교육용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보수적인 미국 학부모들이 이런 교육용 컴퓨터에 대한 구매욕구가 높았음을 생각하면 아타리가 흐름을 타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경쟁자인 마텔인텔리비전에서 교육용 컴퓨터 기능을 강화한 인텔리비전2를 사전에 기획하고 선전했지만 개발이 지체되면서 소비자의 불만이 터져나와 판매량에 직격탄을 맞았고, 콜레코비전과 연동되는 별도의 컴퓨터인 콜레코 아담이라는 애플,코모도어의 경쟁자 컴퓨터를 내놓았던 콜레코는 아타리 쇼크 이후 빠르게 전자제품 사업을 정리해버렸다. 그리고, 닌텐도 역시 이런 소비자의 요구를 파악해 북미 진출 때 교육용 게임 제작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게임 시장의 붕괴는 아타리와 그 유사 기종, 즉 콘솔 게임기에 한정된 것으로 전체적인 게임 시장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콘솔 게임 시장의 붕괴와 다른 게임 시장의 부흥이 맞물린 것으로 봐야 한다. 이렇듯 특정 시장의 붕괴로 유사한 시장이 흥하는 일은 아주 많다.

또한 이 무렵 수많은 종류의 게임기가 나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거의 대부분이 아타리 2600의 아류작으로서 애초에 게임도 별로 없고 게임기 자체도 매력이 없어서 아타리와는 달리 점유율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또한 투자 업체들 역시 다른 본업이 있고 부업으로서 끼어든 것일 뿐이라 이율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았을 때는 곧바로 철수했다. 그 때문에 업체수는 크게 줄어든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각각의 업체는 점유율이 비교적 낮았기 때문에 시장 자체에는 큰 영향이 없었던 것이다.

5. 음모론

아타리 쇼크를 하나의 음모론으로 보고 있는 시각도 있다.

우선 아타리 쇼크를 거대한 사건인냥 주장하는 측은 "1983년의 북미 게임 시장 붕괴"라는 일시적인 사건(지역, 시간이 한정됨)을 "아타리 쇼크"라는 선정적인 표현을 붙여 보편적인 비디오 게임 시장으로 연결시켰다. 그리고 단순히 "과잉생산으로 인한 기업의 타격과 시장붕괴" 현상으로 파악할 수도 있는 것을 "소프트웨어의 품질"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별다른 근거도 없이 주장했다. 그리곤 이를 품질 저하를 막기 위한 "제조사에 의한 통제 조치"를 정당화 하는 논리로 변형·발전시켰다.

한마디로 "아타리 쇼크"라는 용어는 어느 시장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을 마치 비디오 게임 시장의 독특하고 특수한 상황이며, 비디오 게임 업계가 언제 어디서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왜곡하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음모론의 골자는, 이러한 주장을 퍼트린 것은 일본 언론(게임 회사와 연관이 깊은 게임 잡지·언론)이며 이것을 주도한 것이 닌텐도라는 것이다.

일단 닌텐도는 패미컴/슈퍼 패미컴 시대에 소프트웨어의 내용에 간섭하는 "닌텐도 체크"를 엄격하게 벌이고 있었으며 패키지의 제조와 유통을 거의 완전히 독점하고 있었다. 생산을 독점한 상태에서 닌텐도는 패키지의 제조 수량을 철저하게 억제하고 게임 패키지의 가격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였다.(물론 닌텐도가 가져가는 마진율이 매우 높았다)

일단 배경을 알아보자. 당시 게임 업계 관계자 증언에 따르면 닌텐도의 게임 내용에 대한 체크가 상당히 엄격했던 것은 분명하다. 액션 52이나 소위 합팩 같은 패미컴 무허가 소프트들은 대부분 닌텐도의 영향력이 없었던 해외에서 나왔다. 일본에서 이런 소프트가 공공연하게 유통되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짓이었다.

실제로 패미컴, 슈퍼패미컴 시대에 패키지 제작 공장과 유통망은 닌텐도가 철저하게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며 불법 소프트웨어는 소수에 불과했다. 패미컴, 슈퍼패미컴 시장은 결코 무허가 소프트가 난무한다고 표현할 정도의 해적 소굴 상태는 아니었다.

