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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의 난

last modified: 2014-02-06 20:03:41 by Contributors

영가의 난(永嘉之亂)
8왕의 난에 이어서 0가의 난 크리

Contents

1. 개요
2. 발단
3. 전개
4. 절정
5. 결말

1. 개요

중국 서진 말기에, 이민족에 의해 일어난 반란을 지칭한다. 명칭이 영가가 된 것은 회제(懐帝)인 사마치(司馬熾)의 연호였던 영가(永嘉 307년~312년) 때 일어났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는 흉노의 유연에 의한 전조의 건국부터 서진의 멸망까지를 영가의 난으로 보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보다 좁은 낙양 함락과 회제의 죽음정도로 범위를 축소해서 본다.

중국 한족 역사상 정강의 변, 토목의 변과 함께 3대 굴욕으로 손꼽힌다.

2. 발단

혜제(恵帝)인 사마충(司馬衷)의 치세 때 일어난 팔왕의 난(300년) 이후, 고대부터 중원(中原)이라 불리던 화북(華北)지역은 혼란상태에 빠져, 다수의 유민(流民)이라 불리는 피난민이 각지을 유랑하고 있었고, 예전 한나라시대 이후 중원에 침입하여 한민족과 함께 살고 있었던 새외민족도, 활약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산서성을 중심으로 이주했던 흉노의 족장 유연은 팔왕의 난 때, 성도왕 사마영의 휘하에 있었으나 304년 서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좌국성(左國城 - 현재 산서성 이석현(山西省 離石縣)을 본거지로 삼고, 대선우(大單于)의 지위에 앉았다. 또한 한나라때 내려진 유씨 성에 의거해 한왕(漢王)을 칭했다. 이 나라는 후에 전조(趙)로 이름을 바꾼다. 그 후 산서성 남부로 세력을 확장해, 갈족의 석륵과 한족 유랑민의 우두머리였던 왕미를 휘하에 흡수해, 하북성과 산동성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3. 전개

팔왕의 난 후, 서진 왕조는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간신히 정권을 유지하는 상황에 있었기에, 권력자였던 사마월은 유연의 아들인 유총이 침공해오자 허창에 주둔하여 군대를 불러모았다. 하지만 회제는 평소 자신이 동해왕의 꼭두각시라는 점을 싫어하여 기회를 포착했다고 생각했는지 구희라는 장군에게 밀서를 보내서 동해왕을 주살할려고 했었다. 그러나 밀서를 받은 자가 사마월에게 체포되었고, 동해왕은 이를 알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분사(憤死)하자 일거에 서진은 구심력을 잃어버렸다.

311년 4월 석륵은 동해왕의 영구를 장지로 운반한다는 구실을 잡고 낙양에서 사실상 도망치던 태위인 왕연(王衍)이 이끄는 황족, 귀족, 정예병사를 포함한 무리 10만을 격파하였다. 이때 왕연 이하 몇만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서진의 친왕 48명을 포함한 나머지 인원도 포로가 되었다. 문제는 이들이 사실상 낙양과 그 주변을 지킬 병력중 주력이었다는 것.

사태가 이렇게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회제는 낙양에 머무른 채로 각 지방의 지원군을 받으면 수도를 지켜낼 수 있다고 착각하였다. 하지만 파견된 사신 중 상당수가 이미 낙양 주변에 만들어진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붙잡혔으며, 그나마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한 사신들이 각 지방에 도착했지만, 각지를 장악한 왕족이나 호족은 일단 자기 코가 석자인데다가, 팔왕의 난과 동해왕과 회제의 갈등등으로 인해 중앙정부에 충성을 바칠 이유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말만 그럴싸하게 하고 지원군을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4.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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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년의 상황. 사실상 낙양이 완전포위된 상태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연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유총은 석륵(石勒)과 유요(劉曜), 왕미(王彌)의 군을 집결시켜 낙양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이미 낙양을 한번 공략했다가 실패했던 유총은 310년 10월부터 낙양 주변의 하남성을 철저하게 박살내서 교통망을 다 끊어놓은 상태였다. 이 시점에 와서야 회제는 낙양에서 탈출을 결심했지만 이미 황하로 통하는 나루터가 장악되었고, 나루터에 남아있던 배도 이미 이를 눈치챈 유총에 의해 모조리 불탄 상태라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311년 5월 낙양성 공방전이 벌어졌고, 낙양에 남아있던 서진의 군대는 유총을 비롯한 전조의 주요 인물들이 12번의 전투를 모두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저항했다란 언급을 할 정도로 용맹하게 싸웠으나, 앞서 언급한 왕연의 건으로 인해 병력부족에 시달렸다. 결국 낙양은 1개월도 제대로 못 버티고 6월에 함락되었으며, 황태자이며 회제의 외아들인 사마전을 포함한 3만명이 살육되었고, 낙양은 약탈과 방화로 완전한 폐허가 되었다. 이 때 궁전이 있는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왕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유요는 낙양을 깨끗이 태워버렸다.

그러나 왕미도 잘한 것이 없는 것이 비록 낙양을 태웠지만 나름의 군기를 유지한 흉노족보다 오히려 약탈이 극심한 부대는 흉노에 투항한 한족 왕미의 군대였다. 이들은 낙양이 폐허가 되기 전 민가를 약탈하고 역대 서진의 황릉들을 철저하게 도굴해 부장품들을 챙기고 파괴했다. 이 때문에 현재 낙양에 있는 서진의 황릉은 어느 것이 사마의 것인지, 어느 것이 사마염의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심지어 이를 유요가 말릴 정도였으니 극심했을 것이다.

회제는 유총에게 체포되어 한나라의 수도 평양(平陽 - 현재 산서성 임분현 山西省 臨汾縣)으로 연행당했다. 312년 유총은 회제를 회계공에 봉했는데 유총은 그를 연회에 초대했다. 사실 유총과 회제는 회제가 예장왕이던 시절에 서로 만났던 일이 있어 안면이 있어 아끼던 첩을 사마치에게 선물로 주었고 그 첩은 회계공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는데 313년 황실 새해 맞이 행사에서 유총은 사마치에게 노예 복장을 입히고 고급 포도주를 관리들에게 접대하도록 했다. 원래 서진의 관리였던 유민과 왕준은 이런 굴욕적인 광경을 보고 감정이 복받쳐올라 크게 울고 말았다. 이것이 유총의 화를 돋워 유민과 왕준을 포함한 서진 출신의 관리들을 모두 반역 및 서진 장수 유곤에 대한 내통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사형에 처했고 이것은 결국 그들의 주군이었던 사마치에게도 옮겨붙어 결국 313년 봄에 회제는 독살당하였다. 여기까지가 좁은 의미의 영가의 난이다.

5. 결말

회제의 사후 313년 여름에 장안에서 민제(閔帝)인 사마업(司馬鄴 혹은 司馬業)이 옹립되었으나, 이미 실질적인 서진 왕조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민제도 316년에 전조의 포로가 되었고, 318년에 살해되었다. 화북은 이후 본격적인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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