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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last modified: 2015-04-10 11:31:14 by Contributors

Contents

1. 고려 태조 왕건
1.1. 성장기
1.2. 고려 건국
1.3. 견훤과의 대결
1.4. 후삼국 통일과 말년
1.5. 최후
1.6. 능력
1.7. 정치 스타일
1.8. 평가
1.9. 왕건 상
1.10. 오늘날의 왕건
2. 오대십국시대 전촉의 건국자
3. 王鍵
4. 기타

1. 고려 태조 왕건

고려의 역대 국왕
태봉 1대 궁예 초대 태조 왕건 2대 혜종 왕무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고려 태조 어진. 이길범 화백의 작품이다.
이 외에 왕건과 인연 깊은 충남 논산 개태사가 별도로 그려 봉안한 어진이 있다.
묘호 태조(太祖)
시호 응운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
(應運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
연호 천수(天授)
왕(王)
건(建)
약천(若天)
배우자 신혜왕후(神惠王后), 장화왕후(莊和王后),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신정왕후(神靜王后), 신성왕후(神成王后), 정덕왕후(貞德王后)
아버지 왕륭(王隆)
어머니 숙왕후(威肅王后)
생몰년도 음력 877년 1월 4일 ~ 943년 5월 29일
양력 877년 1월 31일 ~ 943년 7월 4일(66세)
재위기간 음력 918년 6월 15일 ~ 943년 5월 29일
양력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26년)

고려태조.

1.1. 성장기

왕건의 족보에 대해서는 의종대에 김관의가 쓴 편년통록에 따르면, 그의 조상이 고구려 유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돈이 많았다. 6대조 강충은 집에 천만금을 쌓아놓았을 정도였다. 왕건의 할아버지인 제건은 상선을 타고 서해를 항해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것으로 보인다. 즉 왕건의 선대는 고구려 유민으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지방세력가였다.

왕건의 아버지는 송악 지방의 호족이었던 왕륭이며 후에 후고구려의 궁예왕이 세력을 키우며 명성을 떨칠적에 아버지와 함께 그의 휘하로 들어가 젊은 나이일 때부터 공을 세우며 벼슬도 계속 올라갔다. 아버지인 왕륭이 송악의 큰 세력을 지닌 호족인 점도 작용했겠지만 왕건의 능력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왕륭의 송악 세력은 패서 일대의 다른 호족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어느 틈엔가 왕건이 호족 세력의 수장격이 되었다는 것은 왕륭과 왕건의 능력과 지략을 보여주는 증거다.

특히, 후백제와 싸울 때에 견훤이 방심한 틈을 타서 해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도읍 바로 아래에 있는 해안가의 나주 지역을 점령했던 일은 최고의 공적이었다. 훗날 오랜 세월인 지난 후에 견훤이 탈환하기는 하였지만 나주를 통하여 백제의 도읍을 바로 등 뒤에서 공격할 수 있었으므로 오랜 세월동안 후고구려와 고려가 백제를 압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왕건이 무역을 통해 세력을 기른 호족 집안 출신이기에 본래 해전에 능한 반면, 견훤은 제해권의 중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대처를 소홀히 했던 데에 있었다. 이후에도 후백제와의 수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정에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왕에 다음가는 지위인 시중 벼슬을 받았다. 그야말로 엄친아, 먼치킨급...

1.2. 고려 건국

후에 궁예가 중앙집권화를 위해 세력있는 호족들을 숙청하던 중에 어느날 뜬금없이 관심법으로 왕건의 마음을 꿰뚫어 역적모의를 하고 있음을 알아냈다며 왕건을 압박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궁예의 옆에 있던 최응이 붓이 바닥에 떨어져 줍는 척 하면서 왕건에게 복종할 것을 넌지시 일러주었다. 이에 왕건은 스스로 역적모의를 인정하고 죄를 빌자 궁예는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란 칭찬과 함께 처단한 역적들로부터 몰수한 금은보화의 일부를 하사하면서 용서하였다.

