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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last modified: 2015-04-15 21:15:40 by Contributors

battle_of_okinawa_shuri.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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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성에 깃발을 꽂는 미군. 1945년 5월 30일, 오키나와)[1]

오키나와 전투
작전명
Operation Iceberg(빙산 작전)
날짜
1945년 4월 1일 ~ 1945년 6월 22일
장소
일본 오키나와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
지휘관 사이먼 B.버크너†
로이 가이거
체스터 니미츠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루스 프레이저
우시지마 미츠루†
조 이사무†
야하라 히로미치
이토 세이이치†
오타 미노루†
고무라 게이조
병력 183,000명 120,000명
피해 규모 12,513명 전사 95,000여명 전사
결과
미군의 승리
기타
몰락 작전을 위한 마지막 받침대


Battle of Okinawa

Contents

1. 개요
2. 전략적 배경
2.1. 1944년 말~1945년 초의 태평양의 정세
2.2. 대만에서 오키나와로
3. 전투 개요
3.1. 육상전투의 양상
3.2. 해상에서의 전투양상
3.2.1. 기쿠스이 작전
4. 그 이후
5. 창작물에서


1. 개요

이오지마(행정구역상 도쿄오가사와라무라에 속해있다)를 제외하면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유일하게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전투이며, 더불어 태평양전쟁에서 치루어진 최후의 지상전이기도 하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지옥을 체험했던 미군은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상륙을 감행한다. 이후 6월 말에 함락될 때까지 약 2개월 간 오키나와는 생지옥이 되었다.


2. 전략적 배경

2.1. 1944년 말~1945년 초의 태평양의 정세

1944년은 미래를 알지 못하는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도 태평양 전선의 승패가 명확히 갈린 해였다. 마셜 제도 강습을 시작으로 라바울 무력화, 사이판 탈환, 필리핀 해 해전레이테 해전에서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를 재기불능으로 빠뜨리면서[2] 미국은 이제 태평양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 시간을 정해놓고 싸울 수 있게 되었다.

2.2. 대만에서 오키나와로

오키나와 침공에 대한 플랜을 처음 내놓은 것은 미국의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이었다. 사이판 전투 이후 체스터 니미츠어니스트 킹의 회담 자리에서 킹 제독이 괌 이후에는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은지 물었고 스프루언스는 그자리에서 "오키나와"라고 답했다.

미 해군의 기존 계획은 마리아나 제도 점령 이후 을 거쳐서 대만으로 가서 최종적으로 중국에 상륙, 중국군과 합세하여 중국 대륙에서 일본군을 축출해 내고서 일본의 gg를 받아 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대륙타통작전으로 인해 이 대만 침공론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해 버리고 만다. 이는 미국이 장제스에게 버마전선으로 정예군을 차출할 것을 강요한 측면이 크다 장제스는 일본군의 공세를 간파하고 있었고 이를 미국측에게 알렸지만 미국은 그 말을 무시하고 장제스를 협박하여 정예군의 차출을 강요하였다 그리그 그 틈을 노려 일본군은 중국군을 탈탈 털어먹었다. 태평양 해역군에서는 대만침공론의 전략적 의의가 없어지자 팔라우 제도의 펠레리우 섬 침공 이후에는 차후 전략적인 목표가 없었고, 이대로면 루존 섬을 점령, 필리핀을 발판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명확한 마스터플랜을 가진 맥아더 장군이 본인의 소원대로 대일전의 단일 총사령관이 되어 태평양 함대가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떨어질 수도 있는 판이었다.

이 변화를 태평양함대 내에서 감지한 것이 스프루언스 제독이었고, 이를 받아들인 니미츠가 태평양해역군[3]의 육군관계자들에게 이를 물었고,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속에 10월 3일, 합동참모본부에 3월 1일까지 오키나와 상륙을 진행하라는 지시를 받아내게 된다.

