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영의정

last modified: 2014-12-09 11:49:56 by Contributors

신라시대의 시중고려시대의 하시중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의 최고 관직. 뜻은 의정(議政), 즉 의정부의 수장(領)이라는 의미로 조선에서 의정부가 최고 의결기관이므로 결국 조정 신료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라는 의미가 된다. 흔히 영상(領相)이라 불리었다. 의정부, 돈령부, 중추부 등의 정1품 아문과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등의 특수부서에 존재했던 영사(領事)의 하나로 영사는 각 부서의 으뜸 벼슬로서 모두 정1품. 대개의 경우 원로대신이 예우로 임명되는 영중추부사와 왕비의 아버지들이 맡는 영돈령부사를 제외한 나머지 영사는 거의 다 영의정이 겸직하고, 마찬가지로 정1품 자문명예직인 도제조 또한 영의정이나 다른 좌우정승이 겸직하는 것이 관례였으니 영의정이란 자리가 가지는 상징성은 상당한 것이었다.

본래 조선은 고려말의 관직체계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지만 정종이 즉위하면서 고려때부터 내려온 최고 의결기관이던 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였다. 이때 의정부의 수장으로 영의정부사를 두고 그 밑에 좌의정과 우의정을 두었다. 영의정부사를 줄여서 영의정이라 부르게 된 것.

일반적으로 영의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하여 임금 바로 아래의 최고위관직으로 실권도 대단했을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조선 시대에 영의정의 권력이 막강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애당초 의정부 자체가 경륜있는 노신들이 모여서 국정을 관장하고 자문하는 정도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의정부의 수장인 영의정은 신료들에게 원로로, 조정의 영수로서 존경은 받았지만 실권은 크지 않았다. 영의정의 입지는 왕권의 강약에 따라, 그리고 조정내 의정부의 권한의 변동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다.

실제로 조선사의 권신들을 보면 영의정해먹었던 양반들은 얼마 안된다. 최강의 권신 김안로도 좌의정에 그쳤고[1] 윤원형은 영의정이 되긴 했지만 정작 권력이 최강이던 시절에는 우의정이나 영중추부사같은 자리에 있었으며 영의정일 때는 오히려 또다른 권신 이량의 급부상으로 힘이 예전만 못했다. 이숙번도 직급상으론 낮은 직책에 있으면서 상관인 남재, 성석린 등에게 호령을 해댔다. 봉한도 그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좌의정에 있었다. 결국은 누가 왕의 총애를 받느냐에 따라 달린 일이다.

오히려 영의정 자리는 권신들이 얼굴마담으로 그럴듯한 사람을 세워놓기 위해 비워두는 자리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중종조의 명재상 정광필의 경우에는 권신 이항, 심정, 이행, 김안로 등이 모두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기 위해 영의정으로 합의를 봤고 인조반정 이후에도 반정 4대장 이귀, 김류, 이서, 신경진등의 합의로 이원익이 영의정이 되었다. 왠지 지금 국무총리랑 똑같은거 같은데...

힘이 셌던 영의정으로는 한명회, 신숙주의 경우가 있고 물론 세조에게 납작 엎드렸지만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수양대군과 중종반정의 삼대장인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이 있다. 그외에 숙종조의 영의정 허적이 좀 세도를 부려봤으며 선조조의 이준경도 상당한 힘이 있었다.

특히 태종은 의정부서사제 대신 육조직계제를 더 선호해서 태종때의 영의정은 그냥 외국에 보낼 외교문서를 점검하고 중죄인이나 사형수의 판결에 대해서 검토하는 정도의 수준의 일을 했다.

