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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last modified: 2015-07-01 01:39:12 by Contributors

영어 명칭Washington Naval Conference
장소워싱턴 D.C.
시기1921년 11월 12일 ~ 1922년 2월 6일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국가별 상황
3.1. 미국
3.2. 영국
3.3. 일본
3.4. 프랑스이탈리아
4. 조약 내용
5. 결과
6. 조약형 해군 시기 함선들
7. 기타
8. 관련 문서
9. 관련 항목


1. 개요

1921년~1922년 두 해에 걸쳐 타결되어 1936년 말까지 예고된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5대 열강국가의 해군 군축조약. 끔찍했던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가 더 이상의 대규모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의 일부로, 특히 일본의 해군팽창을 억제하는 데 공헌한 이 조약은 1934년 일본제국 해군에 의해서 2년을 남겨두고 깨지게 된다.

2. 배경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원인으로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로 늘 거론되는 것이 영국독일의 건함경쟁이다. 독일의 빌헬름 2세와 해군제독 알프레히트 폰 티르피츠가 추진한 건함정책에 맞서, 1 > 2+3 정책이라고 해서 해군력 2위, 3위 국가의 전력합계보다 더 강력한 해군력을 상시적으로 유지한다는 영국의 전통적인 해군전략을 유지하기위한 영국의 대규모 건함, 그리고 이에 자극받은 다른 열강들의 건함경쟁 합류는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1차대전 이전 국제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이유였다.

결국 이런 미친듯한 건함경쟁은 전후 승전국들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다. 건함경쟁의 당사자 중 하나인 독일은 완전히 아웃되었고,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으로 인해 다시 부활할 가능성도 제로나 다름 없었다.[1] 하지만 여전히 다른 5대 열강국가는 건재했고, 건함을 계속하고 있었다. 특히 1차대전으로 신흥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서태평양의 패권국가로 발돋음한 일본을 중심으로 한 건함경쟁은 새로운 전쟁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를 만들어냈다. 실제 미국에서는 1920~1921년 사이에 건조스케줄상 미국과 일본의 전함총량이 균형에 도달하는 1923년에 전쟁이 터진다는 예측을 하는 저서들이 횡행하고 있었을 정도다.

3. 국가별 상황

3.1. 미국

미국은 1차대전에서 별 피해도 안 입고 돈만 잔뜩 벌었다. 참전 자체도 1917년의 일이었으며, 그동안 유럽국가들에 돈 빌려주고 물건을 팔아먹었으며 참전 직후에는 대규모로 병력을 파병하여 최종적인 전쟁승리에 기여했다. 때문에 국제외교가에서 미국의 입지와 영향력이 상당해졌다. 하지만 아직 군사력으로서의 미국은 별것 아닌 상황이었다.

그러는 동안 미 해군은 대대적으로 건함경쟁에 나섰다. 유럽 국가들이 피터지게 싸우는 중이던 1916년에 8척의 주력함을 건조하기로 했으나, 1918년에는 28척(…)으로 늘려서 의회에 예산달라고 징징거렸다. 행정부와 의회가 돈 없어! 하며 삭감했지만 그래도 16척.

미 해군이 이러한 요구를 하게 된 배경은 바로 영일동맹이었다. 미 해군은 대서양 방면에서 영국을, 태평양 방면에서 일본을 동시에 상대해야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있었다. 당시 미 해군은 두 해역에서 강대국을 상대로 하는 양면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물론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양면전쟁을 한 적은 있지만 그때는 상대가 스페인 하나뿐이었고 스페인의 국력도 메롱인데다가 이들도 양면전쟁을 해야 했던 상황이므로 사실상 논외였다.

미 행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외교적 이상주의로 타개하고자 했다. 이상주의자였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국제연맹 제안으로 시작된 미 행정부의 이상주의는 워런 하딩 행정부에도 이어졌다. 결론은 우리랑 남들이랑 다 같이 억제하면 세계는 평화로워염 데헷.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 생각을 했어요?

