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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타 히데이에

last modified: 2015-03-31 04:06:00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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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喜多秀家
1572~1655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 아명은 하치로.우키타 나오이에의 장남[1]으로, 비젠 오카야마 57만 4천석의 다이묘였다. 도요토미 정권의 5대로중 한 사람이었으며, 별명은 비젠의 재상(備前宰相). 큰 키(약 170cm)에 미남자였으며, 아버지[2]와는 정반대로 성실하고 인정 깊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1581년 아버지 나오이에가 병사하자,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1582년 가독을 계승하고 영지를 보장받는다.
당시 쥬고쿠 공략 중인 하시바 히데요시 군에 편입되어 빗츄 다카마스성 공략에 참전하지만 아직 어렸으므로, 실제 지휘는 숙부인 키타 다다이에가 대신하였다.

노부나가 사후에는 히데요시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되는데, 성인이 되면서 히데요시의 이름에서 한 자(히데)를 받았으며, 1586년 히데요시의 양녀이자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인 고히메(豪姫)를 정실로 삼는다.

이러한 경위로 히데이에는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강력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고, 또한 이에 부응하여 히데요시 생전에는 5대로의 한 사람으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였으며, 사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 참가 무장중 가장 많은 수의 군사[3]를 이끌고 참가하여 분전하는 등, 충성을 다했다. 우키타 가가 아닌 도요토미 가의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강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총대장이 되어 참전하였다가 행주대첩권율의 조선군에 대패하고 자신도 부상을 입는다. 하지만 벽제관 전투나 제2차 진주성 전투[4]에서의 승리로, 주나곤(中納言)에 임명되기도 했다. 히데이에는 임진왜란의 굵직한 전투에 이름을 올리고, 나름대로 성과를 올리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를 귀여워 한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굴복시키게 되면 조선의 통치자로서 히데이에를 임명할 계획이었다고도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때는 서군에 속하여 초반에는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끄는 동군과 격전을 펼쳤으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등의 배신으로 전세가 급속히 불리해지자 결국 패배, 시마즈 요시히로의 영지로 도망친다.

곧 시마즈씨가 그를 숨기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요시히로의 아들 마즈 다다쓰네에 의해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겨진다. 이후 다다쓰네와 처남인 마에다 도시나가의 탄원으로 처형은 면하고 구노산 도죠쿠에 유폐되었다가 곧 하치죠지마(八丈島)[5]으로 보내진다.[6] 여담으로, 일본 역사상 최초로 유형에 처해진 인물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형은 율령제 초기부터 있었다.

시마즈 가와 마에다 가의 후원으로 유배지에서도 풍족한 생활을 했다고 하나, 풍랑으로 인해 잠시 하치죠지마로 상륙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부하에게 술을 얻어 마셨다는 일화나 하치죠지마의 대관에게 주먹밥을 얻어 먹었다는 일화, 또 밥을 더 달라고 해서 주먹밥을 만들어 아들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일화 등, 그가 불우하고 궁핍하게 일생을 보냈다는 안습전설도 있다.

유배지에서 50여 년을 보내게 되고, 결국 본토로 돌아오지 못한 채 1655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여담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한 다이묘중 가장 오랫동안 생존한 인물이다.

히데이에가 하치죠지마에서 낚시를 했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해변에는 1997년에 오카야마현에서, 오카야마성 개성 500주년[7]을 맞아 히데이에와 부인 고히메의 석상을 세웠다.

두 석상은 옛 영토인 비젠과, 옛 거성(居城)인 오카야마성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이 해변은 하치죠지마에서 석양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듯.


두 사람의 석상.

어린 나이에 가독을 승계하고, 당대의 절대 권력자인 히데요시의 신뢰와 지원을 받았던 축복받은 전반기와, 그와는 반대로 유배지에서 50여 년간이나 곤궁한 생활을 하고 여생을 마친 중후반기. 말 그대로 천당과 지옥을 오간 인물이다.

