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원균

last modified: 2015-08-02 17:36:12 by Contributors

Example.jpg
[JPG image (50.91 KB)]
평택시 도일동 산82에 자리잡은 원균의 사당에 모셔진 영정
성명 원균(元均)
출생 1540년 1월 5일
(율리우스력 2월 12일)[1]
사망 1597년 7월 15일(?)[2]
(그레고리오력 8월 27일)
출생지 조선 충청도 진위군 여방면 도일리
(현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국적 조선
평중(平仲)
본관 원주(原州)
비고 사후 선무공신에 녹훈됨.

Contents

1. 소개
2. 원균 일대기
2.1. 임진왜란까지
2.2. 임진왜란 발발 이후
2.3. 삼도수군 통제사 원균
2.4. 칠천량 해전
2.4.1. 사실 살았다?
2.5. 삼도수군 통제사 원균의 전투 일지
3. 인간 백정 행각
4. 추증 - 선무공신 1등(!!)
5. 원균옹호론
5.1. 원균명장설
5.2. 원균맹장
5.3. 옹호론이 나오는 이유
6. 기록에 남아있는 원균
6.1. 난중일기에 기록된 원균
6.1.1. 1592년
6.1.2. 1593년
6.1.3. 1594년
6.1.4. 1595년
6.1.5. 1597년
6.2. 실록
6.3. 난중잡록
6.4. 달천몽유록
7. 창작물에서의 원균
8. 기타


증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原陵君)[3]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99권, 31년 4월 2일 2번재 기사. 사관의 논평.

1. 소개

제2대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에 능히 맞설 만한 일본 최고의 명장

조선 선조 당시 활동했던 무인.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우수사를 역임했엇으며 이순신에 이어 제 2대 삼도수군통제사를 재직했으나 칠천량 해전 이후 행방이 묘연한 인물이다. 일부에서는 이순신과 비교하며 원균 명장론등에 의해 부각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원균 일대기

2.1. 임진왜란까지

1540년 1월 5일, 충청도 진위군(현 경기도 평택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인 집안 출신이자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던 원준량. 이후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造山萬戶)를 거쳐 부령부사(富寧府使)를 지냈다.

원균의 무과급제는 아버지 원준량의 입김이 작용한 부정시험의 의혹이 있다.[4] 김탁환의 소설 불멸이나 불멸을 원작으로 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북방에서 여진족 토벌에 활약했다고 설정되어 있지만 실록에 그가 어떠한 군공을 세운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그의 승진속도는 꽤 빨랐으며 과거 급제한 뒤(1579년[5] ) 12년 만에 경상우수사에 오른 것을 볼 때 군공을 세웠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특히 원균 옹호론자들이 조산만호 때 변방 오랑캐를 무찌른 공으로 부령부사로 특진했다고 말하는데 승진기록만을 볼 때 조산만호에서 부령부사로 특진한 것만큼은 기록에 나와있고[6] 시전부락 전투에 당시 종성도호부사(약칭 종성부사·종3품)였던 원균이 '우위, 1계원장(一繼援將)'으로 참전하기는 했다고 나온다.[7][8]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 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9]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25권, 2월 4일(신미) 1번째기사링크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그런 자리에 앉기엔 성과가 형편없다"라는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592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아니 능력없는 양반에게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라니![10] 부임한 지 3개월 뒤에 그의 인생을 바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2.2. 임진왜란 발발 이후

임진왜란 초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연려실기술에는 그의 초기 행보에 관한 두 가지 기록이 있는데 하나는 경상우수영 병력을 이끌고 산포 앞바다로 나갔지만 1. 적의 수가 너무 많아서 후퇴했다는 것과 2. 어선을 보고 적인 줄 알고 후퇴했다는 두 가지 기록이다.[11]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은 원균이 경상우수영 병력을 모아서 부산포 앞바다로 나갔다는 것이다. 어선을 오판한 게 맞다면 욕 먹어 마땅하지만 적을 보고 후퇴한 경우 수송선인지 전투선인지 판단하기 힘들었을 테니 이 부분까지는 까이지 않아도 될 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선조실록에 따르면 5월 10일 선전관 민종식이 전선시찰을 마치고 돌아와 원균이 적선 30여척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허나 6월 28일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올린 경상도 전선의 상황보고에 따르면 원균이 군영을 모두 불태우고 보유 판옥선을 전부 자침시킨 후 배 한 척 달랑 몰고 도망쳤다는 정반대의 보고를 올린다.

이후의 장계에서도 원균의 승전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고 모두 공통적으로 원균이 군수품을 모조리 태워먹었다는 소식은 언급된다. 기록만으로 보자면 원균의 승전소식은 그 며칠 전 벌어진 옥포해전의 결과가 와전되어 보고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식의 와전은 왜란 중 왕왕 일어났던 흔한 일이었다.[12]

당시 기록에 따르면 경상 우수영에는 전쟁 발발 당시에 판옥선 70여척을 간단히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하며 법제상으로만 보면 3~4일 내로 판옥선 100여척에 군사 1만여 명을 확보할 수 있도록 체제가 갖추어져 있었다. 판옥선 100여척이라는 전력은 왜란 초기 당시 조선 수군 최대의 규모였으며 왜란 중기 당시 삼도 수군 전체 함대의 전성기(칠천량 직전)에 도달한 120여척에 필적하는 것으로 만약 이것이 온존해 있었더라면 제해권은 보다 손쉽게 장악되었을 것이다. 아니, 산포과 가까운 경상 우수영의 위치를 고려해볼 때 만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상륙하기 전 원균이 척후를 보내 그들의 접근을 알아차리고서 미리 출동했더라면 변변한 해상 전투력을 갖추지 못했던 1차 상륙군은 순식간에 박살났을 것이고 임진왜란은 실록에 '임진년에 상당히 큰 규모의 왜구가 출현하였지만 원균이 미리 알아차리고 분쇄하였다'라는 한 줄로 끝났을 가능성도 있다.[13]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 적이 수송선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이라서 수백척이 모여있는 부산포를 공격하는 건 힘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선을 보고 도망쳤다는 기록과 일본 수군이 거제도를 공격한 건 해전 때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대로 정찰조차 하지 않은 채 함선을 자침하고 병력을 해산시킨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지원 요청을 하며 적선 10여척을 분멸하였다고 했지만 김성일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사천판옥선 한 척을 격군도 없는 상태로 보유하고 있었고 그에게 근처의 빈 성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적이 오는 걸 보고 다시 후퇴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그가 싸웠다고 하더라도 육지에서 싸웠다는 것이다.

어쨌든 원균이 이후 이순신과 협력하에 전투를 치룬 것은 널리 알려진 그대로이다. 하지만 옥포의 승전 장계를 이순신이 원균을 따돌리고 단독으로 올림으로서 두 사람은 완전히 엇나가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서로를 헐뜯는데 많은 노력을 경주하게 되는데 이순신은 원균을 원흉(元凶)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순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조선시대에 장계는 '연명', 즉 공동으로 이름을 올려 작성하는 게 가능한 '상소'와는 달리 당사자들이 각각 단독으로 작성해서 올리는 게 원칙이었다. 더군다나 장계를 단순히 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변 임지의 책임자들을 비롯해 각지에 해당 장계를 서로 돌려보게 했기 때문에 정말 공이 있다면 장계를 단독으로 올린다고 남의 공을 묻어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위의 사건이 언급된 것은 후에 이순신을 숙청하는 데에 열을 올린 인물 중 하나인 윤두수(이 사람은 원균과 인척이었다.)가 이순신이 하옥되기 직전 시기에 "원균이가 그렇다고 하더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황을 놓고 봤을 때 실상은 원균의 공을 가로채기는 커녕 원균이 "내세울 공은 없고 상은 받고 싶으니 이순신한테 묻어가야겠다" 마음먹고 이순신한테 집적대다 퇴짜맞은 뒤 앙심을 품고 주변 사람들에게 퍼뜨린 유언비어가 후에 이순신 숙청을 시도한 무리들에게 월척급의 떡밥으로 작용한 것이다.

원균과 이순신의 반목이 심해지자 조정은 원균을 충청병사로 발령을 냈다. 경상우수사(정3품)에서 충청병사(종2품)으로 발령이 났으니 여하간에 승진이었다. 충청병사 재임시에 상당산성을 다시 건축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완공된 후에 내린 비에 무너지고 말았다고 한다. 수군 막장인 건 익히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육군을 잘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어 그 외에도 포악하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옹호로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1596년에 전라좌병사로 다시 전출된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요시라가 반간계로 조정과 이순신을 흔들고 있을 때 원균은 '수군이 출동해서 부산 앞바다에서 위용을 과시한다면 가등청정이 수전에 약한지라 그냥 물러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요즘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육군 군단장이나 야전군사령관이 해군참모총장과 해군 작전사령관의 해상작전에 대해 자신이 전직 해군 함대사령관이었기에 잘 안다며 왈가왈부한 것으로서 심각한 월권행위이다. 하지만 선조와 비변사가 원균의 상소에 대해서 그럴 듯하다고 받아들임으로써 이순신이 파직되는데 한 몫을 거들게 된다. 경상도의 주요 항구/포구 및 거점들이 일본군들에게 모두 점령되어있는 데다가 일본군들이 곳곳에 왜성을 쌓아서 해로를 감제하고 있는 점을 완전히 배제한 원균의 상소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에 불과했다.[14] 원균이 이런 작전을 펼칠 능력이 있다면 이때보다 한참 전인 임진왜란 발발초에 이미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후에 육군이 가덕도와 안골포를 점령해줘야지 부산포로 출동할 수 있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어쩌면 출전하기 싫어서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댔을 수도 있겠지만...

2.3. 삼도수군 통제사 원균

이순신이 좌천된 후 삼도수군통제사를 이어받았다. 이때 원균은 친척 안중홍에게 "이 직책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게 치욕을 갚은 것이 통쾌합니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겼다.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은봉전서(隱峰全書)에 실려있는 글에 따르면

나의 중부(仲父) 동암공(東巖公)[15]의 처가 원씨의 친족이기 때문에 원균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나의 중부를 찾아뵙고 "내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고 하므로 중부는 "영감이 능히 성심을 다하여 적을 무찔러 그 공로가 이순신보다 뛰어나야만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저 이순신의 직함을 대신하는 것으로 통쾌하게 여긴대서야 어찌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할 수 있겠소" 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균은 다시 "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될 때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고 맞부딪치는 경우에는 (기름칠한 곤봉)을 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소"[16]라고 하므로 중부는 웃으면서 "대장으로서 칼과 정을 쓰게까지 되어서야 될 말인가?"[17] 하고 대답했다. 원균이 떠난 뒤에 중부가 나에게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 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趙括)[18]기겁(騎劫)도 필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한참이나 탄식하였다. 남쪽의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하지 않음이 없다. -은봉전서(隱峰全書)

원균의 친척인 안방중의 은봉전서의 글이다. 앞서 말했던 원균의 친척이 바로 안방중의 집안어른인 안중홍인데 안중홍이 원균을 질책하자 한다는 소리가 바로 이 소리.

축약하자면 안중홍은 원균이 돌아가자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趙括)과 기겁(騎劫;전단의 화우계에 발린 장수)도 필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고[19] 이후로도 "남쪽의 사람들은 (은봉전서가 쓰여진)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하지 않은 이가 없다"라고 은봉전서는 전하고 있다. 참고로 같은 기록이 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 에도 있다. 조경남 자신은 '그래도 싸우다 죽은 원균은 도망친 다른 관군 장수들보다는 낫다'는 식의 동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원균에 관해 들은 악평들을 자세히 기록해두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부사관 최고계급도 아니고 최고지휘관이고 장군이란 자의 마인드가 "내가 죽어라고 싸울 거니까 패할 리가 없음!"...가만 이런 거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참고로 은봉전서에 기록된 또다른 원균에 대한 평은 이렇다. "원균이 수급을 모으는 데만 정신이 급급하고 심지어 다른 장수들에게 수급을 까지 하니 병사들이 이를 두고 '한 숟갈씩 얻어온 밥이 온 공기보다 많다'라며 비웃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책은 원균의 친척이 쓴 거다. 게다가 저자는 원균을 두둔한 윤두수가 있는 서인에 속해있었다. 멀긴하지만 친척이고, 같은 당파에 속해있는 사람마저도 원균이 한심하고 무능하다며 까고 있다.

