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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 롬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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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win Rommel
1891년 11월 15일 ~ 1944년 10월 14일.

"롬멜은 독일군이든, 이탈리아군이든 병사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다. 이제 그는 거의 신화적인 존재가 되었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전쟁의 참상과는 별개로 장군들을 평가한다면, 저는 롬멜을 위대한 장군이라고 생각합니다" - 윈스턴 처칠

"기사란 옷과 칼은 피로 물들어도 마음은 순백의 상태를 유지한 자, 그 자가 바로 기사다."

풀네임에르빈 요하네스 오이겐 로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1] 제2차 세계대전독일군 명장으로 유명한 인물. 속칭 '사막의 여우(Wüstenfuchs)'라고 불리며 전쟁사를 모르는 사람들조차 한두번 정도 이름은 들어봤을 만한 군인이다.

rommel.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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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롬멜 약사
1.1. 1차대전 이전
1.2. 제1차 세계대전
1.3. 전간기
1.4. 제2차 세계대전 초기
1.5. 사막의 여우
1.6. 서부전선에 지다
2. 롬멜 논란 - 천재 혹은 광대
2.1. 관련 텍스트의 접근성
2.2. 빠와 까
2.3. 롬멜 개인에 대한 비판
2.4. 반박
2.4.1. 영국군이 롬멜을 띄웠던 것은 단순한 체면 살리기였다?
2.4.2. 롬멜과 다른 동료장군과의 관계
2.4.3. 북아프리카의 무모한 작전은 병참을 가중시켰다? 이탈리아군의 노고를 씹었다?
2.5. 총평
3. 기타
4. 주요 보직 내역
5. 진급 내역
6. 주요 서훈 내역
7. 저서

1. 롬멜 약사

1.1. 1차대전 이전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교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소년이었는데, 어려서는 워낙 순한데다 창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부가 희어서 누나를 비롯한 가족들이 그에게 붙였던 별명이 백곰이었다고 한다. 어릴 땐 곰이었는데 나이 먹고 여우...응?

그 자신이 교장까지 지냈던 만큼 그의 아버지인 에르빈 롬멜은 집안에서도 아들 에르빈의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성장하면서 워낙 장난이 심해 성적은 개판이고, 아버지와의 관계도 악화일로를 걸었다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 부자관계가 호전된 것은 엉뚱하게도 롬멜이 그 당시 유행하던 비행기와 글라이더에 열광하면서부터였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당시 어린 롬멜은 글라이더를 만들고자 친구와 함께 열심히 머리 굴렸는데(…) 실제로 글라이더를 날리려면 복잡한 항공역학에 따른 설계가 필요했고, 항공역학의 근간은 수학이었다. 그런데 롬멜의 아버지인 에르빈 롬멜이 다름아닌 수학 마니아였다.(…)

글라이더와 비행기, 비행선에 빠져 어린 시절을 보내던 롬멜은, 성적도 안 나오는 김에 체펠린 비행선을 제작하는 공장에 엔지니어로 취직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교육자인 아버지 에르빈 롬멜 입장에서는 아들이 대학을 갈 실력은 안되어도 차마 (아버지 관점에서)공돌이가 되는 꼴은 볼 수 없었던 모양으로, 그 대신 아들에게 제시한 진로가 다름아닌 군인이었다. 롬멜은 엔지니어 지망생답게 처음에는 공병, 그 다음에는 포병에 지원했으나 모두 망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상당히 많지만 아버지가 추천서에 좋은 말을 쓰지 않은 것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결국 그를 받아준 것은 보병이었다.

보병장교로 임관하기 위해 군사교육을 받던 중, 청년 롬멜은 언어학을 전공하던 루셰 마리아 몰린이라는 이름의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 그들이 만났던 곳은 공교롭게도 단치히였다. 이 지역은 독일이 폴란드를 칠 때 구실로 내세웠던 지역이다. 침공당시 총통 호위를 맡았던 롬멜은 그 전쟁을 크게는 독일의 영광을 회복할 기회, 개인적으로는 우리 자기야와 만났던 땅을 다시 찾는 기회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롬멜은 이미 10대 과일장수 처녀인 발부르가 슈템머와 사고를 저질러 사생아 딸을 얻게 되는데, 이 과일장수 여인은 후에 1928년 롬멜과 정식으로 결혼했던 루셰 마리아가 롬멜의 아들 만프레트를 낳자 자살했다고 한다. 게르트뤼드라는 이름의 이 딸에게 롬멜은 평생 삼촌 행세를 했다고 하며, 루셰 마리아 몰린과의 결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죽을 때까지 유지된 것을 보면 루셰가 남편을 용서했던 것으로 보인다.

1.2.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청년 롬멜은 보병부대 소위로 참전했다. 프랑스 참호전에서 저돌적인 활약과 지휘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며 넙적다리에 관통상을 입는 와중에도 활약을 함으로서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 받는다. 1916년에 중위로 진급하고 휴가를 내어 결혼식을 하였다. 이후인 1917년에 당시 이탈리아독일은 서로 전쟁중인 사이였는데, 이탈리아의 알프스 산맥 위에 있는 마타주르산의 요새를 공격하면서 유명세를 탔다.[2] 당시 이 요새의 중요도는 워낙 뛰어난데다, 격전지여서 독일 황제가 요새를 함락시키면 훈장을 준다고 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롬멜은 이곳을 정복하면서 1개 대대 병력, 그나마도 100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이탈리아군에게 10,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게 하는 용맹을 떨쳤다. 하지만 평민 출신이었던 그의 배경이 문제가 된 듯, 훈장은 귀족 출신의 엉뚱한 장교에게 가버렸다.[3] 물론 그가 훗날 또다른 마을을 점령하면서 기어이 푸에르 메리트 훈장을 받게 되었지만 그는 이를 끝까지 잊지 못했다고 한다.

훗날 다른 전투에서는 독일군 진지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아 현지에 도착했을 때 진지의 병력 대부분이 사망한 상태에 적군에 포위되기 직전임을 알고는 후퇴를 결심했으며, 야간을 틈타 귀신같이 벌어진 퇴각작전에 적은 어떠한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다. 특히 퇴각시 적에게 이쪽의 정보 일체를 남기지 않으려고 생존자가 전사자를 업고가게 하여 전사자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런 여러 사례들은 지금도 군에서 교육이 되고 있을 정도. 그가 나치 집권 초기에 1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이 지휘했던 전투를 소재로 보병전에 대해 쓴 책 '보병전술'은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종종 연구된다고 한다.

1.3. 전간기

종전 후에 롬멜은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잔류, 주로 야전장교로 활동했다. 물론 푸르 르 메리트 서훈자였으므로 당연히 참모장교를 양성하는 전쟁대학의 과정에 입학하도록 추천되었지만 롬멜 자신이 거절하였다. 이러다가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팽창하기 시작한 육군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어, 포츠담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부임하는 등, 자기 목소리를 낼 기회를 점점 많이 얻게 된다. 실제로 롬멜과 히틀러는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할만했는데, 일단 통설로 알려진 것만 따지자면 병사로서 용맹을 과시한 바 있고, 그런데 평민 출신이며, 이론이나 상식 외의 직감과 같은 다분히 즉흥적인 면에 기대는 바가 컸다. 쉽게 말해 변죽이 맞는 사이였던 듯. 실제로 롬멜은 히틀러를 몇번 만나기도 전에 그가 제시하는 독일제국의 비전에 적극 찬동하게 되었고, 히틀러는 이 대담한 평민 장교를 기억하게 된다.

롬멜은 이런 히틀러와의 인연을 십분 활용, 폴란드 침공 당시 전선을 시찰하는 히틀러를 호위하면서 그에게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어필하여, 보병출신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새로 편제되던 기갑부대의 지휘관으로 부임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는 중대한 인생의 전환점이었는데, 당초 그는 보병장교인 동시에 마타주르 전투 등으로 산악전 전문가로 알려져 있어, 산악사단 지휘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만일 이 때 산악사단으로 갔으면 역시 용맹을 떨쳤겠지만 산악사단의 특성상 제2전선에서 험준한 지형을 벗삼아야 하므로 공을 많이 세워도 국지전에서 보병전의 전문가로서의 영광이지 주력군에서 벌어지는 기갑전의 영광이 아닐 것이므로 지금까지 이렇게 유명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롬멜이 부임한 기갑사단이 바로 프랑스 침공 당시 그가 지휘한 제7기갑사단이었다.

