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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비스마르크

last modified: 2015-04-14 23:21:29 by Contributors

Contents

1. 소개
2. 초기 생애
2.1. 집안 배경
2.2. 성장기
3. 외교관 시기
4. 업적
4.1. 군국주의자 인가?
4.2. 독일 제국의 건국
4.3. 비스마르크 체제
4.4. 통일 이후의 내치
4.5. 사임과 사망
5. 개인적인 면모
5.1. 여러 일화들
6. 비스마르크와 3
7. 기타

1. 소개

© Loescher, P. & Petsch (cc-by-sa-3.0-de) from



1815. 04. 01 ~ 1898년 7월 30일
본명은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당시에는 수백년전 분가한 다른 비스마르크 가문과 구분하기 위해 비스마르크-쇤하우젠(Bismarck-Schönhausen)이라 쓰기도 했다.[1]
키도 커서 196cm에 달한 장신이었다.

지금의 대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血), 곧 병기(兵器)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연설 전문

법률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소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아서, 보지 않는 것이 좋다.[2][3]

천재적인 외교술과 정치력으로 19세기 말 유럽 전체와 전세계를 통제했던 인물
철혈재상
독일제국의 아버지

19세기 후반 프로이센의 재상이자 독일 제국의 재상. 대부분의 사람이 비스마르크가 정확히 뭘 했던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어째 철혈재상(Eiserner Kanzler)이란 별명만은 친숙하며, 대한민국 세계사 교과서 수준에서는 '독일 제국 건국의 주역'이라는 것 정도까지는 학습한다.[4]

그러나 이렇게 독일 제국 건국기의 모습 정도만 다루는 것은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을 절반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시각이다. 적어도 '19세기 유럽의 세력 균형 체제를 주도했다.',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기민한 회유책으로 국내의 불만을 완화했다.'는 내용 정도는 짚어야 비스마르크의 상을 대략으로라도 그려낼 수 있다.

비록 국가주의적 정책의 성격으로 인해 보수적인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가 두드러지기는 하나, 정치적인 이해를 떠나 실질적으로 19세기 후반의 독일을 유럽 대륙부 최고의 주목대상으로 만든 인물이자 19세기 후반의 유럽 외교를 틀어쥐고 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성격을 본받을 위인은 아니어도 그 기량이 대단했던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영국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19세기 유럽역사는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라는 두 거인을 중심으로 쓰여질 수 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그리고 E. H. 카에게 이 발언으로 개 까였지...

2. 초기 생애

2.1. 집안 배경

비스마르크 가문은 프로이센에서 작위 없는 귀족 가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듣보잡 까진 아니고 제법 역사가 있는 편이다. 15세기초반에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와 루트비히 4세때 공을 세워 브란덴부르크 지방에 정착했고 16세기 중반 호엔촐레른 왕가에서 비스마르크 가문의 땅을 탐내서 영지를 교환하고 쇤하우젠에 정착한다. 이후 고조부는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궁정에서 봉사했고, 증조부는 프리드리히 대왕때 전쟁서 전사했으며, 조부를 거쳐 아버지 4형제중 둘째 셋째 큰아버지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여 둘째 큰아버지는 전사하고 셋째 큰아버지는 육군 중장까지 지냈다.

나머지 형제인 큰아버지는 백작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백작이 되었고, 아버지는 형제중에 좀 초라한데 별다른 경력없이 젊은 시절 부터 시골 지주생활을 하며 프로이센 귀족의 필수 코스인 장교가 된것도 지주로 지내면서 세금을 많이내어 명예직인 예비역 기병 대위 지위를 얻은 정도였다.

외가는 귀족은 아니지만 신흥 부르주아 인텔리 가문으로 외증조부는 법학교수, 외조부는 스웨덴 대사를 지냈다. 외증조부는 극단적 계몽주의사상가였고 외조부도 사상이 의심(?)을 받아 스웨덴 대사 이후 관운은 순탄치 않았으나 외무부 관료로 활약한 덕분에 궁정에 인맥이 널리 있었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어머니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빌헬름 1세 어린시절 소꿉동무 였다고... 이덕분에 귀족가가 아님에도 귀족인 비스마르크 집안과 결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2.2. 성장기

둘째 셋째 큰아버지들은 독신이어서 복잡한 가문의 상속법 때문에 큰아버지들의 영지는 형제인 아버지가 아닌 비스마르크 가문의 먼 친척 연장자에게 넘어간다[5] 덕분에 아버지는 별 볼일 없는 코딱지만한 시골 지주였다. 재산이 적기 때문에 조카의 영지인 포메른으로 이전하여 비스마르크는 태어난지 1년만에 쇤하우젠을 떠나 포메른에서 자란다.

정작 어머니는 베를린서 태어나 자랐고 궁정에도 있어봤기 때문에 화려한 생활을 잊지못해 가정적이지 않고 사교계를 좋아해서 남편이나 가정은 뒷전이고 자기 자식 두 형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5살 연상 헤르베르트를 기숙사에 쳐넣고 놀러다니기 바빴다고 한다. 비스마르크의 형제들은 어머니가 여러일로(?) 바쁜관계로 명절 때도 나오지 못하고 공부만 강요 받았고 이 결과 가정적인 시골 지주인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았지만,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해 훗날 언급조차 꺼릴정도 였다고 한다.

비스마르크의 어머니는 지금으로 치면 강남엄마(?) 스타일로 자식들에게 정을 주는데는 익숙한 편이 아니지만 형제들의 진로에는 자기마음대로 사사건건 간섭을 해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초반생은 거의 어머니의 설계(?)대로 이뤄졌다.

