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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푸시킨

last modified: 2015-04-09 21:40:25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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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1799~1837

러시아 소설가이자 시인.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의 국민 시인.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를 맨 처음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푸시킨의 시를 꼽으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Если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일 것이다.[1] 본인은 정작 삶의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결투를 하긴 했지만.

Contents

1. 초반 생애
2. 중반
3. 결혼과 죽음
4. 평가
5. 그 외


1. 초반 생애

1799년 모스크바에서 명문 귀족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푸시킨의 초상화를 보면 외모가 독특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푸시킨의 외증조부가 에티오피아 출신 흑인으로 러시아 제국의 귀족이 된 아브람 페트로비치 간니발(Абрам Петрович Ганнибал)이다.[2] 즉, 흑백혼혈이라고 볼 수도 있다. 푸시킨은 자신의 외증조부 혈통과 이국적인 외모를 자랑스러워 했다. 정작 다른 사람들은 곱슬 머리에 키 작은 루저라고 놀려댔다.

군대에서 퇴역한 후 문필활동을 하던 아버지의 개인 서재덕분에 어렸을때부터 고전 문학들을 접하며 책을 많이 읽었고 삼촌도 시인이었기 때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유모로 부터 러시아의 여러 민담과 민요들을 배웠다. 이런 성장 배경은 푸시킨이 시인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된 동시에 훗날 푸시킨이 러시아의 전제 정치를 비판하고 러시아 민중들을 동정하게 된 밑바탕이 되었다.

이미 10살때 프랑스어로 자작시를 지었고 12살때 중,고교 과정이 통합된 러시아 귀족 자제 교육기관인 리쩨이(лице́й)에 입학했다. 리쩨이에서 교육받는 동안 130편의 시를 지었고 15세때 처음으로 시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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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레핀의 그림.

17살때 리쩨이에서 진급 시험을 칠때 '짜르스꼬예 셸로[3] 추억'이라는 자신의 자작시를 낭독했는데 심사위원으로 왔던 문학가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푸시킨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2. 중반

리쩨이를 졸업한 후에는 당시 귀족 자제들의 출세 코스에 맞게 외무성에 들어가 8등 문관 신분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워낙 전형적인 재미없는 생활이었기 때문에 곧 이 공무원 생활에 흥미를 잃고 이때부터 3년간 향락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어렸을때부터 품어온 자유주의적 사상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당대의 혁명적 자유주의자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으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에 동참했다. 유명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Руслан и Людмила)'를 발표한것도 이 무렵. 푸시킨은 이 무렵 러시아의 농노제와 전제 정치를 공격하는 시를 지었는데 이 때문에 당국의 눈 밖에 나 1820년 러시아 남부로 전근 당한다.[4] 오데사에 머무르며 외국 문학을 공부하던 푸시킨은 오데사 총독과 불화를 일으켜 영지인 미하일롭스꼬예로 추방당한다. 1825년에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귀환이 허용될 때까지 남부지방에서 짱박혀 있었고 1824년에는 외국 망명까지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거기다 그와 친분이 있엇던 자유주의자들은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숙청당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시기였으나 예술적으로는 매우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한시기였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 예브게니 오네긴와 보리스 고두노프를 이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1825년에 자유주의자들이 일망타진된 후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해도 좋다는 황제의 허가가 있었으나 푸시킨은 이미 위험인물로 낙인 찍혀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된다. 황제의 검열 없이는 작품 발표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된것.[5] 사적인 여행도 일일이 허가받아야 했다. 때문에 귀환한 후 얼마간은 서정시나 연애시를 적으면서 기분전환을 하고 다녔다.[6] 그리고 1830년부터 다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갔는데 1831년에 예브게니 오네긴을 완결 짓고 여러가지 시와 소설들을 발표했다.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7]등 푸시킨의 대표 소설들도 이때 발표된 것들이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한 것으로 설정한 희곡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도 썼고, 그것이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1898년에 오페라화를 했다. 이것이 1979년에 쓴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영화화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이렇게 더 알려지게 된 것이다.[8]

3. 결혼과 죽음

1831년, 푸시킨은 러시아 상류층에서 미인으로 소문났던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곤차로바(Наталия Николаевна Гончарова)에게 청혼했다. 곤차로바는 당시 18살이었는데 이미 자신보다 13살 연상이었던 남성과 사별한 유부녀였다. 곤차로바는 미인이었지만 워낙 그녀에 대한 뒷소문이 좋지 않았기[9] 때문에 푸시킨의 어머니는 곤차로바와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결국 푸시킨은 곤차로바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이 무렵 푸시킨은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고 곤차로바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식이 태어났다. 자식들로는 아들 알렉산드르, 그리고리, 딸 마리아, 나탈리야로, 나중에 막내딸 나탈리야의 손주들이 왕가의 후손과 결혼하게 된다.

곤차로바는 결혼 후에도 사교계에서 인기가 많았고 자연히 많은 스캔들을 일으키고 다녔는데 그 중에는 니콜라이 1세와 불륜(...) 관계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1834년에 푸시킨은 차르의 시종보가 되었는데 이게 사실 곤차로바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니콜라이 1세의 음흉한 속셈 아니냐는 소문이 당대부터 돌았다.[10] 푸시킨은 이런 소문에 처음에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지만.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푸시킨 본인도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사치를 좋아하던 아내 때문에 빚도 크게 늘어났다.

