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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역사

last modified: 2015-01-23 12:38:57 by Contributors

에티오피아역사를 다루는 항목.

Contents

1. 전근대사
2. 근현대사

1. 전근대사

자신들이 인류 문명의 기원이며[1], '신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는데 덜 구운 놈이 저기 백인이고, 탄 게 딴 나라 흑인들이며 우리가 '[2]이라는 신화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여러가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뭐 게에즈(Ge'ez)어가 어족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고, 바다 건너 예멘과도 관련이 깊었으니 혼혈의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서도.

인류 최초로 수수를 재배한 작물재배 지역 중 하나였으며, 고대에는 나일 강의 상류 국가였기 때문에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수준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 경 이전까지는 간간히 이집트인의 여행기에 등장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뚜렷한 기록이 없다. 다만 수단의 카르마(Karmah 혹은 Kerma)와 교류하며 수단과 에티오피아 국경 지대의 가시(Gash) 델타에서 문명이 태동하기 시작한 흔적이 보인다.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지역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뚜렷한 국체(國體)는 D'mt라는 나사 빠진 이름으로만 남아 있는데, 셈어족 계통에서는 주로 모음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이 국가는 '다못(Damot)'라는 이름으로 주로 복원되는데 기원전 700년 경부터 400년 경까지 존속했으며, 수수를 재배하면서 관개의 흔적을 남기고 철기를 사용했으나 사료가 많지 않아 명확한 규명까지는 힘들다.

이후 수단의 쿠시(Kush) 왕조가 번성하면서 한동안 잠잠하던 에티오피아 고원에는 쿠시 왕조가 쇠퇴할 무렵 악숨(Aksum) 왕국이 등장하였고, 3세기 경 이미 로마 제국사산 왕조, 중국과 함께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에 의해 4개의 강성한 왕조로 일컬어질 정도로 번성하였다.[3] 350년 경에는 지리멸렬해진 쿠시 왕조를 병합하고, 소말리아와 예멘 지역까지 점령하며 교역의 핵으로 떠올랐다.

악숨 왕국의 번영은 고대 이집트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경계 대상 중 하나였다. 솔로몬에게 퀴즈 배틀을 신청한 시바의 여왕이 바로 에티오피아 사람이다. 여기서 솔로몬과 동침해 자손들을 남겼는데, 솔본좌 그들은 대대로 유대교를 믿었다! H. 라이더 해거드가 쓴 '솔로몬 왕의 보물'의 배경 무대가 되는 지역이기도.

기록을 믿는다면 로마 제국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20년 뒤인 333년에 에티오피아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339년에는 국교로 선언해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는 아르메니아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 기독교 국교 나라였다고 한다. 참고로 시리아가 370년에 기독교로 국교를 선언하고 로마는 392년에서야 국교로 선언했다. 고대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동방 일대가 오늘날 이슬람교 일색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1600년이 넘게 기독교 신앙을 지켜온 나라인 셈이다. 이후 이 나라는 7세기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슬람교의 물결에서도 살아남아 기독교 신앙을 독실하게 유지했다. 다만 이슬람의 바다에 홀로 고립되어 있어서인지 기독교 신앙이 독특하게 발달해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정교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고대의 흔적이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이 또한 기독교 사학자들에게는 중요한 연구과제가 되고 있다.

5 ~ 6세기에는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 왕조가 기약 없는 전쟁을 벌이면서 홍해 방향의 무역로가 흥성했고, 악숨도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점차 아라비아 세력이 성장하고 내분이 지속되면서 결국 아라비아의 패권은 포기했으며, 수단 지역에서도 노바티아, 마쿠라, 알와 등의 왕국이 성립하면서 힘을 잃어갔다.