앞서 서술한 대로 만 6세때 페스탈로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엄격한 기숙사 학교에 보내져 새벽 5시에 일어나 노는시간 운동시간까지 시간표대로 배정된 생활을 했고 이 때문에 '루소 사상에 영향을 받은 학교 선생들이 귀족 출신인 나를 학대 한다'는 음모론(?)에 빠지기도 했다고... 당시 귀족들은 가정교사에 기초적인 교육을 받고 일찍 입대하여 유년군사학교로 보내거나 유럽각지에서 여행으로 인맥(?)을 쌓은다음에 사관학교로 가거나 하는게 일반적이었는데 비스마르크의 형제들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부르주아들이 가는게 일반적인 수준높은 학교에 보냈으며 5살 연상 형이 라이프치히로 대학을 가자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무슨 대학교수니 학교교장이니 박사님집이니 하는데서 집에서 하숙을 시켰다. 이 덕분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어머니를 더 사이가 멀어졌고 고향과 시골생활 땅에 대한 집착이 매우 커졌다고 한다.

본의 아니게(?) 수준 높은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학업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라틴어나 다른나라 언어에는 관심과 성적이 우수한 편이었고 특히 영문학의 셰익스피어나 바이런에 푹 빠진 문학소년(?)이 되었다고 한다. 김나지움 졸업반 성적은 18명중에 15등... 최고수준의 학교를 다닌걸 감안해야 하지만 그리 학업 수준은 평범했다고 한다.

15세때 아버지는 아들을 당시 프로이센 귀족들 출세 코스인 군입대를 시키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모자의 뜻이 합치되어 군입대는 거절하고 대학에 진학한다. 대학과 전공까지도 또 어머니의 입김이 작용했는데, 언어면에서 관심을 보인 비스마르크의 취향은 당연히 무시(?)받고 어머니가 원한대로 외조부 외증조부의 전공인 법학으로 결정되었고 비스마르크가 가고 싶어한 본 대학은 역사가 짧고 학문적 수준이 의심스러워서 거부...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에 보내면 격한 성격의 비스마르크가 술퍼먹고 싸움질 할게 우려보류... 결국엔 하노버의 괴팅겐으로 선택하여 진학하는데, 하노버는 당시 자유주의 학풍으로 보수 귀족 서클과 자유주의 부르주아 서클에서 술처먹고 격렬하게 맨날 싸워댔다.. 당연히(?) 격한 성격의 비스마르크는 여기에 끼어들었는데 의외로 훗날 보수 반동의 이미지인 비스마르크는 처음엔 애국주의 민족계열 서클인 부르셴샤프트에 가입했다. 나중에 이것은 자신의 흑역사로도 꼽히는데 지적인 면에서나 생활면에서 수준이 떨어져서 탈퇴했다.며 어물쩡 넘어갔다.. 조금 늦게 탈퇴 했으면 자신의 경력이 끝날뻔 했는데 불과 2년뒤에 프로이센에서 부르셴샤프트 회원은 공직 취임이 금지 되었기 때문... 초반생부터 운빨이 쩔었다.

괴팅겐의 학부시절은 술퍼먹고 싸움질에 결투에 난동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학창시절 때 '10계명 중 하나도 어기지 않은 게 없는 망나니'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친구들이 자신만을 빼놓고 파티장의 문을 잠그고 파티를 열자 권총으로 파티장 문을 쐈다고 하니 성격 하나는 불같았던 것 같다. 괴팅겐 시절 25번이나 결투를 벌였다고 하고 대학감옥의 단골 수감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까진 무신론자로 신이나 종교에 대해 토론할땐 괜찮았지만 프로이센 왕실을 모독하면 칼을 빼들고 결투를 신청했다고 집에 보낸 편지에서 자랑까지 했다고 한다.
괴팅겐 생활은 단 3학기로 막을 내렸는데 싸움질에 도박빚 까지 크게져서 학교를 다니기 어려워지자 자퇴를 하고,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 편입한다. 베를린에서도 그다지 학업에 열성적이진 않았으나 6세때부터 어머니의 치맛바람으로 독일내 최고 등급에 해당하는 기숙학교를 다닌 가락이 있기 때문에 당시 현재보다 학업 부담이 매우 적은 대학을 졸업하는데는 큰지장이 없었다.[6]

어쨌든 비스마르크는 괴팅겐 대학과 베를린 훔볼트 대학을 다니며 인맥을 많이 쌓았고. 이는 후에 유럽 최고의 외교관으로서 발돋움하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 또한 다양한 경험과 만남을 통해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시골 융커식의 사고관이 보다 유연해지게 되었다. 대학 때 만난 미국인 친구[7]와는 평생 서신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이름에 Von자를 넣고 다니는 촌스런 시골 귀족과 변방 출신(?) 유학생의 사이는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라고 하며, 이후 비스마르크가 새로운 세계에 안목을 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법대를 나와서 법원에 들어가 처음에는 법관이 되려 판사서기(로클럭)가 되었다가[8] 법원 생활중엔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1년만에 때려치고 외가의 직업인 외교관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외교관 시험을 친다. 막상 외교관시험에 합격하지만 외교관들의 세계는 귀족 출신인 그에게도 집안이 듣보잡이라 출세하기 어렵다는데 잠시 실망하기도 했지만[9] 결과적으로 외국 강대국이 아닌 독일 내 외교관으로 발령이 난게 결과적으로 자신의 출세와 경력이 도움이 된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며 수습기간은 아헨에서 하게 되는데 꽃뱀에게 낚여서 약혼까지 하고 빚을 지고 몇주동안 결근했다가 면직 처번되지만 외교관시험 동기[10]의 도움으로 복귀.. 여기까진 그렇다 치는데 또 17살짜리 영국 귀족처녀 꽁무니를 쫓아 다니며 스위스까지 무단 결근하고 넉달동안 여행을 하느라 당연히 짤렸다...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운 좋게도 별 다른 징계 없이 넘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도박빚을 많이 지는바람에 아헨에서 생활은 어려워졌고 23세때 넘은 나이에 도피성으로 군대에 입대해 버린다.