3.2. 영국

아무리 세계최강, 팍스 브리타니카의 대영제국이라지만 독일과 미칠듯한 건함경쟁을 벌이고, 5년동안 세계대전을 치루며 막대한 전비를 소모한 전후에는 건함경쟁을 벌일 힘이 없었다. 이미 팍스 브리타니카는 유지하기 버거워지고 있었으며, 막대한 전비지출로 전후 경쟁은 커녕, 기존에 건조한 해군 주력함들의 유지조차 힘든 실정이었다. 독일에게 베르사유 조약으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기로 되어있었지만, 독일이 전쟁배상금을 낼만한 여력이었나??

더군다나 영국은 세계 모든 해역에서 제해권을 유지해야하는 판국이었다.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이상 미국과는 대서양을 두고 대립하는 가상적국이었으며, 프랑스와는 연합국이라고 하기에는 영원한 숙적이자 라이벌이고, 이탈리아지중해에서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세력이었으며, 러시아가 붕괴된 지금 일본과의 영일동맹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팍스 브리타니카를 외치며 기존의 1 > 2+3 정책의 유지를 한다는 것은 제국의 해체를 가속화시키는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했다. 영국으로서는 어떻게든 건함경쟁을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의 이상주의에 따른 제안을 영국이 적극 찬동했던건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3.3. 일본

러일전쟁러시아 혁명으로 북방세력의 남하 걱정이 사라지면서 영일동맹이 사실상 무의미해지면서 일본은 독자적인 세력강화와 이를 뒷받침하기위한 막강한 해군력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여기에는 러일전쟁 승리, 특히 쓰시마 해전에서의 승리로 힘이 강해진 해군의 강력한 요구와 군부의 팽창주의적 사고가 결합되어 있었으며 해군은 1916년 84함대, 1918년 86함대에 이어 전후인 1920년에 88함대 편성을 요구, 의회의 승인을 받고 예산까지 타냈다.

88함대란 말 그대로 전함 8척과 순양전함 8척으로 구성된 해군 주력함대의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론이 나온 이유는 아키야마 사네유키와 사토 데츠타로가 러일전쟁 직후 세계해전의 역사와 러일전쟁에서의 해전상황을 분석하여 포격전함 8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중심으로 해군전력을 구축하고, 예비전력으로서 노후화된 포격전함 8척과 장갑순양함 8척을 보유하는 것- 즉, 전함 총 16척과 갑순양함 16척 -이 이상적이라는 결과를 내면서 일본해군에서 88함대 이론이 전개되었던 것이다.[2] 일본 해군은 보유함 대부분이 건조된지 오래된 노후함이거나 러일전쟁 당시 노획하여 편입시킨 노후함이라는 이유로 신조함의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사실 그 노후함들은 이미 예비전력이었다. 즉, 핑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1921년 시점에서 국가예산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해군의 건함사업에 자연스레 반발이 일어났다. 참고로 총력전급으로 예산을 국방비에 쏟아붓는다는 북한이 전체 예산의 30%를 국방비로 쓴다는 걸 생각하면 저건 정상적인 건 아니다.

19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함은 주력화기로 11~12인치 거포 4문을 탑재하고, 장갑순양함은 8~9.4인치 중간포 4문을 주력화기로 사용하는 물건이어서 당시 일본재정상황으로도 88함대는 충분히 보유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일본해군은 32척의 주력전투함은 환상이나 다름없고 16척이 실질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포다수탑재함인 드레드노트와 일반적인 장갑순양함을 넘어서는 덩치 및 전함의 주포와 동등한 화포를 다수 탑재하는 빈시블급 순양전함이 등장하면서 주력함 건조비용이 척당 3배 이상 치솟아 버렸고, 일본내에서 엄청난 논란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이 시기는 제국시절 일본에서 그나마 정상적이던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였고, 총리대신은 민간인이자 순수한 관료, 정치가인 하라 타카시로 군부의 전횡에 맞서 민간정부의 우위를 지키기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하라 다카시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의회내각은 늘어나는 해군예산을 억제하고 군부의 전횡을 국내외적 정치환경으로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미국의 군축제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약으로 해군은 가히 침몰..

