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야마구치 모모에

last modified: 2015-04-12 18:43:58 by Contributors


山口百恵 1959.01.17~ 카나가와현 요코스카 출신.

73년에 데뷔. 당시 같은 또래로 데뷔한 사쿠라다 준코, 모리 마사코와 함께 꽃의 중3 트리오로 불렸다. 정식 데뷔 전인 1972년에 <타탄생>에서 우승자 사쿠라다 준코 다음으로 준우승을 해 얼굴을 알린 뒤, 그 이후로는 우승자 준코를 쌈싸먹고도 남을 커리어를 냈다. 그래서 트리오 중에서도 최고격의 대접을 받는다. 70년대를 풍미한 대표적인 아이돌로 다수의 명곡을 불렀다.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일본에 생겨나게 한 존재. 일명 '전설의 아이돌', '불세출의 가희'. 은퇴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일본 가요계의 3대 가희로 회자되고 있다. (다른 두명은 미소라 히바리나카모리 아키나)[1]

원래는 발랄한 이미지의 아이돌 가수였지만, 1979년도에 일본 국철 테마송으로 나온 "좋은 날의 여행(いい日旅立ち)"이 전일본적인 히트를 치면서, 전국민적인 아이돌이 되었다. 10대임에도 40대의 중후한 보컬링이 특이점. "만주사화(曼珠沙華)"라는 곡에서 이러한 절정을 보여주면서 엔카곡에서도 기질을 많이 보여준다. "曼珠沙華라는 곡은 엔카 가수들이 흔히 즐겨부르기도 한다. 이 곡을 작곡한 사람이 조용필의 절친이자 당시엔 포크가 큰 대세였으며 그 중심이자 훗날 역사상 한 획을 그은 일본 음악계의 전설인 타니무라 신지인데 타니무라 신지가 말하길 이 곡을 만든 이유가 아이돌에서 싱어로 벗어던지게 하려고 했으며, 이 노래 역시 코스모스와 더불어서 가족을 소재로 한 노래이다. 그래서인지 야마구치 모모에에게는 의미가 깊은 노래이다. 전 국민적인 아이돌이 아닌 당대 명실상부한 가수로 발돋음하게 된 계가 되었다. 특히 모자를 쓰며 이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 NHK SONGS에 방영되었는데 눈망울에 눈물이 맺혀있는게 감동적이다.

그 이전에도 "가을의 코스모스(秋櫻)"라는 사다 마사시가 제공한 곡으로 아이돌의 이미지를 벗어보려고 했지만 いい日旅立ち가 나오기 전까지 아이돌의 이미지는 완전 벗지 못했었다. 이 가사의 내용은 원래 사다 마사시의 동생 사다 레이코의 이야기로써 동생인 사다 레이코가 결혼적령기가 될 무렵 그걸 걱정하는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다. 더구나 가족 이야기라면 지긋지긋해서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했던 야마구치 모모에이기에 사다 마사시의 질문에 처음에는 그 노래를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いい日旅立ち가 히트를 하고 은퇴를 앞두면서 훗날 야마구치 모모에가 결혼을 하면서 이 곡을 이제서야 이해했다며 사다 마사시에게 이야기를 하며 그 노래를 콘서트에서 부르며 진가를 보여줬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슴아픈 가정사에 대못박는 얄미운 두 음악계의 전설. 하지만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되고 2곡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고 야마구치 모모에. 역시 남자든 여자든 결혼을 해야 가족의 소중함을 알며 저런 2곡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런데 마냥 발랄한 이미지의 아이돌 가수라고 보기도 어려운게, 1974년 그녀의 첫 히트했던 곡인 '어느 여름 날의 경험(ひと夏の経験)'은 15살 소녀가 부르기에는 가사 내용이 검열삭제스런 곡이었다. 일명 '소녀성'을 표현한 노래.[2] 그래서 당시 일본의 학부모 단체에서 이 노래가 방송에 나오지 못 하도록 단체활동까지 서슴치 않을 정도로 대차게 줄기차게 까였다. 뿐만 아니라도 본인도 이런 노래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느꼈으며, 그래서인지 노래를 부를때마다 종종 뻘쭘해한다. 어쨌든 모모에는 처음부터 과감한 노래를 불렀기에 여느 아이돌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성숙한 이미지로 가수 생활을 하게 됐다.


