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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이소로쿠

last modified: 2015-03-06 15:36:33 by Contributors

Contents

1. 일본군인
1.1. 개요
1.2. 생애
1.2.1. 어린 시절
1.2.2. 제2차 세계대전까지
1.2.3. 진주만 공격, 그리고 짧은 영광
1.2.4. 전사
1.3. 평가
1.4. 매체에서의 등장
2. 란스 시리즈의 등장인물


1. 일본군인

山本五十六 1884.04.04~1943.04.18

이름에 쓰인 한자가 참 간단하기로 유명하다.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산본오십육'. 반면에 일본식 한자읽기가 참 괴랄맞다는 것도 동시에 보여준다. ごじゅうろく가 아니다.

yamamoto.jpg
[JPG image (45.6 KB)]
총사령관 취임 직후 만년에 국회에 출석하며

1.1. 개요

일본군 해군 제독. 일본 연합함대 총사령관.

진주만 기습작전의 입안자로, 미국에 유학을 갔다와 그 잠재력을 알고 있었던 지미파였고. 그렇기에 미국과의 전쟁을 결사반대하였다. 하지만 결국 전쟁이 확실시 되자, 진주만 기습을 성공시킨다. 이후 미드웨이 해전에서 정규항모 4척을 날려먹고 과달카날 전투 도중에 쇼틀랜드로 시찰차 1식 육공에 탑승하여 이동하다가 부겐빌 섬 상공에서 이동일정이 포함된 통신을 해독한 미군의 캑터스 항공대 토머스 랜피어 대위의 P-38 라이트닝에 의해 격추되어 전사.

1.2. 생애

1.2.1. 어린 시절

부친의 나이가 56세였을 때 그를 얻었다고 하여 이소로쿠(五十六)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본명은 다카노 이소로쿠[1]였으나 1916년에 과거 번(藩)의 유력가였던 야마모토 가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야마모토 이소로쿠로 개명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싸우게 된 미국은 일본인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를 조사하다가, 그들이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장남부터 순서대로 숫자를 붙이는 일이[2]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근데, 그 사령관 이름이 뭐라구? 오십육? 아들만? 얼마나 파워풀한 아버지였길래?" 사실 56세에 애를 본 것도 파워풀한 거 맞다.

1.2.2. 제2차 세계대전까지

러일전쟁 당시 해군 소위로 종군하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지휘 아래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다. 이 전투에서 오른손 왼손 손가락 두개를 잃었는데, 전상이 아니라 그냥 사고였다.

1914년 고급 과정인 해군대학을 졸업했다. 1919년에 미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하버드 대학에서 연수하고 유창한 영어를 익히게 되었다. 1921년부터 1923년에 걸쳐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관계로 미국을 자주 방문하였다. 이 때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미국의 잠재력에 훗날 태평양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된다. 디트로이트의 공장지대, 애팔레치아의 크고 아름다운 광산, 야마모토가 몰다 퍼져버린 자동차를 뚝딱 고쳐낸 미국 소녀의 크고 아름다운 능력을 보고 그러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압도적인 생산능력, 풍부한 자원, 흔하게 볼 수있는 소녀가 자동차를 고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기술력과 교육 수준. 모두 일본이 달성하기에는 너무나 높은 레벨이었다.

유학시절 방학 때 친구들과 멕시코에 밀입국해서 유전지대를 관찰하다 걸린 건 흑역사.(…) Hoyt의 전기에 의하면 멕시코 정부에서 일본 대사관에 조사 의뢰를 맡겼다고 한다.

1935년 해군성 항공본부장에 취임해 일찍부터 거함거포주의의 한계를 간파하고 해군항공대와 항모전단 편성에 심혈을 기울여 선진적인 항모전술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이 있지만, 사실 항공기의 진가를 알아봤다기보단 일본이 미국과의 생산력 경쟁에서 이기려면 선박보다는 항공기 쪽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특히 전함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야마토의 건조에 대해서 '야마토를 만들 돈이면 제로센을 1000기는 뽑아낼 수 있다'며 반대한 것도 이것의 일환.

다만 구상한 항공모함 운용은 최후의 함대결전을 위한 점감작전의 일환이었고, 그것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항공모함을 잘 운용하여 적의 주함대를 약화시킨 다음, 일본근해로 다가오는 적의 함대를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과 같은 함대결전으로 제압하여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그의 원래 구상이었다. 게다가 정작 본인이 항공전에 무지했던지라 일본의 항공기 개발이 산으로 가버렸고, 항공기 운용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탓에 파일럿들에게 '우리의 적은 우리 장관님이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전후에도 사카이 사부로같은 항공대 출신 파일럿들에게도 대차게 까이기도.