원균은 통제사에 제수되기 전에는 이순신이 겁쟁이라서 부산을 공격하지 못한다면서 비난하는 발언을 자주 했는데 그 역시 제대로 공격에 나서지 못하면서[20] 권율에게 호출당해 곤장을 맞는 치욕까지 겪었고 결국 여차저차 출전은 하였으나 칠천량 해전이라는 한국 전쟁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기록적인 대패를 당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160여 척 중 상황이 불리해지자 배설이 이끈 10척을 제외하고 전부 '증발'했다. 단, 이에 대해서는 명량 해전 직후 수군의 재건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는 점을 들어 침몰한 게 아니라 뿔뿔이 도망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해전 직후만 해도 조정에서는 전멸했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후 '뿔뿔히 흩어졌다'는 식의 서술에서 '단 한 명도 죽은 이가 없다'는 서술까지 나오면서 이 해전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전사가 확인된 장수는 (뒤에 밝혀진) 이억기최호 둘이었고 (사실 처음엔 유일하게 죽었다고 알려진) 생포된 김완 이외에는 전사가 확인된 장수가 없으며 명량대첩 이후에 하나둘씩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뒤에도 나오지만 전사를 확인할 수 없는 목록에는 원균도 포함되어 있다.

조정과 권율이 출전을 거부한 원균에게 출전을 강압했기에 원균만 나쁘다 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지만 애초에 상술했듯 원균 자신이 부산포 진격 떡밥을 흘리며 이순신의 경질과 자신의 부임에 큰 역할을 했으니 이는 자업자득이다. 또한 누가 예상했으랴, 원균이 이 정도로 대우주급 병크를 저지를 줄이야! 장비와 훈련도는 절대적으로 우세했으며 아군인 무적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적인 왜군의 사기는 장졸을 막론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할 정도에 조선 수군은 그동안 배 한 척 부숴지지 않고 일본군을 쥐잡듯 했으니 나름 충무공과 비슷한 급의 수군 장수로서 '함께' 왜군을 격멸한 원균이 패배하리라고,[21] 그것도 적군은 아무 타격이 없고 아군은 수습할 여지조차 없는 패배를 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아무리 낙천적인 일본군이든, 아무리 염세적인 조선군이든 일본군의 승리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았을까.

이순신이 부산포로의 출전을 거부했다는 게 통설인데 이순신은 부산포로 출전을 몇 차례 했었다. 1597년의 실록 2월 23일 기사에 따르면 김응서와 함께 부산포로 출전해서 늘 하던 것처럼 신나게 부수다가 돌아왔고 원균이 했던 것처럼 가덕도에 하루 경야한다. 이때 가덕도의 왜군이 기습해서 병사 5명이 전사하고 초동 1명이 잡혀갔는데 이순신은 이에 대노하여 공성전을 벌이게 된다. 부산에 있던 요시라가 와서 협상한 후에야 돌아갔다. 굳이 이걸 언급하는 이유는 이후 원균의 출전과 너무나도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때 이순신의 병력은 겨우 62척이었다.

아래는 칠천량 해전을 전후로 한 원균의 작전 결과이다.

  • 원균이 통제사가 된 직후 거제도에서 벌목하던 왜병 30여명을 잡은 공이 있었다.[22] 이로 인해 선조는 통제사가 되자마자 공을 세웠다며 추켜세워줬고 신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전투는 원균이 그들을 달래서 돌려보내준 후 뒤에서 기습한 전투였다. 기습당한 그들은 죽기살기로 싸워 판옥선 한 척을 점령하고 그 과정에서 평산만호는 눈 아래에 총상을 입었고 보성현령 안홍국이 죽었다. 이게 밝혀진 후 조정의 반응은 그저 망연자실. 조금 더 현실감 있게 말하자면 옥포해전 이후 일본군의 공격에 의해 판옥선이 당한 최초의 사건이다.[23]
  • 부산포 앞바다에서 시위하던 중에 일본 본토에서 오는 수송선단과 마주쳤는데 이때 선전관 김식은 그들이 조선 수군을 유인하며 뿔뿔히 흩어졌다고 한다. 원균은 이를 추격했고 이 과정에서 무려 12척의 배가 해류에 떠내려 가버린다. 격군들이 해류를 이길 수 없을 정도로 무리하게 추격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물마루를 넘었다고 하는데 이건 조선 수군 전체가 조선으로 돌아가기 힘들 정도로 미친 듯이 추격했다는 말이 된다. 그나마 유인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쫓아가는 것은 바보짓이고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그냥 조선 수군을 보자 겁이 나 피해서 도망간 것이라고 한다...
  • 이후 원균은 가덕도에서 경야하는데 이번에도 물을 확보하러 간 병사들이 기습을 당한다. 이때 원균의 병력은 최소 130척이지만 400명이나 되는 아군을 버리고 도망간다. 버려진 400명의 운명은 안봐도 비디오. 이순신이 겨우 62척으로 공성전을 벌인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사건.
  • 물론 당시 일본군은 크게 증원된 상태였고 조선 수군을 어떻게든 격멸해야 했기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맞서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을 보면 원균의 지휘에 크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에 분노한 권율은 직접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친다. 여기서 의견이 갈리는데 한 번 맞았다는 말과 두 번 맞았다는 것, 자식인 원사웅까지 같이 맞았다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확인바람. 만약 두 번 다 맞은 거면 권율은 거제도 바로 근처까지 와서 원균을 때렸다는 것이고 이것은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이때 곤장을 친 이유는 도주한 것 때문이 아니라 조정을 기만했기 때문이라고 실록에 기재되어 있다.#

결국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었던 원균은 일심으로 할 뿐이다비장하게 싸움을 결의한다. 그리고 일본군 역시 조선 수군 격멸을 위해 전멸을 각오한 야습을 펼치게 되는데...

2.4. 칠천량 해전

이렇게 칠천량 해전은 시작되었다. 칠천량 해전 때 조방장으로 선봉에 섰던 김완은 이 상황을 자신의 저서 《해소실기》에 자세히 남겼다. 당시 사관의 표현대로 가슴이 찢어지고 가 녹는[24]임진왜란 최대 패전이 시작된 것.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칠천량 해전의 예고편에서 이 구절에 대해서 찢어진 희망이 피로 흘렀다라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문구로 나온 적이 있다.

  • 일본군은 야습을 시작했고 김완은 이에 맞서 싸운다. 이때부터 조선 수군의 비극이 시작되었는데 휘하 병력의 절반 가량이 무작정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런데...이때 기습한 적은 단 두 척이었다.
  • 나머지 절반은 조선 수군 주력이 있는 곳으로 후퇴했다고 하는데 이때 원균이 직접 군관 김대복을 보내 후퇴를 명령했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이라서 지휘권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이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것. 당연히 두 척밖에 안 되는데 김완은 거부했고 아군이 계속 본진 쪽으로 후퇴하면서 김완의 함선은 결국 점령당한다. 이때 김완은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힌다.
  • 다시 말하자면 이때의 후퇴는 정상적인 명령으로 작동했다는 것. 야습한 적은 토도 다카도라의 병력으로 50척이 채 되지 않았다. 이후 조선 수군의 도주가 확실해진 이후에야 우리가 잘 아는 '바다를 뒤덮은 천 척의 적'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수군은 산도로 돌아가지 않았다.

16일 오전 8시경 조선 함대가 양갈래로 나뉘었고 한쪽은 진해만으로, 한쪽은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반도를 향했다.[25] - 《해소실기》 1권

이는 칠천량 해전 최고의 의문으로 지휘권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든 아니든 조선 수군은 견내량으로 후퇴해서 한산도로 가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우리가 잘 알듯이 고성 앞 춘원포로 후퇴해서 거기서 모두 도주해 버린다. 배설만이 홀로 후퇴하여 경상우수군만 살았다는 것이 통설인데 명량대첩에서 배가 없는 장수들은 통제사 좌선에서 일개 사수로 참전했다는 것을 보아 자신의 배를 타고 도망친 장수는 그대로 배에 타고 참전했다는 걸 알 수 있고 여기에 전라수영 휘하 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배들이 견내량으로 후퇴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 권율의 군관 최영길의 보고와 명량대첩 이후 임치첨사 홍견 등 판옥선을 끌고 합류한 장수, 조선 수군의 부활이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점 등에서 제법 많은 배가 춘원포로 가지 않고 견내량으로 탈출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조선 수군이 춘원포로 갔다는 건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었다는 것이다.

원균이 술에 취해 기생들을 끌어안고 있다가 기습 당해서 지휘권이 무너졌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정말 원균을 좋게 봐준 거고 낙관적으로 상황을 본 것이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가 춘원포에서 전사한 것으로 봐서 춘원포로 간 것은 이들의 판단이 아닌 이들보다 상관, 즉 원균의 명령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고, 설사 지휘권이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원균 단독으로라도 한산도로 돌아갔어야 했다. 그야말로 조선 수군을 모두 사지로 몬 것. 술에 취해서 지휘권이 무너졌다면 더 많은 배들이 한산도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춘원포에서 대다수가 도망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칠천량 해전 내내 견내량은 막히지 않았고 한산도가 점령된 건 해전 이후 일주일은 지난 후의 일이었다.

이때문에 원균이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었다는게 오히려 정상참작이 된다. 이게 아니라면 원균은 제정신인 상태로 자기 혼자 도망가기 위해 조선 수군 전체를 사지로 끌고 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나마, 그나마 그를 옹호해줄 유일한 방법이 견내량 바로 서쪽에 막힌 해협이 있는데 이곳을 견내량으로 착각해서 갔다가 육지에 막히자 패닉에 빠져 도주했다는 것. 하지만 이 역시 그의 지휘가 무능했다는 반증밖에 될 수 없다.

칠천량 해전이 사실상 정유재란이 시작된 원인이라는 걸 생각하면[26] 이 전투에서 그를 옹호해줄 방법은 없다. 디테일하게 보고 싶다면 김경진의 임진왜란 1~3권 참조. 조선 수군이 어이없이 소멸되는 걸 보면서도 웃음이 나오는데 뭔가 자신이 M이 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4.1. 사실 살았다?

원균은 장렬하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미지수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권율의 서장에 따르면 그가 군관 최영길에게 듣기를 원균은 사지를 빠져나와 도망쳐 진주까지 와서 최영길이 그의 말을 들었다라고 한다. 그 뒤로도 원균이 살아있으니 찾아내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의가 조정 내에서 반복되지만 선조는 응하지 않았으며, 결국 원균이 확실히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럴만도 한게 칠천량 해전의 최고 책임자는 분명 원균이지만, 그 판을 깔아준건 선조다. 그냥 원균이 죽었다고 간주해서 선조의 정치적 피해를 최소화 했음에도 선조가 노골적으로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기 싫다는 내색을 하는데도 신하들이 이순신 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자 아무 말없이 이를 승인해야만 했을 정도로 선조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흔들렸다. 이 점을 감안하면, 원균을 잡아와서 제대로 전후 사정을 확인하게 되면 선조도 연대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이쯤되면 선조가 원균을 암살해서 입을 막았다는 음모론도 설득력 있을 듯

7월 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蛇梁)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추측만 무성한 이순신 생존설, 자살설과는 차원이 다르게 원균의 살아서 도망쳤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1차사료에서의 증언이다. 더욱이 원균이 전사했다는 선전관 김식의 글은 김식 자체가 신뢰하기 힘든 사람이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김식조차도 원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 죽었다고는 안 했다. 김식 말로는 원균에게 왜군이 달려들었다니 그 상황에선 죽었겠지 하는 것.

그리고 일본 쪽 기록을 봐도 해전에서 죽지 않고 도망쳤다는 설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일본도 장수들의 논공행상을 위해 죽인 적장의 기록은 빠짐없이 했는데 그 어디서도 그 명단에 원균은 없다. 즉, 적어도 원균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해 수급이 입수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원균 정도면 갑옷으로 인해 구별하기 쉬웠을 것인데도 말이다. 갑옷을 벗고 도망가다 죽었다면 모를까.. 사실 이게 말이 안되는 게 일본군 장수들이 원균의 이름을 알리가 없다. 당장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이 일본에 알려진 게 에도시대 이후 류성룡의 징비록이 유행하면서부터다. 심지어 김시민의 경우 에도시대 일본에서 소설이나 연극에 나올만큼 유명한 인물이지만 역시 이름 대신 모쿠소라는 괴상한 명칭으로 불려졌다. 즉, 일본쪽 기록에 원균이 없다고 이것이 원균의 생존했음을 증명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전사했든 안했든 결국은 곧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며[27] 시신이 없어 고향인 경기도 평택에 가묘를 만들어 봉했다.(경기도 기념물 57호). 아직도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가운데 진묘로 추정되는 봉분은 통영시 안정국가산업단지에서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로 이어지는 국도 77호선 주변 야산 20여m 지점에 완만하게 오른 자갈 흙더미로 남아있다. 지금은 흔적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다.

