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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last modified: 2015-03-03 10:08:02 by Contributors

睿宗

  • 可以作聖曰睿 - 성인을 될 수 있었음을 일러 라 한다.
  • 深思遠慮曰睿 - 깊이 생각하고 멀리 헤아림을 일러 라 한다.
  • 聖知通微曰睿 - 성인의 앎으로 작은 것까지 통달함을 일러 라 한다.
  • 慮周事表曰睿 - 주위를 헤아리고 사업이 드러났음을 일러 라 한다.

Contents

1. 고려 16대 왕
1.1. 대내 업적
1.2. 외교 업적
1.3. 무과의 부활, 군사력 강화
1.4. 총론
1.5. 가족 관계
2. 조선 8대 왕
2.1. 왕위에 오르다.
2.2. 찌질한 왕?
2.3. 갑작스러운 죽음
2.4. 평가
2.5. 기타
2.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3. 중국 당나라의 5대 황제


1. 고려 16대 왕

고려의 역대 국왕
15대 숙종 왕옹 16대 예종 왕우 17대 인종 왕해

묘호 예종(睿宗)
시호 예종명렬제순문효대왕
(睿宗明烈齊順文孝大王)
왕(王)
우(俁)
세민(世民)
배우자 경화왕후(敬和王后), 순덕왕후(順德王后)[1],
문정왕후(文貞王后)
아버지 왕옹(王顒)
어머니 명의왕후(明懿王后)
생몰년도 음력 1079년 1월 7일 ~ 1122년 4월 8일
양력 1079년 2월 11일 ~ 1122년 5월 15일 (45세)
재위기간 음력 1105년 10월 2일 ~ 1122년 4월 6일
양력 1105년 11월 10일 ~ 1122년 5월 15일 (17년)

고려 현종때 부터 100여년간 이어진 태평성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명군. 선양이라 쓰고 찬탈로 읽는다으로 조카 헌종의 뒤를 이은 숙종의 아들이다.

부왕 숙종이 여진 정벌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붕어하자, 그 유지를 이어 윤관(尹瓘)에게 여진족 정벌을 명해 동북9성을 쌓는 등 큰 수확을 보았지만(1107) 그만큼 손해도 많았고 여진의 세력이 강성함을 경계해서 결국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결국 이같은 여진족의 끈질긴 게릴라 전술에 지친 예종이 동북 9성을 여진에게 포기함으로서 여진 중흥의 발판이 되었다.

이후 패전의 책임을 들어 윤관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결국 윤관은 파직되었다. 그러나 죽기 직전(1110년,참고로 1111년 사망)에 예종에 의해 복직되었다. 여진 정벌 중에 한국사 역사상 최강의 인간흉기장수로 일컬어지는 척준경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그 활약은 인종 때까지도 이어진다.

1.1. 대내 업적

예술에 조예가 깊어 1120년 관회를 열고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나름 문학적 소양을 나타냈는데 [2] 현재 (雅樂)의 근본인 북송의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와 이를 정비했으며, 9성 개척으로 인한 국력 소모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민국(惠民局)을 설치하는 등 민생에도 신경을 썼다.

또한 학당을 많이 설치하는 등 유교적 통치를 강화하기도 했다. 이미 최충의 학당으로 대표되는 사교육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숙종 대에는 폐지론까지 나온 국학(공교육) 진흥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선 국왕이 바로 예종이다. 9재 학당을 모방하여 국학 7재를 개설하였다. 7재란 주역, 모시(시경), (3례의 하나), 상서(商書, 서경의 일부), 대례(戴禮, ), 춘추(오경과 주례가 된다. 또 장학재단인 양현고를 자감에 설치하였으며, 학문 연구기관인 보문각과 청연각도 설치하는 등 고려시대 중앙 교육 시설의 틀을 잡았다.

1.2. 외교 업적

송나라와의 관계는 문종, 선종대를 거치며 상당히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당시 송나라에선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 당시 송나라를 제외한 나라중에 가장 높은 직위로 인정해 주었다.

