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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

last modified: 2015-10-11 01:58:35 by Contributors

Contents

1. 袁紹
1.1. 전반기
1.1.1. 청년 시절
1.1.2. 6년상
1.1.3. 재야의 거두
1.1.4. 하진 휘하로 임관
1.1.5. 십상시의 난
1.1.6. 맹주로서의 행보
1.1.7. 계교전투와 하북 평정
1.2. 이후
1.2.1. 협천자 논쟁
1.2.2. 조조와의 대립
1.2.3. 관도대전
1.2.4. 말년
1.2.5. 사후
1.3. 평가
1.4. 현대의 평가
1.5. 기타
1.6. 조조 시점에서의 원소
1.7. 재평가
1.8. 기타 창작물에서의 원소
1.9. 원소는 투구를 쓰지 않았는가?
2. 爰邵

1. 袁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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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97.45 KB)]

글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長揖橫戈出(장읍횡과출) : (공손하게) 읍을 하지만 옆으론 칼날이 흘러나온다.
將軍蓋代雄(장군개대웅) : (원소) 장군은 시대를 뒤덮는 영웅이구나!
頭顱走千里(두로주천리) : 머리는 천리 밖에서 잘려 오는데[1]
失計殺田豐(실계살전풍) : 어긋난 꾀로 전풍이나 죽였다.


(155? ~ 202)

후한 말의 군벌이자 삼국지의 인물. 후한의 명사로 는 본초(本初).

자모위용(姿貌威容)이라는 표현 그대로 빼어난 용모에 위엄이 서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지 관련 2차 창작에서는 열에 아홉은 조조보다 못생겼다... 이는 2차 창작물 대부분이 실제 얼굴보다는 연의의 이미지로 외모를 만들기 때문이다. 일례로 맹달은 실제로는 조비가 마음에 들어할 정도의 미남이였으나, 2차 창작물에서는 그 외모가 안타깝다.지금 상단의 이미지가 연의기준이다. 지못미 원소

1.1. 전반기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사람이지만, 이는 가문의 본적이 여남군 여양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되었을 뿐, 실제로는 후한의 수도였던 낙양(洛陽)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원소 본인이 남긴 글에서 자신이 낙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동탁 진영에서 원소를 비하할 때 수도에서 나고 자라서 외모만 반듯한 겁쟁이니 변경에서 실전으로 백전연마한 자신들의 상대가 안된다고 호언하는 기록들에서 잘 드러난다.

고조부 원안(袁安)부터 4대가 모두 삼공(三公)의 작위를 얻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나 태생은 다소 복잡하다. 노비였던 어머니와 다르게, 아버지 쪽은 태위 원탕(袁湯=원소의 할아버지)의 삼남 원봉의 자식이나 요절한 차남(장남과 차남이 모두 요절해서 삼남 원봉이 종가가 되었다.) 원성의 가계로 입적되었다고 하나 원성의 유복자라는 설도 있다. 진수삼국지에서는 부친에 대한 언급이 없이 고조부 이래로 삼공을 지내 큰 집안이었다고만 설명되어있고, 후한서나 그 외의 주석서들에서는 원봉 혹은 원성의 얼자(孼子)라고 나온다. 얼자라는 말은 천민출신인 에게서 나온 자식이라는 뜻인데 후한 시기만 해도 서자가 출세에 큰 제약은 받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노비인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당시에는 과거제로 사람을 뽑아 쓰던 시대가 아니였는지라, 주변의 평판이나 추천이 중요했고 이는 곧 천거로 이어졌는데, 아무래도 사회의 편견이 있으니 어머니가 노비면 평판이 좋게 나오기 힘들었다. 공손찬과 원술이 나중에 원소를 비난할 때 "종놈"이라 부른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1.1.1. 청년 시절

어린 시절부터 삼공부 고위 관료들의 주목을 받아 낭(=고관의 하급부관)으로 일하다가 20세에 벽소되어 복양현장에 임명되었는데 청렴하고 깨끗하다는 평판이 두루 있었다.

조조와는 어린 시절부터 교분이 있었다. 세설신어에서는 조조와 원소가 젊은 시절에 다른 집의 신부를 잡아서 겁탈하려 하다가 원소가 가시덤불에 걸려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조조가 "도둑이 여기있다!"고 외쳤고 원소는 기겁을 하여 필사적으로 뛰쳐나왔다는 웃기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세설신어의 특성상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당대인들이 조조와 원소에 대해서 가지는 이미지가 이랬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1.2. 6년상

마침 이때 원소의 적모(嫡母=원봉의 정부인이자 원술의 친어머니)가 죽었는데 원소는 이를 계기로 벼슬을 그만두고 원씨의 본적이 있는 여남으로 내려가 시묘살이를 하며 삼년상을 지냈다. 탈상을 마친 후 곧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고아 -그는 원봉의 자식이나 태어나자마자 이미 죽은 원성의 가계로 입적되었으므로 호적상으로는 고아가 된다.-였으나 상복을 입지 않았던 것을 추감하여 아버지(=원성)의 삼년상을 연이어 지냈다. 이런 기이한 행보로 인해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많은 빈객들이 찾아왔는데 이때 원소 또한 누구를 만나더라도 귀천을 막론하고 예를 갖춰 대하는 등 항상 정중하고 겸허한 태도를 유지했고 이는 곧 그에 대한 좋은 평판으로 이어졌다. 그때 한번이라도 원소를 만나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인하여 그의 집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주변의 거리가 마비되었다고 한다.

