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오자키 유타카

last modified: 2015-04-02 19:54:34 by Contributors

尾崎 豊 | Ozaki Yutaka


1965년 11윌 29일 ~ 1992년 4월 25일

80년대 일본 청춘 문화의 상징

보다 자세한 내용은 블로그 참조.

Contents

1. 개요
2. 생애
3. 갑작스런 죽음과 논란
4. 유명한 곡
5. 여담

1. 개요

전설적인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한국에서는 포지션이 리메이크한 I Love you 등 발라드 곡의 원곡자로 유명하지만, 자국에서는 록큰롤 전반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으며 명곡도 많은지라 실질적으로도 전설이었다.

27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는 것 때문에 자국에서는 X Japan히데와, 한국에선 김광석 혹은 김현식과 비교된다. 음악적인 스타일이나 약물라인을 탔던 것을 보자면 김현식과 더 비슷하다. 다만 김현식이 가왕 조용필에 밀려 가객 대접을 받은 것에 비해 오자키는 딱히 비교할 대상이 없다. 생전에는 고등학교 중퇴라는 반항적인 이미지와 록음악이라는 장르로 주로 젊은 연령대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서태지 같은 이미지였고, 오자키의 사망 후에는 그의 짧은 생애와 아티스트적인 면모가 두드러지고 일반인들에게 널리 불러졌다는 점에서 김광석과 비슷한 이미지가 되었다는 것이 적당한 비유일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노 모토하루의 적자라 할만하며 슨 브라운, 브루스 스프링스틴, 빌리 조엘, 마다 쇼고, 이노우에 요스이, 아나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 생애

학생 시절엔 성적이 우수하여 명문고인 아오야마 학원에 합격함과 동시에 육상자위대소년공과학교에 20대 1의 경쟁률로 합격. 그러나 머리를 짧게 깎아야하는 교칙 때문에 아오야마 학원으로 입학하였다. 하지만 흡연으로 정학, 밤 중에 시부야에서 친구들과 술마시다 대학생들과 한판 붙어 경찰이 출동하는 등의 말썽을 일으켜 무기한 정학을 받는 항아적인 성향이 있었다. 이것이 첫번째 앨범을 만드는 동기가 되었다. 후에 결국 출석일수까지 모잘라서 완전 퇴학당했지만.(...)[1]

1983년 17세의 나이로 데뷔한 데뷔곡 〈15세의 밤(15の夜)〉은 그가 중학교 시절에 가출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곡으로 친구가 두발검사에 걸린 것이 동기였다고 한다. 이렇게 10대의 경험을 쓴 정열적인 곡들로 학생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사 + 락음악이라는 장르 + 곱상한 외모 + 데뷔 후 자퇴 크리 등으로 '10대들의 교주'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고 학교폭력이 문제시되었던 80년대와 맞물려 사회현상을 일으키게 되었다. 여담으로 1985년에 졸업이라는 노래가 발표된 뒤엔 중,고등학교의 졸업식에서 이 노래가 자주 불려졌는데 문젠 가사 내용을 따라 학교 창문을 박살내는(...) 학생들이 나타났다는 것. 심지어는 오자키에게 창문을 박살냈다고 자랑스럽게 편지를 보내는 학생들까지 나타나자 오자키 본인도 매우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일본 대표 명곡 중 하나.

허나 이후 방황을 많이 하여 각성제 및 마약혐의로 구속된 적도 있고, 엄연히 아내가 있는데 당시 인기 여배우였던 사이토 유키불륜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재기해서 전국투어까지 성공적으로 치루고 6집 새 앨범까지 녹음한 일주일 후인 1992년 4월 25일 채 30살이 되기도 전에 안타깝게 사망했다.

활동 당시에는 반항적인 이미지를 배경으로 한 절대적 인기때문에 중고교에서 터부시되어왔으나 그가 죽고 난 후에 곡들이 재평가되어 〈15세의 밤(15の夜)〉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사진과 함께 실리게 되었다. 교과서의 설명에는 '1980년대에 활약하여 요절한 싱어송라이터', '스스로 작사 작곡한 곡에 몰두하며 전심전력을 다해 노래한~' 등의 글이 실려있다.