'전함이란건 함대 기함으로 사용할 것과 그 예비로 사용할 것으로 총 두 척만 있으면 충분하다'라는 발언이나, 야마토의 건조현장에서 작업자들에게 '이제 전함은 필요없어질테니 자네들은 조만간 실업자가 되겠구만'같은 소리를 하여 수많은 관계자들에게 원한을 산 에피소드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야마토가 완성되고 난 뒤에 '이 배가 있으니 반드시 이길 수 있다'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면 야마토 자체를 싫어했던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감각이라는 게 아예 없었던 다른 장성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미국과의 전쟁이 승산없는 전쟁임을 예감했던 것은 사실이며,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유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에 정국을 장악했던 육군 강경파와 대립했는데 오죽하면 1939년에 연합함대사령장관에 오른 것도 강경파의 암살위협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연합함대 사령부는 육상이 아닌 전함 나가토 함상에 있었기 때문에 암살자가 오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가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언급한 '"우리는 처음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맹렬하게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텍사스의 유전과 디트로이트의 공장이 단호하고 결정적인 반격을 시도할 수 있는 수단들을 제공할 것이다."는 언급은 실제로 거의 들어맞았다.

1.2.3. 진주만 공격, 그리고 짧은 영광

그러나 개전이 결정되자 미 태평양 함대의 본거지인 진주만을 공습해 기선을 제압해야 승리의 가능성이 있음을 역설하며 철저한 준비와 훈련에 매달렸다. 1941년 12월 7일 개시된 진주만 공습을 철저한 준비로 대성공을 거두어 미국의 당시 가용전력은 거의 없다시피한 상황이었으나 본래 목적인 미 함대 전력들을 상당수 격침시키거나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시 유류저장고 등의 기간시설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서 후일 미해군의 재기의 단초를 만들어주고 말았다. 실제로 그는 진주만 공습 성공소식을 듣고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주만 공습으로 주력 전함 및 중순양함이 왕창 털린 미해군은 이때의 전훈을 집중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적인 항모를 전력의 핵심으로 삼는 함대를 찍어내기 시작한다.

진주만 공습 이후에 그가 요미우리 신문의 기자와 한 인터뷰는 아주 인상깊다.

요미우리 기자 : 자, 진주만 공습이 성공했는데, 이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미국과 싸우실 겁니까?
야마모토 이소로쿠 : 미국과의 휴전조약을 준비할 겁니다.

말만 들어보면 곧바로 전쟁을 중단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와이를 점령하고 이곳을 기점으로 파나마 운하를 틀어막으면 공업기반이 동부에 집중돼있는 미국으로서는 손을 들 수 밖에 없을테니 이때 선심쓰는척 조약을 맺으면 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야마구치 다몬이 상부에 제출한 계획도 대충 이런식. 다만 야마구치 다몬의 경우 조약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미국 본토까지 점령하는 완전승리까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후, 둘리틀 특공대의 공습으로 충격에 빠진 대본영의 분위기를 바꾸고, 미군의 잔여 항공모함들을 모조리 격침하기 위해 미드웨이 공략을 계획하였으나 이미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모조리 해독해 작전의도를 다 파악한 상태였고, 여기에다 방만한 작전 계획으로 인해 제대간 협동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항모기동부대의 지휘를 맡았던 나구모 주이치의 뻘짓이 겹치면서 작전에 동원된 정규항모 4척을 잃는 대참사를 당했다. 너무 믿기지 않는 지독한 패배라, 사기에 영향을 줄까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반에는 기밀사항이었다고.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도 전후에야 이걸 알고는 경악을 금치못했다고 하니...

이후, 그의 노력은 아무 소용 없이 전황은 악화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1.2.4. 전사

1943년 4월 18일. 부겐빌로 전선시찰에 나섰다가,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야마모토의 전선시찰 계획을 알고있던 미군이 진로상에서 가장 가까운 기지에 위치하고 있던 육군의 P-38 라이트닝 전투기 16대를 출격시켜 수송단을 캐치한다. 수송단은 G4M 폭격기 2대에 제로센 6대 가량의 편대였는데, 8기의 P-38이 제로센 6기를 상대하는 동안 나머지 8기의 P-38이 끈질기게 공격하여 2대 모두 격추시켰다. 다만 1대는 확실히 확인했지만, 나머지 1대는 전투중의 혼란으로 추락하는 것은 확인했으나 잔해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중 한 대에 야마모토가 타고 있었기 때문에, 사망이 확실시되었으며 훗날 일본군 점령지로 야마모토로 추정되는 시신이 떠밀려오기도 했다. 시신의 안면부에 총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격추시 사망한 게 아니라 격추 후에 권총으로 자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으나….