정화(政和) 연간(1111년 ~ 1117년)에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로 승격시켜 예우가 서하국보다 위에 있었고, 요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으며, 인반관(引伴官)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대성연악(大晟燕樂)》과 변두(籩豆), 보궤(簠簋), 존뢰(尊罍), 따위의 그릇도 하사하고, 심지어는 예모전안에서 고려 사신을 위해 연회까지 베풀었다.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고려의)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고려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敝)케 하였으니(재정을 궁핍하게 하고 민생을 피페하게 했으니)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 (고려 사신이 오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고려가 과거에 거란(契丹)을 섬겼으므로 지금에는 반드시 금(金)나라를 섬길 터인데, 그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여 (금(金)나라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고려의 사행(使行)을) 중지시켜 오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아뢰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명주(明州)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그 예물(禮物)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듬해 그들은 비로소 귀국하였다. 왕휘(王徽) 이후부터 사신이 끊이지는 않았으나 거란(契丹)의 책봉(册封)을 받고 거란(契丹)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여 (송(宋)나라) 조정에 올린 글이나 기타 문서에 대부분 간지(干支)를 사용하였다.
고려가 거란(契丹)에 대해 한 해에 조공(朝貢)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 (고려 사신들의) 가렴주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란에서는) 항상, “고려는 바로 우리의 노예(奴隷)인데 남조(南朝)는 무엇 때문에 고려를 후하게 대우하는가?” 라고 하였다.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거란이) 한번은 고려가 서쪽으로 (송(宋)나라에) 조공(朝貢)한 일에 대하여 힐책(詰責)하자, 고려는 표(表)를 올려 사과하였다. 그 표(表)의 대략 내용이, “중국에서는 3갑자(甲子)만에 한번씩 조공(朝貢)하고 대방(大邦)에게는 1년마다 여섯 번씩 조공(朝貢)합니다.” 하니, 거란이 깨달아 (고려가)마침내 화(禍)를 모면하였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여서는 금(金)나라 사람들이 고려와 내통할까 염려하여, 적공랑(迪功郞) 호려(胡蠡)를 가종정소경(假宗正少卿)으로 삼아 고려국(高麗國)의 사신으로 임명하여 정탐하도록 하였다. 호려(胡蠡)의 귀국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 -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심지어 송나라에선 고려 사신들이 행패를 부리는데 이를 보고 한탄하는 기록도 남아있다. 참고로 이시기 고려 사신의 위상은 엄청났는데 각국의 사신들이 송황제와 대면하기전 고려사신을 먼저 접견해서 문제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사실 송사 고려전에서 문종 - 예종 사이의 기록들은 송나라에서 "와 고려 저새퀴들 진짜 너무 깝치는데 우리가 손쓸 방법은 없고 어휴.." 같은 한탄이 굉장히 늘어난다(...).

또한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여 거란과 여진과의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 의주가 우리 땅이 된 것도 바로 예종의 치세. 거란의 지원 요청을 묵살하고(1115) 오히려 지원을 빌미로 거란의 내원성과 포주성을 도로 받아(1116~1117)낸 것이 바로 지금의 의주(당시 의주 방어사)이다.

그렇다고 여진족에게도 저자세로 나간 것도 아니었다. '형제국이 되자(물론 금이 형)',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며 아골타(아구다, 후의 금태조 완안아골타)가 제의해온 것 역시 짐짓 무시하였다(1117). 또 같은 해 여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천리장성의 높이를 석 자나 더 높였다. 이 공사를 여진은 방해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천리장성 방비를 강화해 나갔다. 다만 국사 교과서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천리장성은 당시 고려가 진출한 북방경계에 비하면 한참 후방이었다.

