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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last modified: 2015-03-10 17:32:26 by Contributors

(ɔ) from

왜구란 조선 반도나 중국 대륙 등지에 배로 침략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가끔 역사 교과서를 보면 출병했다느니 하고 쓰여있긴 합니다만,
그건 해적이라고요. 약탈을 하러 간 거라 이겁니다. 나쁜 녀석들이에요
woegu.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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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에이이치로(만화 원피스의 작가) 대략 이런 이미지.
그런 고려말 이후 모습이 확 바뀐다.

Contents

1. 개요
2. 역사
2.1. 전기 왜구
2.2. 후기 왜구
3. 한국사의 왜구
3.1. 고려 시대
3.2. 조선 시대
4. 중국사의 왜구
5. 가왜
6. 평가

Japan_pirate_rout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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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왜구들의 활동 영역. 짙은색은 산둥반도, 한반도가 포함된 전기 왜구의 활동 영역이고, 연한색은 후기 왜구의 활동 영역이다.

전기는 일본의 남북조시대, 후기는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영향을 받았고, 보통 혼란기가 진정되면 왜구도 함께 진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1. 개요

倭寇

해적. 일본의 해적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와코(わこう)라고 불렀는데 어감을 봐도 알겠지만 일본에서도 무척 경멸하는 투로 불렀다.

동북아 역사상 등장하여 수많은 나라들에게 해악을 끼쳤으며 결국 중국고려, 조선 등이 바다를 포기하게 만든 주범들 중 하나. 당시 동북아시아에서는 국제적 골칫거리였다고 할 수 있겠다. 현대로 치환하면 인도양 해적. 왜말리아

이들은 주로 이키 섬, 쓰시마 섬, 키타큐슈, 세토내해 등지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왜구'란 이름대로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나, 후기 왜구들 중에는 중국인이나 동남아 계통, 심지어는 포르투갈인도 섞여있었다. 새역모와 같은 일본 극우 사학계에서는 이를 핑계로 왜구는 일본만이 아닌 명, 동남아, 조선을 포함한 국제적 집단이었다는 주장을 종종 해댄다. 물론 해적=왜구라는 것은 아니어서, 고려 때는 여진 해적이 울릉도를 습격하는 사건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기자들까지 '왜구=일본군'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애초에 왜구란 일본인들로 구성된 특정 무장집단을 가리킬 뿐이지 일본 전체 혹은 일본 정규군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왜'라는 표현은, 일본에선 헤이안시대이후 '일본'이라는 국호를 정식으로 사용하며 사라졌고, 당 왕조 이후 중국에서도 일본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후에도 간혹 '왜'라는 명칭이 사용되나, 이 경우엔 만주족을 '호인'이라고 부른 것 처럼 일부러 비하하려는 의도의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간혹 무지한 사람들이 정식 명칭인줄 착각하고, 임진왜란 관련 서술에서 '일본군'이란 정식 명칭을 사용할 경우 왜구를 미화한다며 징징거리는 모습을 심심치않게 볼수있다.

2. 역사

왜구들의 활동 영역은 대개 조선과 명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 본토도 그들의 활동 영역 중 하나였다. 일본도 심심하면 왜구들에게 당해 사실상 각 지역 왕이나 다름없던 영주들도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단순한 약탈을 넘어서 통행세까지 받아낼 정도였으니 규슈에서 수입한 명이나 조선의 물건들이 교토를 넘어 동쪽으로 갈수록 물류비가 더해져 값이 몇배나 뛰었다.

능력있던 왜구가 등용되어 유력 다이묘 가문의 신하가 되기도 했지만 이건 소수. 그런데 다이묘 가문이 직접 나서서 왜구랑 손잡고 약탈물을 나눈다든지 배후조종하며 이득을 취하기도 했다. 일본과 무역하던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에스파냐 상선들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동남아에 진출하기도 했다. 굳이 왜구가 아니라도, 일본의 동남아 진출은 일본역사에서 꽤나 유래가 깊다.

