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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계곡

Contents

1. 개요
2. 조성 사유
3. 현실은 시궁창
4. 예상 밖의 생존 사례
5. 결과
6.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과거 파라오의 묘역인 피라미드가 신나게 털려서 파라오의 미라의 안전을 절대 보장할 수 없는데다가 건설 기술까지 까먹자 고대 이집트의 신왕국 때 파라오들을 장사지내기 위해 새로 조성한 묘역이다.

일단 조성 사유부터가 도굴꾼들을 피하기 위해서 선정한 위치였다. 그래서 테베(오늘날의 룩소르) 반대편인 나일 강 서안지대에 왕가의 계곡이 있지만 얼핏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계곡처럼 보인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지상에 노출되는 구조물을 건설하면 도굴꾼에게 털리므로 계곡에 구멍을 파서 묘실을 만든다음에 파라오의 장례가 끝나면 입구를 봉인해서 위치를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건설 시기는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1000년으로 500년간 이용되었다. 18왕조의 제3대 파라오 투트모세 1세가 최초로 묻혔고 마지막으로 묻힌 파라오는 2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람세스 11세다. 다만 주인을 알 수 없는 KV39가 있어서 아직까지 확정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KV39는 말 그대로 왕가의 계곡(Kings Valley) 39호 무덤이라는 의미로 일괄적으로 매긴 번호를 말한다. 왕가의 계곡은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하는데 동쪽에 대부분의 무덤이 있다. 다만 서쪽의 무덤은 WV로 매기기도 한다.

그리고, 파라오의 묘역이라고 하지만 왕비, 왕자, 공주를 비롯한 왕족들과 왕이 총애하던 신하들은 물론 심지어 왕들의 애완동물들도 묻혔다. 동물까지 묻힌 이유는 이집트 신화에서 , 악어, , 원숭이, , 고양이 등의 동물은 신들과 상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2. 조성 사유

당시 파라오들은 도굴꾼들 때문에 중왕국 때까지 사용하던 피라미드같이 눈에 띄기 쉬운 것들을 피하고 그들의 묘를 인적이 드문 계곡 바위 틈이나 벼랑에 만들었다. 이 결정은 왕과 왕족들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결단이었는데 영혼이 영생하고, 먼 훗날에는 자신의 신체인 미라를 이용해서 다시 생전처럼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던 상황에서는 절대적이었다. 특히 영혼도 먹어야 살 수 있으므로 제사가 이루어지는 신전에 주기적으로 왕복해야 했다. 문제는 무덤은 비밀스런 장소에 마련할 수 있지만 신도들이 찾아오고, 제사장이 있어야 하는 신전은 대도시에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당장 자신들의 영혼이 인적이 드물고 길은 무늬만 있는 험지를 한참 걸어가서 신전에 도착한 후, 다시 험악한 길을 따라 무덤에 돌아가는 천리행군을 매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죽어서도 영혼이 개고생을 할 각오를 한 셈이다. 그리고 말이 새어나갈 수 있는 무덤 건축 노동자들은 외부 출입이 통제되는 마을에 모여살게 한 대신 아주 많은 임금을 주어 입을 막았다.

덕분에 이곳 파라오들의 무덤은 비교적 늦게 도굴당할 수 있었다... 안습. 물론 당시 고대인 관점에서는 충분히 도굴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지형이었으나...

3. 현실은 시궁창


게다가 신왕국 말기에는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는 바람에 무덤 노동자들에게 임금 체불이 일상화되었고 그동안의 후한 대우에 익숙해 있던 노동자들은 빡쳐서 몰래 무덤 입구와 도굴로를 동시에 만드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당연하게도 장례식이 끝나면 도굴로를 열어서 전부 털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일은 파라오뿐만이 아니라 왕비, 왕족, 귀족, 평민들까지 가리지를 않았다. 심지어 어느 귀족의 경우 장례식을 하는 동안에 몰래 침입해서 데드 마스크를 털어가는 사례도 있었고 람세스 3세의 왕비 이시스의 경우에는 무덤 노동자들이 몰래 뒤에 굴을 파고 털어버리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값비싼 부장품들이 시중에 공공연히 유통되면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이집트 경제는 더욱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사실 이런 심각한 사실은 그 당시에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20왕조 말기의 파라오 람세스 9세 때 대대적으로 조사를 했다. 11왕조부터 20왕조의 무덤 16개를 조사했으나, 그 중에 18왕조 2번째 파라오 아멘호테프 1세의 무덤과 11왕조 인테프 2세의 무덤을 제외하면 모두 털렸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실 당시에는 사제들과 귀족, 도굴꾼이 한 패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재정이 부족해진 21왕조 파라오들은 선왕조의 무덤을 털어 재정을 보충하는 등 막장이었다. 예를 들면 21왕조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는 람세스 9세의 반지와 19왕조 파라오 메르넵타의 관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전 왕조의 무덤을 털어 재정은 물론 부장품으로 재활용했다는 좋은 증거이자 일례다.

