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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병합

last modified: 2015-10-11 14:20:32 by Contributors


Anschluss(안슐루스/Anschluß(옛 철자법), 혹은 Anschluss Österreichs)
墺德합방

Contents

1. 개요
2. 기원
3. 발단
4. 전개
5. 결말
6. 여담
7. 관련 항목

1. 개요

1938년에 이루어진 나치 독일오스트리아와의 정치연합, 사실상의 병합을 가리킨다. 원래 안슐루스는 통합 등을 가리키는 독일어 보통명사였으나, 1938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사실상의 고유명사로도 지칭한다.

2. 기원

독일 문화권에 속해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민족들이 한 나라를 이뤄야 한다는 관념은 신성 로마 제국 시기부터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하자 정치적 운동으로 나타났다. 사실, 신성 로마 제국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실질적으로 해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느슨한 국가 연합과 비슷한 형식으로 남았으니 아직까지는 단일국가라고 주장할 만했으나, 나폴레옹 전쟁에 따른 이름만 남은 제국의 해체[1]로 더 이상 "통일한 독일인의 국가"가 없자 통일 국가를 만들기 위한 운동(1848년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19세기의 독일 정치지형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 제국과 호엔촐레른 왕조프로이센 왕국이라는 2대 강국 중심인 다수의 소국가였고, 정치적 관념 또한 다시 다민족 연합국가인 오스트리아를 포함하는 대독일주의와 단일한 독일인만으로 이루는 국민국가를 건설하자는 소독일주의로 나뉘었다.

이 가운데 소독일주의자들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결집하였고,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로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의 해산과 함께 통일운동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프로이센 중심의 북독일연방과 바이에른 중심의 남독일연방은 1870년에 발발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연합한 뒤, 정치 협상을 거쳐서 독일 제국을 만들기로 합의해 소독일주의에 기초한 독일 민족의 통일국가가 탄생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제국 안에는 보오전쟁에서의 패전에도 독일인의 통일국가를 만들자는 관념이 상당히 잔존해서 문제였다.

3. 발단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은 해체되었다. 독일인들이 집중되었던 오스트리아 일부에서는 방대한 영토, 특히 상공업이 발달한 보헤미아(체코, 즉 당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를 잃어 나타난 경제적 곤란함을 벗어나야 한다는 위기감과 전통적인 통일 독일 관념이 결합해 다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통합시켜야 한다는 관념이 나타났다.[2] 그러나 승전국들은 독일이 너무 좋아 2개 있으면 더 좋을 듯해서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단일한 국가를 만드는 것에 반대하였고, 1919년 제르맹 조약1922년의 제네바 의정서로 독-오 합병은 20년간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패전 20년 뒤(...)

1920년대 오스트리아 정계는 기독교 사회당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라는 2대 정당이 정치했으나, 대공황기에 독일과의 관세동맹을 통해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기사당 출신 수상인 쇼버의 노력이 독일의 동의 및 독일과의 통일을 향하는 첫걸음으로 인식한 국내의 통일된 지지에도 국제적인 압력으로 포기했다. 그리고 "저자세 외교"라고 비판한 사민당과 이를 부당하다고 여긴 기사당과의 알력은 나치당의 대두를 허락했다.

그렇게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1932년의 지방선거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뒀다. 게다가 오스트리아 내의 우익집단인 호국단의 쿠데타 실패로 기존의 보수층들을 흡수하면서 성장했는데, 1933년 오스트리아 출신인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를 하면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독일과의 통일을 과격하게 주장하는 분위기가 팽배, 테러 행위가 빈발했다. 이에 대응하여 기사당 출신의 수상인 돌푸스는 독일과의 통일을 반대하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외교적 후원과 호국단과의 연합을 통한 권위주의 체제를 실시하여 사민당과 나치당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1934년 돌푸스가 수상관저에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에게 습격을 받아 사망하고, 나치당의 쿠데타가 나면서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독일과의 통일 논의가 급락했다(슈슈니크가 쿠데타를 진압했다). 거기다 무솔리니는 4개 사단을 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국경선에 전개시켜서 독일의 행동을 견제했고, 나아가 히틀러를 매도했다.[3]

그러나 1935년에 영독해군협정을 맺으면서 독일이 국제적 지위를 개선했고, 다시 1936년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무솔리니를 히틀러가 지지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가 좋아졌다. 또한 1936년에 독일-오스트리아 협정으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하면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사면과 정치 활동의 재개를 보장받았다.[4]

4. 전개

1938년에 이르러 히틀러는 자신의 산장으로 2월 12일 슈슈니크를 초빙하여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보호국으로 두기 위한 여러 조치를 요구했다. 슈슈니크가 도저히 못 수용할 제안이었지만, 오스트리아 나치를 대표하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Arthur Seyss-Inquart)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하는데는 동의했다.[5] 그리고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독일에 합병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저 독일의 외교를 적극 지지할 나라를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고, 무솔리니가 1934년처럼 나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이만한 합의라도 히틀러에게는 만족스러웠으며, 오스트리아 나치당에게 보낸 공개적인 지시에서도 "슈슈니크와의 합의는 매우 광범위한 것이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에는 어떠한 마찰도 해소되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허나, 위의 생각과는 달리 아래인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말단들은 독일과의 통합이 다가왔다라 여기고 과격한 폭력 활동에 돌입했다. 국내의 치안불안에 말려든 슈슈니크는 국민투표를 제안하여 독일과의 합의를 무시하며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이 국민투표 제안이 히틀러의 역린을 건드렸다.