주변마을 주민 사이에 '엉규이(원균의 지역적 발음으로 추정) 무덤' 또는 '목 없는 장군묘'로 불려 온 이 봉분은 각종 문헌과 구전을 토대로 원균의 묘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통영군사편찬위원회가 1985년 펴낸 '통영군사'와 통영문화원의 '통영향토사 연구 논문집' 그리고 선조실록 및 선조수정실록에 선전관 김식이 기록한 원균의 마지막 행적을 고려할 때 봉분이 원균의 묘로 확실시된다는 게 향토 사학계의 주장이다. 그러나 성웅으로 추앙받은 이순신과의 갈등관계와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장본인이라는 낙인 탓에 후손조차 애써 외면해 왔고 그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 그러다 최근 봉분 주변을 지나는 국도 77호선 확장공사로 아예 사라질 처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발굴조사 필요성이 다시 제기됐다.#]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 후 그의 시신이 수습되지 않아 조정에서는 그가 숨었을 것이라 단정하고 그가 나타났을 때 처벌을 건의하는 상소가 올라가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하리라고는 원균 본인조차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설령 살아서 도망쳤다 하더라도 죽은 것처럼 위장해서 숨어 살았을 것이 뻔하다. 조선 수군을 거의 폐지시켜버린 것과 가까운 행동을 했으니 살아있다는 게 알려지면 당연히 전국에 원균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질 것이라고 원균은 생각했을 것이다.

2.5. 삼도수군 통제사 원균의 전투 일지

  • 1597년
    • 2월 : 원균 삼도수군 통제사에 임명.
    • 3월 9일 : 거제도에서 왜적 47명의 수급을 취함. 하지만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래 최초로 판옥선을 탈취당함.[28]
    • 6월 18일 : 원균, 100여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부산포로 출동.
    • 6월 19일 : 안골포에서 일본 군함 2척을 포획, 가덕도에서 군선 여러척 포획, 전투후 회항중 안골포의 일본 수군이 역습, 평산만호 김축이 눈 아래 총상, 보성군수 안홍국은 머리에 탄환을 맞고 전사. 판옥선 1척 탈취당함.
    • 7월 4일~7월 5일 : 출전한 것으로 추정[29]
    • 7월 8일 : 소규모 전투에서 10여척을 격파. 이후 일본 수송함대와 조우했고, 도주하는 적 수송함대를 원균이 추격. 이때 무리한 추격으로 격군[30]이 지쳐 해류에 12척이 떠내려갔고 5척이 두모포에, 7척은 서생포에 표류. 서생포에 표착한 조선수군은 전멸했다.[31]
    • 7월 9일 : 서생포에서 왜군과 교전 판옥선 20여척의 손실을 입음.
    • 7월 14일 : 조선 수군 함대 전체가 출동 부산 앞바다 물마루[32]을 지나가 가덕도에 정박. 이때 물을 구하러간 조선수군 400명이 다카하시 나쓰오구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에 의해 전사. 가덕도에서 거제도 북단 영등포로 이동. 하지만 또다시 기습 당해 육지에서 돌아감.
    • 7월 15일 : 비바람이 몰아쳐 기상을 살펴보다 오후에 풍랑을 무릅쓰고 영등포에서 칠천량[33]으로 이동. 밤 10시에 일본군 습격으로 전선 4척이 불에 탐.
    • 7월 16일 : 새벽 4시. 도 다카도라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일본 수군이 포위를 완료하고 공격. 조선 수군 거북선 3척 모두 침몰, 판옥선 122~158척 침몰 또는 실종, 병력 2만여명 궤멸

3. 인간 백정 행각

무능한 것 뿐만 아니라 원균은 학살도 저질렀다.

출세에 눈이 멀어 군인으로서 본분을 망각한 간백정으로 한산도 해전 직후 이순신에게 위임받은 패잔병 처리 임무에 실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오던 조선인 여성등과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여 왜군의 목을 벤 것이라 속였다. 자기 능력으로 안되니까 이렇게 공훈을 부풀려서 보고하려고 수작을 부린 것이다.

일본으로 잡혀간 여자들은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엄히 금지시켜 되돌려 보냈는데 수사[34]가 적선을 쳐부순 날에 배에 가득 실려있던 아이들과 여자들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외쳤으나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모두 목을 쳤다고 한다. 이로써 송서(宋瑞)의 딸과 손녀도 우리나라 사람 손에 죽은 것이 아니겠는가
ㅡ《정만록》

이후 전란을 피해 남해안의 섬에서 살아가던 조선인 어부들을 죽여 그 수급을 바치려다 이순신에게 저지당한 기록이 난중일기에 남아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나온다. 심지어 어부들에게 머리카락을 일본인처럼 꾸미고 옷도 일본식으로 입혀놓았다가 이순신에게 발각되었다.

의병장 조경남이 남긴 난중잡록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한 끼에 밥 한 (10공기), 생선 5마리, 3, 4마리"를 먹는 대단한 대식가로 위의 그림과 같이 비대한 몸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유일하게 잘한 점으로는 결코 왜와 내통하거나 항복하진 않은 점. 그리고 그게 끝. 그런데 이마저도 원균의 행적을 보면 차라리 임진왜란 초반부에 왜군과 내통이라도 하다 걸려서 처형당했다면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적어도 이순신 딴지는 걸지 않았을테니까.

그리고 원균은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싶은 마음에 이순신을 모함한 논지를 지지했으나 막상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나니 칠천량은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다시 이순신의 논지를 그대로 보고 베꼈다. 이에 권율은 원균이 조정과 자신을 갖고 놀았다는 생각이 들어 곤장으로 후려팼다.[35]

4. 추증 - 선무공신 1등(!!)


평택시 도일동 산82에 자리잡은 원균의 사당. 본래는 원균의 묘역 앞에 있었으나 물이 나고 낡아 현재의 위치인 묘 뒷편 언덕으로 옮겨 세웠다.

의외로 원균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임진왜란 3대 선무공신 중 한 명인데 그가 선무공신에 제수된 것이 그의 공을 증명한다는 시각도 있으나 사실은 선조의 무한한 원균 사랑의 발로. 개그 같지만 개그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왕권강화에 집착했던 선조는 이순신의 위명이 조선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을 매우 꺼렸으며 그에 대한 견제로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만든 것. 더군다나 이몽학의 난을 당해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커서 충공깽, 지못미, 데꿀멍 등등...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정신적 충격을 이몽학의 난으로 한큐에 다 받아버린 선조로서는 뭔가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존재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다. 게다가 신립이 탄금대에서 드러눕고 한양까지 털려버리자 선조는 도망간 반면 광해군은 그냥 거기 남아서 분조를 꾸려 궁을 수비하려고 노력했다. 이미 백성들의 지지도 역시 선조<<<넘사벽<<<광해군인 상황이었다. 당시 조정에선 이순신을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한 목소리로 원균에게 어찌 그런 영예를 주냐고 반대했지만 선조가 다 씹고 무리하게 공신으로 만들었다. 이는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비교적 잘 드러나는 편이다.수군 말아먹은 무능한 장수에게 공신 1등을 주는 선조의 위엄

그랬기에 원균은 전후 논공행상에서 2등에 제수되었으나 원균에게 출정하라고 독촉하던 선조는 태도를 싹 바꿔 칠천량의 패배를 도원수와 비변사의 독촉으로 몰며 자기의 생떼만으로 원균을 1등 공신으로 제수재수시켰다. 또한 이는 원균이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한 것 자체를 공으로 만들어 명에 원군을 요청한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한 술책이기도 했다.

종전 후 공신책봉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 선조는 명나라 덕분에 이겼지 조선 장수들은 한 게 없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權栗)은 행주(幸州)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 나은 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왕이 공로가 있다고 한 세 장수 중 하나가 원균인데 공신명단 자체에서 빼면 왕 체면이 뭐가 됐을까? 2등공신에 올린 거조차도 선조 체면 세워주기용에 가깝다.

선무공신 제수는 선조 37년(1604) 10월에 하사된 선무공신교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로도 매우 정치적인 녹훈으로 선무공신 1등공신인 이순신, 권율, 원균은 1604년 제수 당시 시점으로도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원균 1597년 전사, 이순신 1598년 전사, 권율 1599년 병사). 말 그대로 죽은 영웅은 있어도 살아있는 영웅은 없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편찬자들이 상당한 원균까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선조 사후 원균까밖에 없었다 쪽이 답이다. 그 후 실록을 보면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들먹이는 이름이다. 그 지역에 탐관오리가 넘쳐나 마치 원균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쩌구, 왕이 잘못하면 원균 같은 놈이 벼슬을 하니 저쩌구 등등.

'敎資憲大夫知中樞府事贈孝忠仗義迪順協力宣武功臣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元均書’
'교자헌대부지중추부사증효충장의적순협력선무공신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원릉군원균서’

헌대부(정2품) + 중추부사(정2품)에서 무공신 + 록대부(종 1품) + 의정부 찬성의금부사(종1품) 원릉군. 심지어 천위에 모셔졌다.

내용은 "장군은 전사하였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으니, 공업(功業)은 끝을 보지 못하였으나, 훈상(勳賞)은 죽어도 가상하므로 선무공신 1등에 책훈(策勳)하고 3품계를 올려주며, 부모와 처자에게도 3품계를 올리고……, 노비 13구(口), 전지 150결(結), 은자(銀子) 10냥, 옷감 1단(段),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여기서는 원균이 전사했다고 쓰고 있다.

위키백과의 칠천량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아들은 무슨 죄야는 설에 따르면[36][37] 핏덩이 손주를 당시 55세의 부인 윤씨가 길러 대를 간신히 이었다. 윤씨는 무려 96세까지 살아 홍주 땅에 묻혔으나 가세가 몰락해 시신을 거둘이가 없었다. 집의 노비가 말년의 인조에게 알려 간신히 매장하였다.

그러나 이 간신히 대를 이은 증손자가 송시열의 제자(박세채 등)들에게 새 행장을 부탁했고 영문도 모르던 이들이 "과부적"으로 대표되는 왜곡된 행장을 지었다.

참고로 원균의 3살 아래 동생인 원연은 개막장인 형과 달리 선비로 살다가 전란이 터지자 의병을 모아 왜군을 격파(!)하고 이후 현감이 되어 치적을 쌓다가 정유재란때 전사했다. 원연의 아들 원사립도 서천군수로 있다가 왜군을 막아냈다. 내용. 이들 부자야 말로 평택의 위인이라 할 만하지만, 평택에선 개막장을 지역의 위인이라고 밀고 있으니...

5. 원균옹호론

환빠에 버금가는 과대평가.
요약: 조수미가 데스메탈 부르는 소리

박정희시절부터 이순신과의 비교를 위해 원균이 지나치게 옹졸하고 악독하며 모함만 일삼는 소인배로 격하되었다는 논조가 널리 퍼지며 원균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많이 진행되었다. 한마디로 '약자는 알고 보면 피해자고 더 알고 보니 영웅이었다'는 논리의 시작이었다. 또한 이건 20세기 후반에 대두된 기존 역사적 서술을 의심하고 재해석하던 사수정주의의 한 흐름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1980년대 이재범의《원균정론[38]》이 첫 스타트를 끊었고 대중소설가 정욱의 《원균, 그리고 원균》[39] 대중소설가 탁환의 《불멸》로 이어지며 원균옹호론을 퍼트리는데 앞장섰다. 이덕일 또한 《우리 역사의 수수깨끼》에서 원균옹호론을 전개한 바 있다.[40] 이걸 자세히 읽다 보면 사실은 선조 재평가를 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원균을 기용하고 칭찬한 선조는 위대했다는 서술이 많다. 모 소설가는 원균을 위해서 변명 비슷한 글을 썼더니 원씨 가문 사람이 와서 감사를 표하더라고 한다. 이건 뭐 원북공정도 아니고

현재는 공단기 공무원 학원의 한국사 대표강사인 신영식 강사의 무료강좌를 통해 원균 맹장론의 주요 주장들이 퍼지고 있다. 참고로 해당 강의는 매년 최소 수만명 이상의 공무원 수강생들이 실제 역사로 달달 외우는 강좌로 매년 수만명 단위의 원균 맹장론자가 양산된다고 볼 수 있다.[41] 거기다 신영식은 민주당 계열의 정치인이기도 하며, 스스로 역사학계의 일원이라고 홍보하고 있기 때문에 파급력은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원균이 계속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통에 원균에게 생긴 까가 빠를 만든다 덕분에 원균옹호론은 널리 퍼졌고 지금도 퍼지고 있다. 또한 대중에게 원균옹호론이 중립적이고 신빙성있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대중역사책에 심심찮게 나타나고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여기에 낚이고 있다.

