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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

역대 마케도니아 왕조 국왕
필리포스 2세 알렉산드로스 3세 필리포스 3세 &
알렉산드로스 4세 (공동왕)

(ɔ) Ruthven (talk · contribs) from
Μέγας Ἀλέξανδρος (그리스어) / Alexander the great (영어)
생몰 : B.C. 356년 ~ B.C. 323년 마케도니아의 전제군주 헬레니즘 제국의 창시자

"만약 그가 신이 되고 싶다면, 우리는 그저 신이라고 불러주는 수밖에."[1]

정확히 말하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Ἀλέξανδρος Γ' ο Μέγας). 영어식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으로 더 유명하다. 하지만 진정한 영어식 발음은 앨리그잰더, 알렉산더는 독일식 발음이다. 아랍어권에서는 이를 음역한 이스칸다르(الإسكندر)라고 부른다.[2]

뛰어난 능력으로 당대 최강대국들을 분쇄해버린 고대 시대 최강의 정복군주.

Contents

1. 개요
1.1. 즉위
1.2. 페르시아 원정의 시작
1.3. 이소스 전투
1.4. 시리아와 이집트 정복
1.5. 가우가멜라 전투
1.6. 다리우스 추격
1.7. 페르시아 제국의 동쪽 끝으로
1.8. 인도 정벌의 착수
1.9. 병사들의 파업과 철군
1.10. 말로
1.11. 사후, 분열
2. 사상과 사생활
2.1. 인품
2.2. 사생활
2.3. 외모의 문제
3. 후대의 평가
3.1. 이란에서의 평가
4. 대중문화 속의 대왕

1. 개요

그리스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 겸 제2대 코린토스 동맹 의장.
알렉산드로스는 즉위한 직후부터 무서움을 보여 주었는데 그가 즉위한 그해에 아버지였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코린토스 동맹을 맺은 고대 그리스 국가중 하나였던 테베가 이러한 어린왕의 즉위에 틈타 "마케도니아에 어린아이가 올랐으니 혼란스러울거라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했음은 물론 테베를 그리스 지도에서 영원히 소멸시켜 버렸다...

또한 동쪽으로 오랫동안 그리스 영토를 칩입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아케메네스 혈통을 없애고 페르시아 제국의 통지자가 된 것도 모자라,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이집트 왕의 호칭인 파라오가 되었고, 나아가 지금의 인도 부근까지 정벌하여 고대 그리스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한 인물이다. 게다가 페르시아를 박살낸 기간만 따지면 고작 8년으로 정복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에선 영어 발음인 알렉산더 대왕으로 통용된다. 그의 스승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로 손꼽힌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참고로 아리스토텔리스의 스승은 플라톤이며 플라톤의 스승은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다.
즉 알렉산드로스3세는 소크라테스의 증손제자에 해당된다.

1.1. 즉위

마케도니아필리포스 2세의 아들로 아버지가 그리스를 제패한 뒤 암살당하면서 약관 20세(탄생년도가 336년, 필리포스 2세의 사망년도가 356년)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사실 필리포스 2세가 너무 절묘한 시기에 암살당한 탓에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암살의 배후가 아니냐는 의혹이 당대에도 제기되긴 했다. 필리포스 2세가 애첩에게서 낳은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위기감을 느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암살을 사주했을거란 소문이 나돌았지만. 증거가 없는 관계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왕위에 즉위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하자마자 보여준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을 감안한다면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필리포스 2세가 꺼린 것이 이상한 일이지만 그때까지 알렉산드로스는 아직 소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군사적 중책을 맡은 적은 없었고 따라서 필리포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전설적인 군사적 재능을 완전히 꿰뚫어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당시의 정세를 감안하면 어쩌면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를 다른 후계자로 교체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할 가능성이 충분한 상태였다.

우선 알렉산드로스는 사춘기로 접어들면서부터 필리포스 2세와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순수한 마케도니아인이 아닌 혼혈인 반면[3] 필리포스의 후실이었던 클레오파트라[4]가 낳은 아이는 순수한 귀족 마케도니아인이었다. 이 때문인지 필리포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때 필리포스의 측근이자 클레오파트라의 삼촌이었던 아툴루스라는 장군은 '이 결합으로 인해 마케도니아의 훌륭한 후계자가 태어나길 바랍니다'라고 축원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알렉산드로스는 분노하여 '넌 내가 안보이냐'라고 소리를 친 뒤 술잔을 던졌는데 이에 분개한 필리포스는 알렉산드로스를 향해 칼을 빼들기도 하였다. 그 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어머니는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후에 클레오파트라가 사내아이를 낳았고 이대로 가다간 알렉산드로스의 왕위계승은 절망적인 상황이나 다름없어보였다. 그러던 것이 필리포스가 암살을 당함으로써 극적으로 반전이 된다. 사실상 필리포스의 암살은 알렉산드로스에겐 대단한 횡재였는데 이 때문에 증거는 없지만 현재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반쯤 암살범 취급 당하는 중.

필리포스가 죽었을 당시 그는 누구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내분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군대가 알렉산드로스를 왕으로 지지하였고 따라서 그는 마케도니아 왕으로 등극한다. 그가 군대의 신임을 얻은 이유는 그나마 다른 왕자에 비해 필리포스의 군에 종군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필리포스가 테베아테네의 연합군을 꺾은 카이로니아 전투에선 알렉산드로스가 좌익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오르자 자신과 왕위 계승을 다퉜던 왕자들을 모두 죽였는데 이를 보면 그의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알 수 있다.[5] 특히 알렉산드로스에게 가장 위협이 되었던 애첩 클레오파트라는 딸과 함께 산채로 태워죽었다고 한다. 물론 이건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가 제멋대로 저지른 일로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듣고 노발대발 하였다.

클레오파트라를 붙여준데다 추방의 계기가 되었던 축사를 해서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던 장군 아툴루스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가족 전체가 쑥대밭이 된다. 우선 아툴루스는 처형당하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죽음을 당한다. 그의 아들만이 용서받았는데 그 이유는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가 그에게 독을 먹여 정신이상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실컷 분풀이를 끝낸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그리스 전체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괴물급인 필리포스 2세가 죽고 겨우 20세에 불과한 애송이가 왕위에 올랐으니 반란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필리포스 2세에게 개발살난 뒤 강제로 린트 동맹으로 묶여있었다. 이때 알렉산드로스의 측근들은 모두 외교로 해결하라고 조언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기병 3천명만 이끌고 신속히 남하한다. 이러한 전격전으로 인해 마케도니아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폴리스인 테살리아가 가장 먼저 제압당했고 테살리아의 병력을 인수한 알렉산드로스가 남하하자 모든 그리스의 도시들이 사절을 보내 용서를 구하고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에게 모두 죄를 묻지 않는 선처를 베푼다.