3. 전투 개요

3.1. 육상전투의 양상

펠레리우 전투에서부터 시작되어, 이오지마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은 해안수비를 포기하고 내륙수비에 주력, 미군의 상륙작전은 대단히 순조로웠다. 그러나 일단 내륙 점령을 위해 진격을 개시하자 각지에서 일본군이 격렬한 저항을 감행했으며, 그 결과 미군의 피해도 급속히 늘어났다. 이 당시 섬에서 농성하는 일본군을 제압하기 위한 미군의 전술(함포로 해안방어 제거→상륙 후 거점확보→공격해오는 일본군 격멸)은 43년과 44년의 경험으로 이미 완성된 상태였으나, 이오지마의 일본군은 애초에 미군 격퇴 같은 건 아예 포기하고 최대한 동굴 진지에 틀어박혀 시간을 끄는 것을 택했고 소탕전이 이어지면서 미군측의 피해도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오키나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본군은 와키나와 류큐 왕국의 방어요새였던 우라소에성을 주요 방어거점으로 삼아 틀어박혔는데, 12세기 무렵 지어진 이 성이 완전 천연의 요새였던지라 미군의 육상작전을 지휘한 존 리드 하지 소장[4]으로부터 '구조물을 폭격으로 싸그리 날려버리지 않는 한 이곳의 점령은 불가능하다'는 소리까지 튀어나올 정도였다. 결국 폭격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끝에 3주만에 점령당했다. 이후로 우라소에성은 아직까지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

그러나 이미 미군은 여러 차례 이런 전투를 겪어 어느정도 대처방안을 마련한 상태였고, 이오지마에 비해 큰 섬인 오키나와는 오히려 대규모 병력이 활동하기 용이했다. 따라서 병력을 집결하고 수송하기도 편리했기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일본군을 아작내기 쉬운 상태였다. 덕분에 미군이 이오지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섬인 오키나와를 점령하는데에는 겨우 3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가지 더 결정적인 요인은 일본군의 큰 전술적 실책에 있었다. 다름아닌 중간에 상황을 반전시켜 미군을 몰아낸답시고 반격작전을 펼쳤던 것. 그런데 애시당초 거점을 확보한 상태에서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강력한 화력으로 역관광하는 것은 태평양전쟁 시기 미군의 기본전술이자 특기였고, 결국 이런 반격은 오히려 방어선만 말아먹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 하지만 일본측 입장에서도 다행인게 오키나와에서 시간을 더 오래 끌었다면, 일본에 떨어진 원자탄이 두개에서 끝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오키나와를 수비하는 일본육군 제32군에게 실제로 오키나와 본섬의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부족했던 것도 비교적 신속한 전투 경과에 한 몫 했다. 제32군에 배속된 전투부대는 보병사단 4개, 보병여단 5개라는 방대한 것이었으나, 정작 오키나와 섬에 배치된 병력은 9, 24, 62사단과 44여단 뿐이었고, 그나마도 9사단이 대만으로 차출당하면서 새로 보충해준다는 84사단도 수송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파견되지 않았다. 만약 84사단이 히메지에서 오키나와로 운송되고 미야코 섬에 배치된 28사단과 나머지 4개 여단(일본군 여단은 보병연대 2개가 기본편성이다.)이 모두 오키나와 본섬에 있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보병대대의 숫자만으로는 미군보다 더 많아지기 때문에 오키나와를 미군이 2개월만에 점령을 완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딱 하나, 오키나와 일본군에게 주어진 행운이 있었는데 일본군 치고는 비교적 넉넉한 포병 전력이었다. 본래 일본군 사단 및 여단 포병대는 미군에 비하면 양과 질 모두 열악하여 보병부대에 제대로 된 화력지원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군과의 교전은 2차대전 내내 고난 그 자체였다. 당시 미국/독일/소련육군은 사단포병을 4인치 대의 야포를 주력으로 6인치 대의 대구경 야포를 지원화력으로 구성했지만, 일본육군 보병사단들은 대부분이 75mm 야포나 동구경의 산포로 사단포병의 주력을 구성했다. 4인치 야포는 그야말로 지원화력이고, 그나마도 포병연대 전체의 야포수는 미/독/소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편이다. 사실 75밀리 야포라고 갖고 있으면 다행이지만 62사단은 아예 사단포병대가 없었다! 보병여단의 포병대에 이르면 더 말할 것도 없이 10cm 이상의 중포는 아예 배치되지도 않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오키나와 섬에 주둔한 24보병사단의 포병대에게 10.5센티미터 야포와 15센티 중포가 배치된 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필리핀으로 가야 할 중포병화력들이 수송로의 안전문제 때문에 오키나와로 몰린 것은 일본군에게는 그나마 얼마 안되는 행운이었다. 말 그대로 사단포병이 없던 62사단에게 포병화력을 제공해주는 것은 기본이고, 군단포병조차 열악하던 당시 일본육군에게 야전군 직할로나 배치되는 중포들이 군단에게 무더기로 굴러들어 온 것. 하지만 이런 조건으로도 도저히 오키나와 방위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시 일본군과 미군의 전력차는 컸다.

