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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last modified: 2015-10-20 06:19:07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어진 제작
2.1. 제작 과정
3.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어진
3.1. 삼국시대
3.1.1. 경순왕
3.2. 고려시대
3.2.1. 고려 태조
3.2.2. 공민왕
3.3. 조선시대
3.3.1. 조선 태조
3.3.2. 조선 세조
3.3.3. 조선 영조
3.3.4. 조선 순조
3.3.5. 조선 철종
3.3.6. 조선 고종
3.3.7. 대한제국 순종
3.3.8. 왕족의 그림
3.4. 기타
3.4.1. 삼국시대
3.4.1.1. 가야
3.4.1.2. 고구려
3.4.1.3. 백제
3.4.1.4. 신라
3.4.1.5. 발해
3.4.2. 고려
3.4.3. 조선
4. 외국에 현존하는 어진

1. 개요

御眞

의 초상화. 진용(眞容),영정(影幀),왕상(王像)등의 단어로 불리다 1713년 숙종 39년 숙종 어진을 그릴 당시 어용도사도감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였던 이이명(李頤命)의 건의에 따라 '어진'이라는 명칭으로 통일되어 불렸다.

영자(影子)는 왕이 지칭하는 것이므로 신하로서는 감히 지칭할 수 없고, 영정(影幀)은 그 뜻이 회화를 열어 펼친다는 뜻이니 족자(簇子)로 꾸며진 것이 아니면 칭할 수 없는 것이다. 수용(수容)이란 단순히 모습을 지칭하는 것이니 부를 바가 못 되며, 어용(御容)역시 거칠고 투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전신(傳神)이란 사진(寫眞)으로 불려왔으며, 또한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는 처소를 진전(眞殿)이라 하므로 왕의 화상 역시 어진(御眞)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 《승정원일기》

2. 어진 제작

기록이 남아있는 조선 시대를 기준으로 작성하였다.

어진 제작은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模寫) 이렇게 3종류로 나뉜다. 다만 도사와 모사는 1713년 이전에는 모사(模寫)라는 단어로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 도사(圖寫) : 왕이 살아있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리는 것.
  • 추사(追寫) : 왕이 살아있을 때 그리지 못하여 사망 후 그리는 것.
  • 모사(模寫) : 왕의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새로운 진전에 봉안시에 기존의 어진을 본떠 그리는것.

어진 제작을 위해 도감(都監)을 설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왕실 종친들이 주도하는 종부시(宗簿寺)에서 관장하기도 했다. 또 유화(儒畵)라는 기술적 조언자들도 참가해 잘못된 부분에 대해 조언을 해 주기도 했다.

직접 제작하는 화원을 어진화사(御眞畵師)라고 불렀는데 도화서 화원 가운데 뽑았지만 마땅히 사람이 없을 경우엔 민간의 화가중에 선발해서 그리게 하기도 하였다. 어진화사(御眞畵師)는 보통 6~7명 선이었지만 최대 13명까지 이를 때가 있었다. 어진화사 중에서도 집필화사(執筆畵師)와 왕의 몸 중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그리는 동참화사(同參畵師), 물감을 섞는 일을 돕는 수종화사(隨從畵師)로 나뉘어 있다.

2.1. 제작 과정

어진의 초본을 완성하면 비단 위에 먹으로 초본을 옮겨 채색을 한다. 채색이 끝나면 뒷부분을 종이로 배접하여 잘 말린 후 영정의 네 가장자리를 두르는 장황을 하고 뒷부분을 비단으로 배접한다. 옥축, 홍사유소[1], 봉안색환[2]등을 부착하고 마지막으로 표제(標題)작업[3]이 끝나면 어진 제작이 완성된다.