악숨은 결국 7세기 이후 크게 쇠퇴하여 10세기 중엽 유대인 여왕 쥬디트(Gudit/Judit)에 의해 멸망했다고 전하며, 이후 한동안 소국들이 분립하는 혼란의 시기를 맞는다. 이 시대를 종결지은 것이 자그위(Zagwe) 왕조인데, 기록의 부족으로 정확한 연대 추산까지는 아니나 대체로 1137년부터 1270년까지 5명의 왕에 의한 통치는 인정하고 있다. 이 왕조도 기독교 원리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까지 자그위 왕조를 통치한 게브레 마스켈 랄리벨라(Gebre Masqel Lalibela)는 다수의 교회를 짓는 한편 이슬람교 세력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대신하여 자신의 국가에 '새 예루살렘'(랄리벨라)을 건설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한편 동부 지역에서는 소말리족을 중심으로 이슬람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갔다.

십자군 전쟁을 치르던 유럽 국가들과 에티오피아가 접촉한 것도 이 때였다. 유럽 국가들은 이슬람교도들이 자기네 배후에 기독교 국가가 있다고 한 얘기를 믿고 기독교를 믿는 나라의 왕 프레스터 존에 대한 이야기인 프레스터 존의 전설을 지어내 퍼뜨렸는데, 이게 바로 에티오피아 정교를 신봉하는 에티오피아 제국에 대한 얘기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이 이전에도 이미 잘 알려진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에, 동방에서 이슬람에 치명타를 가한 몽골인들의 영향이라고 보는 설이 훨씬 지배적이다. 어쨌든 에티오피아는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 편에 서서 싸웠다. 킹덤 오브 헤븐 등에서 허여멀건한 백인들과 검은 흑인 기사가 편먹고 싸우는 좀 뜬금없게 여겨지는 상황은 이래서 생긴 것.

이후 자그위 왕조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솔로몬(Solomon) 왕조는 자신을 악숨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예쿠노 암라크(Yekuno Amlak)에 의해 건립되었다. 솔로몬 왕조는 초기 통치를 왕의 전사적인 영웅성과 악숨 왕조의 혈통으로 정당화했는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왕이 예쿠노 암라크의 손자로 14세기 초에 활동한 암다 체욘(Amda Tseyon)이었다. 그러나 암다 체욘이 기독교를 앞세워 동부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한편 13세기 이래 티그라이 등지에서 수도원이 확산되어 나가면서, 기독교가 통치의 수단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는데 이를 왕의 통치와 연결시킨 인물이 15세기 중엽의 자라 야코브(Zara Yaqob)였다.

자라 야코브는 행정 구역을 통합하고 교구제를 강화하는 한편 악숨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해 애썼다. 그러나 이는 종교를 이용한 권위주의적 통치로 여겨져 귀족들의 반발을 불렀고, 이어 어린 왕들이 연달아 제위에 오르면서 에티오피아는 쇠퇴기를 맞는다. 이러한 16세기 초반 동쪽으로 쫓겨났던 하레르 술탄국의 이븐 아흐마드 이브리힘 알 가지(Ibn Ahmad Ibrihim Al-Ghaji)가 에티오피아에 침입하자 서쪽에서도 쿠시족이 독립을 위한 반란을 일으켰고, 에티오피아는 1543년까지 14년 간 이슬람 세력에 의해 통치받게 된다.

에티오피아는 포르투갈의 도움을 받아 국가를 회복 했으나, 오로모(Oromo)족의 침입으로 남동쪽의 영토를 상실하고 수도를 곤다르(Gondar)로 옮긴 뒤 왕권은 급속히 쇠퇴한 상황이었다. 17세기에는 가톨릭 선교사들과의 충돌이 벌어지고, 18세기에 들어서면 짧은 기간 내 다수의 왕이 교체되는 등 절대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특히 1769년에서 1855년까지 '판관의 시대(Era of Judge)'에는 각지에서 왕을 옹립하기 위해 분란이 벌어졌고, 이집트 헤디브 왕조가 에티오피아에 진출하기까지도 했다.

