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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JSBach.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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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스 하우스만이 그린 61세의 바흐(1748). 이 그림에 있는 악보를 자세히 보면, 6성부 3중으로 된 카논이다. 재미있는 점은 거울상으로 이 악보를 보면 또다른 3성부가 보인다는 점이다.
Johann Sebastian Bach

Contents

1. 소개
2. 생애
2.1. 일화
2.2. 바흐의 일족
3. 주요작품
3.1. 독주 건반악기 작품
3.2. 현악 작품
3.3. 관현악 작품
3.4. 성악 작품
3.5. 협주곡 작품
4. 함께 보기


"바흐는 모든 음악의 시작이며 끝이다."
막스 레거

"바흐는 우리의 경애하는 음악의 주님이다."
("Bach is Our Dear Lord of music.")
클로드 드뷔시

"바흐는 음악의 예수이다."
예후디 메뉴인 경

"바흐는 거대한 음절이다."
레너드 번스타인

"만일 베토벤이 인간중의 거인이라면, 바흐는 바로 신의 기적이다."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

"바흐는 모든시대의 가장 놀랄만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며 그의 음악은 음악사상 가장 놀랄만한 기적이다."
요하네스 브람스

"그는 작은 시냇물이 아니라 크고 광활한 바다라고 해야 마땅하다”(Nicht Bach, Meer sollte er heissen)
루트비히 판 베토벤

"바흐는 마치 로도스 섬의 거인과 같다. 모든 음악가들이 그의 아래를 지나야 한다. 모차르트는 가장 아름답고 로시니는 가장 천재적이다. 하지만 바흐는 가장 포괄적이다. 그는 말해야 할 모든 것을 말했다. 만약 바흐 이래로 쓰여진 모든 음악이 사라진다고 해도 바흐의 음악을 토대로 다시 재건할 수 있다."
샤를 구노

"지속적으로 강력히 바흐에 몰두한 뒤 베토벤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겐 문화집단이 유일하게 심원을 염두에 둘수 있는 바로 그곳에서 마치 일종의 장식적인 오락 음악에 직면한 듯한 생각이 일어난다. (바흐를 집중해서 계속 들은 뒤에 베토벤의 음악을 듣게 된다면 마치 일종의 경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1. 소개

위에 열거된 기라성 같은 위인들의 찬사와 같이,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인간도 음악의 깊이와 작품성 면에서 그를 뛰어넘은 적이 없었다.

음악의 神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 독일의 바로크 작곡가로, 일명 음악의 아버지[1]로 불리우는 클래식계의 Big Boss.

베토벤은 바흐를 가리켜 "그는 실개천이 아닌 음악계의 대한 대양이다."라는 표현을 남기기도 하였다.[2] 혹자는 신을 믿지 않는 음악가는 있어도 바흐를 믿지 않는 음악가는 없다는 말로 바흐의 위대함을 표현하기도 했다.[3] 클래식 갤러리에선 바본좌로 칭해진다.

또한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엔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루터교 정통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또 자기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그가 바로크 시대에 너무 많은 업적을 이루어서,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그의 죽음을 기점으로 끝났다고.

2. 생애

1685년 3월 독일의 튀링엔 지방의 소도시 아이제나흐에서 음악가인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의 아들로 태어난다. 바흐 가(家)는 200년간 유럽의 명문 음악가문으로 군림한 본좌급 집안이기에 바흐 역시 아버지나 형들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 다양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9세에 어머니를 잃고 이듬해엔 아버지를 잃었던 바흐는 불우하고 어려운 유년기를 자신의 큰형의 집에서 보냈다고 한다.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71-1721)와 함께 살게 되어 오어드루프(Ohrdruf) 시로 옮겨가 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 기초를 배웠다. 15세 때 북부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인 게오르크 뵘(Georg Boehm, 1661-1733)과 얀 아담스 라인켄(Jan Adams Reinken, 1643-1722)을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다.