이러한 궁예의 행동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다. 대체적으로 궁예가 호족들을 압박하기 위해 당시 잘나가던 왕건을 일부러 걸고 넘어져 무언의 경고를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궁예는 왕권 강화를 위해 심지어는 패서 호족들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던 자신의 부인인 강비와 그 소생 왕자들까지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강비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패서 호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는 해석도 있긴 하다. 왕건도 (내 위세에 눌려서) 역심을 실토했으니 너희들이라고 무사할것 같으냐?라는 것. 궁예가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시중 벼슬에 있는 인물을 증거도 없이 역적으로 몰리도 없고, 게다가 역적모의를 시인했음에도 정직하다는 칭찬과 함께 금은보화를 하사했다는 점에서 왕건의 마음을 떠보기 위한 궁예의 수작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저 다음의 궁예와 왕건의 대화는, 요약하자면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니가 주장한 해군 증강계획 말인데, 니가 맡아서 해라" 쯤 된다. 사실상 새로이 증강된 해군은 왕건의 지휘하에 들어가게 되므로 궁예는 그 전에 미리 왕건의 기를 꺾어놓으려고 했던 것.

그러나 이 일로 왕건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일단 그 자신이 시중 벼슬에 있으면서 호족들 가운데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의 세력가였으므로 궁예의 숙청에 안전할 수 있을지 두려움을 품게 된것이다. 그러던 상황에 고려의 4대 개국공신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찾아와 지금의 왕은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니 시중이 왕위에 올라야 합니다라고 간청하였으나 왕건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 부인인 신혜왕후 유씨가 갑옷을 내와 직접 입혀주면서 무언의 설득을 시도하였고 마침내 왕건도 결단을 내려 충성을 맹세한 4명의 무장들과 함께 궐기하였으며 궁예를 제거하고 918년 6월 15일 고려를 건국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혹을 약간 넘긴 42세였다. 이듬해 왕건은 도읍을 철원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옮겼다.

1.3. 견훤과의 대결

개성의 왕건 능인 현릉에 있는 왕건의 초상화.
문명 4에서의 왕건 모습은 여기서 따온 듯하다.

고려의 왕이 된 왕건은 초기에 큰 난관에 부딪혔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사실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이들을 잘 구슬려 나라를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던 왕건은 후백제견훤과 화친을 맺고 충돌은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의 요충지였던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자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후백제의 군대와 조물성에서 충돌한다. 그러나 양측의 힘이 비등하여 승부를 내기가 힘들어지자 서로간에 인질을 교환하여 다시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고려에 인질로 가있던 견훤의 조카가 갑작스레 병사하자 견훤은 왕건을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고려와 후백제는 다시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황은 왕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일단 궁예를 따르던 몇몇 성주들과 호족들이 고려에 귀순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후백제에 붙어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특히 삼년산성에서 왕건이 패배한 결정적인 원인은 호족들이 후백제로 투항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온화했던 성품의 왕건도 이 때만은 법을 굉장히 엄격하게 시행했다. 태조 왕건에서는 후백제로 투항한 호족과 장수들의 가족을 모조리 철퇴로 때려죽이고 시신은 까마귀 밥이 되게 하였다. 칼 대신 철퇴로 죽인 이유는 시신이 온전하게 보존되지 않는 처형법이기 때문... 정사에서도 왕건이 이렇게 혹독하게 법을 시행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적었다. 또 후백제왕 견훤 역시 수많은 전투를 통해 다져진 노련한 전술과 만만치 않은 실력으로 왕건을 몰아 붙였다.

이때에 왕건은 견훤에게 수차례 패하며 수세에 몰렸는데 특히 공산 전투에서는 1만명, 연구에 따라 2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개국 공신이었던 신숭겸마저 전사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왕건은 신숭겸의 도움으로 황급히 도망가면서 대구의 많은 지역의 이름을 붙여줬다. 이 도주 루트를 따라 대구시가 신숭겸 장군 유적지에서 안심역에 이르는 공산 왕건 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본래 공산 전투 당시에 왕건은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서라벌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를 구원한다는 명목 하에 기병 부대를 이끌고 급히 서라벌로 향하였다. 이때 견훤은 왕건의 군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즉시 군사를 물렸는데 왕건은 견훤의 군사자 숫적으로 열세에 놓여 겁을 먹고 도주한 것으로 착각하고는 여세를 몰아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는 견훤의 계략으로 급히 추격해오던 왕건의 군대를 매복술로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던 것이다.