보통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도 삼년상 지내다 줄초상 나는 경우가 왕왕 있었던 만큼 삼년상이라는 것은 중노동에 가까운 고행이었다.

후한말에는 이를 간략하게 고친 약식으로 상을 지내는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삼년상을 지내는 사람들은 효자로 명성을 얻었고, 명성과 평판은 관직 천거의 주된 이유가 되었다. 때문에 이 '효행'에 대해서 의혹의 눈초리도 적지 않았다. 후한서의 진번열전에는 원소와 비슷한 시기인 영제 시대에 삼년상을 지내 효자로 이름이 알려지고 주에서 천거되었던 선비에 대해 조사하던 중 상을 치르는 기간 중간에 자식을 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 대해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고, 예와 절차에 맞게 삼년상을 지내며 사람들로부터 명성이 알려졌고 존경을 받았지만, 홑이불을 덮어야하는 고된 시묘살이로 인하여 초췌해져 탈진해 쓰러져 있는 아들을 보다못한 어머니가 겹이불을 덮어줬던 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고난 후 소문이 돌아 하루아침에 빈객이 뚝 끊겼다는 일화가 전해져 왔을 정도였다.

원소는 복상 기간동안 그를 보기 위해 항상 거리가 마비될 정도로 인파가 몰리는 등 높은 명성을 유지했고 당대의 명사였던 하옹의 극찬을 받았다. 이는 곧 고된 시묘살이를 수많은 선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가운데 단 하나의 흠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말이 된다. 그것도 모자라 탈상하자마자 추감하는 형식으로 안 지내도 될 삼년상을 또 다시 지냈다. 원소가 지낸 복상의 대상은 자신의 적모임과 동시에 원성의 가계로 입적됨에 따라 숙모가 되는 여자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호적상의 아버지인 원성인데 모친상과 부친상의 대상이 사실상 별다른 혈연관계가 없는 남남인 셈이다.

배송지는 원소가 육년상을 지낸 일화를 두고 친부가 죽은 일로 추복했다는 전례도 여지껏 문헌에서 본 적이 없는데 설마 양자인 원소가 그랬겠냐며 친부가 원성이었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제기했다. 하지만 첫 삼년상의 대상인 적모는 원술의 친어머니(=원봉의 정실부인)로 보이기 때문에 배송지의 의견에는 반박의 여지가 있고, 또한 달리 말하면 적모를 위해 복상을 하고 양부를 추복하며 효재를 다하는 고금을 통틀어 유래가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기에 그만한 유명세를 탈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원소가 6년상을 지내기 이전에 2차례의 당고의 금 사건으로 당인세력이 낙양에서 축출되어 형주와 예주 일대에서 숨어 지냈는데, 6년상 기간 동안 청류파의 명사였던 하옹 등 여러 당인(黨人)들과 교류하며 중앙정치의 부정을 성토하는 등 청류파로서의 입지를 넓혀 갔다.

흔히 원가를 사세오공을 지낸 명문가라고 하는데, 이건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환관세력과 결탁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청류파 인사들이 원가의 배경을 가진 그를 처음엔 달갑게 여기진 않았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즉, 원소는 천출이라는 출신성분과 탁류파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었던 원가의 일원이라는 이미지를 무려 6년 간의 복상이라는 을 거침으로서 씻어내고 극복해낸 것이다.

원성이 원소의 친부였던 양부였던 간에 원소가 시묘살이를 이유로 관직을 버리고 여남에 머무르며 청류파로서의 입지를 넓혀나간 것은 사실이며, 이 과정에서 천출인 원소가 다수의 청류파 인사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원씨의 문객과 고리 등의 지지기반을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1.1.3. 재야의 거두

6년상 이후 탈상을 마치자 곧바로 낙양으로 이주했다. 이보다 앞선 176년 5월에는 당인을 보호하던 영창태수 조란을 찢어죽여 사대문에 효시한 뒤, 당인 및 그 보호자에 대한 연좌제가 시행되어 이들의 문객과 고리 그리고 5촌 이내의 친척 중 관직에 있는 자는 모두 파면시키고 임용기회를 박탈하는 칙령이 내려졌었다. 따라서 당인들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졌다. 이 때문에 십상시 등 환관 세력의 중심인 낙양에서의 청류파는 전멸상태였고 오히려 부정부패가 들끓어 지사(志士)들은 모두 낙양에서 도망친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가히 마도라 불릴 만 했다. 이러한 사실은 후한서 하옹열전에서 극명하게 보인다.