1.3. 무과의 부활, 군사력 강화

또한 1109년(예종 4년), 앞서 언급한 국학 7재 중에 무관 양성을 위한 '무학재'라 불린 강예제를 엄청난 반발에도 불구하고 설치하였고, 후기에는 무학재에 인원을 상대적으로 더 늘리기까지 하는 등 여러모로 군사분야에 신경을 많이 쓴 보기 드문 국왕이었다. 고려시대에 유일하게 시행된 무과 역시 예종 대에 실시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문벌 귀족 사회였던 고려는 이후의 조선시대보다 훨씬 무과에 대한 천대가심해서 강예제 설치에는 엄청난 반발이 따랐다. 그런 반발에도 예종은 본래 유학재 70명, 무학재 8명으로 시작한 관학 7재를 10년 뒤에는 60명과 17명으로 조절해버렸다. 이걸 보면 유학이 3배 이상 많은 것 같지만. 유학재는 6재가 모인 것으로 각 재당 10명이었던 반면에 무학재는 17명으로 오히려 1.7배가 된다. 애초에 윤관의 별기군도 그렇고 예종으로서는 독한 맘을 먹고 군사력 강화를 진행한 것이다. #

그러나 무과는 결국 예종 다음 국왕인 인종 11년(1133년, 24년만)에 바로 폐지되어 경사 6학으로 재편되었다. 무과가 시험이 간단하고 상대적인 응시자가 적어(앞서 말한 뽑는 인원이 많았기 때문),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문과의 세가 약해진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려시대의 무과는 사실상 없는 것과 같다고 해석되다가, 최근에 예종때 아주 잠깐 했었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추가되었다. 학생들은 더 머리가 아파지겠지 공양왕 2년에도 무과가 257년 만에 부활되었으나 사실상 멸망 직전이라 의미 없는 부활이었다.

1.4. 총론

그러나 결국 말년에 지나친 주가무와 연이은 파티로 인해 종기가 발병, 발병 후 한 달만에 죽고 만다. 향년 45세.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며 시호는 문효(文孝), 정확히는 예종명렬제순문효대왕(睿宗明烈齊順文孝大王)이다.

평균 43~44세를 살았던 고려 왕의 평균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다. 재위기간도 17년으로 평균인 14년과 흡사하다. 더구나 폐위나 비명횡사한 케이스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현종 이후의 고려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마지막 군주로, 더 나아가 고려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성공을 거둔 현군이라 할만하다. 수백년 뒤의 어떤 왕과 비슷하다

고려 중기 최대의 문제 인물중 하나인 이자겸은 예종 시기에도 이미 외척으로 존재하였지만, 예종대에는 꼼짝도 못하고 그냥 일반 외척으로 머물렀다는 것만 봐도 예종 이후와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자겸을 견제하기 위해 예종이 일부러 한안인(韓安仁)을 측근 세력으로 양성했다. 다만 예종이 죽을 시 그의 후계자 인종의 나이가 어렸기에, 인종의 안전한 제위 보장을 위해 이자겸에게 힘을 실어주게 된다. 그리고 이는 년 뒤에

선대의 왕들이 받아먹었다라고 해야 할 정도로 대내외적으로 시기를 잘 타고나기도 했고, 문벌 귀족들에게 휘둘린 감도 없지 않다면, 예종은 숙종시기 어느정도 확보된 왕권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이후 이자겸의 난과 함께 고려는 내리막을 걷는다. 이 막장의 후반기 300년은 설사 왕이 능력이 있어도 무인정권처럼 실권이 없거나 원의 내정간섭을 극복 못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1.5. 가족 관계

그의 아들이 두 이모하고 결혼해 몸소 근친+자매덮밥을 실천한 인종(仁宗)이다.

첫 왕비가 사망한 후에 경원 이씨 집안의 딸을 맞아들였는데 이가 순덕왕후 이씨이다. 기록에 의하면 경원 이씨 집안 여자들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이 분도 그러했다. 그녀가 죽자 예종은 신하들이 말라고 간관들이 나서서 안된다고 하는데도 대궐 밖까지 나가서 손수 조제를 올리고 영구 행렬을 보냈다.

심지어 예종이 혼당으로 가자 간관들이 강력히 만류하였다. 이에 예종은 "조제의 예식은 송나라 임금도 한 적 있거든? 나는 그 일을 본받은 것 뿐이라니깐! 그리고 혼당 한번 간다고 무슨 큰일이라도 나나염?" 그리고는 기어코 하고 싶은대로 했다고 한다. 이점도 왕권 강화의 상징. 다만 이런 점에서 왕권은 강화해 놓고 후대가 약하면 외척정치가 시행되는데, 이점에서는 조선 정조와 이미지가 유사해진다.

