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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게이트 사건

last modified: 2015-03-11 21:35:56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과정 및 결말
3. 진실을 파헤친 사람들
4. 후일담
5. 같이 보기


1. 개요

Watergate Scandal

1972~1974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최대의 정치 스캔들.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2015년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하야한 사건의 계기가 된 스캔들이다. 음모론이 사실, 실제였다고 밝혀진 사례 중 하나이기도 하다.

2. 과정 및 결말

사건은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에 위치한 민주당 선거운동본부에 괴한들[1]이 침입하여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다 경찰에 현장에서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경찰 수사로 5명이 검거되었는데 처음에 이들은 단순 절도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는데 단순 절도범에 어울리지 않는 거물급 변호사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들을 변호하고 결정적으로 일당 중 1명이 가지고 있던 수첩에서 백악관 사무실 전화번호가 발견되면서 언론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일이 점점 커지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CIA를 이용해 워터게이트 사건을 은폐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2] 이때 은폐를 계획한 내용이 녹음[3]되어 나중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버린다.

1973년 1월 도청기를 설치한 자가 유죄 판결을 받고 상원 청문회가 열려 전국에 TV 중계까지 되었으며 결국 청문회에 나온 닉슨의 부보좌관이 '은폐 내용이 녹음되었다' 고 말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특별검사와 상원 특별위원회는 '녹음 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하라' 고 백악관에 요청했고 닉슨은 국가 안보를 위해 법무장관에게 이것을 무효로 하고 특별검사를 해임하라고 명령했지만 법무장관, 법무차관이 이를 거절하고 줄줄이 사임한다.[4]

이 당시 닉슨은 기자회견에서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I'm not a crook)" 라는 유명한 개드립을 날리기도 했다.[5]

똥줄이 탄 닉슨은 테이프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합의를 하고 증거로 제출하지만 이때 기록 대부분을 삭제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결국 연방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녹음 테이프를 제출하라' 고 판결했고 닉슨이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들통났다. 미국 사회 전체가 벌집 쑤신 듯 되었고 끝까지 그를 지지하던 보수층마저 닉슨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6][7] 결국 의회의 탄핵이 가결되기 전인 1974년 8월 9일 닉슨이 자진 사퇴함으로서 일단락되었다. 대신에 테이프는 지켰다

일단 선거에서는 닉슨이 민주당 후보를 관광보냈던 탓에 민주당에서도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고 부통령[8]이었던 제럴드 포드[9]가 대통령 자리를 승계했다. 그리고 '대통령 사면' 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닉슨을 사면[10]한다. 이후에도 닉슨 본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개입했다는 걸 부정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사실 민주당사 도청 시도는 매우 사소한 일부분이다. 닉슨은 1968년에 당선되고 1971년부터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지만 베트남 전쟁과 반전 운동, 경제 불황으로 인기가 바닥이었다. 결국 불법적으로 막대한 비자금을 조성해서 광범위한 정치 공작을 진행했다. 민주당 정치인과 언론사 기자에 대한 미행, 도청, 공갈 협박, 강도 위장 침입, 유괴 및 습격단 조직, 민주당 정치인을 유혹하는 고급 창녀 동원, CIA와 FBI를 이용한 신상 털기, 조작된 정신병력 등의 허위사실 유포, 언론기사 조작 등등. 이런 방해공작으로 닉슨에게 가장 위협적이던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은 민주당 경선에서 자멸하고 최약체인 조지 맥거번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면서 매우 손쉽게 대선에서 승리한다. 독재 정권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공작 정치라고나 할까?