일년 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를 공격하기 전에 우선 북쪽 국경을 안전하게 해두고 싶어서 지금의 이스탄불 북동쪽에 위치한 트라키아인들을 공격하여 제압해둔 뒤 도나우 강까지 올라가 그 곳에 위치하고 있던 게타이(훗날의 다키아) 부족을 격파한다. 그때 일리리아(그리스의 서쪽, 이탈리아와 아드리안 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알렉산드로스는 즉각 그 지역으로 이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세력을 모두 진압한다. 그때 알렉산드로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그리스에서 퍼졌고 따라서 테베가 반란을 선동하고 여기에 편승해 아테네도 반란에 참여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즉각 남하하여 우선 테베를 포위했는데 테베인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테베는 점령당했고 알렉산드로스는 테베를 완전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버려 아테네와 쌍벽을 이루었던 강력한 도시인 테베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다만 시인 핀타로스의 집은 부하들에게 절대로 파괴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참고로 테베는 옛날에 페르시아 전쟁때도 페르시아의 편을 들었다가 실익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는 헛소문만 믿고 억지만 부리다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제대로 박살이 나버렸다. 상황 파악을 전혀 못하고 기분에 따라서만 일을 처리하면 어떤낭패를 보는지 알려주는 좋은 경우라고 할수있다. 아테네의 경우는 테베가 처참하게 완전히 박살난 사실을 확인하고는 무조건 정말로 항복하며 알렉산더 대왕은 아테네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하게 대해줬다고 한다. 확실한 사실은 알렉산더 대왕이 아테네를 파괴했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는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2. 페르시아 원정의 시작

저런 바쁜 군사활동을 단 일년만에 마무리 지은 알렉산드로스는 다음해에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를 건넌다(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를 가르는 좁은 해협, 페르시아의 크레스크세스가 대군을 이끌고 건넜던 바로 그 곳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상륙하자 그 지방의 페르시아 사트라프(태수)들은 각각의 군대를 끌고 나와 합류한 다음 그라니쿠스라는 곳에서 알렉산드로스와 조우하였다. 이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포진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부하장수들은 밤에 강의 상류 지역으로 올라가 건너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허를 찌르기 위해 자신의 기병대로 즉각 도강하여 공격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대담하게 강을 건너 공격할 줄은 예상못한 페르시아군은 완전히 격파되고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에서의 첫 전투를 대승으로 마무리 짓는다.

이 싸움의 승리로 인해 아나톨리아의 서부 지역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보단 그리스와 친한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계 폴리스들을 회유[6]하며 거침없이 남하한다. 그는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을 해안선을 따라 쭉 돌면서 점령하며 내려왔는데 이는 항구도시들을 모두 장악함으로써 페르시아 해군을 고사시키기 위해서였다. 마케도니아군은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만이 페르시아 해군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페르시아 해군은 그리스 출신의 멤논이라는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마케도니아군의 보급선을 끊으려 했으나 거의 성공할 무렵 멤논이 갑자기 병으로 죽은 데다 항구도시들이 마케도니아군에게 점령되면서 해체되었다.

이렇게 점령하는 동안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썰어서 풀어 전차를 득템한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즉 '이거 푸는 사람이 짱먹음'이라는 말에 풀다 짜증난 알렉산드로스가 칼로 치고 세계를 정복했다는 이야기.

1.3. 이소스 전투

아나톨리아 서부를 제압한 뒤 겨울을 나고 23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봄이 되자 시리아 쪽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시리아에 진입하기 위한 관문인 이소스라는 곳에서 그는 다리우스 3세가 그동안 열심히 모아 두었던 페르시아의 대군과 조우한다.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였고 총 병력은 11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4만여 병력이었기 때문에 병력상으론 알렉산드로스가 불리하였다.

그러나 이소스는 의외로 좁은 평야였고 따라서 적은 병력을 가진 알렉산드로스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다리우스가 굳이 이런 곳에서 싸우기로 한 이유는 불명확하다. 아마도 다리우스가 병력의 우세에 우쭐했을 수도 있고 다리우스가 터키 지역의 침략을 일년간이나 방관한 것을 변명하기 위해 조급하게 싸움을 서둘렀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학자들에 따르면 페니키아 지역에 있는 도시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접근으로 인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고 하였는데 이는 즉 다리우스가 늑장을 부린 것 때문에 그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이소스 전투초기에 다리우스 자신의 병력을 강 북쪽으로 포진시킨 뒤 알렉산드로스가 강을 건너면 공격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소스에 포진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터키 지역과 그의 본대의 길목을 차단하였으므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주문대로 강건너 공격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초기엔 다리우스가 유리한 입장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전투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는데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숫적으로나 전황으로나 불리한 상황을 보고 다리우스를 직접 노리기로 하였고 이 전술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다리우스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노리기 위해 보병의 우익에게 명령하여 페르시아군을 최대한 밀어내게 하였다.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가 그 긴창을 이용해 잘 밀어내자 페르시아 좌익과 중앙에 약간의 틈이 생겼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정예기병인 헤타이로이을 쐐기 대형으로 짠 뒤 자신이 그 꼭지점에 위치한 뒤 그대로 그 틈을 통과하여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에 다리우스는 혼비백산하여 달아났고 최고 사령관이 도주한 것을 본 페르시아군은 혼란에 빠져 격파당하고 만다. 이 전투는 후에 망치와 모루 전술의 기반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전투 후 다리우스의 어머니, 아내, 딸들을 모두 사로잡았는데 그는 이들 가족을 매우 정중하게 대우하였다고 한다. 특히 다리우스의 아내는 역사서에 당대 최고의 미녀라는 기록이 남겨진 분인데 생포된 뒤 일년뒤 사산으로 목숨을 잃는다. 증거는 없으나 그 아이가 알렉산드로스의 아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생포된 다리우스의 두 딸 중 한명은 그대로 알렉산드로스의 아내가 되고 다른 한명은 알렉산드로스의 동성애자 상대로 알려진 헤파이스티온의 아내가 된다.

이소스의 패배 뒤 다리우스 3세는 강화를 제의하는데 이 제의는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땅을 몽땅 양보한다는 것에 자신의 가족의 몸값으로 1만 탈렌트를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으로 치면 대략 3천억원에 해당되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거절하며 자신은 아시아의 왕이므로 영토 분할은 자신의 권한이라고 답한다. 그의 마음속엔 이미 그가 페르시아의 왕이 된 것...이때 부하 장군인 파르메니온과의 대화도 유명한데 파르메니온은 '제가 알렉산드로스 왕이면 이 강화를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내가 파르메니온이었으면 그랬겠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1.4. 시리아와 이집트 정복

이수스의 패배로 인해 시리아는 완전히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이 지역을 휩쓴다. 다음 해에 24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로 남하하였는데 이때 티레와 가자와 같은 도시들은 격렬하게 농성을 하였으나 모두 격파되고 이들 도시의 시민들은 모두 노예로 팔리고 만다. 도시 티레의 공성전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데 알렉산드로스는 이 공성전을 직접 지휘하면서 그가 회전 뿐만 아니라 공성전에서도 대단한 능력을 지닌 무결점 지휘관임을 입증하였다. 티레는 섬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공략하기 위해 인공 길을 바다위에 만들고, 50미터에 해당되는 공성탑을 건설하고, 배에 공성충차를 실어 성벽을 타격하는 등 온갖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면서 이 도시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7] 이때 또다른 대도시인 예루살렘은 성문을 열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즉각 항복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반감때문에 그리하였다고. 로마 시대의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기록하길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다니엘 서를 접하고 이 서에 알렉산드로스가 그가 아시아를 제패하고 그의 사후 나라가 네개로 갈라질 것이라는 예언을 전해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이집트에 도착한 알렉산드로스는 그가 필리포스의 아들이 아닌 아몬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는 이 신탁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자신이 제우스 신의 아들(그리스 인들에게 제우스 신은 아몬과 동일 신으로 여겨졌다.)이라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것을 기념하는 동전[8]까지 발행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각은 마케도니아 장군들을 곤혹스럽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들 대부분이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 필리포스에 의해 발탁된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1.5. 가우가멜라 전투