18세로 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곧 자활할 필요에 쫓겨, 1703년 4월부터 한때 바이마르 궁정의 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고, 그 해 8월에는 아른슈타트(Arnstadt)의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서 채용되었다. 이 시대에는 북부독일의 뤼베크를 찾아가 대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1637-1707)의 작품과 오르간 연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그 영향은 이 시기의 화려한 오르간곡에 명확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 아르시타트 시대(1703-1707)는 오르간의 연주와 작곡에서 바흐가 개성적인 양식의 기초를 굳힌 중요한 시대인데, 그를 감독하는 입장에 있었던 성직회의(聖職會議)와 자주 충돌하여, 1707년 6월 새로운 직장을 찾아 같은 중부독일의 도시 뮬하우젠으로 갔다. 뮬하우젠에서는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 활약하는 한편 교회 칸타타의 작곡에도 힘을 들여 제71번, 제131번, 제106번 등 초기 칸타타의 명작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루터파 내부의 정통파와 경건파 사이의 분쟁에 말려든 바흐는 겨우 1년 만에 이 곳을 떠나게 되었다.

다음으로 바흐를 맞이한 것은 바이마르 궁정이었다. 한때는 한낱 악사로서 취직하였던 추억의 고장으로, 이제 젊은 대가가 된 그는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돌아온 것이다. 1708년 7월 23세 때의 일이다. 이 바이마르 시대(1708-1717)는 바흐의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불리며, 현존하는 오르간곡의 태반이 여기서 작곡되었으며, 비할 데 없을 만큼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로서 그의 이름은 독일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1714년에는 궁정악단의 콘서트마스터에 임명되어, 매달 1곡씩 뛰어난 교회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바이마르 궁정에서는 당시의 가장 새로운 음악이었던 비발디 등의 협주곡이 즐겨 연주되었는데, 바흐는 그것들을 열심히 연구하여 이탈리아 협주곡의 형식과 기법(技法)이 바흐의 그 후의 작풍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4] 1717년 8월, 바흐는 쾨텐 궁정에 악장으로서 취임하였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독일에서 음악가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이며, 음악을 사랑한 젊은 영주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이례적(異例的)인 후대를 베풀었다. 쾨텐의 궁정은 칼뱅파여서 교회음악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으므로 바흐의 중요한 직무는 영주나 귀족들을 위하여 세속적인 합주곡이라든가 실내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6곡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WV1046-1051),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BWV1001-1006), <무반주 첼로 모음곡>(BWV1007-1012)을 비롯하여 그의 세속적 기악곡의 대다수가 이 시대에 작곡되었다.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풍성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밝고 즐거운 표현으로 넘쳐 있었다. 이른바 바흐의 인생의 리즈 시절이라고도 불리는 시기가 이 바이마르 시절이라고 한다, 이때 바흐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7남매를 얻었다고 한다.[5]

바흐의 첫번째 부인인 마리아 바르바라는 현모양처에다 뛰어난 사람이였다. 바흐는 아내에게 집안의 거의 모든 일을 맡겼고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1720년 아내가 사망하자 바흐는 크나큰 상심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쾨텐 공작 레오폴드를 따라 연주 일정을 소화하고[6] 집에 돌아올 때 쯤 아내의 부고를 듣고 황급히 집에 와보니 이미 장례까지 치른 뒤였다고 한다. 장의사가 청구서를 내밀자 바흐는 무심한 말투로 "아내에게 물어보시오..."라고 말했다.

다음해인 1721년, 그는 16세 손아래인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고, 13명의 아이를 얻었다. 합계 20명의 자녀 가운데서 약 반수는 어렸을 때에 사망하였는데,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뛰어난 음악적 재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1710-1784), 차남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1735-1782)[7]은 음악사(史)에 이름을 남기는 뛰어난 작곡가로 성장하였다.

쾨텐시절에는 이들 아이들이나 또는 바흐의 명성을 흠모하여 모여든 제자들을 위하여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1권(BWV846-869), <인벤션>(BWV772-801)을 비롯한 수많은 클라비어곡도 작곡하였다. 대단도 하시다 바본좌...