게다가 견훤이 여세를 몰아 부하 장수 상귀로 하여금 개경 앞바다를 공격해 왔을 때에는 처음으로 해전에서 패배하는 수모를 겪었다. 왕건이 비록 바닷가에서 태어나 물에 익어 해전에 능했다고는 하나 견훤도 나주를 빼앗긴 후에 철지부심하여 열심히 해군력을 길러 왔던 것이었다. 연이은 패배로 인하여 왕건은 일생 일대의 위기에 부딪혔다.

이후에 왕건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후백제와 국운을 건 싸움을 수차례 벌였다. 양측의 세력이 비슷하여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던 중,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8천의 적군을 무찌르고 견훤의 여러 장수와 책사들을 사로잡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의 무대가 되었던 안동 지역의 세 호족 가문이 왕건을 지원해 주었던 것이 승리의 요인이었는데, 왕건 특유의 넓은 포용력과 친신라 정책이 토착 세력들의 호감을 끌었던 듯하다. 승리 후에 왕건은 안동의 호족들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이때 왕건에게 벼슬을 받았던 김선평, 권행, 장정필이 안동 김씨, 권씨, 장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이들을 '안동 삼태사'라 부른다. 반면에 견훤은 서라벌을 공격하고 신라왕을 자결케 한 사건 때문에 신라인들과 여러 호족들의 반감을 샀다. 견훤은 이 기점에서 크게 기가 꺾여 버렸는데 고창 전투로 입은 피해를 제대로 수습하기도 전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 나라가 분열되면서 후백제는 서서히 세력을 잃어갔다.

결국 후계자 문제에 휘말려 아들이었던 신검에게 왕위를 강탈당하고 유폐당하였던 견훤고려에 귀순하였는데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대인배의 면모를 드러내어 민심을 얻고 이를 후백제와의 결전에서도 잘 이용할 수 있음을 간파하여 한때는 원수였던 견훤을 상보 어르신이라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였다고 전해진다. 상보란 한자로 尙父로 쓰며, 이 때는 아비'부'가 아닌 어르신'보'로 새겨읽으므로 상부가 아닌 상보가 정확하다. 왕이 손위의 권신에게 사여하는 존칭으로써, "그대는 우리 아버지(즉 선왕)보다 못하지 않음"정도의 뉘앙스. 그런데 왕건과 견훤은 10살 차이 이렇게 견훤마저도 왕건에게 큰 대접을 받자 견훤은 감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왕건이 견훤마저도 거두어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후에 신라도 고려에 투항해왔고, 발해가 멸망한 후에 태자가 유민들을 이끌고 망명하자 이 또한 받아들이니, 이 시점에서 고려의 국력은 이미 후백제를 훨씬 압도하였다.

1.4. 후삼국 통일과 말년

왕씨족보에 그려진 왕건
이때에 신검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몇개월만에 간신히 내란을 평정하여 왕위에 올라 왕건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왕건이 발해계 잔당과 북방의 이민족, 그리고 견훤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 일대의 세력을 아우른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자 후백제는 망했어요...마침내 후삼국시대를 50년만에 종결시켜 삼국통일을 이루는 대업을 이루었다.

후삼국의 통일 사업을 완수한 후에는 국가의 체계와 기틀을 잡는 한편 장남이었던 왕무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정치적 공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왕무는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 전, 궁예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던 시기에 얻은 아내로부터 얻은 아들이었으나 그 외가쪽 가문의 세력이 무척 한미하였기 때문에 다른 쟁쟁한 호족들로 부터 얻은 아들들이 왕위를 탐낼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왕건이 이렇게 장남을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한 것은 장남을 무시하였다가 결국 나라를 망국의 지경에 이르게 했던 일생의 라이벌 견훤의 선례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하여간, 이 덕분에 본래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하였던 장남 왕무가 훗날에 왕건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왕건은 최후에 자신이 무척 아꼈던 충복이었던 강직한 재상 박술희왕규를 불러들여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맡기고 그를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고려의 왕이라면 국가를 다스리는데 참고해야 할 훈요 10조를 남기고 사망하였다.