이 회의에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다 하지만 이 회의의 목적이 목적인 만큼 대한민국 독립 등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3.4. 프랑스이탈리아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주력함 건함경쟁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있는 입장이었다. 이는 두 나라 해군전략에 기인하는데, 프랑스는 영국의 제해권에 대한 전면도전대신 통상파괴전과 어뢰정을 중심으로 한 기습, 그리고 현존함대 전략에 치중했다. 이탈리아 역시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았으며 해군의 작전해역이 본국 주변에 국한되어서 대규모 함대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러나 전후의 국제적 환경이 달라지면서 양국 역시 주력함 건함의 필요성을 느꼈는데, 두 나라 모두 승전국임에도 피해는 엄청나게 입고 전비지출도 막대해서 건함경쟁에 나서기에는 국가적 여력에 제약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 와서 건함경쟁을 한들, 영국이나 미국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양국은 공통적으로, 괜히 건함경쟁을 해서 격차가 더 벌어지느니 차라리 외교적으로 협상을 통해 미국·영국과의 해군력 격차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4. 조약 내용

여기서는 대략적인 조약 내용을 소개하며, 부가설명은 별도의 표시로 추가한다.

  • 1921년 11월 12일부터 모든 주력함의 신규 건조는 10년동안 중단한다. 현재 건조중인 주력함은 모조리 개발살 건조중단 및 폐기하고 계획중인 함선은 폐기한다.

    • 예외 1 : 미국은 건조중인 콜로라도급 전함 2척의 완공을 허가받고 대신 건조가 끝나는 대로 기존 전함 2척(BB-28 델라웨어 / BB-29 노스 다코타)을 퇴역시킨다.

    • 예외 2 : 영국은 아래의 조항들을 지키는 선에서 2척에 한하여 주력함 신규 건조가 가능하다. 물론, 신규건조를 할 경우 다른 전함들을 폐기해야한다.

      예외 1, 2는 당시 일본이 이미 16인치급 전함을 2척 보유했기에 그 비율을 맞추기 위한 조항이었다. 미국은 사실 일본의 16인치급 전함중 무츠도 폐기하라고 요구했지만 일본이 강력히 거부했다. 일본이 강력하게 거부할 만도 한게, 무츠는 회의개시 직전에 미국기준으로도 의장을 거의 다 마치고 시험항해마저 종료하여 아주 사소한 공사만 마치면 바로 완공판정을 받을 수 있는 상태였고 건조과정만 따져도 완성도가 95% 이상이였다. 따라서 폐함에 반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자 심정이었으나, 그 결과 일본은 미래의 적국에게 16인치 주포를 탑재한 전함 4척을 추가로 허용하는 바람에 전략, 전술상으로 크게 불리[3]해졌다.

  • 미·영·일·프·이 5개국의 주력함 및 항공모함 보유비율은 5:5:3:1.75:1.75로 한다.

    협상과정에서 미국은 국무부의 암호부서 "Black Chamber"에서 일본의 외교암호를 해독하여 기밀사항-대미 7할을 관철하되 미국이 강경하게 고집할 경우 6할 유지 및 무츠의 완공함 인정을 받아내라는 내각명령을 알아챘고, 결국 강경대응한 끝에 일본은 대미 6할 수용 및 무츠 보유의 대가로 미영에게 16인치 포격전함의 추가보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보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헌데 이후 취임한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 국무장관이 암호해독을 신사(...)이라면서 암호부서를 폐지하고 부서 책임관이었던 Herbert Yardley 가 1930년대에 일본측 암호를 해독했다고 자랑하는 저서를 내면서 들통나 버렸다.[4] 이 폭로는 일본해군이 군축조약에 대해서 더 이상의 미련을 가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 이 비율에 따라 미국과 영국은 525,000톤, 일본은 315,000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175,000톤의 한계 내에서 주력함 보유가 가능했다.

      기준배수량 기준이다. 워싱턴 조약은 각 함의 배수량 기준까지 세밀하게 규정했는데 기준배수량은 탄약 적재 및 승조원 탑승이 된 상태이나 연료 등은 싣지않은 상태를 기준배수량으로 규정했다. 이후 이 규정이 기준배수량의 기본이 된다.