군복을 입고 나온 초상화가 많아서 군인출신 정치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다른 귀족 출신 자제와는 달리 군대를 싫어했고 대학시절 결투시에 입은 오른팔 부상을 근거로 병역 면제를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을정도였다. 병역은 대학생 혜택을 봐서 1년만 채워도 되는데 귀찮아서 몇달 다니다가 대충 다니고 땡땡이를 쳤는데도 전시도 아니고 관대한 지휘관을 만나 별 문제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훗날 독일 통일후에 땡땡이나 치던 예비역 소위[11]는 '육군 원수'를 수여받는다[12]
몇달 다니다 땡땡이 친 이유는 뜬금없이 농업에 관심이 생겨서였다. 군복무는 사실 왕궁 근처의 포츠담 연대라 높으신분들 자제들이 우글거리는 땡보라 농업학교에 별 지장이 없었고 포츠담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지가 있는 포메른으로 전근신청을 한후 그나마도 1년을 못채우고 때려친다.
처음엔 프로이센에서 생소한 사탕수수를 배워서 공장을 만들 생각이었다가 비료에 관심을 가지면서 신종 비료를 자신의 영지에 보급 대성공하여 몇년후에 노름빚을 다 갚는다 역시 대학출신 인텔리 ㄷㄷㄷ 시골 지주 생활도 성미에 맞았는지 귀족티 배운티 안내고 영지 농민들에게 사투리로 대화하고 친한척 친목질을 잘한것도 성공의 원인이라고.

32세에 프로이센에 의회가 생기면서 자신의 영지에서 의원으로 뽑혔고, 이 때부터 정치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극우 골수 독일지상주의 파당의 협조를 얻으며 정계생활을 했으나, 점차 이들과 간격을 벌리면서 합리적 보수주의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래서 후에도 극우파나 융커 출신 군부세력과의 사이가 원활하지 못했다. 1848 혁명 당시엔 강경 진압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영지 농민 50명을 화승총 20자루로 무장시키고(?) 베를린에 쳐들어가려고 해서 유명인사가 되었고(?)[13] 동료들에게 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혁명세력에 찍혀서 영국으로 도피한 당시 빌헬름 왕세제(훗날 빌헬름 1세)에게 눈도장을 받게 된다.
당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 "허약한 국왕은 물러나라"라 막말을 패드립을 쳐놔서 자유주의자나 귀족 양쪽에서 안티들이 생겼지만 반대로 인지도도 꽤 오른셈.

3. 외교관 시기


혁명이 진압된 후 1851년 부터 외교관으로 복귀하여 프랑크푸르트 독일연방 의회 외교관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오스트리아의 주도권에 맞서서 북독일의 프로이센 위주의 복수주도권을 주장하게 된다. 1849년 혁명이 진압되고 1850년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압력에 굴복하여 올뮈츠의 굴욕이라는 외교적 참사가 일어난지 얼마 안되는 시기였다.
연방회의에서의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일화로 소위 '위신 투쟁'이라 불리는 사건도 있다. 당시 연방회의의 의장국이자 실질적인 맹주였던 오스트리아 대표만이 회의석상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는데, 비스마르크가 '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가?'라면서 의장에게 직접 불을 청해 담배를 피운 것이다. 고작 담배 한 개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행동은 꽤 큰 파장을 불러온 초유의 사태였다. 당황한 각국 대표들은 심지어 본국에 이를 보고하며 '담배를 피워도 될 것인가'를 묻기까지 했고, 결국 바이에른 대사 카를 폰 슈렌크(Karl von Schrenck)를 시작으로 비흡연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대표들이 차례로 담배를 피워 물기 시작했다[14]. 마지막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남은 것은 헤센-다름슈타트 대표 뿐이었다고 한다. 프로이센이 더 이상 오스트리아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담배 한 개피로 어필한 셈이다.


이후 독일 연방의회에서 임기가 끝나고 1858년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쫓겨나 본국으로 보따리를 싸는데 크림전쟁에서 러시아편을 들어 중립을 주장한 인연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발령이 나서 내키지 않지만 가족과 떨어져 전근을 가는데 알렉산드르 2세와 차르 가족까지 몰려나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비스마르크의 외교노선중 원칙의 하나인 러시아와 친선은 이시기부터 이어진다.

프로이센 대표와 프랑스 대사와 빌헬름 왕세자가 즉위하고 나서 군비확대와 징병제 기간 연장을 두고 의회와 충돌하자 전격적으로 독일 수상에 임명 된다.

4. 업적

4.1. 군국주의자 인가?


