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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

last modified: 2015-04-10 18:14:58 by Contributors

Contents

1. 일반 명사
2. 서진의 장수
2.1. 생애
2.2. 타루비
2.3. 기타 창작물에서
3. 수나라의 비정통 황제


1. 일반 명사

  • 良好, 훌륭함, 썩 괜찮음을 뜻하는 단어. 어감상 우수와 무난의 중간쯤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 養護, 학교에서 학생의 위생, 건강 등을 돌보아 주는 것을 뜻한다.

2. 서진의 장수

羊祜
(221년 ~ 278년)

서진의 정치가 겸 장군. 자는 숙자(叔子).

2.1. 생애

태산 평양 사람으로 태산군의 명문 출신이며, 후한의 학자 채옹의 외손자이자 채염의 외조카다. 거기에 신비의 딸 신헌영의 조카. 더불어 하후패의 사위이기도 하다.[1] 그의 누이 양휘유사마사의 후처가 되어 후에 경헌황후로 추존되었다.

양호의 가문은 대대로 2천석의 관리를 지내 9대째인 양호에 이르러 맑은 품덕으로 이름나자 양호가 아이일 때 문수가에서 놀고 있을 때 지나가던 노인이 그를 보면서 처사는 관상이 휼륭하니 노력하면서 60세가 안되어 천하에 큰 공을 세울 것이니 부귀하게 되면 자신을 잊지 말라고 했다.

조상이 정권을 잡았을 당시 왕침이 양호를 눈여겨보고 관직에 추천하려 했으나 그는 '목숨을 다해 사람을 받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 말하며 거절했다. 뒤에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몰락하자 왕침은 그의 생각이 옳았다고 했는데, 이 때도 일이 미처 그리될 줄은 몰랐다고 대답해 선견지명을 지녔음을 보여 주었다.

사마소가 대장군이 되었을 때 중서시랑, 급사중, 황문랑을 역임했다. 당시 황제였던 조모가 시문을 좋아해 많은 시문을 지어 바쳤지만 이것이 다른 신하들의 비위를 거슬러 한직으로 밀려났다. 조환이 제위에 오르자 거평의 6백호를 받아 관의 비서감이 되었다. 종회는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시기해 매번 헐뜯을 구실을 찾았다고 하며, 이 눈치를 안 양호도 종회와 맞닿는 것을 피했다. 종회가 성도에서 난을 일으키려다 피살당하자 중앙으로 복귀해, 종사중랑이 되어 기밀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서진 건국 때 왕침, 순욱, 가충, 배수 등과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진이 세워진 뒤 중군장군 산기상시가 되어 군공에 봉해졌지만 이를 사양해 후의 작위를 받았다. 태시 연간에 상서우복야 겸 위장군에 올랐다.

도독형주제군사에 임명되어 양양에 주둔하며 형주 북부를 지켰는데, 농지 8백여 경를 개간하여 10년치 군량을 마련하고 형북 일대의 민심을 수습하며 오나라 포로 중 고국을 그리워하는 자가 있으면 기꺼이 보내주는 등 너그러운 정책으로 신망을 얻었다. 오 지방 사람들은 감복해서 그를 양공(羊公)이라 칭하고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오의 석성 태수가 자주 양양을 침공하자 계책을 써서 그를 파면시키는 등 군략에서도 빈틈이 없었는데, 후에 거기장군까지 승진했으면서도 진중에서 갑옷 대신 편한 옷차림으로 걸어다닐 만큼 소탈한 모습이었다고 전한다.[2]

272년 의 서릉독 보천이 서릉을 바치며 투항하면서 뒤이어 육항이 보천을 급하게 추격했고 형주자사 양조와 더불어 보천을 구원하고 강릉을 공격하려 했으나 육항의 계략에 속아 군량을 나르기 어렵게 되어 결국 철수했고, 보천도 죽음을 당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벼슬이 평남장군으로 강등되었다.

그 뒤로도 계속 육항과 대치하며 양양을 지켰는데, 육항과도 입장을 초월한 교분을 나누어, 서로 사자를 통해 술과 약을 거리낌없이 주고받는 등 대범하면서도 인간적인 면으로 주변을 감복시켰다. 이 일화에 대해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김홍신 평역판 기준).