표제를 마친 어진은 길한 날을 선택하여 진전에 봉안했다. 진전은 임진왜란 이전에 총 6곳에 이르렀는데 한양의 문소전, (이성계의 고향인) 영흥의 준원전, 평양의 영숭전, 개성의 목청전, 경주의 집경전, (이성계의 본향인) 전주의 경기전에 영전들을 배치했다. 이는 한나라 한고조의 묘를 수도뿐만 아니라 군국에 분립하게 했다는 제도를 따른 것이다. 다만 이것들은 모두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4], 경기전의 어진만이 살아남아 병자호란 등의 전쟁에서도 이리저리 옮겨다녔다고 한다. 영조때의 전주성 대화재(1767년)도 피했다니 참 운 좋은 어진인 셈이고 그 덕분에 우리는 태조의 어진만큼은 볼 수 있다. 역시 복사를 많이 해놓아야 후손들에게 전해지기 좋다 뒤에 가면 이런거많이 나올거임

3.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어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정식적으로 그려진 어진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 시대도 몇 없는데 당연 이들 어진은 그린 이가 확실하거나 혹은 사서에 등장하는 어진으로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그림이기 때문에 등재했다.

3.1. 삼국시대

3.1.1. 경순왕

1794년에 이명기가 그린 경순왕 초상 1904년 승려화가 이진춘이 그린 밑그림

눈썹 신경쓰면 지는거다
통일신라가 멸망한 직후인 고려초에 경순왕을 추모하기 위해 강원 원주시 고자암[5]에 봉안해 놓은 경순왕 어진을 모사한 작품들이다.

  • 1677년 강원도 원주 고자암에서 제작된 것
  • 1749년 경북 영천 은해사 상용암에서 제작된 것
  • 1794년 초상화가 이명기가 은해사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 1904년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그리고 이것의 밑그림

이들 어진은 경순왕 사당인 경북 경주시 숭혜전 창고에 방치되었다 2007년 최초로 발견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어진으로[6]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유물이다.

3.2. 고려시대

3.2.1. 고려 태조

(ɔ) User:Dikinodon from
경기도 연천 숭의전에 있는 태조 왕건의 영정
조선 시대에 그려진 영정의 1950년대 이전 모사본이라 한다.
얼굴 확대 (좌우 반전) 눈이 장난아니게 비범하다


3.2.2. 공민왕

고려 공민왕 어진으로 전해져 오는 그림(오른쪽 인물, 왼쪽은 노국공주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재위 4년째인 1395년에 종묘 창건을 하며 경내의 신당에 봉안했던 그림인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리자 광해군 때 건물을 복원하면서 이모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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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대원리의 화장사라는 절에 소유하고 있던
공민왕의 초상이라고 전해졌던 그림이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참조.

3.3. 조선시대

조선시대 어진은 임진왜란 때 궁궐이 타면서 태조의 어진, 문종의 어진[7], 세조의 어진만이 남았다고 전해진다. 이 후 왕들의 어진을 다시 그렸고 임진왜란 이후의 모든 왕들은 어진을 그렸다고 한다. 예를 들어 조선 선조처럼 어진 그리기를 거부한 왕이 있는가 하면 행사 때마다 어진을 그린 조선 정조처럼 자주 그린 왕이 있었다.

1921년, 고종의 3년상이 끝난후 당시 전국에 있던 왕의 그림들과 각 궁궐에 퍼져있던 역대 임금들의 어진들을 한 곳에 모아 모시기로 하고 창덕궁에 선원전을 설치했다. 1921년까지 남아있던 어진들은 태조, 세조, 덕종(성종의 아버지로 추증), 정원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효명세자, 헌종, 철종, 고종의 어진 뿐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전의 어진은 거의 다 불탔는데 세조와 덕종의 경우 이이첨이 건졌다. 그리고 문종의 어진도 건저냈다.

의아한 점은 일제강점기때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불타 없어지기까지 9년이란 시간동안 어진을 찍어놓은 사진이 없다시피하다는 것이다. 왕의 어진이라는 이유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 게 주 원인으로 이때 사진이라도 찍혔다면 조선 왕들의 얼굴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일정 정도의 추정, 보정을 거쳐 복원도 가능했을 텐데 말이다.