이런 환관의 천하에서 원소는 배짱 좋게도 당인이었던 하옹과 함께 환관세력의 안방인 낙양으로 들어가 은밀히 당인들을 보호하고 십상시에게 억울하게 해를 입은 사람들을 도왔다. 당시 당인을 도운 사람들 역시 연좌제로 처형당하는 것이 법이었으므로 원소의 행동은 대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원소는 자신을 중심으로 모인 당인들과 매양 장차 환관 체제에 타격을 가하고 전복시켜 정치를 바로잡을 방안을 의논하였다고 한다.

이는 그의 6년의 고행과 맞먹는 매우 기발한 발상이었는데, 원소가 이토록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원소의 가문이 있었다. 당시 원씨는 환관 체제에 협조적이었던 대표적인 탁류 가문이었는데 이미 칙령을 천하에 공표한 이상 문제를 공론화시켜 원소를 처형하려면 원소뿐이 아니라 자신들의 우군인 원씨 가문 전체를 절단내야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원씨는 4대에 걸쳐 삼공을 지냈기에 그 문객과 고리들이 온 나라에 퍼져 있었는데 원씨를 제거한다면 이들 모두를 적으로 돌려야 했다. 원소는 비록 노비의 자식이었지만, 자신이 원씨라는 점을 그야말로 절묘하게 이용한 샘이다.

이토록 원소 하나를 잡기 위해서 엄청난 파장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십상시는 섣불리 원소를 제거할 수 없었고, 그러는 사이 전멸상태에 가까웠던 청류파 세력은 원소를 중심으로 자연히 모여들어 원소의 명망은 나날이 높아졌다.

또한 벼슬을 내리며 회유하는 조정의 소환에도 매번 병을 핑계대며 불응하는 등 어그로란 어그로는 다 끌었기에 자연히 청류파의 대표로 두각을 드러내 모든 환관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며 환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원씨 가문과도 대립했다.

이때 원소는 천하에 명성이 알려진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마 암살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 같다. 가능성이 높은 것이, 환관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당시 원소는 암살이 아니면 답이 없었다. 설령 원씨를 잘라낼 각오를 하고 원소의 문제를 공론화시켜 법정에 세우더라도 1차 당고의 금의 전례와 같이 오히려 역관광을 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원소와 낙양의 청류파들은 원씨가 아니더라도 자신들을 보호할 패 몇 가지는 준비해야 했으며, 항상 환관 체제를 공격할 기회만 찾고 있었다. 또한 수 십 년간 쌓이고 쌓인 것이 환관들의 비리와 부정이었다. 당고의 금이라는 희대의 언론탄압으로 반대여론을 표면적으로는 무마시켰으나 이미 환관 체제에 대한 식자층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는데 원소가 법정진술에서 이를 성토하여 다시 불을 붙이면 환관 체제는 치명타를 받게 되며 이는 3차 당고의금이라는 답이 없는 막장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는 문제다. 그렇기에 원소의 문제를 공론화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벼슬을 내리며 회유하는 것은 원소 본인이 단호히 거부했다. 암살하는 수단 외에는 정말 도리가 없었다. 원소 본인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며 이미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겪었을 가능성도 높다.

1.1.4. 하진 휘하로 임관

하지만 최소한 184년 무렵에는 대장군 하진(河進)의 연(掾)[2]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영웅기에 따르면 중상시 중 하나인 조충이 원소가 명성만 키우면서 조정의 소환을 거부하는 동기가 불순하다며 주변 환관들에게 성토했고 이것을 들은 원외가 "원소에게 집안을 망칠 작정이냐."[3]고 꾸짖자 벼슬에 응했다고 하지만 후한서에 의하면 원외의 말에도 끝끝내 따르지 않았다고 하고 있어 어떤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이는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다기 보다는 아마 시기적으로 황건적의 난이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황건란을 계기로 당인들의 수배가 풀렸고 이에 당인들이 다시 조정에 진출했는데 이때 당인세력을 지지층으로 거느린 원소 또한 이에 맞춰 출사한 것으로 보인다.

임관 뒤 학행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아 시어사[4]로 승진했으나 평소 사이가 나빴던 원술(袁術)이 상서[5]로 있었기에 결국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

이후 최소한 186년 이후에는 호분중랑장(虎奮中郞將)이 되었는데 당시 종정이었던 유우와 함께 황실의 근위대를 지휘하고 있었고 갑훈,유우와 모의하여 근위대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십상시를 주살할 계획을 세웠지만 마침 장온이 갑훈을 경조윤으로 전임시키도록 조정에 건의했고, 갑훈을 꺼려하던 건석(騫碩)이 이를 적극적으로 밀어 부쳐 통과시키는 바람에 바람에 불발에 그쳤다.

188년, 서원팔교위가 창설되자 원소는 형식상 서원군의 2인자인 중군교위로 전임되었으나 실권은 상군교위인 건석이 독점했다.