1.4. 제2차 세계대전 초기

Photographer.
1940년 친구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가 찍은 라이카 카메라를 든 롬멜
(카메라 모델명:Leica III rangefinder)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전격전의 강력한 지지자로, 기계화부대의 속도와 충격력을 살리는 방법을 연구해 훗날 전투에서 그 강력함을 입증해보인다. 놀라운 것은 폴란드 전역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롬멜은 전차의 운용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고, 침공 초기에도 놀라운 독일군의 진격 속도는 공군의 활약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그의 생각을 바꾼 것이, 히틀러를 호위하면서 그가 목격한 구데리안의 전차군단이었다지만, 보병전의 전문가가 신속하게 기갑전의 전문가로 변화된 것은 놀랍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침공 때는 7기갑사단장으로 근무했는데, 부대 휘하의 장갑차와 전차를 앞세워 전군에서 제일 빠른 속도로 앞장서서 심지어 독일 기갑부대의 아버지격인 구데리안보다 먼저 뫼즈 강을 도하했다! 프랑스로 진격했기에 이 신출귀몰함에 프랑스군은 이들을 '유령사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롬멜이 진군한 거리는 놀랍게도 당시 주력전차인 2호, 3호 전차가 최대속도로 계속 달렸을 때보다 더 나아갔을 정도라고 하니,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진격을 했던 셈이다. 이 진격이 가능했던데는 메스암페타민이라는 강력한 마약성분의 각성제도 큰 역할을 했다. 7기갑 사단 직할 군수참모가 직접 3만정의 각성제마약를 관리하면서 72시간동안 수면없이 강행군을 했던 것. 물론 이 때는 의학 지식의 부족으로 메스암페타민이 마약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중독이나 부작용에도 관심이 없었다.
여담으로 히틀러 역시 메스암페타민에 심각한 중독 증세를 보였었고 롬멜의 초기 정신나간듯한 진격전술의 배경에 이 약의 각성효과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어쨌든..육군에서 진격 정지하라고 명령을 계속 내렸지만 씹고(...) 무조건 진격했다. 다른 쪽에서 그렇게 행동하려던 구데리안은 상급자인 클라이스트가 보호해 주다 결과적으로는 바로 복귀했지만 일시적으로는 해임 조치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롬멜은 여기서 막나가는 지휘패턴을 보여주었는데 뫼즈 강을 도하하기 위해 롬멜은 도하작전, 수송대 편성 등을 직접하며 최전선에서 동분서주하고, 결국 한개 보병대대를 직접 지휘하기 시작, 포탄이 사방에 작렬하는 가운데 7기갑의 분견부대는 결국 강을 건넜다.

사실 그때 직속 상관 호트와 동료장군 하르클리프와 마찰을 빚는데, 2개 사단이 한번에 도하 못할거면 하르클리프에게 갈 물자와 도하장비를 모조리 자기 7사단에게 달라고 했다. 이 오만하고 이기적인 요구에 호트는 크게 당황하고 하르클리프는 격분하지만 인자한 영감 호트는 롬멜의 과격한 요구를 들어주고 하르클리프를 달랬다.

뫼즈 강을 건넌 롬멜은 옹에라는 마을로 서진을 시작했는데 진두지휘를 위해 휘하 연대장의 지휘전차인 3호 전차를 빼앗아(...) 타고 가고있다가 대전차포 매복에 걸려 피격되고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옹에를 손에 넣는다.

제7 기갑사단은 드디어 벨기에 국경의 연장 마지노선에 도착하는데 집단군 사령부는 이 요새선에 대한 '공격 대기'를 할것을 명령했지만, 롬멜은 사령부에 자기 참모만 남기고 전차연대를 이끌고 나가버렸다. 결국 '제한 조건'을 달고 있던 서식이 도착했을 때 롬멜은 이미 닥돌 시작한 뒤였다.(...)

이렇게 진격한 끝에 드디어 아헨에 도착했는데 그후 프랑스 전차부대와 조우하여 승리를 거두면서 그 여세를 몰아 쪽의 랑드르시로 돌격. 그냥 가서 롬멜이 "항복하라!"고 하자 그곳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독일군을 대군으로 착각하고 그대로 항복했다.(...)

드디어 제7 기갑사단은 유류와 탄약 고갈로 랑드르시에서 정지했고 이미 50km 가까이 진군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롬멜 자신이 직접 지휘한 기갑연대만 돌진했고 군단장 명령에 인해 아직 요새를 넘지 않았었다. 결국 롬멜은 사령부로 돌아가기로 결심,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험을 시작한다. 롬멜은 자기 지휘차와 3호전차 한대를 호위용으로 붙여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그 3호전차가 퍼져버렸고 결국 롬멜의 지휘차만 다시 후방 50km를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후방에는 우회당해 교전도 못해본 온전한 프랑스군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롬멜은 요새지대를 피해가며, 뭔가 많아보이는 행군중인 적에게 지휘장갑차 혼자 다가가서 당당하게 적 지휘관에게 "항복하라!" 고 외쳤으며 프랑스 병사들은 전부 낚여서 항복(...)했고 이렇게 이렇게 몇차례 성공했다. 이런 사기가 연달아 성공할 수 있던 이유는 당시 프랑스군은 통신도 개판이었고 상황전파도 개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 장군이 갑툭튀해서 "항복하라!"하니까 상식적으로 적 장군이나 되는 자가 아무 대책없이 왔을리가 없으므로 어 우리 포위된건가?라 생각하고 항복해버린것(…).사막의 여우가 아니라 그냥 프로 낚시꾼
사막의 낚시꾼 사막의 낙지꾼 사막의 낙지 세발낙지... 어?! 고만해 이미친놈들아
드디어 롬멜은 아헨에 도착했는데 사단 참모는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이제야 아헨에 도착한 상태였다. 롬멜의 장갑차 뒤에는 프랑스군 트럭 40대안에 포로가 가득 들어 있었다. 롬멜은 이 공으로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맹진격을 거듭하던 도중인 5월 21일, 롬멜이 지휘하는 제7기갑사단은 아라스에서 역습에 나선 영국군의 전차들과 마주치기도 했는데, 이때 상대편 전차의 방어력이 뛰어나 50대 이상의 전차가 순식간에 파괴당하자, 사단장인 자신이 직접 방공포부대의 88mm 대공포를 끌고와 적 전차들을 제압하기도 했다. 대구경 대공포의 화력을 응용한 이 작전은 유효해서, 이후 독일군은 대전 내내 88mm 대공포를 대전차용으로도 사용하게 된다.

물론 완전한 임기응변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 이 88mm 대공포는 개발 당시부터 대전차용으로 쓸 수 있도록 철갑탄이 개발된 상태였다. 단, 소련에서 KV-1을 만날 때까지는 고폭탄으로도 충분히 전차를 격파할 수 있으므로 철갑탄의 숫자는 매우 부족했다고 하며, 역시 화포 자체의 수량부족 및 대부분의 대공포가 공군소관이라 소속도 달라서 사실상 이 때 용도전환 하기 전에는 해당 대공포를 운용하는 대공포병도 지상목표를 잘 사격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물꼬를 튼 셈.

프랑스 침공에서 극적인 활약으로 일약 독일군 최고의 저명인사로 떠오른 롬멜은 그를 주연으로 하는 전시선전영화 "서부의 승리"가 그를 위해 특별상영되는 등, 인생 최고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이때의 영광이, 이후 그의 전설을 만들게 되는 또다른 무대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1.5. 사막의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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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 칼라 사진, 뒤에 파란색 제복 입은 두 명은 이탈리아 장교)

프랑스 점령 후,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려 계획하게 되는데... 이때 이탈리아가 뜻하지 않게 아프리카에서 영국군에게 대패하면서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문제는 이 시기에는 소련 침공 작전 준비가 대부분 진행된 상태라, 빼낼 수 있는 병력이 얼마 없었다. 그런 이유로 독일군은 소수의 기계화부대와 유능한 장군 한명을 보내는 것으로 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이탈리아가 축출당하는 것만 막는 선에서 마무리지으려 했는데, 그때 도착한 것이 바로 롬멜이었다. 롬멜은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정찰기를 타고 영국군 지역 상공을 정찰했으며, 영국군의 상태가 이탈리아군을 추격하는데만 집중되어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알고 아직 수송선에서 병력이 제대로 하차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반격을 개시한다.

1941년 3월 독일 주간 전시뉴스.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단 활약상 소식을 다뤘다.

반격할 병력이 없다는 말에 롬멜은 트럭과 경차량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전차 모양이 나게 만들라고 지시하고 이들을 끌고가는 과감함을 발휘했는데, 놀랍게도 이 작전이 대성과를 거뒀다! 이미 주력을 처칠의 명령에 따라 억지로 그리스에 파견했다가 상당수 잃어버려 약체화된 영국군은 지휘관 교체로 방어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블러핑한 독일군의 공격에 간단히 격파당했다. 이후 사실상 아프리카의 전쟁은 롬멜 대 영국군의 전쟁이 되어 영국군으로부터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며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 이 무렵 그를 찬양하는 주제로 삼은 군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곡명은 우리의 로멜.

영국군에게 롬멜은 정말로 무섭고 미운 적이지만, 동시에 군인으로서 존경할 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처칠조차도 때때로 롬멜을 언급하며 '까마귀 무리 속에 단 한명의 진짜 군인'이라는 식으로 묘사했다.군계일학?. 군오일군. 영국군 포로가 지휘관을 만나 식수부족 문제에 대하여 항의하게 해달라고 하자, 자신이 직접 만나 물부족으로 지휘관인 자신을 포함해 포로와 독일군 전원이 하루 반컵의 물을 지급받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또한 언제나 최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했기에, 식사조차도 장갑차를 타고 달리는 중에 병사들과 함께 통조림으로 때우기가 십상이었다.[4] 이탈리아군 장교들이 사막에서도 하얀 식탁보를 깐 테이블위에 와인과 화려한 식사를 놓고 먹던 것과 비교하면 천지차이의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일선 병사들과 함께하다가 잠깐 안 보인다 싶으면 어느새 정찰기를 타고 적군 진지 위로 날아가는가 하면, 아군 진지 위로도 비행하며 이상이 없나 확인했다.

