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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last modified: 2015-09-16 12:49:45 by Contributors

(ɔ) Moranski from
예수회의 문장

Contents

1. 개관
2. 역사
3. 예수회 소속의 유명 수도자
4. 관련 항목
5. 기타

1. 개관

이른바 가톨릭의 두뇌. 가톨릭의 부는 프란체스코회에 있고 가톨릭의 두뇌는 예수회에 있다고 한다.
재미 있는 일화로, 교황이 기도 하면서 뭐를 먹어도 되느냐고 묻는 신자에게 그건 안된다고 하자, 예수회에서 식사를 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은 어때요? 라고 해서 물어 교황이 그건된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가톨릭에서 교육을 강조하므로 전세계에 학교를 세우기에 가장 열심인 수도회이다.

가톨릭의 남자 수도회를 말한다. 이 수도회 회원을 영어로는 제수이트(Jesuit), 우리말로는 예수회원이라고도 부른다. 예수회는 회원들의 인격 완성과 이웃 봉사, 그리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식별하고 추구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창립자인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영신수련(靈神修鍊) 개념이 이러한 목표를 위한 예수회원들의 수행의 지침이다.

이 영신수련을 통해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 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를 말한다. 예수회의 기본정신은 창립자의 정신에 따라 회원 각자의 인격완성과 종교·교육·문화·사업을 통하여 높은 도덕심과 인내, 소명(召命)에 따르는 생활을 하도록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원은 기도와 고행을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받고 예수님처럼 봉사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1]

그렇기 때문에 다른 수도회와 달리 예수회는 일반 교육사업을 매우 강조한다. 1547년 최초의 예수회 대학을 설립한 이래 전세계 100여 개 국가에 진출해 226개의 종합대학과 단과대학을 세웠다. 일례로 한국에는 서강대학교광주가톨릭대학교[2]가 있고, 미국에는 보스턴 칼리지, 노틀담 대학교[3], 조지타운 대학교[4], 로욜라 대학교[5], 포드햄 대학교[6]가 예수회 소속이며, 일본에는 소위 '소케이조'라고 일컫는 죠치대학(소피아대학교) 등이 예수회에 의해 설립됐다. 이것은 예수회가 선교활동을 하면서 신학·철학·문학에 밝은 선교사들을 각지에 파견하며 교육사업에 힘썼기 때문이다.

2. 역사

근세 유럽 지성사학자 휴 트레버-로퍼의 평에 따르자면 '근세 가톨릭 반격의 특공대(Shock-troops of Counterreformation, 대항종교개혁 특공대)'. 세계 곳곳에서 개신교인들을 죽이고 탄압하는 등, 기동성을 중시해 왔기에 교황해병대라는 별명이 있다. 그만큼 역사적으로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의 파괴에 앞장서는 사제들을 배출해 내고 있다.

1534년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등과 함께 파리에서 창설했던 종교 모임이 그 기원으로, 1540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종교분열이 일어나 개신교가톨릭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프로테스탄트들의 활동과 교세가 활발하게 번져갔으며 마르틴 루터장 칼뱅의 등장으로 가톨릭의 교세는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예수회는 이러한 가톨릭의 위기를 배경으로 탄생하였으며 프로테스탄트의 탄압과 학살에 앞장섰다..