3.2. 해상에서의 전투양상

3.2.1. 기쿠스이 작전

해군 내 오키나와 반대론자들은, '이오지마에서도 일본 앞마당에 가니까 육상발진 항공기의 항공위협에 계속 시달렸는데, 큐슈에서 채 1000km도 떨어지지 않은 오키나와는 카미카제 등을 비롯한 일본군의 지상발진항공기에 의한 항공위협은 이오지마에서 겪었던 것과 견주어도 차원이 다를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항공위협의 차단을 위해서 미 해군은 영국 태평양 함대까지 끌여들였으며,[5] 평소에 별로 사이도 안 좋던 육군항공대에 사정해서 제21폭격사령부 소속 B-29를 동원해 카미카제 특공기가 이륙할것으로 예상되는 비행장을 쉬지 않고 폭격해서 아예 비행기를 띄우지도 못하게 하려고 했다 이 작전으로 특공기 이륙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지만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뼛속까지 전략폭격론자였던 르메이는 불만이 가득해서 기회만 나면 다시 산업시설 폭격하게 해 달라면서 징징거렸다.

이런 피눈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4월 6일부터 6월 22일까지 시행된 기쿠스이 작전에 의해서 꽤나 큰 피해를 입었다.(사이먼 B 버크너 중장도 전사.) 격침 26척에 피격에 의한 피해는 164척이었다. 기쿠스이 작전에 동원된 일본 항공기 수가 육해군 항공대 합쳐서 1,900여대에 달하는 것을 감안하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로 관한 미 해군의 피로도가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육상 전선의 지지부진함으로 인해서 해군 지원함대가 붙잡힘으로써 점점 더 카미카제에 노출된다고 생각한 니미츠 제독은 4월 23일 시찰 나온 자리에서 오키나와의 육군 총사령관 버크너 중장에게 전선을 조금 움직이라는 압박을 주었으나 버크너 중장은 "육군 소관인데 해군이 상관 마셈." 했다가 짤릴 뻔 했다. 미 해군이 카미카제에 대해서 어느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는지 알만한 사례.[6]

기쿠스이 작전 자체는 카미카제를 이용해서 최대한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였고, 비용 대비 효과로 보자면 상당한 낭비였다. 이 작전의 일부로 행해진 천 1호 작전에서 전함 야마토와 상당한 해군 전투함들도 상실되었다. 야마토를 이용한 기쿠스이 작전의 요지는, 해군 선박을 먹이로 내주고, 미군 항공기를 대공포로 격추, 이후 항공기로 인한 호위를 잃은 미군 항모를 카미카제로 요격, 격침한다는 것이지만, 실제 전과는 일본군은 전함 야마토, 경순양함 야하기, 구축함 4척 침몰 외에도 구축함 4척이 크고 작은 손실을 입고 야마토에서만 전사 3,055명, 그 외 함선에서 1,187명이 전사했지만, 미군은 전투기 3대, 헬다이버 4대, 어벤저 뇌격기 3대가 격추되었고 조종사 4명과 항공 승무원 8명이 전사하였다. 한마디로 해군의 반자이 어텍!

4. 그 이후

이 전투 내내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영예롭게 죽기를' 강요[7]하여 수많은 무고한 오키나와 도민(島民)이 희생당했으며[8], 전쟁 통에 끌려온 조선인 다수도 이 전투 도중에 죽었다. 현재는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일본군에 의한 학살에 가깝다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 오키나와에는 오키나와 전투로 희생된 다수의 민간인을 기리는 평화공원이 있으며, 당시 희생당한 조선인들을 위한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오키나와 못지않게 조선인이 많이 희생된 히로시마의 경우 조선인을 위한 공간이 최근까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의 차이를 드러내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어이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이 강간 및 학살을 저지른 전적이 있다. 이래서 미국은 뻔뻔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일본정부가 공식 발표랍시고 지껄이자 열받은 미의회가 대동단결하며 위안부 성명을 통과시켜버렸다.