1836년 11월, 푸시킨과 그의 동료들은 아내 곤차로바가 염문을 일으키고 다니고 있다는 익명의 투서를 받는다. 푸시킨은 당시 곤차로바와 가까워 진 프랑스인 근위대 장교 조르주 당테스가 범인이라고 확신했고 당테스에게 결투 신청을 한다. 하지만 처제의 결혼때문에 결투는 유야무야 되었다. 그러나 곤차로바와 당테스를 둘러싼 추문은 끊이지 않았고 푸시킨과 당테스는 결국 결투를 했다.


그러나 결투에서 푸시킨은 치명적인 총상을 입었고 이틀후 사망했다. 푸시킨은 자신의 서재에 꽂혀있던 수천권의 책들을 보며 "안녕, 친구들!"이라고 말했고[11] 병상 옆에서 울고있는 아내에게는 "나의 죽음 때문에 자책하지 마시오. 이것은 나 혼자 저지른 일의 대가라고 생각하오."라고 말하고 숨졌다.

푸시킨의 장례식에는 2만명의 인파가 몰렸는데 그걸 보고 깜짝 놀란 니콜라이 1세는 일반인들의 장례식 참석을 금지하고 신문에 과도한 추모 기사 작성을 금지할것을 명했고 장례식에 군대까지 보냈다. 이런 정황을 볼때 많은 사람들이 푸시킨의 죽음에는 푸시킨을 시기하던 보수적인 귀족들이 음모를 꾸며 푸시킨이 그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4. 평가

낭만주의 문학가인 동시에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러시아 문학이 인지도를 얻게 된것도 푸시킨의 공이라 할 수 있다.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자유주의와 러시아의 민족주의를 적절히 배양하여 러시아의 국민성과 혼을 문학으로 잘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듣는다.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모든 작가들은 푸시킨이 개척한 길을 따라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등 후대 러시아 문학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미래파와 마야콥스키는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푸시킨을 지목하기도 했지만 마야콥스키는 후에 자신의 입장을 바꿔 푸시킨을 옹호했다.

5.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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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에 그려진 초상화.

나탈리야 곤차로바는 푸시킨이 죽은 후 군인 란스코이와 재혼해서 두 딸을 낳았다. 곤차로바는 지금까지 좋은 소리를 못듣고 있다.

2007년에 <푸시킨: 마지막 결투> 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푸시킨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를 파헤치는 추리물인데 영화에서 곤차로바는 당테스와 바람을 핀게 아니라 사실 푸시킨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계속되는 염문때문에 고통받는 아내를 위해 푸시킨이 결투장에 나온다. 푸시킨과 당테스의 결투 뒤에는 푸시킨을 싫어했던 황실과 당테스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음모가 있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는 푸시킨과 곤차로바의 동상이 있는데 푸시킨이 살던 집도 여기에 있다.

1829년에 조지아에 머물렀는데 조지아의 풍광과 음식에 매료되어 극찬 했다. 특히 조지아 요리에 대해서는 요리 하나하나가 시와 같다고 묘사했고 와인[12]도 칭찬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푸시킨은 조지아에서도 인기가 높은 시인이다. '그루지야[13]의 언덕에서'라는 시를 남겼다.

푸시킨은 결투 직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단골 카페에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나갔는데 그 카페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푸시킨이 죽은 이후에는 레모네이드는 안 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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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일제강점기에 처음 번역된 후 한국의 근현대사와 맞물려 크게 유명해진 시. 하지만 정작 러시아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고 한다.
  • [2] 에티오피아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끌려갔다가 러시아 대사가 간니발을 러시아로 데려왔으며 러시아에 온 후 러시아의 귀족 자제들과 함께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간니발 가문은 러시아의 명문가가 되었다. 간니발이 세례를 받을때 표트르 대제 자신이 간니발의 대부가 되어 주었다.
  • [3] 오늘날의 푸시킨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에 있으며 푸시킨을 기념하여 이름을 푸시킨으로 바꿨으며 푸시킨이 있었던 리쩨이가 이곳에 아직까지 남아 있어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러시아 황실의 궁전인 예카테리나 궁전도 이곳에 있다.
  • [4] 말이 전근이지 사실상 유배. 그래도 오데사의 사교계를 계속 들락날락 거리며 오데사의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 [5] 니콜라이 1세가 푸시킨의 작품들을 직접 검열했다.
  • [6] 이렇게 만든 시들을 시집으로 묶어 발표했는데 두달만에 모두 품절.
  • [7] 푸가초프의 난을 배경으로 한 소설.
  • [8] 단, 독살은 푸시킨의 희곡에서만 했고, 나머지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서 죽는 데 기여를 하는 것으로 나온다.
  • [9] 사생활이 문란하고 음탕하다는등의 이야기.
  • [10] 레프 톨스토이의 하지무라드에서도 가면 무도회에서 만난 미녀와 불륜 관계를 맺으러 으슥한(...) 궁전의 방으로 둘이서 같이 들어가는 니콜라이 1세의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거기에 이미 남녀가 밀애를 나누고 있었고 먼저 들어와 재미보고 있던 장교는 황제를 보고 혼비백산한다.
  • [11] 책이 곧 친구라는 말.
  • [12] 한국에서는 별 인지도가 없지만 조지아산 포도주는 동유럽에서 매우 유명하다.
  • [13] 조지아의 러시아식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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