로욜라는 군인으로 활동하다가 부상을 입어 종교에 몰입하게 되었으므로, 엄격한 기풍에 걸맞게 회원들은 군대제도를 모방한 엄격한 규율을 중심으로 뭉쳤다. 이에 맞춰 예수회는 굳건한 결합력을 자랑했으며 반 종교개혁 운동과 유럽 이외의 지역 전도에 앞장섰다. 로욜라 본인을 비롯하여 2, 3대 총장 모두 스페인 출신이었고, 스페인 왕실의 비호를 적극적으로 받은 만큼 초기 예수회는 전투적이고 팽창적인 스페인 가톨릭 신앙의 영향력이 짙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예수회는 개신교의 사도 전승에 따른 교회의 신성성의 부정을 노골적으로 의식하여 가톨릭교회의 수직적 구조와 상명하복의 원칙을 중시한다. 그러면서도 또 현실 속에서는 로욜라 본인도 스페인 종교 재판소의 감방에 신세를 진 적이 있었고, 지금도 바티칸에서는 명백히 부정하는 라틴아메리카해방신학과도 관계가 가깝다는 것이다.[7] 이는 예수회 자체가 스페인에서 시작하여 유럽 전역으로 뻗어 나가 개신교가 장악한 현지에서 학교, 병원 등을 적극적으로 운영하며 지역 현실에 치열하게 파고 들어간 역사적 전통에서 나오는 아이러니라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회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 자체가, 루터가 불 지핀 종교개혁의 불길에 알비파왈도파 같은 짜잘한 지역 이단들로만 인식하고 안일하게 대응한 바티칸 교황청과는 달리 스페인이나 북이탈리아, 플랑드르 지방의 지역 종교 단체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가톨릭 교회 내의 신앙적 혁신을 추구했던 것이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바티칸 정통의 가톨릭 본부와 예수회 등의 지역별 베리에이션의 온도차나 사고 방식의 차이는 뚜렷한 편이다. 막상 언급된 해방 신학도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바티칸에서나 삿대질 하지, 중남미 현지의 가톨릭 교회는 교회가 연관된 하나의 사회적 현실로 인식하고 현실적으로는 하나의 실체로 인식하며 교황청에서 뭐라 하든 협력하는 편이다. 또한 예수회가 군대적 규율에 기반하여 교황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교조적이고 수직적인 형태를 가졌다고 하나, 이는 수도회의 행동적 특징일 뿐이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를 비롯한 예수회 초기의 신앙적 지도자들은 되려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으며 스페인이나 파리의 신비주의적 신앙관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개인의 양심을 중요시 하며, 미사 뿐만 아니라 사적인 고행과 성찰, 명상을 통한 개인적인 신학적 체험에 중점을 두는 등 르네상스의 신학적 조류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교황청과의 노선 차이가 역사적으로 눈에 띄는 편이다. 애초에 창시자 성 이그나시오 로욜라의 대표적인 저서이자, 예수회 양성 과정의 핵심이자 꽃인 성심수련 자체를 두고 이그나시오 본인이 "이러한 (신앙적 각성) 과정은 이를 체험하는 각 개인의 성격, 배경, 심성, 성향에 맞추어 적용 해야 한다"라고 말했을 만큼 이성적이고, 지성에 기반한 믿음을 중시하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

유럽 지역에서 예수회는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가 성당 건물을 세우며 도시에 확립한 삼각 구도를 이렇게 된 이상 센터로 간다! 아예 삼각 구도의 내부로 파고들어 선교하면서 돌파하려 시도했다. 창설자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 본인부터 귀족 가문의 인문주의적 교육을 받은 상당한 지적 엘리트였고, 예수회 내부에서도 교황청에서는 억압한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적 신학관의 영향력이 상당히 컸던 만큼 예수회는 교육 활동, 그것도 당대 유럽 귀족과 군주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엘리트 교육에 집중하여 짦은 세월에 지리적으로는 개신교가 장악한 독일이나 동유럽의 영토 속에서 가톨릭 교회가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교두보 확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이후 철저하게 반가톨릭 정서가 뿌리 박은 영국에서도 여러 귀족 가문의 교육을 담당했으며, 적지 않은 수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지역 가톨릭 귀족들과 연계하여 반 왕실 음모 계획에 가담하는 등, 근세 유럽에서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공세를 막아내고 플랑드르, 보헤미아, 폴란드 등의 영토를 수복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물론 해당 국가의 개신교도들 입장에서는 스페인의 군대와 함께 적그리스도 교황청의 마수의 양 축을 이루는 악의 사도들로 보였지만.[8]

이러한 도시 중심부에 대한 집념은 유학자와 다이묘 등을 집중적으로 선교하며 나선 중국, 일본 등지의 선교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이외에 예수회의 선교 판도에는 스페인에 의해 점령된 멕시코페루, 그리고 대항해시대에 발 맞춰 무역이 흥성하게 된 인도중국, 일본을 포함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이 아시아 지역으로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예수회의 동양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예수회는 비록 엄격한 조직이기는 했지만 현지사람들이나 전통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나 사원의 파괴ㆍ이단심문 등의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16세기 살라망카 대학에서 비교적 유화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교도 대전'을 해석했던 학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이에 맞춰 예수회는 현지 적응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신도의 자격에 대해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같이 사도신경을 믿는 사람들이면 신자라고 생각하여, 반드시 엄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무작정 현지의 신앙을 탄압하기보다는 현지인들의 사상을 더욱 '그리스도적으로' 만드는 것이 나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는 예수회의 중국 선교에서 잘 드러난다. 유럽 못지 않게 고도의 체계를 갖추고 있던 정치와 학문 세계를 접한 예수회는 단순한 그리스도교 우위의 선교만으로는 중국인들에게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선교의 거점이 된 곳은 인도였는데, 포르투갈이 1513년 고야를 점령했기 때문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의 선교사들이 원활히 활동할 수 있었다. 이후 하비에르는 일본 선교에 나서 크게 성공했고 중국 진입을 노리기도 했으나 당시 명나라 정부의 해금령으로 실패했다.

