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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last modified: 2014-01-02 21:52:23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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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Ulrich Friedrich Wilhelm Joachim von Ribbentrop, 1893년 4월 30일 ~ 1946년 10월 16일)

Contents

1. 개요
2. 기행
3. 기타
3.1. 리벤트로프? 리트비노프?


1. 개요


아들인 어린 루돌프와 함께


나치독일의 정치가로 외무부 장관. 어렸을때 아버지가 유럽의 여러나라를 전전했고, 후에 캐나다퀘벡지역에서 일했기 때문에, 때문에 프랑스어영어에 유창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나중에 리벤트로프의 출세길을 열어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을 거쳐 독일로 돌아가 장교로 종군하였고 독일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자 운이 좋아 샴페인왕(王)이라고 불린 헨켈[1]의 딸과 결혼하여 베를린의 수출입 상인으로 재산을 모았다.

여기서 그가 계속 주류사업에 종사해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면 문제없었겠지만....

히틀러와는 1928년에 알게 되었고 1930년대 초반에 나치당에 입당했다, 리벤트로프는 사업가로서의 사업 수완과 외국어 습득 능력을 바탕으로 당의 비공식 외교관(공식 직합은 총통 외교보좌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전문적인 외교 업무에 무지했고, 어릴적부터 외국에 살았기 때문에, 독일어가 철자법에 서투른데다가, 가끔 헛소리를 하는 습관이 있어서 이라트를 비롯한 독일의 정통 외교관료들은 리벤트로프를 무시했으나, 히틀러가 절대권력으로 떠오르자 리벤트로프는 독일의 외교업무를 실질적으로 관장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한 뒤에는 영국 대사[2]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히틀러의 뜻에 부합해 오스트리아 병합, 주데텐란트 획득,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독소 불가침조약 등 2차대전 직전에 맺어진 각종 중요 조약들의 협상과 조인을 담당했다.

대전 초기에 독일이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였을때, 해군·외무관료·경제계와 결탁하여 소련과는 공존관계에 있으면서 영국을 공격하여 아프리카 등을 손에 넣을 계획을 세우고, 일본을 설득하여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추축국 라인을 구축하고 영국의 분할을 꾀하였으며 동맹국이나 점령국의 괴뢰 정부에 대한 외교 활동도 맡았다.

하지만 전쟁이 심화되고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정치적인 영향력은 점점 잃어갔고 히틀러가 불가침 조약을 위반하고 소련을 불시에 침공하자 자신이 맺은 불가침 조약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쟁이 발발하고나서 소련 외교관을 불러 선전포고를 한 후, 리벤트로프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모스크바에 전해주시오..그래도 나는 대소 전쟁을 반대했다고"

1945년 4월 20일에 히틀러를 마지막으로 접견하고 함부르크 방면으로 피신했으나, 영국 점령군에게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내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헤르만 괴링에 이은 나치 인사 중 거물이였기에 죄가 인정되었고 결국 교수형이 인도되었다. 사형 직전 유언으로 "나의 마지막 소원은 독일인이 그 운명을 스스로 자각하는 것과 평화로운 세계를 원합니다."였다.

총제적으로 평가하여 나치에 줄 잘못 섰다가 인생 참 제대로 꼬인(?) 양반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그래서 사람은 줄을 잘서야한다.

여담으로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일으킬 당시, 리벤트로프는 일본이 직접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독일이 나서서 일본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히틀러는 진주만 기습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요들과 카이텔에게 달려가서 그 소식을 말하고는 환호작약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3,000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동맹국이 생겼다."[3] 그런데 이미 일본도 400년전 졌긴 졌잖아?. 안될꺼야 아마 그리고 독일은 멸망했다

2. 기행

엉뚱한 성격으로 영국 대사 재임시 당시 조지 6세 앞에 나치식 경례를 하는 등 과도한 돌출행동으로 물의를 빚었으며 영국 첩보부에 의해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극렬 나치빠인 윈저 공 에드워드의 아내 심프슨 부인과 내연의 관계에 있었으며 심프슨 부인을 이용해 영국의 정보를 빼냈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귀족을 나타내는 'VON'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으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리벤트로프의 집안은 원래 귀족 집안이 아니었으며, 리벤트로프는 귀족 칭호인 'VON'을 얻기 위해 귀족이었던 고모부의 양자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신의 고모에서 청을 하여 귀족 칭호를 얻게된 것이었다.