이후 189년, 영제가 승하하고 대장군(大將軍) 하진이 권력을 잡자 원소는 다시 하진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1.1.5. 십상시의 난

하진은 본디 천민이었으나 환관들에게 줄이 닿아 여동생을 후궁으로 넣으면서 낭중으로 벼슬을 시작했고, 여동생이 영제의 총애를 받음에 따라 승진을 거듭해 하남윤까지 출세했으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대장군으로 임명, 진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막강한 위세를 얻은 인물이었다. 영제가 서원군을 창설하고 건석을 수장으로 삼은 것은 중앙군을 강화해 하진을 견제하기 위함으로 서원군은 황제의 직할군이며 건석은 비록 교위에 지나지 않지만 황제를 대리해 그 직할군을 지휘하는 역할이었으므로 군부의 최고위인 대장군도 상군교위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 건석 또한 평소 하진을 벼락출세한 무식쟁이로 여겨 항상 지나치게 깔보았는데, 영제의 임종을 지켜며 하진을 죽이고 진류왕 협을 황제로 추대하고자 했으나 하진은 이를 간파하고 선수를 쳐 외조카인 변황자를 황제로 옹립한다. 유혈 충돌은 없었으나 이를 기점으로 양자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때 원소는 하진의 측근 장진을 통해 하진에게 먼저 접근해 환관 세력을 축출할 것을 권하는 등 직속 상관인 건석을 배신하고 하진을 부추겼다. 비슷한 시기 호분중랑장을 맡고 있던 원술 또한 하진에게 포섭되면서 하진의 위세는 더욱 강해졌고, 불안해진 건석은 서원군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하진과 군사적으로 전면적인 대결을 벌이고자 했으나, 하진과 가까운 환관들의 밀고로 간파당해 다시 선수를 맞고 처형당한다.

건석이 이끌던 서원군은 해체되어 하진의 휘하로 편입되면서 하진은 모든 권력을 독점했으며 서원군의 2인자 격이었던 원소는 이 과정에서 하진의 핵심 측근으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굳힌다.

본디 십상시의 후원으로 출세한 하진은 건석을 제거한 시점에서 기존 십상시 등 환관세력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입장이었으나 원소를 필두로 하는 강경파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원소는 수도의 행정,사법을 총괄하는 사례교위(司隷校尉)에 임명되어 환관세력 축출을 주도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십상시의 난 항목 참조.

이후 하진이 암살되자, 도성을 장악하기 위해 장양(張讓)이 임명한 사례교위 등 친환관계 관료들에게 선수를 쳐 그들을 모두 살해한 뒤 궁정에 돌입해 환관세력을 철저히 주살했으나 마침 지방에서 올라와 있던 동탁(董卓)이 원소보다 먼저 황제의 신변을 획득했으므로 결국 정권 장악에 실패했다.

원소는 도성을 제압한 뒤 황제를 폐위하려던 동탁과 대립하던 끝에 결국 기주(冀州) 발해군(渤海郡)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다. 폐위를 둘러싼 동탁과의 언쟁 중 폐위를 강행하겠다는 동탁의 협박에 칼을 뽑아 읍하며 "천하에 힘있는 자가 동공 뿐은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난 것은 유명한 일화.

동탁은 원소에게 분노하여 현상금을 걸고 원소를 잡아들이려 했지만, 하옹과 오경 등이 원소와 친했으므로 원소를 두둔하며 회유할 것을 권했다. 동탁은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원소의 명망이 높고 가문 또한 큰 것을 봤으므로 이에 동의해 원소를 발해태수(渤海太守)로 임명하여 원소의 세력권을 추인하는 등 회유에 나섰다. 원소는 태수직을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본래의 직함이었던 사례교위를 자칭했다.[6]

동탁은 또한 어사중승 한복을 기주목으로 삼아 원소를 견제하도록 했다. 원소는 동탁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생각이었지만 한복이 부관들을 보내 행동을 낱낱히 감시했으므로 거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교모가 삼공부의 지령을 날조해 각지의 거병을 부추기는 격문을 돌리자 한복이 원소와 동탁 사이의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다가 마침내 원소의 거병을 승인했다고 한다.

이 이전에 동탁은 나름대로의 민심 수습책으로 영제 시대의 부패한 분위기를 청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청류파의 명사들을 대거 기용하며 각지의 자사,태수로 임명했다. 이는 결과적으론 오히려 역효과로 작용했는데 이렇게 임명된 태수와 자사들은 모두 원소의 거병에 호응하고 연합해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게 된다.

1.1.6. 맹주로서의 행보

군사를 일으킨 원소는 하북의 여러 국상, 태수들과 함께 하내에 주둔했다. 하지만 기주목 한복은 여전히 업에서 대기했는데 업이라는 지리와 기주목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보았을 때 연합군의 후방의 보급과 군사업무를 총괄한 것으로 보인다.[7] 하남 지역에서 거병한 관리들은 따로 산조에 모여 주둔했다.

제후국도 아니고 훗날의 절도사마냥 사실상의 군벌 케이스도 아니라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되어 지방으로 파견나간 관리들('삼호법'에 따라 모두 현지 출신이 아니다)이 서로 연합하고 군대를 조직해 중앙정부를 공격한 일은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보기 힘든 사건이었다.