전투를 앞 둔 병사의 눈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하자는 말을 하지 못 할 것이다.
(비스마르크 曰)
보수적인 성격과 '철혈재상'이라는 말 때문에 한국에서는 군국주의자[15] 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하였다. 물론 목표를 위해서 불가피할 때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그 전쟁도 적에게 필요 이상의 피해나 굴욕을 주는 것에는 매우 반대했다. 비스마르크 재임시절 발생한 전쟁은 보오전쟁, 보불전쟁인데, 이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는 것 이외는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두 전쟁을 통해 독일 통일이라는 과업을 이룬 후에는 새로 건설된 독일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고로 비스마르크를 고전적 현실주의자, 국익지상주의자라고 할 수는 있으나 군국주의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외교관 출신 답게 유럽내 많은 국가들에게 프로이센의 입장을 잘 주지 시키려고 노력했고 이것은 일말의 합리성 없이는 불가능 한 일이다. 클라우제비츠처럼 전쟁은 어디까지나 외교,정치의 연장인 수단으로 보았다. 외교에서 각국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독일의 외교정책이 성공 한 것이며 각국의 첨예한 이익 다툼 속에서 비스마르크가 원하던 대로 정세가 진행된 것은 군사적 수단의 사용은 최대한 억제하려고 노력했고 특히나 독일 통일 이후에는 불필요한 식민지는 반대하며 유럽 국경의 현상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가 성공할수 있었던 것이다.

4.2. 독일 제국의 건국


보불전쟁 승리 이후 베르사이유 궁에서 독일 제2제국 수립을 선포하는 유명한 그림, 원래 비스마르크도 검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으나 빌헬름 1세 황제의 특별 지시로 그림에서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흰색 제복을 입은 것으로 변경되어 그려졌다.

빌헬름 1세를 도와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차례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보불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독일 제국 건국을 이뤄낸 주역이다. 취임사에서 한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닌, 철(=무기)과 피(=병사)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철혈재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현대적 관점으로 볼때 국가를 준전시상황으로 상정하여 정치적 반대파들의 입지를 없애고 생산 - 멀티 - 테크 - 생산 - 멀티 - 테크 - … 방식의 국가 운영을 이끌어 간 것으로 분명 비민주적인 정책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유럽의 다른 나라도 딱히 민주적이지는 않았다. 제국 정체가 유지되고 있던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조차 나폴레옹 3세가 독재를 하던 시절이다. 정작 비스마르크가 무너트리긴 했지만... 그리고 그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백색테러, 사형 남발 등을 오히려 자제했다는 점에서는 평가를 좋게 줄 수 있다. 즉 당나라 재상 이임보처럼 구밀복검(口蜜腹劍)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 시기 비스마르크의 외교수완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비스마르크의 재임 시절에 프로이센은 덴마크(슐레스비히-홀스타인을 점령),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전쟁을 해서 승리했는데, 프로이센군은 목표를 이룬 이후에는 적국에 머물지 않고 바로 철군했다. 이 말인즉슨 쓸데없는 약탈 등으로 타국의 반발감을 불러 일으키는 일을 최대한 줄였다는 이야기로 비스마르크의 장기적 혜안을 잘 보여주는 일화. 다만 프랑스에서는 원래 국민 감정이 안 좋은 탓에 반발도 심해서, 나폴레옹 3세의 항복 이후 파리에서 공화정부가 성립되어 들고 일어나자 4개월간 포위해서 저항의 씨를 말려버렸다. 그러고도 파리 코뮌이 들고 일어났지만.

비스마르크가 특히 유명한 것은 1860 ~ 1870년대의 외교 정책과 전쟁 과정 때문으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는 프랑스가 개입하지 못 하도록 애매모호한 보상책을 제시하며 프랑스를 묶어두고, 오스트리아를 물리친 뒤에는 엠스 전보 사건을 교묘히 조작해 전쟁구실을 찾던 프랑스에게 미끼를 던져주고 선제침공을 유도함으로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발발시키고 독일 내 여론도 우호적으로 돌려놓았다. 여론조작을 통한 대중통제의 선구자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결과는 프랑스의 황제가 쫓겨난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이 건국되고 독일 황제가 즉위하는 초유의 결과로 나타났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 비스마르크는 근대의 전설이 될 만한 인물이다.

이 시기의 일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는데, 독일 제국 성립 전에 독일계 연방국가들이 모인 프랑크푸르트 연방회의에서 비스마르크가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자 군인 출신이었던 오스트리아 대표가 "얼마나 많은 전쟁에 나갔길래 그렇게 많은 훈장을 달았소?"라고 말했다. 이것은 문관이었던 비스마르크를 비아냥거린 것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주눅들지 않고 "외교전에서 딴 것이라오."라고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첨언하자면, 그 유명한 알자스-로렌을 빼앗아 온 것도, 그래서 알퐁스 도데마지막 수업을 쓰게 된 것도 이 당시의 일이다. 본래 유명한 광산 지대로 루이 14세 때 프랑스의 영토가 되고서 그 후 프랑스 혁명전쟁을 같이 치른[16] 지방이었는데, 이 때 독일에 강탈당하면서 그 갈등이 심각해졌다.

4.3. 비스마르크 체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절묘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며 독일이 안전이 보장되었던 1890년대까지의 유럽의 외교 구도를 흔히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베르사유 체제라든가 냉전 체제와 다르게, 한 시대의 프레임에 개인의 이름이 부여된 유일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17] 그 명칭만으로도 비스마르크 외교의 진가가 나타난다.