1.5. 최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왕건의 붕어를 매우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재위 26년째인 서기 943년 5월 정유일, 재신(宰臣) 염상(廉相)과 왕규(王規), 박수문(朴守文) 등이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한문제(漢文帝)의 유조(遺詔)에, '대개 생명이 있는 천하 만물은 죽지 않는 것이 없다. 죽음은 천지의 이치며 만물의 자연이니 어찌 심히 슬퍼할 것이 있으랴.' 하였으니, 전고(前古)의 명철한 군주는 마음가짐이 이와 같았다. 내가 병에 걸린 지 이미 20일이 지나 죽음을 제집으로 돌아가듯이 여기고 있으니, 무슨 근심이 있으랴. 한문제의 말이 곧 나의 뜻이다. 오랫동안 처리하지 못한, 도성 안팎의 중요한 일은 경들이 태자 무(武)와 함께 재결한 후에 아뢰라." 하였다.

며칠 후인 병오일. 이 날 죽기 직전에 왕건은 신덕전에서 학사 김악에게 유조를 적게 했다. 유조에는 내외의 모든 관료들은 다 태자의 명령을 따르도록 할 것이며, 장례와 무덤의 제도는 한나라 문제위나라 문제의 고사에 의거하여 검소하게 지내라고 지시했다. 이 유조를 다 불러 주고는 갑자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왕건이 세상을 뜬 줄 알고 큰 소리로 통곡을 했는데 말이 없던 왕건이 갑자기 훼이크 신하들에게 "이게 무슨 소리냐?"라고 물었다. 그래도 신하들은 오열을 멈추지 않고 "성상께서는 백성의 부모이신데 오늘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려 하시니 신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혼란스런 한반도를 통일하고 오백년 고려의 왕업을 다진 이 영웅은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웃더니 잠시 후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

"뜬구름처럼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

완전 쿨함

1.6. 능력

당대에 왕건 자신의 군사적 능력도 결코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패서 호족이었던 만큼 수군을 잘 다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후백제의 후방인 나주 지방을 상륙전으로 빼앗은 것에서 잘 드러난다. 나주를 빼앗긴 견훤은 그야말로 언제 뒤쪽을 가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수십년 동안 시달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견훤보다는 한 수 아래였던 듯. 공산 전투에서는 견훤을 무리하게 추격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탈탈 털려서 신숭겸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죽을 뻔 했고, 장기인 해전에서도 비록 나중에 되찾았다고는 하나 나주를 빼앗기는 등, 나중에는 견훤이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왕건의 진정한 장점은 궁극의 화친 능력과 유화력. 견훤의 아버지아자개를 회유하여 상주 지방을 영향권에 들게 하고, 견훤이 세운 신라의 왕인 경순왕도 아군으로 끌어들여 신라를 자신의 편으로 붙게 했다. 또한 한창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역전시킨 고창 전투에서의 승리도 토착 호족 세력의 마음을 빼앗은 덕분에 가능했었다. 놀라운 수준의 화친 능력으로 호족 세력을 계속 끌어모으니 결국 견훤은 궁지에 몰렸고, 마침내는 최대의 적이었던 견훤마저 아군으로 삼았다(...). 패왕색의 패기 물량 앞에 장사 없지

이런 결과는 물론 정략이나 용인술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 토대가 되는 왕건 자신의 인화력이 대단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족들, 심지어는 가족들 간에도 화애롭지 못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견훤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항우유방과 같은 모습이다.

1.7. 정치 스타일

정책적으로 정략결혼을 많이 하여 왕비가 수십명이었다고 한다. 비가 6명에 빈이 23명. 이는 호족을 회유하기 위해서 각종 회유책으로 정략 결혼과 사성 정책(공이 있으면 성을 내림)에다가 땅을 지급(역분전)하고 지방마다 일부로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지만 왕건은 단순히 호족빠가 아니였다. 강경책으로 인 제도를 썼다. 그 기초는 상수리 제도로 호족의 자식들은 개경에 머물게 했으며 사심관 제도로 지방에 행정, 치안의 특권을 줬지만 못하면 대 책임을 물게 했다. 이 기인 제도 때문에 자살하는 호족 자식들도 있었다.