다음해에 25세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에서 나와 동쪽을 향해 진군한다.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짜내 모은 9만 여의 병력을 이끌고 가우가멜라라는 곳에서 알렉산드로스에 맞선다. 이 전투에서 다리우스는 이수스때처럼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에게 돌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부대의 정예기병으로 알렉산드로스의 헤타이로이를 견제하도록 한 뒤 자신의 우세한 병력으로 마케도니아 군을 찌부려뜨리는 전술을 짠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헤타이로이 부대가 견제당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우익 끝까지 이동하여 페르시아의 별동대를 중앙에서 멀어지게끔 유인한다. 중앙군을 남기고 우측이 떨어져나가자 중앙군의 옆에 틈이 생겼고, 필연적으로 다리우스의 위치가 노출되었다. 이때 우익으로 유인된 헤타이로이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은 페르시아 기병은 우익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던 마케도니아 보병의 공격에 붙들리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헤타이로이 기병은 그 견제에서 벗어나 방해받지 않고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수스 때처럼 다리우스는 또다시 공황에 빠져 달아났는데 이로 인해 승부가 또 결정되고 말았다.

이소스 때와 마찬가지로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도 다리우스가 도망치기 전까진 페르시아군이 꽤 우세하였는데 특히 마케도니아의 좌익은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따라서 다리우스가 죽음을 각오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돌진에 과감히 대항하였으면 그토록 어이없게 패배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꽤 겁이 많은 성격을 가졌는지 조금만 위협받으면 바로 도망쳤는데 그로써 알렉산드로스에게 손쉬운 승리를 선사한다.

이렇게 다리우스의 겁이 많은 성격은 전투시 가장 선두에 서는 알렉산드로스와 대조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예 한술 더떠 이소스나 가우가멜라 전투에선 헤타이로이 기병대를 쐐기 대형으로 짠뒤 자신이 그 꼭지점의 끝에 자리잡고 적진을 항해 돌격하였다. 쐐기 대형의 꼭지점 끝은 당연하게도 사망할 확률이 제일 높은 위험한 자리이다.[9]

물론 이러한 위험한 행동은 마케도니아 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는데 특히 직접 지휘받는 헤타이로이의 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았다. 왕이 직접 가장 선두 끝에서 돌격을 이끄는데 누가 용기를 얻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헤타이로이 기병은 전투시 대단히 용맹하였고 그 때문에 그들이 이소스, 가우가멜라 전투의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가우가멜라의 패배로 다리우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이제 페르시아는 재기불능이 된 것이었다. 가우가멜라에서 동원한 병력은 다리우스가 동원할 수 있는 마지막 군대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꼭 사로잡고 싶었기 때문에 도망가는 다리우스를 맹추격한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달아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지 단숨에 자그로스 산맥을 돌파한 뒤 동쪽으로 자취를 감춘다. 다리우스를 놓힌 알렉산드로스는 대신 남하하여 바빌론에 입성한다.

바빌론을 방문한 뒤에 알렉산드로스는 수사에 입성한 뒤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여 페르세폴리스에 진입한다. 페르세폴리스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크세스크세스의 거대한 석상을 때려부순다. 뒤이어 페르세폴리스에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전쟁때 아테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복수로 고의로 방화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왕궁에서 창녀들을 데리고 파티를 벌이던 중, 타이스라는 이름의 한 창녀와 내기를 벌이다 불을 놓는 바람에 페르세폴리스가 전소되어 괴멸했다는 것이 있다. 페르시아의 후예라 자부하는 이란에서는 거의 정설로 믿고 있는 듯. 다른 설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애인을 유혹할 속셈으로 페르세폴리스에 불을 놨다는 이야기도 있다. 혹은 실수였다는 설도 있고 바빌론을 수도로 삼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랬다는 설도 있으나 영국 BBC에서 만든 알렉산드로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화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적어도 우발적인 방화는 아니라는 것.

1.6. 다리우스 추격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여 다리우스의 추격에 나선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추격하는 대신 페르세폴리스에서 페르시아를 정복했다고 선언한 뒤 외교를 통해 페르시아 태수들을 회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리우스를 생포하는 것에 집착하였는데 그 이유는 다리우스에게 정식으로 양위를 받아 페르시아 황제가 되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선양??

다리우스는 동쪽으로 달아나 다시 한번 병력을 모아 알렉산드로스와 대결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이미 다리우스에 대해 진절머리가 난 부하들이 다리우스를 배신하여 그를 사로잡는다. 이 반란을 지휘한 자의 이름은 베수스였는데 그는 다리우스의 친척이자 다리우스 외엔 가장 왕위 계승권에 가까운 유력 영주였다. 그는 다리우스의 지휘 능력에 대해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이것은 다른 다리우스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에 따라 베수스는 다리우스에게 자신이 다리우스 대신 군대를 지휘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를 이긴 뒤 다리우스에게 지휘권을 돌려주겠다고 말하였다. 다리우스는 이를 거절하였고 그러자 베수스와 그를 지지하는 장교들은 다리우스를 포로로 잡는다. 베수스는 다리우스를 소가 끄는 우마차 감옥에 억류해 두었는데 그때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작은 규모의 호위군과 함께 근처에 당도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혼란에 빠진 베수스는 달아났는데 이때 감옥에 있던 다리우스를 찌르고 달아났다.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를 발견하였을때 다리우스는 이미 죽은 상태였고 따라서 꼭 생포하고 싶었던 알렌산드로스는 대단히 실망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페르세폴리스로 보내 매우 정중하게 장사지낸 뒤 베수스를 잡으려고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 자신에게 페르시아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유언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베수스는 페르시아 왕국의 반란자이므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왕으로써 이를 진압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쫒아 동쪽으로 계속 행군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행군하면서 수많은 신도시를 건설하였고 이들을 모두 알렉산드리아라고 명명한다. 이 알렉산드리아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꿈꾼 완벽하게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시험작들이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이 도시들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문화가 어울리도록 조치하였고 그에 따라 당시 서방에서 모을 수 있었던 거의 모든 문헌을 수집 배분하여 도서관을 설치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당시에 있어서 책의 가치를 생각해본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 알 수 있다.[10] 헬레니즘 문화의 발흥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 의한 것이다.

세계 방방곡곡에 건설되었던 알렉산드리아는 모두 폐허가 되어 위치조차 알 수 없고, 현재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 바로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다. 터키의 항구도시인 이스칸데룬(Iskenderoun 또는 Iskenderun) 역시 그리스어로는 알렉산드렛타라고 불리며, 스스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후신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멸망한 뒤 같은 위치, 혹은 인근에 세워진 새로운 도시라는 설이 유력하다.