이는 동탁 정권이 기존의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하고 겨우 9살이었던 유협을 사실상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웠던 만큼 그 정통성이 바닥을 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탁은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경악하였고 이에 곧바로 소제를 살해했는데 이는 소제가 연합군의 구심점이 되어 복위 운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동탁은 그 다음달에 장안으로 천도를 강행하고 군대를 낙양에 주둔시켜 관동지역에서의 접근을 차단했으며 3월, 호족들의 대다수가 원소에게 귀부하여 원소가 관동지역을 수중에 넣었다는 소식을 듣자 태부 원외와 태복 원기 및 원소의 친어머니와 누이를 비롯한 낙양에 남아 있는 원씨 일가 50인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몰살시켰고 이후 호모반, 음수, 한융 등 조정의 명사들을 칙사로 보내 연합군의 해산을 종용하지만 원소는 하내태수 왕광을 시켜 호모반 등을 처형하고 시체를 조리돌리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황제의 칙사를 살해하여 수만명의 군사들에게 조리돌림하는 충격적인 행동을 보였음에도 관동지역의 호족들은 오히려 더욱 원소를 지지했고 전국 대다수의 군현에서 원소에게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켜 거병하기 시작했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맞물리는데, 첫째로 당시의 제실은 동탁이 마음대로 기존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꼭두각시 황제를 내세운 형태였다는 점과 홍농왕으로 격하된 전 황제를 시해했다는 것, 또 후한 2백년의 수도였던 낙양을 초토화시키며 무자비한 천도를 강행하고 황실과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여 싹쓸이하는 등의 광포함에 대비되듯 원소가 그동안 보여 왔던 올곧고 청렴하며 부패한 권력에 저항하는 민주열사 이미지로 인해 당시 호족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던 청류파의 대표로서 평판이 매우 좋았던 것에다가 원씨 일족이 몰살당한 것에 대한 동정표가 더해졌다. 여기에 더해 동탁이 원씨의 고리였다는 점도 호족들의 공분을 자아냈다.[8]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당시 원소의 위세는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때 한복은 원소가 지나치게 민심을 얻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9] 이에 원소의 군대에 공급하던 군량을 끊으어 원소군을 붕괴시키려 했고 이에 원소는 별다른 군사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단지 하내에 주둔한 채로 시간을 보낸다.

190년 겨울, 한복이 원소의 군량을 끊은 이후 원소와 한복이 어떤 경위를 거치며 서로 타협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원소는 한복과 함께 당대의 명망높은 황족이었던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고자 시도했다. 간신(=동탁)은 수도를 불태우고 패악을 저지르며 꼭두각시인 어린 황제는 연락이 끊겨 관동이 무주공산이 되었으니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명망과 위엄을 갖춘 황족을 추대하여 새로운 질서를 새운다는 명목이었는데, 상기한 이유로 인해 동탁과 장안 조정의 정통성은 바닥을 기고 있었고 원소의 지지도와 발언력은 막강했으며 유우 또한 훌륭한 통치와 그 인품으로 당대 인덕의 아이콘으로 여겨질 정도로 오랬동안 모든 계층에게서 존경을 받았기에 헌제와 장안의 조정은 전국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공손찬과 원술을 필두로 한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평소 유우와 견원지간이었던 공손찬은 장안 조정의 정통성을 옹위하며 원소와 한복 등의 행동을 역모로 규정, 군사를 일으켜 기주를 공격했다.

원소의 이복형제 원술 또한 원소에게 유독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있어 원소가 정국을 주도하며 지지를 받는 것을 고깝게 여겼다. 이에 원소와 한복의 행동을 역모로 규탄하며 장안으로 진군해 동탁을 격파하고 황제를 구출할 것을 주장했다. 오서에 의하면 이는 원술 본인이 개인적으로 무군지심을 품어 한황실의 쇠퇴를 알면서도 오히려 이를 기회로 여겼기에 유우 같은 능력있는 인물이 황제로 추대되면서 질서가 회복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조조 등이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호걸들이 원소를 따랐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당시의 중론은 유우의 옹립으로 무게가 기울어 진 쪽으로 봐야 한다. 우선 동탁이 이끄는 제실과 황제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져 각지의 장관과 유력자들은 조정과 연락을 끊고 황제의 인가 없이 멋대로 관직을 남발하는 등 후한 왕조와 무관하게 군벌화하고 있었고 장안 조정의 정통성을 옹위하던 대표적인 세력인 원술과 공손찬 역시 이런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아서 오서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장안 조정에 대한 충심은 전혀 없고 단지 자신들의 라이벌이었던 원소, 유우를 견제할 정치적 대의명분을 확보하려 한 것에 가깝다.