숭불정책 불교빠이였으며 신라 하대 지방호족 출신이기 때문에 불교를 더 선호했었다(사실 조선 이전엔 유교보다 불교가 더 선호되었다. 조선시대에도 불교는 개인신앙으로써 큰 역할을 차지했다.). 훈요 10조에서 팔관회, 연등회를 거르지 말라고 할 정도였으니 엄청난 불교빠였지만 후에 이게 백성들을 힘들게 해서 성종이 최승로 의 시무28조를 받아들여 잠시 폐지시키기도 했다.

덤으로 훈요 10조에 '차령산맥 이남 공주강(금강) 바깥은 배역의 땅이니 인재를 등용치 말라'는 소리를 남겼는데 이 건 지금의 전라도를 뜻하며 지역드립을 유발시키는 곳에 자주 쓰이고 있지만 이 것은 2대 왕 혜종이 전남 나주 출신 호족의 외손자라는 것과 신숭겸, 최지몽 같은 측근들을 간과한 것이다. 태조 왕건에 대한 대중역사서를 썼던 김갑동 교수는 흔히 훈요십조의 이 내용이 전라도 지역을 가리키는 것을 해석 문제로 보고 친궁예 세력이 발호했던 청주지역이나 후백제 세력의 마지막 저항이 있던 충청도~전주 일부라고 보고 있다. 훈요십조의 그 내용은 순전히 왕건 자신의 정치적 입지 문제로 후손들에게 남긴 것일 뿐. 오늘날만큼 쓸데없이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은 일도 받을 일도 없는 것이다.

1.8. 평가

"태조는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힘을 다하였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대접하여 멀든 가깝든 모두가 그를 따랐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은 천성에서 나왔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견훤이 부자간에 서로 해치자 토벌하여 취하였고, 신라는 군신이 와서 의탁하자 예를 갖추어 그들을 대우하였다. 강한 거란이 동맹국을 침략해 멸망시키자 국교를 단절하였고, 약한 발해가 나라를 잃고 돌아갈 데가 없자 이를 위무하여 받아들였다. 자주 서경에 행차한 것은 근본이 되는 땅으로 만들려는 까닭이었으며, 친히 북방의 변경을 순수한 것은 사나운 풍속을 합쳐 교화하려 함이었다. 왕업을 처음 창건하여 모든 것을 고쳐 시작하였으니 비록 예악은 미처 제정하지 못했으나, 그 큰 규모와 원대한 계책이며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은 진실로 이미 5백 년의 국맥을 배양하였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1권 태조 신성대왕 편 중에서

"어진 사람을 좋아하고 착한 일 하기를 좋아했다. 자기 생각을 미루고 남의 생각을 존중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를 지켰다. 모두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민간에서 자라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었기에 사람들의 참모습과 거짓 모습을 모두 알아보았고, 일의 성패도 내다보았다. …(중략)… 재주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았고, 아랫사람이 가진 힘을 모두 쏟을 수 있게 도왔으며, 어진 사람을 취할 때와 간사한 사람을 쫓을 때에 주저함이 없었다." -승로의 시무 28조 중에서