롬멜은 일선 병사와 부사관, 초급장교들에게 친절히 대하며 그들의 의견과 고충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작전에 반영했으나, 지휘관들에겐 악몽 그자체였다. 심지어 어느 장교는 잠시 진격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간 정찰기에서 롬멜이 "지금 당장 진격하지 않으면 내가 내려가서 부대를 지휘할테다"라고 적은 쪽지를 떨어뜨린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적의 저항이 너무 거세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보고를 받자 '자네를 포함해 병력 절반이 희생당해도 그건 예정된 희생일 뿐이야!'라며 공격을 계속하게 독촉하기도 했다. 얼마나 지휘관들을 거칠게 채찍질했던지, 롬멜과 동갑내기인 휘하 사단장 하인리히 폰 프리트비츠 소장은 그의 독촉을 받고 황급하게 전투에 나섰다가 초장에 전사하고 말았다. 안습.


(롬멜이 아프리카에서 타던 차)

Rommel's command vehicle
(롬멜의 지휘차량-Greif)

심지어 그 자신은 너무 빨리 진격한 나머지 퇴각하는 영국군의 후위에 끼어버리는(…) 경우마저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영국군들 중 그 누구도 옆에 있는 차량이 롬멜의 것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야음과 함께 롬멜이 사용한 지휘차량 '맘모스'가 노획한 영국제 장갑차였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사실 프랑스에서도 그는 이런 일을 겪었는데, 전차 2대를 대동하고 단독으로 전선 시찰을 나갔다가 숨어있던 영국군 전차 부대의 기습을 받고서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서 2시간 동안 숨어있었다가 구조된 일화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영국군은 독일군이 근처에 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이어 벌어진 아라스 전차전에서 첫 패배를 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 그를 괴롭힌 것은 적군보다는 오히려 보급품의 부족과 무능력한 이탈리아군이었다. 이탈리아군은 병력은 많아도 전의와 능력이 중구난방이어서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다. 물론 용맹한 자들도 있어서 아리에테 사단과 리토리오 사단을 포함한 이탈리아 제20군단은 예외였다. 이들은 열심히 싸워 몇몇 독일부대보다 훌륭한 전과를 내었고 덕분에 롬멜은 이들을 매우 아꼈다. 물론 그런 20군단도 영국군 포화를 맞자마자 도망가버렸다면서 롬멜이 불평할 때가 간혹 있었다.

여기에 중요한 진격을 할 때마다 연료와 탄약이 크게 모자랐다. 당시 독일군 3개 사단에 대해 이탈리아군은 6~7개 사단으로, 이들의 총 보급소요는 독일군과 비슷하거나 더 많았다. 그런데 정작 이탈리아군의 보급품 운반용 차량은 독일군의 절반도 되지 않고 그나마 성능도 나빠 고장율이 매우 높았다. 더구나 독일군조차도 차량은 실제 소요의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밖에 갖고 있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니 진격을 하면 할수록 보급은 점점 어려워졌고, 결국 후퇴의 원인이 됐다. 이런 상황 때문에 롬멜은 언제나 보급에 불만을 제기했으며, 독일 지휘부는 그런 롬멜의 불평을 받아들여 대소련전으로 병력과 물자가 소모되어가는 마당에도 아프리카 군단에 의외로 많은 양의 보급품을 보내주었고, 적어도 1942년 중반까지는 최소필요량의 전달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중해를 장악한 영국의 해/공군의 공격으로 많은 물자가 수장된 데다가 보급을 담당한 이탈리아군의 비효율, 그리고 사실상 해안가에 놓인 비포장인 단일 도로망에 의존하는 취약한 보급로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양의 물자는 절대 제시간에 충분한 물량이 도착할 수 없었다.

Rommel’s plane
(비행기 타는 롬멜, 왼쪽에서 세번째. 비행기는 Heinkel He 111 폭격기)

결국엔 롬멜도 거칠고 긴장된 생활의 연속으로 인해 병을 얻어 본토로 떠나게 된다. 그는 본디 규칙적인 군 생활에다 산악등반과 승마 등 운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체력을 지녔으나, 북아프리카 사막의 혹독한 환경은 그런 그에게도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그가 아프리카를 떠난 사이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의 대반격이 시작되고, 급하게 돌아왔던 롬멜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히틀러의 명령마저 씹어버리고 병력을 최대한 온존하며 퇴각하기 시작한다. 이후 영미연합군의 모로코 상륙(토치 작전)으로 튀니지에 갇혀버렸고, 총통을 직접만나 병력 증파를 요청하러 독일로 갔지만, 히틀러의 요구로 그는 요양을 위해 남게 되고 아프리카 방면군 사령관은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상급대장으로 교체된다. 이는 이미 대세가 결정되었으며, 여기서 롬멜이 포로라도 되면 심각한 위신손상이 올 것을 우려한 조치로, 실제로 아르님 상급대장은 분전을 펼쳤으나 결국 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게 항복한다.

1.6. 서부전선에 지다

Rommel
(1944년 초, 서부전선 시찰하는 롬멜)

그 이후 그는 유럽지역에서 연합군의 상륙을 막는 대서양 방벽의 지휘관이 되어 짧은 시간내에 임시방편이지만 방어능력을 상당히 향상시켰다. 하지만 이때 롬멜은 어이없는 행동을 하는데 하필이면 연합군의 상륙 당일날 폭풍우가 치는 것을 보고 아내의 생일파티에 참석하러 떠나서 작전 당일 롬멜은 전선이 아니라 본국인 독일에 가 있었던 것(...). 당시 히틀러를 포함한 독일군의 전략담당자들은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은 벨라루스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봄철 라스푸티차(얼어붙은 땅이 녹아 진흙탕으로 변하는 시기)가 끝나는 6월말에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소련군의 공세와 보조를 맞추어 실시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미영의 프랑스 진격이 6월초로 확정되었다고 독일군이 판단했다면 롬멜의 귀국은 당연히 허가되지 않았을 것이다. 덤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날까지 심각한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쳤으므로 상륙하더라도 이날은 아닐것이라고 현지 지휘관의 대다수가 판단한 바 있기에 롬멜 역시 안심하고 독일로 가 있었던 것.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는 롬멜의 실책이 되었다.

롬멜의 부재 중 B집단군 사령부를 책임져야 할 참모장 한스 슈파이델은 갈팡질팡하다가 이렇다 할 방편을 마련하지 못했고, 연합군의 상륙 이후에도 롬멜은 7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돌만 상급대장과 갈등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돌만의 갑작스러운 자살 이후 공석이 된 사령관 자리에 파울 하우서 SS상급대장이 임명되는 것을 맹렬히 반대했다. 독일군이 팔레즈 포위망을 탈출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야전 지휘관이 하우서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잘못된 판단.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회상한 말 그대로 인용하면 독일군 병사들은 노르망디에서 공군의 지원 없이 연합군 군대와 힘겨운 전투를 벌였고, 그들에게는 고위 지휘 체계가 무질서해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1944년 7월 17일, 전선 시찰을 나가던 중 연합군 공군기의 공격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영국과 미국의 특수부대가 롬멜 암살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사고로 인해 암살 작전은 취소 되었다고 한다.

Rommel's casket
(1944년 10월 18일 사망 이틀 후 자택에서 나오는 롬멜의 운구)

Hitler's wreath
(롬멜의 장례식)

Rommel's Funeral
(1944년 10월 18일 롬멜의 장례식. Württemberg, Germany)



이후 부상을 치료하던 와중에 발생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관련성이 제기되면서 히틀러의 미움을 사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국민적 영웅인 그가 암살에 관련되어 처벌당하는 것은 독일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절대 좋지 않다고 여겨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고, 공식적으로는 영웅의 죽음으로 국장을 치르며, 더 이상 죄를 따지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그에게 자살을 권했다. 롬멜의 사후 그의 장례는 약속대로 국장으로 치러졌다. 암살 미수를 눈감아 줬으면 아르덴 대공세에서 성과가 조금이라도 있었을텐데

2. 롬멜 논란 - 천재 혹은 광대

파란만장한 경력을 자랑하며 독일 정부의 프로파간다, 영화 등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장군이다.

2.1. 관련 텍스트의 접근성

현재의 밀덕계의 큰 형님 취급을 받는 이들이 활동을 시작하던 80~90년대 한국의 척박한 현실에서는 2차 대전 관련 서적을 입수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서적은 일문 중역판으로 입수되었다.[5] 예외라면 타임 라이프에서 30권으로 출간된 전집 정도일까... 그렇지만 이웃나라이자 추축국인 일본은 극단적인 롬멜 찬양 국가였고, 이는 서브컬처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6] 21세기에 들어서도, 롬멜을 비판적으로 보는 원서들이 대개 일반인을 배려하지 않는 전문서적이고 국내에 정식 출간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롬멜 비판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국내에 소개된 2차 세계대전 서적 중 독소전쟁과 항공전까지 충실히 다루었다는 점에서 지금도 사랑 받고 있는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의 저자 이대영이 중증 롬멜빠라 본서의 롬멜 묘사를 읽어보면 역사 왜곡, 좋게 말하면 소설에 가까운 미화를 보여준다. 네이버 검색하면 지식in 답변으로 자주 나오는 롬멜에 관한 극단적인 미화와 사실 오류는 여기서 기인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문장 배치까지 똑같다. 해당 서적의 맨 뒷장 주석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판 책자들을 대량 인용한 탓에 눈에 거슬리는 일본식 외래어 발음 표기에 롬멜에 대해서는 '천재'라는 표현이 아주 빈번하게 등장한다.