2. 근현대사

에티오피아의 근대적 개혁은 지방 총독이던 테오드로스(Tewodros)에 의해 본격화된다. 그는 군사 공장을 설치하고 지방 군벌들을 억눌렀는데, 이 과정에서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려 하자 교회의 반발을 겪게 되고 1868년에는 영국 원정군의 침략을 받게 되어 자살했다. 이후 권력은 티그라이의 요하네스 4세에게 넘어갔고, 요하네스 4세는 에티오피아의 통일을 위해 군사력과 외교력을 총동원하는 한편 셰와의 메넬리크와 혼인 동맹을 맺는 등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그는 수단의 무슬림 군대와 전투하는 와중에 전사하게 된다.

이후 즉위한 것이 바로 메넬리크 2세였다. 메넬리크 2세는 셰와의 관료제를 국가 통치에 도입하는 한편, 전선과 전화, 철도 등을 부설하고 학교를 지으며 본격적인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아디스아바바로 천도하는 한편 기관총을 비롯한 군사 무기의 도입과 군대의 육성에도 노력하여, 주변 지역을 정복하고 이를 군대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주변 지역의 위험은 커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홍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지부티를 장악했고 영국은 수단 남부와 소말릴란드를 강탈했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뒤늦게 들어와 에리트레아와 현대 소말리아의 동남부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마침내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기 위해 내란에 가담하는 형식으로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 등의 비호를 받던 에티오피아에 의해 격퇴되면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사실상 유일한 독립국으로 남게 된다.

그러다가 1935년,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기어코 에티오피아를 합병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국제연맹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 무솔리니는 노력을 기해 독가스까지 동원하면서 1936년 에티오피아를 병합했지만 몇 년 뒤 이탈리아가 패망하면서 에티오피아도 자동으로 해방됐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한국전쟁 당시 군대를 파견한 나라였으며, 1968년에는 황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정도로 한국과 가까운 사이었다. 국가기록원 영상자료에 보면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방한 영상이 있다. 당시 황제의 방한 영상[4] 이후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남았는데 전쟁의 여파와 경제개발 실패가 이어졌다. 그리고 극심한 기근과 실업 또한 심각한 문제가 되었으며 1961년 에리트레아가 독립을 주장하며 에티오피아 내전의 시작을 알렸다. 한국과의 관계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 급격히 냉각되어 현재는 뭐...[5]

물론 황제가 아예 무능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어서 1930년 즉위 이래로 에티오피아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를 실시하였으며, 여러 근대 문물을 들여온 근대화의 상징으로써 존경받았다. 이탈리아에 대한 항전에서도 크게 활약하였고,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창설을 제창하였으며 자메이카에선 살아있는 신으로 모셔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입헌군주제 실시. 근대화 추진 등 몇 가지를 제외한 국내 통치에는 극히 무능했으며 기근으로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손만 빨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보통 에티오피아가 잘살다가 공산 체제 하에서 망가진 것으로 여겨지기 쉬운데 실제로는 이전부터 한국과 다를 게 없는 최빈국이었던 것이다.[6] 즉 잘해봐야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전 국왕과 별 차이가 없었던 셈.

결국 민심이 황제를 떠났고 얼마 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를 중심으로 한 군의 소장파 장교[7]들이 1974년 쿠데타를 일으켜 에티오피아 제정을 폐지했다.[8] 그 결과 에티오피아는 공화정으로 탈바꿈하였다. 이 반동으로 미국소말리아의 독재정부에 지원을 퍼부어 친미 정권으로 만들었으며 에티오피아 반군을 지원하기도 했다.