팬들 사이의 애칭은 도련님(坊ちゃん). 2ch 등지에서는 '수영을 잘 한다'는 동인설정이 있는데, 이는 2ch에 투고된 '오사카 전투 당시 히데이에가 하치죠시마에서 헤엄쳐서 오사카까지 왔다'는 내용의 글이 그 발단. 이리하여 '하치죠시마에서 오사카까지 헤엄쳐서 왔다'는 농담이 성공적으로 정착하였다.

임진록 2에선 도끼를 들고 싸운다. 때문에 한국 위키백과 내용에 무기가 도끼로 되어있다. 흠좀무. 2에서는 사실상 조선 침공에 관한 모든 일을 총괄하는 사령관급의 위치로 그려지고, 심지어는 시니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의 다툼도 말리는 등의 스토리 비중이 많은 편인데 반해, 차기작인 조선의 반격에서의 스토리 비중은... 공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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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다 히데이에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 능력치는... 말을 말자. 전형적인 C급 무장이다. 그래도 백만인의 신장의 야망에서는 합전 79로 상향.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인 무장으로 있을 줄 알았으나, 창조에서 B급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상향되었다.

지휘봉의 행방에서도 등장한다. 비주얼 신장 168cm, 비주얼 연령 21세, 취미는 독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우키타 가의 당주. 상당히 프라이드가 높고 제멋대로 구는 성향이 있어 초반에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다루는데 애를 먹었다. 그러나 한 번 미츠나리를 인정한 뒤로는 그를 신뢰한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에 누구보다 분노한 인물. 사실 지금의 성격은 어린 나이에 우키타 가를 이었기 때문에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한 노력의 발로.

명실공히 서군의 주력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중앙 전선을 유지. 그러나 잇다른 배신으로 서군이 무너지면서 가신 아카시 테루즈미에 의해 정신을 잃고 강제로 전장에서 이탈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비젠 57만 석을 아까워하지 않고 반납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을 돌며 도쿠가와를 따르도록 다른 다이묘들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3년 후 하치죠시마에 은거.

태합입지전5 에서는 통솔이 79에 전투쪽에 치우친듯한 능력치이다. 군학이 1레벨인게 실로 안습하지만 족경은 그나마 3레벨이고 기마, 철포도 2레벨이라 그냥저냥 써먹을 수 있다. 의외로 건축도 2레벨. 문제는 등장하는 시나리오 2개에서 모두 다이묘인데, 1582년은 노부나가->히데요시 천하이며, 1598년은 세키가하라에서 서군가담해서 승리하면 히데요리 천하가 되는지라 천하를 잡기 위해선 심히 귀찮아진다는 것. 사실 이건 다테 마사무네도 마찬가지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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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의붓형 미우라 도쥬마루는 나오이에의 친아들이 아니다.
  • [2] 아버지 나오이에는 평생을 모략과 암살, 음모로 점철한 인물.
  • [3] 1만 7천명. 1위는 동군의 이에야스로, 약 3만명.
  • [4] 1차 진주성 전투의 조선군 지휘관은 김시민. 이 때는 말 그대로 일본군의 참패. 지휘관은 호소카와 타다오키였지만.
  • [5] 도쿄에서 남쪽으로 287km나 떨어진 섬.
  • [6] 이는 탄원 때문이라기보다는 우키다 개인 자체는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우키다 히데이에는 별다른 능력도 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아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고 실제로 그 자신이 노력하긴 했지만 별다른 재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대부분의 전략이나 전술, 정치적 사안 처리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몫이었고 우키다 히데이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으니, 이에야스도 별다른 위협은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그가 반역을 꾀한다 하더라도 그를 보좌하거나 도울 만한 인물들은 이 시점에서 죄다 처형되거나, 자기 목숨 지키기도 급급한 판이었다.
  • [7] 500년 전인 1597년은, 히데이에가 오카야마성을 대대적으로 개수한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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