이토록 동탁과 장안 조정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했던 원소의 논리는 각 주와 군의 군벌화를 부추기며 중국을 군웅할거의 무질서 상태로 몰고 갔다. 하지만 원소는 물론 원술같은 유니크한 견해를 가진 인물이 아닌 이상 기존 장관들의 대부분도 관직과 법령이 남발되는 무질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바랐던 것은 절대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가 바로잡힐 필요가 있었고 유우는 명망과 능력면에서 당대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그 중심에 서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한편 이 무렵 원술은 남양에 주둔하면서 부장인 손견을 선봉으로 내세워 동탁과 접전을 벌였고 눈치만 보며 나서지 않던 다른 제장들과 달리 직접 행동으로 나서서 정말로 동탁군을 격파했으며 곧 낙양을 수복하였다. 이로 인해 대단히 주가를 올렸으나 한편으로는 전비 조달을 위한 영지에서의 지나친 학정과 수탈로 반대세력을 양산했다. 양주의 명사였던 주흔, 주앙, 주우 삼형제가 대표적이었는데 원소는 주씨 삼형제를 부추겨 원술을 견제했다. 주앙을 예주자사로 임명하며 예주 장악을 지시하고 주앙과 주우가 원술의 근거지였던 예주와 사예 지역의 중간기지인 양성을 습격해 탈취하면서 원술군의 진격로를 차단하자 원술은 결국 낙양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주씨 형제와의 싸움으로 수년간 발목을 잡히게 된다.

하지만 정작 유우의 추대는 유우 본인이 수 차례에 걸쳐 완강히 거절했기 때문에[10] 물거품이 된다. 이에 한복은 유우에게 따로 사절을 보내 영상서사가 되어 연락이 끊어진 천자 대신 국정을 총괄하며 관직의 임명을 맡아주도록 권했으나 유우는 이 또한 거부하였고 오히려 한복의 사자를 붙잡아 참수했다.

유우가 진정한 대인배인 것이 드러나는 것은 한복의 사자를 참수한 시점부터다. 이 이후로는 직책을 받들어 처리하고 공물을 바치는 것이 더욱 공경스럽고 엄숙해졌으며 혹 외국의 사절로부터 바쳐진 조공이 있으면 도로가 막혔더라도 모두 운송하여 장안까지 보내는 등 철저히 헌제의 정통성을 옹위하고 신하로서의 위치에 충실했다. 겉으로만 장안 조정의 정통성을 옹위하며 속으론 딴 생각만 품고 있던 원술, 공손찬 따위의 군벌들과 달리 오직 조칙에 따를 뿐 끝까지 군벌화하기를 거부했으며 오히려 원소 등을 달래며 장안의 조정을 받들어 따르도록 설득하였다.

하지만 후한 13주 자사, 태수들의 대다수는 유우와 같은 성인이 아니었다. 원소가 호족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황제의 칙사를 살해하고 조리돌림한 사건 이후 후한 조정의 권위는 사실상 붕괴되어 장안에 고립되었고, 원소가 유우를 중심으로 붕괴된 체제를 대신할 신질서 수립에 실패하자 중심을 잃은 전국의 관리들은 제각기 군벌화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군웅할거의 시작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11]

1.1.7. 계교전투와 하북 평정

원소의 유우 추대 시도가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에 의한 것인지 한복의 견제에 대한 타협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연합군 창설 초기에 원소는 낙양의 바로 북쪽인 하내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내는 황하 건너편의 나루터인 맹진을 거쳐 바로 낙양을 노릴 수 있는 곳이고 산조의 연합군과 연계할 수도 있어 낙양 공격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기주의 북쪽인 발해군에서 멀리 사예주에 있는 낙양 공격의 주요 루트인 하내군에 군을 이끌고 가서 주둔했고 연진까지도 진군했으며 칙사까지 죽여버리는 등 기세등등하던 것으로 봤을 때 이때까지만 해도 원소는 분명 동탁과 직접 맞붙을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때 한복이 원소의 군량을 끊으며 원소를 견제하였는데 이에 원소군이 거의 와해될 지경이었다고 한다.

한복이 원소를 견제한 이유는 원소의 행동들이 예상외로 전국적으로 엄청난 지지를 받았기에 결국 원소가 그 명망을 바탕으로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날 것을 두려워한것. 그렇지 않아도 당시 동탁의 탐욕과 광포함에 대한 불만여론이 들끓던 상태였는데, 그에 반발해 대립각을 세웠던 상대가 평소 청렴하고 올곧다는 명성이 높던 원소였고 여기에 더해 동탁의 원씨 일가 멸족크리로 원소에 대한 동정여론이 들끓었던 상황이었다. 설령 원소가 패배하더라도 원소가 일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몸소 군사를 이끌며 동탁과 대결하는 구도가 나오는 자체만으로 원소의 주가는 올라가게 되며 이길 경우에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손견을 앞세워 낙양을 점령한 원술이 잠시 손견을 견제할 생각을 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지만 원술은 결국 끝까지 손견을 밀어줬었다.