1974년 이후에도 에티오피아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멩기스투는 고위인사를 처형하고 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공산주의 정책을 시도했다. 그러나 멩기스투 역시 무능한 건 마찬가지라 낙후될 대로 낙후된 에티오피아의 경제를 성장시키기는 커녕 내부 공산화 및 소수 민족 억압에만 눈이 멀어 있었으니 제정 시절과 달라질 것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국교인 에티오피아 정교를 믿는 국민(약 45%)과 이슬람교를 믿는 국민(약 40%)의 대결, 부족 간의 내란, 지역 분쟁, 소말리아와의 전쟁, 수단과의 분쟁, 국내 정치 혼란, 경제 빈곤화, 사막화 문제, 극심한 가뭄과 식량 부족 문제, 에이즈 환자 폭증 등이 중첩, 국가 역사상 최악의 국가 막장 테크를 타며 극도로 쇠약해졌다. 남들은 발전하는 사이 에티오피아는 제자리걸음을 수십 년간이나 한 것이다.

이후 러스 제나위의 좌익 성향 반군과 에리트레아 독립군, 그리고 보수 성향 반군과 오로모족과 말리족, 아파르족 등의 반군은 쿠바소련, 북한 등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 공산 정권과 맞서 웠으며 이 과정에서 최대 140만 명이 사망했다. 1990년 소련이 지원을 중단하자 위기에 빠진 멩기스투는 그제서야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공산주의자가 아니어도 당원이 될 수 있도록 법을 고쳤지만 이미 늦어 1991년 멀러스 제나위가 이끄는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이 에티오피아를 장악했다.

1993년에는 내전과 평화 협상 끝에 에리트레아가 기어이 독립해 떨어져 나가면서 내륙국이 되면서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에리트레아 측은 항구 이용금액을 마음껏 올리고, 에티오피아 돈은 받지 않으면서 그 타격이 엄청났고, 에티오피아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에리트레아에 대해 경제 제재를 단행하면서 서로 원한이 쌓여 갔다. 여기에 국경분쟁까지 곁들어서 결국 두 나라는 원수지간으로 1998년부터 2년 동안 전쟁을 치뤄야 했고 지금도 국경분쟁으로 국경선에서 전투가 벌어지곤 한다. 전쟁 당시 미국과 이스라엘이 강력하게 지원하면서 한 때 에리트레아 공군력 대다수를 소탕하며 막대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번에는 아랍 나라들 및 러시아가 에리트레아를 지원하면서 외교적으로 물러서야 했기에 전투에 이기고도 뭐 하나 이득이 없었다. 게다가 과거부터 존재하던 빈곤이 냉전 종식과 함께 더 심해지면서 민심 이반이 심해진 것도 한 원인이었다.[9]

거기에 1990년 이후 소말리아가 지옥으로 변하면서 그 여파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에티오피아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한편 오가덴 반군의 지원을 차단할 생각으로 소말리아를 공격했는데 그 결과 졸지에 소말리아와도 원수지간이 되었고,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2007년 소말리아 몇몇 항구도시를 공격했지만 이후 삽질을 거듭하다가 2009년 철수를 단행했다. 안 그래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에티오피아에겐 이런 전투에 나서는 것도 상당한 부담이었기 때문.[10] 그러다보니 오늘날에도 여전히 에티오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어쨌든 혼란 속 에티오피아는 새 헌법을 지정해 의원내각제연방제 국가가 되었다. 첫 총선에선 멩기스투에 맞서싸운 EPRDF가 오로모와 암하라, 티그레 민족주의 정당과 연대해 승리를 거두었다. 2000년 두번째 총선에서 EPRDF가 의석의 88%를 싹쓸이해 갔는데 이 때부터 부정선거 의혹이 일기 시작했다. 2005년 총선에서 EPRDF가 또 압승을 거두자 야당을 중심으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고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이 발포해 193명의 시위대가 사망했으며 전국적으로 6만 명이 체포되었다.

1980년대 초반, 미국 유명 가수들이 모여 부르던 위 아 더 월드도 바로 에티오피아 기근 및 난민 피해자 성금 모금을 위하여 기획된 노래였다. 하물며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나라는 어렵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탓에 에이즈 환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엄청난 문제가 되고 있지만, 에티오피아 정부는 사실상 별 대책이 없는 것 같다.