    • 역시 같은 비율에 따라 항공모함 보유한도로 미국 및 영국이 135,000톤, 일본이 81,000톤, 프랑스와 이탈리아 60,000톤이라는 상한선이 생겼다.

  • 주력함의 최대 배수량은 35,000톤을 넘기면 안되며, 함포구경의 최대치는 16인치(406mm)이다.

    예외가 가장 많은 조항이다. 일단 아무리 허용된 배수량 쿼터가 많아도 16인치 함포를 단 전함을 각국의 동의없이 함부로 추가건조할 수 없으며, 영국의 순양전함 후드처럼 이미 만들어진 상태인데 35,000톤을 넘기는 경우에는 협상의 결과에 따라 존속이 결정되었다.

  • 항공모함의 최대 배수량은 27,000톤이다. 항공모함의 함포구경 최대치는 8인치(203mm)이다.

    항공모함이란 간판만 붙인 채 수상기 몇대 정도만 보유하는 전함을 만드는 꼼수를 금지하는 조항이다. 따라서 이런 꼼수를 써도 제대로 된 전함으로 만들 수 없는 10,000톤 미만의 항공모함은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성립하기 전까지는 예외대상이 되었다. 이럴 경우 미국은 7천톤대의 랭글리를, 일본도 7천톤대의 호쇼를 조약외 항공모함으로 취급하면서 보다 신형의 항공모함을 허용된 항공모함 총배수량 범위내에서 추가로 만들 수 있었다.

    • 예외 : 각국은 각 2척씩, 건조 중이던 주력함을 재활용하여 항공모함으로 개조, 건조할 수 있다. 이럴 경우의 배수량 제한은 33,000톤으로 늘어난다.

      도크에서 한참 건조중이던 함선을 몽땅 박살내고 고철로 처리해야 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국가들에게 일부 함선을 재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조항이다. 이 조항에서 배수량 제한이 늘어난 것은 기존의 전함과 순양전함의 배수량이 크기 때문에 이들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하더라도 배수량을 줄이기 힘들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조항을 이용해서 항공모함으로 변신한 전함과 순양전함들은 함령이 오래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어느 정도 활약을 하게 된다. 당장 덩치가 커서 신형 항공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베아른급 항공모함처럼 예외는 있었다.

  • 주력함 및 항공모함을 제외한 '보조함'들의 함포구경 최대치는 8인치(203mm)이며, 최대배수량은 10,000톤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단, 수송선 및 지원함은 이 규정에서 제외한다.

    이 조항은 10,000톤급 이상의 배를 만들고 이 배가 구축함이나 경순양함 드립을 치는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1900년대까지만 해도 8~9.4인치 포 다수을 탑재하는 상비배수량 15,000톤대의 장갑순양함들은 영국을 중심으로 여러 척이 만들어졌고, 함포의 발달을 고려해보건데 순양함에는 공수주의 균형을 위해서는 그 이상의 배수량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약토의 당시에서는 5.5인치~6인치 포를 주력으로 하는 6,000톤에서 7,500톤대의 경순양함들이 만들어지고있던 시점인데다 당사자들이 전함과 항공모함에만 신경쓰고 순양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연구를 한 나라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미-일이 보유한 8인치포 4문 장비 장갑순양함의 상비배수량 상한인 10,000톤을 '보조함' 기준배수량의 상한선으로 적당히 타협하게 되었다. 바로 이렇게 엉성하게 순양함의 배수량 상한을 정해놓는 바람에 조약형 중순양함들은 "양철판 순양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하나같이 극심한 방어력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 폐기하는 군함을 타국이 이용할 수 없게 해야한다.

    수출하지 말라는 소리다. 이외에도 형식상으로 독립시켜놓은 식민지 종속국에게 서류상으로만 판매했다가 유사시 다시 끌어와서 재사용하는 것을 금지할 목적이기도 하다.

  • 주력함 및 항공모함은 함령이 20년이 넘어야 대체건조가 가능하며, 대체건조시에도 이를 다른 조인국들에게 통보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대신, 사고로 손실된 함정의 대체건조는 언제든지 가능하다.