전후 미군이 일본군의 서류를 조사하자 진상이 드러났다. 당시 폭격기 2대가 모두 격추되었으며, 숲 속으로 떨어진 1대에 야마모토가 있었고, 바다에 떨어진 1대에는 참모장인 우가키 마토메가 탑승했으며, 우가키 제독은 목숨을 건졌다. 주변의 일본군이 숲을 샅샅이 뒤져서 격추된 지 2일 후에 찾아낸 시신은 부서진 폭격기 옆에 튕겨나와 있었고 군도를 꼭 쥔채 숨져있던 야마모토 제독의 시신에서 P-38의 기관총탄 관통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격추되기도 전에 전투기 기관총으로 끔살당했다는 이야기로, 얼마나 미국이 야마모토를 제거하는 데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격에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

이후 야마모토의 시신은 워낙 험악하게 훼손된 탓[3]도 있어서 현지에서 화장, 전함 야마토에 실려서 일본으로 운구되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국민과 군의 사기가 떨어질까봐 사망 사실을 숨기고 문제의 전투를 "해군 갑(甲) 사건"이라는 암호명으로 부르다가 한 달 후에 화장한 유골이 일본에 도착하자 그때서야 사망 사실을 일반에 공개하고 영웅 대접을 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뤄졌으며, 원수 칭호[4]가 추서되었으며, 동맹국 독일에서는 백엽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보내왔다. 지금까지 외국인 중에서 이 훈장 서훈자는 야마모토 제독이 유일하며, 또한 하위 훈장을 받지 않고는 위 훈장을 받을 수 없는 철십자장 수훈 제도[5]를 따르지 않은 특례를 인정한 유일한 수훈 사례이다.

미국이 야마모토를 끔살한 이유는 야마모토가 한 발언 중에서 일부가 약간 와전돼서 전해진 것이 미국 백악관까지 진격해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군부에서 주장하는 미국에 대해 한번의 결정적인 승리로 평화협정을 맺는건 병크이고 차라리 캘리포니아에 상륙해서 미국을 가로질러 백악관에 진격해야 하는게 낫다라는 것으로 진주만 기습 정도로는 미국이 평화협정은 안 맺을거니 미국 본토 점령 능력없으면 미국과의 개전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이게 와전돼서 미국 점령을 획책하는 광인으로 그려진 것이다.[6] 이 때문에 반드시 없애버려야 할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덕분에 후술하는 몇몇 제독들이 제거에 반대입장을 보였지만…. 여론에 밀려버렸다고….

한편 미국은 야마모토 사살 보고를 받았음에도 침묵을 지켰다. 일본이 한 달 후 스스로 야마모토 제독의 사망 사실을 실토하자 그제서야 "해안감시원이 야마모토 제독이 폭격기에 타고 부겐빌로 가는 사실을 보고받아 작전을 펼쳤다"란 브리핑을 내놨다. 이는 연합군의 일본 암호감청 및 해독 사실을 숨기기 위함이었으며 구체적인 전모가 공개된 것은 전후의 일이다.

여담으로, 야마모토 제독은 그 당시 막 채택된, 함정 및 육상 모두에서 범용으로 착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군복인 3종 군장(#)을 처음으로 입고 갔는데[7], 이 때문에 한동안 해군에선 3종이 재수없는 옷으로 통했다는 야사가 있다. 그래서 일본 해군이 졌나?

1.3. 평가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한 일본군 장성들 중에서는 흔치 않은 상식인이며 개념인으로 평가되는 사람. 다만, 일본군 해군의 한계는 그닥 극복하지 못했다고 보인다.[8] 미드웨이 해전에서 나구모가 아닌 그가 작전지휘를 맡았다면 전투에서는 이겼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미드웨이 당시 야마모토가 이끄는 본대는 미드웨이로부터 400여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다른 함대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지원이 여의치 않은 상황임을 보면, 일본측의 무의미한 아쉬움일 뿐이다. 게다가 작전 전반에 걸쳐 야마모토 자신이 작전의 제1목표를 미함대 격멸인지, 미드웨이 섬 점령인지 애매모호하게 지시를 내림으로서 나구모의 실책을 유도하는 데 일조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미드웨이 해전을 벌일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보면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지 못한 당시 일본군 군령체계의 약점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상층부의 전략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는게 드러난다. 상세는 미드웨이 해전항목을 참고하자.