다만 미군의 공격으로 인해 대량의 민간인 사상자가 나온 것은 사실. 그중 대부분이 독가스에 의한 공격으로 사망했다. 틀어박혀있는 일본군을 끄집어내기 위해 연막탄을 사용했는데, 사용이 금지된 생화학무기는 아니었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독성이 너무 강한 탓에 사상자가 나왔던 것. 또한 일본군이 강제로 오키나와 주민들을 인간 방패로 내몰아 반자이 어택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미군의 공격에 휘말려 사망한 민간인도 많았다.


이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 유일하게 일본군 투항자가 만 단위를 넘기고 영관급 장교가 포로가 된 전투이다. 최종 집계된 일본군 포로의 수는 약 1만 5천명으로, 일본군 수비대의 8퍼센트에 달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이전에 벌어졌던 전투들에 비해 규모가 훨씬 컸고, 일본군 병력의 상당수가 현지 징집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수의 일본군이 포로가 된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미군이 놀랄 정도로 많이들 항복했는데, 심지어는 몇백명 단위로 몰려와서 항복하는 통에 함정이 아닐까 의심까지 했을 정도였다. 미군의 심리전이 상당히 통한 탓도 있으며, 상당수의 일본군이 이미 자신들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위 '옥쇄'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했던 것. 설령 본토 결전이 벌어졌더라도 일본 군부가 주장한 '최후 한 명까지' 저항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인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2011년, 일본은 이걸 미군이 상륙하자 일본 주민들이 미군이 두려워 집단 자결했다고 교과서에 실었다.[9] 이때 주일 미군은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현장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구조와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어그로 키핑은 세계적인 선진국 일본 오키나와 전투 이전부터 미군이 상륙하자 주민들의 집단 자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이유가 일본군이 미군이 상륙하면 남자들은 학살당하고 여자들은 강간당한다며 주민들에게 계속 세뇌시켜놨기 때문이다. 이걸 믿은 주민들은 미군이 오기전에 딸과 부인을 자기손으로 죽이는 등의 행위를 저질렀다.

물론 일본군이 떠들어댄 말들은 당연히 얼토당토않은 개소리였고 미군과 접촉을 해 사실을 알게 된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에게 상당히 협조적인 태도로 응했다. 퍼시픽 논픽션 소설판을 보면 미군의 대민작전이 나오는데 오키나와 주민들이 협조적으로 나와서 수용구역내에서 나오지 않으면 자치권을 보장해 주고 미군의 작업을 돕는 대신 식료품 등을 받아가는 장면도 나온다.[10] 미군 병사가 지나가던 오키나와 농부에게 이샤는 어디에 있냐고 묻자 농부가 유창한 영어로 여기에는 없고 시내에 가보라고 해서 미군 병사들이 놀라기도 했다. 그 농부는 미국 농장에서 취업한 경력이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한편 이오지마에 이어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학을 뗀 미군은 막대한 희생이 예상되는 일본 본토 공격을 감행하기를 꺼리게 되었고, 미국은 소련의 대일 참전을 강력히 주문하는 한편 원자탄을 이용해 일본에 압박을 가한다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또 오키나와는 이오지마와 함께 몇 안되는 미군에 전투를 치르고 점령당한 일본 본토이기에, 1951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뒤에도 오랫동안 미국(미군)의 직할 통치(군정, 軍政)를 받았다. 이오지마는 1969년에야 일본으로 복귀했으며, 오키나와는 1972년에 일본 본토로 복귀, 큐슈에 속한 오키나와 현이 되었다.

5. 창작물에서

  • 키나와 결전(영화) - 오카모토 기하치 감독. 각종 일본산 서브컬처에서 나오는 적이 7할, 바다가 3할란 대사가 나온 원작이다.

  • 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 - 미 해병대 후반 미션의 배경이 오키나와 슈리성 전투이다. 주인공 C.밀러가 소속된 중대가 슈리성에 돌입하여 점령하는 장면이 미군 캠페인의 마지막.