3. 진실을 파헤친 사람들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파헤쳐 진실이 밝혀지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들에게 중요한 단서를 계속 제공한 정보원이 있었는데 밥 우드워드는 이 사람을 깊은 목구멍(Deep Throat) 이라고 칭했다. 깊은 목구멍의 정체는 그 이후에도 드러나지 않다가 2005년에야 밝혀지는데 그 정체는 바로 사건 당시 FBI 부국장이었던 마크 펠트였다.[11] 펠트와 연락한 사람은 밥 우드워드였는데 둘의 인연이 기이하다. 우드워드가 해군 장교 재직 중에 백악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펠트를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조지 워싱턴 대학원 동창이었던 둘은 서로 친해졌고 펠트는 이후 우드워드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장교 제대 후 듣보잡 신문사에 있던 우드워드에게 중앙지로 가라고 해준 사람도 펠트였다고.

펠트가 우드워드에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과정은 첩보극을 연상시키게 한다. 우드워드는 펠트와 만나고 싶을 때 자기 집 창문에 빨간 깃발을 꽂은 화분을 놓았고 펠트가 이를 보면 미리 약속한 지하주차장에서 다음 날 새벽 2시에 만났다고 한다. 우드워드는 펠트가 어떻게 자기 집 창문을 볼 수 있었는지 아직도 미스터리라고 언급한 바 있다. 만약 펠트가 우드워드를 만나고자 할 때에는 뉴욕 타임즈의 20면에 시계를 그려놓았다고 한다. 그렇게 밥 우드워드가 정보를 물어오면 칼 번스타인이 주로 확인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종종 우드워드가 펠트한테 확인을 받기도 했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이 워터게이트 사건 폭로의 공로로 무명의 신참 기자에서 일약 전 미국인이 아는 대기자가 되었다. 이 2명은 1971년 워터게이트 건물 침입 사건부터 1974년 닉슨 사임까지 무려 3년 동안 오로지 이 사건에만 매달렸고 결국 대통령 퇴진을 이끌어내었다. 이런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한 장기간의 심층 취재와 보도는 매일 마감시간에 쫓기면서 속보 경쟁만 하고 있던 미국 신문, 방송에 일대 경종을 울리면서 탐사보도 저널리즘[12]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여기엔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펠트 이외에도 당시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이었던 벤자민 브래들리[13]와 사주였던 캐서린 그레이엄도 큰 역할을 했다. 브래들리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사건 기사를 냉철하게 편집해 실어 사건의 전개 과정을 조율해냈으며 그레이엄은 워싱턴 포스트의 붕괴를 각오하고 두 기자를 보호하며 외풍에 맞섰다. 실제로 닉슨 행정부에서는 워싱턴 포스트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 조사는 물론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해왔던 걸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30년 동안이나 정보제공자를 보호한 워싱턴 포스트는 언론사의 귀감으로 평가 받을 만하다. 그리고 이 사건의 교훈은 내부고발자의 중요성도 다시 느끼게 해준다는 것.

4. 후일담

닉슨 사임 이후 2명이 저술한 책을 바탕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치는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의 모습을 그린 영화가 1976년작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14] 로버트 레드퍼드(밥 우드워드 역)와 더스틴 호프먼(칼 번스타인 역)이 두 주인공을 맡아서 열연했다. 이 영화 자체에서는 대통령이 발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사실상의 행정부의 승리와 함께 엿 먹는 것처럼 그리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닉슨의 하야를 이끌어낼 증거가 발견되어서 하야했다' 는 식의 자막이 뜬다. 이 영화는 1977년 49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로 올랐으나, 상은 록키한테 돌아갔다.

하지만 대특종을 낚은 두 사람의 길은 엇갈렸다. 우드워드는 승승장구한 반면 번스타인은 1980년대 초 거짓 편집 사진 사건으로[15] 포스트지에서 물러났다. 물론 강연과 기고 등으로 번스타인도 굶주리지는 않았지만 우드워드의 막강한 영향력에 비하자면 번스타인은 초라하다는 것이 일반적.[16] 우드워드는 이후 누구도 그의 인터뷰 요청을 쉽게 거부하지 못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최근까지 총 8권의 책을 발간하였다.[17]