왜구는 막부도 사실상 통제하지 못하는 무법자 집단이었기에, 명과 조선이 일본 막부에 압력을 넣어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게다가 조선초-명대의 이 시기에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는 완전히 허수아비인 상태로 각 지역의 다이묘들이 할거하여 150년간 난리를 치던 전국시대였다. 육지도 통제가 안 되는 마당에 해적들을 통제할 수 있을 리가... 애초에 이렇게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왜구들이 창궐했기도 했고. 지금 동아프리카 해역에서 소말리아 해적들이 난리 바가지를 긁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2.1. 전기 왜구

전기 왜구는 14~15세기에 쓰시마와 이키, 마쯔우라를 근거지로 한 왜구들이다. 이들은 본래 사무라이 세력이었지만 혼란한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몰락하게 되었고 재기 또는 생계를 잇기 위해 한반도 남부를 약탈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로 인해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일어났다.

그러나 고려 조정에서 큐슈와 쓰시마 지역에 사자를 파견해 억제를 요청하는 한편 황산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고 수차례의 쓰시마 정벌을 감행하자 전기 왜구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특히 박위, 이종무의 쓰시마 원정은 전기 왜구의 직접적 종말 원인이 되었다.

2.2. 후기 왜구

후기 왜구는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통제력을 잃고 전국시대(일본)가 되자 합무역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시작되었다. 감합무역이란 조공과는 달리 외교관계가 없는 오로지 무역만 허가되는 형태로써 황제의 인장이 찍힌 문서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대혼란을 겪으면서 명나라 황제의 인장이 찍힌 가짜 서류가 난무하는 현상이 나타나자 감합 무역이 더이상 불가능했고 밀무역이 속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중국과 일본 사이를 밀무역상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으나 중국 해안의 방어를 뚫기 위해 자연스럽게 무장을 하게 되었고 결국 밀무역 대신 일방적인 약탈을 가하게 되는게 후기 왜구의 등장이다. 후기 왜구는 16세기 말 명나라 군대의 적극적 대응으로 소탕이 되면서 점차 잠잠해졌다.

16세기의 후기 왜구는 쓰시마와 이키를 근거지로 하였으나 구성원중에서 7할이 중국인이었다.# 이는 왜구왕으로 불린 왕직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중국과 일본과의 통상을 중개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1557년에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왕직의 죽음으로 왜구는 내부 분열을 맞게된다.

1589년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태합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구에 대한 전격적인 금지령을 내렸다. 물론 이 규정은 지켜지지 않아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일본 수군에 편입되어 조선을 노략질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 사령관이었던 구키 요시타카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고, 에도 막부 수립 이후 다시 금했다. 또한 기독교 탄압의 일환으로 쇄국 정책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당연히 왜구도 혹독한 탄압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3. 한국사의 왜구

왜구가 한국 역사에 등장한 것은 굉장히 오래 전 일로, 박혁거세 즉위 8년에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기사가 있을 정도로 그 짓의 역사가 유구하다. 신라 역대 왕들의 삼국사기 기록을 뒤져보면, 왜구의 침략에 대한 기록이 없는 왕보다 있는 왕이 더 많을 정도. 신라 문무대왕이 대왕암에 묻어달라는 이유도 이 되어 왜구를 막기 위해서였다.

3.1. 고려 시대

특히 이들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 고려 말부터였는데, 당대 한반도 해안지역은 동서남해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이 약탈대상이었다. 조운선을 습격해 조세를 털어가고, 육지에 상륙해 사람들을 잡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왜구들을 토벌하기 위해 최무선을 비롯한 고려군이 지속적으로 전투를 치렀으나 결국 이들을 근절하는데는 실패한다.

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는 이미 갑주를 갖추고 정확한 지휘계통을 갖춘 군대였다. 아기발도항목을 보면 전신갑주로 무장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정도의 무장을 갖출정도면 사실상 정규군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려말 극심한 왜구의 활동은 사실상 국력이 침체된 고려의 수군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왜구가 5백여척을 몰고와 고려를 습격한 적도 있었지만 최무선이라는 일세의 영웅의 탄생과 함께 세계 최초로 함포테크를 완성하여 화력덕후의 시작 거꾸로 왜구를 학살하는 업적을 세우기도 했다. 진포대첩 어떨땐 왜구를 털겠다며 일본 군항을 공격했는데 사전에 왜구들의 근거지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실수로 애먼 일본 정규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당시 고려의 수군은 상당히 막강한 편이었으며, 조선 역시 최소한 임진왜란까지는 상당한 수준의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사 전체로 보자면 오히려 수군이 약했던 고려말이 예외라고 해야 할 정도다.