순덕왕후 이씨 뒤에는 종친인 문정왕후 왕씨와 혼인했다. 인종은 순덕왕후 이씨 소생으로, 자신의 이모들과 결혼하게 된다.

2. 조선 8대 왕

조선의 역대 국왕
7대 세조 이유 8대 예종 이황 9대 성종 이혈

묘호 예종(睿宗)
시호 조선 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
(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양도(襄悼)
황(晄)
명조(明照) / 평남(平南)
출생지 한성 사저
사망지 한성 경복궁 자미당
배우자 장순왕후(章順王后) / 안순왕후(安順王后)
아버지 이유(李瑈)
어머니 정희왕후(貞熹王后)
생몰
기간
음력 1450년 1월 1일 ~ 1469년 11월 28일
양력 1450년 1월 14일 ~ 1469년 12월 31일 (19세 356일)
재위
기간
음력 1468년 9월 7일 ~ 1469년 11월 28일
양력 1468년 9월 22일 ~ 1469년 12월 31일 (1년 100일)

2.1. 왕위에 오르다.

세조차남이자 4대 임금 세종대왕의 손자.

세조가 쿠데타로 즉위한 뒤에도 원래 그는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세조의 장남의경세자(덕종으로 추숭 됨)와의 나이차가 워낙 많았는데다 의경세자는 여러모로 유력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운인지 음모인지 의경세자가 만 19세의 나이로 급사해버렸다. 단종을 죽인 것에 대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의 저주란 야사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먼저 죽었다. 이로서 세자가 되었고, 세조가 죽자 정통으로 왕위를 이어받는다. 하지만 몸이 안 좋았고 성년이 되기 전인 19세에 즉위했기 때문에 세조의 부인이자 예종의 어머니인 정희왕후가 예종과 동석하여 수렴청정을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정희왕후가 곧 수렴청정을 거뒀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예종의 나이는 거의 성년에 가까웠고, 당시 수렴청정을 한 전례가 없었다. 그리고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은 성종 때의 정희왕후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세자 시절엔 얌전하고 똑똑해 신하들이 '문종같은' 군주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한마디로 신하들과 함께 조정을 운영해나가는 형태의 군주를 기대한 것이다. 앞서말한 얌전하고 똑똑의 핵심은 '얌전'에 있다. 하지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신하들의 기대는 금방 박ㅋ살ㅋ 난다.

2.2. 찌질한 왕?

짧은 재위기간 내에 벌어진 '남이의 옥사'로 인해 사극에서 항상 찌질한 왕으로 등장하며, 등장해도 금방 죽어 성종, 연산군이 차례로 왕이 되는 징검다리 군왕일 뿐이다(예: SBS 드라마 왕과 나 등). 실제로 인종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는 최단 기간의 왕이었다(1년 2개월, 이 정도의 기록이면 더 안습하다).

즉위하자마자 사람을 형틀에 매다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까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의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모양. 그가 내린 교서 예종실록 예종 1년 10월 8일자를 참고해보도록 하자.

세조 말년에 세조는 옛 계유정난 이후 형성된 측근 위주의 원훈(구공신)들과, 이시애의 난 이후 새로 등장한 신공신 들을 서로 견제하여 원훈의 성장을 견제하려고 했다. 애초에 이미 세조 말년 구 공신을 견제하기 위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자들을 신 공신으로 세웠다가 세조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자 원상제를 도입한 것만 봐도 이미 남이는 구성군 이준[3]과 함께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로 분류되어 있었다.

예종은 강경책을 택한다. 구공신들이 드린 세조의 묘호(신종)를 물리치고 세조라는 묘호를 고집 관철시켜 구공신들을 억제했고 신공신의 대표인 남이, 을 죽여버림으로써 신공신을 박멸하려 했다.