양호의 부하들이 양호에게 와서는 "지금 오군은 군주가 포악하여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군사들도 오합지졸이라고 합니다. 이 때 오군을 쳐야 합니다."라고 간하자 양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육항을 가볍게 보고 있다. 지난날 육항이 서릉으로 군사를 이끌어 우리 군사를 무찌르고 보천을 죽였을 때 나는 내 부하들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러니 가만히 있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자 부하들이 그 말을 듣고 움직이지 않았다.
(중략)
한번은 양호의 군사가 사냥을 나갔는데, 마침 그 때 육항의 부하들도 사냥을 하고 있었다. 이에 양호는 부하들에게 "절대로 오군의 경계를 넘지 마라."라고 주의를 줬고, 부하들이 그에 따르자 육항은 "진군은 저렇게 질서가 서 있으니 쉽게 쳐부수지 못할 것이다."라고 감탄했다.
양측이 사냥이 끝나고 돌아와서 확인을 해 보니 오군의 화살을 맞고 진군에게 잡힌 동물이 있자, 양호는 그러한 동물들은 오군에게 돌려 주도록 했다. 오군이 사냥감을 돌려받고 기뻐하는데 육항이 심부름 온 군사에게 양호가 술을 좋아하냐고 묻자 부하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에 육항은 술 한 동이를 줘서 돌려보냈는데 부하들이 이유를 묻자 "적이 나를 덕으로 대하는데 똑같이 대하는 게 예의 아닌가?"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한편 술을 가지고 돌아온 부하가 상황을 설명하자 양호는 술을 마시려 했다. 부하들이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며 말리자 양호는 웃으면서 "육항은 그런 짓거릴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안심시키며 술을 다 먹었다. 이후 두 장군은 서로 부하를 보내 안부를 묻기도 했다.
한번은 육항의 부하가 와서 육항이 병들어 누워 있다고 하자, 양호가 혀를 끌끌 차면서 "장군의 병은 나와 같은 병일 것이다. 이 약을 가져다 드려라."라고 했다. 이번에도 육항의 군사들이 "그건 위험한 약입니다"라고 말렸지만 육항은 개의치 않고 약을 먹었고, 병이 나았다. 병이 나은 육항에게 부하들이 축하하니, 육항이 그들에게 "양호가 이끄는 군대는 질서가 잡혀서 무너뜨리기 힘드니, 우리가 섣불리 들어가는 것은 손해다. 그 쪽에서 무너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육항은 손호의 미움을 사서 파직당했다. 배드 엔딩

함녕 연간에 정남대장군, 의동삼사로 임명된 뒤에는 육항이 죽고 오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익주자사 왕준을 익주제군사로 세운 뒤 선단을 건조하게 했다. 뒤이어 사마염에게 상소해 오를 쳐야 한다고 했으나 가충, 풍담, 순욱 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277년에 거평후에서 남성군후로 책봉되자 이를 사양했으며, 그 후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임종의 자리에서 사마염에게 두예를 천거하고 병사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살짝 더 부풀렸다.

양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사마염이 병문안을 와서는 "그대의 말을 듣고 오를 일찍 쳤어야 했다."라고 후회하자 양호는 목숨이 위중한 와중에도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두예를 총사령관으로 하면 쳐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마염이 "왜 천거(추천)하는 글을 불사르고 이렇게 비밀스럽게 얘기하는가?"라고 묻자 "가끔 추천을 받은 사람들이 추천했던 사람에게 와서 사례를 표하는 일이 많습니다. 신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후 얼마 못 가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마염은 통곡했다고 한다.


죽은 뒤 태부 및 남성후에 추증되었고[3] 후에 오를 정복하자 사마염은 이 모두가 양호의 공이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쉽게도 양호는 자식이 없어서 그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또한 남주 사람들은 양호가 죽었다는 소식을 곡하면서 상복으로 휘장을 쳤다.

삼국지연의 마지막회를 장식하는 인물 중 하나로, 장수로서나 인격으로나 출중한 능력[4] 을 보여줬지만 아무래도 우세한 쪽의 장수였기 때문인지 오 최후의 명장으로 불리는 육항보다는 약간 평가가 처지는 편. 그래도 천하통일 후 서진의 행보가 어땠는지 상기할 때 그같은 인물이 오래 살아서 사마염을 충심으로 보필했다면 정권의 미래가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2.2. 타루비

양호가 세상을 떠나자 양양 일대 백성들이 몹시 슬퍼하여 그가 도독으로 지내던 시절 즐겨 거닐던 현산 [5] 에 비석를 세워 고인을 기리기 시작했는데, 좀더 구체적인 경위는 아래와 같다.