이 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한국전쟁 당시에 다른 왕실 유물과 함게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 관재청 벽돌식 창고에 보관되었다. 하지만 희대의 병크가 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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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용두동 대화재 당시. 안돼

1954년 12월 10일 새벽 광복동 피난민 주거지에서 일어난 큰 불이[8] 근처에 있던 관재청에도 불이 옮겨 붙어서 모두 불탔다. 문제는 전쟁 중에 탄 것도 아니거니와, 이 화재 당시 관계자들은 창고 열쇠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물들이 불타고 있는걸 구경하고 있었고 문화재청교부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는 왕실유물이라고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 해방 후에 사진이라도 찍어뒀더라면 복원하는데 참고라도 됐을텐데 이 때 소설된 어진들은 익선관본 순종 어진 사진을 제외하면 사진조차 없다.전후 상경을 못한 상황에서 관재청 창고에 불이 붙어 어진들과 왕실 유물들이 불에 타 없어진 것이다. 이 화재로 사라진 궁중 유물의 수만 해도 3400여점에 이른다.[9] 이 유물들은 목록 정리 조차 되지도 못하고 타버렸다. 거기에 엎친격에 덮친격으로 구황실재산관리총국에서 작성한 궁중유물 서류,유물들 마저 일체 1960년 6월 6일 창덕궁 청사에서 누전사고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또한 화재 이후 건져낸 유물등은 민간인에게 팔아넘겼다. 이 때문에 경찰의 조사가 혼잡해지고 언론에서도 보도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친일 순사 출신인 모씨가 방화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한마디로 망했어요.

결국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반쯤 타 버린 태조, 철종, 순조, 문조의 어진과 그나마 온전한 영조와 고종 어진 뿐이다. 태조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있는 청룡포본을 참고해 복원했고 철종 어진은 얼굴이 무사했기에 복원이 가능했으나, 순조 어진과 문조 어진은 가로로 얼굴이 완전히 불타 버려 복원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당 김은호가 순종 사후에 그린 익선관본 순종 어진은 흑백 사진으로만 전할 뿐 원본은 195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세조, 정조, 숙종, 헌종의 어진은 완전히 불타버렸으니 말 다했다.

물론 조선 왕들의 경우 어진이 없더라도 얼굴을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데 각 왕릉에 묻혀있는 왕들의 두개골만 스캔해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10] 다만 아무리 민주주의 공화정 시대라 해도 왕의 얼굴을 복원한답시고 무덤을 함부로 파내는 게 여론에는 좋지 않게 비칠 터이고 전주 이씨 종친회의 거센 반발을 이겨내야 하는데 그게 쉽나...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방법이다.

또한 세조, 정조, 원종, 순조, 철종 등의 초상화가 있는 선원보감 어진을 배경으로도 복원하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선원보감 어진은 복장부터가 익선관곤룡포가 아니라 사모단령을 입은 모습이다. 거기에 헌종이나 철종 항목에 나와 있듯이 과연 실제 인물을 보고 그리기나 한 건지 의심되는 점이 많다. 지나치게 세부적인 표현이 간략하며 거기에 그 표현마저 과장이 심하기 때문에 이 의견은 소수의견에 머무르고 있다.

3.3.1. 조선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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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타버린 원본 2011년 복원한 조선 태조의 어진

청룡포를 입은 태조 어진.

신숙주가 쓴 《영모록(永慕錄)》에 따르면 당시 선원전이라는 경복궁내 열성어진 봉안처에 받들던 태조 어진이 무려 26축[11]이나 있었으며 그중에는 말을 타고 있는 태조의 어진도 있었다고 한다. 반쯤 타버린 홍룡포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있는 청룡포 어진을 참조해 복원한 것이다.

청룡포 어진 원본은 태조가 승하한지 2년뒤인 태종 10년(1410년)에 이성계가 64세 때 모습이 담긴 경주 집경전 어진을 모사해 제작되었다. 여러가지 일을 겪으며 현재까지 남았는데 한반도에 있었던 주요 사고들을 볼 수 있다.

  •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엔 전주 지역 선비들이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전란을 피해 의주를 거쳐 묘향산으로 이안되었다.

  • 묘향산에 있던 어진은 1614년에 불에 타 없어졌던 경기전을 다시 세우면서 전주로 돌아왔다.