비스마르크가 사적인 보수적인 가치관과는 별개로 재상으로서 활동한 공적인 업무에서 유일하게 까이는 점이 비스마르크 같은 능력자가 아니면 유지하기 곤란한 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인데, 후세의 일까지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터….

독일 제국의 수립 이후 비스마르크는 숙적 프랑스가 세력을 재건하여 독일에 복수할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했으며, 이에 따라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을 외교정책의 제1과제로 삼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프랑스 왕따시키기가 목표였던 것이다.

또 비스마르크가 일생을 걸쳐 일관되게 관철한 외교 철칙은 "외교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고 전하며, 이해를 위해 첨언하자면 프랑스의 고립도 이 수준의 원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이 각지의 식민지 확장 등으로 타 강대국과 갈등 관계가 심한 가운데 유럽 대륙 내에서는 중립적 태세를 취하자,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손을 잡음과 동시에 러시아 친화적인 정책을 펴면서 프랑스의 외교 대상국이 될 만한 강대국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통일 이후에는 전쟁을 벌였던 오스트리아와 관계를 회복시키고 프랑스를 고립시켰으니 비스마르크의 외교력이 어떤 수준이었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이다. 이렇게 독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동맹 관계를 3제 동맹이라고 하는데, 세 국가가 모두 제정 체제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19세기 후반 유럽 대륙 내 세력 균형 체제(Balance of Power)의 효시로 평가된다.

그러나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범슬라브주의적 팽창을 시도하면서 잦은 위기가 벌어졌는데,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당시 러시아의 지지를 받는 발칸 국가의 영토 확장을 베를린 조약을 통해 축소시키면서 갈등이 심각해져 한때 3제 동맹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본인은 "러시아 걔네 우리랑 관계 끊어봐야 손 잡을 데도 없음. 다시 우리한테 손 벌리러 올 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1881년 재건된 3제 동맹은 1884년에 재확인되고, 1887년에는 독일과 러시아 간에 재보장 조약이 맺어져 비스마르크의 해임까지 생명을 유지한다.

자유주의자인 프리드리히 3세와는 성향상 자주 대립했고, 빅토리아 황후와는 극히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독일 통일 후에는 사람이 바뀐 것마냥 평화주의자로 돌변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평화주의자로 돌변한 것이 아니라, 항상 보수적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의 전쟁은 독일에 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때문에 빌헬름 2세를 비롯한 주전론자들에게 밀려 물러나면서, 비스마르크는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에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비스마르크가 물러난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아주 잘 이야기해준다.

실제로 비스마르크가 해임된 1890년 이후 17년만에 유럽 내에서는 3국 동맹과 3국 협상의 격한 갈등 관계가 형성되고, 그 원인도 빌헬름 2세의 반영 - 반러시아 구도였다. 다만 직접적으로 갈등 관계를 터트린 발칸 반도 문제는 오히려 1870년대 이후로 계속 심각해지던 문제로, 비스마르크도 여리박빙의 상황에서 다루었던 문제이다.[18] 어찌보면 그걸 잘 처리해냈으니까 명재상이겠지만.

4.4. 통일 이후의 내치

반면 국내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의 제대로 된 정착을 방해하는 헌법적 규범과 의회의 의사를 제멋대고 개변하고 무시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제국 재상은 제국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규정인데, 이 때문에 독일의 학자들에게서는 국내정치에 관한 한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자본주의를 윤리적 측면에서 정당화한 막스 베버이다. 베버는 아예 대놓고 비스마르크를 가리켜 독일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은 사람이라고 깐다. 다만 이 규정은 사실 비스마르크가 의회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반면 빌헬름 1세는 말 그대로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자신의 보수성도 엄청난데 1848년 혁명 당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노동자들의 시위를 무력진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폐위하고 무력진압에 찬성하는 동생 빌헬름 1세를 국왕으로 올리려는 계획을 주도했을 정도로, 그 계획 때문에 차후 빌헬름 1세의 재상이 되었을 때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황녀는 비스마르크를 상종하지 못할 역적이라고 여겼다. 또한 수십명의 소작농을 거느린 대지주로서, 소작농을 무장시켜 수도로 진격하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보수주의의 극한에 다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과격성은 이후 어느 정도 누그러지게 된다.

그런데 그 사상과는 반대로 세계최초로 1883년 의료보험, 1884년 산재보험, 1889년 연금보험 등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즉 현재 4대 사회보험중 3개가 비스마르크 체제 아래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19] 이 부분에 대해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평가가 있다. 더 큰 것을 요구하기 전에 미리 적절한 선을 그어버린 것. 물론 이러한 사회주의 억압은 빌헬름 2세가 사회민주당을 합법화하면서 실패하게 되었지만 비스마르크가 만들어낸 복지제도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되면서 독일이 복지국가로 도약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한편으로 반가톨릭 운동을 펼쳤지만 보수적이고 가톨릭 신자가 많은 바이에른 등의 남부를 중심으로 반발이 거센데다가 새로 황제로 재임한 빌헬름 2세와도 파업사건으로 충돌이 빚어지고 1890년 총선에서 반 사회주의 법을 시행했음에도 사회주의자들[20]과 가톨릭계 정당이 대거 약진하고 親비스마르크파가 패배하면서 명분에서 밀린 비스마르크는 보통선거 폐지 드립을 치기도 했으나 결국 하야하게 된다.