대개 원균옹호론자들은 원균 옹호에 신빙성 없는 가문기록인 《원균행장기》을 내세우며 난중일기와 장계들을 비롯한 이순신의 기록들은 이순신의 기록이라며 무시하고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들은 이순신의 친척이 실록 편찬을 맡아 원균을 고의적으로 왜곡했다며 무시한다. 논파당하면 "역사는 승자의 역사", "옛날 일을 네가 봤냐? 어떻게 아냐?", "원균도 열심히 싸웠다"라는 소리로 일관한다. 어째 환빠와 비슷한 패턴인데 실제 환단고기가 유행할 때 원균옹호론 역시 같은 논리로 유행했다. 두 집단이 말하는 것에서 주어, 목적어만 바꾸면(예 : 강단사학이 진실을 은폐한다. 숨겨진 진실을 찾아야 한다 등등) 완전히 똑같다.

이들 책 속의 오류는 너무나도 쉽게 잡을 수 있다. 차라리 실록에서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논쟁을 다룬 부분은 그나마 이해해 줄 수 있다.

  • 《원균정론》에서는 이순신이 몰래 장계를 따로 올렸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실록 기사 하나를 내놓는데 이를 이순신이 장계를 올린 건 원균이 알아챘고 따로 올렸다는 근거로 삼는다. 근데 그 내용이...이전 한산도(옥포의 오기) 해전의 장계와 같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이 기사가 적힌 날짜는 한산도 대첩 직후다. 교수라는 권위와 책이라는 권위 때문인지 이렇게 눈에 바로 보이는 왜곡이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 정말 왜곡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분류해도 될 정도다.

  • 경상우수영 병력이 1만이면 조선 수군은 10만이고 육군은 50만이다라는 주장이 실려있는데 이건 일본 학자들의 주장으로 당시 조선 병력이 얼마였는지는 경국대전과 실록에 아~주 잘 실려있다. 특히 왜 만양병설이 좌절되어야만 했는지만 봐도 굳이 경국대전을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 《선조수정실록》을 대차게 욕한 게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는데 그 어느 학자도 수정실록을 참조하지는 않는다. 기록이 넘처나는 조선시대, 그것도 실록에 비견되는 신뢰도를 가진 기록들이 많은 임진왜란 시기를 논하는데 당연히 제대로 된 학자라면 그 모든 자료를 모아놓고 교차검증을 해가며 연구를 한다. 거기다 수정실록이 아닌 그냥 실록을 놓고 봐도 원균은 본문의 내용과 별 차이가 없는 놈이다.

  • 기타 많은 오류들이 존재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 책이 나온 것이 이미 20년이 되어가는데 원균옹호론은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초에 선조 옹호라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시작된 이론이 전혀 연구되지 않은 채 인터넷과 책들을 통해서만 여기저기 퍼날라지고 있는 것.

  • 결국 이 이론은 환단고기와 함께 역사 뒤집기 바람의 최대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결국 재평가 작업 자체가 오히려 지나치게 원균을 영웅으로 만들고 명장으로 포장하면서 이순신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주류를 이룬 탓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원균까는 원균을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그리고 실상 원균에 대한 평가가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 것이 조정에 공식적으로 보고된 그의 전공은 이순신과의 연합작전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42]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결국 빛을 보는데 불멸의 이순신에서 감히 원균을 이순신의 멘토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더구나 원균의 최후마저 장렬하다. 공중파 대하사극에서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에 분기탱천한 김경진, 윤민혁 등은 공저한 소설 《임진왜란》에서 원균옹호론을 정면으로 공격했고 다음 토탈워 카페지기 도현신은 자신의 책인 《원균과 이순신》에서 원균옹호론의 오류를 반박했다. 그럼에도 《원균, 그리고 이순신》, 모 재미교포 작가가 쓴 희대의 불쏘시개왕을 참하라!》, 《조일전쟁》 등 원균옹호론 저서들은 계속 나오고 있으니[43] OTL. 이우혁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슬픈 시각으로 본 원균명장설'이란 글을 올렸으며 이 글은 토론할 때 종종 인용이 된다.보러가기

파면 팔수록 막장이라는 증거만 나오는데도 여전히 원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이우혁의 말대로 원균이 패배하고 전사(혹은 행방불명)했기 때문에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특히 민주화 된 이후 역사 인물들의 재평가가 시작되면서 박정희가 이순신을 우상화했기 때문에 그 피해를 원균이 입었다는 주장이 나온 것. 지금이야 많이 줄었지만 원균옹호론 글을 잘 보면 꼭 이런 대목이 하나씩 나온다. 궁예, 정도전 등이 재평가 되는 것과는 질이 다른 것.

사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원균옹호론의 진정한 원조는 현대의 작가들이 아니라 다름아닌 선조. 원균옹호론 관련해서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들은 원균행장은 물론이고 선조가 원균에 대해 칭찬한 실록 기록들만을 쥐어뜯어서 편집한 것에 불과하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나라 말아먹을 뻔한 무능한 자. 불멸의 이순신류의 원균 재해석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면 혹시 왜곡된 정보로 억지주장하는 것인지 잘 살펴보자. 만약 불멸의 이순신에서 차라리 원균을 일본군과 내통한 반역자로 왜곡했다면 더 좋았을지도.

재미있게도 영어 위키에선 원균을 Korean admirals 카테고리에 등재시키고 있다. 좀 그렇긴 하지만 일단 잠시 제독이었던 건 맞으니...가슴으론 납득이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 해군 교과서를 쓴 이들이 쓴 책인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펴냄)에서도 이순신을 전설적인 명장 제독으로 추앙하는 반면 원균은 조선 수군을 아주 매장한 최악의 무능 제독으로 통렬히 비꼬고 있다(단 여기에선 박홍도 동류로 까고 있는데 이 사람은 적어도 원균에 견주면 훨씬 유능한 편이며 억울한 점도 크다.).

  • 2010년 12월에는 <이순신, 꿈속을 걸어 나오다>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그런데 책의 290페이지에서 '원균, 비극의 주인공, 운명의 수레바퀴와 충돌하다'는 대목이 있다. 대목을 보면 왠지 원균 옹호론 같은데 또 왜곡된 정보를 바탕으로 주장할까봐 걱정.

  • <난세에 간신 춤춘다>라는 책에서는 원균은 어쨌든 자기가 경상우수영 바다를 맡고 있으니 자기가 선봉에 서서 길을 안내해주지 않았으면 싸우지 못했을 텐데 이순신이 이걸 무시하고 혼자 장계를 올려서 공을 훔쳤다고 생각했을 거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원균 논란 자체가 해전의 중요성은 커녕 전쟁 중에도 무인들을 푸대접하던 조선의 체제가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도 원균에게 좀 동정적인 서술.

  • 평택에선 이 무능하기론 희대의 명장으로 꼽히는 그를 지역의 유명인사랍시고 종종 홍보하는 입장이라, 이 옹호론을 들먹이는, 세금이 아까운 상병크를 자주 보여주고 있다.

언젠가는 모에선의 영향으로 모에화가 될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불멸의 이순신 방영 때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원균옹호론에 낚인 부녀자들이 실제 원균을 그네들 방식으로 모에화시켰다! 당시 부녀자들은 그들 방식대로 미화시킨 이순신과 원균을 가지고...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실제 원균맹장론이 어떤식으로 진행되는지 궁금하다면 주석을 읽어 볼 것.[실제사례]

5.1. 원균명장설

원균 옹호론의 2갈래 중 하나로 실은 원균은 이순신에 필적하는, 혹은 능가하는 장군이며 이순신의 전공은 모두 우상화한 측의 역사왜곡이라는 극단적인 주장.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주로 원균행장기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행장기의 사료적 가치는 실록이나 난중일기에 비하자면 없다고 해도 좋다. 애초에 문중에서 자기 조상들 이름을 높이려고 사후 한참이 지나서 쓴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 난중일기는 전쟁 당시 당사자가 쓴 기록이며 다른 공식기록과 교차검증이 되지만 원균행장기는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런 식으로 여기에 대응하면서 나온 농담이 바로 김억추 명장설. 똑같이 김억추 행장기를 근거로 하면 김억추는 원균을 한참 능가하는 절세 명장이 돼버린다.

결론부터, 원균은 명장 맞다. 조선군의 명장이 아니라 일본군의 명장 or 팀킬의 명장이라서 문제지. 사실 임난 초기에 전투다운 전투도 안하고 75척~100척 가량의 경상우수영 함대를 자침(...)한 전례가 있지만 칠천량의 병크가 워낙 커서인지 아무도 기억 못하는 편(...).

임진왜란 발발 직후 원균이 겁에 질려 배를 버리고 도망가려 하자 원균 휘하의 옥포만호 이운룡"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관으로서 강토를 사수할 것이며 더욱이 이 지역은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입니다. 전라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라고 항언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런 걸 봐도 어떻게 원균 옹호론이 나오는지 의문스럽다.


그래도 굳이 유능한 점을 찾으려 한다면 후빨능력이나 자리보전 및 낙하산 능력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무관으로서 필요한 능력은 한없이 0에 수렴하면서 간신배의 필수소양은 가히 만렙을 찍고 있다. 사실 고도의 청야전술이라능~!

5.2. 원균맹장

원균명장설이 너무 쪽팔리니까 나온 것으로 원균은 명장은 아니지만 용맹한 장수였다는 설.

사실 이게 좀 오래된 편이다. 1980년대 MBC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500년에서조차 원균이 적어도 무능한 밥벌레는 아니었고 맹장 타입이었다고 좀 옹호해주었다. 이 드라마에선 원균이 주로 돌격으로 왜선을 박살내는 모습까지 나왔다.[45] 불멸의 이순신에서 채택한, 혹은 시작한 '해전에는 능숙하지 못하지만 육전에는 능숙해서 북방의 명장이었다'란 주장도 원균맹장설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가 공을 세우기는 커녕 육전에 능했다는 근거 자체가 어디에도 없다. 물론 깐깐하기로 소문난 조선왕조실록에도 없다.[46]

결론부터, 원균은 맹장 맞다. 猛將(용맹한 장군)이 아닌 盲將(아무 것도 모르는[47] 장군)이라서 문제지. 맹구장군

이순신이 해상전을 지휘한 장군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당시 조선시대에 수군 무과 육군 무과가 따로 있던 것도 아니고 병법을 배웠다면 수군이든 육군이든 용병술이야 당연하게 쓸 줄은 알아야 했을 것이다. 물론 육지와는 다르게 해상에서는 군선이라는 별도의 도구를 써야 했으므로 이순신같은 유연한 전략술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화려하게 다루지는 못했더라도 원균처럼 무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맹장이었던 사람이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함선을 불태우고 나중에야 휘적휘적 나올까?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된 후에는 계속 난폭하고 찌질한 모습이 주를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각종 짤방이 난무하게 된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기록광이었다.[48]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은 모조리 번역되었고 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진 이들이 늘어나자 이를 어여삐 여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인터넷에까지 등재를 마쳤다. 그러니 원균옹호론 따위는 그런 사료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교차검증이나 고찰도 없는 그저 한낱 개그에 불과할 뿐이다.

원균옹호론에 대한 논리적이고 사료를 통해 고찰한 글은 이글루스의 블로거인 을파소의 블로그에서 잘 볼 수 있다. 원균 옹호론을 반박하기 위해 일부러 카테고리를 개설했고 연재도 마쳤다. 책으로 보는 것보다 인터넷으로 보는 게 좋은 사람은 을파소의 블로그를 방문해보자. 그리고 맹장이었든 아니었든 칠천량에서 화려하게 아군을 말아드신 이 사람을 뭐가 이쁘다고 선무공신 1등으로 올려준단 말인가?? 오히려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모욕이다.