2.2. 빠와 까

덕분에 생겨난, 밀리터리 관련 커뮤니티 등에서 롬멜빠라고 칭해지는 자들은 롬멜과 적대했던 모든 인물들을 무능하다고 몰아붙이며 롬멜 이외에는 독일에 장군이 없다고 말하는 등 극단적인 롬멜 찬양의 모습을 보이는데, 롬멜은 사이가 좋은 장군이 거의 없었고, 몇몇 상관들의 제지를 방해로 여기고 있었으므로[7] 상당수의 독일군 장성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편견을 가진 롬멜빠들은 한국에서만의 문제점은 절대 아니고 범세계적이라 서구권 서적에서도 롬멜 찬양 서적에 독일군 장성들은 상당히 희생당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귄터 폰 클루게 원수. 이러한 경향은 그나마 독일 통일 이후에 동독 지역에 남아 있던 군사 문서들이 재발견되고 시간이 흘러 공개되면서 다소 상황이 나아졌다.

덕분에 국내에서는 독일 장군들 중에 빠가 까를 만든다가 적용되는 몇 안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까들도 생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전쟁사를 공부했던 이들 중에서도 클라이스트 원수 같은 이의 존재라도 아는 밀덕은 3자리 수도 안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한국 밀리터리 계에서 롬멜에 대한 대대적인 격하 운동(?)이 있기 전에는, 까들은 그냥 자신들의 영웅인 패튼, 몽고메리 등등을 추앙하는데 만족했을 뿐이나... 2차 대전 밀덕질의 특성상 A의 찬란한 업적은 B의 치욕스런 실패가 된다.[8] 따라서 롬멜에 대한 비판은 나치 독일의 다른 장군의 빠들보다는 몽고메리의 빠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빠가 까를 만든다는건 논리적인 토론을 통해 비판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감정적인 반발심에 의해 안티가 되었다는 뜻이다. 즉, 롬멜이나 2차 대전의 나치스 독일을 까던 사람들 역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근거할 아무런 텍스트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술했듯이 거의 유일하게 입수 가능하던 영미권이나 일본 서적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매우 드물었시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롬멜 까들은 주장을 하고 나서 21세기의 관련 서적의 대대적인 출판에 의해 근거를 얻은 것이며, 그 이전에는 그냥 까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화가 치솟아서 단순한 인신 공격을 하려고 보니, 영미권에서 나치라는 인신 공격이 가능했던 것과는 다르게, 한국 밀덕계에서는 오히려 2차 대전기의 독일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이들을 모욕한다며 무례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냥 쌍욕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롬멜 까들은 잠재적으로 존재하였지만, 수면위로 올라온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진 않았다.

한국 밀덕계와 이 항목에서의 롬멜을 둔 설왕 설래는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3. 롬멜 개인에 대한 비판

먼저 그는 총통 경호실에서 근무하며 아돌프 히틀러와 상당히 친분을 쌓았고, 그 경력이 이후 그의 출세가도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다른 군인들과 비교해볼때 특별히 나치의 강력한 신봉자는 아니었고 나치 당원도 아니었으나 히틀러를 매우 유능한 지도자로 생각했고 그가 제시한 비전에 찬동하고 있었다. 물론 히틀러가 주장한 독일제국의 중심은 사실상 롬멜이 속한 육군이었으므로 자기가 속한 세력을 중시하는데 상식적으로 따르지 않을리가 없지만 아예 나치당에 가입한 극렬주의자를 빼면 롬멜이 눈에 드러나도록 히틀러를 추종했던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히틀러도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 아닌 그를 굉장히 아꼈다. 원래 일반 병(兵) 출신인 히틀러는 귀족 출신이 다수에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 진급한 기존의 국방군 장성들에 대해 열등감과 경멸감을 함께 갖고 있었고, 그 때문에 롬멜 같은 신흥 무관들이나 자신의 심복이랄 수 있는 SS 출신의 무관들을 특히 총애했으므로, 1차대전의 무훈만으로도 충분히 실력이 있다고 판단된 롬멜에 대한 총애는 각별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프랑스 침공에서 세운 무훈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롬멜은 자신의 기갑사단이 군단의 주공이 되기 위해서 스 폰 하르클리프가 지휘하는 제5기갑사단에게 갈 군단의 보급물자 및 도하물자를 7기갑사단에 달라고 군단장인 호트에게 졸라댔다. 하르클리프는 당연히 펄펄 뛰었고 호트 또한 롬멜의 이 이기적인 요구에 곤란해 했지만 롬멜이 히틀러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데다가 롬멜에게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 판단해 롬멜을 밀어주었다. 그리고 아라스 전차전에서 영국군을 차단한 롬멜은 무슨 이유인지 상대한 영국군 전차의 수를 5배로 늘려서 보고했고 이는 히틀러와 OKH가 영국군이 아직 강력한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오판하게 만들어 덩게르크로의 진격정지 결정에 본의 아니게 영향을 주기까지 했다.

또한 그가 아프리카에서 세운 전공에도 많은 논란이 있다. 애초에 사령부가 주문했던 리비아 국경선 유지를 무시한 것이다. 게다가 사령부의 예상이 정확하게 적중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미 아프리카에 롬멜이 가기도 전에 독일에서는 보급의 문제점을 파악한 뒤였고, 아프리카로 파견된 롬멜이 2개 군단만 더 있으면 영국군 바를 수 있다고 하자 동부전선을 준비하면서 전력을 계산하느라 노이로제 직전까지 있던 참모총장 할더 상급대장이 기겁을 했다고 한다. 2개 사단에 불과한 병력만을 파견한 것도 현지의 이탈리아군을 보조해서 리비아를 지키라는 것이었지 영국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이집트까지 점령하라는 게 아니었다. 본문중에도 나오지만 당시 독일은 소련침공준비에 전력을 다하는 시점이었기에 북아프리카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도 필요도 없었다. 무솔리니가 사고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끼어들게 된 것이다. 롬멜이 설치자 영국은 북아프리카에 가용가능한 지상전력 대부분을 쏟아부었고, 국가전략이고 뭐고 일단 승리하면 무턱대고 좋아하는 히틀러의 과대망상증은 부풀어 올라 종국엔 롬멜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더 내달아 중동을 석권하고 터키를 끌어들인 후 캅카스까지 진출할 거라는 원대한 망상[9] 그리곤 스탈린그라드와 엘 알라메인 전투 [10] - 에서 파울루스와 롬멜이 깨지면서 망상임이 드러났다. [11]

게다가 방어전을 펼치면서 버텨도 모자른 판에 무리한 진격을 거듭하여 최대의 약점이었던 보급선 연장을 오히려 부추겨 종국에는 아프리카 전선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으며, 이탈리아 사령부와의 노골적인 반목으로 전선 전체를 혼란시켰다. 관우네.이는 롬멜이 1차대전때 전공을 세운 곳은 이탈리아였다는 것도 큰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이미 1차대전 후에는 이탈리아 여행 당시 봉변당할 뻔한 적도 있어서 롬멜은 이탈리아를 도우러 가는 장군으로서는 가장 최악의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후 "이탈리아군을 이끌고 승리한 유일한 장군"으로 알려지면서 이탈리아 장군들의 자존심을 시궁창에 박아버렸던 탓도 크다.

실제로 아프리카 전선에서 이탈리아군 아리에테 기갑사단과 리토리오 기갑사단, 트렌토 차량화사단 등 이탈리아군의 일부 기동부대는 장비의 후진성과 훈련의 저열함에도 불구하고 롬멜의 전쟁에서 결코 빠질 수 없었던 주력부대였으며 토브룩 공략 당시 적의 전면을 담당한 부대에도 아리에테 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1942년 11월 4일 아리에테 사단은 결국 전멸당하고 만다. 게다가 항상 보급품의 곤란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아프리카 군단이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던건 포위나 후방 감시 등, 기동 전력을 할애할 수 없는 부분을 맡아준 이탈리아 군대 덕분이었다. 보급이나 진지 공사 같은 궂은 일은 병력이 많은 이탈리아군이 도맡다시피 했고, 비록 취약한 보병사단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독일군이 공세에 나설 때 그 측면을 엄호하는 역할 역시 수적 주력인 이탈리아군이 맡아 왔다.

롬멜은 전쟁 초기 이들 때문에 뒷목잡은 경험들 탓에 이들을 무시했다. 물론 이탈리아군을 아예 완전히 공기급으로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평가를 내림으로서 이탈리아군의 운용 가치를 매우 낮게 쳤다. "이탈리아 병사는 훌륭하지만 장교는 형편없고 장군은 쓰레기이며, 그들의 전차와 야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말을 이탈리아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은데 전쟁의 양상을 보면 완전히 틀린 해석이다. 2차대전이 전차와 야포가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 전쟁임은 틀림없지만 모든 건 보병이 핵심[12]이므로 이 발언이 이탈리아군을 까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군과 그 동맹군인 자신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불만을 토로한 말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당장 보급문제로 인해 "독일군 병사들도 영국요리노획식량으로 하루하루 버티는 판에, 이탈리아군 병사들이 독일군 병사들에게 구걸할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이탈리아군 장교들은 전세에 관계없이 제대로 차려먹었으므로 이탈리아군 장교에 한해서는 대부분 기존 평가가 맞긴 하다.