어느날 현산에 추담과 함께 올랐을 때 양호가 "이 산은 옛부터 많은 현인재사들이 올랐고 그보다 더 무수히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올랐지만, 그들의 이름은 모두 역사에 묻힌지 오래이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하지만 나는 죽어서 사람들에게 잊혀진 뒤에라도 계속 이곳에 오르고 싶다네." 라고 말하자 그 친구는 "그대의 높은 덕은 모두가 아는 바이니 이 산과 더불어 길이 전해질 것이오." 라 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세설신어에도 실려있다.

이런 연유로 양호를 기리는 비석을 현산에 세웠으며, 그 비석에 적힌 내용을 읽고서 울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라 해 타루비(墮漏碑) 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후대 당나라 때에 양양 출신인 맹호연이나 이백 등이 이 비를 소재로 시를 남기기도 했다.

덧붙여 우리나라에도 전라남도 여수 고소동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타루비(보물 제 1288호)가 남아 있는데, 바로 이 양호의 고사를 본받아 장군의 덕을 길이 추모하려는 뜻에서 세웠다고 적혀 있다. 이로 미뤄보면 조선시대에도 양호는 여전히 덕장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3. 기타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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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 10 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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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최후반부에 주력으로 쓸만한 무장. 등장 시기 자체가 어차피 장수들이 바닥나는 때라서 크게 의미는 없을수도 있겠지만, 60대 중반쯤으로 낮은 무력치 외에는 다른 능력들이 꽤 훌륭하다.

삼국지 3에도 등장하는데 제발 싸움꾼을 출연시켜달란 말이에요. 능력치는 거의 별거 없는 수준이다. 다만 지력 하나 정도는 군사는 될 수 있는 수준이긴 하다. 육지83 수지72 무력46 지력80 정치79 매력74에 야망8 운7 냉정5 용맹8로 싸움을 못하는 학소라 할 수 있다. 다른 능력치가 죄다 학소와 비슷한데 지력이 살짝 높고 무력이 현저하게 낮다. 능력치는 전형적인 문관 계열인데, 얼굴은 무관 계열 범용 얼굴로 등장한다.

삼국지 5에서는 능력치가 무력 83/지력 82/정치 80/매력 86으로 좀 어정쩡하다. 보유진형은 추행/기형/수진이며, 습득특기는 침착/격려/수계/수신/화시/응사이다. 아무래도 양호가 무관인 이상, 전투에서 주로 쓰기 마련인데, 지력90-정치80이상을 동시에 만족하는 장수는 군사라는 별도 계급으로 취급하여 용명에 관계없이 20,000명의 군사를 거느릴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장수는 용명이 없을 경우 8,000명밖에 군사를 거느릴 수 없다. 양호는 당연히 221년생인만큼 제일 마지막 시나리오인 시나리오7에서도 초기엔 등장하지 않고 240년에 등장한다. 한마디로 모든 시나리오에서 바닥부터 올라가야 된다는 소리. 비슷한 처지로는 학소가 있는데(물론 학소는 적당한 시나리오에선 용명이 바닥까진 아니다.) 학소는 지력이 89지만 수행로또가 터져만 준다면 바로 군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저 양호는 안습.

삼국지 9 이후 시리즈에 접어들수록 능력치 총합이 딱 10위권 전후를 왔다갔다 할만큼 균형잡힌 능력치 보유자로, 라이벌인 육항보다 지력은 약간 못하나 인품이 높았다는 평가 때문인지 매력은 늘 90대 근처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87/69/91/86으로 총합은 거의 사기적인 수준. 분투와 연사도 보유하고 있지만 무력이 약간 낮은 게 흠이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87/65/87/85/90에 특기는 12개이고 명사특기가 있다. 능력치 총합이 무려 414로 강유에 이어 전체 11위. 군사특기가 없는것이 조금 아쉬울 뿐.

