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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들롱

last modified: 2015-03-13 14:40:52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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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ain Delon.

본명은 길다. 알랭 파비앵 모리스 마르셀 들롱(Alain Fabien Maurice Marcel Delon).

Contents

1. 소개
2. 인성
3. 작품들


1. 소개


1935년 11월 8일 프랑스 출생의 영화배우이자 전 지구적 꽃미남. 70년대 미남의 대명사. 원조 옴므 파탈

한국에서는 "아랑 드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었다. 영화 수입업자들이 일본식 발음대로 표기하다보니 대중들도 이렇게 발음하게 된 듯. 필름 누아르가 전성기였던 1970년대에는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 있는 외국 남자배우였다(할리우드 배우들을 포함하더라도). [1]

1935년 11월 8일 프랑스 일드프랑스의 소에서 태어났다. 4살 때 부모님이 갈라섰고, 재혼한 어머니와 살았으나 계부와 잦은 갈등을 빚었다. 유복하지 못했던 유년기 때문인지 가톨릭 학교를 다녔지만 행실 불량으로 여러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걔중에는 신학에 대한 그의 적성을 알아본 교사들이 그에게 사제직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랭은 14살에 학교를 떠나 짧은 기간 동안 계부의 정육점에서 일했다. 17살엔 외인부대의 낙하산 부대로 자진 입대하여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으나 규율 불량으로 11개월 간 군 감옥에 갇혀 있기도 했다. 결국 불명예 제대 후 세계 각지를 떠돌다 1956년 프랑스로 돌아온다. 수중에 돈이 없던 그는 웨이터, 짐꾼, 비서, 점원 등 갖은 잡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이때 여배우 브리짓 오버와 친분을 쌓게 된다. 이후 그녀와 함께 칸 영화제를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미국의 영화 제작자 데이빗.O 셀즈닉(1902~1965)에게 발탁된다.

스크린 테스트 후 셀즈닉은 그에게 영어 교육을 제공하고 계약을 제안한다. 하지만 파리로 돌아온 그는 프랑스의 Y.알레그 감독을 만나게 되고, 고국에서 경력을 쌓으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셀즈닉과의 계약 파기 후 Y.알레그 감독의 영화 1957년 "여자가 다가올 때"로 데뷔한다. 이후 "사랑은 오직 한 길(Christine)", "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로 인기를 얻고, 공전의 히트작 태양은 가득히로 세계적인 톱스타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후에도 수없이 리메이크 된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은 잘생기고 위험한 남자 "톰 리플리" 역을 맡아 다부진 몸과 매혹적인 눈빛으로 전 세계 여성을 사로잡았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머님 세대에서 미남 배우는 단연 알랭 들롱이었다. 외모만 잘생긴 배우가 아니라 연기력도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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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 마리 라포레에게 키스하는매의 눈빛

워낙에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인지라 여성 편력 역시 화려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의 여배우 미 슈나이더와의 스캔들.[2] 1958년 그는 영화 "사랑은 오직 한 길"에서 호흡을 맞춘 독일 영화계의 스타 히로인 로미 슈나이더와 사랑에 빠져 약혼했지만, 오래가지 못해 결별했고 로미 슈나이더는 죽을 때까지 알랭 들롱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브리짓 바르도, 미레이유 다르크, 마리안느 페이스풀과 연애를 했다. 공식적으로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본부인 나탈리 들롱과의 사이에서 낳은 공식적 장남 안토니 들롱은 배우로 활동 중이며, 네덜란드계 모델 로잘리 반 브레멘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아들도 연예계 준비 중이라고. 또한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얼굴마담~ 멤버였던 니코와의 사이에서 실제적 장남 크리스티앙 아론(아리)을 낳았다. 그러나 알랭 들롱은 친자 인정 소송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론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정작 이 사생아가 알랭 들롱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이 아이러니. 아이들 얼굴을 비교해놓은 샷들을 보면 이 사생아가 빼도 박도 못하게 닮았는데 알랭 들롱은 끝까지 자기 아들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확인 소송에서 친자 아니라고 인정받았다는데 어떻게 인정받았는지 불가사의할 정도(...)