1.7. 페르시아 제국의 동쪽 끝으로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행군하여 마침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오게 된다. 이 지역에서 베수스를 보호하고 있었던 사고디안 부족장인 스피타메네스는 베수스를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주고 강화를 맺기로 결정하였다. 사고디안 부족은 지금의 아랄해와 인도 국경 사이에 살고 있던 부족이었다. 베수스를 넘겨받은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코와 귀를 자르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데 이는 페르시아가 반란자를 처형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이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스키타이 부족과 전투를 치루었는데 사고디안 부족은 베수스를 넘겨주고 강화를 맺은 것을 백지화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모두 진압하였고 사고디안 부족은 이를 주동한 그들의 부족장인 스피타메네스를 죽이고 알렉산드로스와 강화를 맺는다. 사고디안 부족을 격파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 지역을 공략하였는데 박트리아는 지금의 히말라야 산맥 서쪽 지역으로 인도와 꽤나 가까운 곳이다. 이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록사나라는 박트리아 귀족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의 첫번째 아내였다.

이때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여러 차례 암살 시도가 일어났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음모를 주도한 것은 모두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장교들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왕이 되었음을 선언한 뒤 페르시아 식의 궁중예법을 자신의 부하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예법대로라면 알렉산드로스를 만나려면 시종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만나서는 우선 반지에 키스를 해야 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에게 있어 이러한 짓은 지나치게 비굴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는 관을 쓰고 페르시아 궁중복을 입으며 비위를 잘 맞춰주는 페르시아인들을 가까이에 두었었다. 게다가 논공행상 할 때도 많은 페르시아인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었는데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입장에서 많은 피정복민들이 그들과 동등한 직책을 맡은 것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11]

이때 마케도니아의 장군이자 알렉산드로스 다음가는 사령관인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암살당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들이 알렉산드로스의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파르메니온의 아들을 죽인 뒤 파르메니온의 군인들에게서 받고 있는 높은 신뢰는 알렉산드로스로 하여금 그를 매우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 때문에 암살한 것. 일찍이 알렉산드로스를 페르시아로 건너온 뒤 벌인 첫번째 전투인 그라니쿠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생명을 구한 바가 있는 클레이투스도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클레이투스는 알렉산드로스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나 알렉산드로스와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황제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매우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접근을 거의 허가하지 않았는데 아주 모처럼 그들을 모아놓고 술자리를 벌였다. 그는 모인 장군들에게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며 이는 자신의 아버지인 필리포스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클레이투스나 알렉산드로스 모두 이때 매우 취한 상태였는데 클레이투스는 이에 격분하여 알렉산드로스에게 맹비난을 퍼부우며 그는 업적은 그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덕택이며 이것을 잊어선 안된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필리포스를 생까며 자신은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것에 도취된 알렉산드로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클레이투스를 내쫒으라고 명령하였으나 클레이투스는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불평을 토로하였고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창을 가지고 클레이투스를 꿰뚫어 죽인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음날 술에 깬 상태에서 클레이투스를 죽인 것에 매우 후회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그렇게 마케도니아 장교들과 알렉산드로스의 불화는 점점 심해져가고 있었다.

1.8. 인도 정벌의 착수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원정을 희망하였고 우선 인더스 강 서쪽, 지금의 파키스탄 서쪽 지역에 있던 지방 영주들을 소환하여 자신을 따르는 것을 보이라고 명령하였다. 많은 이들이 이에 응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나아갔으나 몇몇은 거부하였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군사적으로 공격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는 동안 심한 부상을 입기도 하였으나 그들을 모두 공략하는데 성공하였고 그에게 부상을 입힌 도시 시민들은 모두 학살당하고 빌딩까지 부숴 완전히 폐허로 만든다.

알렉산드로스는 파키스탄 지역을 공략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 지역까지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동쪽 대륙의 끝까지 정복한 뒤 그 대륙의 끝자리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남기고 오겠다는 다소 허황된 계획 때문이었다. 그는 인더스 강을 건넌 뒤 남쪽에 위치한 파우라바라는 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이에 파우라바의 왕 포루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알렉산드로스는 대략 4만여 병력이었고 포루스는 5만여 병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알렉산드로스는 병력의 일부를 본 진영에 남겨 대군이 머무르는 것처럼 위장한 뒤 밤에 몰래 강의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넜다. 포루스는 이에 주력을 이끌고 상류로 올라가 강을 건넌 알렉산드로스와 싸웠는데 알렉산드로스는 우세한 기병(7천대 4천)으로 포르스의 기병을 격파하는데 성공하고 배후로 돌아가 포르스의 보병을 팔랑크스와 협공하는데 성공한다. 포르스는 용감하게 싸우다 결국 항복하였고 포루스의 용맹함을 높이 산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왕위에 그대로 앉히고 그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선에서 그를 풀어준다.

포루스를 격파하여 인더스 강 남쪽에 교두보를 확보한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자신의 죽은 애마인 부케팔로스[12][13]의 이름을 딴 부케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한 뒤 이번엔 갠지스 강을 건너 인도 본토에 침입할 계획을 세운다.

1.9. 병사들의 파업과 철군

이때 겐지스 강 남쪽엔 난다 왕조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왕조는 포르스의 파우라바와는 달리 거대한 국가였다. 이 국가는 인도 북부를 통채로 지배하고 있었다. 포르스의 부하들은 마케도니아 인들에게 난다 왕조의 군사력을 말해주었는데 이들은 20만 보병, 6만 기병, 8천 전차대, 6천개의 코끼리 부대가 겐지스 건너편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런 사실을 들은 데다 너비가 6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강인 갠지스 강을 건너야 한다는 점도 있어 병사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난다 왕조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였다. 이들을 파업을 벌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써보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서쪽으로 군대를 철군하기로 하였다.[14] 대체 이 사람이 끝까지 갈 수 있었다면 어디까지 갔을런지 궁금하다.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죽기 전 아라비아 반도 원정을 거쳐 북아프리카를 지나 이탈리아 반도에 이르는 원대한 중년기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글쎄…

사실 알렉산드로스가 한 말을 보면 회군한게 잘한 것일지도 모른다. 당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는 코딱지만한 땅인데 지금 정복 안하면 언제 정복하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근데 알렉산드로스가 그동안 원정다닌게 다 이런 마인드로 한 것이라서, 회군하지 않았다면 진짜로 별 문제없이 정복 했을지도...(...)

1.10. 말로

인도 원정에서 되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수많은 관료들이 부정축재를 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 관료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을 볼 때 이토록 빨리 원정을 중단하고 병사들이 파업할 줄 누가 알았을까? 귀국할 줄은 예상못했고 또한 그들의 많은 자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원정 도중 전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음껏 부정축재를 벌인 것인데 이들 많은 수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처형당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수사로 돌아가 그를 따라 종군했던 마케도니아 군에게 많은 급료를 주고 그들의 빚을 모두 대신 갚아 준 뒤 마케도니아로 귀국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마케도니아 군이 인도에서 파업을 벌였을 때 내세운 표면적 명분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그러나 이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오해한 것으로 사실 이들이 원한 것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은 것이었지 마케도니아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곁에 머물며 정복자로써의 혜택을 누리고 싶었지 얼마간의 퇴직금만 받고 마케도니아로 되돌아가 실업자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오피우스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에게 직접 나아가 이들을 꾸짖고 몇몇 주동자를 처형하라고 지시한다. 그러자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밤에 알렉산드로스가 있는 막사를 포위한 뒤 동틀때까지 목놓아 울었는데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고 이들을 모두 용서한 뒤 이들 전원에게 자신의 '일족'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영예를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이들과 함께 주연을 즐긴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뒤 마케도니아인들의 반발이 자신의 친페르시아 행보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마케도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을 융화시키기 위해 그 두 인종간의 집단 혼인식을 치르게 한다. 이때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한 마케도니아 남자의 수는 무려 1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15] 알렉산드로스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수스때 사로잡은 다리우스의 큰딸과 결혼한다.