그후 좋은 환경 속에서 한때는 쾨텐에서 영주할 것을 결심한 바흐도, 1723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라이프치히로 옮겼다. 독일 바로크의 중요한 작곡가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의 후임으로서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합창장)에 선출되었다. 175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27년간, 그는 이 곳에 머무르며 교회음악의 최고 책임자로서, 또 사실상의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으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시대의 창작중심은 <마태 수난곡>(BWV244), <나단조 미사>(BWV232),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BWV248), 약 160곡의 교회 칸타타 등의 교회성악곡이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 대부분은 라이프치히 시대의 최초의 수년간에 작곡된 것이라 한다. 자기의 이상을 끝까지 관철코자 했던 바흐는, 시의 당국자나 교회의 책임자들과 자주 충돌하였으며, 교회음악의 일에 점점 열의를 잃어간 것같이 생각된다. 1724년 이후, 교회음악의 창작은 급격히 수요가 줄고, 그 대신에 세속 칸타타나 세속적 기악곡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1736년경부터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전에 작곡한 것을 고치기도 하고 몇 편의 작품을 곡집 형태로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클라비어를 위한 <파르티타>(BWV825-830)[8], <이탈리아 협주곡>(BWV971), <골트베르크 변주곡>(BWV988) 등이 그 예이다. 1747년 5월, 바흐는 포츠담의 궁정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하고,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즉흥연주의 묘기를 보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작곡한 것이 대왕에게 헌정한 <음악의 헌정>(BWV1079)이다. 그리고 1748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최후의 대작 <푸가 기법>(BWV 1080)의 작곡이 진행되었으나, 1749년 5월에 뇌일혈로 졸도하여 시력도 잃어서[9] <푸가의 기법>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10] 바흐는 1750년 7월 28일 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조용히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지금은 음악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그도 죽은 후에는 점점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고, 그의 음악은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며 사장되었다. 그러나 바흐 사후 약 80년의 시간이 흐른 1829년, 낭만파 시대에 멘델스존이 마태 수난곡을 복원하며 바흐의 음악을 다시 세상에 널리 알렸다. 또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은 첼로의 거장인 파블로 카잘스가 발굴한 것이며[11]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또한 요제프 요아힘에 의해 19세기 후반에서야 인정받는 등 지금의 그의 명성을 생각해 보면 매우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들의 발견과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바흐를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2.1. 일화

바흐는 상당히 건장한 체격을 지녔다고 전해지며, 그의 유골을 분석해본 결과 키는 178cm[12]로 꽤나 후덕하시다. 또한 바흐는 춤과 노래에도 꽤나 솜씨가 좋아 종종 자신이 즉홍적으로 작곡한 곡을 연주하면서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바흐 자신과 여러 동시대 음악가들의 작품을 기록해 둔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공책(Notenbüchlein für Anna Magdalena Bachin) 같은 작품집은 이런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은 작곡가로 유명하다. 생애 거의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고.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혹은 존경하는 작곡가의 연주를 듣기위해서 등 필요한 경우에는 평상시의 업무는 생까고 여행을 가기도 하였다. 가장 유명한 여행은 1705년 북스테후데에게 대위법을 사사 받기 위해 아른슈타트에서 뤼백까지 걸어서 4주간 휴가를 얻어 400km를 걸어간 것일 것이다. 지금도 뤼백의 성 마리아 교회에는 그 일화에 대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물론 이런 이유들로 바흐가 난처한 상황에 자주 엮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이다.

즉흥의 천재였다고 한다. 그는 멜로디 라인을 받으면 즉석에서 여덟 파트의 성부를 연주를 했다고 한다. 그는 마치 작곡을 위한 기계 같았다고.

경건한 신앙심과 작곡기법에서의 장인기질, 음악의 아버지라는 별칭 등등 여러가지 때문에 바흐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바흐는 쾌활하며, 왕성한 대식가라 미식을 즐기며, 다혈질적인 면도 있었다. 한 번은 악단 소속의 바순주자의 연주실력이 형편없다고 면박을 줘서 크게 다툰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일로 바순주자는 바흐와 싸움이 붙었고, 바흐는 도중에 칼(!)을 바순주자에게 정당방위로 이용하게 된다. 이 일로 바흐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지는 일이 발생한다.