  • 1636년 병자호란때는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졌고 이듬해인 1637년에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 1688년 한성의 영희전에 모실 어진모사를 위해 한성으로 옮긴적도 있다.

  • 1763년엔 한차례 수리를 했고, 1767년에 일어난 전주성 대화재 당시엔 전주향교로 옮겨지기도 했다.

  • 동학농민운동 당시 위봉사 법당으로 이안된 뒤 다시 돌아왔다.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고종 9년이던 1872년 당시 경기전에서 받들던 어진이 오래되고 낡아서 영희전에 있던 태조의 어진을 화사 박기준, 조중묵, 배은배 등 8명이 4월 22일부터 5월 4일까지 모사 한 것이다. 모사본이 완성되고 1410년에 제작된 원본은 세초한 후 항아리에 넣어 경기전 본전 뒤편에 있는 북쪽 계단 위에 묻었다고 한다. 안 꺼내나

청룡포의 어진의 경우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은 물론 양쪽 트임새로 보이는 내공(內工)과 첩리(帖裏)의 형태가 조선 초기 초상화법을 닮았으며, 정면관을 훌륭히 소화해 낸 작품으로 보(補)와 견룡(肩龍)의 이금(泥金) 효과에 의하여 왕의 품위가 돋보이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로 태조 이성계의 최초 어진은 1389년 고려 공양왕이 왜구 토벌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성계의 공적을 치하하면서 그의 초상을 벽화로 그리라는 명에 따라 그려진 벽화다. 조선 왕으로써 그려진 어진은 1398년으로 왕위에 오른지 7년째 되던해에 그린 어진인데 그해 함주(함흥)의 준원전에 자신의 진영을 봉안토록 하였고 8월에는 계림(경주)의 집경전, 문소전, 장생전 등에 봉안되었는데 이는 고려를 무너트리고 세운 조선 왕실의 권위와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현재 경기정 정전의 어진의 원본은 2008년 보존 처리후 2010년 부터 경기전 경내 어진 박물관에 있으며 1999년 전주시가 권오창 화백에게 모사를 의뢰해 제작된 모사본은 어침실 문앞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는 전주시에서 어진 원본을 박물관으로 옮기고 모사본을 배치하려 했으나 전주 이씨 종친회의 강력한 반발로 모사본과 원본 2개를 보유하게 되었다.

함흥 준원전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조선 태조 어진.

1913년, 일본인 순사가 촬영한 사진이다. 함흥 준원전 어진은 전주 경기전 어진과 마찬가지로 전란을 피했던 어진이었기에 1398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당시 이성계의 나이는 64세가 되었을 때다. 저 얼굴이 64세라면...흠좀무. 그러나 한국전쟁 때 준원전이 사라지면서 행방불명되었다. 따로 들고 나오지 않았다면 소실됐을 확률이 높다. 북한은 도서정리사업도 했다

3.3.2. 조선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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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에 찍힌 조선 세조의 어진. 왼쪽 사진에서 저 멀리 보이는 게 어진이고 그리고 있는 것이 모사본이다. 그러나 현재 원본, 모사본 모두 남아있지 않으며 사진 자체가 원래 원본과 모사본 자체를 찍으려고 촬영한 게 아니라 모사본을 만드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거라서 어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과거 저 사진에서 모사본을 그렸었던 김은호가 신문기사로 남긴 수염없는 초본의 얼굴은 1969년 5월 14일경향신문에 남아 있는데 오른쪽 사진으로 광대뼈가 드러나고 수염이 거의 안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초본은 현재 행방불명이다.

합천 해인사 성보박물관 소장 세조 어진[12]이다.
다만 민간신앙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그려진 것만큼 실제 모습보다 변형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당대에 그려진게 그대로 보존된 만큼 가치는 높다.

3.3.3. 조선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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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 시절 영조 조선 영조의 어진

연잉군 시절 영조의 그림은 현재 남아있는 어진 중 유일한 원본이다.[13] 숙종 40년인 1714년, 영조가 21살 되던 해에 화사 진재해가 그린 것이다.