예종 스스로는 기민한 직감력과 강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부지런하고 엄한 상사. 그러다보니 세자 당시부터 병조판서로 벼락 출세한 남이를 위험하게 생각했다. 세조가 지나치게 총애한 면도 있지만 남이 자신의 처신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할 때 총사령관이었던 구성군 이준을 세조가 총애하자 견제하는 말을 하다 세조에게 누구와 의논했느냐는 말을 듣기까지 했다. 그래서 즉위 직후 병조판서 남이를 의산군 겸사복장으로 강등시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후에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꾸몄다고 고변하자 심문 끝에 죽였다. 흔히 유자광이 남이를 모함하기 위해 남이가 지은 시의 미평국(나라를 편안케 못하면) 부분을 미득국(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고쳐 바쳤다는 것은 야사이며 남이가 실제로 역모를 꾀하거나 평소 조정에 불만이 있었다고도 전한다. 유자광은 그 기회를 잘 포착한 것이다. 각설하고 지지부진 할 수 있었던 국대전 편찬 작업을 강행한 것도 역시 예종.

나쁘게 말하면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부분에 집착하는 찌질이였고 좋게 말하면 남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천재형이었다. 여하간 좋은 상사는 아니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 세조는 신하들과 벗을 하면서까지 신하들을 다독이고 이해시키며 했으나 그의 아들인 예종은 굳이 신하들과 벗을 하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2.3. 갑작스러운 죽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죽기 전 날까지 멀쩡했다고 전하며, 예종은 전날 "전부터 발에 종기가 있어 좀 아프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라고 대답했으나 다음 날 급사하고 만다. 예종은 즉위 2년만인, 정확히 13개월만에 족질로 죽었다.

예종실록은 기축년(1469) 11월 28일 예종은 훙하였다고 적고 있다. 예종실록을 살펴보면 당시 예종의 죽음에 왕실과 신료들이 매우 혼란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숙주는 예종 사후에 대비를 만난 자리에서 "신 등은 밖에서 다만 성상의 옥체가 미령(靡寧)하다고 들었을 뿐이고, 이에 이를 줄은 생각도 못하였습니다"고 말했다. 그만큼 예종의 죽음이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비 역시 "주상이 앓을 때에도 매일 내게 조근(朝覲)하였으므로, 나도 생각하기를, '병이 중하면 어찌 이와 같이 하겠느냐?'하고, 심히 염려하지 않았는데, 이제 이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느냐?"고 놀라움과 슬픔을 함께 표출했다. 대비도 예종의 병이 죽음을 이르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 바다.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에는 예종이 평소부터 몸이 안 좋아, 즐겨 보는 책에 손수 '예종'이라고 쓰고, 자신이 죽은 뒤 '예종'이라는 묘호를 달라고 신하들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이야기는 실록에도 나온다. "대왕 대비가 대행왕이 예(睿)로써 시호를 삼도록 말했었다고 알리다." (성종 1권, 즉위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12월 3일(임자) 3번째기사). 이 얘기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죽었을 때 나이는 만 20세. 조선 역대 국왕 중에서 사실상 가장 단명한 왕이다. 단종이 있긴 하지만, 단종이 자연사가 아닌 것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가장 단명한 왕은 예종이다.

예종 스스로는 앞서 말했듯 강력한 위기의식과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때문에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일들을 억지로라도 이끌면서 심신이 퍽 지쳐있었던 듯 하다. 새하얗게 불태워 버렸어

2.4. 평가

아버지 세조가 공신들을 적절히 솎아내지 않고 우대하여 공신들의 위세가 높았으나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고 강한 왕권을 휘두른 것에 감명받아 왕권 강화에 힘썼다. 이 와중에 장인이자 권신인 한명회와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그래서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배후에 항상 한명회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이 사실은 예종의 치세에 완성되었으나, 반포하기 전 예종이 급사해 그 업적은 성종이 이어 받았다. 여러모로 안습인 군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신하들의 입을 빌려 세조Ⅱ라 칭하기도(...)