이후 마카오를 통해 진입한 마테오 리치와 미첼 루지에리 등의 신부들에 의해 중국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미첼 루지에리는 불교그리스도교를 비견하여 선교를 시도한 '천주실록'을 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마테오 리치가 유교적 관념을 그리스도교와 대비시켜 선교에 나서면서 천주실의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등지에도 전래되어 동아시아 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후 아담 샬이 명청 교체기에, 조아생 부베와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등이 청나라 시대에 활동하면서 교세를 펼쳐나갔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황제의 관료로서 활동하며 청 황제의 시강을 맡는 한편, 중국의 지식인들과 밀접하게 교류하며 중국어와 유학 사상을 적극적으로 익혔다. 그들은 상류층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발달된 서구 문물을 소개하는 한편, 중국 전통 사상과 가톨릭의 공통점에 착안해 중국의 가톨릭화를 모색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저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저술들은 비록 중국의 가톨릭화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중국 지식인들의 세계관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책들은 조선의 연행사(사신)들에 의하여 국내에 소개되어 실학 사상이 싹트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나, 국내의 의견은 18세기 이전까지 대개 비판적이었다. 한때 서광계가 조선 사신으로 파견되어 실질적으로 천주교 전도를 노리기도 했으나 무위로 돌아갔고, 소현세자가 아담 샬과 교유한 것 정도만이 조선 내 예수회 선교의 흔적으로 남았다.[9]

한편 교세라는 측면에서 볼 때 중국의 가톨릭은 그다지 흥하지 못했다. 중국의 1억 인구 중에 마테오 리치 시기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은 2 3만 명, 1662년 당시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은 11만 명 수준이었다. 이는 전국시대 일본만도 못한 수준에 불과했다. 순치제 등 유력 인사들이 가톨릭에 관심을 갖고 서광계, 이지조 등의 유학자들이 전향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도시 중심의 활동으로 인해 민중 종교로 파고 들지 못한 점은 예수회 선교의 계속되는 약점으로 남았다. 게다가 외래 종교에 대한 적대감이 계속해서 발목을 잡았다. 명의 위기 시대에 적대감이 폭발한 난징 천주교 교난, 아담 샬 때문에 천문 기관에서 밀린 양광선의 박해 시도 등이 이러한 대표적인 예였다.

정작 중국 정부에서도 가톨릭 선교사들은 '유용한 기술자'로서 천문 관측, 기계 기술 등의 측면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이들의 사상까지도 허용해준다는 개념이었지, 종교적으로 이들을 마냥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철저히 중국화를 추진하면서도 선교사들을 남겨두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강희제 시대 선교의 자유가 허가되면서 정점을 맞는가 했던 예수회의 선교는 이후 커진 전례 문제로 인해 완전히 무위로 돌아간다. 현지 적응 중심의 예수회의 뒤를 이어 등장한 원칙 중심적인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가 예수회와 전례 문제로 대립한 것은 17세기 초반부터였다. 'Deus'를 원어로 쓸 것인가 혹은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조상 제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중점이었는데, 17세기 말 교황들은 '번역어로 천주(天主)만을 허용하며, 조상 제사는 금지할 것'을 확정해 나갔다.

문제는 강희제가 그리스도교의 천주를 중국의 전통적인 천(天)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여 경천(敬天) 현판을 천주교 교당에 내려주고 조상 제사는 중국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의식으로 보는 등, 이 조치와는 반대 노선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교황은 특사를 파견했지만, 정작 이 특사는 강희제가 제시한 한자 몇 글자와 천주실의마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병크를 터트렸다. 강희제는 분노했고 1692년 중국 선교는 금지되었으며, 선교 없이 기술만을 협조할 선교사만 남게 했다. 옹정제와 건륭제에 의해 이 조치는 고수 혹은 강화되어, 아편전쟁 이전까지 중국에는 그리스도교가 발을 붙이지 못했다.