1946년 1월, 전범 재판을 받고 있던 리벤트로프는 돌연 자기 변호사를 해고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일이기에 다른 제소자들이나 법정은 의문을 표했고 리벤트로프는 그들에게 대답했다.
"그 자식, 나한테만 새해인사를 안 보냈어!"

과거 주류상으로 일했을때 사업이 1920년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었는데, 리벤트로프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통해 이를 타개하려고 했다. 리벤트로프가 선택한 아이템은 위스키였다. 그는 우연찮게 조니 워커 위스키가 독일판매를 기획하고 있으며, 판매대행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영국으로 급하게 달려갔다.

그러나 리벤트로프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경쟁자가 열차를 타고 먼저 출발했다는 소식이었다. 리벤트로프는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가는 늦을게 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급하게 비행기를 수소문해 스코틀랜드로 날아가 Kilmarnock에 있는 알렉산더 워커 경의 잔디밭에 착륙해 워커 경을 찾아갔다. 건방지게 남의 장원을 비행기 착륙으로 훼손시킨 것에 대해 워커 경은 분노할 수도 있었지만, 리벤트로프의 사업에 대한 열정에 감명받았고, 리벤트로프와 계약을 맺었다.


3. 기타



리벤트로프의 아들 루돌프 폰 리벤트로프도 나치 독일군에 입대, SS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친위대에 배치되어 독소전과 노르망디 상륙작전, 아르덴 대공세 등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5번이나 입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보다 더욱 잘생겨 인기가 많다.(...) 루돌프 폰 리벤트로프는 최종적으로 SS중위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고 현재까지도 생존해 있다.

3.1. 리벤트로프? 리트비노프?

가끔 같은 시기 소련의 외무인민위원이었던 "막심 리트비노프"와 이름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한글로 표기했을 때 이름의 처음과 끝 글자가 같고 글자수도 같은데다 담당업무도 비슷해서인듯 하다. 굉장한 실례다. 리트비노프는 스탈린의 대숙청 치하를 살아남은 몇 안되는 셰비키 원로 멤버로 20년대, 30년대를 걸쳐 탁월한 외교감각과 매력으로 초기만 하더라도 국제사회에서 대놓고 천민 취급받은 소련을 국제 정치판에 복권시켰으며, 무엇보다 나치 독일의 팽창정책을 우려하여 소련과 영국, 프랑스, 서방국들, 폴란드, 체코와 함께 독일을 포위하는 집단안보체제를 구상하였으나, 서방국들은 이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폴란드는 예전부터 반소련 정책을 펴오고 있었기 때문에 겨우 체코와 방위협정을 맺는 것으로 끝났다. 이러자 스탈린은 리트비노프 구상을 폐기하고, 독일과 직접 협상하여 안전보장을 도모했고, 이는 히틀러의 양면전선 우려와 맞아 떨어져 결국 독소 불가침 조약이 맺어진다. 그래서 소련과 독일이 맺은 불가침 조약은 리트비노프가 아니라 그 후임인 몰로토프가 체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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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헨켈 트로켄이라고 우리나라 대형마트에서 독일산 샴페인으로 팔리고있다.
  • [2] 영국 대사로 재임시 에드워드 8세의 연인인 심슨 부인과도 관계를 맺었다. 한마디로 구멍동서
  • [3] 처칠은 같은 소식을 듣고 동일하지만 상반된 결론에 도달해서 "그렇다면 우리가 이겼군"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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