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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

禮訟[1]論爭.

Contents

1. 개요
2.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
3.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
4. 예송논쟁의 의미와 평가
4.1. 대중의 인식
4.2. 학문적, 이념적 의미
4.2.1. 효종의 정통성 문제
4.2.2. 이기일원론 VS 이기이원론
4.2.3. 예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5. 결론과 의의
5.1. 긍정적 견해
5.2. 부정적 견해
6. 관련 인물


1. 개요

조선시대에 있었던 최대의 정치적, 사회적 여파를 낳은 키보드 배틀대논쟁이자 조선 정신 문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

후술하겠지만 이 논쟁의 궁극적인 원인은 소현세자가 죽자 그의 아들이 아닌 동생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을 세자에 올린 인조의 후계 대책에 있다.

이 논쟁의 주축은 서인남인인데, 싸우는 이유는 효종과 효종의 왕비(인선왕후)가 사망했는데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느냐였다. 현종 시대에 벌어졌으며, 1차와 2차로 나뉜다.

당시에는 굉장히 중차대하고 국운의 사활이 걸린 중대 담론마냥 다뤄졌으니, 이는 다름 아닌 왕가의 정통성 문제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생에는 큰 상관이 없었으므로 특히 민중사관론자들에게는 명분론의 정점인 병크 취급되며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사건이기도 하다. 근데 왕가와 역모 문제가 안 중요했던 시절이 어디 있었던가? 그러나 실상은 서인 산당과 남인, 그리고 그 사이에서 왕권을 확보하려는 현종의 줄다리기였다.

참고로 자의대비는 효종보다는 5살, 효종비인 인선왕후(효숙대비)보다는 6살이 어리다. 1659년 사건이 터졌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35세, 요즘 기준으론 파릇파릇한 새댁뻘이었다.

사실 중국 명나라 때도 이와 비슷한 논쟁인 '대례(大禮)의 의론'이 있었다. 이건 가정제 참고.


2.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가 몇년복을 입느냐가 문제가 되면서 발생했다. 효종이 장남이 아니지만 국왕이었으므로, 의붓어머니인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상복을 1년 입어야 하는가 3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된 것이다. 이 논쟁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다름아닌 윤휴였다. 효종이 장남은 아니되 인조의 적통된 후계자이니 3년복이 맞다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에 정태화, 송시열, 이시백 등은 이 문제를 고심하지만 전례에 따라 1년이면 충분하다고 결론지었고 이때 나온 말이 그 유명한 체이부정(體而不正). 송시열은 '4종지설(四種之說)'이라 하여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인 네 가지 경우를 설명했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아래 목록에서, '정(正)'이라 함은 곧 '정통성'이니, 본처 소생의 맏아들, 맏손자 등 정통성에 문제가 없는 경우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보면 되고, '체(體)'라 함은 손자가 아닌 아들을 일컫는다고 보면 된다. 대가 떨어져 있지 않고 몸으로 이어졌다는 의미. 즉 다소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정=맏'이고 '체=아들'로 보아도 무방. '이(而)'는 '말이을 이'로서, 영어로 치면 and, but 등을 광범위하게 포함하는 어조사다.

정이불체(正而不體)[2]적손(장손)이 후사를 이은 경우
체이부정(體而不正)[3]서자(중자)를 세워 후사를 이은 경우
정체(正體)[4]적자(장자)가 병이 있어 후사를 잇지 못하는 경우
부정불체(不正不體)[5]서손(중손)이 후사를 이은 경우

즉 송시열은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었으므로 정통성이 없다(체이부정)고 보았기에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지 못하고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 영의정 정태화는 이 용어의 폭발력을 직감하고는 놀라 송시열에게 손을 흔들어 말을 막고 이석견이 살아있어 그 말은 곤란하니,[6] 국조 이래 아버지가 아들의 상에는 보통 1년 상복을 입었으니까 그냥 국제대로 따르자고 제안한다. 깊이 들어갔다가 피 보지 말고 그냥 하던 대로 해요, 하던 대로 송시열 역시 대명률의 복제 조항에도 그렇게 되어 있으니 따르자 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다른 규정도 있고 하니 그렇게 합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하였듯 이것은 결국 정치적인 포장이었고, 서인들의 엄격한 학문적 해석에 따르면 효종은 중자(=적자 아닌 모든 태생)에 불과했다. 일종의 정신승리. 말은 이렇게 하지만 우리는 너님 정통이라고 인정 못 해요

그러나 여기에 허목이 3년복을 입자고 주장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7] 송준길이 다급하게 반박했지만 허목은 다시 상소를 올려 송준길을 발라버렸고 서인 진영은 크게 동요했다. 원두표 등 서인 중에서 한당에 속하는 이들은 아예 허목을 지지하면서 이전의 논의에서 큰 실수를 했다고 인정하기까지 했다. 이때 송시열이 상소를 올린다. 서인을 이끌던 송시열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니 1년만 상복을 입어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이는 자칫 현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서인들은 경국대전과 대명률에는 장남이든 차남이든 다 1년복을 입게 하였으므로 경국대전과 대명률을 따라 1년복을 입자고 실드를 쳤다. 이것은 정확히 말하면 송시열과 같은 서인 내 학자에 가까운 사람들이 하는 주장이 아니라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태화를 비롯한 당대 정치가들의 포장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서인의 학문적인 주장은 왕도 사대부의 법에 따라서 중자(=적자 아닌 모든 태생)이니 1년이라는 것. 그렇게 논쟁이 지어지는가 했는데...