이 사건을 계기로 권력형 비리 사건에는 ~게이트 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1991년 수서택지 분양특혜 사건을 워터웨스트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편 테이프에 과연 도청 지시 사항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영원한 논쟁거리이다. 왜냐하면 닉슨이 하야함으로서 테이프에 실린 내용은 영원히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 다만 여러 정황 증거를 통해서 확실히 도청 관련 이야기가 있다는 건 일반적인 이야기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문제, 즉 위에 설명된 여러 더러운 정치 공작에 대한 이야기들이 같이 들어있어서[18] 닉슨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였다고 한다.[19]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이 사건이 유머러스하게 풍자된다. 유명인이 되어 닉슨을 만난 검프가 그의 배려로 워터게이트 호텔에 묵게 되는데, 밤에 자기 건너편의 불 꺼진 객실에서 괴한 몇명이 형광등은 안 켜고 손전등으로 방을 이리저리 뒤지는 걸 발견한다. 검프는 그 방이 정전되서 그러는 줄 알고 나름 배려해준답시고 프런트에 전화해서 '저쪽 방이 정전된 것 같은데 사람 좀 보내주세요'라고 하는 바람에...(...)은혜를 원수로 갚은 참전용사의 패기

왓치맨에선 대충 처리된 듯하다. 코미디언이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을 처리할 때가 재밌었다고 파티장에서 낄낄거리는 장면이 있다. 거기선 리처드 닉슨이 20년이나 해먹는 상황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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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들 중 일부는 전직 CIA 요원으로 CIA에서 사용하는 동일 종류의 도청 장비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 문제 때문에 CIA는 사건 초기부터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 [2] "'은폐, 특히 증인 매수 및 입 단속에 필요한 을 CIA 자체 자금으로 처리하라' 는 것이 닉슨 측의 명령이었다" 고 당시의 CIA 국장이 훗날 회고했는데 이는 CIA 자금 이외에는 마땅히 닉슨이 남들 눈에 안 띄게 쓸 수 있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CIA로서도 이미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함부로 돈을 쓸 수 없었고 결국 증인 매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 [3] 당시 백악관에는 대통령 집무실의 모든 대화가 자동으로 녹음되는 도청 시스템이 있었다. 닉슨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백악관의 모든 대화를 녹음해 남겨두려했고, 결국 도청기에 할말 안 할말 다 녹음된 것. 자승자박이다. '언노운 노운'이란 다큐에서 럼스펠드가 증언하길, 다른 대통령은 안 친해서 모르지만, 가장 긴밀한 관계였던 포드 대통령 만큼은 백악관에 도청기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포드 대통령은 닉슨의 바로 다음 대통령이다.
  • [4] 당시 특별검사는 하버드 로스쿨 교수였던 아치볼드 콕스였는데 법무장관에게 해임권이 있었다. 닉슨이 법무장관에게 특별검사의 해임을 명하자 법무장관은 이를 거부하고 사임한다. 이에 닉슨은 다시 법무장관 권한 대행이 된 법무차관에게 해임을 명하는데 차관도 이를 거부하고 사임한다(...) 결국 특별검사의 해임은 법무부 서열 3위였던 송무실장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사건을 '토요일 밤의 대학살(saturday night massacre)'이라고 부르며 당시 미국 국민들의 마음이 닉슨을 떠나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했다.
  • [5] 그러나 이 발언은 오히려 미국민들이 닉슨 대통령을 사기꾼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전면적 부인과는 상관없이 대통령이 말한 사기꾼이라는 단어만 뇌리에 남은 탓. 그리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아메리카 퍼니스트 홈 비디오에서 대통령들의 말을 따라하는 아이가 "닉슨 대통령은 뭐랬어?" 라는 엄마의 물음에 사악하게 썩소를 지으며 웃으며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닉슨의 개드립(나는 사기꾼이 아니다)을 따라한 적이 있다(...)
