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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Contents

1. Antonio
2. 이 이름을 지닌 실존인물
2.1. 성 안토니오 아빠스
2.2.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3. 이 이름을 지닌 가상인물
3.1. 어새신 크리드 2의 등장인물

1. Antonio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의 남성 이름. 포르투갈어로는 안토니우(António)이며, 브라질 포르투갈어로는 Antônio이다. 이름의 기원은 라틴어 안토니우스(Antonius)로 고대 그리스어을 뜻하는 'ανθος(안토스)'에서 유래되었다. 이 이름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은 수도생활의 창시자 大 안토니오 아빠스와 파도바의 안토니오로 모두 그리스도교의 성인이다.

영어권에서는 안소니(Anthony), 프랑스어로는 앙투안(Antoine), 러시아어로는 안톤(Антон)이다.

2.1. 성 안토니오 아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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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년경 이집트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 출생, 356년 이집트 콜짐 산에서 선종. 축일은 1월 17일.

이집트수도자, 은수자, 교부(敎父). 밑의 안토니오와 구분하기 위해 大 안토니오(Anthony The Great)라고도 불리고 사막의 성자라고도 불리며, 각지에 숨어있던 은수자들을 한데 모은 최초의 수도 공동체의 창시자로서 모든 수도자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초대 교회의 교부이기 때문에 모든 종파에서 성인으로 공경받는다. 축일은 가톨릭에서는 1월 17일, 정교회에서는 1월 30일. 상징물은 악마를 물리치는 , 돼지, 성경, 안토니오 십자가로도 불리는 타우(T) 십자가, 피부병을 치유한다는 '안토니오의 불'.

그리스도교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20살이 되던 때에 부모님을 여의고 여동생과 단둘이 살던 그는, 34세 때 교회에서 부자 청년에 대한 복음 말씀[1]을 듣고 하느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먼저 여동생의 몫인 동산 하나를 제외한 자신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준 뒤, 이집트의 사막으로 나가 은수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성경의 내용대로 살기 위해 성경을 아예 외우고 다녔고, 기도 생활과 노동을 계속해 왔다. 중간에 갖가지 유혹과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더더욱 외부와의 문을 걸어잠그고 이를 극복하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 안토니오의 유혹에 대해서는 후세의 예술가들이 작품으로 많이 남겼다.

안토니오는 '아무래도 혼자 사는 것보다 마음을 함께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게 더 낫지 않겠나' 싶어, 제자들을 모아 수도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 때가 305년이고 안토니오가 54세 때의 일이다. 이때 수도 공동체는 모두가 모여 사는 수도원의 형태라기보다, 평소에는 따로따로 살다가 성체성사나 안토니오의 설교가 있을 때마다 일시적으로 모이는 형태였다. 하지만 61세 때인 312년에는 다시 공동체를 나와 동굴에서, 또 이후에는 텅 빈 성채에서 거의 35년 동안 독수 생활을 했다. 그는 되도록 사람을 만나지 않기 위해 아예 입구를 막았지만 사람들은 계속 모여들었다. 또한 그가 세웠던 수도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또 다른 집단을 만들어 발전시켰다.

홍해 근처의 콜짐 산에서 생활하던 안토니오는 88세 때 특별히 알렉산드리아로 갔는데,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성 타나시오를 도와 아리우스파 이단을 단죄하기 위해서였다.[2] 그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감화되었고, 임무를 완수한 뒤론 다시 산으로 들어가 105세의 나이로 선종할 때까지 계속 수도생활에 열중하였다. 그의 선종 순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 기도를 청했는데, 그 중에는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황제인지 뭔지에 관심이 없는 안토니오는 그저 그에게 "올바르게 정치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고 답했고, 황제의 편지에 놀란 동료들에게 "그도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다"고 한 바 있다.

그의 성해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산꼭대기에 묻혔다가 오래지 않아 발견되었고,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장되었다.

2.2.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Santo António de Pád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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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5년 8월 15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출생, 1231년 6월 13일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선종.

본명은 페르난두 마르팅 드 불룡이스 이 타베이라 아제베두(Fernando Martim de Bulhões e Taveira Azevedo).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수도자, 신부, 교회박사. 위의 안토니오와는 달리 가톨릭에 한정된 성인이며, 축일은 6월 13일. 상징물은 지식의 상징인 , , 환시 때에 봤다는 아기 예수, 백합, 물고기, 불타는 심장.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선종한 성인이므로, 어디선가 파도바의 안토니오를 설명할 때 노인의 모습이 그려진 성화가 첨부되어 있다면 그건 위의 안토니오 아빠스를 착각한 것이다(…). 파도바의 안토니오는 머리 가운데가 도넛처럼 뚫린 탁발 수도자의 모습을 한 젊은이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아기 예수와 백합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분실물의 수호성인이며, 그에게 전구하면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파도바, 포르투갈, 브라질의 수호성인으로, 특히 파도바에서는 축일이 되면 성인을 기리는 퍼레이드를 연다.

신분이 높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페르난도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5세 때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뒤이어 1212년에는 지인들을 피해 코임브라의 성 십자가 참사 수도회로 옮겨 1219년 수도사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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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다음 해 1월 말, 성 베라르도를 위시해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순교한 최초의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수도자[3] 5명의 성해가 포르투갈 친왕 돔 페드로 페르난데스에 의해 성 십자가 성당으로 옮겨져 왔다. 마침 자신이 몸담고 있던 성 십자가 수도회의 소극적인 성향이 답답했던 페르난도는, 그 순간 자신도 순교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느껴 지체 없이 작은형제회로 갈아탔다.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얻게 된 것도 이때로, 페르난도란 이름은 귀족만이 쓸 수 있는데 속칭 거지들의 틈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어 바꿔야 했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필리피노 수사와 함께 모로코 선교를 지원하여 갔으나, 병이 나서 포르투갈로 돌아가야 했다. 물론 폭풍우 때문에 돌아가는 길도 순탄치는 못했다고.