    전력의 현상유지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조항이며, 대체건조시기를 늦춘 이유는 당장 함선건조예산을 크게 줄이기 위함과 동시에 새로 등장하는 신기술을 함선에 빠르게 적용시켜서 숫자상으로는 균형이 맞으나 실제로는 개함간 능력격차가 커져서 전력균형이 안맞는 문제를 막기 위함이었다.

    • 프랑스 및 이탈리아는 10년간의 주력함 건조금지 기간 종료 이후, 대체함 건조에 따른 퇴역함을 각 2척씩 훈련목적으로 보유가 가능하다.

      이는 주력함 비율이 가장 낮은 양국에 대한 일종의 혜택이다.

  • 미국, 일본, 영국은 조약상 명시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태평양 지역에서 해군기지를 현 상황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주력함 비율을 5대 3.5로 하자던 일본의 제안을 미국이 강력 거부하자, 그 대안으로 일본이 요구한 것을 미국과 영국이 수용했다.

  • 각국은 전시에 타국을 위해 건조 및 보유, 인도준비중이던 함정을 사용해선 안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장관이던 이 아자씨칠레오스만 제국의 주문을 받아 건조중이던 전함을 강탈한 것 때문에 추가된 조항.

  • 이 조약은 1936년 12월 31일까지 유효하며, 탈퇴하는 국가는 2년 전에 사전고지해야 한다.

    조약의 실효일을 미리 정해둠으로서 조약이 지속되지 않을 경우 각국이 미리 대비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는데 의미가 있다. 또한 탈퇴하는 국가가 독자적으로 해군 전력을 증강할 것에 대비해서 조약에 아직 남아있는 국가들이 서로 협의를 통해 조약을 개정하고 전력을 증강할 여유가 있어야 하므로 2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 말고도 수두룩하다. 각 조항마다 부칙도 수두룩 달려있고, 항공모함의 조건부 개장 옵션이라든가, 장착가능 화포의 숫자 및 구경 제한도 더 자세하고, 폐기처분하는 주력함의 폐기방법 및 그 수단 등등….

함의 크기의 기준이 전장이 아닌 배수량(무게)으로 정해진 이유는 파나마 운하의 존재 때문. 미국은 함대의 운용을 위해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게끔 함선의 전폭에 제한이 있었고, 커다란 함을 만들기 위해선 전폭을 줄이는 대신 그만큼 전장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전장을 기준으로 함선의 크기를 결정할 경우 미국에게만 불리해지는 규정이었던 것. 미국의 잔머리라고 할 수 있겠다(…).

5. 결과

그 어느 해전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만큼 많은 주력함을 침몰시킨 적이 없다. 당시 폐함처분된 함선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미국
    • 사우스 캐롤라이나급 전함 2척 - 사우스 캐롤라이나 / 미시간
    • 델라웨어급 전함 2척 - 델라웨어 / 노스 다코타
    • 콜로라도급 전함 1척 - 워싱턴
  • 영국
    • 드레드노트급 전함 1척 - 드레드노트
    • 벨레로폰급 전함 3척 - 벨레로폰 / 슈퍼브 / 테메레르
    • 세인트 빈센트급 전함 2척 - 세인트 빈센트 / 콜링우드
    • 넵튠급 전함 1척 - 넵튠
    • 콜로서스급 전함 2척 - 콜로서스 / 허큘리스
    • 오리온급 전함 4척 - 오리온 / 모나크 / 컨커러 / 썬더
    • 킹 조지 5세급 전함[5] 3척 - 킹 조지 5세 / 센츄리온 / 에이잭스
    • 애진코트급 전함 1척 - 애진코트
    • 에린급 전함 1척 - 에린
    • 인빈시블급 순양전함 2척 - 인도미터블 / 인플렉시블
    • 인디패거티블급 순양전함 2척 - 뉴질랜드 / 오스트레일리아
    • 라이온급 순양전함 2척 - 라이온 / 프린세스 로열
  • 일본
    • 카가급 전함 1척 - 토사
    • 키이급 전함 2척 - 키이 / 오와리
    • 아마기급 순양전함 2척 - 아타고 / 타카오
  • 프랑스
    • 노르망디급 전함 4척 - 노르망디 / 랑그도크 / 가스코뉴 / 플랑드르
  • 이탈리아
    •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 1척 - 레오나르도 다 빈치
    •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급 전함 4척 -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 /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 마르칸토니오 콜론나 / 프란체스코 모로시니