하지만 결국 유우 추대가 실패한 이후에도 원소는 한복의 집요한 견제를 받아 근거지에 돌아가지도 못한 채 연진에 머무르며 허송세월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한복의 장수인 국의가 한복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상황은 국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한복을 증오하고 있던 원소는 이를 기회로 여겨 국의와 연합했다. 이로서 표면적으로나마 유지되던 한복과의 관계가 완전히 결단나게 되었는데, 이때 공손찬과 암약하고 그를 끌어들여 한복을 격파하자는 봉기의 모략이 더해졌다. 원소는 공손찬에게 밀사를 보내 기주를 칠 것을 설득했고 이에 공손찬은 '동탁을 치기 위해 길을 빌린다'는 뻔한(...)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기주로 향했고 한복은 황급히 군대를 돌려 공손찬에게 맞서나 크게 패하며 시원하게 병력을 말아먹고 만다.[12]

이에 원소도 군사를 이끌고 기주로 향하며 한복이 패한 틈을 타 기주에서 깔짝대기 시작하던 흑산적과 장양, 어부라 등의 무리를 전부 발라버리고 상당수를 병합하며 세를 늘려 간다. 한복은 공손찬이 대군으로 남하하고 있는 데다가 원소가 이에 호응하듯 급격하게 병력을 불리며 기주로 들어오니 원소와 공손찬이 협공할 것을 두려워하며 공포에 질린다.

이에 원소는 한복과 같은 영천사람인 곽도순심, 외조카인 진류사람 고간 등을 세객으로 보내 기주의 여론을 부추기고 한복을 협박했다.

순심이 한복에게 유세하며 한 말에 따르면 공손찬은 도저히 이기기 어려운 적수이며 원소 또한 영걸이라 결코 한복 밑에 있는 만족할 사람이 아니므로 두 사람이 연합한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으나 원소는 한복과의 옛 친교가 있으니 자리를 양도한다면 목숨은 물론 지위도 보장해주겠다고 설득하였다.

담력이 작았던 한복이 이에 동의하려 하자 한복의 측근인 종사 이력, 경무, 민순, 저수 등은 원소의 군세가 급조된 오합지졸인데다 제각기 산재해 있고 군량조차 없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 둬도 곧 와해될 것이라고 진언했다.

하지만 한복은 공손찬에게 패한 이후로 이미 싸움에 질려 있었는지 자신은 원씨의 고리였던 데다 원소 또한 자신보다 훨씬 유능하므로 뛰어난 자에게 뒤를 맡겨야 한다고 핑계대었다.

패하기 이전에 한복은 도독종사 조부, 정환 등에게 1만의 강노병[13]을 맡겨 하양에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조부와 정환은 한복이 원소에게 기주목을 양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급히 군사를 이끌고 업으로 귀환해 원소와 일전을 벌이자고 한복을 설득했으나 한복은 끝끝내 듣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 한재를 원소에게 파견해 기주목의 관인을 양도했다.

이에 원소의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한복의 종사 10명이 달아났고 모든 종사들은 그저 원소가 도착하면 자신이 뒤에 남을까 두려워하고 있었으나 경무와 민순 등은 직접 무기를 잡고 나서 원소가 오는 것을 저지했다. 여론이 흩어질 것을 두려워해서인지 원소는 이들에게 당장 손을 대진 못했으나 이후 전풍을 시켜 이 둘을 죽였다.[14]

191년 7월, 기주목이 된 원소는 천자의 명의를 빌어 한복을 분위장군으로 삼았으나 실권은 전혀 없었다. 그 외에 저수를 분무장군으로 삼고 감군을 겸하게 하여 중용했으며 거록사람 전풍, 위군사람 심배 등을 발탁하였는데 대체로 한복에게서 소외되었던 인사들을 발탁하는 경향이 강했다. 한복은 이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원소가 발탁한 도관종사 주한이 원소에게 영합하기 위해 마음대로 군사를 내어 한복의 자택에 테러를 벌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복은 달아나 화를 피했으나 한복의 장남은 구타당하여 두 다리가 부러졌다. 이에 원소는 즉시 주한을 잡아들여 참수했으나 공포심이 극에 달한 한복은 관직을 버리고 원소를 떠나 장막에게로 의탁하였다.

기주목이 된 원소가 내부를 장악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할 때 공손찬은 남쪽으로의 진군을 멈췄지만, 곧 원술과 연합하여 원소를 견제했고 사촌동생인 공손월에게 군대를 주며 원술에게로 파견했다. 원소 또한 유표와 연합해 형주로 진출하고 있던 원술을 견제하였다. 공손월은 원술을 지원해 손견과 함께 주씨 형제와 싸웠는데 예주의 양성에서 주앙 을 공격했지만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화살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이 사건에 대노한 공손찬은 모든 것이 원소의 책임이라고 하며 군대를 다시 남쪽에 배치시켰다. 이에 원소는 크게 두려워하며 공손찬의 다른 사촌동생인 공손범에게 발해태수의 지위를 양도하였다.[15]

원소는 공손범이 자신과 공손찬 사이를 중재해줄 것을 기대했겠지만 공손범은 오히려 발해의 군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가세하였다. 191년 11월, 청주의 황건적 30만이 하북으로 올라와 발해군의 경계를 침입했는데 공손찬은 보기 2만을 이끌고 이를 요격하여 별다른 전력 손실 없이 30만을 거의 몰살시킨 것에 가까운 엄청난 대승을 거뒀으며 이로 인해 공손찬의 위명은 전국을 뒤흔들었다.[16]

이로 인해 공손찬의 무리는 더욱 강성해졌고 위세는 절정에 달해 공손찬은 원소군을 무찌르며 계교로 군을 전진시켰고 엄강을 기주자사로, 전해를 청주자사로, 추단을 병주자사로 삼아 각기 파견했으며 기주, 병주, 청주 모든 군현의 태수, 현령을 모두 자기 사람으로 임명했다. 3개 주의 주, 군, 현에 배치된 기존 관리들을 모조리 실력으로 몰아내고 점거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노골적인 야심을 표출한 것이다. 또한 장안의 헌제에게 원소의 10가지 죄상을 알리는 상주문을 작성하고 포고한다. 이에 하북이 진동하였으며 기주에서도 수많은 군현이 공손찬에게 투항했다.