영조 어진은 51세때의 모습으로 대한제국 광무 4년인 1900년에 경운궁 선원전에 불이나 태조, 숙종,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이 사라지자 고종이 이들 어진을 모사하도록 지시했을 때 같이 제작된 어진으로 조석진(趙錫晉), 채용신(蔡龍臣) 등이 모사한 것이다.

3.3.4. 조선 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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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조의 어진

순조 30년(1830년) 화가 유당 하종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순조 어진은 원유관 강사포본 2축과 익선관본 2축 총 4축이 있었으나, 이 그림 제외하고는...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유일하게 남은 순조의 원유관 강사포본 어진으로 얼굴의 반이 불타 복원은 불가능하다.아니, 최소한 귀와 눈썹이 남은 효명세자와 달리 이쪽은 구렛나룻 외에는 남은 부분이 없다(...)

3.3.5. 조선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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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의 어진 복원본

철종의 31살 때 모습을 담은 구군복본 어진으로 철종 12년인 1861년, 3월에 제작되었다. 《어진도사사실(御眞圖寫事實)》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도사를 담당했던 이한철, 조중묵이 주관화사였고 김하종, 박기준, 백영배, 백은배[14], 유숙, 이형록이 도와 1개월동안 제작했다고 한다. 또 구군복본 외에 강사포본을 그렸는데 그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얼굴까지 소실된 다른 어진들과는 달리 얼굴 부분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라 복원본을 제작할 수 있었다.

3.3.6. 조선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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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 어진

고종의 어진은 1872년 군복대소본, 익선관본, 복건본, 면복본등 모두 5본이 도사했는데 그 중 2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1910년 채용신이 그린 고종 어진의 모사본들 뿐이다. 또한 위 사진 오른쪽 아래에 있는 통천관 강사포본의 경우는 배경에 을 치는 등 일본식 화법이 가미되어 있는게 특징이다.

역대 제왕 중 유일하게 외국인이 그린 어진이 있다. 휴버트 보스(Hubert Vos)라는 네덜란드 화가가 그린 것. #

고종의 경우 어진 말고도 사진 자료도 많이 남아 있어 얼굴을 유추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편이다.

3.3.7. 대한제국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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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순종 어진[15] 순종 어진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렸다

전통적인 기법보다 서양화적 요소가 가미된 어진이다. 김은호가 그렸으며 1912년 어진이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 순종 어진 유지초본으로 마지막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익선관본 중 황룡포,홍룡포본 총 3축이 있었지만 1954년 용두동 대화재로 소실됐다.

고종과 마찬가지로 사진 자료가 남아있어 순종 승하 후 김은호 화백이 사진을 토대로 어진을 그렸다.

3.3.8. 왕족의 그림[16]

효령대군

경기도 과천시 연주암 경내 효령각에 소장되어 있는 효령대군의 초상화이다. 1978년 11월 10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되었다. 화면이 다소 거칠고 정교하지 못한 것은 조선 전기의 초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여러 번 옮겨 그린 탓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몇 번 옮겨 그린 중모본이기는 하지만 조선 전기의 초상화가 거의 전해오지 않는 현 시점에서 소홀히 해서는 안될 작품이다. 문화재청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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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

왕들의 족보인 선원계보에 의하면 문조(효명세자)는 어진이 8축이나 제작되었음을 알 수가 있지만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이 어진 하나뿐이다. 문조가 18살 때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남아있는 어진 중 유일한 면류관곤복본이며 순조 26년인 1826년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얼굴 부분이 소실되어 복원 불가능하다

3.4. 기타

3.4.1. 삼국시대

현재까지 남아 있진 않지만 상상에 근거하여 그린 어진이 몇 가지가 있다. 쉽게말해 상상도. 그러니 실제 모습과는 달라 실제 모습이 이렇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성왕의 경우엔 남아있는 유물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여기에 등재된 어진들은 북한 개성 현릉의 고려 태조 초상화와 세조 이유 종친회에서 만든 어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부표준영정(政府標準影幀)을 기준으로 등재하였다. 일반화가가 아닌 국가에서 공인한 그림들이다.