결정적으로 그의 전공은 상당 부분이 일관된 전략-전술관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직관에 기인한 즉흥적인 것이 대부분이어서 상대의 의표를 훌륭하게 찌를 때가 많기는 했으나, 반면 직관이 빗나갈 경우엔 참담한 피해를 입곤 하였다. 특히 1차 토브룩 공방전 때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강공을 요구, 지나치게 큰 희생을 치르고 시간을 낭비한 것도 그의 이러한 직관과 감각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전투 성향 때문이었다. 이는 1941년 말 크루세이더 작전에서도 그대로 노출, 영국 30군단이 완전히 전투력을 잃었다는 속단 하에 아프리카군단의 공격 방향을 돌려버린 상태에서 30군단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현장의 보고를 무시한 탓에 결국 그해 겨울의 후퇴를 자초하기도 했다. 물론 롬멜이 30군단을 무시하지 않았다 해도 후퇴를 피할 수 없었으리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30군단에 대한 속단은 확실히 지휘관으로서는 해선 안 될 오판이었다. 이후 1942년 하계공세 때도 지나치게 직관에 의존, 그의 가장 빛나는 승리로 일컬어지는 가잘라 전투 역시 하마터면 아프리카 군단의 전멸로 끝날 뻔 했다. 당장 가잘라 전투 당시 아프리카 군단은 영국군을 얕잡아보고 공세로 들어갔다가 영국군의 반격으로 포위당했었다. 그러나 당시 8군 사령관 리치의 소극적인 지휘 덕분에 아프리카 군단은 전멸을 면했고, 롬멜은 포위망 바깥에 있던 이탈리아군과 소수 독일군 부대를 지휘해서 포위망을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영국 8군은 거의 괴멸되고 말았다. 결국 간신히 대역전승을 거두었지만 항상 이렇게 위태로운 승리를 거둘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롬멜이 불평했던 보급문제도 솔직히 말하자면 롬멜이 자초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프리카 전선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독일에서는 유사시 독일군이 파견될 경우 최대 2개 사단이 보급이 가능할 것이라는 정확한 예측을 했다.

실제로도 적군의 방해가 없고 그냥 일직선으로 트럭을 몰고 가기만 하면 땡이라는 비현실적인 가정을 하더라도 엄청난 거리가 발목을 잡게 된다. 우선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토브룩까지의 거리가 소련의 국경선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의 거리를 추가할 경우, 독일의 베를린에서 청색 작전의 최종 목적지중 하나인 코카서스 산맥 근처의 아제르바이잔에 있는 바쿠와 비슷한 거리가 된다. 물론 중간에 벵가지나 토브룩 같은 항구가 있긴 하지만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 해군을 상대해야 하는데다가 항만의 크기도 트리폴리보다 작은 것이 큰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간신히 화물을 이들 작은 항구에 내려도 전선까지 1,000km이 넘는 거리를 오로지 트럭에만 의존해서 수송해야 하는 막장상황이 밥먹듯이 벌어진다. 물론 대부분의 물자가 하역되는 트리폴리라면 전선까지의 거리는 2,000km은 껌으로 넘어가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제대로 된 길은 심심하면 영국 해군과 공군에게 공격받는 해안도로 한개, 철도는 없다시피 하고, 지중해를 건널 때 몰타에서 공격을 받는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동부전선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보급하기 정말 안좋은 지역이 북아프리카 전선이다. 이런것을 해결하려고 U보트 도 파견했지만 몰타, 수에즈, 어디서 계속 보급받는 영국함대(...) [13]
따라서, 이런 악조건에서 보급을 유지하려면 롬멜이 언급한 것처럼 트럭만 따져도 최소한 8,000대 이상 필요한데, 그 당시 동부전선 전체의 보급을 담당하던 트럭은 고작 14,000대에 불과했으므로 사실상 독일은 롬멜의 요구를 들어줄래도 그럴 능력이 없던 상황이었다.

또한 독일과 이탈리아는 합동으로 지중해에서 영국의 불침 항공모함 역할을 하며 보급품 선단에 큰 피해를 주고 있던 몰타 섬 공략을 추진하고 있었고, 지속적인 공습으로 사실상 몰타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데에도 성공했었다. 그러나 롬멜이 영국군을 이집트에서 몰아내기 위한 최종 공세를 실시하기 위해 몰타 섬 공략을 위해 할당된 자원을 중간에서 가로챘고 결국 몰타 섬 공략과 북아프리카 제압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몰타섬 역시 크레타섬 과 같이 대규모 공수작전이 필요했다 그게 한번도 없어서 말아먹은것이지(...)

게다가 적이 정신차리기 전에 빨리 전과를 올리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닥돌을 선호하는 전투 스타일 때문에 그의 부대는 만성적인 연료 부족에 시달렸다. 롬멜 장군의 전투 기록을 보면 항상 기름이 모자라서 진격이 둔화되고, 이 틈을 찌르고 들어오는 적군에게 낭패를 본 사례가 많았다. 그리고 공군에게 그들의 능력 이상의 항공지원을 요구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는 공군 장교들을 만날 때마다 "왜 하늘에는 항상 영국 전투기들만 보이나!?"하고 불평했다고 한다.알고보면 이탈리아 공군원수가 팀킬된 시점에서 제공권이 아작났다

여기에 앞에서 말했듯이 적국의 뛰어난 장군을 의도적으로 추켜세워 자신들의 실패를 좀 더 만회하고자 했던 영국의 의도적인 롬멜 띄우기로 인해 그의 명성은 실제 전과에 비해 과대포장 되었다는 논란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영국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체면을 세운 적이 한두번이 아닌지라... 그 덕에 롬멜은 자기보다 더 뛰어난 장군, 원수 네다섯명과 동급의 장군들을 다 제쳐 두고 독일 장군의 대표인 양 띄워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상대한 영/미군이 당시 동부전선의 소련군과 비교해 질은 더 좋았지만 그 숫자는 몹시 적었다는 생각해 보면 의외로 그의 전과가 대단치 않음을 눈치챌 수 있다. 당장 사단, 군단의 섬멸이 무척 엄청난 일처럼 여겨지는 아프리카 전선과 서부 전선과는 달리 동부전선에서는 사단 목숨이 사병 목숨일 정도로 전투의 스케일이 달랐다. 물론 결코 넘겨버리면 안될 사실은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상대한 연합군은 영연방군 지상군 전체의 거의 절반이었다. 초반에는 그리스 전역 등지 때문에 약화되었던 영국군이었지만 유럽이 독일의 손에 넘어가고 지상군을 투입할 전역이 북아프리카밖에 없었던 관계로 가용가능한 지상전력 대부분을 북아프리카에 쏟아부었다.

많은 독일군 장성들이 전쟁 당시에 이미 자기 전공 선전에 열을 올린 롬멜에 비판적이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때 마타주르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수여된 푸어 르 메리테 훈장을 엉뚱하게도 점령소식이 잘못 알려서 딴 사람에게 뺏겼다가 열심히 노력해서 찾은 후부터라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 이것이 문제가 되어 당시 독일군 통수본부에까지 문제가 올라가기도 했으며 롬멜 본인이 마타주르 전투를 자랑스러워 한 만큼이나 평생에 걸쳐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런 점과 필요에 의해서 괴벨스가 롬멜의 전공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켜주기도 했다. 경호실 시절의 친분과 히틀러의 총애가 상당히 작용한 것. 괴벨스의 일기에 롬멜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긴 하나 원래 괴벨스의 일기에선 인물 평가가 일관적이지 않고 독일군의 전황에 맞추어 그때 그때 다르다.

독일 육군의 최고참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는 롬멜을 애송이 원수, 광대 원수라고 부하들 앞에서 얘기했다는데 이는 기존 항목에 서술된 대로 전쟁대학 운운한 것이라기 보다는 롬멜이 프로파간다를 적극 활용하고 이에 출연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게 종전 후 군사 서류에 기록된 내용이다. 당시 서부전선 사령부 참모장이었던 귄터 블루멘트리트 장군에 따르면 룬트슈테트 특유의 귀족적인 자존심 때문에 롬멜에게 대놓고 싫다는 말은 못 하고, 오히려 이러한 영상을 보며 (비)웃으며 즐기는 모습이었을 뿐 아니라 롬멜과의 대화 자체는 겉으로 보여지는 갈등은 없었다고 한다.

거기다 롬멜 자신이 보다시피 허영심이 매우 강했고 장군참모로 대표되는 독일군 참모본부를 비아냥대는 발언을 기자들 앞에서도 일삼았기에, 대부분의 독일군 장성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므로 결국 '상관은 깔보고, 하급 지휘관은 무시하는' 스타일관우+장비의 안 좋은 부분만 모아놓았네?이 완성되었으며, 이는 인화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부하들에게 '파파'라는 애칭을 받은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조차 이 롬멜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였다. (후술할 클루게에 비하면 표현이 점잖은 편) 앞서 언급했듯이 호트는 1940년 프랑스 침공 때 롬멜의 직속상관이었고 롬멜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문제 때문에 꽤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이를 최선을 다해 조율해냈다. 이들의 상관인 4군 사령관인 귄터 폰 클루게 또한 롬멜은 루프트바페를 비롯한 다른 부대들의 희생은 경시한 채 자신의 전공만을 내세우고 있다고 보다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물론 전후 수많은 롬멜 서적에서는 이렇게 롬멜을 비판한 귄터 폰 클루게를 '전공을 질투한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게 대부분.