윤선도가 상소를 올리면서 조정이 발칵 뒤집힌다! 그가 어떤 상소를 올렸는지는 해당 항목 참조.

결국 윤선도가 송시열을 역적죄로 모함했다고 막장 치킨게임이 벌어졌고 남인들이 서인들의 윤선도 처벌 요구에 대거 반발하면서 일부 서인들까지 윤선도의 주장에 동조하는 등 조정은 개판이 된다. 마침내 현종은 윤선도를 귀양보내고 국조오례의에 따라 1년설을 받아들였고[8] 송시열에 맞섰던 남인 윤선도는 과격한 발언으로 현인을 모함했다 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현종은 남인 허적 등을 영상에 계속 앉히는 등 싸움이 과도하게 번지는 일을 막는데 성공한다. 아예 한쪽이 망할 때까지 부채질한 숙종과의 차이다.

권력적인 구도에서 보면 인조반정 이후 성립된 서인,남인 공존 체제가 송시열이라는 산당의 영수 등장과 함께 깨질 조짐을 보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환국정치의 예고편으로도 볼 수 있다.) 인조반정 이후 30여년간 조선의 정치구도는 집권 서인과 야당인 남인으로 분류되지만, 또한 그 집권 서인이 , 한당 등의 계파로 갈라져 대립하곤 했기에 남인은 그 사이에서 나름 스팅보드를 쥘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남인의 입지는 사실상 관제 야당 수준으로 전락해갔으며 거기에 산당의 송시열이 전면에 나서면서 서인의 계파 갈등이 산당을 중심으로 봉합, 이런 흐름이 남인들을 자극하게 한 것. 그 중에서도 남인 중 강경세력인 청남(윤휴, 허목)이 서인을 똘똘 뭉치게 만든 송시열을 끌어내리기 위해 논쟁을 이끈 것.

비록 이 논쟁이 서인의 판정승으로 귀결되었지만 지속적으로 남인 유생들의 반발 상소가 올라오고 몇년이 지나도록 상소와 주장이 빗발치는 등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었다. 한편으론 양란과 당쟁으로 인한 혼란 속에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예학이 더욱 중요시되던 시대적 모습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3.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

1674년 효종의 부인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사망했다. 이 때 자의대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나로 키배가 벌어지게 되었다. 효종 때는 경국대전이 장남과 차남을 같게 취급해 1년복을 입어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문제는 며느리의 경우 경국대전이 맏며느리는 1년, 그 외 며느리는 9개월을 입도록 규정했다는 것. 맨 처음에 서인은 아무 생각없이 1년복으로 왕의 결재를 받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송시열의 주장에 따르면 9개월이 맞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왕에게 "저번에 실수했는데 대공복(9개월 복)이 맞네요."라고 수정을 요구했다. 이에 현종은 몹시 빡쳐서 "일을 이따위로 하냐? 니들 옷벗어!"라고 예조의 담당자들을 모조리 파직해버렸다. 이때부터 2차 예송이 터지게 된다.

송시열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니, 그 아내인 인선왕후도 장자의 아내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9개월만 입어도 된다라고 주장했고, 서인들은 이번에는 주례와 의례에 맏며느리를 위해 9개월 동안 상복을 입게 되어 있음에 9개월을 입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송시열의 주장에서 '전에는 지금의 법(아들에 대해서 1년복이라는 국조오례의)을 썼는데 이제는 옛날 법(맏며느리에 대해서 9개월복이라는 주례, 의례)을 쓰자는 것이니 논리의 일관성이 없다'는 논리로 이번에는 서인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국조오례의 대로 장자인 효종에게도 1년, 장자처인 효종비에게도 1년 상을 치르게 되었다.

갑인예송은 1674년(현종 15년) 7월에 벌어졌고 한달도 지나지 않아 신속하게 마무리되었다. 현종은 송시열에게 싸늘하기 그지없는 비망기를 내려 송시열을 조롱하고 질책했고 서인들과 송시열은 최대의 정치 위기에 몰렸으나 현종은 송시열의 제자인 서인 영상 김수흥을 내쫓고 남인 허적을 영상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김수흥의 동생 김수항은 좌상으로 삼아 조정의 균형을 맞추었고 남인이 자신에게 가세하기 전에 일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두달도 채 지나지 않아 시기 적절하게 8월 18일에 숨을 거둔다. 효종 때처럼 너무 타이밍이 절묘해서 송시열이 현종을 독살한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하지만 예송논쟁 자체는 이미 마무리된 상태고 송시열과 서인이 역적으로 멸문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왕을 암살할 정도의 위기도 아니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숙종 시절에 그 말이 안나왔을 리가 없다. 어쨌거나 뒤이어 즉위한 숙종은 이 예송을 근거로 송시열이 예송을 잘못 이끈 죄를 물어 서인들을 내쫓았다.