음악성으로도 엄청나게 훌륭한 곡들이 다수로 그녀의 정규 스튜디오 앨범 22장 모두 빼놓을 곡이 없을 정도로 명곡이 포진되어있다. 보통 이 시절의 아이돌이라고 하면 엔카풍의 노래나 부르고 얼굴로 먹고살고 마는 게 기본인데 모모에의 앨범들은 시대를 초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1974년 곡 '聖少女'만해도 나레이션으로 시작해서 잘게 다듬어지는 비트 때리는 스킬이라든가 'Play Back pt.2'처럼 저음부의 리드미컬한 베이스 비트가 깔리는 곡이 1970년대 그 당시의 일본 음악이 아닌 뭔가 비범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이런 곡이 앨범 전체에 걸쳐 다수있다. 그야말로 70년대 젊은 아티스트의 최종집약체. 동시대의 선배 마츠토야 유미에게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 싱어송라이터로서도 재능이 있었다곤 하지만 성인이 될 무렵에도 곡을 쓰는 것은 불가능했고, 가사도 겨우 쓸 수준이 되었다. 이치에라던가 지나간 바람(通りすぎた風)이라던가 하는 노래들이 대표적인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시적인 가사들을 썼긴 했지만 아직 그 나이에 훌륭한 가사를 쓰기란 한계가 많은건 어쩔수 없다. 사실 더욱 더 훌륭한 가사들을 쓸수가 있었고 마츠다 세이코처럼 작곡에 참여는 물론 가사만큼은 노래만 나오면 전곡을 쓸수 있을텐데, 하필 은퇴를 빨리해버린 나머지 작곡 공동작곡조차도 엄두를 못냈고, 작사한 곡도 얼마 안된다.

일본 국철(현재의 JR)의 캠페인이자 동명의 캠페인 송이었던 '좋은 날의 여행'(DISCOVER JAPAN 참고).
1978년 지 TV에 나와 부른 영상
1978년 일본 국철의 '좋은 날의 여행' 캠페인 광고.

1980년 21살 당시 우라 토모카즈[3]와 같이 영화에 출연에 그대로 연인관계에 들어가 미우라와 결혼 후 은퇴하였다. 다만 아내와 달리 미우라는 아직도 연기를 하고 있다.


웨딩 사진. 둘 다 미모가 정점에 달했다.

인기의 정점에서 결혼과 함께 미련없이 은퇴. 이것이 아직도 전설로 회자되는 이유일 듯. 한국으로 치면 심은하가 비슷한 예. 둘 다 인기의 정점에서 결혼은퇴. 다만 이쪽은 배우, 그쪽은 가수겸배우 라는점이 다르다. 또 정윤희와 비슷하다 할 수 있을듯. 심은하보다는 둘의 나이차이가 비슷한편이고 최고의 인기를 누릴때 은퇴한 시기도 비슷하다. 다만 남편의 직업이 이쪽은 이혼하고 애딸린사업가 그쪽은 인기를 누리고 있던 청춘스타배우라는 점이 다르다. 또 껴맞춰보자면 이쪽은 불명예스럽고 큰 스캔들로 은퇴한 이미지가 강한 반면 그쪽은 가정을 위해 구설수없이 조용히 은퇴했다는 분위기가 강한편인듯.
(둘다 슬하 2남이라고 인물정보에 기재되어있으나 이쪽은 한명은 친자가 아닌 전처의 소생이고 그쪽은 둘다 친자가 맞다. )