이것을 안 히틀러는 격노해 "이건 사기투표이니 독일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국민투표의 중지와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수상직 이양을 요구하는 한편, 3월 10일에 오스트리아 제압 작전을 지시했다. 3월 12일에 독일 국방군을 월경시켜 무력으로 오스트리아 국토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이 정보는 오스트리아에 누설되어 오스트리아 정부에 충격을 주었다. 3월 10일 오후 4시, 슈슈니크는 국민투표의 중지와 총리에서 사퇴할 것임을, 즉 '굴복'의 뜻을 라디오로 방송했다. 슈슈니크는 자이스-잉크바르트를 후계로 추천했지만, 대통령인 미크라스는 승인을 꺼렸다. 그러나, '굴복' 방송에 힘이 난 각지의 오스트리아 나치당원은 , , 라츠, 인스부르크등의 지방 정부의 시설에 하켄 크로이츠 기를 걸었다. 다시 독일은 아직 내무장관이던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파병 요청"을 강요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오후 9시 45분에 파병 요청을 하였다. 끝내 12일이 되기 조금 전, 미크라스는 마침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독일 육군은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으나, 그 과정이 근대 육군의 교과서라던 예전의 명성은 못 찾을 어설픈 모습이었다. 히틀러가 조급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참모총장 베크와 차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3일 만에 작전안을 짜서 움직여야 하였으며, 보급과 행군 모두 착오의 연속이었다.[6]

그러나 끝내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저항으로 오스트리아로 진주했고, 대통령에게 사임을 강요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된 자이스-잉크바르트는 3월 13일 빈에서 히틀러와 만나 병합에 관한 법률안에 서명했다.

© Unknown (cc-by-sa-3.0-de) from

오스트리아 수도 에 입성하는 독일군. 사진에서도 보이지만, 군인들이 탄 자동차가 군용이 아니라 민간용이다. 준비없는 독일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7]

이후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전역을 접수한 가운데, 형식적인 법 절차로 나치당 감독 아래 4월 10일 국민투표를 했다. 이 투표는 투표지부터 병합 찬성에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어떤 지방에서는 투표소를 경비하는 독일군 앞에서 공개투표도 했다고.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결과는 97% 찬성.

(ɔ) Unknown from

찬성 쪽의 동그라미를 크고 아름답게 그린 불공정한 투표지.

Volksabstimmung und Großdeutscher Reichstag
국민투표와 대독일 국회의사당

Stimmzettel
투표용지

Bist du mit der am 13. März 1938 vollzogenen
당신은 1938년 3월 13일에 실시된
Wiedervereinigung Österreichs mit dem Deutschen Reich
오스트리아독일의 재통일[8]
einverstanden und nimmst du für die Liste unseres Führers
동의하고 우리 총통의 후보자 명단을 위해
Adolf Hitler?
아돌프 히틀러를 선택하는가?
Ja / Nein
/ 아니오


© Scherl (cc-by-sa-3.0-de) from

안슐루스 뒤 국경표지판을 떼어내는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 관계자들.

5. 결말

사실, 오스트리아의 정치가들이나 주민들은 신교도적인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삼킨다고 우려하는 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을 빼면 공통적으로 독일과의 통합을 지지했다. 그들이 반대하는 까닭은 독일사의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합스부르크의 전통인 오스트리아가 이질적인 나치에게 삼켜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의 당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 주민들이 가지는 충성의 대상은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왕조가 만든 "대독일"국가였기 때문에 독일과의 병합으로 "대독일주의인 통일독일"이 목전에 다가오자 압도적인 지지로 병합을 지지했다. 반나치주의자이던 사민당 출신의 전 수상인 카를 렌너가 "나치는 싫지만 독일과의 통합은 필요하다"고 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봐야만 한다. 지지율이 높았던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하지만 합병 이후에는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등한 통일'을 기대했던 오스트리아 인들과는 달리, 독일의 입장에서 이는 '병합'에 불과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라는 이름 자체가 없어지며 일개 '동쪽 땅'을 의미하는 '오스트란트'로 바뀌게 되었다. 유럽을 주름잡고 독일계의 주도자였던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광스러운 과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오스트리아 인'들은, '타 민족과 잡거하며 순수한 독일 혈통을 더럽힌 과거'를 가진, 약간 잡종스럽고 더럽지만 독일인으로 쳐주는 수준의 '2류 독일인'으로 취급 받게 되었다. 나치스 앞잡이 들이야 나치당에 등용되어 한 자리 하면서 좋아했지만, 오스트리아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건 뭔가 아닌데? 내가 바라던 통일이 아닌데?" 싶은 일이 계속된 것이다.