3. 갑작스런 죽음과 논란

1992년 4월 25일 아침, 한 민가 앞에서 나체로 쓰러져있는 걸 동네 주민이 발견하고 병원으로 이송, 온 몸이 끔찍한 상처 투성이였지만 의사는 과음이라며 부인과 함께 오자키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허나 다음 날 숨이 끊겨있어 다시 병원으로 이송되어 사망이 확인되었다. 오자키의 공식적인 사인은 폐수종[2]이지만 아무리 봐도 맞아 죽은 사람 모습이었기에, 각성제 중독으로 인한 병으로 죽었느냐 아니면 사이가 틀어진 기획사의 사주로 야쿠자에게 맞아 죽었느냐 같은 논란이 아직까지도 벌어지고 있다.

실제로 오자키 유타카는 죽기 직전 자신이 속해있었던 소속사 더 앤 칠드런에서 독립하여 자신만의 회사를 설립, 기존의 반항적인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순수한 뮤지션으로서의 이미지로 활동을 재기해서 투어를 성공적으로 돌았고 민가 앞에서 발견되기 일주일 전 새 앨범 녹음까지 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오자키는 사이토 유키와의 불륜으로 부인이었던 시게미와 이혼 소송 중이었는데, 이 아내가 오자키가 죽은 이후 의문사 가능성을 부정해서 당시엔 꽤 의혹을 불러 일으켰었다. 거기다 오자키는 시게미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동의도 하지 않고 연재 중인 소설에 폭로해 시게미의 화를 돋구었고, 생전 오자키가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확인되는 사람도 4월 24일 밤 같이 술자리를 가진 전 소속사 대표 후쿠다와 부인 시게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몇몇 팬들은 아직도 '오자키는 시게미(부인 이름)가 죽였다'라고 의심하는 판국.

하지만 만약 오자키가 누군가로부터 살해 당했다면 그녀는 범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시게미는 비록 오자키와의 이혼 소송이 진행중이었기는 했지만, 1차 술자리까지만 일행과 같이 있다가 오자키가 시게미에게 후쿠다 사장과 술 한잔 더 마실테니 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한 장면이 음식점 종업원들의 진술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시게미는 오자키가 쓰러진 채로 발견되자 가장 먼저 병원에 연락해서 오자키를 살려달라고 하기도 했었다. 병원에 가기 싫어한 오자키를 계속 병원에 보낼려고 했었다는 점을 들어 시게미를 의심하는 오자키의 팬도 있는데 만약 사람이 반주검이 된 상태로 발견됐는데 당연히 병원으로 보낼려고 하지 않겠는가? 다만 오자키 사망 이후 사망원인을 계속 폐수종으로 주장했던 점[3] 등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기는 하다.[4] 현재 범인으로 유력하게 지목되는 사람은 유럽으로 음악 연수를 가고 싶어했던 오자키를 미국으로 보낸 다음 일부러 마약중독에 빠트려서[5] 계속 반항적인 이미지의 오자키로 돈을 벌려 했던 후쿠다 사장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 (죽기 직전 인터뷰에서 오자키는 마더 앤 철드런 시절 자신의 모습을 <아티스트>라는 이름을 단 <노예>라고 표현하였다.) 실제로 후쿠다 사장은 오자키가 민가에서 발견되기 직전인 술집에서 오자키와 마지막으로 같이 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으며 오자키는 생전 인터뷰에서 후쿠다 사장을 속을 알 수 없는, 가장 싫은 사람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연예계 일에서 은퇴한 후쿠다 사장은 자신의 전 소속사 연예인 중 유독 오자키와 관련된 일은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4. 유명한 곡


첫번째 히트곡인 15세의 밤. 그런데 위 영상의 가사 중 '盗んだバイクで走り出す'[6]를 훔친 자전거라고 번역했는데, 일본에서 바이크는 오토바이를 가리킨다.# 자전거는 일반적으로 지텐샤(自転車)라고 말한다. 15살에 자전거를 훔치는 것과 오토바이를 훔치는 것은 노래 분위기가 달라진다.(...)