이 싸움으로 남인이 잠시 득세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숙종 때의 환국도 현종이 어느정도 판을 만들어 뒀으니 가능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4. 예송논쟁의 의미와 평가

4.1. 대중의 인식

후대에 후손들이 국사책에서 별다른 이해없이 단순하게 이 싸움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 이뭐병이다. 왜 이런 것으로 싸우나 싶은 정도. 당장 경신대기근 항목만 봐도...

식민지 시절 일본인 사학자들 역시 이 예송논쟁을 가지고, 형식적인 것에 목숨을 걸었던 의미없었던 뻘짓이라고 평가하고, 이를 근거로 이용해 우리의 민족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4.2. 학문적, 이념적 의미

예송논쟁은 정치적, 학술적 상징성이 엄청났던 사건이었다. 모양새는 단순한 복식정도였지만, 내부적으로는 효종의 정통성 문제를 시작으로, 서인과 남인(더 정확하게는 동인) 시절부터 있었던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조선의 통치체제 문제까지 걸려 있던 일대격전이었다.


4.2.1. 효종의 정통성 문제

이 논쟁의 가장 큰 원인은 효종의 정통성 문제다. 장자승계가 원칙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이는 자칫 정통론까지 비화될 수 있는 문제였다[9]. 이런 정통성 문제가 생긴 큰 원인은 인조효종을 세자로 삼은 게 당시 상황상 반억지였기 때문이나, 이 논쟁이 있었을 때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송시열의 주장은 효종의 정통성을 제대로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릴 수 있었다.[10]

1차 예송 때도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윤선도가 '서인이 소현세자가 적통이라고 왕을 비하한다!'고 시비 걸었다가 서인들에게 깨져서 귀양한 바 있다. 쉽게 말해서 겉으로는 장남과 차남의 서열, 왕족과 양반의 차이를 두고 단순히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를 따지고 있지만 효종의 정통성도 관련이 있었으니 과연 효종이 왕위를 이은 게 정당한가?라는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은 엄연히 세계관을 모두 포섭하는 학문체계이고, 그 안의 분파에 따라 그 사람의 세계관, 정치성향이 결정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조선의 관료는 모두 성리학에 능통한 학자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혹은 가지고 있다고 의제되었고), 논쟁의 기반도 포괄적인 세계관인 성리학적 학문체계에 포섭시켜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성리학과 정치적 관점이 융화된 모습으로 나타는데, 상복을 입는 기간 자체가 그 사람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일면으로 평가될 수 있고, 특히 위 문제는 효종 치세의 정통성을 인정하느냐의 여부까지 더해진 복잡한 문제가 된다.

4.2.2. 이기일원론 VS 이기이원론

그리고 이의 학술적 배경에는 '왕이 사대부와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 즉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의 대결이 있었다. 즉, 사대부와 왕이 같다면 당연히 국왕이 누구이건 효종은 집안의 2남이 된다. 하지만, 사대부가와 달리 왕의 경우는 특별해서 국통이 이어진 것을 정통으로 볼 경우라면 효종은 적장자가 될 수 있다. 이 경우는 효종은 당연히 국통을 이은 장자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앞서 언급된 장자가 아닌 자가 이은 정통성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만약 왕가의 예법이 사대부와 다르다면 당연히 정통성의 문제는 제기될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조선이라는 나라가 '왕과 신하가 같이 다스리는 나라'인지, 아니면 '왕이 주도하고 신하는 보좌하는 나라'인지 문제까지 올라가는 유구한 문제였다. 그리고 이것을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이이의 이기일원론이 학문적으로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다[11] 즉 이 문제에서 밀리는 것은 붕당의 기반이 되는 학맥의 정체성 문제로 직결되었다.

이런 대립 속에서 물론 국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지원해주는 세력, 즉 동인계열이 예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조선은 건국초기 정도전까지 올라갈 정도로 군신공치의 개념이 강했다[12]. 즉, 양반 사대부들의 세력기반이 너무 강해서 왕도 쉽게 대할 수 없었다. 여기에 광해군이 동인 중에서도 북인들을 중심으로 국정운영을 하다가 인조반정으로 물러나면서, 사색당파 중 동인의 한 세력인 북인이 완전히 몰락했다. 결국 판이 서인 중심으로 짜이면서[13] 약간의 남인을 포함하는 형태로 양반층이 구성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통성이 허약한[14] 효종 초기의 경우는 서인들을 끌어안지 않으면 국정운영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때문에, 국왕들은 왕권과 직접 닿아있는 이런 상황에서도 쉽게 서인들을 칠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약했던 남인들을 지원하면서 대립의 균형을 잡았다[15].