고려는 군함 400척을 동원해 해상시위를 벌여 가마쿠라 막부를 압박, 통상을 요구해 통과시키기도 했다. 해군력은 신라 때부터 막강했는데, 대표적인 사례인 장보고 외에도 신라 말 호족이 세력을 얻으며 등장한 신라구는 일본인들로 하여금 "규슈는 사람이 살 곳이 아니다 !!"라고까지 하게 할만큼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이것도 왜구의 전성기 시점에서는 옛말. 사실 고려 초만 해도 고려의 군사진지를 보면 대개 강변에 위치해있지 해안가에 위치한 것이 드문걸 보면 국가 단위에서 대규모 수군을 운영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고, 그나마 고려 말에는 제대로 된 해군 자체가 사라졌다. 애초에 그럴 해군이 있었다면 괜히 육지까지 올라와서 왜구들 설쳐대는걸 보느니 처음부터 바다에서 때려잡았을 것이다.

최영이 1,000여척의 해군 증강 계획을 세웠으나, 그 도중에 왜구와 한타 싸움 벌였다가 깨끗이 말아먹어서 왜구가 강화도까지 들어와서 설치는데도 제대로 몰아내질 못했다. 해전에서 고려가 절대적인 열세에 있던 상황을 뒤집은 것이 바로 전술한 최무선의 화포 테크에 이은 진포 해전이고, 그 다음이 정지의 해군 정예화 계획에 힘입은 관음포 전투. 이 시점에 이르러서 고려-조선의 수군은 본격적으로 왜구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자세한 것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항목 참조.

3.2. 조선 시대

조선 건국에 이르러서도 왜구들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건국 시조인 이성계부터가 아지발도(아기바투)가 이끄는 왜구들을 크게 소탕함으로서 입지를 쌓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의 왜구들 역시 고려 때만큼이나 골치거리였다. 세종대에는 태종의 섭정과 이종무의 지휘하에 대마도 정벌까지 했으나 왜구들의 반격이 거세 어중간하게 마무리되었다. 여기에는 워낙 견고했던 일본의 도 한몫했다. 기본적으로 산성, 기껏해야 읍성 등 성의 방어력에 그닥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조선군은 말 그대로 수비에 모든것을 올인한 일본의 견고한 성을 함락시킬수 없었다. 물론 굳이 조선군이라서 함락을 못시켰다는게 아니라 원래 일본의 성은 오랜 전란의 영향으로 정면승부로 함락시키기 매우 힘들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후 '무력만으로는 왜구를 단속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삼포(부산포, 내이포, 염포)를 개방하고 여기에 왜관을 설치했다. 조선 초기 대외관계를 칭하던 "사대교린"중 교린에 해당한다. 이 중 일본 국왕에게는 '적례교린'으로, 대마도(쓰시마 섬) 도주를 비롯한 호족들에겐 '기미교린'이라고 하여 차등을 두었다. 쉽게 말하자면 회유와 강경책을 동시에 쓰기이다. 그래서 계해약조와 기유약조 등을 맺어 왜구들의 활동을 억제하였다.

  • 계해약조 : 위에서 말했듯이 삼포를 개방하고 왜관을 설치하며, 조선과 교류하거나 방문하는 왜인들은 증명서를 소지해야 했다. 수도서제(授圖書制라고 하여 통교증명서인 도서(圖書)를 받는(授) 제도(制)가 있었고, 서계(書契)는 대부분의 외교문서, 문인은 여행증명서를 뜻한다. 참고로 서계는 후일 운요호 사건으로 시작되는 일본의 침입의 단초가 된다. 또한 왜인들이 왜관에 들렀다가 돌아갈 때의 비용은 조선에서 담당했는데 이게 비용이 만만찮은데다 왜구가 도적 천성 못 버리고 이런저런 위반을 일삼다가 삼포왜란이 터지게 되었다.
  • 기유약조 :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먼저 제안(내지 간청)함에 따라 맺은 약속. 아무래도 임진왜란 직후이다 보니 일본측 무역선의 숫자를 제한하고 개항장도 부산포 하나로 줄이는 등, 자연스레 일본에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4. 중국사의 왜구