삼국지 11에서도 전작과 비슷한 90/64/84/87/89의 능력치에 병과적성이 창,노가 S가 인 무장이고 총합, 순위가 모두 전작과 동일하게 414, 11위이다.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선 능력 및 병종적성이 괜찮아서 사마의 진영의 주력으로 활약시킬 수 있으나 보유 특기가 효율성 미묘한 정묘라는 게 문제. PK라면 강력한 특기로 바꿔주자. 삼국지 11 한국어판 열전에서는 "사마사의 아내"라고 오타가 나 있는데, 원문은 "누나는 사마사의 아내"이다. 완벽한 발번역

삼국지 12에서는 복병이란 전법이 생겼다. 안그래도 병종이 궁병이라서 스나이퍼 플레이를 할수가 있다. 능력치는 전작과 동일하고 군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예상대로 히카루의 바둑(고스트 바둑왕)의 도우야 아키라로 나온다. 전투외편 6-1에서 짤막하게 첫 등장.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서의 기록과, 일본어 읽기 방법 때문인지[6] 삼국지대전에서는 아예 여성스러운 외모의 캐릭터로 그려졌다

김용신조협려에서도 양과의 부탁으로 양양 영웅연을 암암리에 돕는 등장인물들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한 훌륭한 인물로 평가하는 듯. 극중 설명에 따르면 양과와 양호는 훌륭한 행적도 견줄만 한데다 이름을 읽는 법도 같다.[7]

3. 수나라의 비정통 황제

楊浩

586 ~ 618

수문제의 손자이자 수양제의 조카로 진효왕(秦孝王) 양준(楊俊)과 최씨(崔氏)의 아들이다. 양준 사후 진왕(秦王)이 되었는데 618년, 좌둔위장군 우문화급이 동생 우문지급과 함께 병변을 일으켰다. 양제는 우문화급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알고 도망가려 했으나 이내 우문화급의 무리에게 붙잡혔고 허리에 매고 있던 띠로 교살당했다. 양제를 시해한 우문화급은 양제와 같이 있던 수나라 황족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는데 우문화급의 동생 우문지급과 친했던 양호만이 화를 피하고 살아남았다.그리하여 우문화급은 양호를 황제로 추대하고 자신은 섭정으로써 모든 권력을 차지했다.

이 후 황제 양호와 대신들, 자신의 측근 및 병사는 물론 양제의 보물들까지 이끌고 수나라의 옛 수도인 낙양으로 향했다. 이 때 낙양에서는 세충을 비롯한 여러 관리들이 양통(楊侗)을 황제로 옹립한 상태였다. 낙양의 관리들은 다른 반란세력 이밀에게 위공(魏公)의 자리를 주고 우문화급을 막게 했다. 우문화급은 이밀과 몇 차례 싸웠지만 우세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우문화급 진영의 군량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밀은 우문화급에게 화친을 제의하는 척 하면서 우문화급 진영의 군량이 완전히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우문화급은 이밀의 이러한 전략을 알아챈 뒤 이밀의 진영을 기습했고 거의 이밀을 죽일 뻔했으나, 결국 이밀을 죽이는 데 실패했다. 우문화급은 이밀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식량도 얻지 못한 채 북상했다. 이 때 양호는 우문화급에 의해 폐출되었고 독살했다. 이 후 우문화급은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고 그는 국호를 ''(許), 연호를 천수(天壽)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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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하후패의 동생 하후위가 태산에 부임했을 때 양호의 기량에 반해 하후패를 설득해 조카를 시집보내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후에 하후패가 에 투항했을 때 많은 친족들이 하후패와 절연을 선언했으나, 양호는 오히려 장인의 안위를 염려하고 아내를 위로할 만큼 정이 깊었다고 한다.
  • [2] 서윤이라는 인물이 '장군의 몸에는 나라의 안위가 달려 있으니 함부로 행동하셔서는 안 됩니다' 라고 간한 뒤부터는 그만두었다고 한다.
  • [3] 죽을 때까지 남성후에 임명되는 것을 사양했으며 검소한 장례를 원했지만 사마염은 끝내 그의 관에 남성후의 도장을 넣었고 낙양성 밖의 장지를 골라 묘소로 하사했다.
  • [4] 진서 양호전에 따르면 지관이 양호 조부의 무덤에 제왕의 기운이 있다고 말하자 양호가 무덤을 파헤쳐 옮겼는데, 지관이 '그래도 팔 부러진 삼공이 나온다' 는 얘기를 했고 후에 정말 한쪽 팔이 부러진 일이 있었지만 삼공의 지위에 올랐다는 얘기가 실려있다. 능력과 충성심 양쪽을 겸비했음을 강조하는 예화인 듯.
  • [5] 오늘날의 후베이성 샹판시 남쪽에 있는 현수산 (峴首山)
  • [6] 羊祜를 일본어로 읽으면 요코(ようこ)로 매우 여성적인 느낌이다.
  • [7] 물론 중국식으로 읽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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