이렇게 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이로 인해 대단한 상실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 뒤 얼마 안있어 알렉산드로스도 쓰러졌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고작 32세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쓰러질 전까지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젋었기 때문에 아랍 원정[16]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다. 쓰러지기직전 알렉산드로스는 해군 제독이었던 니아르케스와 파티를 한 뒤 아침이 될때까지 술을 퍼마셨었다. 그 뒤 알렉산드로스는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고열은 계속되었다.

일주일 후 알렉산드로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17] 그 다음날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건강에 무엇인가 이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렉산드로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 중 지위가 높은 몇 명만 만났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반기기 위해 간신히 손을 들어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이틀 뒤 알렉산드로스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암살설[18]을 제기하기도 하고, 너무 젊은 시절에 이룰 걸 다 이뤄서 의욕상실로 병에 걸려 죽은 거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학설에서는 죽기 전에 포도주를 6.5리터 가량(그것도 원액)을 들이켜 마셔서 사망했다고도 한다.[19] 헤파이스티온도 과음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열병을 빨리 치료하기 위해 독성이 강한 약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신빙성은 거의 없는 야사이긴 하지만, 어느 지역에서 그에게 여자를 진상했는데, 그 여자가 소위 말하는 독인(어릴때부터 독을 먹여서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독살이 가능하다는 사람)이어서 그 여자를 안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가장 유력한 학설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모기에 물리는 바람에 일종의 풍토병인 말라리아 감염설이 있고, 실제로 고대의 독살설이 제기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동방의 풍토병이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는 점 때문에 말라리아가 의심되곤 한다. 즉 가장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망원인을 분석하자면 이렇다.

원정을 갔다. → 직접 병력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지휘했다. → 니아르케스와 파티를 하면서 술을 퍼마셨다. → 술을 퍼마시는 도중 모기에게 물렸다. → 모기가 갖고있던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죽었다.

1.11. 사후, 분열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이 워낙 급작스럽고 또한 그가 젋은 나이였으므로 그는 후계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록사나는 임신 중인 상태였는데 그녀의 뱃속의 유복자가 알렉산드로스의 유일한 아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회의를 열어 이 아이가 사내아이로 태어날 경우 왕으로 삼자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보병들은 그들이 이 회의에서 배제되었다는 이유로 이 합의를 거부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배다른 동생으로 간질을 앓고 있던 필리포스를 왕으로 추대한다.[20] 나중에 록사나가 결국 사내아이 알렉산드로스(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자 양측은 합의하여 이 아기와 필리포스를 공동 왕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간질 환자와 갓난아기였던 이 둘은 허수아비, 꼭두각시, 괴뢰로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이후 분열과 이합집산 과정은 디아도코이 항목을 참고하라.

알렉산드로스가 죽기 직전에 유언으로 가장 강한 자가 자신의 후계자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로마 시대의 역사가인 디오도루스가 그 출처이지만 그와 함께 알렉산드로스 시대 역사의 주요 소스인 아리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는 모두 알렉산드로스가 말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이 유언 그대로 되고 말았다. 그에 부하들 중 가장 강한 자들이 나라를 나눠 가졌으니...

여담이지만 이를 두고 성서의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숫양과 숫염소에 대한 계시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다리우스 대왕을 비유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 종파도 있다.[21] 일단 날개 달린 표범처럼 빠르게 영토를 넓혔고, 후에 4개의 나라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라고.

2. 사상과 사생활

2.1. 인품

어릴 적의 스승은 레오니다스, 영화 《300》에 나오는 그 분과는 동명이인. 좀 더 커서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 서양 학문의 기초를 혼자서 다 닦으신 그 분 맞다. 근데 깊게는 안 배우고 기본만 배웠다고 한다.[22] 단 그리스식 영웅주의에 아주 빠져있어서 베개 밑에 일리아스를 넣고 잘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 일리아스를 추천해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알렉산드로스가 항상 갖고다닌 일리아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작성해준 요약 필사본이라고 한다. 이처럼 둘의 사제관계는 처음에는 제법 좋았던 모양인데, 나중에 가면 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단 동문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칼리스테네스를 죽게 만들기도 했고...

여하간 배운 것의 문제인지, 원래 야심이 컸는지 20세 청년이 세계정복에 나서버렸다. 참고로 이 '세계정복'에 테마를 맞춘 《왕 알렉산더》라는 일본의 괴작도 있으나 좋게 말해 괴작이다. 절대 돈 주고 사서 보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기 바란다.[23]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점령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귀족들에게도 융화정책을 펴서 그들의 충성을 얻었다.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철학에 감화되어 있었지만 정치적으론 현실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도 포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집트에 갔을 때도 굳이 파라오 칭호를 받은 것도 이집트인을 포용하기 위한 것. 사실 페르시아에 쳐들어갔을 때도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복수하자고 하면서 그리스인들을 이끌었다. 문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그리스는 페르시아랑 휴전을 했던 것. 그리스인들이 "야만인"의 지배를 받는 걸 못마땅해하자 시선을 밖으로 돌린 것이다. 그런 이후에도 그 "야만인"들을 잘 구슬려서 충성을 받은걸 보면 정치적인 융화력이 상당하다는걸 알수 있다.

2.2. 사생활

아내를 두 명(소아시아 계통) 두었고, 다리우스 3세의 여동생과도 정략적 차원에서 약혼하기도 하였다. 첫번째 아내는 페르시아 관리의 딸인 록사나였는데, 록사나와 결혼한 이유는 아마 다리우스 3세의 여동생과 약혼한 것과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록사나와 관계를 맺어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를 두었었으나 일생 대부분의 시간을 원정에 쏟아부었고, 아들이 아직 어릴적에 요절했으니 함께 했던 시간은 극히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알렉산드로스는 또 다른 아들도 두었는데 이름은 헤라클레스. 하지만 헤라클레스 역시 그가 죽은 뒤 등장한 디아도코이 간의 내전 중에 카산드로스(싼드로스)에게 독살당한다.