일본은 전국시대 유력 다이묘들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등 교세가 크게 흥성했다. 유교보다 불교가 흥성했던 일본에서는 내세관을 갖춘 그리스도교에 훨씬 개방적이었고, 예수회도 극단적인 선악관을 가진 신란의 정토진종에 대해 '마르틴 루터의 무리가 이미 일본에 있다'고 발언하는 등의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유사점은 그리스도교 전도에 큰 도움이 되어, 중국과는 달리 일본의 그리스도교는 민간 종교적인 성격을 띠기도 했다.

남만사(南蠻寺)[10]와 선교사 양성지, 그리고 화승총과 직물을 비롯한 활발한 무역으로 흥성하던 그리스도교는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의 정권 말기부터 서서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인 노예가 판매되는 것을 알게 된 일본의 반감, 엔랴쿠지 등 불교 세력을 압도하면서 견제구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그리스도교의 전파, 그리고 화승총 무역 등으로 지방 정권의 군사력이 뒷받침되던 점 등이 통일 정권을 향해가던 일본 집권자의 압력을 부르게 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를 거쳐, 에도 막부로 진입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쇄국 단계에 들어서고 선교사들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선교 없는 교역만을 조건으로 네덜란드만이 흔적을 남긴 채 서양 세력은 완전히 쫓겨나 예수회 선교도 사실상 종결되고, 시마바라의 난으로 남은 그리스도교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진다.

이후 예수회 등의 선교 세력이 향한 곳은 베트남이었다. 프란체스코 부소미 등의 신부는 당시 남북[11]이 갈려 격하게 대립 중이던 베트남에 진입해 집권자들과 교역을 트고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두 정권이 전쟁보다 내부 안정을 우선시하면서 교역을 통한 무기 확보에 열의가 떨어지고, 전통 관습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기 시작하면서 예수회 선교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동방 선교가 쇠할 때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력도 약해지면서 예수회는 본격적으로 다른 선교 단체의 압력을 받기 시작했고, 스페인도 왕권 지상주의를 앞세운 개혁에 나서면서 18세기 후반에는 예수회가 아예 해산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예수회에 대한 압력은 아메리카에서 큰 권위를 누리던 예수회 교회 세력의 반감을 불러,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1810년 멕시코 독립 운동에 나선 미셸 이달고 등의 신부였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예수회의 재건 운동이 시작된 한편,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해방신학이 예수회 등에 의해 흥성하기도 하였다.

예수회는 현대에 들어서 중세나 근대만큼의 명성이 남아있지는 않다는 평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후로 예수회원 출신의 대거 환속이 있었고, 교황청에 의해서 이단 신학자로 경고를 받은 회원이 많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하느님의 해병대라면서? 과거의 예수회의 본래의 영성이 쇠퇴하고 지나친 사회 참여로 이냐시오 영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2013년 3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선출됨에 따라 마침내 예수회 출신 교황이 탄생했다. 문제는 예수회 장상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수사 신부였을 때 쫓아내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는 점이다. 교황은 아르헨티나 관구장 당시에 해방신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회 장상들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탈퇴를 할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지금도 교황은 탈퇴를 한다는 문서를 가지고 있는데, 안 그래도 탈퇴하려던 참에 갑자기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의 보좌주교가 되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수사가 주교가 되면, 수도회원이라는 신분을 유지하되 수도원장이나 수도회 총장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회 장상들의 속사정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후문이다. 자기네들이 박해하던 수사 신부가 주교가 되고 추기경이 되서 교황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3. 예수회 소속의 유명 수도자

  • 프란치스코 교황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

  • 디에고 라이네스

  • 마테오 리치

  • 박홍 루카 신부

  • 이냐시오 데 로욜라
    예수회 창시자

  • 제프 티소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파시스트 지도자

  •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
    보나벤투라프란치스코회 제2의 설립자라 불린다면,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프란치스코 데 보르하)는 예수회 제2의 설립자이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성씨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이 경건하고 검소했으며 훗날 성인으로 시성된 예수회 3대 총장이 바로 그 유명한 막장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증손자 되시겠다. 본인 또한 이러한 혈통에 대해 나름대로 골치 아파하며 의식적으로 더욱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듯하다. 축일은 10월 10일. 참고로 알렉산데르 6세의 조카인 프란치스코 데 보르자 추기경과는 동명이인이다.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아담 샬

  • 유시찬 보나벤투라 신부 (유시찬 신부에 대한 기사)

  • 정일우 신부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1960년대 한국을 처음 방문한 뒤에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故 바실 프라이스 신부의 영향으로 다시 한국을 찾은 뒤로 사망할 때까지 한국의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고 빈민들괴 기거하였고, 1980년대 서울시의 빈민촌의 철거작업이 진행되자 빈민들의 자립을 위해 '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들어 판매했다. 그러한 선행으로 인해 1986년 故 제정구 前 위원과 함께 막사이사이 상을 수상하였다. 2014년 6월 2일 선종.