왕건은 이념과 시대에 관계없이 평가가 매우 후하다.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유민을 포용하여 이후 남북한 분단까지 천년간 이어지는 단일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역사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고려-조선 교체기처럼 외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고대를 청산하고 중세를 열었다는 점도 높이 평가받는다. 민족 포용책을 썼고, 적국에 대해 매우 관대한 면도 그렇고, 무신정권 시절 이런 기치를 내세운 반란세력이 있긴 했지만 왕건 이후엔 지역에 기반한 신라나 백제의 부흥운동 같은 게 대부분 사라졌다는 점에서 단일한 민족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고 남북국시대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왕건을 실질적인 민족의 통일자로 본다고 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결혼동맹으로 호족들을 안정시켰다고는 하지만 확인된 부인만 29명으로, 이쯤 되면 결혼동맹의 의미가 없다. 더군다나 꼭 필요한 가문과 결혼한 것도 아니다. 혜종의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의 부친 오다련은 나주 호족이긴 했으되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만 나주인 목포에 있던 인물이었고 고려사에서는 대놓고 오씨를 원나잇 상대로 하려 했으나 오씨가 임신하려고 노력해 성공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결론은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으나 그가 건드렸다가 덜컥 임신한 사람들을 많이 들였다는게 된다. 서전원부인의 경우 그나마도 가문도 전해지지 않을 뿐더러 부친이 관직을 가지지도 않았다. 결혼동맹이 이렇게 막장이 되자 그 가치의 인플레를 막기 위해서 왕가와 결혼할 수 있는 가문을 정하기도 했고 근친혼이 성행하게 된다. 더불어 왕족들의 성씨를 정하는 제도도 설정하게 되는데 이것도 걸작이다. 물론 안좋은 쪽으로. 왕씨와 결혼한 여자가 아들을 낳으면 왕씨 성을 따르지만 딸을 낳으면 외가의 성을 따른다. 이는 그 딸이 딸을 낳아도 딸의 성씨를 따르게 되며 이리되면 그 가문과 지속적으로 혼인동맹을 맺을 수 있고 지위의 인플레도 막을 수 있긴 하다. 그런데 이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뿐만 아니라 후계 구도를 이상하고 엉성하게 잡아서 아들 혜종의 위치를 위태롭게 했다. 후견인이라고 붙여준 것이 박술희인데 박술희는 왕건이 아끼던 인물이긴 했으되 힘이 없었고 그렇다고 모계쪽이 힘있는 호족도 아니었다. 상기했듯 오다련은 진짜 나주 호족도 아니고 세력을 가질만큼 강한 인물도 못됐다. 그렇다면 사돈가문을 힘있는 가문을 들였냐 하면 그도 아니었다. 이뭐병. 당시가 건국초이고 호족 세력이 강한만큼 황주 및 개경세력을 지지기반으로 해주거나 그도 아니라면 경주 세력과 맺어주어 개경세력을 견제하도록 해줬어야 했다. 하지만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딸과 결혼한 것은 정종이었으니... 그러니 고려 초기의 정치적 혼란은 상당부분 이 사람 때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1.9. 왕건 상





1993년 북한 개성 태조왕건의 능인 현릉의 봉분 외곽에서 출토된 왕건의 금동상. 머리엔 통천관(通天冠)을 쓰고있으며 몸은 나체다. 연구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인물상은 나체로 만든 뒤 그 위에 옷을 입혔는데 현재 옷은 사라졌다. 위의 상에는 성기가 매우 작게 표현된 부분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마음장상'이라고 하며 성인으로서 성욕을 초탈한 모습을 표현한 불교적 표현이다. 소물 이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북한 국보 전시회에서는 중요 부분을 천으로 가려놓았다. 나체 상에 옷을 입히는 형태의 상은 토속신앙의 조각상의 양식이라고 한다#

1.10. 오늘날의 왕건


그를 다룬 드라마 작품으로는 KBS태조 왕건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정작 왕건보다는 궁예견훤이 주인공 같은 이상한 드라마다.

최수종이 열연하였다. 방송전에는 사극의 주인공으로는 맞지 않을 거라게 세간의 평가였다. 당시 최수종의 이미지는 눈크고 겁많은 부잣집 도련님 수준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실제 역사상 왕건도 실전으로 잔뼈가 굵은 장군보다는 온화한 이미지의 부잣집 도련님에 가까웠으니 오히려 이쪽이 고증에 맞다는 주장도 방영 당시에 있었다. 어쨌건 방송이 나가면서 우려와는 달리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다만 캐릭터 자체가 무장형 군주 보다는 무난한 성장형 군주여서 그런지 궁예와 견훤 역으로 열연한 김영철과 서인석의 포스에는 조금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견훤, 궁예 같은 강렬한 인상은 없어도 그야말로 '주인공다운' 인덕을 갖춘 선량하고 결백한 영웅이라는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묘사해낸 편이다. 오히려 근래 몇몇 사극이 자주 일으키는 문제처럼 견훤과 궁예가 그저 막무가내로 악마화 되거나 미화가 지나쳐 페이크 주인공 화가 되는 문제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왕건의 결백하고 인덕을 갖춘 '영웅 다움'이 대단히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 뭐 다른말로 하면 개성이 강한 궁예나 견훤에 비해 심심한 인물로 그려졌다는 얘기도 되지만.