2.5. 기타

  • 혼인 당시(1460년) 예종은 11세로, 아내였던 한명회의 딸인 장순왕후 한씨는 16세의 나이였다. 혼인한 그 다음해에 장순왕후가 회임하여 아들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사망하였고 인성대군 또한 얼마 살지 못하고 3세의 나이에 풍질로 죽었다. 인성대군이 태어난 해가 1461년이니 예종의 나이 12세 때 이미 아버지가 된것이다.많이 조숙했나보다 덧붙여, 조선의 역대 왕 중 가장 아들을 일찍 본 임금이기도 하다. 유명한 아들인 제안대군은 계비 안순왕후 소생의 차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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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종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경내에 있는 창릉(昌陵)으로 안순왕후와 동원이강 형식으로 안장되었다. 창릉은 화마라도 꼈는지 유난히 화재를 많이 겪었는데 인조 때 1년의 시간을 두고 두 번(1625년, 1626년)이나 봉분이 타는 화재를 겪기도 했고 영조 때에는 정자각이 불에 타서 정자각을 재건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종 때인 1896년과 1901년에도 봉분이 불에 탔다고 한다. 창릉이 쓰러지지 않아.

  • 고려나 조선이나 부왕이 쿠데타(지만 역사는 물려받았다고 기록돼 있으니...)로 집권한 점에서 똑같다.

2.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SBS 대하사극 왕과 나에서는 4회 분량에 등장해 독살당한 것으로 그려 시청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켜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드라마에서 예종은 판내시부사 조치겸(환관 전균을 모델로 한 가상인물)에 의해 독살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제작진은 예종의 재위기간이 2년 밖에 되지 않았던 점,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뒤를 이어 정치적 혼란기에 살았던 점 등을 들어 예종 독살설을 들고 나왔다. 학계는 독살설은 차치하고 환관이 왕의 독살을 주도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조윤선 청주대 교수는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했던 사대부 세력이 환관이나 궁녀를 이용해 국왕에게 독약을 먹이는 '소급수(小急手)'의 예는 많지만, 환관은 어디까지나 궁궐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하수인에 불과했다"고 강조했다. 국내 환관 연구를 본격화한 정희흥 대구대 교수 역시 "일정 부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 고려시대 환관과 달리 조선의 내시들은 '왕의 노비'에 불과했고 정치적 역할도 철저히 차단됐다"고 말했다.

  • MBC모 방송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인조 때의 창릉 화재는 은근히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인조 때의 창릉 화재는 1625년 2월 8일과 1626년 1월 26일에 일어났는데, 마지막 화재의 정확히 1년 뒤인 1627년 1월 26일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했다. 그리고 뒷날 1637년 2월 8일(첫 화재가 났던 날짜)의 실록 기록을 보면 소현세자효종이 볼모로 청나라에 가게 되어 인조가 이들을 전송하는 기록이 있다. 끼워맞추기 식의 이야기지만 이쯤 되면 창릉의 화재는 호란을 예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드는 대목. 하나 더 섬뜩한 것은 예종의 능 뿐만 아니라 예종의 후임 군주인 성종의 선릉인조 때만 화재를 두 번이나 겪었다. 인조 때는 왕릉 관리가 잘 안 된 것인지 선왕 능에서의 화재가 자주 일어난 편.

  • 재위기간이나 수명이 짧았던지라 대중매체에서 주역으로 다뤄질 기회가 적을텐데, 의외롭게도 순정만화(!)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적이 있다! 작가 왈, 하필 예종인 이유는 단명해서 수염 그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겨우 그런 이유라면 대표적인 소년왕 단종도 있잖아(...)

3. 중국 당나라의 5대 황제

당예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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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자겸의 2녀로 예종비이자 인종의 어머니이다. 1118년에 사망하였다. 인종의 폐비인 이씨들의 언니이기도 하다.
  • [2] 이건 사실 왕권 강화 목적이다. 공산 전투시 사망한 신숭겸을 기리는 글을 써서, 신하들에게 왕인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목적이었다.
  • [3]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차남. 그러니까 예종과는 사촌간이다. 영의정까지 되었지만, 결국 역모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귀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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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03 1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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