도고 헤이하치로 곁에 묻혔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나름 추앙받는 인물이기는 하다. 물론, 그 정도의 평가에 거품이 낀 것은 후술할 이유로 부인할 수는 없다.

게다가 나구모와 야마모토에 대한 니미츠의 평가도 바닥을 기어서, 그를 기습하는 계획을 보고받은 니미츠 제독이 더 유능한 놈이 대신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시 계획을 입안한 정보장교 레이튼 중령은 '일본군의 정신적 충격이 매우 클 것이다' + '그의 후임이 될 사람 중에서 그보다 똑똑한 사람은 없다라고 설득했다고 하고, 니미츠는 마지못해 승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레이튼 중령의 장담대로, 야마모토의 뒤를 이은 후임들도 변변치 못했으니….

또한 그 역시 일본군의 전형적인 병폐였던 연공서열과 구시대적 함대결전 사상에 찌든 면모가 속속 드러나고,[9] 그 자신이 조약파이면서도 조약파와 함대파간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군령부총장이 이끄는 함대파에 영합하는 발언을 하여 조약파가 대량 숙청당했을 때 무사히 빠져 나갔으며, 전쟁을 막고 싶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떠벌이기만 하고 다녔다는 비판이 나오는 등 실은 평판에 거품이 많이 낀 인물임이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심각한 도박 중독였다. 일단 자리에 한번 앉으면 열시간이고 스무시간이고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런 기질이 전투에서 드러난 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주만 기습도 미드웨이 해전도 자기 감에 맡기는 "올인"한 작전이었는데 전자는 제대로 허를 찔렸으나 후자에서 180도 뒤집힌 까닭에 그 한 판으로 여지껏 번 돈의 절반을 홀라당 말아먹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후임들은 아예 판돈을 불살라버린다.

또한 러일전쟁에 초급장교로 참전했을 때 전투와는 무관한 사고로 손가락을 잃었는데 후에는 이것을 전상이라면서 자랑하고 다녔다고도 하고, 이래저래 과시욕이 좀 있는 사람인 건 사실인 듯 하다. 이런 예는 일본군 전체를 봐도 많은데 예로 황족인 후시미노미야도 러일전쟁 중 가슴에 전상을 받았다는 걸 자랑하고 다녔다는데, 실은 전상이 아니라 사고로 다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함대파에 속하였던 후시노미야가 군령부 총장이 되었을 때 동병상련의 정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야마모토가 조약파였음에도 중책에서 내쫓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일 때문에 살려준 것이다. 게다가 야마모토 자신의 정치력도 대단했고. 케케묵은 전함우위사상에 물들어서 그렇지 후시노미야는 사람보는 눈 하나는 나았다.[10] 함대파에게 가장 강경하게 반응한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강경한 남자야말로 쓸모가 있다"는 이유로 한직이긴 하지만 연습전함 히에이의 함장으로 임명하여 해군 상층부로[11] 복귀할 길을 열어놓은 것만 보아도 사람보는 눈은 확실히 있었던 사람이다.

그래도 일본 군부에서 미국의 쇼미더머니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인물임은 확실하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당시 불만을 품은 강경파들을 상대로 이 조약의 의미는 일본 해군이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을 5로 묶은 데 있다. 무제한의 건함 경쟁이 일어나면 3대 해군국간의 전력비는 5대 3은 커녕 10대 1로 벌어질 것이다라면서 설득한 적이 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에서 그 말은 현실이 된다. 3국동맹에도 불만을 가졌었고 진주만 기습때도 대미교섭이 타결되면 어떤 시점이든 간에 즉시 귀환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일선 사령관들이 불만을 품자 "불만이 있는 자는 당장 이 자리에서 사표를 제출하라."'는 식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의외로 인재보는 눈은 있어 그도 오자와나 야마구치 같은 이들을 눈여겨보긴 했지만 기기묘묘한 일본 해군의 구조덕에 그들은 필요한 순간에 함대를 지휘할 자리에 앉지 못했다. [12]

가끔 일본 해군의 바보짓중 하나인 "물에서 석유뽑는 사기 사건"에 야마모토 제독이 연루되어 있었다는 말이 돌긴 하지만 그냥 보고 라인에만 야마모토 제독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기에 낚인 사람은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대신과 해군 항공본부 교육과장 오니시 타키지로 대좌. 여담인데 이 오니시가 바로 카미카제를 최초로 지시한 장본인이다. 천하의 개쌍놈. 그리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고노에도 상병신이다.