이 당시 도굴꾼을 처벌한 기록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에서는 17왕조의 파라오 소베켐사프 2세와 그의 아내 누브카스 왕비의 피라미드 무덤[1]을 약탈한 사례가 있다. 도굴꾼들은 이 무덤을 약탈하여 부장품들을 싹쓸이하고 관에 불을 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에 불을 지른 이유는 미라를 불태워서 저주를 막고 무엇보다 관에 붙은 금박을 떼어내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도굴꾼들은 미라가 부활할까봐 겁을 먹고 미라를 불태워버리거나 훼손하기도 했고 땅 속에 파묻거나 심지어 기념품(!)으로 챙겨가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1왕조의 파라오 세누스레트 3세의 피라미드의 경우에는 도굴꾼들이 무덤을 털고 무덤 벽에 파라오를 조롱하는 그림과 낙서까지 하고 갔을 정도다.

그리고 그 중 하나 비교적 멀쩡히 살아남은 것이 바로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드가 발견한 18왕조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도굴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 무덤의 봉인을 보면 2번 정도 도굴당한 흔적이 있다. 그러나 가볍고도 가치가 높은 귀금속류와 귀한 연고류가 주로 분실되었고 관리들이 조치를 잘해서인지 그 후에는 도굴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20왕조 파라오 람세스 6세의 무덤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그의 무덤 위에 오두막을 만들고 시간과 세월이 흐르면서 모래가 쌓히고 잊혀지면서 20세기 초에 와서야 발견되었다. 하워드 카터는 여러 증거들을 통해 이 곳을 발굴했는데 신의 한 수였던 셈이다. 자세한 것은 투탕카멘의 저주 참조.

사실 이집트 파라오 중에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파라오는 현재 21왕조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 뿐이다. 이 무덤은 투탕카멘 무덤 발굴에 맞먹을 엄청난 고고학적 성과이나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무덤이 아니라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 있는 타니스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고 나일강 삼각주라는 지형의 특성상 부장품들이 대부분 박살나고 훼손되었으며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마저 환경 때문에 훼손되어 해골만 남은 상태였다. 그나마 남은 것이 위에도 있는 원래 메르넵타의 관이었던 금속제 관이나 데드 마스크정도인 수준이다. 따라서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하고 묻혔다. 물론 현재까지 나머지 파라오들은 죄다 도굴당하거나 무덤 자체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4. 예상 밖의 생존 사례

참고로 피라미드의 전성기였던 이집트 고왕국 시대도 후기에 들어오면 피라미드 중 도굴꾼에게 안털린 피라미드가 없었다. 따라서 파라오의 주요 임무중 하나가 털린 피라미드를 수선하고 미라를 수습하며 재봉인하는 것일 정도였다. 게다가 이 임무도 나름 돈과 수고가 많이 들어가서 나중에는 임무를 포기한 후, 아직 멀쩡하게 남은 미라를 한 곳에 모아서 땅 속에 석실을 세우고 그냥 공동묘지처럼 한 곳에 묻어버렸다. 사제들이 이 일을 맡았는데 남은 부장품들은 대부분 거둬들여 재정으로 썼다. 이들은 왕가의 계곡과 인근 무덤들을 다니며 남아 있던 파라오, 왕비, 왕족, 기타 인물들의 미라를 거둬들이고 다시 염습한 다음 소량의 부장품과 함께 2곳의 은신 무덤에 재매장했다.

이런 식으로 공동묘지화된 곳은 2개가 발견되었는데 앞서 말했듯이 부장품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묻혔으므로 누구도 도굴할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세월이 지나면서 진짜로 잊혀지는 바람에 근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단 두 곳중 전자는 왕가의 계곡 근처에 있던 깊은 암굴 무덤(DB320)으로 원래는 21왕조때의 대사제였던 피네젬 2세와 그와 가까운 가족들의 무덤이었다. 후자는 이미 도굴당한 20왕조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KV35)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공동묘지로 쓸 무덤도 재활용한 셈이다.