심지어 이런 평가는 유능한 명장 뿐 아니라 다른 장군들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심지어 무능한 장군으로 유명한 무장친위대의 요제프 디트리히 기갑상급대장도 롬멜은 자기가 '아프리카의 왕'인줄 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결국 이러한 그의 성격상의 결함은 훗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당시 노르망디 전선에서 복잡하게 얽힌 지휘계통과 함께 수습불능의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14]

부하들에게 자상했다는 점에도 약간 의문이 있는데, 제1차 토브룩 공격이 과도한 사상자를 내면서 실패한 이후 제5경사단장 요하네스 슈트라이히 소장은 너무 소극적으로 나섰다는 질책을 받고 롬멜에 의해 면직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그 때 유명한 일화가 있다. 롬멜 왈,"자네는 자네 부대의 안녕에만 너무 치중했네!" 물론 그 말을 들은 슈트라이히 소장은 기막혀하면서 "사단장으로서 그 이상의 칭찬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꾸했다. 다만 앞서말한 토브룩의 패배에 대해 '희생을 치러야만 한다'고 기록했던 점과 대비되게 1943년부터 집필한 전사록에서는 '군 지도자들이 요구하는 군사적으로 합당치 않은 용기는 어리석다,그들은 무책임할 뿐이다.'라고 기록하거나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후퇴한 점을 보면 계속된 패배에서 심경의 변화와 반성이 있었던 듯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예견했다는 사실도 또한 논란이다. [15] 실제로 롬멜은 노르망디 자체를 단지 자신이 부임한 지역이기 때문에 부대를 배치한 것뿐이었다는 것.[이견] 한편 일부에서는 롬멜이 노르망디 근처에 둔 기갑부대의 목적은 노르망디 대비가 아니라 7월 20일 쿠데타 때 롬멜이 직접 장악할 쿠데타군으로 쓸 목적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글쎄..

이런 문제들과 더불어 프랑스 전선에서의 옛 경험 등에 근거해서 노장 룬트슈테트 원수는 롬멜에 대해 사단장감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고 평가한 적도 있었다. 이는 근거없는 소리가 아닌 것이 영국군도 "잘해봐야 군단장감" 이라는 평가를 내렸기 때문이다. 확실히 전술에는 능했지만 전략관이 별로 없어서, 원수봉을 쥔 것은 솔직히 낙하산 인사라는 의견이 많다. 룬트슈테트 원수는 롬멜의 장례에서 '롬멜을 만나본 후 그에 대한 편견이 바뀌었다'고 회고하였지만 B집단군을 대표하여 장례식에 참석한 빈리히 베어 소령은 룬트슈테트의 장례사에 대하여 매우 위선적이었다고 비판했다.

한편 또다른 문제가 되는 것은 롬멜이 북아프리카의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일단 유대인 학살설은 영국의 거짓 선전설이 우세하다. 당시 롬멜은 영국군 포로중 유대인을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퇴각하면서 포로들을 수용소에 그냥 놔두고 퇴각해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이를 히틀러에게 보고한 적이 있었다. 롬멜의 부관이었던 슈미트의 회고록에 의하면 히틀러가 내린 유태인포로 학살명령서를 참모장이 무시하자고 건의했고 롬멜도 동의하여 명령서를 소각했다고 한다.

'동부전선에서 독일군 패배는 유능한 장군인 롬멜이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은 2차대전사를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면 심각하게 그릇된 의견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는 당연히 사장된 상태. 동부전선에서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 발터 모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페도르 폰 보크 등 당대 그리고 전쟁의 역사에 남을 명장들이 있었고 롬멜이 이들에 비해 유명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실력이 낫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대표적인 예로 노르망디 상륙 이후 서부전선에서 B집단군 사령관이 롬멜의 부상 이후 귄터 폰 클루게, 발터 모델로 교체되면서 오히려 독일군의 상황이 나아졌다는 것은 그동안 롬멜 찬양만을 일삼던 영어권 서적에서도 인정하고 있으니까. 참고로 이 두 사람은 프랑스 전역 이후 노르망디 상륙까지 영미연합군을 상대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동부전선 전문가들이었음에도 그동안 영미연합군만 상대해온 롬멜보다 이들을 상대하는데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2.4. 반박

2.4.1. 영국군이 롬멜을 띄웠던 것은 단순한 체면 살리기였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렇게 따지자면 어째서 서부전선에서 자신들을 패퇴시킨 룬트슈테트나 클라이스트 그리고 구데리안같은 장군들에게는 증오심을 보였던 것인가? 영국은 80대의 고령이었던 룬트슈테트를 고문하는 수준으로 가장 가혹하게 심문해 3번씩이나 졸도하게 만들었는가?
게다가 롬멜은 듣보잡 장군과 싸운 적이 없었다. 롬멜과 맞붙었던 오킨렉, 리치, 웨이벌, 몽고메리등은 영국내에서 인정받는 뛰어난 장군들이었다. 그중에서 오킨렉의 경우는 롬멜의 대한 공포증으로 겁먹은 병사들에게 롬멜은 초인이 아니라는 공문까지 돌렸는데 이런 것도 체면살리기인가? 게다가 처칠의 경우 토브룩이 함락되자마자 거의 충격에 빠졌으며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까지 제출되었다.



2.4.2. 롬멜과 다른 동료장군과의 관계

분명히 롬멜은 독선적인 면모를 보여 동료장군과 어느정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롬멜을 비판하는 책에서는 정작 롬멜이 구데리안과 같은 유능한 장군과는 친분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17]또한 독선적인 성격으로만 따지자면 연합국의 주코프맥아더가 롬멜보다 몇 배는 더 심했으며 , 패튼은 그의 상관인 아이젠하워가 대인배였기 망정이지 보통의 상황이었으면 이미 불화로 문제가 커졌을 텐데 왜 유독 롬멜에게만 이러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인가?

2.4.3. 북아프리카의 무모한 작전은 병참을 가중시켰다? 이탈리아군의 노고를 씹었다?

일견 타당한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롬멜의 책임만을 물을 수는 없다. 육군참모본부와 히틀러는 분명히 롬멜에게 현지사수를 하려고 명령을 내렸지만 히틀러에게도 문제가 있었는데 영국군의 콤파스 작전 전인 40년 7월 히틀러가 북아프리카로 토마를 파견했을때 토마는 독일이 참전할 생각이 있다면 적어도 4개 기갑사단은 필요하다고 보고하였지만. 그럼에도 히틀러는 롬멜을 파견하면서 완편되지 않은 1개 경사단과 1개 기갑사단을 그것도 축차적으로 파병했다.
애초에 히틀러와 육군참모본부는 북아프리카 상황에 전혀 알지 못했고 이탈리아를 구원해 줘야하니 그냥 형식적으로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도와줘야 할 이탈리아군 역시 문제가 있었는데 이탈리아군은 사실상 무기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들이었다. 롬멜이 두체가 전쟁하라고 자기 병사들에게 쥐어준 무기를 보면 현기증이 난다라고 할 정도 였으니 이쯤 되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또한 사기도 바닥이라 독일이 참전할 당시엔 무려 50만명의 이탈리아군이 3만5천명의 영국군에게 쫓겨 13만명이 항복하고 나머지는 벌벌 떨고 있었다.그리고 독소전 항목에도 보면 알수 있듯이 이탈리아 군이 한 참호건설이나 진지공사는 소련에선 민간인이 했다. 애초에 그런 공병노릇에 정식 군대가 투입된다는거 자체가 그 군대는 전력외라는 반증이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독일군은 너무 적었고 남의 나라땅에서 싸워야 하기때문에 사기도 별로인데다가 언어문제와 보급부족까지 겹쳤다. 이런 상황에서 롬멜이 진짜 현지만 사수했음 엘 알라메인 전투까지 갈 것없이 41년의 배틀엑스 작전에서 이미 독일과 이탈리아군은 전멸했을 것이다.
롬멜이 병참을 생각하지 않고 무식하게 진격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무다구치 렌야의 임팔 작전같은 것과는 급이 다른 것이다. 무다의 경우는 맹목적으로 승리와 전선확장에 열을 올려 정작 그것에 필요한 병참에 대해선 고려해 보지 않았고 그 작전이 한계에 부딪힌 뒤에도 진격을 고수한 것 때문에 일본군 제 15군단은 전멸당했다.
또한 롬멜 비판은 기본적으로 사막전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온 부분도 있다. 넓은 사막에 섬처럼 존재하는 거점을 위주로 전투가 벌어지는 사막전은 곧 기동전이다. 롬멜은 물량이 압도적이었던 영국군을 롬멜은 조공과 주공을 섞은 동시다발적인 기습이후 극단적인 기동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려 고립된 부대를 각개격파시키거나 깊숙히 적을 끌여들여 적의 약화 시킨뒤 한 두번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한 후 추격해 전과를 확대시키는 전술을 썼다. 사령부에서 내린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면 1941년에 엘 알라메인 전투를 찍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당장 1차 엘 알라메인 전투가 벌어진것도 보급에 쫓긴 롬멜이 무리하게 펼친 공세였다. 고로 책임은 이탈리아 군과 독일 상부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탈리아군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하곤 식충이에 불과했고(독일군이 물량으로 영국군을 압살하지못한건 이놈들의 무능때문이다.)독일 본토에선 몰타섬 점령을 통해 최소한 지중해 안쪽에라도 보급선을 유지시키지 못한게 크다. 만약 기동방어가 가능하게끔 만드는 최소한의 제공권과 보급이 존재했다면 연합군은 유럽도 아닌 타지에서 무의이미한 피를 흘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아프리카 군단은 일반 완편 군단의 절반도 안되는 병력이었다. 나중에 이탈리아 전역에서 추축국이 입은 피해를 생각해보면 이 전선을 유지시키지못한건 뼈아픈 실책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탈리아군에 대해서 장교와 장군에 대한 발언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탈리아 수뇌부에 대한 비판이고 북아프리카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쳐던 아리에테 사단에 대해서 롬멜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2.5. 총평

어쨌든 그의 광기에 가까운 군사적 직관이나 부하 장병들을 다루는 면모, 일정 범위 내로 제한된 야전에서의 상황 장악능력 등을 보면 롬멜이 훌륭한 전술지휘관이었다는 점은 변함없을 것이다. 즉 1개 전선을 담당하는 최고 지휘관이 아닌, 야전 지휘관으로서는 사실상 최고 수준이며, 그를 휘어잡을 수 있는 강력한 리더쉽이 존재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명령을 받고 주어진 상황에서 전투를 치르는 건 최고였으나 전략적 식견과 전역을 담당하는 역량이 부족한 인물이, 집단군 사령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자신의 이러한 단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패전의 책임을 사이가 나쁜 다른 장성들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이 비판을 받아온 것.