그리스의 트렌드에 맞춰 알렉산드로스 역시 동성애자였다.(그 당시 그리스에서 동성애란, 일종의 전우애였다) 단, 흔히 말하는 동성애자의 정의대로 이성에겐 애정을 못 느끼고 동성에게만 애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양성애자라고 해야 옳다.[24]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릴 적부터의 친구이자 최측근이던 헤파이스티온이 알렉산더의 동성연인이었다고 한다.[25]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 헤파이스티온이 병으로 죽자 크게 슬퍼하여 병을 고치지 못한 의원을 죽여버렸다는 말까지 있다. 헤파이스티온이 죽은 이후로 의욕을 잃고 술만 마시다가 몸이 쇠약해져 죽었다고도 하지만 그리 신빙성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헤파이스티온 뿐만아니라 페르시아 출신의 미소년 환관이었던 바고아스와도 연인 관계였다고도 한다. 본래 바고아스는 다리우스 3세의 남색 대상이었으나, 다리우스 3세가 패배한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차지가 되었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인도를 떠나 게드로시아 사막을 횡단한 후에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무용 경연이 열었는데, 바고아스가 여기서 아름다운 춤을 추어 우승하고 덤으로 알렉산더 대왕과 키스를 나누는 영광을 누렸다고(...) 한다. 해외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일화이지만 의외로 아시아권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26][27]

2.3. 외모의 문제

고대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알렉산드로스를 꽃미남으로 묘사하고, 남아있는 조각상에서도 일반적으로는[28] 준수한 미청년의 모습을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20세기에 들면서부터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남아있는 전신상들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자세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 이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에게 골격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른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즉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나타났던 어떤 미적인 규칙을 준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또한 고대 역사가 아리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는 한쪽 눈은 검푸르고 다른쪽 눈은 하늘색, 그러니까 오드아이였다고 하는데, 이것도 어떤 유전적인 장애의 징후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의견을 종합하다시피 한 사람이 영국의 역사가 피터 그린인데, 그의 말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평균적인 마케도니아 남자의 키에도 못미치는 루저에 몸은 뒤틀려있고, 목소리는 쉿쉿거리는데다 수염도 성기게 나기 때문에 뽀대가 안 나서 일부러 면도를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정도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뱀혓바닥 수준이다.

다만 혹자들이 제기하곤 하는 필리포스 왕이 이러한 알렉산드로스의 외모 때문에 그를 후계자로 택하는 것을 망설였을 수도 있다는 가설은, 일단 알렉산드로스의 외모가 당시 기준으로 어떠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는 점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 알렉산드로스 추남설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알렉산드로스가 지닌 여러 외모상의 문제점, 그러니까 뒤틀어진 골격이나 오드아이, 거친 목소리 등을 부왕 필리포스로부터의 유전, 나아가서는 당시 마케도니아 왕실의 종특 유전적 특성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서출 형제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의 장애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추측되는 부분이 있는 바, 때문에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외모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게 옳을 듯 하다.

게다가 아직도 알렉산드로스의 외모에 대해서는 꽃남설이 다수설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불확실한 점이 많다는 것. 알렉산드로스 추남설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부각되었는데, 그의 외모에 대한 논쟁은 그에 대한 논쟁들 중 메이저는 아닐지라도 2천년은 족히 지속되어온 장기 떡밥이다. 섣불리 결론내리기는 어렵다.

일단 정설로서 취급받는 학설은 "역사에 획을 그을 정도의 추남은 아니라는 것" 즉 미남이 아닐 수는 있어도 보자마자 혐오감을 느낄 정도의 외모는 아니었을거란 것이다.[29]

신체적 결함에 대해서도 소소한 장애는 보유하고 있을수 있어도 행동에 지장을 줄 정도의 장애는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일화중에 날뛰는 난폭한 말에 올라탔다는 일화, 무용담,[30] 또 왕에게 심각한 신체적 결함이 있을 경우 왕이 되기 힘든 그 당시 사회상, 언제나 전쟁터에 군대와 함께 섰었다는 걸 생각했을때 장애설은 신빙성이 없다.[31][32]

애시당초 위에 나온 추남설은 대다수가 근대에 와서 제시되기 시작한 의견으로 '클레오파트라'는 미인이 아니었다 등과 비슷한 맥락으로 그 당시의 일종의 유행같은 것이었다.[33]

3. 후대의 평가

그리스와 동방문화가 결합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유명하며, 친구 헤파이스티온과의 뜨거운 관계로 다른 방면에서도 상당히 유명하다. 또한 부하 장병들에게 현지 여성과의 결혼을 장려하였는데, 이 역시 그리스와 동양을 혈통적으로 결합하여 이상적인 세계시민을 양성하려는 의도였다고 추정된다. 이런 동서문화 융합정책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측근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해서 반역 음모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이런 융합 정책 때문인지 로마 때는 폭군으로 기록되는 일이 많았지만 소아시아의 왕들 중에는 자신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로 부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또한 영웅시되는 일이 더 많았다. 일례로 티무르의 생애를 다룬 열전에서 그 지역의 위대한 왕들의 이름을 얘기할때 알렉산드로스도 언급된다.

서양에서는 동양에 대한 우월감을 상징하는 인물로 쓰이기도 하며 이 인물 때문에 과거의 마케도니아와 관련없는 현재의 마케도니아도 그리스와 관계가 복잡해진다. 아이러니한건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지방을 어르느라 동방문화를 받아들여서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욕을 단단히 먹었었다. 역시 죽고나면 정치적인 도구가 될 뿐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리는 역사서들은 옹호와 비판의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옹호쪽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킹왕짱!스러운 시선이 지나쳐서 《창천항로》의 조조급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비판쪽은 군사적인 면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잔인함과 술주정에 주로 집중하는 편이다.

그 인기 때문인지 이슬람권에서는 침략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이슬람 교리를 전파해서 그의 정복은 이슬람의 성전이라 믿는 사람들도 있다. 비슷하게 기독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기독교를 전파해서 그의 정복이 기독교의 성전이라고 믿는데 둘 다 두 종교가 성립된 때를 생각하면 헛소리지만 그의 인기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34]

인도쪽에서는 역사적으론 침략자인 만큼 별로 취급이 좋지 않다. 전 인도 수상 네루는 딸에게 대놓고 야만족의 우두머리라고 가르쳤다.

역사학자 놀드 토인비는 그가 오래 살았다면 세계 제국과 과학의 발전이 일찌감치 성공했으리라고 예상했지만, 거꾸로 그가 단명하지 않았으면 그나마 남아있던 헬레니즘 문화의 바탕인 오리엔트 문명이 그리스인들의 무지에 더욱 파괴되었을 것이란 반론도 있다. 사실상 알렉산더의 동방 제국을 그대로 계승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현실을 볼 때 설득력 없는 의견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알렉산더 개인의 성격이 어쨌건간에 말이다. 앞에서 말한 계획대로 로마로 진공했다고 해도 한니발이나 피루스 2세의 신세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35][36]로마로 진군했다는 것은 다시말해 인도까지 밟아버렸다는 건데 한니발에게 피의 가르침을 받기도 전 상태인 로마정도는 한번에 박살나지 않았을까 하는 문제는 제쳐두고 말이지

3.1. 이란에서의 평가

한편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전근대 이란인들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사산 왕조 시대 유행하던 것으로 알렉산드로스를 악의 화신으로 보는 관점이며, 둘째는 이슬람 정복 이후 등장한 것으로 알렉산드로스를 그냥 유명한 영웅 중 하나로 보는 관점이다.