구두쇠 기질이 있어서, 집에만 오면 옷 닳는다며 훈도시만 입고 지냈다고 한다.

1.4. 매체에서의 등장

가공전기나 대체역사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몽키 D. 루피로 분했다. 원래는 이 문서 최상위에 링크된 란스 시리즈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코스프레를 시킬 셈이었는데 너무 매니악해서 교체당했다고 한다.(…)

허니와 클로버의 일본 해군빠인 하나모토 슈지가 좋아하는 인물... (오해할까 덧붙이지만 만화는 밀리터리랑 전혀 상관이 없다. 그냥 지나가는 컷으로 언급되는 수준.)이지만 역자가 밀덕이 아니여서 '야마모토 고주로쿠'로 잘못 표기되었다.

2011년 12월 진주만 공습 70주년 기념으로 일본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개봉했다. 제목은 그의 이름과 같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감독은 《8일째 매미》의 루시마 이즈루이다.쿠쇼 고지가 야마모토 이소로쿠 역을 맡았고 모토 아키라나이 미쓰마사 역을, 아베 히로시야마구치 다몬으로 출연한다.


영화의 성격상 그를 꽤나 미화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일례로 미드웨이 해전 패배의 책임에 대해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아니라 군령부 측에 전가하고 있다.[13] 실상은 야마모토 본인 지위를 이용해서 똥고집을 부린게 그 원인이었지만...

영화에 나오는 장면들 중 과달카날에 상륙한 병사들이 고립된 상태에서 "지금이야말로 거함거포를 쓸 때가 아닌가!"라며 함대결전을 주장하는 사령관이 "연료가 없다(아부라가 나인다)."고 대답하는 말을 듣자 조용히 주저앉는 장면이 유명하다. # [14]

2. 란스 시리즈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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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감벽의 함대에서는 이 이름으로 나온다.
  • [2] 예: 一郞(이치로),二郞(지로).
  • [3] 열대지방이라 발견했을 때 구더기가 들끓는 등 부패가 빠른 속도로 진행된 탓도 있다.
  • [4] 일본에서의 원수는 계급이 아니라 칭호다. 원수 항목 참조.
  • [5] 쉽게 말해, 백엽검 기사 철십자장을 받기 위해서는 최하위인 2급 철십자장부터 시작해 하위 철십자장들을 모두 받아야 한다.
  • [6] 도라!도라!도라!에서도 저 대사가 나오는데 미국판의 자막은 그냥 순화시켰다.
  • [7] 평소처럼 흰색 하정복인 2종 군장(#)을 입고 있다가, 육군 인원들을 만날 예정이라 육해군이 동질감을 느낄만한 녹색 군복을 입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참모들과 함께 3종으로 갈아입고 비행기에 탔다.
  • [8] 이러한 점은 전근대적인 사고를 완전히 떨치지 못했던 이홍장이나 흡사 대한민국 검찰마냥 독일 내에서 자기네들의 소왕국을 건설했고 그에 따라 파벌주의적 경향을 보인 독일군의 수많은 장성들에게서도 나타나는 사항이다.
  • [9] 사카이 사부로가 여러 서적에서 그를 제대로 깐다 비판한다.
  • [10] 야마모토는 나구모와는 다른 라인이었다.
  • [11] 이 시기에는 전함의 함장으로 근무하는 것이 제독으로 승진하는 코스였다. 그리고 연습전함 히에이에는 히로히토 덴노도 종종 좌승하곤 했다
  • [12] 나구모는 그가 데려온 게 아니라 연공서열로 앉게 된 케이스였다.
  • [13] 가령, 해군 군령부는 전선을 동쪽으로 밀기 위해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라고 했고,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함대 격멸로 잡았다. 그리고 군령부 총장이 자기네 라인인 나구모를 불러 미드웨이 섬 점령을 우선하라고 한 장면이 나온다.
  • [14] 실제로 일본 해군은 연료부족에 자꾸 시달려왔다. 제대로 정제도 하지 못한 기름을 넣은 탓에 침몰한 다이호의 예시나 폭사했지만 그 연료탱크에서 연료를 긁어다 주유해야 했던 무츠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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