3.4.1.1. 가야

수로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49호

구형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62호

3.4.1.2.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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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14호

3.4.1.3. 백제

성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75호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을 본따 만든[17] 호류사 몽전 구세관음상을 기반으로 제작한 대한민국 표준 영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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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71호

3.4.1.4. 신라

무열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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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13호

3.4.1.5. 발해

고왕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86호

3.4.2. 고려

고려 태조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66호

(ɔ) Unknown from
태조 왕건의 능인 개성 현릉에 있는 태조의 초상화
북한에서 제작한 듯하나, 자세한 사항은 추가바람

3.4.3. 조선

세종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2호

[성종]
표준영정은 아니고 우승우 화백의 어진이다.

정조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42호
위의 고려 태조 왕건 어진을 복붙한것 같은건 기분탓이다 왕건 그린 화가가 그린 것이라 그렇다. 자기 얼굴 비슷하다. 후에 조심태도 그렸다.


세조
표준영정은 아니고 세조 종친회에서 따로 복원한 어진이다.[18]
게임캐 같아서 겜덕들에게 주목 받는다

4. 외국에 현존하는 어진

중국의 경우엔 고대의 경우 역대제왕도권 등이 남아있고 명나라청나라의 경우엔 어진들이 온전히 남아있어 보기가 쉽다. 명나라의 각 황제 항목청나라의 각 황제 목록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유럽의 경우엔 매우 많이 남아 있다. 역시 각 왕들의 항목마다 배치되어 있으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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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붉은 비단실을 묶어 만든 장식끈.
  • [2] 봉안용 고리.
  • [3] 이 어진이 누구의 것이며 언제 제작되었는지를 표기하는 작업.
  • [4] 전주 경기전의 경우는 정유재란.
  • [5]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한 뒤 말년에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생활하던 곳이다.
  • [6]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1875년 모사한 것이다.
  • [7] 완전한 것은 아니고 얼굴 일부 부분만 남은 조각이었다고 하나, 수염이 긴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고 한다.
  • [8] 전기공사청부업을 하던 정씨의 식모 안씨가 동판자집 2층 마룻바닥에 촛불을 놔둔채 자다가 다른 판자집에 인화되어 불길이 용두산까지 이어져 용두산 동남쪽 마을 창고,290동을 비롯 몽땅 태워 버렸다.
  • [9] 그나마 546점은 건져냈다. 타버린 것들로는 어진 이외에도 역대 재상의 초상화, 중일기, 어친필, 은제기,악기,고전음악보등이 있었다.
  • [10] 임진왜란 당시 약탈된 성종의 릉과 중종의 릉을 제외하곤 도굴된 적이 없다.
  • [11] 개수를 뜻하는 단어.
  • [12] 1458년 그려져 해인사에 봉안되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 [13] 다른 것은 모두 모사본 또는 복원본이다.
  • [14] 임천백씨로 현종, 숙종 때 어의였던 백광현의 종잉손자(잉조할아버지의 형제다. 실제로는 고조할아버지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현조할아버지 래조할아버지 곤조할아버지 잉조할아버지 운조할아버지로 이어진다.) 그의 형인 백광찬의 직계후손이다. 아버지는 백민환 할아버지는 백명채 증조할아버지는 백사구 고조할아버지는 백임대 현조할아버지는 백상규 래조할아버지는 백홍주 곤조할아버지는 백흥선 잉조할아버지는 백광찬. 출처: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15]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 [16] 효명세자의 경우 세자 시절 사망해서 왕족으로 분류했으나, 사후 왕(문조)으로 추존되었다.
  • [17] 이설로는 쇼토쿠 태자의 외모를 본따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쇼토쿠 태자는 실존 인물인지 불분명하다.
  • [18] 이목구비나 얼굴형 등은 위의 김은호 화백이 남긴 어진 초본 스케치에서, 수염과 넓은 얼굴, 하관은 선원보감의 간략하여 그린 어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복원된 어진이 멀리서 찍힌 사진으로 남아있는 세조의 어진과 해인사 세조어진과 비교하면 완벽하게 복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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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0-20 06: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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