그러나 세종경륜있는 원로분들이 국정에 참여못한다는건 말이 안된다라고 하여 육조직계제 대신 의정부서사제를 기조로 삼았다. 태종때는 육조, 즉 오늘날로 치면 각부처의 장관들이 왕에게 직접 보고하고 결재를 받는 시스템이었다면 세종은 이것을 각부처 장관들이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 이를 조율해서 왕에게 올리는 시스템으로 바꾼것이다. 황희 정승이 이 시스템을 싫어합니다

사실 세종이 육조직계제 대신 의정부서사제로 돌린 이유 중에는 결재해야할 일이 육조직계제하에서는 너무 많은 탓에 과중한 업무를 좀 줄여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 세종은 어려서부터 소갈증(당뇨)에 시달렸기 때문에 육조직계제의 과도한 업무를 감당 할 수 없어서 의정부서사제로 체제를 돌렸다고도 한다. 이렇게 되면 상당히 훌륭한 재상이 필요한 법인데, 다행이 세종 시대에는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허조 같은 훌륭한 재상들이 있었기에 잘 돌아갔다.

물론 세종이라고 해서 영의정에게 모든 권한을 준건 아니다. 고위직 임명이나 군사권, 중죄인에 대한 처결문제등은 왕이 직접 처결했다. 하지만 세종이 집권 후반기에 들어가면서 건강이 악화되고 한글창제등으로 업무를 줄일 필요성이 있게 됨에 따라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면서 단종시절까지 영의정 등 삼정승의 권력은 강해졌다. 이는 결국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권세가 너무 커져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명분으로 계유정난을 일으키는데 빌미가 되었다.

당연히도 세조는 다시 의정부서사제에서 육조직계제로 시스템을 회귀시켰고 이후 조선에서는 다시는 의정부서사제가 부활하지 못했다. 이후 중종 12년 (1517년)에 국방문제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설립된 기구인 비변사가 점차 권력이 커지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국정 전반을 담당하게 되자, 의정부와 6조는 유명무실한 기구가 되고 삼정승도 비변사에 자문명예직인 도제조로 밖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영의정은 조정신료들의 수장이라는 명목상의 지위만 남게 된다.

물론 조선시대의 모든 영의정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던 영의정은 1453~1455년까지 재임했던 이유(李瑈)이다. 그 정체는 바로...

현대에는 개그콘서트에서 왕이 내리는 명령에 "아니되옵니다!"라고 할 수 있는 역할로 격상되었다.
영의정 영의정 영의정 영의정 만세 만세 만만세!