  • 더 퍼시픽 9화 - 평범한 아낙네(그것도 갓난아기를 업은!!)에게 부비트랩을 장착해 터트리고 그 직후 민간인을 인간 방패 삼아 총을 쏴갈기며 개돌하는가 하면, 도민들을 내쫓은 뒤 기관총으로 갈기는 천하의 개쌍놈 일본군의 미친 짓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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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진의 성조기를 달기 전에 벌어진 해프닝이 있다. 슈리성을 점거한 미군이 아군 오폭을 방지하기 위해 성조기를 달려고 했으나 마침 성조기가 없었는데, 이 때 미국 남부 출신의 두젠버리 대위가 대체물을 꺼낸 것이 하필이면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맹이 쓰던 남군 깃발(...)이었던 것. 이 남군 깃발을 보고 지휘부는 처음에 뜨악해 했지만, 이내 웃어넘기며 진짜 성조기를 전달해 사진처럼 다시 걸게 한 것이다.(출처 : 타임-라이프 2차세계대전사)
  • [2]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 항모기동부대가 사실상 무력화 된 것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미드웨이에서 입은 피해는 크기는 했지만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적 자원의 피해는 미드웨이 이후에 과달카날과 부겐빌, 라바울 방면에서 조종사를 포함한 항공 정비병들이 손실된 것이 더 컸고, 항모기동부대 자체는 1943년 후반부 즈음에는 외형상 다시 미군과 붙어볼만한 전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마리아나에서 일 항모기동부대가 대패한 것을 두고 "일본군의 등뼈를 부러뜨린 전투"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3] 니미츠 제독의 태평양 해역군(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태평양 함대)과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 해역군으로 나뉘어져 있었음.
  • [4] 미군정 당시 대한민국을 통치했던 그 사람이다.
  • [5] 킹 제독은 영국이 다 해놓은 밥에 밥숟가락이나 얹으려는 거라며 반대했지만, 현장 지휘관인 스프루언스랑 니미츠가 찬성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었다
  • [6] 이건 카미카제에 예민해져 있던 것도 한몫 하지만, 버크너 중장의 태도가 더 큰 문제였다. 니미츠는 태평양 전쟁 기간동안 자신을 단순한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 아니라 태평양 해역군의 통합군 사령관으로 여기고 있었고, 자기 부하들에게도 해군뿐만 아닌 통합군으로써의 시각을 계속 요구했다. 사이판에서 같은 해군(해병대)였던 홀랜드 스미스 중장이 육군 랄프 스미스 소장을 해임했을 때도 각군의 차이를 간과한 홀랜드 스미스 중장의 잘못이 더 크다 보고 내친판에, 저런식으로 육해군 선을 딱 그으려는 행위는 니미츠 제독의 눈밖에 벗어나기 충분했다. 바로 그날 오후에 이어진 브리핑에서 자기가 어떤 처지에 처해졌는지 낌새를 챈 버크너 중장이 꼬리를 내리는 통에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 [7] 어떤 사례에는 영예로운 죽음을 강요해 소년에게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때려죽이게까지 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가 다수라는 점에서 2차대전 말기의 일본군이 얼마나 광적이었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걸 일본 우익이 자랑스럽게 교과서에 수록하려 하자 생존자들이 격렬하게 항의한 적이 있다.
  • [8] 오키나와는 본래 류큐라는 독립국이었으나 19세기 말엽에 일본땅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땅이라고는 해도 식민지 취급을 받을 때도 종종 있었고, 그래서 자기네가 불리해지자 애꿎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본군에 대해 주민들의 반감은 매우 컸다.
  • [9] 이게 헛소리라는 것은 아주 미 군정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이들은 미군에게 합리적인 보수와 먹을거리, 잠자리를 보장받은 후에는 전선에 보급품을 나르는 위험천만한 임무까지 자원해서 참여했다. 자세한 내용은 미 군정에서 주민들에게 보장해 준 것과 주민들의 이에 대한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 [10] 사실 주민들에게 작업을 시키는 것은 미군 측의 의도도 어느 정도 있었다. 주민들이 스스로 노동을 하고 그 대가를 받아가도록 하는 것이 주민들의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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