이 모든 전함 및 순양전함들이 현역이었던건 아니다. 저중엔 대전 직후 바로 퇴역한 함선, 건조중이던 함선, 예비함이던 함선, 현역인 함선이 다 섞여 있다. 그러나 퇴역이건 예비역이건 얄짤없이 폐기처분해야 하는 강력한 군축조약의 규정상 모두 몇 년 내로 폐함되어서 고철로 처분되었다.

위의 함선들 외에도, 건조중이던 주력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장 가능하다는 규정을 이용해 항공모함으로 용도변경된 전함도 상당수 있으며, 군축조약 타결 시점에서 아직 건조가 시작되지 않은 프로젝트 함선들도 상당하는 걸 생각하면 워싱턴 군축 조약의 여파는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보조함 전력비율에 대한 규정이 없었지만, 이는 1930년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통해 완성되었다. 사실상 인류가 만들어 낸 최대규모의 군축 성과이다.

특히 영국은 이 군축조약으로 엄청난 해군력 유지부담을 한번에 훌훌 털어버리게 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무리한 건함경쟁을 할 필요가 사라지게 되면서 세계는 전쟁없는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대신 지상전을 하면 되지!

그러나 일본은 이 군축조약에 매우 불만이었다. 총리대신 하라 타카시가 군축조약을 보기 직전에 정적에 의해 암살된 이후, 일본 정계는 어수선해졌고 민간정부와 의회의 힘은 차츰 약화되어 갔다. 해군은 해군대로 미국 및 영국 대비 겨우 60%라는 해군전력 수준에 강한 불만을 나타내며 민간정부를 맹공격했다. 해군 장교 실업자도 대거 양성되었고 말이지

반면에 조약파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이 조약의 진정한 의미는 일본이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영/미를 5로 묶은 것이다.'라면서 일본에 유리한 조약으로 평가했다. 하버드대 유학과 주미대사관 무관 근무로 미국의 엄청난 공업생산력을 체감하고 있던 야마모토는 본격적인 '건함경쟁'을 하게되면 1:10까지 벌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는 2차대전 말기에 실제로 증명되었다. 또한 조약대로라면 양 대양으로 전력을 나누어야 하는 미국, 전 세계에 전력이 분산된 영국에 비해 일본은 해군력의 집중이 가능했다. 즉, 저 60%로도 여차하면 미영 해군에 대한 우세를 점할 수가 있었다. 진주만 공습에서도 그랬고. 한마디로 말해 일본의 생각이 전혀 잘못된 것.

결국 미쳐 돌아가던 일본 군부는 1934년 고작 2년을 남겨놓고 조약 파기를 선언하며 다시 건함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일본은 조약형 경순양함이라는 미명하에 모가미급 중순양함을 건조해서 미국, 영국 등을 속이고 조약 탈퇴후 바로 8인치 함포로 교체하여 중순양함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원래 8인치 함포는 1만톤급 미만에서 정상적으로 운용하기 힘들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므로 이 때 일본이 배수량을 속였을 것이라고 대체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실재 일본의 모가미급은 8인치 함포를 단후 기준 배수량이 12,400톤(만재 15,057톤)이 넘어가게 된다.

1930년 런던 군축조약 이후 기준 배수량 1만 톤 이상 중순양함
연도국가함급기준 배수량만재 배수량
1935년일본모가미급 중순양함12,400 톤15,057 톤[6]
1939년독일어드미럴 히퍼급 중순양함14,050 톤[7]18,200 톤
1943년미국볼티모어급 중순양함14,733 톤17,273 톤
1948년미국디모인급 중순양함15,653 톤18,991 톤

이후 각국이 편법을 사용하게 되면서 중순양함의 배수량이 사실상 1만톤 ~ 2만톤 사이인 호칭으로 변질되게 되었다. 원래 중순양함과 경순양함이 모두 1만톤 미만이였던 것을 생각하면 조약은 유명무실해 진것이다.