조선시대 주요 영의정 역임자

  • 배극렴[2]
  • 조준[3]
  • 하륜
  • [4]
  • 황희: 조선 역사상 최장기 영의정 재임자. 무려 18년. 1431년 69살때 영의정으로 재임하기 시작하여 1449년 87세로 노령을 이유로 물러날 때까지였다.
  • 황보인
  • 수양대군[5]
  • 정인지
  • 한명회
  • 신숙주[6]
  • 구성군 이준: 조선 역사상 최연소 영의정 역임자. 27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 원종, 순정, 성희안: 중종반정삼대장. 반정 이후 슬슬 벼슬이 올라가다 셋이서 차례로 사이좋게 영의정을 진짜 조금씩 해 보았다. 왜 조금씩 해 보았냐면은 영의정 몇달 해보기도 전에 죄다 병으로 죽었기 때문(...) 이들이 연산이 거느린 미녀들을 취하고 전국에서 뇌물을 받아 창고가 모자랄 정도였다는데 이에 선비들은 하도 저딴 식으로 굴다가 천벌을 받았다고 비웃었다고 한다.
  • 남곤
  • 광필[7]
  • 윤원형
  • 이준경
  • 이산해
  • 류성룡
  • 이항복
  • 이덕형
  • 이원익
  • 김류
  • 오윤겸
  • 김자점
  • 이경석
  • 최명길[8]
  • 김육[9]
  • [10]
  • 수항[11]
  • 창집[12]
  • 태구: 소론 완론의 수장. 경종 때 대리소동 당시에 우의정으로 재임하며 대리청정의 명을 거두는 데 앞장섰고 노론의 자폭으로 환국이 있자 영의정이 되었다. 소론이지만 온건파인 완론이라서 형식적으로나마 영조를 옹호했고 경종이 죽기 직전에 죽었다. 죽은 후에는 노론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관작이 추탈되지만 정미환국으로 복권되었고 뒷날 영조 31년의 소론 준론 집단 자살의 와중에 역률로 추죄된다.
  • 광좌: 소론 완론의 강경파. 삼수의 옥 사건 때 노론을 공격하는데 앞장섰고 영조 즉위 후에 수세에 몰린 소론 대신들이 죄다 노론과의 타협을 꾀하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노론 놈들이 삼수의 옥 때 반역한 게 아니면 뭡니까?라고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여 노론들의 공공의 적으로 몰렸다. 영의정에 여러번 제수되었으나 노론의 공격으로 번번이 낙향했고 실제로 영의정 노릇은 얼마 못 해보았다고 한다. 영조 31년의 나주궤서사건과 소론 준론의 집단 자살 쑈 때문에 직첩이 거두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 김좌근
  • 흥인군
  • 김홍집 :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
  • 최효종
  • 의안대군[13]
----
  • [1] 세종의 장인 심온이 라이벌 박은에게 "심온은 영의정이 되고나서도 좌의정처럼 실권이 있는 자리도 아니라고 불평을 해댄답니다."라고 탄핵을 당한 걸 보면, 좌의정은 상당히 권한이 있었는 모양이다. 심온은 후에 태종에게 처형당한다.
  • [2] 조선의 첫 최고재상, 고려의 대신이었으나 태조가 구시대의 인물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우대했다. 그러나 영의정이란 관직명이 등장한 건 태종 1년 의정부 설치와 함께이기 때문에 태조 1년에 졸한 배극렴은 생전에 영의정으로 불릴 일은 없었으며, 당시 배극렴의 정식 관직명은 문하좌시중이었다.
  • [3] 배극렴 사후 문하좌시중에 올랐다가, 태종 1년 의정부 설치 이후 영의정 자리에 올랐다. 배극렴 생전에는 의정부가 없었으므로 사실상 조준이 최초의 영의정인 셈이다.
  • [4] 세종의 장인이나 외척을 경계한 태종에 의해 개발살난다.
  • [5] 계유정난 직후 즉위할 때까지 영의정이었다.
  • [6] 10년 넘게 영의정을 하면서 최장기 재임 영의정 중 하나에 속한다. 여담으로 신숙주는 최단임 영의정 기록을 세운바가 있는데 자그마치 4일이다. 세조의 변덕 때문인데 자세한 정황은 세조항목 참조.
  • [7] 11년 이상 영의정으로 재임한 중종조의 명재상. 조광조의 독주 시절에는 그를 제일 강력히 저지했고 조광조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누구보다도 열렬히 그를 변호했다. 김안로의 미움을 사서 유배되자 도성의 백성들이 통곡했고 그가 귀환하자 환영행렬이 길거리를 메웠다한다.
  • [8] 그의 손자인 최석정은 영의정에 가장 많이 임명되었는데 무려 9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했다.
  • [9] 대동법의 확장과 화폐 사용을 강력히 역설한 효종조의 명재상.
  • [10] 탁남의 영수이자 영의정 중에서 그나마 세도를 좀 부려본 양반, 절제된 처신으로 효종, 현종의 신임을 받았고 숙종도 그를 중용했으나 서자인 허견의 역모로 죽고 만다. 야사에서는 그가 유악을 멋대로 가져다 써서 숙종의 미움을 샀다는 얘기가 있으나 실록 어디에도 관련 기록이 없다.
  • [11] 송시열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자 효종, 현종, 숙종 초의 중신, 호포제를 주장한 바가 있으며 환국 때 사사된다.
  • [12] 숙종 말, 경종 초의 권신이자 김상헌의 직계 후손이며 김수항의 아들, 노론의 영수인 4대신의 필두였으나 삼수의 옥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다.
  • [13] 항목 2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이복동생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4-12-09 11:49:56
Processing time 0.1095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