4.5. 사임과 사망

새 황제 빌헬름 2세와 의견이 맞지않아 충돌하고 총선에서도 친 비스마르크 파가 패배하면서 제국 수상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한국에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2세에 의해서 쫓겨난다고 알려졌을 때 독일 내에서는 이 조치를 열광적으로 반겼다. 비스마르크의 행태에 보수파부터 시작해서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들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장원(함부르크 근교의 프리드리히스루흐Friedrichsruh)[21]으로 은퇴할 때는 의장대군악대가 기차역 플랫폼에서 송별식을 해주었으며 그 이후에도 프로이센의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사실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에서 인기를 끈 것은 빌헬름 2세가 하도 경망스럽게 구는 것에 질려버린 것이 결정적이었고,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의 관계는 사임 이후에도 악화일로였다. 아들의 결혼식으로 빈에 갔을 때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접견하려 했으나, 빌헬름 2세는 프란츠 요제프에게 편지를 보내 접견을 방해했고 비스마르크의 후임자인 제국 재상은 각지의 관리들에게 비스마르크를 접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자 당시 황가의 큰어른이 비스마르크가 죽기 전에 화해하지 않으면 황제에게도 큰 흠이 될 것이라고 직언했을 정도였다.

빌헬름 2세는 차후 비스마르크와 만남을 가지긴 했으나 역시 전 재상의 충언을 듣는체 마는 체할 정도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젊은 황제와의 불화로 사임한 이후에도 지방신문 사설의 주요인사로, 조국을 위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였다. 국가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을 수는 있어도 어찌되었건 일평생 국가에 충성하며 일선에서 열심히 뛴 인물임은 분명하다. 한편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말년에는 거의 평화주의에 기울었고 평화주의자로 불릴만한 발언도 했다.[22] 그래도 갈등관계 때문에 빌헬름 2세의 신하라는 말을 듣기는 싫었는지, 묘비에는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던 독일인 공복' 이라는. 생전에 자신이 직접 쓴 묘비명을 쓰라고 유언했다.

한편 비스마르크가 사망했을 때, 임종 자리에 가족들이 비운 사이 기자들이 침입해서 방금 사망한 사진을 찍어서 잡지에 돌렸다. 당연히 병에 찌들고 방은 엉망이 된 참혹한 모습…. 결국 기자들은 체포되어 처벌받고 사진 수정으로 아주 온건한 임종모습이 유포되었다.

5. 개인적인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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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재상 등과 같은 전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비스마르크는 상당히 감수성이 풍부한 티멘탈한 성격이었으며, 신경쇠약증 때문에 과식을 자주 했다고 한다. (사인도 과식) 게다가 이런 예민한 성격 때문에 울음도 많았다고 한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보상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빌헬름 1세와 의견대립이 생겼을 때는 울면서 자살소동을 벌여 빌헬름 1세의 뜻을 꺾은 적도 있다고 한다. 한번은 비스마르크가 '내 말 안 들어주면 사임하겠습니다!'이라고 외치자 빌헬름 1세도 '제국에는 나보다 비스마르크가 필요하다'면서 '그럼 내가 퇴위하겠다!'이라고 맞받아쳤다. 어찌됐든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가 어떻게든 설득하면 츤츤하면서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빌헬름 1세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비스마르크는 큰 상심에 빠졌다. 갭 모에 쩌네

문제는 빌헬름 2세가 자기 말을 안 듣자 똑같은 짓을 했는데, 빌헬름 2세가 쌩까자 열받아서 잉크병을 빌헬름 2세의 이마에 던졌다. 이때 상처가 남아 빌헬름 2세는 모자로 이마를 숨기고 다녔다. 안습.

자신의 미국인 친구 존 말트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식료품점 주인이 자기 일을 싫어하는 것처럼 정치를 싫어했다."고 했다. 말트리는 비스마르크의 대학시절 동창이었고, 이후 미국의 외교관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와는 노년까지 쭉 편지로 교류했다.

5.1. 여러 일화들

여하튼 사생활 및 사고방식이 꽤나 독특했던 듯하며, 여러가지 일화나 명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독일 제일의 저술가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다만 19세기 독일산문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는 大몰트케와 비교한다면 밀리기는 한다.

늪에 친구가 빠졌는데 구해줄 자신이 없자 빠진 친구를 구해주지 않고 빠져죽으라고 돌을 던져 도발해서 스스로 빠져나오게 만든 일화가 유명하다. 혹은 총을 친구에게 겨누고 '구하진 못하겠고 차마 천천히 죽는걸 볼 수도 없으니 고통없이 죽여주겠다'는 식의 말을 하니 친구가 화들짝 놀라 스스로 있는 힘을 다해 알아서 나오자 친구를 안으면서 말하길, 내가 겨눈건 자네의 포기하는 마음일세라는 말도 전해진다. 빠져나와서 망정이지 못 빠져나왔으면 과연 철혈재상 소리나 들었을 일화[23]

귀족 여식을 아내로 맞이할 때 장인을 상대로 치밀한 작전과 노력을 해 사기친 일화같은 카더라식 에피소드도 있다. 하지만 결혼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신론이나 다름없던 이신론(理神論.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규칙의 일환으로서만 인정한다)에서 루터교로 개종한 것이고, 그나마도 47세 때였다, 러시아 대사의 25살난 아내와 연애행각을 벌였다. 아내와 러시아 대사가 대인배라서 눈감아주지 않았다면, 엄청난 스캔들로 비화해서 꽤나 골치아팠을 것이다.