4.2.3. 예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예학적 관점에서는, 예송논쟁은 서인 측의 완패라고 알아두면 된다. 서인은 유교적 관점은 커녕 일반 논쟁의 관점에서 봐도 100% 패배했고,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처음부터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수단을 썼다가 논쟁에서 완패했기 때문에 억지로 상대 당파를 정치공세를 퍼부어서 매장할 수 밖에 없었던 거라고 볼 수 있다. 즉, 송시열이 너무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서 말로 하면 목이 달아나게 됐으니까 칼을 휘두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송시열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근거로 제시했으며, 윤휴는 주례, 의례, 예기 '삼례서'를 바탕으로 반론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이미 송시열이 졌다.(…) 이유는 간단한데, 주자가례는 삼례서를 이길 수 있는 '근거 문헌'이 안 되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논리에도 상하관계가 있다. 초고대문헌인 '경(經)'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아래에 공자, 맹자, 증자 등의 성현의 공식적인 저작이 있으며, 그 뒤에 있었던 학자들의 연구나 주석은 이 아래에 배치된다. 근거 문헌도 짬밥 순이라는 건데, '보다 권위있는 저작'이 우위에 있다고 심플하게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예학에서는 이 정도가 심하여, 예학은 '주례, 의례, 예기'라는 삼례에 대한 해석으로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런데, 주자가례는 송대문헌이기 때문에 그 권위가 삼례서보다 한참 뒤에 위치한다.

주자가례는 권위가 떨어질 뿐더러, 그 자체가 근거로 삼기에는 문제가 많은 문헌이다.
  1. 성인의 경전이 아니며, 국가의 공식적인 예서도 아니다. 주자가 개인적으로 저술한 책이다.
  2. 의례를 근거로 삼지만, 이를 다른 근거 없이 자의적으로 변경하였다.
  3. 불교, 도교에 오염된 송대의 풍습과 타협하였다.
  4. 원대 이후로 주자의 작품이 아니라는 위작 제기까지 있었다.

고전서에서는 예류(禮類)를, 주례, 의례, 삼례총의, 통례의 '삼례오목'에다가 더해서, 육목(六目)으로 잡례서(雜禮書)로 놓고 주자가례를 사마광(司馬光)의 서의(書儀)와 함께 잡례서의 일종으로 격하해서 수록했다. 주자가례는 경전적 근거가 빈약하고, 사인(私人)이 편리하게 참조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가의주(私家儀注)에 불과하다고 정의했던 것이다.

따라서 증학적 관점에서 권위는 삼례서>>>>>>>>>>>>>>>넘사벽>>>>>>>>>>>>>>주자가례가 되버린다.

'사가에서 쓰려고 만든 간편한 의례서'에 불과한 주자가례를 근거로 삼례서나 국조오례의 같은 국가 의례서를 반박하려 하는 것은, 소위 말하는 '한권으로 읽는-' 수준으로 쓰여진 같은 사교양서를 가지고 '1차 사료'를 반박하려 하는 것과 비슷한, 엄청난 무리수이다. 게다가 이건 사인들이 사가에서 쓰려고 만든 것으로 간단히 설명하자면 본래부터 '가정의례서'다. '주자가례'를 요즘말로 풀이하자면 '(주자가 쓴) 한권으로 읽는 가정의례서'이다. '주자가례'라고 쓰면 뭔가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책으로 보이니까 이 아래에서는 이 책의 권위도 수준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주자가 쓴) 한권으로 읽는 가정의례서'라고 일괄적으로 표기하겠다.

결국 송시열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 자료로서 '(주자가 쓴) 한권으로 읽는 가정의례서'를 썻던 것이다. 주자가 썻다는 이유만으로 '(주자가 쓴) 한권으로 읽는 가정의례서'를 훨씬 더 치밀한 논리와 근거가 필요한 '국가의례'를 논하는 현장에 근거랍시고 가지고 나오려고 했으니 논리적으로 말도 안되는 무리수가 나올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예송논쟁은 유교의 철학 체계 내부에서 정당화 할 도리가 없는 불합리한 논쟁이 되었다. 유교의 철학 체계에서 송시열의 주장 자체를 따지자면, 말도 안되는 무리수가 맞다.(…) 송시열이 이 주장을 제정신으로 했다면 역적이 되고, 실수로 했다면 치매에 걸린게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주나라에서 만들어진 종법질서는 왕통과 종통을 하나로 보았으며, 이에 따라서 왕실이 '국가의 대종'으로서 '온 백성의 어버이'와 같은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정치 철학 체계를 세웠다. 아버지가 가정을 다스리는 권위가 있는 것과 같이, 임금은 온 나라를 다스리는 권위가 있으며, 천자는 천하를 다스리는 권위가 있다는 피라미드 같은 구조의 가부장제 체계를 정당화 하는 정치 철학인 것이다. 이러한 철학 체계에서 임금은 곧 온 백성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가 되며, 온 백성이 임금을 따르고 임금은 백성을 자식처럼 아껴야 한다는 사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왕통의 계승과 종통의 계승은 하나이다.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종법질서의 대전제이다. 그러므로 애시당초 왕통과 종통이 분리될 수 있다는 주장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주장이다. 종법질서가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있으므로 주나라 이래로 수천년동안 모든 학자들이 왕통=종통으로 보았다. 실제로 장남이 아닌 차남이 왕위를 승계한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러나, '차남이 왕통을 계승했으므로 왕통과 종통이 분리된 것으로 본다.'는 사례는 주 천자 이래 중국 수천년 역사상을 봐도 단 1번도 없었다. 종법질서라는 논리 내에서는 고려할 가치 조차 없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예송논쟁에서 송시열은 왕실과 정치의 안정을 위해서 개발된 종법질서를, 오히려 무리수를 일으켜서 왕위 계승의 불안정을 부르는 논리로 만들어서 버린 것이다. 결국 송시열은 종법질서의 기본 원칙을 망각하고, 주자에 대한 광신적 신뢰 때문에 '(주자가 쓴) 한권으로 읽는 가정의례서'같은 문제가 많은 서적을 근거로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해서 조선 정국에 모순과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5. 결론과 의의