닌텐도가 팩의 제작 공장을 완전히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패미컴과 슈퍼 패미컴에서 닌텐도 체크를 피해가는 소프트는 시장에 진입할 수 없었다. 우회적인 꼼수를 부리는 기업이 몇몇 있기는 했으나[21] 결국 절대다수의 소프트웨어는 닌텐도 공장에서 제조되어야 했으므로 닌텐도의 체크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독점 구조에서 닌텐도는 중고 가격이 많이 떨어지지 않도록 생산량을 지나치게 억제해서 게임 제작사의 이익을 착취하고, 유통을 장악하고 쓰레기 게임 재고를 떠넘겨서 소매점을 착취하는 하면서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훗날 1994년 플레이스테이션이 나타날 때까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일본은 그나마 사정이 낫지, 당시 미국은 일본에 게임 라이선스 값 갖다 바치는 판권 셔틀에 불과했다.[22]

결국 이러한 닌텐도의 독점과 통제 상황을 정당하게 보이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낸 루머가 바로 '아타리 쇼크'라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긴 했던 상황이지만, 아타리 쇼크에다가 슬그머니 "저질 소프트의 남조"라는 "원인"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이런 야쿠자적 착취 구조에서 업계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닌텐도가 아타리 쇼크의 원인을 과장해서 게임잡지 등에 "닌텐도가 제작, 제조, 유통을 관리한다. 모두를 위해서"라는 이론을 퍼트렸다는 것이 이 음모론의 핵심이다.