  •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 고니시 만쇼 - 고니시 유키나가의 외손자.

5. 기타

묘하게 일본에서는 예수회를 악의 비밀결사라고 보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예수회를 둘러싸고 갖가지 음모론이 회자되는데 대표적인 걸로 꼽아보면 혼노지의 변의 배후였다, 하비에르는 아타미 은산을 탐냈고 종국에는 일본을 정복하려 했다(…), 가라샤를 죽였다 등이 있다. 물론 단편적인 근거만 가지고 부풀린 음모론이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

사실 비단 일본만의 경우는 아니고 정교회개신교 문화권에서는 예수회에 대한 음모론이 의외로 흥하고 있다. 러시아의 거장 도스또예쁘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어 보면 주인공 중 하나인 알료샤가 예수회를 무슨 죽음을 먹는 자를 언급하듯이 자주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형 이반의 극단적인 주장을 듣고 '그런 건 예수회나 할 법한 사악한 생각이에요!'라고 외친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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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렇게 자기 자신의 영성을 단련하는 것과 인격완성을 강조한다는 면이 부각되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에 있어 하느님의 은총 자체를 중요시하는 가톨릭 교회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충돌하는 면이 있을 수도 있다.
  • [2] 광주가톨릭대학교는 1962년 대건신학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고 예수회가 운영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69년 11월 운영권을 천주교 광주대교구로 넘기게 된다.
  • [3] 미국 인디애나주 소재로 조 몬태나, 콘돌리자 라이스(1975년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음) 같은 동문들을 배출했고 미드 웨스트윙에서는 대통령이 나왔던 대학이기도 했다.
  • [4] 미국의 워싱턴 DC 소재로 정치 외교학, 정부학으로 이름나 있고 미 대학농구의 간판격 대학이기도 하며, 패트릭 유잉, 앨런 아이버슨, 알론조 모닝 등이 본교 농구팀 출신이다. 영화 엑소시스트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 [5] 창시자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이름을 붙인 대학.
  • [6] 미국 뉴욕시 브롱스 소재.
  • [7] 요한 바오로 2세 당시 예수회 총장이었던 페드로 아루페는 해방신학을 '아직 성숙하지 않았지만, 장래가 크고 의미 있는 움직임'이라며 옹호하다가 교황의 갈굼을 먹은 전력이 있다. 현 예수회 총장인 아돌포 니콜라스 총장 또한 해방 신학을 '라틴아메리카의 비참한 사회 현실에 대한 용기 있고 혁신적인 대응'이라 칭송했다가 베네딕토 16세에게 갈굼먹고 '물론 어떤 신학처럼 해방 신학은 하나의 신학으로서 성숙하고 성장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성숙의 여유가 주어지지 않고 해방 신학의 날개가 조숙하게 잘리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한다'며 뼈 있는 개김대답을 한 적이 있다.
  • [8] 이런 관계로 예수회가 주역인 - 물론 최종 흑막은 교황청이지만 - 역사가 오랜 음모론 시리즈도 제법 있고, 지금도 이런 관점은 개신교도 사이에서 꽤나 널리 유포되어 있다. 음모론 파는 사람들에게는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등과 비슷한 존재. 예수회 출신 교황이 나오자 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 [9] 천주실의 몇 권과 연행사가 선교사들과 만난게 다였다. 하지만 이렇게 조선 선교에 가장 힘을 쓰지 않았음에도 아니 아예 신경을 껐음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근현대에 가톨릭 교세가 자생하여 순교자의 피가 흘러내린 곳이 한반도였다. 게다가 초기 한국 가톨릭 교회의 중심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대상으로 하던 노론에 밀려서 쭉정이긴 했지만 사회지도층인 기호남인이었다. 이후에는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주로 관할하였고 순교자도 나왔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아예 자리잡고 중국처럼 했다면 구한말 이전 본격적으로 서구와 교류했을지도 모른다. 이양선을 대한 것과는 다르게 했을테니까.
  • [10] 당시 그리스도교 교회를 일컫던 일본의 용어
  • [11] 북쪽의 찐 씨, 남쪽의 응우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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