단, 2010년대 들어 어마어마한 경제적 성장을 이룬다. 터키나 몽골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경제위기를 기회로 맞아들인 국가들 중 하나. 다만 빈부격차만은 해결은 고사하고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추세라 장기적으로 경제 규모는 올라가겠지만 그와 별도로 남아공 비슷한 처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된다.

2010년 총선에서도 EPRDF와 동맹 정당이 국회 536석 중 534석을 차지하고 지방 선거 의석 1,904석 중 1,903석을 차지하였다. 이에 야당이 재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이 해 G20정상회담에서 말라위와 함께 옵서버(관람객)로 초대되었다.

2012년 20년 가까이 집권해 오던 제나위 총리가 사망했고, 후임으로 하일레 마리암 데살렌 총리가 들어왔다. 전임총리와 마찬가지 노선으로 기자와 정치범을 수천 명 가까이 잡아가두더니 이에 반발을 샀다. 2013년 6월 3일 아랍의 봄의 여파를 받은 거센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물론 에티오피아는 아랍권은 아니지만)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30603_0012130872&cID=10103&pID=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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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인류의 기원은 좀더 아랫쪽에 살고있는 산부시족. 인류가 뻗어나간 지역(온 세계 죄다)을 생각해보면 먼 것까지는 아니다.
  • [2] 에티오피아에 관심이있으며 알겠지만 피부색이 커피색이다.
  • [3] 물론 당시 로마도 위축되고 있었고, 사산 왕조는 막 세워졌고, 중국은 저 멀리 있어 제대로 된 정보가 전해지지 않았으니 정확한 평가라고 보기까지는 어렵다. 마니라는 인물이 활동한 지역이 페르시아 인근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하고.
  • [4] 지금도 강원도 춘천에는 황제가 직접 심은 상록수가 엄청 커서 잘 자라고 있으며 관광명소중 한 곳인 공지천 근처에 이디오피아 참전기념관이있으며 이디오피아의 이름을 딴 유명한 커피샵도 있다.
  • [5] 에티오피아가 공산화 이전에 부국이었다는 말이 있으나 1970년 에티오피아의 1인당 GDP는 UN에 의하면 83$에 불과하다. 즉 에티오피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원래부터 극히 가난한 나라였던 것. 멩기스투가 잘살던 에티오피아를 말아먹은 게 아니라 이전부터 막장이던 걸 더 막장으로 만든 정도에 불과하다. 종종 에티오피아의 1인당 GDP가 6.25전쟁 당시 3천달러였다는 설도 인터넷에 떠도는데, 이 수치도 비현실적인 것이 세계은행 자료에 의하면 독일일본이 1인당 GDP 3천달러를 돌파한 시점이 각각 1971년, 1973년이다. 심지어 미국도 1962년에 가서야 3천달러를 돌파한다.#
  • [6] 게다가 이것도 전쟁 직후 기준. 한국이 본격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키면서 에티오피아를 크게 앞서게 된다.
  • [7] 공교롭게도 주동자인 멩기스투는 황제가 매우 아끼던 장교였다.
  • [8] 이 때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살해되어 유해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옛 왕궁을 파서 황제의 유해를 찾았다.
  • [9] 실제로 국내 언론에 따르면 1990년대 말 전쟁 당시 에티오피아 국민들은 정부가 미친 게 아니냐며, 국민은 굶어 죽는데 무슨 전쟁질이냐고 대놓고 욕했다고 전하고 있다.
  • [10] 물론 전면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듭했다. 상대는 에리트레아군보다 못한 이슬람 법정연대 소속 민병인 반면 에티오피아군은 동아프리카의 정규군이니. 하지만 그 다음 통치가 문제였다. 게다가 소말리아는 북한과 달리 외부에서의 지원이 상당히 용이한 게 특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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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1-23 12:3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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