개를 좋아해서 애견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자취를 감추자[24] 죽기 직전까지 말썽 부리는줄 알고 야단치려고 찾고 있었던 사실을 몹시 후회한 기록도 있다. 임종시에도 그 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고 하는데, 그 이름은 술탄. 그레이트 데인이다. 개를 자기 오른편에 놓고 협상을 하기도 했는데 상대방이 흥분해서 주먹쥔 팔을 휘두르자 개가 주인님을 공격하려는 줄 알고 상대방을 공격하려든 일화도 있다.

주로 개그용으로 자주 인용되는 비스마르크의 명언으로서 "청년들에게 해줄 말은 단 세 마디뿐이다. 일하라, 더욱 일하라, 죽을 때까지 일하라." 가 있다.

훈장에 관련된 유명한 일화도 유명하다.

원수 시절, 전쟁에서 화려한 공을 세운 사병이 있었다. 원수인 비스마르크가 직접 훈장을 수여하는데, 이때 철혈재상이네 웃음을 모르네 하던 걸로 소문이 자자하던 비스마르크가 갑자기 씩 웃으면서 그 사병에게 농담을 했다.
"내가 자네라면 이 훈장을 집어치우고 돈으로 100마르크를 받길 원하겠네."
그러자 사병이 질문했다.
"도대체 이 훈장을 현금으로 치자면 얼마나 되기에 그러십니까?"
그 즉시 비스마르크는 대답했다.
"이거…현금으로 치면 고작해야 1마르크 밖에 안 될 걸세."
그러자 그 사병도 즉각 우렁차게 말하길, "하오면, 저는 그 훈장과 99마르크를 받고 싶습니다!"
이 말에 비스마르크도 잠깐 멍해 있다가 껄껄 크게 웃으면서 사병이 원하던 대로 해주었다고 한다.

단순한 유머 혹은 대담한 병사 개인에 대한 주목을 위한 이야기로 자주 받아들여지지만,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가치와 현실 사이의 거리감을 지적할 때 언급되어 국가주의를 비판하는데 자주 인용되는 뼈 있는 일화이기도 하다.

6. 비스마르크와 3

  • 학창시절 3번 전학을 했다,
  • 3국 대사로 일했다.
  • 3명의 왕을 섬겼다
  • 3번의 전쟁을 치루었다.
  • 3마리의 말을 잃었다.
  • 3번의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 3국 동맹을 결성했다.
  • 이름이 3개(비스마르크, 쇤하우젠, 라우엔부르크)였다.
  • 작위가 3개(백작, 후작, 공작)였다.
  • 암살기도가 3번있었다.
  • 3번사임 했다.
  • 자식이 3명이었다.
  • 참나무 잎 3개세잎 클로버가 뒤엉킨 문장을 달고 다녔다.

숫자 2와 필연적으로 엮인 이 남자와 맞붙는다면 흥미로운 만남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활동 연대가 1세기 이상 차이나서 GG(...) 이 사람도 있다
스팀으로 우리 지갑을 털어가는 게임회사가 가장 혐오하는 인물이라 카더라

7. 기타

체제면에서 박정희와 비교되는 경우가 있다. 희연 교수는 독일의 비스마르크체제가 소련의 스탈린 체제, 한국이 박정희 체제, 타이완의 장제스 체제, 샤오핑 이후의 중국 체제와 같은 성격을 지닌 개발동원체제 라고 평가했다.

당시 시대의 인물과 비교하면 흥선 대원군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실제 사망년도도 1898년으로 같다. 다만 비스마르크가 흥선대원군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고, 흥선대원군이 비스마르크보다 5개월 정도 먼저 죽었다. 그러나 사상의 궤 자체가 크게 차이가 나다보니 둘이 잘 비교되지는 않는 편이다. 다만 8년 늦게 태어나 3년 늦게 죽은, 그리고 근대 국가의 건설을 위해 군수 산업 중심으로 발로 뛴 이홍장과는 가끔 비교되기도 한다.


실제로 둘 모두 일선에서 퇴진한 1896년 서로 만나기도 했다. # 면담 내용을 수록한 동아일보 기사 둘 모두 '제국'을 몸으로 보여주는 듯한 거구가 인상적이다. 두 제국 모두 두 사람이 마음먹은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여담으로 이 기사를 패러디한 "이홍장과 비스마르크"라는 이 문학이 존재한다. OMG

악마의 사전에 따르면 한번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훈장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의 야마토 이전 세계최대의 전함이었던 독일의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미국 노스다코타 주의 주도인 비스마르크(Bismarck)는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독일계 미국인이 이 주에 압도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도시 자체는 전형적인 행정중심도시로, 노스다코타 주 안에서는 파고(Fargo)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25]

아돌프 히틀러 연간에 나온 2부작 영화에는 유태계 정치인들의 마수때문에 물러나고 독일은 또다른 제국을 세워야 한다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치의 선전과정에서 제대로 왜곡당한 피해자.