우울하면서도 차가운 특유의 매력과 싸늘한 미모로 이후에는 주로 느와르에 출연했으며 "프렌치 느와르"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푹 눌러쓴 중절모, 깃을 세운 트렌치 코트를 입고 범죄자를 주로 연기했으며 이런 모습은 밤의 암살자, "시실리안", "암흑가의 두 사람", "암흑가의 세 사람", "볼사리노", "고독한 추적" 등에서 볼 수 있다. 미남 배우의 대명사지만, 알랭 들롱은 로버트 테일러나 로렌스 올리비에 같은 귀족적인 미모와 거리가 멀다. 기품이라든가 선량함과는 거리가 있는 외모. 아마 어렸을 적 질풍 노도의 시기 때문인 듯 싶다. 그래서 그는 대개 밑바닥 인생을 주로 연기했는데 그게 또 잘 어울린다.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책에 "알랭 들롱은 미남이다. 그러나 왠지 풍기는 분위기가 천하다"라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이후 1998년 <절반의 기회>를 끝으로 "프랑스 영화는 죽었다"고 선언하며 돌연 은퇴한 그는 영화 출연보다는 영화 제작과 복싱 프로모터로 활약했는데, 2008년에 <아스테릭스 : 미션 올림픽 게임>에서 백발이 성성한 시저 역으로 오랜만에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었다.

외모도 신의 축복을 받았지만 목소리도 신의 축복을 받았는지 가수 제의도 자주 받았고, 나중에는 미스 이집트 출신의 가수 Dalida와 "Paroles Paroles" 라는 곡의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우리 나라에선 무이자송으로 불리는 굴욕을 맛봤지만... 아래는 셀린 디옹과 함께 부른 "빠로레 빠로레".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 시상자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젊은 시절에 배가 고파서 레스토랑 앞에 우두커니 서 있으면 종업원이 그를 불러 공짜 밥을 먹여주기도 하고 옷가게 점원이 공짜로 옷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미모를 보면 그럴 법도 하다. 젊은 시절엔 차가운 꽃미남, 조각미남이었으나 현재는 미중년을 거쳐 미노년으로 진화.


2. 인성

하지만 미모에 비해 인성이 심각하게 개거지라는 점은 누구나 공인하는 사실(.......) '젊었을 때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그녀들의 사랑이 나를 배우로 만들어줬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속뜻은 '여자 등쳐먹고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한 게 그가 거친 줄리엣 그레코, 로미 슈나이더 등은 모두 만났을 당시 알랭보다 훨씬 성공한 스타였음에도 무명 시절 알랭을 진심으로 사랑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고 나서는 몇년 후 차였다. 성공의 발판으로 삼고 나서 전 여친을 차버리는 행각(새 작품마다 갈아치우진 않았다)에도 불구하고 희한한 점은 그녀들 중 알랭 들롱을 나쁘게 표현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 찌질한 남자들이 여자들을 상대로 '나 나쁜 남자니까 좋아했다간 상처받는다'는 개드립 치기도 하지만 본인이 나쁜남자라고 자처하는 이런 놈들은 거의 대부분이 명확한 찌질이로, 150% 여자들에게 주제 파악 못한다고 뒷담까이는데 비해 알랭 들롱과 헤어진 여성들은 하나같이 그를 진심 사랑했고 잘 되길 응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야 말로 원조 나쁜 남자이자 마성의 옴므 파탈. 여기서 잠시, 그가 전 약혼녀 미 슈나이더를 파멸로 이끌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의 관계는 로미가 먼저 파혼을 선언함으로서 5년 만에 끝이 났다.[3]

하지만 로미가 알랭을 찼다는 위의 말이 오히려 잘못된 것으로, 파혼은 알랭 들롱에게 새 여자가 생겼기 때문에 알랭이 먼저 통보한 것이었다. 말 그대로 일방적인 통보로 쇼크를 받은 로미는 자살미수 등 장기간 이별 후유증에 심각하게 시달려야 했다. 알랭이 로미를 차버리게 만든 여자가 바로 아내가 된 나탈리 들롱으로, 이미 나탈리와의 밀월이나 애정행각이 언론에 드러나면서 눈치를 챘었다고 파혼 후 인터뷰에서 로미가 직접 언급한 바 있다. 로미가 '내 삶은 그를 잊지 못해 추락했다'며 평생 그를 그리워했다는 후일담이 있지만, 로미는 이후 다른 남성과 2번의 결혼을 하였다.[4] 이 이별 후유증 때문에 주변인들이 심각하게 걱정하고 인기도 떨어지고 자신감 상실로 완전히 변해 여러 남자를 전전하면서도 계속 안정된 연애나 결혼에 실패한 로미 슈나이더는 그럼에도 알랭에게 싫은 소리나 원망도 못 했고, 평생 친구로 남으려 애를 썼다.