5.3. 옹호론이 나오는 이유

  • 높은 인지도 : 원균은 인지도가 '나쁜 쪽으로' 매우 높은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행적이 이순신과 대비되어, 그야말로 극과 극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 문제는 이 높은 인지도 때문에 '사실 원균이 명장이다.' 같이 통설과 반대되는 주장을 실어놓은 책이 화제를 부르고 판매량을 얻을 수 있기 때문. 즉, 돈이 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원균보다 재평가를 받을 만한 사람은 충분히 많이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조선 수군의 이억기 같은 경우는 공적에 비해서 인지도가 매우 낮은 인물로서 충분히 재평가 받을 만한 인물이다. 심지어는 그 배설마저도 원균이 싸질러 놓은 병신짓을 치닥거리하느라 고생했을 뿐만 아니라 충무공 이순신이 사용할 배를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서 원균의 병크로 조선 수군을 다 말아먹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끝내 13척을 건져냈고 그게 명량대첩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재평가를 받아야 마땅한 인물이다.다음으로 수전에서 큰 활약을 한 이순신 장군 못지 않게 육전에서 큰 전공을 세운 육군의 권율 장군과 의병의 곽재우 장군 역시 재조명을 될 가능성이 꽤 높은 인물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균 재평가론이 훨씬 많이 나오는 것은 그냥 이 높은 인지도 때문에 '돈이 되기 때문'이다.

  • 종친회와 지역사회의 이기적인 활동 : 원씨 가문 종친회와 평택에서 '지역 위인'을 만들려고 원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이는 역사왜곡을 통해 원균과 이순신을 동급으로 포장하여, 자신들도 그 후광을 얻어보고자 하는 이기적인 심성의 발로이다. 한 마디로 답이 없다.

  • 당대 임금과의 친분 : 이것 역시 무시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 사실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추서된 것도 죄다 반대하는데 선조 혼자 박박 우겨서 집어넣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정도 공신이 되었는데 찌질이로 나오면 뭔가 좀 이상하지 않겠느냐'하는 논지에서 원균이 미화되었다. 이와 비슷한 게 삼국지에도 있는데 그게 하후돈이다. 하후돈이 애꾸눈이 된 과정이 그야말로 장대한 삽질이고 박망파에서는 유비한테 패하고 전투 치고는 도무지 승리라는 게 없는 위인임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최측근에 직책이 대장군이라는 이유로 인해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야말로 관우와 쌍벽급으로까지 미화가 되어 있다.[50] 결국 원균은 선조와 친했고 그런 선조에 의해 공신으로 추대받으면서 그의 행적은 깊이 살펴보지도 않은 채 이정도 공신이니 이만큼 대단하겠구나라는 어림짐작 하에 옹호된 것도 있다.

  • 가공매체에서의 흥미 : 불멸의 이순신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원균 옹호론은 옛날 옛적에 다 논파가 되었지만, 가공매체에서 원균을 조금은 쉴드치는게 '작품의 재미'에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원균 옹호론이 헛소리이고 이들이 주장하는 원균이 만들어진 허구라고 하더라도, '이순신의 라이벌' 운운하기에는 굉장히 좋은 캐릭터인 것이 사실이다. 임금이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원균을 밀어준 전적도 있는데다가 지장 이미지의 이순신과 맹장 이미지의[51] 원균은 대비시키면 꽤 흥미로운 전개가 만들어진다. 사실 역사 그대로 묘사한다면, 원균은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거리기만하는 매우 평면적이고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되기 쉽다. 때문에 현실적인 인물설정을 위해서 조금은 쉴드를 쳐서 출현을 시켜주는 것. 역사적 원균이 비현실적으로 평면적인 바보인게 문제이다 물론 이런짓을 하면 작품의 재미에서는 플러스가 될 수 있어도, 욕은 오지게 먹을 각오를 해야한다.

  • 조선의 인사체계에 대한 옹호 : 해방이후의 역사학계는 과거의 일본의 논리를 청산하는 것에 주력했고, 이를 위해 일본의 논리와 대비시켜 조선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연구 되어 왔다. 현행 교육 내용만 봐도 조선은 부국강병으로 시작해서 긍정적인 붕당정치로 나아가다가, 세도정치기에 이르러서야 쇠퇴하지만 민간은 발전하고 있는 방향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런 조선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주 활용되는 부분이 조선의 인사체계인데, 상피제의 경우나 이조전랑의 특성, 경제소와 유향소를 이용한 견제와 균형 등이 이런 부분의 대표적 사례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원균이 무능력한 데도 그 엄격하다는 조선의 인사체계를 통과하여 고위직에 울랐다면, 이미 세도정치가 아닌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의 인사체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례가 된다. 또한 원균이 선조가 강제로 행한 인사라 하더라도, 이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조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임금과 신하 간의 견제와 균형이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는 것이 된다. 즉 원균이 무능력한데도 불구하고 고위직에 올랐다면, 그 동안의 조선에 대한 재해석과 긍정적 평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례가 되기 때문에, 이는 조선을 긍정적으로 보기위해서는 원균이 명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무능력자가 되서는 안된다. 그러다 보니 조선을 긍정적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원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옹호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실제로 원균옹호론은 조선사 전공자들 중에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단지 인기 등의 요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6. 기록에 남아있는 원균

6.1. 난중일기에 기록된 원균

이순신이야 원래 원균에게 감정이 많으니 그냥 까고 본거다라는 사람들이 있을 지 모르겠는데(...) 개인의 주관적 시선이 크게 들어 가는 일기 형식의 난중일기로 이순신과 서로 사이가 나빴던 원균에 대한 평가를 하는 데선 한계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이순신도 원균이 이순신에 가진 감정 못지 않게 원균에 대해서 좋지 않은 악감정을 저기서 날 보고 죽일놀 살릴놈 하는 데 기분이 안 나쁠 인간이 있을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임을 난중일기에서 찾으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난중 일기에서도 원균에 대한 이순신의 주관적인 불평이나 악평 부분을 제외하고 역사적 사실 부분만을 미루어서 기존 사료와 비교하면 일기 형식의 글도 실록 못지 않은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기에 현명한 위키 러너들이라면 아래 실록과 비교해서 일치하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원균을 평가하자. 그래도 무능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6.1.1. 1592년

  • 5월 2일. 삼도순변사 이일과 우수사 원균의 공문이 왔다. 군관 송한련이 남해로부터 돌아와서 하는 말이 "남해 수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김축 등이 왜적의 소문을 한번 듣고는 벌써 도망쳐 버렸고, 온갖 군기 등 쓰던 물건도 모두 버려서 남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 5월 3일. 방답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보고 우수사 원균이 온다고 좋아 했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니 방답의 배였다. 크게 실망했다.

  • 5월 29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오지 않아 혼자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서 곧장 노량에 도착했다.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서 경상 우수사(원균)와 만났다.

6.1.2. 1593년

  • 2월 8일. 아침에 영남우수사가 내 배로 와서 전라우수사의 기약 늦어진 잘못을 몹시 탓하며 지금 곧 먼저 떠나겠노라고 하였다.[52][53]나는 애써 말려 기다리게 하고 "오늘 해 안으로는 당도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랬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들어오므로 온 진중이 바라보고 기뻐 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2월 22일.[54] (중략) 곧이어 진도(珍島) 상선(上船)이 또 적에게 둘러싸여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원해 내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척하며 끝까지 돌아서서 구원해내지 않았으니 그 어이없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다. 이때문에 경상수사에게 따져 물었지만 가히 한탄스럽다. 오늘 통분한 것은 무슨 말로 다하랴. 모두 경상수사 때문이다.
  • 2월 23일. 원 수사가 와서 보았다. 그 음흉함[55]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56]
  • 2월 28일. 김해강 아래쪽 독사이항[57]으로 향하는데 우부장(김득광)이 변고를 알려왔으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가서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수사 군관의 배와 가덕 첨사(전응린)의 사후선(척후선) 등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면서 태도조차 수상하므로 묶어서 원수사에게 보냈던 바, 수사가 크게 성을 내는 것은 그 본의가 군관을 보내어 고기 잡는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오는 데 있었던 까닭이다.[58]
  • 3월 2일. 비. 종일 비가 왔다. 배 봉창 밑에 앉았노라니 온갖 생각에 가슴이 치밀어 올라 회포가 어지럽다...이영남, 이여념이 왔다. 그들에게 원 수사의 비리(非理)를 들으니 한탄스럽다.[59]
  • 5월 14일. 선전관 박진종(朴振宗)과 선전관 영산령(寧山令) 복윤(福胤)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같이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내가 우수사의 배로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순배 나누고 있을 때 영남수사 원균이 와서 술주정을 부렸는데 온 배 안 장병들로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속이고 망령됨은 말할 길이 없다.
  • 5월 15일. 아침에 낙안군수 신호가 와서 보았다. 윤동구(尹東耈)가 그 대장의 장계 초본을 가지고 왔는데 그 고약스러움은 말할 길이 없다.[60]
  • 5월 21일. 원 수사가 허위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대군을 소동케 하였다. 군중에서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고약스러움을 말할 길이 없다.
  • 5월 27일. 영남우병사 최경회의 답장이 왔는데 원 수사가 송 경략[61]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고 있다니, 매우 가소롭다.
  • 5월 30일. 원 수사가 송 경략이 보낸 화전(火箭)을 혼자 쓰려고 꾀하였으나 병사(兵使)의 공문에 따라서 나눠 보내라고 하였더니 공문을 인정하지 않는 심한 언사로 무리한 말만 많이 하니 우스웠다. 명나라 고관이 보낸 화공(火攻) 무기인 화전 1,5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독차지해서 쓰려고 하다니,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남해 기효근이 배를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는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니 가소롭다. 이 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고도 예쁜 색시를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인 원 수사 또한 그러하니 어찌 하랴.[62]
  • 6월 10일. (전략) 새벽 2시에 원 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가 (적을) 치자'고 하였다. 그의 시기(猜忌)와 흉모(凶謀)는 형언할 길이 없다..[63] 이날 밤으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 6월 11일. 아침에 적을 토벌할 일로 공문을 만들어 영남수사에게 보냈더니 술이 취하여 인사불성이라고 하였다.[64]
  • 7월 21일. 경상우수사와 정 수사가 한꺼번에 와서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의 하는 말은 극히 흉측하고 말할 수 없는 흉계이다. 이러하고서 일을 같이 한다면 뒷걱정이 없을까?
  • 7월 28일. 사도첨사가 복병했을 때 잡은 보자기[65] 10명이 왜복으로 변장해 입고서 하는 짓들이 수상하다고 하므로 자세히 추궁했더니 경상수사가 시킨 일이라고 하였다.[66] 곤장만 때리고 놓아주었다.
  • 8월 2일. 어두워질 무렵에 우수사가 배에 와서 전하기를 "원 수사가 허망한 말을 하며 나에 대하여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더라"고 하였다. 모두 망령된 짓이다. 무슨 상관이 있으랴.
  • 8월 6일. 저녁에 원 수사가 왔다. 이경수, 영공, 정 수사도 와서 일을 의논했는데 원 수사의 주장에는 자주 모순이 생긴다. 한심한 일이다.
  • 8월 7일. 저녁에 경상수사의 군관 박치공(朴致公)이 와서 적선이 물러갔다고 전하였으나 원 수사와 그 군관은 본시 헛말 전하기를 잘하니 믿을 수가 없다.
  • 8월 26일. 원 수사가 왔다. 얼마 뒤에 우수사, 정 수사도 모두 모였다. 흥양(배흥립)이 오므로 막걸리를 대접했는데 원 수사는 술을 먹겠다고 하므로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해서 망발을 하는 것이었다. 우스웠다.
  • 8월 30일. 원 수사가 와서 영등(永登)으로 가자고 독촉한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어 보내고 다만 7, 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쓰고 일 처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다.[67][68]

6.1.3. 1594년

  • 2월 11일. 식후에 활터로 올라가니 경상수사와 우수사 조방장도 왔는데 같이 술에 취해 있었다.
  • 10월 17일. 어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원 수사의 속이고 무고하는 말들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참으로 해괴한 노릇이다.

6.1.4. 1595년

  • 2월 27일. 원균이 포구에서 수사 배설(裵楔)과 교대하려고 여기에 이르렀다. 교서에 숙배하라고 했더니 불평하는 빛이 많더라고 한다. 두세 번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했다고 하니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습기도 하다.