마지막 노래인 "이별의 저편(さよならの向こう)"은 팬들에게 헌정하는 노래로, 1980년 은퇴 콘서트에서 마이크를 무대에 내려놓고 퇴장하는 장면이 매우 유명하다.[4]

80년대 일본 아이돌 중에서 나카모리 아키나[5]마츠다 세이코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다면, 70년대 일본 아이돌 중에서 전세계적인 지명도는 야마구치 모모에가 가장 으뜸. 야마구치 모모에의 명곡인 "좋은 날의 여행", "이별의 저편", "가을의 코스모스"는 아직도 일본 여가수, 심지어 남자 가수 들에게도 콘서트 라이브때 즐겨 불려지는 노래이다. 애초에 80년도 은퇴콘서트 영상이 아직도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근거없는 소문이 있지만 확인은 안된다. 모모에의 얼굴이 한국인처럼 생겨서 나돈 오해인듯. 사실 한국인설보다 더 근거가 있는게 중국계라는 설이 있는데, 실제 외모도 한반도보단 대륙적인 외모에 더 가깝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다름 아닌 양귀비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은 양귀비 일족이 일본으로 도주하여 후손을 남겼았는데, 그녀의 후손 혈통이 야마구치 모모에였다는거다.


이 링크의 내용에 따르면 그렇다. 2002년 어느 날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원래 성은 양씨로서, 양귀비(楊貴妃)의 후손이라고 밝힌 것이다. 기자회견에서는 집안의 족보 등을 증거로 들고 나왔다. 야마구치 모모에의 집안으로 일본야채구매공사 상하이(上海)사무처에 근무하던 야마구치 미츠도모(山口光友)씨 일행이 1986년에 집안에 전해오는 양(楊)씨 족보를 들고 중국 절강성(浙江省, 저장성)을 찾아가서 조상의 뿌리를 찾은 결과, 중국의 동해안 지방인 절강성 삼문만(三門灣)을 흐르는 사류청계(沙柳淸溪)라는 소하천 입구의 두계(溪頭)양(楊)씨 마을이 야마구치 집안의 뿌리라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물론 양귀비에 버금거는 카리스마와 미모를 가진건 사실이긴 하지만 증거는 아직도 불충분하며 당시 왜국은 그렇게 족보가 조직적으로 자리잡히지가 않았다니 크게 믿지말길. 이런 이야기가 나온거는 역사기록의 불일치와 이에 따른 해석으로 짐작이 된다. 하긴 그녀가 보여준 미모와 카리스마가 양귀비와 버금간 것은 사실인듯 하지만 말 그대로 근거는 불충분하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한국인들 대부분이 중국인들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 근거를 한국인들에게 믿으라고 하면, 그대로 믿을수가 있을까? 일단 이 근거가 충분해지려면, 가장 먼저 양귀비가 두계 양씨인지의 여부가 확인이 되어야 하며, 구당서에서 양귀비의 시체 존재의 여부가 확실하게 적혀져야 하며, 또한 중국 양귀비의 무덤과 일본에 존재한다는 양귀비의 무덤에서 DNA 조사를 통해 그것이 확인되어야만 위의 주장들이 성립이 된다.

또한 야마구치 모모에의 발언 시기가 어린시절 치기어린 소리일 때가 가장 높다. 그 어린 나이에 누구나 그런 비슷한 발언을 해본 사람은 널렸을 것이다. 2002년때 언론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고 하는데, 이미 언론과 열심히 트러블이 붙어서 그런 언론플레이를 할만한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한국계라는 설과 양귀비의 후손 설을 주장하느니 한국인은 중국인들의 후손이라니 요시츠네는 칭기즈칸의 후손이라는 설과 다를거는 없다.


아빠가 총각이라고 속여서 모모에의 엄마와 결혼했지만 사실은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 사생아로 태어나 호적에도 올리지 못하고, 어릴 때는 아빠와 친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해 초인기 아이돌이 되자 아빠가 엄마로부터 양육권을 뺏으려 해 양육권 소송으로 재판을 벌이기도 했다. 지긋지긋해서 일찍 은퇴한듯. 또한 당시 한국과는 달리 가정사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보장해주는 일본이라고 해도 연예계에 데뷔하고 큰 인기를 끌고 메스컴을 타면 이러한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은퇴한 걸로 추측이 된다.