전자의 견해는 주로 조로아스터교 경전이나 사산 왕조 당대의 기록에 의거한다. 이에 따르면 "로마인" 알레크산다르는[37] 성스러운 경전들을 없애고, 성스러운 불꽃들을 꺼뜨렸으며, 이란을 쑥대밭으로 만든 악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이 악의 화신이란 말이 단순한 비유법이 아니라 악신인 아흐리만, 악룡 아지다하카, 투란[38]의 왕 아프라시압 등과 함께 당당히 실제(?) 악의 화신으로 쓰여져 있다. 이렇게 사악한 알렉산드로스의 공격으로 이란에 혼란과 분열의 시대가 찾아왔으나, 이를 수습하여 이란에 질서와 정의, 종교와 신앙을 되돌려 놓은 것이 바로 아르다시르 1세라는 것이 사산 왕조의 공식 입장이었다.

반면 이슬람 정복 이후, 구체적으로는 10세기 이후 페르도우시의 샤나메나 여러 작가들에 의해 저술된 에스칸다르나메 등에 등장하는 에스칸다르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에스칸다르가 사실 이란 혈통이라는 주장[39]도 있고, 이란을 정복한 후에도 특별히 뭘 파괴하거나 사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이 없다. 오히려 패배자인 다라 왕이 부하들에게 암살당하면서 자기 딸을 에스칸다르에게 결혼시켜 왕위를 이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란의 왕이 된 에스칸다르는 세계 각지를 정복하며 위대하고 현명한 왕이 된다. 나중 가서는 정복왕이 아니라 현자, 예언자라고 쓸 지경이다.

이 같은 변화의 원인은 에스칸다르 전설 자체가 유럽의 알렉산드로스 전설들이 수입/번안된 것이며, 그 과정에서 상당히 이슬람적/이란적 색채로 변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란이 타국 세력에 정복된 이후이고, 이란의 지배 세력이자 독자 정체성의 근간이던 조로아스터교 세력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외국 침략자에 대한 혐오가 상대적으로 약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사산 왕조 시대에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증오가 상당히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났음은 전술한 대로다.

현대 이란에서의 일반적인 평가는 "비록 적이였지만 솔직히 대단했다는 건 인정함" 정도. 워낙 오래된 일인데다가,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의 공주인 록산나와 결혼하는등 동서화합을 모색했고, 키루스 2세의 무덤에 경의를 표하는 등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 인들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에 현대 이란에서의 평가는 꽤 좋은 편이다. 때로는 그냥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중세 이후에는 신화적인 존재나 위대한 왕으로 묘사한 경우가 굉장히 많으며 대표적으로 페르시아의 시인 니자미가 지은 '이스칸다르의 서'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매우 긍정적이고 영웅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만, 이 동네도 모든 사람의 생각이 똑같을 수는 없으니 페르세폴리스를 파괴한 '악마'적인 이미지도 물론 있으며 '영웅'적인 이미지와 양립하는 중.

4. 대중문화 속의 대왕

죽은 뒤에 많은 군주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동경한 나머지 대왕병을 앓게 된다.

일본 SF소설 은하영웅전설의 주인공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주요 모델로 꼽힌다. 과감한 원정을 통한 정복군주, 아름다운 외모, 동성애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친했던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등. 무엇보다 최후도 대원정을 거의 마친 뒤 고열을 동반한 병으로 급속도로 체력이 떨어지며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점까지 충실히 반영되었다.

범용 TRPG 시스템인 겁스에 샘플로 등장하는 대체역사 평행세계중 하나인 '이스칸다르-2'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헬레니즘 제국이 12세기까지 건재한 세계라는 설정으로, 현실세계에서는 근미래 수준의 과학수준을 자랑한다. 이 세계에서의 전쟁은 완전한 기계화가 이루어져서 대부분 로봇들이 싸워준다. 다만 알렉산드로스제국 1극체제는 아니고, 아시아를 거의 다먹은 중국기반의 아시아 제국과의 양극체제 세계.

2004년에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알렉산더》로 재조명되었다. 콜린 파렐, 안젤리나 졸리,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한 이 영화에서는 필리포스 2세의 암살을 올림피아스가 사주한 것으로 그리고 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헤파이스티온의 뜨거운 관계도 그려내서 영화 개봉 당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근데 이 영화는 학자들에게도 지뢰급의 취급을 받고 있다. 안습.

그러나 전투 고증 면에 있어서 영화는 모든 역사/군사학자들의 환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역사상 이렇게 '아름다운' 전투 고증은 흔하지 않다. 한 장면은 위의 벽화의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이 부분은 칭찬은 받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전형적인 헐리우드의 방황하는 10대 마냥 그려진 것이 학자들의 불만을 샀다.

십자군 이야기로 유명한 김태권에 의하면 이란에서 구전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의 모델이 된 왕이 바로 그라고 전해진다.[40] 그리스 신화 쪽에서는 그 이야기의 모델을 미다스 왕이라고 서술해 놓았지만.

아이언 메이든의 Alexander The Great는 곡 제목 그대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리고 있는데 8분 30초의 긴 러닝타임이 일품이다.

히스토리에에서는 헤파이스티온이 동성연애의 대상이 아닌 알렉산드로스의 제2의 인격이란 설정으로 나온다. 거기에 페이지 맨위의 벽화는 알렉산드로스 3세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로서 묘사된다.

Fate/Zero에서 서번트 라이더로 출전. 자세한 건 해당 항목 참고. 다만 여기선 위에서 대립하는 꽃미남설 VS 추남루저설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무지막지한 떡대의 거구 중년남으로 그려놔 약간의 논란(?)이 있다.[41] 다만 미소년과의 커플링 관련으론 나름 고증이 충실하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는 여러 차례 그리스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문명 5에 등장했을 때는 위 벽화의 복장과 애마를 그대로 재현.

영웅전희에서도 정복왕으로 나오긴 하는데, 이상하게도 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동정녀(...)로 나온다. 아쉽게도 레즈도 아니다. 안돼 나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렇게 순수할 리 없어 정복왕인 주제에 실제보다 수십분의 일로 줄어든 마케도니아는 덤

교학사 교과서에 따르면 동방 원정 때 리우스 3세가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대제랑 싸웠다 카더라

디오게네스와의 만남이 꽤 유명하다. 해당 항목 참조.

