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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계

last modified: 2015-04-02 02:55:12 by Contributors

(ɔ) Author in Qing Dynasty from

[1]
묘호 태조(太祖)
시호 개천달도동인극운통문신무고황제
(開天達道同仁極運通文神武高皇帝)
연호 소무(昭武, 1678년 3월 ~ 1678년 10월)
오(吳)
삼계(三桂)
장백(長伯), 월소(月所)
생몰기간 1612년 6월 8일 ~ 1678년
재위기간 1644년 ~ 1678년 (평서왕)
1678년 3월 ~ 1678년 10월 2일(주황제)

Contents

1. 개요
2. 명나라의 장군
3. 청나라의 번왕
4. 주나라의 황제
5. 평가


1. 개요

Oh, 삼계나 삼계탕 5개가 아니라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장수이다. 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후 사망하고 아들대에 이르러 반란은 실패한다.

한족 입장에선 민족의 배신자이자 기회주의자의 전형이지만, 만주족 입장에선 럭키 가이. 한편 중화민족의 개념을 주장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민족 통합의 선구자로 본다.

2. 명나라의 장군

오삼계는 자는 월소(月所), 장백(長白)이며, 원래 집안은 강소성 고우(高郵)에 적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 오양맛살(吳襄)도 장군이었다.
소년시절 아버지 오양이 만주군에게 포위되자 필마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구했다. 나름 효자+맹장이라는 멋진 컨셉으로 데뷔한 것이다. 그런데 훗날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하며 무너졌다.(...)
당시 만주족이 건국한 후금(후에 청으로 이름을 바꿈)이 맹렬한 기세로 팽창하고 있었으므로, 명나라의 주력의 태반은 요동 근처에 주둔하게 되었다. 오삼계도 요동으로 온 아버지에게서 1612년에 태어났다. 1641년에 29세에 제독이 되었다. 여기서의 제독은 해군이 아니라 그냥 육군의 지휘관을 말한다. 오히려 장성(將星)이란 말은 최근에 만들어진 조어. 제독이 해군에만 쓰이는 것은 일본군이 만든 것이다. 명나라군은 결국 만주지방에서 패퇴하고 만리장성과 만주의 경계인 산해관 안으로 도피하였다.

산해관은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에 기병위주인 청군은 이를 돌파하는게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만주족은 없다시피한 화기를 명군은 가지고 있었으니

3. 청나라의 번왕

그런데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주력이 청나라군과 대치중이었기 때문에 이런 농민반란에 대처할 수가 없었다. 이때 오삼계는 이자성보다는 이민족인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유력한 것은 북경에 있던 자신의 첩을 이자성군의 한 지휘관이 뺏었다는게 이유였다나. 자세히 말하면 이 첩은 '진원원(陳圓圓)'이라는 여성으로, 본래 기녀였으나 오삼계가 그녀의 자태에 반해서 애첩으로 삼았는데, 이후 오삼계가 외지에서 근무하다가 이자성이 봉기하자 마음을 돌려 이자성군에 투항했는데, 진원원을 이자성 봉기군의 지휘관이 NTR 빼앗았다는 것을 알고는 화를 내더니 이자성군을 뭉개버리고 진원원을 되찾기 위해 청군을 산해관으로 들였다는 것.

고작 여자 하나라는 원인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면 다른 한가지 원인은 이자성군의 만행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자성군에게 투항한 명나라 관리들이 많았는데 이자성군은 이들을 약탈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투항한 명나라 관리들을 고문하고 삥 뜯어낸 돈이 얼마라 했더라? 추가바람. [2][3] 결정적으로 삥 뜯긴 관리들중 오삼계의 아버지인 오양도 있었다. 명나라는 없어지고 이자성/청나라 에서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서 워낙 이자성군에게 투항하려던 오삼계였으나[4] 북경으로 가던 중 아버지가 감금에 고문에 약탈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포기했다. [5]