또한 자신의 작전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각자의 업무에서, 롬멜 자신이 생각하는 본인의 전술적 역량에 걸맞는 수준이기를 항상 요구하였다. 일견 타당할 요구로 보이겠지만, 모든 인재를 맘에 쏙 드는 천재로 채울수 없는 현시창을 고려하면 최상위 지휘관에 걸맞지 않는 판단이다.[18]

그리고 정작 유능한 지휘관들이 롬멜의 막하에만 오면 제대로 된 실력 발휘를 못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요구하는 실력 이상의 장성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점은 지휘력의 부재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장군의 경우 그 동안 영미권 서적과 위키에서 '프로이센 귀족의 오만함으로 롬멜에 비협조적이어서 아프리카 군단의 패배를 초래했다.'는 식으로 악역을 떠맡아 왔지만, 동부전선에서 그는 소련군 최고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이반 코네프를 정면으로 맞붙어서 대승리를 거둔 화성작전의 주역이었다. 이렇게 탁월한 장군이 그에 걸맞는 역량을 발휘하게 해주는 것도 상급 지휘관의 역할이자 능력인데 빌헬름 리터 폰 토마,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와의 대립도 그렇고 롬멜은 이런 면에서는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3. 기타

대외적인 대인관계는 어쨌던 간에 가족에게는 자상한 인물이어서, 아내 사랑도 지극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러 간 게 그 예인데, 연합군 상륙 보고가 들어올 당시, 집에 있던 롬멜은 잠옷 바람으로 아내에게 줄 깜짝선물을 숨겨두느라 끙끙거리고 있었다고(...). 그래서 전선에 있을 때도 아내한테 "사랑하는 루셰에게"로 시작되는 편지를 보냈다. 그 중 한 통이...

"사랑하는 루셰에게. 상륙 후 어떤 장애도 받지 않고 쾌진격을 거듭하고 있소. 아군의 사상자는 극히 경미하며 포로나 전리품은 셀 수도 없소. 기쁨에 밤잠을 못 이루는 내 마음을 당신도 알 거라 생각하오."

덕분에 후세 역사가들은 당시 아프리카 군단의 자세한 상황과 더불어 롬멜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런 지극한 사랑은 친아들 만프레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프레트가 수학을 잘한다니 참 기특하다."라는 내용의 편지가 지금도 남아 있고 이에 더해서 사생아 게르트뤼트에게도 나름대로 정을 보였다. 그래서 일부 역사가들은 "롬멜이 군인으로의 삶 외에 애정을 가진 대상은 아내와 아들뿐"이라고도 평한다.

다만 이는 전후에 롬멜 관련 서적이 많이 출간되면서 널리 알려진 사실일 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부분의 독일군 장성들이 집으로 보낸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담겨 있다. 특히 아들의 나이가 아직 20대가 아니어서 군에 입대하지 않은 소년인 경우는 그러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에리히 폰 만슈타인하인츠 구데리안처럼 20대의 장성한 아들이 같은 전선에서 종군하고 있는 경우에도 아버지로서의 애정은 매우 지극하다. 그리하여 종전 후 상당한 시간이 흘러 이러한 일선의 장교들이 집으로 보낸 편지에는 전선의 상황이 상당히 직접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괴벨스가 상당한 양의 편지를 검열 후 압수하기도 했지만, 무사히 가족들에게 전해진 편지들을 보면 아내와 자식, 부모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으며 '승리 이후의 평화'를 간절히 기원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다. 수도 없이 언급된 말이지만, 롬멜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는 연합군 장교들에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아들인 만프레트 롬멜은 20년간 슈투트가르트 시장으로 재직하였고, 과거의 적국이었던 프랑스로부터 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도 받았다. 그 이유는 어찌되었건 롬멜은 히틀러가 죽였으며, 포로 학살이나 홀로코스트 같은 전쟁범죄에 연루된 적도 없고, 롬멜이 주로 활약했던 곳에서는 동부전선에 비하면 상당히 신사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연합군측의 주요인물에게 호감을 샀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용해서 만프레트 롬멜은 십대 소년 시절부터 열심히 아버지의 변호를 했고, 그게 먹혀들기도 했다.[19] 다만 만프레트는 결국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80년대에 그를 만난 전사학자는 만프레트가 아버지 롬멜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상당히 부담스러워하고 어쩔 수 없어 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에 충실하게 사막여우가 되었으며, 특기는 썰렁개그. 그의 개그를 들은 아군들은 포효절규하며 닥돌한다.[20] 어쩌면 초기 오너캐였던 늑대를 차용한 걸지도. 골방환상곡가 모델이란 말도 있다. 참고로 진짜 맘모스를 타고 있다.

워낙에 유명한 장군이다 보니,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도 사실. 국내에는 롬멜의 일기와 회고를 롬멜의 아들 만프레트와 델하트가 엮은 《롬멜전사록》이 번역되었으며 우호적인 쪽으로는 필립 마우리체 레미의 《롬멜》이 있다. 기타 다른 책이 있긴 하지만 참고문헌이 빈약하거나 일방적인 롬멜 찬양 수준이거나 해외보다 국내에서 많이 팔린 서적이다. 롬멜 비판을 제대로 다룬 책은 국내에 없다시피 하며 《전격전의 전설》이나 《보급전의 역사》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롬멜의 부정적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패튼과 몽고메리, 롬멜을 함께 다룬 책을 모두 읽어보길 권한다. 마지막 책은 특별한 호오의 입장을 보이는 바 없이 3국 왕따열전(...) 수준이다.

『패튼과 롬멜』, (일조각, 2012) 이란 말 그대로 패튼롬멜을 다루는 책이 출간되었다. 전반적인 논조는 롬멜에 우호적인 편. 하지만 저자인 데니스 쇼월터는 영미권 군사학계에서 독일군 관련 연구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 학자인만큼 책의 전반적인 신뢰도는 높다.

아울러 독일군 장군 중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어 관련서적이 지나칠 정도로 많이 나오는 인물이다. 2010년 11월 현재 서점에서 구입가능 도서만 무려 7종이다. 출판사들이여 제발 다른 독일 장군 다룬 책 좀 내자... 물론 외국에서도 롬멜은 2차대전 관련 장군들 가운데 책이 가장 많은 편이다. 2차대전 장군 중 가장 유명한 축에 드니까 당연할 일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독일 ARD 방송국에서 그에 관한 TV영화가 제작되었다. 꽤 공들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 살펴보자. 하지만 독일어를 모르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롬멜에 관한 일화. 영국군 기관총 진지에 돈좌된 독일군 분대장을 누군가 뒤에서 두들기자 분대장이 돌아봤는데 롬멜이었다. "지금 여기서 뭘하나?", "적 기관총 진지에 고전중입니다." 그러자 롬멜은 상체를 내밀어 기관총 진지를 살펴보더니 "별거 아니군. 당장 돌격해 제압하라." 잠시 후 독일군 분대는 고함을 지르며 기관총 진지로 돌격했고 한사람의 부상자도 없이 그 진지를 제압했다.[21].

롬멜에 관해서는 한 가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롬멜의 황금", 혹은 "롬멜의 보물"이 그것.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재직하던 시절, 유대인들에게서 각종 귀금속과 역사유물들을 약탈했고 이것을 사하라 사막이나 코르시카섬 어딘가에 숨겼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지금도 이 이야기를 믿는 보물 사냥꾼들이 일대를 뒤지고 다닌다고….