참고로 야마구치 모모에가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고 들었다. 마지막 콘서트에서 코스모스를 부르기 전에 팬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여러분들의 어머니를 소중히 여겨주세요, 저도 우리 어머니를 소중이 여길께요." 불효자들은 웁니다.

이렇게 은퇴설에 대해서 여러 추측이 되고, 미우라 토모카즈와의 결혼을 이유로 은퇴로 한거는 그저 형식적인 동기부여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결국 은퇴의 이유는 야마구치 모모에 본인이 인정했듯 공식적으로는 결혼을 이유로 은퇴를 했으며, 또한 평범한 주부로 돌아가서 가정을 돌보기 위한 것이 큰 것이다. 연예인 커플들이 결혼을 하여 이혼한 일례는 일본에서도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만화 마루코는 아홉살에서 마루코가 자주 언급하는 '모모에 언니'가 바로 야마구치 모모에다. 역시나 만화의 시대배경이 1970년대이다보니 그녀가 1970년대 일본 연예계의 아이콘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은퇴 이후 행적을 사진으로 보면

첫 아이가 탄생한 후. 더 예뻐진 거 같다?


2003년 오랜만에 포착된 사진.


2004년 파파라치 사진.


2009년 남편과 함께. 행복해보인다.

확실히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 그래도 엄청 곱게 나이들었다. 과연 레전드. 한편으론 정말 마음씨 좋은 어머니 인상이다.

장남 미우라 유우타로가 밴드[6]로, 차남 미우라 타카히로가 배우로 연예계에 데뷔하였기에, 방송에서 자연스럽게 부모의 화제가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어머니의 은퇴를 생각해서인지 언급을 조심해서 하는 중.


다운타운마츠모토 히토시가 팬이다. 장남인 미우라 유우타로가 속한 밴드가 다운타운이 진행하는 음악방송 'HEYHEYHEY 뮤직챔프'에 출연했을때 마츠모토 히토시가 '자네보다 내가 더 너희 어머니를 좋아한다'라고 했을 정도.[7]



----
  • [1] 나카모리 아키나를 3대 가희라고 하지만 그의 최고 라이벌인 마츠다 세이코도 결코 뒤쳐지 않고, 이 2명의 대결은 현재에서도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더구나 90년대 중반에도 활동한 마츠다 세이코의 경우는 나카모리 아키나도 못한 밀리언 싱글 판매량을 기록했다. 정확히 말해 쇼와의 3대 가희로 일컬어지며, 헤이세이의 3대 가희로는 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 우타다 히카루가 꼽히고 있다.
  • [2] 심야식당 코믹스에서 '리바운드의 여왕' 마유미가 불렀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
  • [3] 1952년생인 배우로 일본 드라마 유성의 인연의 카시와바라 형사, 장미 없는 꽃집의 의사원장, 도쿄독스의 수사반장 역을 맡은 바 있다. 서부경찰의 오키다 고로 형사로도 유명하다.
  • [4] 이 노래는 장국영이 "바람아 계속 불어다오(風繼續吹)"로 리메이크해서 그의 대표곡이 되었다. 이 노래는 영화 종횡사해 삽입곡으로 나온 바 있다.
  • [5] 그녀는 오디션에서 모모에의 싱글 <夢先案内人>을 불러 합격, 데뷔했다.
  • [6] Peaky SALT. 현재는 밴드 활동은 멈춘상태
  • [7] 그 날 Peaky SALT의 짧은 출연 시간 대부분이 야마구치 모모에와 미우라 토모카즈에 관한 얘기만 하다 끝났다. 역시 모모에는 일본 연예계의 레전드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4-12 18:43:58
Processing time 0.2301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