그러나 의외로 사서대로 자신을 배신하고 후백제로 투항한 호족의 가족을 철퇴로 죽이라고 명령하는 냉혈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http://www.youtube.com/watch?v=c7v2CPta0eE#t=401
어찌 되었든 간에 상당한 주인공 포스를 풍긴 최수종은 이 후에도 해신, 대조영 등을 비롯한 각종 사극물에서 주인공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재밋는 점은 이 드라마가 왕건을 최초로 다룬 작품이긴 하지만 왕건이 최초로 등장한 사극은 아니다.
최초로 등장한 사극은 다름 아닌 용의 눈물.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네가 내 후손들을 죽였으니 너 역시 벌을 받으리라!"라며 칼을 들고 위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회성 등장이지만 어쨌든 등장은 등장이니.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그를 위협한 이야기는 야사에 전하는 이야기다. 이 때문에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할 결심을 세웠다고.
사실 왕건 입장에서는 이성계에게 극도로 빡칠 만 한게, 왕건 역시 쿠테타로 나라를 뒤엎고 자기가 왕이 된 뒤 두 나라를 항복시켜 통일을 이루기는 했지만 최소한 이성계처럼 자기가 무너뜨린 나라의 왕족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지는 않았다. 왕건이 직접 죽였다고 확실히 기록된 전 왕족은 후백제의 양검, 용검 정도인데 양검과 용검은 불효자+역적이라 사실 죽어 마땅한 짓을 한 인간들이다. 신검또한 결국 왕건에게 죽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 인간도 불효자+역적 괴수 입장이라는 걸 감안하면 역시나 죽는 게 당연하고, 이후 후백제의 견씨나 신라의 김씨,박씨,석씨등을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기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으니.... 고려라는 나라 자체가 지방세력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왕건이 왕좌에 앉아 있다해도 어떤 신하를 잡아 압박할 상황이 아니긴 했다. 왕씨 학살은 이후 태종 이방원이 이건 "그거 아버지 뜻 아님ㅇㅇ" 발언을 시작으로 차츰 완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1970년에도 왕건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태조왕건>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왕건이 궁예의 폭정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궐기하여 고려를 세우는 과정을 영화화한 듯.



중국인이 분명하다. 위의 어진과 뭐가 닮았다는거지?
(문명 4에 등장하는 왕건)
이게 뭐야 몰라 무서워 화내면 더 무섭다#

이상하게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 계속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한국 팬들은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을 지도자로 하게 해달라고 여러번 건의했으나... 3이나 4 모두 왕건이 한국의 지도자.하지만 5에서는 세종대왕이 나왔지 게다가 3에서는 대머리로 등장한다. # 베타버전이 더 무섭다 # 시대가 변하면서 더 안습해진다 친일파 스타일 그 이유에 대해서는 고려청자와 고려 인삼만이 알려진 탓이 아니냐는 분석과 시드 마이어가 유일하게 본 드라마가 태조 왕건이라서가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태조왕건을 봤는데 어떻게 최수종이 나오지 이런 양반이 나오냐... 사실 Korea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고려왕조의 창시자이기도 하고, 조선왕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통일국가의 역사를 잡은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왕건이 지도자가 되어도 이상할 것은 없긴 하지만. 대신 문명 5에서는 세종대왕이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문명 4에서의 지도자 특성은 재정적, 방어적. 어정쩡한 특성이라고 하는 유저도 있는 듯한데 아무래도 '방어적' 특성 때문에 그런 듯하다. 하지만 재정적 특성이 꽤 괜찮은 특성이고 특성 잘 이용해서 굴리면 꽤 할만하다. 자세한 건 문명 4 워로드 항목의 첫 카테고리 참조. 물론 후속작의 세종대왕의 포스에 비하면 후달리지만 절대로 '구린' 지도자는 아니다. 애당초 문명 4에서는 '구린' 지도자는 없다. 해당 항목에도 나온 얘기지만 확장팩에서 '공격적, 방어적'이라는 괴이한 조합으로 변경된 일본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저 왕건의 모습을 보고 아무리 봐도 중국인같이 생긴 왕건의 얼굴을 보자 "이게 뭐야! 나의 왕건은 이렇지 않아!", "아놔 지금 한국인 무시하나요?" 등의 반응을 보이는 네티즌들이 대부분인데, 사실 저 얼굴이 어떤 의미에서는 고증이 잘 된 얼굴이다. 왕건의 얼굴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용모는 용안(龍顔)과 일각(日角)이며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넓었다"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넓었다는 기록을 보면 상당히 후덕한 풍채의 인물이었던 듯. 아무래도 태조 왕건으로만 왕건을 접해서 저런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2000년에 출시된 전략 시물레이션 게임인 천년의 신화에서는 고려측의 영웅으로 등장한다. 기마 영웅으로 칼을 휘둘러 공격하는데 공속이 느린 편이지만 임진록2곽재우 분신술과 비슷한 보호신장 기술을 가지고 있다. 게임 속 얼굴과 캐릭터 조형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묘사된 왕건의 모습을 따 왔다.