6.1.5. 1597년

5월 2일부터는 아예 이름도 안 부르고 직책으로도 안 부르고 경어도 생략하고 있다.[69]
  • 4월 27일. 일찍 떠나 송치[70] 밑에 이르니 (중략) 저녁에 부사[71]가 와서 보았다. 정사준(鄭思俊)도 와서 원공의 망령된 짓을 많이 말하였다.
  • 4월 30일. (전략) 병사 이복남이 식전에 와서 보며 원공의 일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 5월 2일[72]. 진흥국(陳興國)이 좌수영으로부터 와서 눈물을 뿌리면서 의 일을 이야기하였다.[73]
  • 5월 5일. 늦게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이 한산에서 와서 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도(道)와 진(陣)에 속한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다 (원균을) 배반하므로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 5월 7일. (전략) 송대기, 유몽길이 와서 보았다. 서산군수 안괄(安适)도 한산에 와서 흉측한 자의 일을 많이 전하였다. (후략)
  • 5월 8일. 이경신(李敬信)이 한산에서 와서 원흉(元凶)의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가 데리고 온 서리(書吏)에게 육지로 가서 곡식을 사오라며 내보내 놓고는 그의 처를 겁탈하려고 하자 그 여자가 악을 쓰며 듣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함을 질렀다고 하였다.[74] (중략) 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 탓인가. 그가 바치는 뇌물 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달아 잇고 있으면서도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고 있으니 그저 때를 잘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 5월 11일. 맑다. 전 광양현감 김성(金惺)이 체찰사의 군관을 데리고 살대 구할 일로 순천에 왔다가 와서 보았다. 소문을 많이 전하는데, 그 소문이란 모두 흉측한 자의 일이다. (후략)
  • 5월 13일. (전략) 지난 밤 부사가 말하기를 "체찰사가 보낸 편지에 영공(令公)에 대한 일을 많이 탄식하더라"고 하였다. (후략)
  • 5월 28일. 늦게 출발하여 하동(河東)에 이르니 현감[75]이 서로 만나보게 된 것을 반가워하면서 성 안의 별사(別舍)로 맞아들여 간절한 정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이 미친 짓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 6월 17일. (중략)휘하의 여러 장수중 다수가 다른 마음을 품은 사실과, 통제사가 장수들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는 상황으로 볼때 일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 7월 7일. 오늘 칠석(七夕)을 맞으니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꿈에 원공과 만났다. 내가 원공의 윗자리에 앉아 밥상을 받는데 원공이 기쁜 기색을 띠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박영남(朴永男)이 한산도로부터 왔는데 주장[76]이 실책과 과오로 죄를 받기 위해 원수[77]에게 붙들려갔다고 하였다.[78]
  • 7월 18일. 정미,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6.2. 실록

이제 실록의 기록을 보자.

이 외에도 해당 홈페이지에서 원균으로 검색 후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을 클릭하면 무수히 많은 선조의 사랑과 대신들의 디스를 볼 수 있다.

6.3. 난중잡록

  • 원균은 체구가 비대하고 식사에 밥 한 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을 3~4마리씩을 먹으며 평소에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한다.

6.4. 달천몽유록[80]

  • 원균은 배가 볼록하고 입은 비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다.

7. 창작물에서의 원균

  • KBS의 전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선 과하다 싶게 열혈로 생을 마감했다. 배우는 최재성. 이는 탁환이 저술한 원작 불멸의 영향으로 여기서의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는 '원균 형니이임!'을 어렸을 적부터 외친 천원돌파 그렌라간시몬카미나급의 관계로 왜곡되어 있다. 심지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묘책이 꿈 속에서 본 원균이 일러준 것으로 설정되어 있을 정도. 칠천량 해전에서의 위대한 전술을 일러주다. 불멸의 이순신이 대차게 까이는 이유가 바로 역사를 무시하고 원균을 띄웠기 때문. 애초에 원균과 이순신이 어릴 때 만났다는 기록도 없고 근거도 없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부턴 본격적으로 이순신의 행보에 별의별 트집을 잡아 헐뜯기 시작하더니 이순신이 삭탈관직당하고 자기가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꿰찬 다음부턴 고증대로(?) 犬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보는 사람에 따라선 오만가지 욕이란 욕은 다 튀어나올 수도... 근데 전체적으로 배우빨(?)을 받아 이상하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가끔 보여준다.

    덕분에 부흥 카페는 애초에 임진록2 조선의 반격 길드 네이버 카페에서 출발해 불멸 안티카페를 거쳐 역사 카페로 거듭났다. 그래도 한민족 사상 최고의 영웅을 다루는 드라마라서 고증을 잘 하려고 역사학자를 초빙했는데...그 인물이 하필 원균옹호론자여서 시작이 개판이었다가 그나마 그 뒤 제대로 된 사학자들이 "너님들 지금 무슨 짓거리 하는지 알기나 함?" 하고 지적해서 열심히 수정은 해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윤모 작가의 병크로 결국 기록도 없는 거북선 침몰, 그 뒤 이순신이 신립에게 싸닥션을 맞는 것까지 그려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임진왜란 공저자 중 한명인 윤민혁은 타입문넷 등에 글을 올려 변호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100화가 넘는 대하사극이다보니 작가가 여러명 있었고 그중 역사고증을 맡았던 작가가 원균옹호론자라 고증이 엉망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중반 이후 제대로 된 자문위원을 들이고나서 잘못된걸 알게되었고 어떻게든 수습하려 노력했지만 초기의 캐릭터 설정을 완전히 무시할순 없었다고 한다.

  • 왜란종결자에서는 마찬가지로 막장 행각인데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고 도망치다 왜병의 손에 죽는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마수한테 씌였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내가 널 홀렸다고? 천만에. 너 자신이 나한테 혼을 팔았던 거야..."라고 비웃는 마수의 모습은 나름대로 명장면. 그제서야 이순신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다 이순신 때문이다!" 하는데 작가가 "사관은 논한다"에서 "다 니 때문이다!"라며 대차게 까버린다.

  • 세영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주인공 유승업이 왜군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은 후 분의복수군으로 칠천량 해전에 참전한 후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다. 그런데 여기서 아예 대놓고 '이순신은 지장이요 덕장이면 원균은 용장이요 맹장이다'라고 적어놨다.

    노주현원균.jpg
    [JPG image (10.51 KB)]
  • SBS의 전 시트콤똑바로 살아라에서는 노주현극중극인 사극 '난중일기'에서 원균 역을 맡는데 악역을 재해석하면 인기 오른다는 말에 혹해서 맡았더니, 분장도 사진에 나오는 것과 같이 악의적으로 희화화 시킨데다가(...), 임진왜란 초반에 겁에 질려 경상우수군을 몽땅 날려버리고 이후 이순신을 몰아내기 위해 모함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오는 등 그냥 원균의 모습 그대로 나왔다(...). 훌륭한 고증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어찌저찌 귀양을 가는데 귀양지에서 기생(...)끼고 술판(...)을 벌이기까지 했다(...). 결국 이런 행보에 격분한 노주현이 "세상에 귀양가서 기생끼고 술판을 벌이는 작자가 어디 있냐?"며 작가랑 대판 싸웠고[81][82] 그만 "이럴거면 원균에게 사약을 내려라!"라고 윽박지르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왜 이게 실수였냐면 대판 싸운 이후 원균배역을 맡은 덕택에 CF제의도 들어오고 한참 잘 나갈때였기 때문. 그러나 작가는 노주현이 사약을 내리라고 한 대로 시나리오 방향을 그렇게 잡았으며 각종 매스컴에서는 '원균에게 사약을'이라고 도배된다. 노주현은 뒤늦게 작가랑 화해를 하려했으나 무산되었고 촬영장에서 사약을 엎어버린다. 고증오류지만 통쾌하다. 노주현: 뭐 임마? 뒤에 여차저차해서 해결하고 다시 출연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이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역은 김형일이 맡았다.

  • 징비록에서는 6화에서 이일에 의해 이름만 언급되는데 디스당한다.

  • 1980년대에 나온 삼성당 출판사의 위인전 만화 이순신에서는 무능에 찌질이,극중 설명에서도 공 차지하는데 미치고 도움되는 거 하나도 없었다고 무지 깠다. 최후도 칠전량 해전에서 기생 데리고 술이나 마셔서 부관이 이런 한심한 놈 봤나 어이없어 하고,수군 병사들이 "이순신 장군이 있을땐 이러지 않았는데, 한심하다, 한심해." 라며 까인다. 결국 해전에서 패하자 육지로 달아났으나 왜장의 칼에 베여죽는다.

  • 한국 극장 애니메이션 구국의 태양 , 성웅 이순신(1981)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해 죽은 왜군시체를 끌어올려서 자기가 해치운 것이라고 조정에 올리라고 하지 않나 찌질함이 더 많이 나온다. 칠전량 해전에서 패하자 뭍으로 올라가다가 총에 맞아 죽으며 조선 수군을 망친 천하의 무능한 장수라고 나레이션으로 깠다.

8. 기타

  • 2010년 1월, 평택에서 그곳 출신의 위인(?)들을 배경으로 하는 달력을 선보였는데 다른 건 뭐 특별히 문제 없으나 원균이 1월에 있다. 얼마나 인물이 없었으면...

  • 평택시 홈페이지에는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함께 빛나는 전공을 세운 시의 자랑거리로 소개하고 있다.이게 뭔 개소리야http://www.pyeongtaek.go.kr/New2012/globalpyeongtaek_culture_greatman.jsp?LeftCodeNo=1&LeftSubCodeNo=6#

  • 2011년 7월에는 옥포해전이 원균이 총대장이고 이순신은 그저 원군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그것도 옥포대첩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 회장이라는 작자가 한 말. 이럴 땐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위에서 언급되었듯 파면 팔수록 막장이라는 증거만 나오는데도 아직도 원균을 못 띄워서 안달인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 신기할 따름. 이렇게 보면 원균처럼 한국 역사상 거저 행복한 대접을 받는 역사인물이 있는지 의문이다.

  • 원균을 선무1등공신에 봉한다는 내용의 공신교서는 현재 보물 제11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로 이순신 공신교서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수십년간 뒷세계를 떠돌다 2007년에 발견되었고 2008년 6월 27일 보물 제1564호로 지정되었다.

  • 묘는 도일동(송탄동)에 위치하고 있으며[83] 사실 이 근처에 저수지가 하나 있어 가끔 가다 낚시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그의 후손인 모 국회의원과 평택시에 의해 또 왜곡이 일어날 처지에 놓여있다.

  • 그리고 약 40년 후에도 원균 못지 않은 이가 또 하나 있었으니...

  • 머리는 일자무식이며 능력이라고는 딱 무과에 급제할 만큼의 능력은 갖고 있었다. 이것이 주입식 교육의 병폐다. 예나 지금이나... 그 어떤 무예 시험이라도 병법 실기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무과에서 보는 과목이란 게 그 개인의 무예 실력이랑 병법 이론 (및 유교 교양지식) 정도일텐데, 수전의 장수로서 그 개인의 무예 실력은 거의 필요가 없고 어느 학문에서나 (그리고 특히 병법같은 실기 중심의 학문이라면) 이론만 빠싹하고 실기에서는 개판 치는 사람이란 건 흔하다. 그래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경질당하게 되었을 때 정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가 삼도수군통제사를 하고 싶은 것에만 눈이 멀어서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의견을 지지했다. 다만 보통 모함으로 직위를 빼앗은 경우 전임자와 차별화와 공적을 세울 욕심에 무리하게 나가는게 보통인데, 막상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자 아니다 싶어서 주저한 것을 보면 의외로 나름 기본적인 소양은 있었을 수도 있다. 문제는 당시 상황이 기본적인 소양으로 어림도 없었고, 무엇보다 원균의 그 지랄맞은 성격과 좁은 속, 욕심 때문에 제대로 싸울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자리가 원균에게는 죽음의 자리였다.

  • 뚱뚱하다. 이 때문에 체구가 큰 연예인들이 원균 배역을 맡아야 적절한 고증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조선왕조오백년에서는 선굵은 외모의 신충식이,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젊은 시절 당대 미남 배우로 꼽히던 최재성이 원균을 연기했다.

  • 이화 선생은 자신의 저서 국사 이야기 11권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편에서 원균의 죽음을 묘사할 때 도망하다 죽었다고 분명히 옆에 명시해놓고 그 다음줄에 '최후만은 참으로 장군 다웠다'라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서술을 하였다. 잘 죽었단 소리인가? 당시엔 육지로 도망하긴 했어도 싸우다 죽었단 이론이 대세긴 했는데 그런 서술은 하지도 않고 이런 서술을 했으니...

