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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석

last modified: 2015-11-06 13:48:08 by Contributors


왕안석(王安石, 1021년 12월 18일~1086년 5월 21일)자 개보(介甫)호 반산(半山)
북송정치인이다. 국 장시성(江西省) 출신이며 북송 시기에의 시인·문필가로 활약하였다. 왕안석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이라 불리는 개혁때문일것이다. 그러나 왕안석의 개혁은 반대파의 견제와 불안한 정치상황으로인해 큰성과는 거두지못했다.

Contents

1. 개혁의 배경
2. 왕안석의 개혁
3. 결과
4. 비판
5. 그 외

1. 개혁의 배경

1038년 이원호가 국호를 대하(서하)라고 고치고,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다. 7년간의 전쟁으로 화약을 체결하는데, 태조 조광윤의 문치정책으로 군사력이 약해진 인종 연간에는 중엄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하를 물리칠 군사력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서하가 송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는 대신, 송은 매년 비단 13만필과 은 5만냥, 차 2만근을 보내게 된다. 또한 거란에게도 화의를 주선한 대가로 비단과 은을 제공한다. 병사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으나, 질은 형편없었고, 국방비가 정부 예산의 80%를 차지하게 된다.

황실은 황실대로 낭비를 일삼는 행사를 하여 국고를 탕진하였고, 3년마다 치러진 과거로 인해 벼슬자리보다 관료의 수가 많아지게 되었다. 대지주의 증가로 농민들은 땅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재정 수입이 크게 줄어들게 된다. 이에 따라 물가는 상승되고 세수는 줄어들고, 노비와 빈민들은 늘어나는 악순환의 경지에 이르렀다.국가 막장 테크?

2. 왕안석의 개혁

왕안석은 19세의 젊은 신종이 제위에 오르자, 정치개혁안이 담긴 만언서를 올려 신종의 재가를 얻고 부재상으로 임명된다. 그의 개혁 정책은 1069년~1074년에 걸쳐 시행되었고 서하의침공 등으로 매우 피폐해진 국가의 재정난을 극복하고, 대지주와 대상인의 횡포로부터 농민과 중소 상인들을 보호 육성하여 부국 강병을 이루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 균수법
정부가 지방의 물자를 사들여 다른 지방에 팔아 이익을 얻음으로써 물자 유통을 원활히 하고 물건 값의 조절과 안정을 꾀하고자 한 정책

  • 청묘법
농민들에게 낮은 이자로 농사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어 지주들의 비싼 이잣돈을 얻어 쓰는 일이 없도록 한 정책, 필요한 재원은 상평창에서 충당함.신법을 지지하던 구양수도 이것 때문에 왕안석과 정치적인 견해를 달리하게 된다

  • 보갑법
10집을 1보로, 5보를 대보로, 10대보를 도보로 편성하여 장점을 징집,훈련하여 민병으로 삼아 평화시에는 치안 임무를 수행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관군을 돕게한 정책

  • 시역법
자본이 적은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대상인들이 이익을 독차지 하는 것을 막고 국가 수입을 늘리기 위한 정책

  • 모역법
역이 면제되어 온 관리 사원으로부터 돈을 받아 실업자들에게 일을 시키고 품삯을 주어 역의 형평을 기하고자 한 정책

  • 보마법
백성에게 말을 기르게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군마로 쓰도록 한 정책

3. 결과

왕안석의 개혁안은 제대로만 된다면 국가와 일반 서민층인 농민, 중소상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이였으며, 기존 기득권 세력에게 불리한 정책이였다.
대부호들이 대부분 이 계층의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당파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반대파를 법파라고 하고 개혁에 찬성하는 파를 법파라고 하여 당쟁이 가속화 되었다. 당시 구법파의 당수는 사마광이었다.

1074년 희녕 7년 베이에 큰 가뭄이 발생하자 구법파는 이것을 신법에 대한 하늘의 분노로 상소하여, 당시 구법파의 배경이었던 태후내시, 구법파 관료들이 지속적인 퇴진운행을 벌였다. 이에 신종도 왕안석을 해임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왕안석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신법은 왕안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신종의 재위 기간에는 꾸준히 추진되었다. 그러나 신법당에는 왕안석 외에는 그다지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신법파 내부에서도 내부분열이 일어난다. 다음 해에 왕안석은 복직을 하지만, 1076년에 사직하고 은둔생활을 한다. 1085년 북송 신종이 사망하고 다음 해에는 왕안석도 사망한다.

신종이 죽은 후 신종의 어머니인 선인태후에 의해 사마광이 재상으로 등용되고 곧 신법이 폐지된다. 이에 개혁을 일부 지지하던 소식(1036~1101/소동파란 호로도 알려져있다.)을 비롯해 이런 반동적인 조치가 나라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 우려한 이들이 많았는데, 그 얼마 후에 사마광도 오래 집권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신법과 구법의 당쟁은 원래의 목적을 잃은 채 더욱 가속화되어 정치혼란을 초래해 송의 국력이 급속도로 약화된다.

4. 비판

후대에 대표적인 개혁자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상당한 비판도 받았다. 개혁 부분에 집중하여 고평가하는 사람도 있었고 최근엔 이쪽이 다수파지만, 한동안은 그 폐단에 주목하여 나쁘게 보곤 했었다. 특히 성리학을 세워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남송의 주자가 사마광에 호의적이였기 때문에 더더욱 저평가되어 온 편.

