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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

last modified: 2015-02-19 22:21:44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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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1. 설명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연안에 있는 소련의 휴양도시 얄타(후일 러시아 소속 크림 반도 소재.)에서 연합군(영국, 미국, 소련)의 수뇌부가 모여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한 회담이다.

여기서 전후 독일의 분할(동독/서독) 및 비무장화와 나치 독일 잔재의 청산, 소련의 대(對) 일본 전쟁 참전, 폴란드의 영토 문제 등이 결정되었다. 이 회담에서 독일은 동부 영토를 대거 폴란드와 소련에 넘기는 걸로 결정났다. 오데르-나이세 동쪽 모든 영토(예를 들면 쾨니히스베르크 등), 및 서쪽에 있더라도 슈테틴과 같은 도시는 폴란드에 할양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2차대전 후 독일과 폴란드의 영토 문제 참고.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진정한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미국-소련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안에 대해서는 소련의 손을 들어줬다. 유럽에서 소련의 팽창을 염려한 영국 수상 처칠의 반대를 루즈벨트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유럽의 세력 재편성도 루즈벨트가 스탈린의 제안을 거의 다 수용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한편으론 아직 핵무기가 완성되지 않은 불명확한 시점에서, 일본과의 전쟁에서 미국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소련의 참전이 필요했다는 점도 루즈벨트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었다.

실제로 소련군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순식간에 붕괴시킨 것을 보면 이는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다. 반면 영국은 말레이 해전으로 인해 미국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전력을 동아시아에 제공할 수 없었고, 유럽에서도 그 세력은 소련이나 미국에 비할 바가 못 되었기 때문에 루스벨트는 회담의 실질적 파트너로 스탈린을 선택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이 소련을 좀 과대평가한 측면도 있었다.

처칠에 따르면, 10년 동안 연구해도 이곳보다 세계에서 더 나쁜 곳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들으면 얄타가 매우 안 좋은 곳 같지만, 얄타 자체는 흑해 연안의 아름다운 휴양도시이고, 소련 고관들이 여름을 보내는 곳이었다[1]. 문제는 영미측 협상단의 방 안에는 모조리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더구나 영미측 협상단 내에는 소련의 간첩이 있어서 소련측은 영미측의 의도를 모두 알고 협상을 할 수 있었으니 당연히 소련이 전후처리의 흥정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밖에 없었다. 철의 장막이 세워지는데 톡톡한 역할을 한 것.

그런데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쪽에서는 숙소에 도청기가 널려 있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체하며 소련에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이는 대통령 루즈벨트의 의향이었는데, 전후 세계평화가 확립되려면 양대 초강국인 미국과 소련의 진정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루즈벨트는 얄타 회담 중 처칠이 미-영 회담을 제안하거나 소련을 배제한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면 한사코 거부했고, 오히려 스탈린에게 친근하게 굴었다고 한다. 흠좀무. 심지어 루즈벨트는 스탈린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발트 3국의 소련 병합을 인정하겠다고 약속하여 스탈린의 호감을 사는 데 성공했다.

원래 영미에서는 자기들에게 가까운 스코틀랜드, 몰타아테네에서 회의를 하자고 제안했었으나 스탈린이 주치의의 권고에 따라 모두 거절했다. 덕분에 병든 루즈벨트는 의사와 동료들의 권고를 뿌리치고 4,883마일을 항해한 후 대통령 용기로 1,375마일을 더 비행해 에 도착했다. 결국 루스벨트는 안 그래도 나빴던 건강을 해쳐 그해 4월에 뇌일혈로 사망한다. 스탈린 역시 기차로 이동했다는 떡밥이 있으나, 비행기로 이동했다. 의전을 무시하고 안전을 생각해서 장교가 조종하게 했다고 한다.

국제정치학계에서는 이 얄타회담을 냉전의 시작으로 본다. 이 때부터 영미와 소련은 이해관계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바란 연합국간의 균열은 벌어지지 않았다.[2] 루즈벨트가 죽어도 프리드리히 대왕 엔딩 플래그 따윈 없었다 다음 회담은 아예 독일령인 츠담 회담이었다.

애초에 '3거두 회담'이라고 하지만 1945년 2월 시점에서 더 이상 영국은 초강대국이 아니었고, 미국과 소련의 흥정과 거래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들러리 신세에 가까웠다. 어떤 의미에서 얄타 회담은 초강대국으로서 19세기20세기 초반을 풍미한 대영제국 몰락의 마지막 방점을 찍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윈스턴 처칠로서도 그의 영예의 마지막이었는데, 포츠담 회담에서는 아예 회담중에 영국 노동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처칠이 레멘트 에틀리에게 자리를 비워주어야 했다.

그리고 이 회담은 처음부터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여기 참가한 세 나라 정상들 중에서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먼저 스탈린은 뇌중풍으로 인한 발작으로 치매로 정상적인 의사결정이 어려웠고, 루즈벨트는 이미 뇌경색으로 한번 쓰러졌던 사람이라 현재라면 대통령을 그만둬야 할 정도로 건강이 무지 좋지 않았던 탓에 이 회담이 있고 2달 뒤 사망한다. 처칠은 세사람 중 그나마 정상적인 사람이었으나 훗날 그도 치매로 사망한 것으로 보아 이때는 건망증이 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당시 보좌관들이 합의한 거나 마찮가지였다. 즉 외무장관들이 합의한 포츠담 회담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회담에서 얻은 것이 세나라 모두 없어서 얼마 후 포츠담 회담이 다시 열린 것도 아마 이러한 상황에 합의를 위해서 제대로 된 합의를 이끌어야 하였던 문제로 그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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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흑해 연안의 휴양도시로는 소치도 있긴 하다.
  • [2] 나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이며 독소전쟁 때 대량학살을 자행한데다 유태인 제노사이드까지 저지른 악독한 짓을 했다. 즉 미영불이 소련을 정치적인 가상 적국이라고 찍었다면 애초에 나치인류의 적으로 찍혀있었다! 다만 나치가 그만큼 절박했던 탓도 있다. 1944년괴벨스를 중심으로 소련과 단독교섭을 진행하다가 크게 실패를 거둔 상황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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