  • 동생 원연과 조카인 원사립은 임진왜란에서 공적을 세운 장수였고, 아들 원사웅도 평범한 수준은 되는 무난한 장수였지만 원균의 희대의 뻘짓덕에 같이 묻혀버린 케이스. 기록을 찾아보면 무언가 공을 세웠다는 업적은 원균을 제외하고 이쪽에 있는데...

----
  • [1]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이 개력한 때가 1582년이므로, 1540년에는 서유럽에서도 율리우스력이 쓰였다. 다만 개력 시점을 무시하고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2월 22일이다.
  • [2] 일단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는 것이 중론이나 당대에 원균을 봤다는 기록이 있어 논란이 좀 있는 편이다.
  • [3] 같은 선무공신 1등이라도 권율과 이순신의 경우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은 반면, 원균의 경우는 종1품 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그리고 이 당시 권율과 이순신에게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 및 부원군의 작호가 추증된 반면, 원균은 좌천성 겸 판의금부사, 군의 작호가 추증되었다. 선조에 의해 어거지로 선무공신 1등이 되긴 했지만 조정에서도 원균의 평가가 좋지 못 했음을 단면적으로 드러낸다 할 수 있다.
  • [4] 조선왕조실록 명종 30권 19년의 6월 21일의 기록에 따르면 원준량이 자식을 부정입시케 하여 탄핵받은 바 있다. 이때 원균의 나이는 24살로 입시에 응할 나이이며 원균의 바로 아랫동생인 원영은 21살이나 문과 급제생이었고 남은 두 동생들은 무과에 응시하기엔 지나치게 어렸을 것이므로 이에 해당되는 것은 원균일 가능성이 높다.
  • [5] 명종 19년(1564년)의 입시 부정 논쟁으로 낙방한 뒤 다시 응시하여 급제한 것 같다.
  • [6]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융경원년정묘식년문무과방목(隆慶元年丁卯式年文武科榜目)』
  • [7]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참조. 문제는 이 전투에서 원균은 예비대로 참전해 군공을 세울 일이 없었다. 별다른 군공이 없었는데도 승진이 가능한 건 둘 중 하나다. 첫째, 선조에게 이 전투가 매우 인상적이었는지 이때 참전하거나 활약한 장수들은 후에 조선군의 중추로 성장한다. 그래서 원균은 별다른 군공이 없었지만 참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조의 눈에 들어 승진한다. 둘째, 알려지지 않은 변방에서의 활약이 더 있다. 현재는 원균이 윤두수, 윤근수를 비롯한 조정의 서인 대신들과 교류가 많았다는 점 때문에 조정 집권세력의 비호로 진급했다는 평가가 많다.
  • [8] 이 전투에는 이순신 또한 원균과 같은 계급으로 참전해 활약했다. 나이는 5년 어려도 급제는 3년 먼저 했으니 이순신은 원균의 선배인 셈이다.
  • [9] 쉽게 옮기면 "전라 좌수사 원균은 수령으로 있을때 평가가 바닥을 쳤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지금 전라 좌수사로 앉혀놓으니 공에 따라 지위를 올리고 내려야 하는 것에 거스르는 것이므로 사람들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러니 짤라버리고 젊고 무예와 지략을 갖춘 사람을 전라 좌수사로 앉혀놔야 합니다." 정도가 되겠다. 상당히 돌려서 말하는 당시의 풍습을 감안하면 이건 대놓고 능력없다고 비판한거나 다름없다. 참고로 이순신 장군의 경우 그냥 "진급이 너무 빠르다"가 전부다. 그리고 원균의 후임으로 임명된 사람이 이순신.
  • [10]대한민국 해군으로 치면 후방인 제3함대 사령관으로 발령냈다가 무능하다고 보직해임 해놓고 몇달뒤 주력함대인 제2함대 사령관으로 보낸 격이다(...) 해군 제2함대는 북한의 수상전력 대부분과 대치하기에 대한민국 해군 3개 함대 중 가장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군 제3함대는 후방인 남해안 경비가 주임무이기에 대한민국 해군에서 가장 약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광개토대왕급 구축함이 기함인 1, 2함대와 달리 3함대의 기함은 울산급 호위함 3번함인 충남함이다.
  • [11] 이건 조선시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동양사의 역사 서술의 방식으로 상이한 기록이 있다면 모두 기록해서 후세 사람들이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하긴 그건 그리스헤로도토스도 그랬다.
  • [12] 임진왜란 당시 승전보고 체계가 하도 막장이라 민간인을 학살하고 왜군을 섬멸한 것으로 보고천하의 개쌍놈들 장군까지 존재했다.
  • [13] 이젠 제법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선조는 전쟁 준비를 안했던 것이 아니었다. 전쟁 준비를 너무 열심히 해 백성들의 원성을 살 정도였던 경상감사 김수는 개전 겨우 몇달 전 경상우수영 예하 모든 수영을 검열했다. 검열에서 경상우수영은 합격 판정을 받았다. 경상우수영의 전력은 최소 판옥선 75척에서 최대 100척에 이르렀다.
  • [14] 참고로 이 사실은 "원균은 육군 적성인데 수군에 배치한 조정이 잘못한 거다."라며 원균을 옹호하는 주장에 훌륭한 반박 근거가 된다. 여기에 나온 바와 같이 원균은 스스로 수군 가면 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원균이 육군도 못한다는 건 위에 원균이 성 쌓았더니 비 맞고 무너졌다는 얘기랑 빈 성을 털자고 달려들었다가 왜구 온다고 뺐다는 얘기에서 이미...
  • [15] 안중홍(安重洪)으로 동암처사라 불렸다.
  • [16] 일본 수군을 상대로 싸울 때는 함포를 이용한 장거리 공격이 최선이자 유일하게 승산 있는 전술이라는 것쯤은 이순신 뒤만 따라다녀도 알 텐데, 이 자 수군 통제사 맞나?
  • [17] 지휘관이 직접 칼을 쓰고 활을 당기는 상황은 전선이 무너져서 최후의 발악을 할때나 하는 짓이다! 현대전에 대입해보자면 해군사령관에게 "적이 이러이러하게 오면 어떡할 거냐"라고 물었더니 "멀리 있을때 K-2를 쏘고 가까이 오면 수류탄을 던지겠다"라고 대답한거나 같다. 무슨 어린애 전쟁놀이도 아니고 철저하게 일본군 도륙내는 킬링머신으로 조선군을 키워놓은 이순신의 공학자적 마인드와 크게 비교된다. 억지로, 정말 억지로 원균에게 실드를 쳐보자면 조선 태조 이성계는 손수 활로 적들을 백발백중 쏘아죽이며 전장을 누비기는 했다. 하지만 원균을 태조와 비교한다는 것은 태조에 대한 최악의 모욕이다.
  • [18] 상담병이라고 자기 이름으로 고사성어까지 있을 정도로 입전략의 달인이었다.
  • [19] 조괄은 명장 조사의 아들이었고 이미 당대의 수재라 평가되던 인물이었다. 실전경험이 전혀 없고 그저 책상에서 공부한대로만 병법을 적용하다보니 시시각각 변하는 실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겁 또한 아무리 악의가 연왕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를 대신할 정도면 어느정도 능력이 있다는 얘기고,근데 이순신을 대신한 원균은? 적장 전단이 직접 뇌물과 함께 성이 함락되거든 자기 가솔들을 보살펴 달라는 편지를 보내오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뜻하지 않은 기습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괄과 기겁의 상대는 그 기나긴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도 손꼽힐 명장들인 백기전단이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을 지휘한 도도 다카토라나 가토 요시아키도 분명 유능한 장수들이었지만, 백기와 전단에 비교할 바는 절대 못 된다.
  • [20] 이 당시 원균 본인이 쓴 장계가 육군 30만을 동원해서 섬을 일단 정벌하면 해군도 따라 나서겠다는 내용. 원균 병크의 대표주자이자 원균맹장론 최대의 반론이다. 혹자는 "원균 10만 해병대 양병론"이라고 깐다.
  • [21] 물론 현지 상황을 모르는 조정의 시각. 원균이 이끈 전선은 7척 정도였으니 30~40척을 지휘한 이순신 장군이나 이억기와 같은 선상에 두는 건 무리다.
  • [22] 숫적으로도 열세인 데다 그 유명한 조선 수군이라 별 저항 없이 항복했다.
  • [23] 정조 때 편찬한 <충무공전서>에 안홍국은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과 같이 죽었다고 기록되었는데, 그러자 후손들은 죽은 것은 같으나 싸우다가 죽은 것과 군진이 무너져서 죽은 것은 아주 다릅니다라면서 잘못된 기록으로 공이 묻혔으니 정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니까 이 때는 그나마 싸우다가 죽은 거라도 되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죽었다는 건 싸우다고 죽은 것도 아니라 후손 입장에서는 조상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 들여졌다는 의미다. 조선 후기 칠천량해전에 대한 인식을 보여줄 수 있는 단면.
  • [24] 항목 맨처음에 등장하는 사관의 말을 참조.
  • [25] 이 함대가 배설을 위시로한 훗날 합류하는 함대일 것이다.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주력함대는 죄다 진해만으로 달려갔고 그 결과...
  • [26] 엄밀히 말하면 시작은 이미 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조선수군을 말아먹음으로써 전선이 크게 확대되고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사실상 정유재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고 해도 무리는 없다(...).
  • [27]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책봉되었다는 것은 동명이인이다. 여하간에 학계의 정설은 원균이 전사했다는 것. 최소 1601년 이전에 죽은 것은 분명하다.#
  • [28] 하지만 이날의 승리는 휴전기간에 왜적의 뒷통수를 친 사건이었다(...) 그리고 적선 3척과 왜적 47명을 죽였지만 반대로 조선수군은 판옥선 1척, 고성 현령 조응도, 그리고 140명의 병력 손실이 있었다. 승전도 아니고 손해인 셈(...). 자세한 내용은 칠천량 해전 항목 참조.
  • [29] 선조실록 30년 7월 7일 기사에 조선 수군이 다대포에 정박했다는 기록으로 추측.
  • [30] 노를 젓는 병사들
  • [31] 난중일기 정유년 7월 14일, 16일자 기록.
  • [32]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수정마을.
  • [33] 칠천량은 임란 초기부터 조선 수군이 비바람을 피해 정박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임진장초 선조 25년 7월 15일 계본. "7월 9일 맞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할 수 없음으로 거제땅 온천도(칠천도)에 정박했다."
  • [34] 水使:원균
  • [35] 3번이나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
  • [36] 원사웅이 실제로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게 확인된 이상 동정심을 얻기 위해 지어낸 거짓 사실일 것이다. 심지어 원균집안 족보에 기록된걸 보면 원사웅은 자식까지 있다.
  • [37] 그나마도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살아남은 공신들의 종묘사직 기도 연명문인 <17공신 회맹문>에 보면 좀비처럼 버젓이 살아있다는 설이 있다! 그것도 "선무공신 원균의 큰 아들이자 절충장군 전지중추부사인 원사웅"으로 확인사살.
  • [38] 불멸의 이순신이 방영되자 《원균을 위한 변명》으로 재출간됐다.
  • [39] 마찬가지로 드라마가 방영되자《원균》으로 재출간되었다.
  • [40] 다만 이건 10년도 더 전의 일이며 그 이후 다른 책에서 원균을 옹호한 적은 없다.
  • [41] 공무원 준비생이 2015년 현재 50~100만 인데다, 공무원 국어 최고의 스타강사인 이선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강사라, 신영식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 [42] 이는 원균이 임진왜란 초창기 큰 피해를 입었다는 증거다. 원균에게 제대로 된 전력이 있었다면 무능한데 욕심만 잔뜩 있던 그가 가뜩이나 사이도 안 좋은 이순신에게 계속 붙어있었을까?
  • [43] 왕을 참하라나 조일전쟁은 원균옹호론 저서라기 보다는 조선까 서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작가가 조선까니 더 말이 必要韓紙.