가끔 비스마르크 때의 독일을 제2제국, 히틀러 때의 독일을 제3제국이라 해서 비스마르크가 1차 세계대전에 가담한걸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다. 비스마르크는 1차 대전 전에 사망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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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른 비스마르크 가문(브리스트 계열)과는 교류조차도 없다고 한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전에는 브리스트계 비스마르크 가문이 더 잘나갔다고 한다.
  • [2] 당시 독일 소시지 제조 과정은 현대 중국처럼 개판이었다. 소시지 공장에서 언제 청소했는지도 모르는 바닥에 재료인 고기를 내팽개쳐 두고, 그 위를 마찬가지로 위생이 의심스런 장화를 신은 직원들이 걸어다녔다. 그리고 쥐가 들끓었기 때문에 아무데나 쥐약을 뿌려놨고, 소시지를 만들 때 재료를 아무렇게나 제조기계에 집어넣었다. 그 결과 소시지를 만들 때 위생이 대단히 의심스런 고기, 공장의 오물, 쥐약, 쥐약을 먹고 죽은 쥐가 다 들어갔다.
  • [3] 인기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 역시 이것을 인용했다. 비서실장 리오의 "제조공정을 알고 싶지 않은 두 가지가 있지, 법률과 소시지야."라는 대사가 그것이다.
  • [4] Eiserner라는 단어는 철을 뜻하는 단어이고 피를 뜻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직역하면 철의 재상이라 불러야겠지만, 위의 연설과 피라는 단어가 가지는 냉혹한 이미지 때문에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의 한자 문화권 국가에서는 철혈재상으로 의역되었다. Eiserner Kanzler를 영어로 쓰면 Iron Chancellor.
  • [5] 비스마르크가 70세때 비스마르크 집안 땅 찾아주기 운동'(?)이 벌어져서 추종자들이 영지를 사서 갖다 바치는 훈훈한(?)일이 벌어진다.
  • [6] 그의 회고로는 공부를 전혀 안했다고 한다. 실제로 성적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중간이하... 졸업후 취직을 위해 일주일 정도 공부를 한것 때문에 매우 억울해 하고 다녔다고...
  • [7] 이 당시에도 하버드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왔는데 명문학교가 미국에 있긴 했지만 유럽보다 학문 수준이 떨어져서 미국 상위층은 1차대전 시기 이전까지 유럽 유학이 많았다. 역시 외교관이 되었고 네덜란드 역사에 정통한 저술가 이기도 하다.
  • [8] 이 당시엔 법대를 나와 큰 결격이 없으면 법원서기가 되고 수습을 거쳐 법관이 되는 테크였다.
  • [9] 외할아버지가 스웨덴 대사를 지내긴 했지만 그 당시는 매우 혼란기인 나폴레옹 전쟁시기로 평민출신 외할아버지가 외교관이 된건 대사관 직원들이 다 도망가서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가 남아있는 20대직원인 비스마르크의 외할아버지를 덜컥 임명해버렸다고 한다.
  • [10] 그의 아버지가 매우 유명한 교수라서..
  • [11] 복무시에는 견습사관(사관후보생)신분이고 예비역 소위는 훗날 고향에서 지주시절 시의원때 명예직으로'국경수비대 창기병 예비역 소위' 직함을 얻는다.
  • [12] 군국주의 나라 독일에선 군인이 아니더라도 종종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의 다른 직종 유명인에게 예우로 군인 계급을 수여했다.
  • [13] 군생활 고참이던 포츠담 왕실 경호부대장에게 편지를 썼으나 "농부들의 도움까진 필요없다"고 거절당했다
  • [14] 작센 대표 율리우스 고틀롭 폰 노스티츠(Julius Gottlob von Nostitz)는 내각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지만, 하노버 대사가 피우는 것을 보고 고심 끝에 그 다음 석상에서 결국 실행에 옮겼다. 본인 말로는 '칼집에서 칼을 뽑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 [15] 이런 오해에는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가 큰 작용을 한 것 같다. 독일편의 비스마르크는 완전히 군국주의자처럼 묘사해놨다.
  • [16] 백년전쟁때도 알자스의 동레미에서 잔 다르크를 배출해낸 지방이기도 하다.
  • [17] 메테르니히 체제의 사례도 있으니 유일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빈 체제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도 사실이니까...
  • [18] 일례로 러시아와 재보장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2국동맹을 각각 맺었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갈수록 나빠졌다
  • [19] 4대보험중 하나인 고용보험법은 1927년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네덜란드, 영국에 이어서 3번째.
  • [20] 이시기부터 독일 사회민주당은 주요정당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 [21] 여기엔 당시의 철도역 건물을 개조한 비스마르크 박물관이 있다. 비스마르크의 상징이 되는 레인코트, 베르사유 독일 황제 선포식 그림, 훈장 등 엄청난 레어템들이 가득하다(...) 다만 찾아가기는 조금 껄끄러운데, 함부르크에서 S반(전철 격)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역 다음 역(2km 상당)에 있다는게 문제. 이 구간(즉 한 정거장 구간)을 걸어가든가 아니면 2시간 마다 한번씩 오는 차 시간 맞춰서 맞는 승강장에서 기다려야한다. 원칙적으로는 돈을 내야하지만 말 그대로 한 정거장 구간에 열차표 검사는 거의 하지 않으므로 돈은 들지 않는다. 역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 입장료는 저렴한 편.
  • [22] "전투를 앞둔 병사의 눈동자를 본 사람은 전쟁을 어렵게 생각한다."
  • [23] 그러나 이 일화는 70년대 훈련소 교관이 지어낸 얘기 란 말도 있다 #
  • [24] 개를 비롯해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이런 습성이 있다.
  • [25] 그러나 인구 적기로 유명한 노스다코타답게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라고 해 봤자 광역권 다 합쳐서 약 12만명밖에 안된다(…).
  • [26] '비스마르크 체제' 항목에 설명되어 있지만, 비스마르크는 유럽의 평화와 세력 균형을 꾀했던 인물이다. 만일 비스마르크가 살아있었다면, 가담은커녕 극력 반대했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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