  • [6] 미국 사법체계에서 위증은 엄청난 중죄다. 전국적으로 사퇴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린 것도 도청을 한 게 사실로 드러나서가 아니라 공식석상에서 도청을 안 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이유였다.
  • [7] 위증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건 빌 클린턴 대통령의 지퍼게이트(르윈스키 스캔들)다. 워터게이트야 도청을 했으니 분명히 법을 위반한 것이지만 지퍼게이트는 간통죄가 없는 미국에서는 법을 어긴 것이 아니었다. 선거 전이라면야 이미지가 망가져서 당선은 물 건너 갔겠지만 이미 재선된 후였기 때문에 비난은 받을지언정 대통령 자리까지 잃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클린턴이 법원에서 위증을 했고 르윈스키에게도 위증을 요구한 것이 들통나는 바람에 탄핵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 [8] 부통령이었던 스피로 애그뉴는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뇌물수수 문제로 사임해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화당 하원 대표였던 제럴드 포드가 부통령겸 상원의장(부통령은 상원의장을 겸한다)으로 지명받아 갑자기 대통령이 되었다(연방법상 대통령 계승 순위 3위는 하원의장이었으나 공화당은 소수파여서 하원의장은 민주당이었다. 그래서 당 하원 대표였던 포드가 부통령으로 지명받는 복잡한 절차로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밖에 없었다).
  • [9] 포드의 정치적 목표는 하원의장이었다. 그래서 대통령 자리를 굉장히 힘들어 했다. 재선을 포기한 것도 인기가 없는 것도 있었지만 포드 자신이 대통령직을 버거워한 것이 가장 큰 이유.
  • [10] 사면으로 닉슨은 조사나 재판을 면했지만 '사면을 받아들였다' 는 것은 역으로 스스로 '죄가 있다' 는 것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 [11] 훗날 알려지기로 펠트는 자기보다 높으신 분들이 FBI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걸 굉장히 혐오했고 그들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 [12] 간단히 말해 황우석의 사기극을 까발린 PD수첩이나 안기부 도청 엑스파일을 보도했던 MBC의 이상호 기자, 삼성비자금을 폭로했던 시사in 주진우 기자 등을 떠올리면 된다.
  • [13] 2014년 10월 21일 별세, 언론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인 '대통령 자유메달'을 주었다. 별세한 날 오바마 대통령은 "브래들리에게 저널리즘은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공공재였다"며 "진정한 언론인이었던 브래들리는 WP를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신문 가운데 하나로 변신시켰다"고 애도의 마음을 표했다.#
  • [14] 국내에선 '대통령의 음모'로도 통한다.
  • [15] 닉슨은 죽는 날까지도 번스타인의 이 병크를 예로 들어서 워터게이트 사건도 이런 사이비 기자들의 모략이라고 주장했다.
  • [16] 1990년대 한국 대우 자동차 CF에도 나온 적이 있다. 또 아내였던 영화감독 노라 에프론이 둘째를 임신했을 때 아내 친구와 불륜을 저질렀는데 이혼 후 그 불륜을 담은 소설 '제2의 연인'이 출판되었고 영화로도 만들었다. 완전 안습.
  • [17] 다만 말년에는 부시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인터뷰하면서 '이라크 침공이 정당하다' 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내용을 보도해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부시 행정부가 우드워드의 막강한 영향력을 이용해서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고 우드워드는 다른 기자들은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신만이 만난다는 특권의식에 취해있다는 비판.
  • [18] 올리버 스톤은 노골적으로 그가 케네디 암살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었고 그 테이프에 들어있다는 설까지 이야기한다.
  • [19] 실지로 이미 밝혀진 사항으로도 닉슨은 충분히 욕을 먹고 있지만 보수파의 리더로서 재평가되는 걸 보면... 다만 실제 연구를 위해서 닉슨의 여러 테이프를 들어본 학자들에 의하면 닉슨 자체가 지나칠 정도로 쪼잔하고 세심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앞서 말한 비리 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약점도 공개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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