KDX-2 충무공 이순신급의 4번함인 DDH 978은 왕건의 이름을 따서 왕건함으로 명명되었다. 왕건이 장수로서 보여준 먼치킨급 활약과 혼란스러운 후삼국 시기를 평정한 제왕으로서의 면모를 높이 평가받아 이렇게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2. 오대십국시대 전촉의 건국자

전촉의 역대 황제
1대 고조 왕건 2대 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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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능인 영릉(永陵)
묘호 고조(高祖)
시호 신무성문효덕명혜황제(神武聖文孝德明惠皇帝)
연호 무성(武成, 908년 ~ 910년)
영평(永平, 911년 ~ 915년)
통정(通正, 916년)
천한(天漢, 917년)
광대(光大, 918년)
왕(王)
건(建)
광도(光圖)
생몰기간 847년 2월 26일 ~ 918년 7월 11일
재위기간 907년 ~ 918년 7월 11일

847 ~ 918, 재위 907 ~ 918)
자는 광도(光圖).

소의 난 평정에 가담하여 공적을 세웠다. 그 뒤 당나라의 실력자였던 환관 전령자(田令孜)의 양자를 해, 희종(僖宗)이 황소에 쫓겨 (蜀)으로 피신했을 때 도와 벽주자사(璧州刺史)를 했다. 이후 점차 권모 술수로 촉 전체와 한중을 장악하였고, 903년 당나라로부터 촉왕의 지위를 하사받았으며, 이후 907년 후량이 당나라를 멸망시키자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이후에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심사단(尋事團)이라 불리는 비밀경찰을 만들어 불평분자들을 압박하고 살해했다.

이 때문에 붙은 별명이 왕팔(王八), 중국의 비속어중 아주 유명한 것으로 정착한다.

여담으로 한자가 1의 인물과 정확히 같다(...). 거기다가 생몰년과 제위기간도 묘하게 겹친다. 왕건은 877년생이며 918년에 제위에 올랐다.

죽은 직후 양자와 친자 사이에 제위 쟁탈전이 났으며, 승리한 막내 왕연이 사치에 몰두하면서 끝내 에게 나라가 멸망한다.

3. 王鍵

블리치에 등장하는 도구.

영왕, 왕족이 사는 공간으로 가기 위한 열쇠. 대대로 호정 13대총대장에게만 소재가 구전된다. 만들기 위해서는 10만의 혼백과 중영지라고 하는 특정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왕건이 만들어질때 이 10만의 혼백과 중영지는 소멸하는 걸로 보인다. 나생환.

천년혈전편에서 0번대효스베 이치베에왕건의 정체에 대해 총대장 이외의 사람에게 밝혔다. 이치고가 영왕궁에서 정령정으로 돌아올 때 그냥 뛰어내려 버렸는데, 실은 새로 만든 사패장이 왕건이라 72겹의 차단결계를 뚫고 올 수 있었다는 것. 이점을 영번대가 모를리가없는데 이치고에게 사패장으로 넘겨주는걸보면 의도적으로 유하바하를 영번대가 처단하기위해 만든물건인듯하다. 아니면 그냥 우연 게다가 유하바하가 도착한때부터 싸움준비가 바로되어있었고. 그런데 개털렸잖아

유하바하는 바하의 친구

4. 기타

거대한 물건을 왕건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아무래도 王과 물건(物件)의 건(件 - 물건 건)이 합쳐져서 나온 말인 것 같다. 1번 항목도 있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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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0 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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