4. 주요 보직 내역

  • 1910.7.19. : 사관후보생으로 육군 입대
  • 1912.1.27. : 제124보병연대 배속
  • 1929.10.1. ~ 1933. : 드레스덴 보병학교 훈련교관
  • 1935.10.15. ~ 1937. : 포츠담 군사학교 훈련교관
  • 1938.11.10. : 비너노이슈타트 군사학교장
  • 1939.8.25. ~ 1940.2.5. : 총통경호실장
  • 1940.2.5. : 제7기갑사단장
  • 1941.2.14. : 독일 아프리카 군단장
  • 1941.9.1. : 아프리카 기갑집단장
  • 1942.2.21. : 아프리카 기갑군 사령관
  • 1943.1.1. ~ 1943.3.9. : 독일 이탈리아 아프리카 집단군 사령관
  • 1944.1.1. ~ 1944.7.17. : B집단군 사령관

5. 진급 내역

  • 1910.7.19 : 육군 사관후보생(Fahrenjunker)
  • 1912.1.27 : 소위(Leutnant)
  • 1915.9 : 중위(Oberleutnant)
  • 1917.10 : 대위(Hauptmann)
  • 1933.10.10 : 소령(Major)
  • 1935.3.1 : 중령(Oberstleutnant)
  • 1937.8.1 : 대령(Oberst)
  • 1939.8.1 : 소장(Generalmajor)
  • 1941.1.1 : 중장(Generalleutnant)
  • 1941.7.1 : 기갑대장(General der Panzertruppe)
  • 1942.1.30 :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2.6.22 : 원수(Generalfeldmarschall)

6. 주요 서훈 내역

  • 1914.9.30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1915.3.22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1915.2.25 : 뷔르템베르크 왕가 군사 공로 훈장 금장
  • 1915.4.8 : 뷔르템베르크 왕가 군사 공로 십자 훈장
  • 1917.12.10 : 푸어 르 메리테 훈장
  • 시기 미상 : 1918년 제정 전상장 은장
  • 시기 미상 : 최전선 전투 명예 십자장
  • 1940.5.17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0.5.21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40.5.27 : 기사 철십자 훈장(43번째 서훈)
  • 시기 미상 : 기갑전 은장
  • 1941.3.20 :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10번째 서훈)
  • 1941.4.22 : 이탈리아 용맹 훈장 은장
  • 1942.1.20 : 검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6번째 서훈)
  • 1943.3.11 : 다이아몬드 검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6번째 서훈)
  • 1944.7.12 : 루마니아 미하이 용감공 전공 훈장 3급, 2급
  • 1944.8.7 : 1939년 제정 전상장 금장
  • 1965.6.12 : 서독 연방군 육군 제28기갑여단 병영 헌정
  • 1969.2.1 : 서독 연방군 해군 뤼첸스 급 유도미사일 구축함 함명으로 선정(D187 Rommel)

7. 저서

  • 1937 : 보병 공격술(Infanterie greift an, Infantry Attacks). 한국에서는 롬멜보병전술이란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롬멜 장군의 아들이 역자 황규만 장군(육사 10기, 준장 예편)에게 보낸 편지도 함께 실려 있다. 오래 전에 출간된 책이나 국한문혼용체를 읽지 못하는 한글 세대들이 초급간부가 되기 시작하면서 외면 받았다고(...) 결국 출판사 측에서 황규만 장군을 몇 번이고 졸라서 2판부터 한글로 다시 쓰여졌다고 한다. 황규만 장군은 "500자도 안 되며 뻔한 군사용어도 못 알아본다니 이게 될 일이냐"면서 "한자를 모르면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한다."고 2판 역자 서문에 써놓았다. 한글판이 영 못마땅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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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표준 독일어에서는 한 형태소 안에서 철자상으로 중복되어 쓰는 자음이라도 따로 구별해서 발음하지 않는다. 그래서 Johannes는 요한네스가 아닌 요하네스로 표기되는데 어째 똑같은 겹자음이 들어간 Rommel은 '롬멜'이란 표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 [2] 카포레토 전투 당시의 일이다.
  • [3] 데니스 쇼월터의 《패튼과 롬멜》에는 페르디난트 쇠르너로 나온다.
  • [4] 원래 유럽에서는 독일군의 주식이 감자 그리고 소시지등의 조금의 고기였다. 그러나 사막에서는 이런 식품들은 변질이 쉬웠기에 딱딱한 비스킷정어리 및 이탈리아제 쇠고기통조림, 그나마도 힘줄이 대부분을 차지한 저급 통조림... 특히 비타민이 부족하여 민가에서 귀한 과일을 교환해서 얻거나 대부분 연합군 보급품을 약탈하여 보충하였다고 하였다.
  • [5] 그래서인지 1세대 밀리터리 매니아들이나 서양 도검 매니아들은 러시아어나 독일어, 프랑스어는 물론, 심지어는 영어에 무지한 이들도 수두룩하다.
  • [6] 기동전사 건담의 등장인물 람바 랄은 이름만 봐서는 귄터 랄에서 모티브를 받은 것 같지만 사막의 적장이라는 이미지를 롬멜에서 가져온 것이고, 우주전함 야마토의 도멜 장군은 아예 이름까지 가져왔다. 나아가 최신 리메이크 판에서는 풀네임 '에르크 도멜'에 아내까지 등장, 일본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롬멜 미화 이미지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이 두 작품 모두 일본 국민 애니메이션이며, 특히 도멜 장군은 나이가 지긋한 일본 정치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
  • [7] 서적 '전격전의 전설'에 따르자면, 사실 이 점은 구데리안도 마찬가지긴 했다.
  • [8] 맥아더와 니미츠 같은 다른 사례도 있고.
  • [9] 트리폴리에서 카이로까지는 약 2000km고, 이는 폴란드에서 모스크바까지 거리의 두배가까이 된다. 만약 여기서 캅카스까지 진출하려면 3000km를 더 가야 한다. 거리가 짧은 동부전선에서도 보급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캅카스까지 보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10] 단 엘 알라메인 전투는 독일군의 공세가 아니라 영국군의 공세로 시작됐다. 다만 특이점이라면 물량있으니까 닥치고 어택땅이 였다는것
  • [11] 두 전투의 공통점은 미친 물량 이였다는것 소련은 소련대로 학살 가까울정도로 투입했고 영국은 영국대로 숫적으로 도박한것
  • [12] 정확히 말하면 현대전도 마찬가지다.
  • [13] 몰타를 못 죽인 것도 있지만, 이탈리아 함대와 영국 함대가 서로 다른 의미로 짱박혀서(...)...
  • [14]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부대의 배치는 전략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실제로 '연합군이 상륙하기 전에 제압해야 한다'는 롬멜의 기본 전략은 일리가 있었기에 이는 확실한 전략을 정하지 못한 히틀러의 우유부단함이 가장 큰 문제이지만, 상륙 이후에도 독일군 지휘체계는 여전히 혼선 상태였다. 오히려 롬멜의 부상 이후 혼선이 정리가 된다.
  • [15] 사실 1944년 즈음 해서 연합군의 유럽본토 상륙은 독일군 수뇌부에서 누구나 다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히틀러마저도! 이탈리아 전선이 고착화 되어 돌파구가 없는 상황에서 들이치는 방법은 직접적인 상륙작전 뿐이고 예상된 지점이 두군데로 압축되었는데 한군데는 파드 칼레였고 다른 한군데는 르망디였다.
  • [이견] 조금 이견이 있다. 물론 롬멜이 부대를 자기 지휘권 안에 두려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지휘권을 행사하려 한 것은 아니었고, 롬멜은 원래 상륙지를 파드 칼레로 예상하여 부대를 배치한 것이었다고 한다. 페리스코프 블로그가 사라져 링크를 걸 수 없지만(...) 오히려 노르망디에 상륙지점을 예상한 사람은 히틀러였고 이는 순전히 감이었다. 파드 칼레에 연합군의 함포사격과 기만작전이 행해지자 "연합군 놈들은 속임수를 많이 쓴단 말야!!"라며.. 또한 룬트슈테트 원수와 롬멜 원수의 갈등만이 부각되었는데, 실질적인 부대배치의 논란은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기갑대장과의 갈등이 가장 컸다. 해안으로 밀어내느냐, 아니면 끌어들여서 격퇴하느냐의 의견차이였지만, 각자가 연합군 상륙작전의 예시를 들면서 논란이 되었기 때문에 룬트슈테트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고 부대배치가 애매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 [17] 실제로 구데리안은 롬멜과 2차대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이는 구데리안이 고슬라르 출신이고 롬멜은 고슬라르 예거대대 지휘관을 역임한 적이 있어 안면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데리안은 자신의 자서전인 <한 군인의 회상>에서 롬멜과 자신의 친분과 롬멜에 대한 칭찬을 기록했다. 북아프리카 전역당시 롬멜이 병으로 잠깐 지휘봉을 놓으려고 할 때 히틀러와 구데리안의 관계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데리안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했던 것은 이러한 친분 때문이었다. 물론 히틀러에게 거부당했지만
  • [18] 이는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나 미국의 조지 S. 패튼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나(패튼은 PTSD에 걸린 부상병을 겁쟁이라 욕하며 폭행한 적도 있다), 그들 두 사람에게는 아이젠하워라는 대인배와 천조국이가 있었지만 롬멜에게는 히틀러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세 장군은 연합국과 추축국에서 가장 유명한 육군 지휘관들이다.
  • [19] 정작 롬멜 부인은 '뷔르템베르크의 아들은 결코 반란을 역모하지 않는다.'며 남편이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다는 주장을 적극 부인하였고, 롬멜 신화 정립에 앞장선 한스 슈파이델을 배신자라 칭하며 만나지 않았다.
  • [20] 그런데 이후의 전개중의 다른 개그나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의 개그 센스를 보면 썰렁개그 자체가 작가 본인의 개그 센스일지도 모른다.
  • [21] 출처: 리더스 다이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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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7 12:5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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