5.1. 긍정적 견해


결론적으로 이 논쟁에 대해서는 정치권의 다툼과 학문적 견해 대립이 예송이라는 학문적 논쟁으로 표출되었다는 이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후손들이 보기엔 찌질파이트처럼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들에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논점이었다. 흔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속은 완전히 정치 문제인 가짜 싸움이 아니었다. 이때 사대부들한테는 중요한 문제였다[16][17]. 유교적 도리를 국가 이념으로 표방하고 있던 조선에서 예(禮)가 가지고 있는 중대함이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지니는 가치와 다를 바 없다.그걸 부정하려는 세력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이다 한마디로 현대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바른 적용방식이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똑같았다고 보면 된다. 물론 송시열의 발언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독재는 정당하다'고 주장한 것 만큼 미친 주장이지만. 분명한 것은 예송논쟁은 세계관을 결정하는 논쟁이고, 이 세계관에 따라 한 사회의 권력구조가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은 쉽게 볼 문제는 아니다.

유사한 예로 중세 서양 신학자들도 별 찌질한 이유로 수많은 아가리 파이트를 벌이는데[18], 이는 기독교 이념이 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나온 결과로, 이런 논쟁이 조선에만 있었던 잉여파이트가 아니라 이념과 정치가 미분화된 중세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논점으로 다가왔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까 걔네들은 진심으로 했다.

일각에서는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악질적 당파싸움의 극치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정작 예송논쟁 과정을 보면 이 논쟁으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19] 골수 송시열 추종자들로부터 윤선도가 송시열을 역적으로 모함했으니 반좌의 율을 적용하라고 간접적으로 죽음을 주장한 일도 있긴 했으나 소수에 불과했고 당시의 군주 현종이 적절히 싸움을 완화시키면서 숙종 때의 피바다와는 비교도 안되는 온건하고 점잖은 분위기였다. 현종이나 신하들이나 재위기간 내내 예송에만 매달린 것도 아니었고, 병자호란의 여파와 당시 이상 기후로 인한 연이은 기근(경술, 신해년의 경신대기근) 때문에 피폐해진 민생을 수습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했다. 때문에 붕당정치의 원칙이 가장 잘 지켜진 시기를 인조반정부터 숙종 시기 경신환국 이전까지로 산정하는데, 실제 전쟁기간을 제외하면 예송논쟁 시기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붕당정치의 모습이 지켜지던 시기였다. 뒤의 영조조, 정조조에서 상대 당파 새끼들과는 의리상 한 하늘 아래에서 못 삽니다! 라고 악을 써대던 모습에 비하면 여기선 상대 당파의 말이 합리적이면 오히려 편들어주는 일도 허다했다. 대표적인 것이 송시열의 친구 권시 등이 윤선도를 옹호한 일 등이고 이시백, 정태화, 원두표 등 한당도 계속 중재를 시도했다.

간혹 예송논쟁의 관련자들인 송시열이나 윤휴 같은 이들이 당쟁 때문에 희생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이들이 죽은 원인은 후대인 숙종의 환국 정치 탓이지 예송논쟁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무엇보다 예송논쟁을 통해 정립된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은 서인과 남인의 정책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며, 이것이 실용 정치에 반영된다. 대동법에 대한 논의, 노비제에 대한 논쟁, 호적의 재점검, 예학의 보급[20], 폐4군의 재개발 논의 등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가 현종 ~ 숙종 시기임을 파악하면 예송논쟁을 통해 정립된 당론이 어떻게 현실 정치에 적용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현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16세기 이래 조세 제도의 방만, 양난과 소빙하기로 인해 국가 경제에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이를 재건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정치에 참여하는 사대부마다 의론이 달랐지만, 대표적으로 서인과 남인의 의견을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서인 : 김육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대동법이 보급된 이후 이전까지 반대하던 송시열이 찬성론으로 선회하면서, 대동법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노비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노비종모법 등을 통해 이를 적극적으로 해체하려 하였다. 한편 후에 소론 계통이 되는 구만 등은 폐4군의 개발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서인이 추구했던 사회는 자영농을 직접적으로 육성하여 국가의 기반으로 삼는 사회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노비제의 해체와 민생의 안정을 위한 보조 조치가 필요하였다. 이 때문에 서인 측에서 대대적으로 주장한 것이 '누구나 사대부이며, 왕이든 노비든 성리학적으로 따졌을 때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인간'임을 주장한 이기일원론이었다.

