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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아파트 붕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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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전개
2.1. 배경
2.2. 부실공사
2.3. 붕괴
2.4. 결과
3. 붕괴 이후의 와우아파트
4. 사건 이후의 시민아파트
5. 여담

1. 개요

1970년 4월 8일에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2동에 위치한 와우아파트[1] 15동이 무너진 사건.

2. 전개

2.1. 배경

당시 서울은 경제성장으로 인해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으나 그에 비해 주택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 때문에 소위 판자촌이라 불리는 무허가 건축물들이 기하급수로 불어나고 있는 상태였다.

2.2. 부실공사

이를 좋지 않게 본 박정희 대통령은 판자촌 정리를 명령했고 박대통령의 충복인 당시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의 지시로 각 구청별로 판자촌 등의 무허가 건축물의 현황을 파악한 후 대부분의 판자촌들을 철거하고 시민아파트들을 짓게 했다. 이에 따라 지어지게 된 시민아파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와우아파트였다. 그래서 아파트를 지은 곳은 대부분이 산중턱. 왜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었냐는 질문에 대한 김현옥 시장의 답변도 유명하다. "야 이 새끼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그리고 청와대에서 무너지는 걸 잘 보았겠지 그리고 김현옥은 짤렸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 안에 아파트를 뚝딱 지어내야 하는 상황인 데다가 오늘날보다 더 심각한 건설업체와 공무원들의 유착 등의 문제로 인해 와우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시민아파트는 초날림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와우 아파트는 몇 개의 건설업체가 나누어 지었는데 이 중 13~16동은 (주)대룡건설이라는 업체에서 맡았다. 대룡건설은 이걸 박영배라는 업자에게 하청을 주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무면허 업자였다는 것. 거기에 공사비는 1동에 1100만원 정도로 5층짜리 아파트 한 동을 제대로 짓기에는 부족한 금액이었다. 여기에 하청을 주는 과정에서 한 동당 125만원씩 떼먹었으니 공사비는 더욱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음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공사가 잘되기를 바랬다고 한다(...) 이런상황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또한 시민아파트의 설계도도 문제였다. 시민아파트가 당시 빈민층의 생활수준을 가정하여 설계되었기 때문에 서울시에서 제작한 설계도는 1㎡당 280kg 정도의 하중을 견디도록 되어있었다. 문제는 브로커들의 개입 등으로 입주권 가격이 크게 올랐고 이로인해 층은 도저히 입주금을 낼 만한 형편이 안되자 입주권 소위 딱지를 팔고 떠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실제 아파트가 입주한건 태반이 중산층들이였다.[2] 이들이 무거운 가구와 많은 세간살이를 들여놓으면서 하중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시민아파트에 걸린 실제 하중은 1㎡당 900kg 내외로 설계 하중의 3배를 넘었다.

결국 설계도 부실하고 공사비도 부족한 데다 업자도 무면허니 엄청난 날림공사가 진행되어었다. 철근 70개를 써야 할 기둥에 고작 철근 5개를 쓰고 만들었으니 말 다한 셈. 콘크리트 강도도 크게 떨어졌는데 시멘트 함량이 적어 자갈 섞인 모래반죽이나 다름없었고 콘크리트 만들 때 쓰는 물은 불순물이 엄청나게 많은 하수도 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고작 6개월만에 아파트를 완성하느라 건축물을 세우는 데 필수적인 지반 공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1~2층짜리 가건물 같은 걸 세우는 게 아닌 이상 건물을 지을 때는 올리는 만큼 밑으로 파야한다. 즉, 어느 정도 땅을 파서 기반을 보강한 후 그러고 나서 건물을 올리는 것이 건물을 짓는 정석[3]인데 애초에 건물을 어떻게 짓는지조차 모르는 작자들이 건설을 맡았으니 어떻게 될지 뻔할 뻔자인 것.

2.3. 붕괴

이러한 탓에 와우 아파트의 기둥은 암반이 아닌 부토 위에 세워졌으며 겨울 동안에는 땅이 얼어있었기 때문에 겨우 버텼지만 땅이 녹는 봄철이 되면서 결국 기둥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만 것이었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12월 26일에 완공되어 그때부터 입주가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문제의 업자가 시공한 13~16동에는 금이 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14동은 콘크리트 받침기둥이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나 붕괴시점에는 주민이 대피한 상태였다. 해빙기가 되면서 땅이 녹자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기둥도 내려앉고 아파트가 산 아래로 넘어가듯이 무너져 내렸다. 아파트가 붕괴되면서 아래에 있던 판자집 세 채를 덮쳤으며 이 사고로 인해 사망 33명, 부상 40명의 큰 인명피해를 냈다. 그나마 이 시점이 30세대 중 15세대만 입주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만약 모든 세대가 입주해 있었으면 사상자가 크게 늘었을 것이다.

2.4. 결과

결국 이 사건으로 '불도저' 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서울을 개조하며 잘 나가고 있었던 김현옥 시장은 4월 16일 사직했고 관련자들이 무더기로 구속되었다.

박정희 시대의 고도 경제성장에 구성원 의식이 따라가지 못 한 문화지체현상과 당시 만연했던 비리가 제대로 드러난 사건이었지만, 이를 두고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가수 조영남은 한 공연에서 '신고산이 우르르르 함흥차가는 소리에'[4]를 '우르르르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라고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을 비꼬는 노래를 불렀다가 바로 군으로 끌려가는 사태를 경험하기도 했었다고.