이 사실을 인식한 이자성도 오양에 대한 약탈을 멈추고 풀어줬지만 이미 늦었다. 이자성은 발끈해서 산해관을 공격하자 혼자 힘으로 막을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오삼계는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욕 먹는건 싫었는지라 명분을 투항이 아닌 동맹으로 할려고 했지만 청나라는 끝까지 귀순을 요구한다. 숫적으로 열세인 오삼계군이 밀리면서 전세가 험악해지자 오삼계는 청나라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군은 투항한 명군과 함께 무서운 기세로 중국 본토로 들어와 보병위주의 농민병인 이자성군을 박살내고 중국 본토를 급속히 장악하였다. 위의 설이 사실이라면 오삼계의 첩 진원원이 중국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명나라가 쇠잔하기는 했어도, 산해관에서 청나라를 막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원원 NTR설은 당대 오삼계의 배신에 분개한 이들이 '고작 여자 때문에 오랑캐에게 나라를 내어준' 존재로 비하하기 위해 강조된 설명이기도 하다.(김용의 무협소설인 녹정기도 이런 부분에서는 여전히 전통역사의 관점을 유지했다.) 이러한 야사를 배제하고 '명나라 사령관' 오삼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상황은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오삼계의 충성 대상은 멸망한 명 왕조지 이자성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남명은(...). 물론 남명은 난립된 정권이라 정통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청 왕조에 비할까.) 게다가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 군은 투항에 응하지않는 '명나라 사령관' 오삼계를 벌하기위해 산해관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고 그 병력이 10만에 이르렀다한다. 당시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의 병력은 정예이긴 했으나 3만에 불과했다. 거기에 이 전쟁을 통한 어부지리를 노리는 청 섭정 도르곤이 산해관 밖에서 역시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 중이었다.
이 상황에서 당시 산해관의 수비가 수월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가 이자성에게 투항하고 협력했더라면 청나라를 막아낼 수 있었겠지만.

결국 오삼계 입장에서는 자신이 충성을 바치던 명왕조에 대한 사대가 더 중요한 것인가, 오랑캐 청조를 막는 한족 방어선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전자를 택한 것이다. 민족개념이 정립된 근대 이후인 현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후자가 더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겠으나 동아시아에서는 오랫동안 전자의 가치 역시 매우 숭고한 정신으로 칭송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버마에서 체포되어 곤명으로 압송당해온 남명의 황제 주유랑을 직접 활끈으로 목졸라 죽인게 오삼계이기 때문에 충성의 대상을 과연 명나라로 삼았는지도 의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오삼계의 충성의 대상이 명나라이기 때문에 이자성군이나 청나라군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라면, 왜 주유랑마저 본인이 직접 죽일 필요는 있엇는지 의문. 이런 행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삼번의 난에서 숨은 명나라의 유신들은 오삼계의 호소에 거의 호응을 하지 않았다.

이 공로로 다른 한족 협력자와 함께 멀리 떨어진 운남성의 왕인 평서왕으로 봉해진다. 청나라는 다른 한족 협력자 평남왕 상지신과 정남왕 경정충 등을 번국 왕으로 봉했다. 이는 아직 남쪽에 잔존한 남명을 확실하게 끝장내기 위해서였고 결국 남명은 이들 손에서 사실상 끝장난다. 결정적으로 오삼계는 영력제 주유랑을 곤명에서 죽였다. 하지만 이민족인 청나라도 중국사의 전통인 왕조성립후 토사구팽에 들어간다. 아무리 변경이지만 제국 내에 자치권을 인정받는 번국이 있다는 건 아무래도 이민족인 만주족 입장에선 꺼림직한 일. 삼번의 난도 번을 폐지하기 위해 일부러 조장했다는 설이 많다.

4. 주나라의 황제

오삼계가 보기에 애송이인 강희제 초반에 여러 문제 때문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자, 오삼계는 운남에서 한족 왕조를 다시 건국한다는 명분을 세워 군사를 이끌고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다른 번도 호응하여 1673년 반란을 일으키고 중원으로 군사를 몰았다. 이 때 북경에 살던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吳應熊)[6]과 오응웅의 2남인 오세림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어린 아이는 궁형에 처해져 내시가 되었다.심영 [7] [8] 여기에 1678년(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周), 연호를 소무(昭武)라 정하였으나 그 해 8월에 죽으니 67세였다.