  • 남인 : 대동법, 호포제 등의 세역 개혁안에 대해서는 윤휴와 허목 등의 인물 사이에 의견차가 있었는데, 윤휴는 대동법에 소극적인 대신 호포제를 추진하였고, 허목은 대동법에는 호의적이었으나 호포제에는 비판적이었다. 노비제를 비롯한 사회 질서를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오가작통제와 호패법 등을 강화하여 호구 파악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한편 재야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남인 세력에서는 균전제, 한전제 등으로 토지의 집중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기본적으로 남인이 추구했던 사회는 국가적인 힘을 통해 위계 질서를 바로잡고, 이를 통해 각각에게 맞는 역할을 배당하는 사회[21]였으며, 이 때문에 신분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폐쇄적인 한편[22] 왕권의 확립을 주도하였다. 이를 위해 남인이 내세운 것이 절대성인 이(理)에 대한 관념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사회 질서를 회복코자 한 이기이원론이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서인의 국가적 목표와 남인의 국가적 목표는 조선에 혼합적으로 반영된다. 서인에 의한 신분제 해체와 자영농 육성의 담론이 18세기 노비제가 대대적으로 해체되고 안정된 중소 농민의 가정이 확립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한편, 남인의 담론을 통해 안정된 왕권이 확립되는 한편 토지 소유 구조에 대한 논의가 계속해서 전개되었다. 17세기의 준비 과정이 있었기에 18세기 서민층의 성장과 탕평정치가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17세기 중국과 일본을 바라보면서 '왜 우리는 저렇게 못했냐'는 질타가 있는데, 17세기 두 국가를 지탱한 것이 안정적인 농민층의 형성과 농산물 생산의 증대[23], 그리고 이를 통한 상업 발전[24]임을 상기해보면 17세기 조선의 국정은 이를 지향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다만 여러 악재로 인해 타 국가들보다 다소 그 발현이 늦었을 뿐이다.

예송논쟁은 이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담론을 양자가 재확인한 것이며, 이는 양자가 추구하는 국가관과 개혁안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즉 예송논쟁은 실효성 없는 학문 논쟁이 아니라 정치 철학의 기초에 대한 논쟁이었으며, 조선의 성숙과 함께 했다. 물론 자연과학 등 근대적인 학문과 결합하지 못했다는 점과 논쟁 '그 자체'가 백성들의 삶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정치학으로서 의미 없는 당쟁에 불과한 사건이 아님은 분명하다.

5.2. 부정적 견해

식민사관이 아닌 건전한 시점에서 보더라도 예송논쟁에 대한 비판을 그저 표면적 평가로만 보기는 힘든 측면이 있다. 당대 동시대의 유럽에서는 아이작 뉴턴을 필두로 과학혁명이 진행되고 있던 중이었으며, 비교역사적 관점을 배제하고 조선만 보더라도 심지어 당대의 조선은 경신 대기근의 후유증으로 온 백성이 임진왜란때 만큼이나 고통받고 있는 시점이었다. 이런 시기에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민중의 삶보다 정통성 논쟁에 치중했다는 점에서, 결코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근데 경신대기근 때 구휼은 국가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게다가 당시 정승이었던 김육 아들인 김좌명을 포함하여 관료 중에서도 죽은 사람이 많았다. , 또한 학술적 발전은 결국 예송논쟁이 없어도 실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고, 예송논쟁 자체만으로 어떤 결론이 나온 것도 아니다.

예송논쟁의 전말을 보면 이들의 대립에는 그저 송시열이 유교 철학 체계에서는 정말 말도 안되는 무리수를 두고, 말도 안되는 무리수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송시열이 거유이기 때문에 거기에 추종하는 사람들과 상식적으로 말도 안된다고 반박하는 소장파, 송시열이 제정신인지 의심하고 중재를 시도하는 중도파만이 남게 된다. 송시열이 이게 말도 안되는 논리라는 것을 몰랐을 리는 없고, 이런 무리수를 시도한 원인은 '자기 중심적으로 정치 당파를 재편하려는 시도'로 보는 것이 옳다. 무모한 행동을 하고 그래도 자신을 옹호해주는 '진짜 자기 편'과 '가짜 자기 편','적대자'를 갈라놓는 시험지로 쓴 것이다. 결국 송시열의 권력욕에서 나온 망령된 헛소리에 조선 정계가 한 바탕 뒤엎어진 정치적 사건이 예송논쟁의 실체이다.