붕괴 직후 건축을 전공하는 서독의 대학원생들이 사고의 원인을 분석하려고 시도했는데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아파트는커녕 농가의 헛간을 짓기에도 턱없이 부실한 자재로 어떻게 아파트를 지었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해서라고 한다. 지을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도 기적으로 본 듯(..)한국에 강림한 오크놀러지 제대로 세계구급의 국가망신을 한 사례.

3. 붕괴 이후의 와우아파트

15동 붕괴가 일어난지 8일 후 문제의 시공업자가 시공한 13, 14, 16동도 철거가 이루어졌다. 콘크리트 질이 너무 떨어져 철거하는데도 애를 먹었다고 한다.

와우아파트는 총 19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남아있던 15개동은 붕괴 이후에도 어느 정도의 보강 이후 계속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후 1976년과 1984년, 1988년, 1989년 4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철거되고 1991년까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4개동(3, 4, 5, 가)도 결국 철거되고 부지는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4. 사건 이후의 시민아파트

이 사건 이후 아직 건설되지 않은 시민아파트는 건설 계획이 모두 폐기되었고 짓고 있던 시민아파트는 골조를 더 보강해서 완성되었다. 사고 이후 시민아파트는 434동이 완공된 상태였는데 안전도를 검사하자 무려 349동이 보수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쓸 만한 아파트는 계속 보수해서 쓰고 못 쓸 정도가 된 아파트는 하나하나 철거하기 시작했다.

2012년 기준 서울 시내 대부분의 시민아파트가 철거되고 남아있는 것은 회현 제2 시민아파트 한 동뿐이다. 무한도전 '여드름 브레이크' 특집 초반의 바로 그 아파트.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이후에 준공된 아파트라서 시민아파트답지 않게 골조가 튼튼하다고 하다. 몇 년 전부터 재건축이 논의되고 있는 상황.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아파트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해지자 이에 정부는 시범아파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중산층을 겨냥한 새로운 형태의 아파트를 짓게 된다. 더 높고 더 쾌적하고 안전한 아파트를 목표로 한 것. 이에 여의도를 시작으로 시범 아파트들이 성공적으로 세워졌고 이것이 지금의 아파트의 전형이 된다. 그렇기에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는 대한민국 주거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또한 사실 위의 회현 제2시민아파트의 이름도 시범아파트로 바뀌었다. 사건 당시에는 건설 중인 시민아파트였지만 구조를 크게 보강해서 시범아파트로 바꾼 것. 그러나 여의도의 시범아파트와는 개념이나 구조가 다르다.

5. 여담

조성한 공원은 현재의 홍익대학교 뒷편에 바로 위치하고 있다. 테니스 코트나 각종 헬스기구도 있고 밤마다 사람들이 운동하러 오는 좋은 근린시설이지만 와우산과 바로 맞붙어 있는 홍익대 시설물들(C동, I동, P동 등)에서 가끔 귀신 목격담이 나오는 등 일종의 심령현상 스팟이 된 모양이다. 너무나 어이없는 사건 전말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만 하다.

이 사고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건설업계의 상황은 그닥 개선되지 않다가, 결국 1990년대 성수대교 붕괴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정점을 찍고 말았다.[5] 대한민국 건설업계가 그 오명을 벗어나게 된 건 200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였다.

1980년대 반공서적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철근 대신에 싸리나무를 써서 공법하기 때문에 70년대 아파트 붕괴사건이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라는 서술이 있는데 당시 정부에서 고의적으로 유포한 낭설에 가깝다. 이 때까지는 남북한 간 체제 병림픽 경쟁이 계속되던 때였으니...물론 극과 극은 통한다 90년대 이후 경제력이 악화된 북한에서 부실공사가 성행하는건 맞으며(...) 2014년 평양 아파트 붕괴사고가 터졌다.

최일구 앵커가 와우아파트에서 살았었다고 무릎팍도사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안성에서 서울로 이사갔던 당시에는 이미 와우아파트 사고가 일어난 후였지만, 어린이의 눈으로 보기에도 당시 상황이 꽤 참혹했던 모양. 이 때의 기억 때문에 기자가 된 후에는 "부실공사"라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인연이었는지 최일구 앵커는 MBC에서 한강 교량 보수관리 실태를 취재하게 되었고, 보도한 지 1년 후 실제로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최일구 앵커는 성수대교 붕괴 이후 당산철교의 균열을 발견하여 당산철교로 올라가 직접 촬영하였고 결국 안전검사에서 딱 걸린 당산철교는 1997년에 철거한 후 1999년에 다시 완공했다.

웹툰 작가 강풀의 작품 어게인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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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여기서 와우는 영어 감탄사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게임같은 게 아니라, 아파트가 위치한 곳에 있던 산인 와우산(臥牛山)에서 따온 것이다. 즉 소가 누운 모양의 산에 있어서 와우 아파트지 절대로 Wow Apart가 아니다.
  • [2]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에서 당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실제 개발독재 시절에는 재개발,재건축 아파트 입주권 소위 딱지를 팔고 떠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이걸 중산층, 부유층들이 사들여서 부동산재테크를 하였다.
  • [3]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 있는 피사의 사탑의 경우 거진 10층 다 되는 탑을 쌓는데 밑으로는 고작 3m밖에 파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쪽은 오히려 부실공사를 한 게 아닌데도 해마다 기울고 있다.
  • [4] 신고산 타령 中
  • [5] 성수대교는 1979년 완공. 삼풍백화점은 1989년(...) 완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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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17 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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