  • [실제사례]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불멸의...이순신이 언제부터 호가 불멸의가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불멸의 이순신. 자 이순신의 활약. 이순신은 참으로 드라마틱해요. 임진왜란 발발하기 1년전에 동풍이 특이하다고 해서 임진왜란을 예언해요. 그리고 거북선을 만들기 시작해서 정확히 임진왜란 터지기 3일전에 완성합니다. 놀랍죠. 무슨 예언자도 아니고 이순신은 그렇다고 해군장수도 아니었어요. 함경도 만호하다가 지금 전라좌수사로 바로 내려온 신참내기 수군장수인데. 이거 놀라워요. 너무 이거 드라마틱해. 그래서 뭔가 의심이 가 이순신에 대해서는 이순신의 일대기를 정리한 것은 안흥수씨가 그래갖고 1960년대 사학자에요. 이사람이 <<성웅이순신>>이라는 책을 처음 쓴 사람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말씀 드리는 건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이순신을 폄하하는게 아니고 그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다음에 군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우리도 영웅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당시 작가들에게 한명씩 전기를 다 맡겼어 . 장군들의 전기를 그 여러분이 어린시절에 나왔던 위인전 읽었던거 다 장군들 일거야. 전부 다 그 이유 때문이에요. 사실적 근거? 없는거 많아요. 이순신 어렸을때 골목대장 돼갖고 막 그 자기보다 5살 많은 11살 짜리가 이순신 6살때 자기 친구를 괴롭히자 이순신이 '약자를 괴롭히는건 대인의 도리가 아니다' 라고 얘기했다고 하죠. 그러니까 11살 짜리가 부끄러워서 돌아갔다고 하죠. 도대체 이런 얘기를 누가 지어냈는지에 대해서 참. 이게 사실이라면 11살 짜리는 병신이죠. 그런데 어린시절의 이런 얘기들이 다 문중에서 나온 얘기야. 그러니까 역사적 근거가 있는 얘기가 아니고 아무도 알 수 없는 얘기입니다. 이런게 위인전이 한번 만들어지고 나니까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거지. 자 이순신에 대해서 폄하하는게 절대 아니다. 다만 성웅 이순신이라고 하는 그 책을 1963년에 처음 출간하면서 그게 이순신의 바이블이 됐어요. 그리고 우리가 영웅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것을 음해하는 사람이 있으야 되지. 그러니까 사실은 아무 죄도 없는데 원균이 그 역할을 맡은거야. 요즘 이순신 전기 새로 쓴거 읽으면 원균얘기가 그렇게 안나옵니다. 옛날에 제가 읽었던 이순신 책에는 완전 비열하고 치사하고 막 모함하고 그냥 이런 사람으로 나오는데 원균 그 원씨집안 그 집안이 무골이에요. 정통 집안이야. 물론 원균이 이순신과 사이가 별로 안좋았을수도 있어 왜? 그집안이 워낙에 무신집안으로는 쟁쟁한 집안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뭐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도 (원균) 싫어하는 장면 나와요. 많이 나오는데, 원균이 어디 모이자고 하면 (이순신이) 원균의 말이라 믿을 수 없다. 안가. 막 이런게 난중일기에 나오고 그래. 곳곳에. 근데 둘이 뭐 사이가 안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원균이 무슨 모함을 하고 이런것은 뭐. 국가상대로(원씨집안이) 소송하고 이랬어요. 그 잘못된 것들 그거 전부 다 빠지고 그랬어. 옛날처럼 (원균을)그렇게는 안봐요. 자 어쨋건 이순신 대단한 장수임에는 분명합니다. 맹장이 아니라 지장이죠. (생략) 그러다가 원균과 권율이 모함 해갖고 백의종군하죠.(생략)
  • [45] 이순신에게 조선군선은 왜선보다 튼튼하기에 들이박아도 된다며 역설까지 하고 그 말을 직접 탄 군선으로 실행한다.
  • [46] 조선왕조실록에 신립은 기병을 잘한다는 묘사가 있지만 원균은 뭘 잘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다.
  • [47] 盲이라는 한자는 장님이라는 뜻도 있지만, 무지(無知)하다라는 뜻도 있다.
  • [48] 당장 이곳 리그베다위키에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항목을 한 번 보자. 이런 기록을 남길 만한 나라의 지식인들이 기록을 소홀히 할 리 없다.
  • [49] 네이트 백과사전은 한국역대인물정보의 내용을 기본으로 작성한 듯한데 # 한국역대인물정보의 원균 내용의 집필자가 바로 원균의 재조명을 주장한 논문을 작성한 당사자이므로 이런 내용이 나온 게 당연하다.
  • [50] 대신 하후돈은 인품이나 다른 능력이 뛰어나기라도 했지만 원균은...
  • [51]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절대로 맹장이 아니었다.
  • [52] 난중일기에서는 2월 1일부터 비가 계속 내렸고, 역풍이 있었다고 언급되었다. 2월 5일. 보성군수의 소속함대가 비때문에 발이 묶여 합류가 늦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안그래도 바람세를 포함한 기상여건이 불순했고, 거기에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는 신안 앞바다 기지 함대들까지 우수영에 모여야 하고, 여기에 우수영이 있는 해남에서 견내량까지 이동거리를 감안하면 원균 함대보다 10일정도 더 수고할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균은 이걸 따져보지도 않고 이억기가 안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발끈한거다.
  • [53] 이같은 원균의 험담은 원균을 두둔하는 대신들에게 '원균은 조정의 명을 받고 제일 먼저 달려왔지만 이순신과 이억기는 때마다 늦었기에 원균이 화가 나서 단독으로 출동하고자 했다'고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뭐병
  • [54] 이 날은 웅천포해전을 한 날이다.
  • [55] 시기로 보아 웅천포해전이 끝난 이후 22일에 기록된 원균 함대가 우수영함대를 구원하지 않은 사건때문에 본것 같은데... 음흉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자기 부하들의 잘못을 시정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놓은것같다.
  • [56] 문제는 원균은 이 트롤짓을 이 해전 이전부터 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옥포파왜병장에서는 전라좌수영 병력이 다 잡은 왜군의 배를 활을 쏘아대면서까지 전공을 빼앗으려고 해서 좌수영 측에서 부상자 2명이 나와버렸다.고 서술되었다. 정작 왜군에게는 1명밖에 부상당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부상자 2명이 더 나온 것.
  • [57] 禿沙伊項, 현재의 부산시 강서구 녹산동.
  • [58] 조선군인이 본인의 공에 눈이 멀어 같은 조선인 목을 베어오는 것을 명령한 것이다. 이 천하의...
  • [59] 이영남과 이여념은 원균 휘하의 기지대장들이다(...) 계속 언급되겠지만 부하들에게 뒤통수를 맞을 정도로 무능했다.
  • [60] 원균이 "고약스러운 내용" 을 담은 장계를 올렸는데 원균의 직속 부하인 윤동구가 이순신에게 꼰질렀다는 이야기다. 앞서 이영남, 이여념의 경우도 그렇고 부하가 뒤통수를 칠 정도로 원균의 평가는 이미 바닥을 칠 대로 친 상황.
  • [61]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
  • [62] 이 시기 나고야에는 10만여 왜군이 조선 출정을 대기하고 있었고 북쪽으로부터는 16만의 왜군이 남하해 내려오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저 두 작자들의 하는짓이;;
  • [63] 전략된 내용에서는 탐망꾼이 보고한 내용이 서술되었다. '웅천에 있던 적선 4척이 자기네 본토로 돌아갔고 김해 어귀에 있던 적선 150여 척이 나왔는데 19척은 본토로 돌아가고 남은 배들은 부산으로 갔다'는 내용이다. 원균의 얘기는 이걸 공격하자는 얘기 같은데... 새벽 2시에 떠나자면 취침중인 병사들을 깨워서 출동준비에 들어가야 하고, 여기서 웅천에 도착하면 정오쯤. 수비력이 가장 탄탄할 시간이다. 여기에 김해를 공격하고 부산을 공격할려면 3일은 걸리는데 취침과 식사는...? 때문에 작전제의를 하려면 수사들간의 정보분석->작전입안->출동준비->출항 순으로 절차가 있는 법인데 원균은 그런거없이 그냥 가자고 한거다. 이뭐병.
  • [64] 6월 10일 새벽 2시에 온 원균의 제안에 대해 이순신이 공문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계획안과 작전회의 요청서를 보낸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원균 자신이 출정하자고 요청했으면 바로 답변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안을 구체화하여 다른 수사들과 논의를 해야 하는데... 그 공문 보내고 술을 먹고 곯아떨어진거다.걍 할 생각이 없었던 거지
  • [65] 바닷속에 들어가서 조개, 미역 따위의 해산물을 따는 일을 하는 사람.
  • [66] 수급을 위해 (조선인의 목을 친후 왜구의 목이라고 우기기 위해) 그들에게 왜군 복장을 입혔던 듯.
  • [67] 원균은 아마 이순신을 깔보고 있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는 항목이다. 자신의 배 25척은 어디 숨겨놓고 달랑 7, 8척만 이끌고 와서 출동을 제안한 것을 보아하면 이순신이 자신의 말을 들을 거라고 판단한 듯하다.
  • [68] 그리고 후에 장계에 올릴 때 이 일을 들먹이면서 "저는 항상 용감하게 나가 싸우자고 했는데 이순신 저놈은 쫄아서 절대 안 나왔습니다"라고 모함까지 했다. 전라도 병마 절도사 원균의 서장. 선조실록 30년 1월 22일 3번째 기사.
  • [69] 원균의 모함이 시초가 되어 죄인 취급되었다가 겨우 백의종군 처리되어 석방되었고, 이었기 때문에 4월 13일 모친의 사망소식을 들었음에도 시묘살이조차 못했다.(당시엔 부모상을 당하면 전쟁중이라도 고향에 돌아가 시묘살이를 해야했다. 임진왜란 직후 저술된 소설인 덕령전에서, 왜군을 막겠다고 출정하는 김덕령에게 어머니가 "부친상을 치러야 하는데 그걸 외면하고 전쟁터에 나가냐 후레자식아"라고 까내리는 부분이 있고 이에 김덕령은 엄마 몰래 나가서 왜구 소탕을 해야 했다. 또, 몇백년은 뒤인 13도 창의군의 총대장이 서울 진격작전을 앞에 두고 부친상을 챙기러 내려가는 바람에 13도 창의군이 와해된 일도 있었다.) 이전부터 해먹은것 역시 있기도 하고, 이쯤되면 욕을 안 써놓은 게 용할 지경. 참고로 한자 문화권에서는 사람 이름을 부를 때 아무런 직함이나 칭호 없이 그냥 성만 딸랑 써놓는 건 강호순이나 조승희 급의 흉악범죄자한테나 하는 일이다. 참고.
  • [70] 松峙: 순천시 서면
  • [71] 우치적: 순천 부사
  • [72] 백의종군 하던 당시.
  • [73] '여수 본영'에서 진흥국이 와서 '눈물을 뿌리며' 하소연했다. 여수는 전라좌수사 겸 3도수군통제사의 본영이고, 한산도는 둔치고 있는 진이다. 도대체 원균이 무슨 짓을 했으면 여수 본영 사람들이 이순신에게 달려와서 눈물을 뿌릴까...? 이건 원균이 부임한지 이제 겨우 석달 지났는데 여수 본영과 한산도 진영 사이에 큰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짐작가능하다.
  • [74] 원균은 심지어 부하의 아내를 강간하려 시도하는 짓거리도 저질렀다는 증언이다.
  • [75] 申蓁. 신진.
  • [76] 主將, 원균을 뜻한다.
  • [77] 도원수 권율(權慄).
  • [78] 꿈에 원균한테 밥상을 대접받았더니, 현실에선 원균이 사고치고 붙잡혀 갔다는 얘기(...). '대접'은 맞네...
  • [79] 이 내용 때문에 결국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되고 그 자리를 원균이 차지한다.
  • [80] 임진왜란이 끝나고 2년 후 윤계선이란 선비가 쓴 소설이다.
  • [81] 다만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이 작전중에 군선에 기생을 태우고 논 건 사실이다. 그런 인물이니만큼 유배지에서 기생을 끼고 논다는 전개도 일단 원균이란 캐릭터(?)를 훼손한 것은 아니었을 것.
  • [82] 다만 이건 노주현의 말이 틀린 건 아닌게 귀양은 엄연히 처벌이고 귀양지에서의 반성과 근신이 주목적이니만큼 아무리 생각없는 사람이라도 귀양지에서만큼은 조용히 지내려하지 주지육림에 빠지려 하지 않는다. 방탕하게 보내면 보낼수록 조정과 왕의 눈밖에 나고 생명줄을 단축시키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
  • [83] 현재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는 선산의 묘지는 시신이 없는 가묘이며,실제 묘지는 통영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실제 시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봉분은 방치된 상태이며(해당 링크의 기사는 부산일보 8월 기사,후손들이 벌초비용을 보내고 성묘도 온다고 한다)77호선 확장공사로 아예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고.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8-02 17:36:12
Processing time 0.5040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