물론 송시열의 미친 권력욕으로 해석 안하는 방법도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앞서도 언급된 부분으로 이어진다. 바로 '왕은 사대부중 한 명일 뿐이다'로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군약신강의 대표적 사례이고, 이는 예송논쟁을 바라보는 주류적 해석이기도 하다. 애초에 중국성리학이나 그나마도 박살나는 중국의 정통유학 개념으로 보면 송시열은 역적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애초에 이기일원론 자체가 성리학에서 용납이 되지 않는 논리이고, 이 논리에 따르면 왕정 자체가 무의미하고 귀족정으로 나가는게 맞다[25]. 조선이 왕조 국가이고, 왕이 최고존엄이라는 것을 적어도 겉으로는 인정한다면 이기일원론 자체가 나오면 안되는 주장이다. 하지만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결코 학문적 바탕인 이기일원론을 포기할 수 없었고, 조선을 왕이 없는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다만 실질적으로 왕을 사대부의 대표중 하나로 취급했을 뿐이다. 송시열은 이 학파이자 정파의 거두였고, 자신의 정치적 선배인 정도전이나 조광조, 이이와 같이 왕을 자신과 동급의 위치로 만드는 작업을 이어갔을 뿐이다. 이 자리에 송시열이 아니라 누가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송시열처럼 대놓고 체이부정 이야기는 안했을 가능성이 높을 뿐이다. 이 대립에 대한 것은 군약신강 항목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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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논쟁할 송.소송할 때의 '송'자다.
  • [2] 맏이이긴 하나, 몸으로 이어지지 않은 손자. 맏손자.
  • [3] 아들이긴 하나, 맏이가 아니므로 정통성이 없는 아들. 맏아들 아닌 아들.
  • [4] 맏아들. 뜻을 더 덧붙여서 정체부득전중(正體不得傳重)이라고도 한다. 맏이이며 아들이긴 하나, 전중(후사를 이음)을 얻지 못했다는 말.
  • [5] 맏이가 아니므로 정통성도 없으며, 몸으로도 이어지지 않은 손자. 맏손자 아닌 손자. 전중비정체(傳重非正體)라고도 한다. 정체(맏이이며 아들)가 아니면서도 전중(후사를 이음)했다는 말.
  • [6] 효종(봉림대군)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말은, 효종의 형이었던 소현세자가 정통이며 자연히 소현세자의 생존 중인 아들인 3남 석견으로 정통성이 이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는 얘기. 너 역적
  • [7] 단, 윤휴의 경우는 임금은 '왕'이니까 전부 3년복을 입자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내종'은 '외종'을 위해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왕권 강화 사상을 생각해 볼 때 이럴 수도 있긴 있는데, 근데 그럼 어머니가 자식의 신하가 되어야 한다. 물론 군주제에서는 당연히 국왕의 모친도 왕의 신하가 되는 것이 맞다. 단적으로 국왕의 생부인 흥선대원군 역시 공식석상에서는 고종에게 신하라고 자처했다. 하지만 조선은 유교 중에서도 특이할 정도로 종법적 가족질서를 강조했던 성리학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면이 은근히 잘 드러나지 않는 경향이 있다.
  • [8] 사실 이 때에는 현종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송시열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또한 당시 서인 내 송시열의 입지가 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으로 볼 수도 ...
  • [9] 조선의 경우는 장자 상속에 목숨을 걸었던 국가였지만 의외라면 의외로 적장자가 상속한 경우는 별로 없고, 그 경우에 은근히 뒷끝이 별로 안좋은 경우가 많았던 것도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 [10] 효종이 북벌을 추진했었고, 송시열 역시 그 북벌의 실무적인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보통 역사를 공부하던 사람들은, 효종의 총애를 받았던 송시열이 통수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효종과 송시열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만큼 그리 각별하지 않았다. 송시열은 '우린 모두 사대부' 부심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효종에게 그다지 굽신거리지만 않았고, 효종 집권 내에도 효종이 자존심 다 버리고 도와달라고 했는데도 효종이 듣고 싶은 얘기(그래요 당장 북벌 합시다!)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는 좋지 않았다.
  • [11] 이가 상이고, 기가 하이면 조선의 정치도 국왕이 상이고 신하는 하가 된다. 이런 이황의 학맥이 기반이 된 동인의 분파인 남인들은 국왕과 신하의 예가 다르다고 보았다. 물론 이와 기가 대등하다고 보았던 이기일원론의 이이를 계승한 서인들은 그와 정반대였다. 오해의 여지가 있어 덧붙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학파 모두 이와 기를 따로 논할지라도, 아예 따로 존재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만약 완전히 하나가 독립적이라면,이기이원론이 둘을 굳이 묶어서 이야기할 필요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기일원론도, 이일원론이나, 기일원론이라 칭하고 논해야 할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즉, 이 말은 군과 신의 관계를 양측이 어떻게 설정하든, 두 축이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었다는 것이다. 약술해보자면, 이와 기의 하나임을 계속 밀어부치게 되면, 기보다는 이의 입지가 매우 애매해지는데, 바로 이것이 사단칠정논변의 씨앗이 되었다.
  • [12] 정확하게는 군약신강 하에서 파워풀한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군신공치 이야기가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도전, 그리고 서인의 실질적 영수인 이이이다.
  • [13] 집권층인 서인도 한당, 산당, 원당 등으로 분리 되었으나 송시열대에는 거의 완전히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 [14] 여기에 더해서 이상하게 재위기간 동안 자연재해가 잦았던
  • [15] 실제로 국왕권을 강화하고 싶던 후대의 왕들은 꾸준히 남인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완론탕평을 주장한 영조도, 준론탕평책을 주장한 정조도 남인 세력은 항상 친위세력에 포함시켰다.