그리고 자기 포장과 언플에 능수능란한 것도 유명한 사실. 탈세 혐의 등으로 비난받으면서도 프랑스에서도 자신을 3인칭으로 칭하면서 '그는~', '알랭 들롱은~' 등으로 자신을 부르며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내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데 60년대에는 보디가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불려다니면서도 미디어와 공화국 대통령을 상대로 편지를 보내 거창한 말로 자신이 무죄임을 항변한 바 있다. 그러나 사건 당시 영화를 찍고 있었다던 그의 증언과, 막판에 결정적인 증거 부족과 함께 사건에 연계된 권력층 때문에 알랭은 7년 간의 공판 끝에 결국 무죄로 판명이 났다. 그러나 살해당한 보디가드가 남긴 편지(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알랭 들롱과 나의 부하 프랑수아 마르칸토니(*당시 갱단의 일원)에게 물어달라.")와 구속 직전까지 고려했던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됐을 정도로 그는 유력한 용의자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종결 후에도 마피아의 압력으로 경찰이 수사를 중단했다는 등의 무수한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이 계속되는 스캔들과 사건에 대한 연루 덕분에 그는 프랑스 언론의 도마에 자주 오르내렸다. 한국 방문[5] 시기 프랑스 언론은 그에 대해 아시아 방문하러 간다는데 거기서는 어떤 싸가지로 욕 먹나 봅시다. '역시나 알랭 들롱의 행실은 유럽 밖에서도 돋보였습니다. 자기가 황제인 줄 알았다네요.' 라고 보도하는 등 호의적이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92년 동아일보에서는 그를 '세련된 용모와 매너를 겸비한 배우'라고 보도한 바 있다.당시 통역을 맡은 이다도시의 책에 따르면,그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사람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이다도시에게 같은 나라 사람이니 좀 진정시켜봐라고 하기에 냅다 '나 한국 사람인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그래도 혼자 발광하다가 이다도시에게 사랑때문에 한국에 왔냐면서 분을 풀더라고.

이혼한 부인 나탈리(결혼 전후로 여러 명의 여인과 관계가 있었지만 결혼한 사람은 나탈리 한 명이다)가 있었고, 나탈리와 낳은 아들 안소니 들롱도 있다. 안소니 들롱은 젊었을 때는 '엄마 아빠의 못생긴 점만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중년이 되자 그래도 아버지의 중후한 풍모가 외모에서 배어 나온다. 헐리우드에서 일하지만 인지도나 인기는 그저 그런 정도.

참고로 그가 연기한 역할 중에 실제 알랭 들롱의 성격과 가장 닮은 캐릭터는 야망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냉혹한 청년 '톰 리플리'라고 한다. 이것만 봐도 성격은 말 안 해도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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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영화 카사노바에서 나이가 든 카사노바 역을 맡았는데 당시 최고 개런티급인 7백만 프랑을 받았다. 이를 두고 프랑스 언론은 한물 간 배우에게 무지막지한 개런티를 들인다며 제작자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흥행 역시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1999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여 현재는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당시 로망드 TV에 출현하여 귀화 및 이민 동기를 밝혔는데 스위스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재산 보호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부[6]와 프랑스 사회 전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스위스 귀화의 변이나 마초적 성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치적 스탠스는 철저한 우파이다. 1980년 프랑스 대선에서는 집권 보수여당인 민주연합 레리 지스카르 데 스탱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며 사회당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에게 매카시즘성 인신공격을 해 빈축을 사기도 했고, 나이가 들면서 더 극우화되어 2013년 10월에는 좌경화된 프랑스를 제 자리로 돌려놓을 정당이라면서 국민전선 지지를 선언했다.

여담으로 그의 일본판 전속성우는 故 노자와 나치가 담당했었다.전속성우의 이름이 참 적절하다

3. 작품들


알랭 들롱을 스타덤에 올린 대표작

  • 로코와 그의 형제들 1960년작.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로, 박관념의 후속작.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주연은 버트 랭카스터이고, 그 다음 비중이 높은 조역을 맡았다. 극중 알랭 들롱의 파트너는 1960년대의 섹스 심볼이었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근대 유럽이 배경이다. 알랭 들롱은 버트 랭카스터가 맡은 구시대의 공작와는 반대 일로를 걷는 떠오르는 신흥 귀족(!)으로 출연한다.

