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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진

last modified: 2015-01-10 02:38:37 by Contributors

樂進(? ~ 218년)

Contents

1. 개요
2. 활약
3. 후사
4. 평가
5.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조조의 수하 장수.

삼국지의 인물. 는 문겸(文謙). 양평군 위국현 출생.

조조가 진류에서 거병할 때 부터 휘하에 있었던 용장. 체구는 작았으나[1] 담력이 뛰어났으며 용맹하였다. 여포 토벌전, 장수 토벌전, 관도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에 있어서 물러남이 없었으며 여러차례 군공을 세웠다. 정사에 따르면 관도 전투때는 순우경을 잡았고, 원담 토벌전 때는 몸소 적군의 성루에 가장 먼저 올라가 크게 용맹을 떨쳤다.

2. 활약

담력으로써 조조를 따라 장하리(帳下吏)가 되었다. 출신 군으로 보내져 천여 명을 모병하여, 돌아온 후 군가사마, 함진도위가 되었다. 조조가 여포, 장초, 교유(橋蕤), 장수, 휴고, 유비 등을 공격할 때 항상 선두에 서서 공을 세웠으므로 광창정후(廣昌亭侯)로 봉해지고 토구교위(討寇校尉)에 임명되었다.

200년 관도전투에서는 우금과 함께 황하(黃河)를 건너 획가(獲嘉)에 있는 원소 진영을 공격했으며, 돌아와 조조를 수행해 오소를 수비하던 순우경을 참했다. 원담, 원상을 여양(黎陽)에서 공격할 때 그 대장인 엄경(嚴敬)을 참했고, 행(行, 대리의 의미)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임명되었고, 또한 장료와 함께 음안(陰安)을 낙성시켜 주민을 하남(河南)으로 이동시켰다. 그후는 업성(鄴城) 포위전에 참가하였고 업성이 함락되자 남피의 원담을 공격하여 동문으로 제일 먼저 도착하여 돌입하였고 원담의 패배 후에는 별동대를 인솔하여 옹노(雍奴)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건안 11년(206년) 조조헌제에게 올린 표를 올려 장료, 우금, 악진에 대해 크게 칭찬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력은 크며 계략은 두루 갖추어져 있고, 진실된 충성의 성품은 한결같으며, 절의(節義)를 잡아 지키고, 매양 전장에서 공격하는데 임하여서는 항상 감독하며 솔선하니, 강성하고 굳건한 적군에 떨쳐 돌격하는데, 아무리 견고한 적도 함락되지 않음이 없었고, 스스로 북을 쳐서 사기를 북돋는데 손이 풀어지는 줄 몰랐습니다. 또한 따로 파견하여 정벌케 하면, 군대를 통솔하는데, 군사들을 위무해 화평하게 하여 군령을 받드는데 범하는 게 없고, 적을 맞아서 제압하고 결단낸는 데는 남겨져 실패한 것이 없었습니다. 공을 논하여 기록하고, 등용함에 마땅히 각기 현달한 자리와 은총을 내려야 합니다"

이에 장료는 탕구장군, 우금은 호위장군, 악진은 절충장군의 직책을 수여받았다.

오환정벌 중에 반역한 고간을 별동대를 이끌고 우회해서 배후에서 공략 격퇴시켰고 호관으로 물러나 견수하던 고간을 조조가 직접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전과 함께 청주 북해의 해적 관승(管承)을 토벌한 뒤 양책(陽翟)에 주둔하여 형주에 대비했으며, 형주를 점령한 후 양양(襄陽)에 주둔했다. 212년,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으며, 임저장(臨沮長) 두보(杜普), 정양장(旌陽長) 양대(梁大)를 모두 격파했다.

그 뒤 (吳)와의 합비 공방전에서 손권의 대병을 장료, 이전과 함께 소수의 군사로 쳐부순 것은 매우 유명하다. 악진, 이전은 원래 장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항장이면서 자신보다 계급이 더 높았다는 오해가 있지만 같은 계급(잡호장군)이었다.[2] 그러나 합비 전투에서는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단합하여 훌륭한 전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합비에서 손권을 정벌하여 가절(假節)이 수여되었다. 이때 악진은 손권을 구출하려는 능통과 겨뤄 능통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갔으나 감녕의 공격을 받고 퇴각했다. 그 후, 악진은 우장군(右將軍)으로 관위가 올랐다.

건안 23년(218년)에 죽었는데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노환으로 추측된다. 벼슬이 우장군에 이르렀고, 시호로 위후(威侯)가 추증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수구전투에서 화살을 맞은 이후 출연이 없으나 죽었다는 서술은 없다.

3. 후사

아들 악침이 후사를 이었다. 정사에는 아비의 풍모가 있다고 하지만 별달리 큰 활약은 없었던 듯 하다. 그래도 악진은 한당보다는 훨 낫다. 후에 정동대장군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에게 기습을 당하여 죽었다. 후에 악침의 아들 악조가 후사를 이었다.

4. 평가

정사와 연의의 평이 대체로 일치하는 인물 중 하나. 지장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조조가 거병한 이래 20년 가까이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단 한 번도 추태를 보인 일이 없었고, 장군의 직책에 있으면서도 결코 몸을 사린 일이 없는 용장이었다. 조조 거병 이후로 노환으로 죽을때까지 있던 수많은 전투에서 선두에 서면서도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악진의 능력을 입증한다. 언제나 평타 이상은 치는데 딱히 임팩트가 없기 때문에 민간에 인기는 별로 없는 편. 진수의 평가도 같아서 "악진은 용감성과 과단성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그들의[3] 사적을 살펴보면 전해들은 것과 부합하지 않는다. 간혹 설명이나 기록이 누락된 곳이 있어서 장료나 서황처럼 상세하게 갖추어지지 못했다."고 말한다.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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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래서 삼국전투기에서는 김리로 나왔다.
  • [2] 게다가 이전은 실제로는 관도대전쯤부터 이름이 등장하므로 장료보다 늦게 임관했다.
  • [3] 장합, 우금, 악진 5장군에 대한 평가를 한꺼번에 하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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