  • [16] 그리고 사실, 이면을 읽지 못하고 표면적인 부분만 따지더라도 충분히 진지한 논쟁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야 '상복을 얼마나 입는지가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유교적 윤리와 사회적 규범이 일치하던 조선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이건 현대 사회에서 법의 제정과 적용에 대한 올바름을 따지는 논쟁과 똑같다! 이런 논쟁이 왜 중요한지 궁금하다면, 지금 당장 뉴스나 신문을 보면 된다.
  • [17] 더구나, 이 논쟁의 쟁점에 '왕의 적장자 여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이 논쟁을 절대로 잉여 병림픽이라고 부를 수 없게된다. 왕조시대의 왕에게 혈통적 정당성이 가지는 의미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가지는 대의제적 선출의 정당성이 가지는 의미와 비슷하다.
  • [18]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바늘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을 수 있나 가지고 논쟁을 했다(…). 이 정도는 사회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성자(예수)의 본성이 성부와 같은가, 성자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성모 마리아의 '하느님의 어머니' 칭호는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성자에게는 신성만 있는가 신성도 있고 인성도 있는가, 성자의 신성과 인성의 통합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라틴어 '필리오쿠에(Filioque)' 한 구절에서 시작된 성령은 성부에게서만 발하는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는가 등등등…. 대표적인 예로 니케아 공회의가 있다.
  • [19] 도리어 송시열이 와병하자 남인의 거두 중 하나인 미수 허목에게 처방을 부탁하고, 허목이 비상을 포함한 처방을 했지만 결국 송시열이 허목을 믿고 먹어서 나았다는 일화가 나온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 [20] 성리학의 가례, 나아가 성리학의 기본 정신은 가정 질서의 확립과 이를 통한 안정적인 가족의 확보였다. 이는 예학이 보급된 17세기 후반 이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호적 상의 기록을 통해 개인호가 줄어들고 안정적으로 가정을 구성하는 농가가 증가하는 것을 통해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최재석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한국 가족 제도 연구', 1983), 1630년 25.6%에 달하던 1인 가족은 1807년 3.9%까지 줄어드는 한편 부부 가족(남녀 부부와 그에 딸린 자식으로 구성된 가족)과 직계 가족(친부부와 아들 부부 등 2쌍 이상으로 구성된 가정))의 합산 비율은 71.2%에서 89%로 증가한다. 즉 예학이 '쓸데없이 예절이나 지키라는 뻘소리'가 아니며, 성리학의 보급을 통해 안정적인 가족 구성이 확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당장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출산률 및 결혼률 저하, 가족 해체 같은 사안이 국가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것을 생각해보자.
  • [21] 국사 시간에 공부했다면, 남인 계통의 형원이 어떤 토지 개혁안을 주장했는지 기억나는가? 그렇다. 국가에 의해 역(役)을 배당받고, 이에 걸맞는 토지를 수여받는 균전제이다. 즉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토지 소유 구조를 바로잡고자 한 것이다. 이는 맹자의 정전제 담론을 수용한 남인 고학파(古學派)의 성향이기도 한데... 서술하자면 끝도 없이 길어지니 이쯤하고 패스.
  • [22] '비교적' 폐쇄적이었다는 것이지, 1660년대부터는 노비 가격이 대폭 폭락하는 등(즉, 노비 소유의 실효성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노비제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남인 계통의 인물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등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것까지는 아니었다.
  • [23] 가끔 이 과정을 빼먹고 '중국과 일본은 장사 실컷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왜 안 했음?' 식의 논리를 펴는 사람이 있는데, 중국에서도 호북, 쓰촨 등지의 활발한 농지 개발과 종족 질서의 확립을 통한 안정적인 사회 구조가 뒷받침되었기에 상인층의 기반이 형성되었고, 일본에서도 안정적인 무라(村) 질서의 확립과 대대적인 개간 등이 잉여 농수산물의 증대를 낳아 겐로쿠의 번영을 이끌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단계는 동아시아 사회의 성숙과 발전을 다룰 때 절대 생략할 수 없는 단계이다.
  • [24] 상업에 관해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17세기는 조선에서도 상업으로 호황을 누렸던 시기이다. 그게 서민 경제와 결합한 게 18세기라서 그렇지... 조선은 남명정성공의 활동, 그리고 서양 세력에 대한 다소의 경계로 인해 내려진 해금령 아래에서 일본과 중국 사이를 중개하며 많은 이익을 거두었다. 대표적인 무역품이 중국의 생사(生絲)와 양자를 중개하는 은이었고, 조선 인삼도 호란 이후 개시가 열리면서 무척 잘 나갔다. 일본 내에서 20% ~ 60% 대 순도의 은을 쓰는데 조선은 인삼 팔면서 80% 은 내놓으라고 강짜 부릴 정도. 오히려 무역 수지를 비교하면 중국과 일본이 직교역을 트고 인삼에 대한 수입 대체가 일부 이루어진 18세기에 조선 무역이 더 위축됐고 은가가 높아졌다. 물론 여기에 청과 왜관에 대해 부단히 신경 썼던 중앙 정부가 있었음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현종 시기에 특히 청과 일본에 대한 외교 문제가 대두되었음을 생각하면...
  • [25] 이론적으로는 노비까지 포함하는 체제이지만 보학이 강조되는 성향 등을 고려하면 말만 그렇다 쪽에 가깝다. 실제로 양천제가 반상제로 변하는 것이 서인 및 노론 집권기의 조선후반부 사회의 일반적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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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0-13 22:4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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