오스트리아 인들이 자랑스러워하던 빈의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 악단은 유대인 연주가가 많다는 이유로 해산을 강요받았고, 다수의 유대인 연주자를 강제 탈퇴 시키고 유지를 허용받았다.

1955년 연합군이 철수하면서 재독립했을 때,[9] 독일과의 통일을 법으로 금지했다.[10]

2000년부터 2006년까지 기사당의 후신인 오스트리아 국민당이 게르만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극우 정당과 연립을 짜던 것처럼, 오스트리아 국내에서는 게르만 민족주의가 떠올라서 자신들이 "독일인"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인"인지를 묻는 의식은 지금도 잔존한다.

한편으로는 독일민족의 통합을 내세웠던 오스트리아 합병이지만 무솔리니가 이를 묵인해주는 댓가로 1차대전후 이탈리아로 넘어갔던 쥐트티롤[11] 지방에 대해서 히틀러는 어떠한 영유권도 주장하지 않게된다. 그리고 쥐트티롤의 오스트리아계의 흔적은 파시즘 치하 21년간 철저히 금지된다. 이에 대한 히틀러의 대응은 기껏해야 이주를 받아주는것 뿐이었다.

6. 여담

  •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이 사건이 배경이다. 주인공 게오르크 폰 트라프 소령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해군의 U보트 에이스[12]였으나, 나치에는 반대했다. 나치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뒤 오스트리아 전현직 군인들을 독일 국방군에 입대시켰고, 트라프 소령에 독일 해군의 요직을 제의했지만, 나치에 반대했던 트라프 소령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 오스트리아군은 대체로 산악사단(Gebirgsdivision)으로 바뀌어 독일 국방군에 편입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가 다시 분리되긴 했지만 이 때 편입된 오스트리아군 부대 편제 자체는 그대로 독일군에 남아 있다. 그리하여 독일군 산악사단의 문장은 오스트리아의 국장인 에델바이스다.

  • 이 사건덕에 대대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거주하던, 신성 로마 제국 최후의 제후 리히텐슈타인 공가가 리히텐슈타인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2차세계대전 이후 리히텐슈타인의 국방/주변국을 제외한 외교는 스위스가 담당하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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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단, 빈 회의신성 동맹으로 일 연방은 부활하였다.
  • [2] 이는 오스트리아만이 아니라 독일도 마찬가지여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에는 오스트리아와의 통일을 암시하는 조문이 있다.
  • [3] 당시 돌푸스와 그의 가족들은 무솔리니의 초청을 받아서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가족들이 먼저 이탈리아로 출발했는데, 돌푸스가 암살당하자 무솔리니는 자신이 초대한 가족들에게 가장의 부고를 알리면서 비탄에 빠진 돌푸스의 유족들을 보아야만 하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이러니 안 빡칠 수가 있나(...)
  • [4] 이는 1938년에 무솔리니가 슈슈니크를 방관하는 계기였다.
  • [5] 자이스-잉크바르트와 슈슈니크는 친구였다!
  • [6] 차량들이 오스트리아의 민간주유소에서 돈을 주고 가솔린을 조달함은 기본이었고, 보병사단들의 행군상황은 사단장이 예하 제대의 현 위치를 못 파악하였으며, 선봉은 오스트리아 영내에 있는데 후방지원 부대는 병합작업을 진행하는 그 순간에도 독일 국내에서 오스트리아로 행군하는 도중이었다. 이 꼴을 본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 주재무관이 "독일군의 행군 군기는 극히 열악하다"고 지당한 말을 했다. 만약 오스트리아 주민과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이 격렬했다면 병합은 완전히 물건너가는 정도가 아니라 히틀러의 권력조차 무너질 가능성이 컸다(...).
  • [7] 독일군부가 초기에 막가는 히틀러를 제지하려고 한 것은 다 까닭이 있어서였다. 독일군의 무적신화는 사실 폴란드-노르웨이-프랑스-발칸 전역을 거치면서 (폴란드를 뺀) 다른 나라보다 많이 쌓은 실전경험에서 나왔지, 일부 독빠 밀덕후들의 주장처럼 독일군에게 특별히 잘싸우는 유전자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 [8] 원래 하나였던 것이 다시 합치기 때문에(독일오스트리아역사 참조) 재통일이라는 단어를 쓴다. 따라서 1990년의 동서독 통일도 독일에선 재통일이라고 부른다.
  • [9] 흔히 '독일'은 동독과 서독, 두 나라로 나뉘었다고 표현하지만, 오스트리아를 독일로 보는 관점에서는 '3개'로 나뉜 셈이다. 독일삼분지계. 내가 좋아하는 독일이 3개나 된다.
  • [10] 현대에는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가입국 모두 국경을 개방해 상공업과 인적교류를 제한하는 규제가 사라졌으니, 독일과의 통합필요성은 사실상 없다.
  • [11] 국가인 독일인의 노래 1절에 나오는 독일의 범위에서 에치 강이 의미하는 것이 쥐트티롤 지방이다.
  • [12] 10여 척을 격침시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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