그러나 청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역사상 희대의 먼치킨인 군주인 강희제는 전열을 다듬어서 반격에 나섰고, 결국 삼번의 난은 1681년 뒤를 이은 손자 오세번이 자살함으로서 허무하게 진압된다. 오삼계는 부관참시되어 곤명 저잣거리에 세워진 대나무 장대에 내걸렸다. 장대는 2개가 있었는데 오른쪽에는 이미 죽은 오삼계의 두개골이 걸려 있었고 왼쪽에는 오세번, 마보, 하국상, 이본심, 왕영청 등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5. 평가

아주 오랜기간동안 "한족의 배신자"로 악평이 높았다. 한족이 중국의 주인이라는 관점을 견지한다면, 한족 국가를 저버리고 외침을 한 변방민족의 앞잡이로 한족국가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한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벗어나서 본다면, 오삼계를 일개 기회주의자로 치부하기엔 어려운 점도 있다. 그는 명나라의 장수로서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고, 그가 충성을 바쳐야 할 국가인 명나라는 이자성에 의해 멸망된다. 따라서 명을 넘보는 청나라도 적국이지만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군도 오삼계에겐 적이자 원수이다. 이들 가운데 누구를 선택하는 것이 절대선이고 정의일까? 쉽사리 판단하기 어렵다. 청에 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다 종래에는 청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도 까이지만, 애시당초 가만히 있으면 오삼계는 지나치게 강력한 군세를 가졌기 때문에 숙청당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화려한 갈아타기 전적 때문에 정권의 명분을 세우는데 실패하여 민중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삼번의 난 실패의 원인이지만, 이것을 오삼계의 간사함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무장으로서는 당대 수준급 백전노장. 이때문에 삼번의 난 초기에는 강희제도 쩔쩔맸다. 오삼계 생전에 삼번의 난의 기세는 정말로 청을 뒤집고 한족국가가 다시 들어서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현대 중국 공산당에서는 소수민족을 달래기 위해 "중화민족"이라는 옥상옥의 개념을 앞세워서 오히려 민족 융화를 실천한 인물로 높이 평가한다나. 명말 청초를 다룬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어째 첩 진원원과 관련한 이야기 때문인지 로맨티스트로 각색되는 경우도 많다. 사랑을 위해 나라를 버렸다. 이건 뭐 낙랑공주도 아니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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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복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한복(漢服)이 아니라 만주족 복장이다. 번왕시절 그린 그림.
  • [2] 참고로 이들은 숭정황제가 재정난으로 자금 좀 기부하라고 할 때 모두 없다고 궁상을 떨었던 자들이었다. 아예 투항을 작정했다는 얘기다. 이는 오삼계도 마찬가지였는데 돈 갖고 치사한 짓은 안했지만 숭정황제가 지원군을 요청할 때 일부러 느릿느릿 행군했다고 한다.
  • [3] 물론 이는 벼슬아치들에 대한 계급적 증오심이었다고는 해석하기 어려운데 힘없는 백성들도 기강이 무너진 이자성군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 [4] 오랑캐에게 투항하는건 명성에 안 좋으니 그나마 한족 정권인 이자성을 선택한것
  • [5] 이후 이자성군이 오양을 인질로 협박했으나 오삼계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걸로 봐서는 아버지 일로 분노했기보다는 자신도 가면 험한꼴 당할것 같아서이다.
  • [6] 청태종의 사위였다. 청태종의 14녀인 건령공주와 결혼.
  • [7] 적장자인 오세번은 북경 탈출에 성공하여 운남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
  • [8] 청사고 열전, 오삼계전 吳應熊及其子吳世霖處絞,其餘幼子俱免死入官
  • [9] 민족을 배신하기는 했는데 나라를 버렸다고 하기에는. 어차피 오삼계 입장에서는 이자성과 대순 역시 명을 멸망시킨 반란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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