왕안석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신법 자체가 비현실적 내지는 백성에 대한 지나친 수탈이 된다는 것이다. 이미 당대에 소동파는 균수법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가한 바 있는데, 일단 정부의 전곡 출납 장부의 곡식 가격 자체가 이미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어 있고, 품질이 떨어지거나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거래 자체가 성립이 안되니 조정에서 사들이고 되파는 가격은 시장가격보다 높아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똑같거나 구법 이상이다는 것. 이미 한무제때 이와 같은 균수법을 수행해 똑같은 폐해가 나타났는데 왜 똑같은 짓을 하냐는 게 그것이였다. 청묘법 또한 정부가 민간 사금융보다 더 높게 고리의 이자를 먹여서 돈놀이하냐는 비판이 나왔고 보마법은 잠깐 지나가는 글에도 비현실적이다라는(군마와 짐말은 다른데 짐말을 군마로 쓰겠다는 이야기냐는 이유) 비판이 이어진다.

즉, 왕안석의 개혁은 말만 정부와 백성들을 위한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정부가 대지주, 대상인의 위치를 독점하고 백성들에게 혹독한 수탈을 가하는 짓이 아니냐, 는 것이 정책 자체에 오랫동안 가해진 비판이였다. 이는 조선에서도 이어졌는데, 대용방일기 같은 것을 보면 세손(정조), 유학자(실학자 포함)들이 한목소리로 왕안석을 비판하곤 했으며,[1] 이미 그 이전에 대동법 실시 과정에서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는 측은 자신들이 왕안석같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었다.

두번째 비판은 신법당에 대한 것이다. 왕안석은 빠른 개혁을 위해 지지층을 최대한 늘리려 노력했고 실제로 신법당은 순식간에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문제는, 그렇게 세를 늘리다 보니까 영 문제가 많은 인물들이 신법당의 대부분 구성원을 이뤄 버렸고, 왕안석 생전에도 뒤가 구린 짓을 해서 문제가 된 인물들이 많았다. 왕안석 죽은 후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파당을 짠것도 유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거기다 그 파당의 내부 상태가 이러니 '간신들이 신법당에 많네? 왕안석도 간신이구만!' 하는 후대의 이미지가 생겨버린 것.

그외에, 최근에는 저런 조치들로 북송을 구할 수 있었느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북송 시대 송휘종 무렵에 승자는 채경을 중심으로 한 신법당 측이었고, 구법당은 역적으로 몰려 모욕당했다. 또한 신법도 완전히 묻힌 것은 아니어서, 상당히 많은 정책이 발굴되었고 구법당 옹호측인 주희도 신법과 비슷한 정책을 내놓기도 했었지만 결국은 북송이나 남송이나 망했기 때문.

아무튼 현재의 평가는 "현명한 개혁자 왕안석이 수구꼴통들의 음모에 매장당했다."나 "간신 왕안석의 사악한 음모가 대현인들에게 저지당했다."같이 단락적으로 해석되지는 않고 있다.

왕안석의 이미지가 하도 좋지 않아서 뭔가 개혁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장 걱정한게 저 왕안석같은 놈!이라는 말을 듣는것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에서도 대동법 시행과정에서 대동법 찬성론자들이 가장 우려한게 자신의 이미지가 왕안석같다는것이 돼버리는것이었다고 하니 말 다했다(...)

5. 그 외

신종과의 대화에서 신종이 "옛날 당태종이 고구려를 쳤는데 왜 못 이겼냐?"라고 묻자 "연개소문이 비범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역사에서는 변법개혁을 이끈 개혁정치가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은 당나라와 송나라 시절의 뛰어난 산문작가들을 일컫는 당송팔대가의 일원이다. 당송팔대가는 당나라의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2] ·증공(曾鞏)에 왕안석을 일컫는다. 이 칭호는 송나라 때의 진서산이란 사람이 처음 주창한 단어로 이 평가가 그대로 이후까지 이어져서 명나라 이후의 문인들에게도 받아들여진 것. 이런 의미에서는 중국문학사에도 제법 비중이 큰 인물이다.

특히 소식(소동파)과는 정치판에서 대립하기도 했었지만 소식 개인적으로는 왕안석을 높이 평가했었고, 소식이 왕안석의 변법 중 남겨야 할 것은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마광의 눈밖에 나서 좌천되기도 했다. 그래서 소식은 실각하여 지방에서 살고 있었던 왕안석을 찾아가 함께 지내며 시나 문장을 짓기도 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하나만 더 말하자면 정조의 경우는 세손시절에는 위에 나왔던 것처럼 왕안석을 비판했지만 왕이 되어서는 왕안석을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 자신이 총애했던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에게 '너는 왕안석'이라고 말한적도 있다. 박제가가 이루기 어려운 개혁을 주장한다는 뜻이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뉘앙스는 아니었던것 같다.

전근대 중국 지식인(사대부)들 사이에선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 못하고 도리어 이단아 라고 보는 시각까지 존재했으나 청말 캉유웨이(康有爲)[4]가 왕안석에 대한 재평가를 하면서 왕안석에 대한 시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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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여기서 "왕안석이 재상이 된 것이 역사의 쾌사입니다." "어찌 그렇소?" "그러지 않았다면 왕안석이 간신인 것이 밝혀지지 않고 현자로 평가되었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다함께)"하하하 이녀석 하하하" (…) 농담이 아니다. 실제로 저런 분위기다. 왕안석이 얼마나 닥치고 까였는지 볼 수 있는 대목. 고인드립 쩌네효
  • [2] 소순은 소식과 소철의 아버지다. 그래서 이들은 3소(三蘇)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 [3] 조선왕조실록 정조 15년(1791년) 4월 30일 2번째 기사 "조강에서 《중용》을 강하다"에서 정조가 왕안석을 보는 시각을 자세히 풀어 논한다.
  • [4] 변법 자강운동을 주도한 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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