  • 강 건너 텍사스 Texas across the river 1964년
들롱의 영화 중 드문 코메디. 마틴과 함께 포복절도할 서부 소동극을 그린다. 국내 TV주말 영화 시간에도 여러 번 방송되었다. 그의 절정의 미모를 감상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한 암살자로 나오는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 나중에 고스트 독에서도 패러되되었다.

  • 아듀 라미 1968년작.
찰스 브론슨과 함께 열연했는데, 갑자기 둘 다 웃통을 벗고 근육을 드러내는 장면이 뜬금없이 드러나있다. 이 영화 이후로 성냥불은 입으로 빨아들여서 끄는 게 유행했다.

롤링 스톤즈 재거의 실제 연인이었던 리안 페이스풀이 등장. 여기서 결혼을 앞둔 그녀를 꼬시고 검열삭제하고 계속 불륜을 저지르는 나쁜 남자로 나온다.

  • 시실리안 1968년작
평범한 유로 크라임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로, 여기서 콧수염을 달고 나온다. 원래는 다른 제목인데, 암흑가의 두 사람(1973년작)이 먼저 나와서 이렇게 되었다. 2011년 리메이크한다고 하는데, 알랭 들롱도 출연한다고...

  • 볼사리노 1970년작.
평범한 하드보일드 영화.

리스본 특급이라고도 하고, 불타는 마약단이라고도 한다. 장 피에르 멜빌의 유작. 리처드 크레나와 함께 열연한다.

  • 레드 선 1971년작.
007시리즈와 바라키로 유명한 테런스 영(흑역사로 오! 인천이 있다)감독의 영화. 찰스 브론슨, 미후네 토시로와 함께 나온다.

  • 트로츠키 암살(The Assassination Of Trotsky)1972
    전 약혼녀 로미 슈나이더와 같이 찍은 3번째 영화. 로미는 열혈 트로츠키 추종자, 알랭은 스탈린의 명으로 트로츠키를 암살하려고 로미를 유혹해 이용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 암흑가의 두 사람 1973년작. (Deux hommes dans la ville)[8]
호세 지오바니 감독. 갱생을 다짐한 전과자가 출소후 편견에 사로잡힌 형사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형사를 우발적으로 살해, 단두대에 의해 처형된다는 내용. 이 영화는 사형폐지의 입장에서 전과자가 다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이 영화의 파장이 대단해서 프랑스에서 사형폐지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9] 여기서 주인공을 돕는 보호감찰관역으로 장 가뱅(4~50년대를 풍미한 프랑스 배우. 망향의 주인공)이 함께 나온다. 한국에는 이게 먼저 소개되어서,레드 써클은 암흑가의 세 사람으로 수입되었다(...)

우리가 아는 그 조로가 맞다.

  • 고독한 추적 1976년작.
무슈 클라인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있다. 조제프 로지 감독의 영화로, 미술품 거래인이 비시 정권하에서 유태인으로 오해받는다는 내용.

  • 에어포트 79 1979년작.
  • 분노는 오렌지처럼 파랗다 1988년작.
  • 누벨 바그 1990년작.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작품.

  • 카사노바 1992년작.
  • 아스테릭스: 미션 올림픽 게임 2008년작.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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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80년대 초반까지도 '아랑드롱 같다'는 표현이 '잘생겼다' 대신 널리 쓰였을 정도.
  • [2] 들롱의 유일한 결혼생활은 나탈리 들롱과의 몇 년이었으며, 다른 여인들은 약혼녀거나 동거인이었다.
  • [3] 로미의 파혼 선언에 알랭이 눈물을 쏟았다는 일화는 당시 연예 일보의 인기 가십거리였다.
  • [4] 그러나 2번의 결혼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아들마저 사고로 사망한 뒤 우울증을 앓던 그녀는 사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채 발견된다.
  • [5] 1996년 자신의 이름을 딴 코냑과 화장품 홍보차 한국을 방문하였고 팬 사인회를 가졌다.
  • [6] 개그인 것은 1999년 당시 프랑스의 대통령은 중도우파인 크 시라크였다는 것이다.이원집정부제 때문에 그가 핑계거리로 삼은 조세정책을 추진하던 국무총리가 사회당의 오넬 조스팽이긴 했지만
  • [7] 나중에 헐리웃에서 맷 데이먼 주연의 'Talented Mr. Reply' 라는 제목으로 2000년에 리메이크 됨
  • [8] 원제의 뜻은 그냥 "도시의 두사람"인데..이렇게 번역을 하니 꼭 느와르냄새가 난다. 그러나 이작품은 느와르가 아니다.
  • [9] 결국 1977년 프랑스에서 사형은 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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