5.1. 닌텐도 음모론에 대한 반론

하지만 높은 가격에도 어느 정도 닌텐도가 억울한 측면이 없지도 않은데, 일단 팩에서 게임 롬 때문에 제조 가격이 비싼 편이었다. (원래 업소용이라 비쌀 수 밖에 없지만) 네오지오3DO의 경우, 저렴한 개발 비용으로 수많은 업체들이 개발에 뛰어들기도 했는데 해당 게임기들의 경우 직접 관리하는 강력한 홀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프트의 가격이 비쌌다. 획기적으로 게임 가격이 내려간 건 플레이스테이션이 나오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사실 어느 정도는 이미지 관리가 필요하기도 하다. 이런 닌텐도의 방식이 2000년대부터 CD와 플레이스테이션의 등장으로 더 이상 통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서드파티의 컨텐츠 개발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수하는 회사가 관련 시장에서 주도적으로 지배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바로 애플앱스토어. 사실 이건 마케팅의 전략 중 하나에 해당하는 '이미지 포지셔닝'[23]이 제대로 먹힌 사례로, 애플은 앱스토어라는 강력한 자율규제 모델(특히 서드파티 모델)을 통해 스스로 이미지를 쌓고 있다. 아타리 쇼크는 아타리의 파티 관리 실패가 이미지 관리 실패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사태가 터진 것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실제로 애플 앱스토어와 비교해보면 구글아타리와 비슷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6.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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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참고로 미국에서는 'Atari Shock'라 부르지 않는다. 아타리 쇼크란 단어는 일본에서 넘어온 것으로, 미국의 달러화 관련 정책으로 전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닉슨 쇼크'에 빗댄 것이다.
  • [2] 떠난 후엔 요식업계 쪽에서 일했다고. 떠날 때도 다른 경쟁 업체엔 가지 않는다는 계약까지 했던 모양.
  • [3] 보너스? 그딴 건 없었다. 그냥 월급만 받아갔다. 게다가 자기가 만든 게임에 자기 이름도 박을 수 없었다. 이 당시 아타리의 어느 개발자는 이스터 에그로 비밀의 방에 들어가면 자기 이름이 나오게 만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사람이 퇴사한지 3개월 후에 회사에 발각됐다나?
  • [4] 일화에 따르면 아타리의 개발자들이 키사르에게 당신은 우리 같은 일렉트로닉 디자이너와 일해본 경험이 있냐? 라고 물었더니 아뇨. 하지만 난 수건 디자이너와는 일해봤습니다 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이 인간은 방점을 그냥 디자이너에 찍은 거다. 게임의 ㄱ자도 몰랐다.
  • [5] 마리화나를 피우고 자유로운 복장과 시간 개념 등...
  • [6] 이것들 전부 다 AVGN에 한번씩 언급된 콘솔이다.
  • [7] 어떤 산업이든지 초창기에는 다 이렇다. 어떤 산업 장르가 새롭게 나와서 대 히트를 하면 이 회사 저 회사가 뛰어들어 군웅할거, 춘추전국시대가 된다. 70년대 중반의 미국 PC업계도 그랬다. 그러다가 도산, 흡수 합병등을 통해 상위 몇개 사 형태로 안정된다. 2010년대 초의 스마트폰 업계 또한 그러하다.
  • [8] 간혹 한국 수입식품점이나 미군PX 유출품으로도 볼수 있는 퀘이커교도의 얼굴이 새겨진 그 오트밀 만드는 회사.
  • [9] 물론 제작사는 포르노 회사들. 아타리는 그저 아무 회사나 만들어주기만 하면 장땡이었으므로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 [10]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게임 패키지 뒷면의 주의문에 그렇게 하라고 적혀 있었다.
  • [11] 아타리 쇼크가 터진 1982년 이후 급격히 그래프가 내려간 모습. 미국의 게임산업은 아직도 그때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참고자료.
  • [12] 이 당시, 아타리 2600용 팩맨을 제작하라는 지시에 개발팀에서는 한 개발자가 심심풀이로 만든 버전을 프로토타입으로 제시했고 아타리는 그걸 그대로 롬팩에 담아서 판매했다. 이런 병크에도 아타리 2600용 팩맨은 수백만장이 팔려나갔다.
  • [13] 세간에는 2천만 달러에서 2천 5백만 달러라고 한다. 당시 35달러가 현재 70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라이선스료가 아닐 수 없다.
  • [14] 예를 들면 끼워서 판다던가 아니면 게임매장 앞에서 무료로 나눠줄 수도 있었다.
  • [15] 아타리 쇼크가 터진 1982년 이후 급격히 그래프가 올라간 모습. 이후 게임시장은 한동안 일본이 점령한다. 참고 자료.
  • [16] 브랜드 명칭만 산 거다. 아타리 회사 자체는 일찌감치 공중분해되었다. 좀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아타리는 1984년에 아타리 게임즈와 아타리 소비자 가전이라는 두 회사로 분리되었고, 이중에서 아타리 게임즈는 폐업했으며 아타리 소비자 가전은 JTS라는 하드웨어 제조사에 팔려 그 회사의 한 부서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1998년에 완구회사인 해즈브로가 JTS로부터 아타리라는 브랜드에 대한 권리를 매입하여 아타리라는 이름의 자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001년에 프랑스의 인포그램스가 해즈브로를 통째로 사들이면서 아타리 역시 인포그램스의 소유가 된 것.
  • [17] 유사한 산업구조로서 광산, 유전개발이나 영화나 만화, 음악 등 컨텐츠 시장이 그렇다
  • [18] E.T.카트리지를 워낙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중고로 구하기는 의외로 쉽다.
  • [19] 당시에는 'PC'라 불리는 물건도 텔레비전에 연결해서 쓰는 방식이 주류였었고 흔히 생각하는 모니터란 개념은 회사나 연구소등에서 쓰는 대형 컴퓨터에서나 쓰는 정도였었다. IBM PC매킨토시가 등장한 이후에야 개인용/가정용 PC에도 전용 모니터가 달리기 시작했다.
  • [20] 미국 기준으로 PC에 플로피디스크 같은 보조기억장치의 보급이 느렸던 70년대만 해도 롬팩 기반인 콘솔에 비해 게임 소프트 실행에 크게 불리했으나 80년대 이후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적극 보급으로 PC에서의 게임소프트 실행은 콘솔에 비해 더 편리해졌다.
  • [21] 패미컴 시기 남코가 수작질을 부리다가 분노한 닌텐도에게 크게 털렸고, 반다이도 슈퍼 패미콤 시기 어뎁터 형식의 주변기기를 만들고 거기에 독자적인 팩을 꽂아넣게 하는 수작질을 감행했다. 물론 당시 반다이답게 나오는 게임이 죄다 쓰레기라서 대실패.
  • [22] 이 때문에 북미 게임의 유서깊은 대작은 모두 PC 기반이다.
  • [23] Image Positioning, 기업이 스스로 이미지를 관리해 장기적인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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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8-27 12:5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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