1221년, 포르치운쿨라의 작은형제회 총회에 참여한 안토니오는 성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고 무작정 순교하려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프란치스코의 허락을 받고 포를리라는 곳의 몬테파올로 운둔소에서 고행생활을 하다, 1222년에는 코임브라 관구장 그란치아노 신부와 함께 도미니코회 수도사제 서품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강론할 사제가 어떤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수도원장의 주청으로 대신 강론하게 되었다. 그의 웅변 포텐이 여기서 우연히 터지게 되었는데,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곳의 수도원장은 안토니오에게 운둔생활에서 벗어나 설교 활동을 하길 종용했고, 곧 이단이 판치던 남부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그곳 외에도 몇 곳을 돌아다니며 연이은 대박을 쳤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223년에는 작은형제회의 첫 번째 신학교수가 되었다.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나자 이탈리아로 돌아온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의 후계를 정하는 총회에 참석한 뒤 파도바의 수도원으로 가 그 지방의 사람들을 완전히 감화시키는 등 활발한 설교활동을 하였다. 사람들은 안토니오의 가공할 설교 능력에 혀를 내두르며 그를 이단자를 부수는 망치, 살아있는 언약의 궤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36세가 되던 1231년 열병이 난 안토니오는 요양을 위해 캄포 산 피에로로 갔으나, 낫지 않자 파도바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베로나의 가난한 글라라 수녀회에 들른 그는 6월 13일,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성해는 파도바에 돌아와 묻혔고, 바로 다음 해인 1232년 5월 30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시성해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성인이 되었다.

성 안토니오의
1263년에는 성인이 묻힌 자리에 성당이 세워졌다. 이 때 기공식에서 성인의 유해 이장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당시 프란치스코회 총장인 성 보나벤투라였다. 이 때 유해가 일반에 공개된 적이 있는데, 다른 부분은 모두 자연으로 돌아갔지만 만이 썩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1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볼로냐의 귀도 추기경이 유해를 다시 한 번 확인했지만, 여전히 썩지 않은 혀는 따로 꺼내어져 성유물 상자에 보관되었고, 지금까지 계속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1946년 1월 16일에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3.1. 어새신 크리드 2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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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은 안토니오 데 마자니스(Antonio de Magianis).[4]

생년월일: 1443년

베네치아 출신의 도둑으로 토박이 도둑으로 베네치아 도둑들중 고학력자라 대장 노룻을 하고 있으며 로사의 선생이기도 한다. 귀족집에서 부엌일을 하는 아버지와 하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학자의 길을 걸으려고 했지만 미천한 신분이라는 이유로 대학 입학이 불허되자 결국 도둑이 된 케이스로 이후 카를로 그리말디를 암살하는 시퀸스에서 에지오와 함께 거리를 걸어가면서 귀족들만 베네치아를 지키는줄 알고 있다는 냉소적인 대답을 한다.

에지오 아디토레 덕분에 다리가 부상당한 로사를 재때에 치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에지오를 도와주게된다. 일단 에지오의 경우 에밀리오 바바리고의 암살이고 안토니오의 경우 에밀리오의 횡포 아래에 놓여있는 시장의 자유였기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이후 자신의 부하를 풀어 에지오가 하는 일을 도와준다. 그예로 에지오가 레오나도르의 비행기로 팔라쪼 두칼레 안에 있던 카를로 그리말디를 암살하는데 도움을 준다.

도둑답지 않게 꽤 사교적이며 인간관계도 꽤넓어 베네치아의 매춘관인 라 로사 델리 비르투를 경영하는 있는 오도라와 그런듯한 관계이며 고스티노 바바리고와도 잘 알고있는 관계라 마르코 바바리고를 암살한 직후 에지오에게 소개해 실비오 바바리고단테 모로가 카스텔로구로 가 그곳을 함락시킨 것과 병사를 모으려면 카스텔로 구에 체류하고 있던 용병 대장인 바르톨로메오 드알비노를 소개시킨다. 이후 출현이 없는줄 알았지만 보르지아 레이드때 모습을 들어내 암살단이라는 것을 밝히고 이후 빌라 아디토레에서 그렌드 마스터였던 마리오 아디토레의 집무실에서 서있는 것을 기점으로 브라더후드에서는 등장이 없다.베네치아랑 로마랑 거리가 좀 많이 있지 다만 소설판에서는 에지오와 함께 스페인에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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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마태오 복음서 19장 21절~26절.
  • [2] 아리우스파 이단의 위협을 피해 안토니오에게로 도피한 총대주교 아타나시오를 보호했고, 이때 안토니오와 같이 생활하면서 아타나시오는 그의 전기를 작성하게 된다. 참고로 아타나시오도 성인으로, 축일은 5월 2일이다.
  • [3] 이들의 순교 과정은 프란치스코 항목 참고. 사실 페르난도는 모로코로 가는 길에 성 십자가 수도회에 들른 5명의 수도자와 만난 적이 있었다.
  • [4] 어쌔신 크리드 : 르네상스라는 소설에서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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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3 00: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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