오자키 유타카의 미칠듯한 질주감이 느껴지는 Scrambling Rock'n'Roll. 국내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상당한 명곡이다.[7]
미칠듯한 초월 번역이다.


그리고 오자키 유타카 디스코그래피와 일본 대중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희대의 명곡으로 남은 卒業(졸업).
이것도 만만치 않은 초월 번역.(...)

5. 여담

라이브 때 쉬지 않고 절규하듯이 노래한다. 중간중간에 독백을 자주 넣곤 한다.

오자키는 생전에 아이돌이라 불리고 싶지 않다며 TV 출연을 계속 거부[8]하였고 유일하게 TV에 출연했던 것은 1988년 6월 22일 후지TV의 夜のヒットスタジオ에 단 한번 뿐이다. 각성제 복용혐의로 구속후 석방되어 팬들에게 사죄의 의미로 출연했다고 하며 이때 부른 곡은 구치소에서 만든 太陽の破片(태양의 파편)이다.[9]

사망 이후 오자키 유타카의 곡에 대한 판권은 소니뮤직으로 옮겨갔는데 그야말로 우려먹기의 신화를 써가고 있다.(...) 참고로 일본은 한국과 달리 기획사와 음반사가 다르다. 소속사는 가수의 매니지먼트를, 음반사는 앨범의 제작 및 판매를 전담한다. 위키에 쓰여져있던 것과는 달리 오자키와 소니 뮤직과의 사이는 좋았다. 죽기 일주일 전 녹음한 새 앨범도 소니 뮤직 산하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오자키가 89년에 낳은 아들 오자키 히로야는 아버지의 뜻을 물려받았는지 음악 활동을 하고있다. 2004년 15세 때 아버지의 유작이자 데뷔작인 〈15세의 밤〉을 불렀다.
----
  • [1] 사실 퇴학이 아니라 본인이 자퇴한 것이다. 오자키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유급당하더라도 학교를 졸업해서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그를 담당했던 선생님이 그에게 졸업할 때까지 매일 반성일기를 쓰라고 강요했고, 이에 격분해 선생님과 말다툼을 한 뒤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 [2] 폐포 속에 많은 점액이 축적되어 팽창하는 질환. 주로 마약중독이나 폐가 약할때, 또는 천식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이나 심부전인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질병이다.
  • [3] 참고로 비록 오자키가 각성제를 복용했었다고는 하나 당시 오자키는 마약중독에서 완전히 치유된 후였고 사망 당시 폐수종의 전조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 [4] 이 때 오자키는 병원에서도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고 할까봐 가기 싫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실제로 병원에서 맞은 정체불명의 주사(?)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져 그대로 세상을 뜨고 만다.
  • [5] 오자키와 소속사의 갈등이 최대치로 치닫은 시기의 앨범인 4집 <가로수>와 독립 후 발표한 엘범인 5집 <탄생>에 실린 곡들의 가사, 오자키 생전의 발언 등을 종합해 보면 미국에서 유학 중일 때 여러차례 갱단에 납치되어 강제로 마약을 주사당하여 마약에 중독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후쿠다 사장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 [6] 참고로 지금도 일본 매체에서 종종 '盗んだ○○で走り出す'라는 표현이 등장하곤 하는데, 이게 바로 이 가사의 패러디다.
  • [7] 오자키 유타카의 디스코그래피 중 질주감을 이정도로 끌어올린 명곡은 그 외 3집 '부서진 문으로부터'의 거리의 법칙, Driving All Night 뿐이다.
  • [8] 다만 뉴스와의 인터뷰엔 응했고, 라디오 DJ로 활동하기도 했다.
  • [9] 이 날 나카모리 아키나와 함께 출연했는데 백스테이지에서 아키나에게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4-02 19:54:34
Processing time 0.1543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