미영의 해군장교들은 군축조약의 진정한 승리자는 일본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예산을 타낼 핑계가 생겼으므로 같이 건함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태평양 지역에 있던 미국식민지인 필리핀, , 이크, 미드웨이와 하와이에서 요새설비 공사를 중지시킬 수 있었고, 어쨌든 일본은 모든 종류의 군함들을 망라한 총배수량이 미국 대비 5할도 안되는 판(전함만이라면 6.7할)이라 타국과는 달리 대규모의 함선건조가 조약내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에 건조된 주력함들을 조약형 전함이라 부르며, 이 시기 해군을 역시 조약해군이라고 부른다. 조약 해군 시기는 주력함 보유의 제한으로 보조함 및 항공모함에 대한 연구 및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거함거포주의가 종말을 맞이하고 항공모함 중심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기반이 된다.

6. 조약형 해군 시기 함선들

  • 영국
    • 이글급 항공모함 - 캐나다급 전함 2번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
    • 커레이저스급 항공모함 - 커레이저스급 순양전함 1, 2번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
    • 퓨리어스급 항공모함 - 퓨리어스급 순양전함 1번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
    • 넬슨급 전함 - 미-일의 16인치 전함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위해 건조가 허가된 영국의 16인치 전함
  • 미국
    • 렉싱턴급 항공모함 - 렉싱턴급 순양전함 1번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 2번함인 새러토가도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다.
  • 프랑스
  • 일본
    • 아카기급 항공모함 - 아마기급 순양전함 2번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
    • 카가급 항공모함 - 가가급 전함 1번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
    • 류조급 항공모함 - 조약시기 신규설계함. 10,000톤급 이하는 모두 보조함 취급하는 조약상 헛점을 이용해 9,700톤급(…)으로 만든 경항공모함이다.

7. 기타

하딩 대통령이 개최한 국제회의에서는 해군 군축문제외에도 중국문제와 영일동맹 문제도 같이 다루어졌다.

중국문제를 다룬 회의에서는 일본이 중국정부에게 관철시킨 21개조 요구를 취소시키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인정된 산동성의 독일 이권들을 중국에게 넘기도록 하는 한편, 공평한 문호개방을 내세워서 중국의 현유영토의 유지와 균등한 중국내 상업기회 보장 등을 요구하는 9개국 조약을 성립시켰다. 이 때 중화민국 대표로 참석한 고유균(꾸웨이진,顧維鈞)은 불리한 정세하에서도 중국의 국익을 되찾아왔다면서 "민국외교영웅" 등으로 불리며, 군벌내전에서 총리후보로 단골추대되는 등 여러 정파들의 추파를 받았다.

영일동맹은 이미 제정 러시아독일 제국이 대전이 끝나면서 사라지면서 그 효력이 의심받게 되었지만, 미국과 밀착관계에 있던 신대륙오세아니아영연방 국가-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영일동맹이 지속될 경우 미일간의 전쟁에서 자치령의 이익보호를 위해 종주국인 영국과 전쟁(!)을 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협박(?) 및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독주를 영국이 묵인할지도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 등이 겹치면서 일본의 폭주를 견제하는 목적으로 영일동맹을 해소하고 이를 대체하는 조약으로서 중국 지역에 다대한 이권을 가진 미국/영국/일본/프랑스 4개국이 이권보장을 추구한다는 4개국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모든 종류의 회의에서 일본은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추구를 제한당하게 된 셈이다. 사실, 중국에서 벌어지는 일본의 팽창양상은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인 미국과 서유럽 제국들조차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 것이어서 일본의 팽창욕을 제한하려는 의식이 서양국가들에게 있었다. 물론 이 사건이 오히려 일본의 팽창욕을 자극해서 20년 뒤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고 말긴 하지만..

그리고 받아먹기만한 감은 있지만 워런 하딩 최고의 업적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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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7-01 01: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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