일설에 따르면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것으로 가볍게 푸가 한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흠좀무.

2.2. 바흐의 일족

바흐 집안이 B의 일족음악가 집안이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외에도 음악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큰아버지인 하인리히 바흐, 아들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와 요한 미하엘 바흐의 작품도 J. S. 바흐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자주 연주되고 있는 편. 그 중에도 J. S. 바흐와는 인지도부터가 넘사벽이지만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그나마 유명한 편이다.

3. 주요작품

바흐의 작품들은 바로크 위법의 정점에 선 작품들이며, 푸가를 포함한 작품들이 많다. 작품 목록은 장르별 구분에 따라 BMWBWV로 정리되어 있다.

3.1. 독주 건반악기 작품

  •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1권 BWV 846-869
  •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2권 BWV 870-893
  • 토카타와 푸가 라 단조 BWV 565 : 파이프오르간용 작품. # ##
  • 인벤션 BWV 772-786
  • 신포니아 BWV 787-801
  •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
  • 가의 기법 BWV 1080
    푸가의 기법이 어떤 악기로 연주되어야 하는지는 바흐의 아들 C.P.E.바흐가 출판한 원본 악보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작품은 혼자서 건반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 가능하며, 바흐는 독주용이 아닌 작품은 정말로 독주로는 절대 연주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썼다.

3.2. 현악 작품

3.3. 관현악 작품

  • 현악 모음곡 BWV 1066-1069
    모음곡 제3번의 두 번째 곡인 〈G선상의 아리아〉가 있는 바로 그 곡이다. 그 외에도 제 2번의 마지막 곡인 Badinerie도 유명한데, 노키아 휴대폰 벨소리로 쓰였다.
  • 악의 헌정 BWV 1079 : 다양한 악기편성으로 연주할 수 있다.

3.4. 성악 작품

3.5. 협주곡 작품

4. 함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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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최근의 음악계에서는 이 별명을 쓰지 않는 것이 관행이다. 이러한 별명들의 대다수는 원래 붙여져 있던 것이 아니라 아시아 권에 서양 음악이 유입되면서 일본에서 붙여진 것들이다. 게다가 엄연히 비 서양권 음악이 존재한 상황에서 음악의 아버지라고 치켜부르는 것이 얼마나 무식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해서 서구권에 유학을 가서 음악의 아버지나 음악의 어머니 같은 말을 하면 개드립퍼로 취급을 받게 된다. 한때 음악의 어머니라는 별명이 붙여진 헨델과 부부아니냐는 개드립이 초딩들사이에서 유행하기도 했었다(...).
  • [2] 독일어로 실개천이 bach라는 점을 이용한 말이라고 한다. 항간에는 자신의 아들(!)인 바흐에게 한 말이라고도 한다.
  • [3] 드뷔시가 했다는 말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아르헨티나의 작곡가 마우리치오 카겔이 한 말이다.
  • [4] 악보를 손수 베끼면서 공부했다고 한다. 흠좀무.
  • [5] 그 시절에는 아이들이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아서 되도록 아이를 많이 낳는 게 흔했다.
  • [6] 공작의 휴가에 따라갔었다.
  • [7]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도 친하게 지냈다.
  • [8] 바흐 생전에 출판된 곡 중 하나.
  • [9] 돌팔이 안과의사에게 백내장 치료를 받아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 돌팔이가 유명해서 헨델도 이 자에게 치료받고 되려 악화되어 실명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 [10] 바흐가 죽기 휠씬 전에 작곡을 중단하였다. 푸가의 기법의 마지막 악장에 나온 말(사실 아들이 서술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죽기 직전에 작곡한 곡은 간단한 코랄곡이었다.
  • [11] 하지만 이 일화에 대해 진위 논란이 있다.
  • [12] 당시 유럽인 평균 신장은 161cm 정도였다.
  • [13] 하프시코드의 갯수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1065는 하프시코드가 4대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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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6 16: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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