탈무드에서도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이 믿는 정의에 대해 알고자 하는 그에게 쓰레기 속에 있던 금덩이의 일화를 듣고는 나라면 그 둘을 모두 죽이고 내가 그 금덩이를 차지하겠다. 그게 나의 정의다라 말했다고 한다. 흠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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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스파르타인 다미스(Damis)의 말. 알렉산드로스가 도시국가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대접하라는 명령문을 내린 후의 반응이다.
  • [2]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어형이다.
  • [3]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페이로스 왕족 출신. 그래서 피로스와도 친척관계다. 알렉산더와 피로스는 6촌관계.
  • [4] 역사에 유명한 이집트의 여왕과는 다른 인물이다. 다만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역시 그리스 혈통이었기 때문에 이름은 그리스 식으로 같았다.
  • [5] 물론 단순한 원한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어린나이의 청년이 한 왕국의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혈통인데, 그 유일한 자격을 공유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불안요소이기 때문. 당장 조선만 봐도 왕자의 난이 있지 않았던가?
  • [6] 심지어 한 도시에서는 그곳 여왕의 양자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 [7]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분풀이로 항복한 티레 사령관을 전차에 매달고 죽을때까지 자갈밭 위로 끌고 다녔다.
  • [8] 알렉산드로스의 두상에 아몬 신의 상징인 숫양 뿔이 달린 형상을 새겼다.
  • [9]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침공 첫 전투였던 그라니쿠스 강 전투에서 도강 직후 앞장서서 돌격해 들어가다 본대와 분리된 채로 포위당하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다. 휘하의 장군 클레이투스가 제때 달려들어 도와주지 않았다면 페르시아 원정은 거기서 끝이 났을 것이다.
  • [10]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알렉산드리아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생각하면 알 것이다. 당시 그 알렉산드리아로 들어오는 모든 배를 샅샅이 뒤져서 책이란 책은 전부 다 몇 달이 걸리든 모조리 필사한 다음에 돌려줬다고 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알렉산더 당시에 수십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다.
  • [11] 물론 엄청난 넓이의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12] 인도 전투에선 아킬레우스의 방패 덕분에 살았다.
  • [13] 여담이지만 스타크래프트2에서 멩스크기함 전투순양함 이름이다. 아이러니한건 알렉산더듀갈의 기함명이라는 것. 그래서 멩스크가 듀갈에게 발린 것이다.
  • [14] 이 회군 과정은 거의 참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바빌론에 도착했을 때 남은 병력은 인도에서 출발한 병력의 1/10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보급을 담당한 함대가 인도양의 몬순에 멀리 밀려가 버린 사고 때문이다. 그 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대는 발루치스탄 사막을 지나고 있었다. 안습.
  • [15] 재미난 사실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이혼도 많았다는 것이다. 예외적인 케이스가 있다면 셀레우코스.
  • [16] 정확히는 아라비아 점령 후 바다를 통해서 아프리카를 돌아가 카르타고를 공격하는 막되먹은 발상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머리속에 망봉 따윈 없었을테니까...그리고는 최종목표는 지중해 정ㅋ벅ㅋ이라는 것으로 보아 로마 진공이었을 듯. 여하간 역사가 디오도로스(Diodorus)가 남긴 알렉산드로스의 기획에는 아버지 필립 2세의 무덤을 피라미드에 맞먹게 짓는 것(...), 동서의 인류를 서로 맞바꾸는 민족 대이동을 동반한 통합정책 등이 있었다고 한다.키루스 대왕의 무덤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듯 하다
  • [17] 인간의 뇌는 열에 취약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고열에 시달리게 되면 뇌가 익어 뇌세포가 파괴된다.
  • [18]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플루타르코스 당시에 알렉산드로스가 독살당했으며, 독살의 주체는 당시 마케도니아 섭정이었던 안티파트로스이지만 그 배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는 음모론이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물론 플루타르코스가 참고했던 역사가들은 물론 플루타르코스 본인 역시 독살설 자체가 음모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독살당한 사체 치고는 독살당한 징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19]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부정한다.
  • [20] 그 외에 사생아 헤라클레스도 있긴 했다.
  • [21] 숫양의 두뿔이 당시 페르시아 지배층이었던 메디아와 페르시아 민족을 뜻하고, 숫염소가 숫양을 쓰러뜨리고 가장 강할때 죽으며, 그 뿔이 넷으로 나뉜다는 것이 사후 4개국으로 분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다니엘서 8장 참고
  • [22] 그런데 플루타르코스는 굉장히 깊은 단계까지 배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알렉산드로스의 행보가 매우 이질적인 것을 볼 때, 플루타르코스의 서술이 좀 의심스럽기는 하다.
  • [23] 렉산더 전기라는 제목으로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왔는데, 원작이 괴작이라서 당연히 이 작품도 괴작. 단, 오프닝 곡인 "あなたのキスをえましょう"는 평판이 좋아서 박화요비가 "당신과의 키스를 세어보아요"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참고로 삼성이 여기에 자본을 투자해서 그런지 한국에서도 애니원에서 더빙까지 하면서 방영되었다. 등급은 괴작답게 19금. 국내 방영판은 애니송 작사가로 유명한 김주희씨가 오프닝을 불렀는데 화요비 버전보다 원곡에 충실한 시원시원한 창법이 특징이다.
  • [24] 바로 앞에 언급되어 있는 대로 당시의 시대상에서는 이런 점이 그렇게 논란 거리가 되지 않았다.
  • [25]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당시로선 작은 키에 외모도 평범한 편이었고 오히려 헤파이스티온이 더 키도 키고 잘생겨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박살내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있는 막사에 들어왔을때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그외 일가는 헤파이스티온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인줄 알고 그 앞에 엎드렸다는 얘기가 있다.
  • [26] 이 일화는 심지어 영문 위키백과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 [27] 그래서인지 바고아스는 관련기록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심지어 바고아스를 주인공으로 한 <Persian Boy>라는 소설도 있다.
  • [28] 그러나 가장 신뢰할만한 알렉산드로스의 모습으로 인정되는 조각가 리시포스가 남긴 흉상의 레플리카를 보면 꽃미남이라기보다는 그 아버지 필리포스를 위아래로 잡아늘린 듯한 닮은 터프한 모습에 가깝다.
  • [29] 만약 역사에 회자될 정도의 추남이었다면 그에 관련된 루머나 역사책이 상당수 남아있어야 정상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당시 세계의 절반을 흽쓴 양반이 보자마자 토할 정도의 얼굴인데 아무런 기록이 없다..?
  • [30] 태반이 과장이겠지만
  • [31] 발을 절둑거리며 미친듯이 키도 작은 루저에 몸이 뒤틀린 사람이 전쟁터에서 선봉에 서고도 살아돌아오는걸 반복한다..? 글쎄(...)
  • [32] 비슷한 놈으론 아게실라우스는 절름박이었는데 그가 왕이 되려하자 신탁에선 절름박이 왕 out!이란 말이 나왔다. 근데 그거 말곤 건장했고 그래서 그냥 궤변으로 넘기고 왕 됐다.
  • [33] 너희들이 알고있는 위인상은 잘못됐다! 라는 프렌차이즈
  • [34] 다만 꼭 틀린 것은 아닌 것이 가톨릭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콜라 철학은 물론 이슬람교도 기본적인 교리 체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먼저고 이슬람교와 스콜라 철학이 나중에 나타나지만 자신들의 종교적인 우상화를 강화하기 위해서 순서를 바꿔서 이야기한 것이라고 보면된다.
  • [35] 원본은 로마 장군이 연설하면서 천하의 알렉산드로스도 우리 로마에 쳐들어왔으면 깨졌을꺼임이다.
  • [36] 이 주장은 당대에서부터 제기되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로마로 왔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 [37] 재미있게도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언급한 대부분의 팔라비어 기록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로마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당시 사산 왕조의 주적이 로마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38] 전설상 이란과 적대하는 종족/나라
  • [39]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일부 판본에 그런 주장이 있고, 마케도니아 혈통이라고 쓰는 판본도 있다. 그 설에 따르면 에스칸다르는 당대 이란의 왕이던 다라의 이복형이다.
  • [40] 쌍각왕이란 호칭의 쌍뿔 → 귀
  • [41] 거기 맞춰서 다리우스 3세는 3m 정도의 거인으로 뻥튀기 되었다.This is Spar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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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1-25 16: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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