그리고 후자는 1896년 3월 프랑스의 빅토르 로레가 발견했다. 이 무덤에서는 무덤 주인 아멘호테프 2세, 아멘호테프 3세를 비롯해 15구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물론 미라들이 대부분 이미 도굴당한 무덤에서 수습된 미라라서 상태는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투탕카멘의 어머니의 미라로 확인된 여자 미라[2]는 입이 찢어지고 팔 하나가 없어지고 배는 갈라져 있다. 이것은 도굴꾼들이 보물을 찾으려고 마구잡이로 유린한 흔적이다.

그러나 귀중품 따위는 없고, 부장품도 거의 없이 묻혔기 때문에 대량의 미라가 장기간 보존될 수 있었던 좋은 방법이었으며, 그래서 의외로 많은 수의 미라가 현재도 박물관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5. 결과

결국 왕가의 무덤도 도굴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털린 무덤들의 미라를 한곳에 모아놓은 공동묘지는 근대까지 무사했다는 것을 볼 때 무덤을 엄청난 비용과 수고를 들여서 비밀스럽게 마련하느니, 차라리 반짝거리는 귀금속과 보석등의 부장품을 일체 무덤에 넣지 않는 편이 더 좋았다는 것이다. 물론 지체높으신 분들이 쉽사리 그들이 사용하던 고급 명품을 다 버리고 미라만 달랑 혼자 어두운 석실에 묻히기는 싫었으므로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결국 왕가의 계곡도 안전하지 않은 것을 느낀 2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람세스 11세는 기껏 왕가의 계곡에 무덤을 만들었으나, 정작 그는 이곳에 묻히지 않았다. 이렇게 람세스 11세가 만들고 버린 무덤은 KV4 무덤이며, 그의 무덤은 이 후 파라오의 미라를 새로 염습하고 남은 부장품을 국가 재정으로 활용하기 위한 작업장으로 활용되고 중세에는 은자들의 은거지로 활용되었다. 이것을 보면 그 무덤에 묻히지 않는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는 공식적으로 왕가의 계곡에 묻힌 파라오는 없으며 일부 무덤에 침입 매장하는 사례는 종종 있었다. 여기서 침입 매장이란 남의 무덤을 자기 무덤으로 쓰는 것을 말한다.

6. 매체에서의 등장

이 왕가의 계곡을 소재로 쓰여진 《빛의 돌》이라는 소설이 있다.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자크의 작품. 왕가의 계곡에서 무덤을 파고, 안을 장식하고, 각종 부장품들을 제작하는 장인들의 마을 '진리의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의 창작소설이라고는 하나 실제 발견된 문헌에 어느정도 근거하고 있으며 등장인물들도 그 문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과 특징을 가져다 쓴 것. 당시 이집트의 생활상이나 과학, 의학 등의 높은 지식수준을 엿볼 수 있다. 크리스티앙 자크는 소르본 대학에서 이집트학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로, 베스트셀러 《람세스》를 시작으로 《투탕카멘》《검은 파라오》《오시리스의 신비》같은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만화 유희왕에서는 아무래도 주인공파라오이기 때문에 등장할 수 밖에 없다. 1960년대에 무토 스고로쿠가 궁극의 게임을 찾아 발을 들인 곳으로써 처음 등장한다. 이후에는 주인공 진영과 도적왕 바쿠라 진영의 격전지로도 나오며, 마지막에는 아템이 명계로 돌아가느냐 마냐가 걸린 결전이자 유우기아템이 진정한 최강을 가리기 위한 의식인 '싸움의 의식'을 치룬 곳으로 나온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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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7왕조는 중왕조와 신왕조 사이의 혼란기였던 제2중간기였다. 고왕조와 중왕조 사이에도 제1중간기라는 현시창 시기가 있었으나, 이 때 파라오의 권력이 추락하고 많은 무덤들이 도굴되었다. 제2중간기는 이민족이었던 힉소스의 침입을 받아 남북 대결을 하던 시점이었는데 당시 무덤은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무덤이 아니었다. 암굴을 만들거나 땅에 매장해서 위에 작은 피라미드를 세워 표시하는 무덤이었다.
  • [2]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멘호테프 3세와 티이의 딸이자 아케나텐의 여동생으로 투탕카멘의 어머니라는 것이 DNA 검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 [3] 정확히는 왕가의 계곡에 있는 '운명의 석판'이 잠든 지하신전에서 치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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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1-14 22: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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