중국사에서의 왜구는 크게 전기 왜구와 후기 왜구의 2시기로 나뉘어진다. 전기 왜구의 경우 명나라 초기 원나라의 멸망-명나라의 등장 사이의 공백을 틈타 왜구가 중국의 동해안을 약탈하는 일이 있었으나 명은 건국 초부터 왜구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고, 산둥에서 수만단위의 왜구를 토벌하기도 했다. 1419년 명나라의 수군이 요동반도의 대련 부근에서 왜구를 격파하면서 에게 있어서 왜구는 한동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구가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이른바 후기 왜구였으며 대략적으로 16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약탈이 본격적으로 되었으며 이때부터 약 20-30년 동안 왜구의 약탈이 극심했다. 이 때가 가정제 시기였기 때문에 가정왜구라고도 부른다. 명나라 시기의 왜구는 명말의 명장인 총병 척계광의 활약에 의해 1567년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소탕된 것으로 간주된다. 척계광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에 병법서인 "기효신서"를 집필하는데, 왜군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된 원앙진당파에 대한 언급이 들어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기효신서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을 찾아온 명나라의 장군들에 의해 조선으로 전파되었고 이후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기본적인 군사 교본이 되었다.

왜구는 야만인 무리가 아니었으며, 강력한 군장비와 정확한 지휘계통을 갖춘 군대와 같았다. 비까번쩍한 갑주를 갖추고 잘 갈아둔 창칼을 번뜩이던 왜구들에게 명군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쉬웠다. 이 시기가 일본의 전국시대와 겹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큐슈의 대영주인 쇼니 씨의 사병이나 략함대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 부류의 경우에는 배를 통해 말을 수송해서, 기병대까지 운용한 사례도 보인다. 이쯤되면 해적이라기 보다는 정규군의 상륙작전에 가깝다.

5. 가왜

15세기 이후 후기 왜구들 중에는 중국인도 상당수 끼어 있었다. 중세기 지중해를 휩쓸었던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해적들 중에도 유대인이나 유럽 출신들이 꽤 있었다. 이들은 왜구인 척하면서 중국 해안가를 노략질하곤 했으며 이러한 왜구들을 가왜(假倭)라고 했다. 어차피 동북아에서 해적=왜구였으니 이들을 왜구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서양세력의 진출 뒤에는 동남아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일부 서양인들도 왜구로 활동했다고 한다. 동남아 무역에 종사하고 있던 네덜란드 상선이나 심지어 영국 해적(!)을 털려다가 역관광 당하기도 했다.##.

조선인 왜구 이야기는 이 가왜에 포함된다. 다만 이들은 왜구와 같이 움직였다기 보다는 독자적인 해적이나 도적들이 왜구를 사칭하고 다닌 경우가 많다는 설이 있다. 특히 제주 출신 사학자들은 제주도를 포함한 남부 해안 도서에서, 특히 먹고 살기 어려워서 뭍으로 나가서 김 캐고 미역 팔던 두모악(豆毛岳)이나 포작인(鮑作人)으로 불린 사람들이 왜와 지리적 근접성으로 교류 좀 하고 일본 옷 좀 입고 다닌 것 뿐인데 일본에서 이들을 뭉뚱그려서 왜구 취급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다고 한다. 덧붙여서 일본 사학계에서 가왜에 대해서 활발하게 연구하는 것은 이 가왜를 과대포장해서 일본과의 연결고리를 약하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6. 평가

왜구와 관련해서 유명한 책으로 무라이 쇼스케의 '중세 왜인의 세계'가 번역되어 있는데, 해양사적 관점에서 왜구를 다루고 있다. 현재 왜구 개념의 큰 틀을 다루고 있는데, 지나치게 일본 편의적이라는 비판도 존재하니 냉정한 판단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

일부 역사가는 왜구를 '동양의 바이킹'으로 평하기도 한다. 바이킹처럼 배를 타고 이곳 저곳 들쑤시고 다니며 깽판을 벌여놓은 점은 확실히 닮았다(...). 사실 그 외에도 동아시아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니 그런 점에서도 닮았을지도. 다만 바이킹들은 왜구들과는 달리 유럽 전역으로 흩어져서 여러 지역에 뿌리내리고 정착하거나 아예 나라를 세워 눌러 앉는 등 여러모로 다른 점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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