또한 이때 원소에게 붙고 있던 장양, 어부라는 동탁이 이끌고 있는 장안 조정에게로 투항하여 원소와 다시 적대하였다.[17]

이에 더해 흑산적의 맹주 장연은 공손찬과 연합해 부하 두령인 두장을 파견해 공손찬을 지원했고 별도로 우독, 수고, 백요 등 10만의 군세를 보내 원소의 근거지인 위군과 연주의 동군을 공격한다.[18]

위기에 몰린 원소는 이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으므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하로 진군했다.(192년 1~2월경) 당시 막 생겨난 신세력이었던 원소는 아직 군의 편제가 통일되지 않았고 군사의 수와 훈련도는 물론 장비와 물자도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으나 국의의 활약에 힘입어 회전을 통해 공손찬의 주력이었던 기병을 강노로 무력화시키고 엄강을 전사시키며 승기를 잡았고, 계교에서 이어진 2차전에서 공손찬군을 완전히 박살내는데 성공한다.

참패한 공손찬은 발해로 달아났으며 발해군을 약탈해 초토화시킨 뒤 근거지인 유주로 돌아갔다. 그 외에 동군으로 진출한 흑산적은 왕굉을 격파했으나 이 무렵 원소의 지원을 받던 조조의 활약으로 다시 하북으로 쫓겨났고 원소는 조조를 동군태수로 삼았다. 어부라 또한 이때 조조에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고 위군을 공격한 흑산적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별도로 부하장수를 시켜 막아내는 데 성공한 듯 하다. 원소는 부장 최거업을 보내 공손찬을 공격했지만 최거업은 참패했고 최거업을 격파한 공손찬은 재차 기주로 진군해 평원군에 주둔했다.

이후 기주 전역과 연주의 일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산발적인 교전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192년 12월 무렵, 원소가 용주(龍湊: 발해군과 평원군의 경계에 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에서 공손찬을 대파하면서 완전히 기주에서 쫓아내는데 성공한다.

이 이전 장안에서는 동탁이 왕윤, 여포에게 살해되고 이각, 곽사가 정권을 잡고 있었고 조정은 관동 지역에 사절을 보내 각 주군의 관리들이 제각기 전쟁을 벌이는 것을 중단하고 화해하도록 권고하고 있었다.

193년 1월, 조정에서 파견한 태복 조기가 하북에 도착하자 공손찬은 원소에게 화해하자는 편지를 썼고 원소 또한 이를 받아들여 휴전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3년 3월, 원소가 부재중이었던 틈을 위군의 불만세력들은 장연과 연계해 반란을 일으켰다. 휘하 두령인 우독을 중심으로 흑산의 10개 조직이 참가했고 이에 반란군이 내응하면서 위군태수 율성을 죽여 기주목의 관부가 있는 업을 기습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장안 조정에서 임명한 기주목인 호수를 앞세워 기주를 통치하려 했다.

이때 기주의 여러 관리들은 물론 원소의 일가족도 모두 포로로 붙잡혔으며 공손찬 또한 휴전 약속을 깨고 재차 병력을 보내 침공해 왔으며[19] 이에 더해 원술 또한 흑산과 연계하여 군사를 이끌고 원소를 치기 위해 북상하기 시작했으며 어부라도 이를 지원했다. 이에 지휘부 전원이 패닉에 빠지는 등 위기를 맞았으나 원소는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하며 군사를 모으는 등 반격을 준비한다.

우선 조조를 지원하며 원술의 북상을 저지했는데, 이에 조조는 진류에 침입한 원술을 수 차례에 걸쳐 대파했으며 오히려 원술의 영역권인 예주까지 공격한다. 당시 예주에는 원소의 우군이었던 주씨 형제들도 아직 건재해 있었고 그 남쪽에는 유표가 있었다. 조조와 주씨 형제, 유표 등 친 원소계 군벌에 둘러싸여 역관광을 타게 된 원술은 근거지인 예주를 버리고 회남으로 달아나게 된다. 한편 점령하고 있던 10명의 두령들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도승이라는 자는 자신의 조직을 이끌고 원소에게 붙어 원소의 가족과 기주의 관리들을 구출하고 직접 호위하며 척구(斥口)까지 호송하는데 이에 원소도 척구로 향해 도승과 합류한다.

같은 해 6월부터 원소는 흑산적에 대한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위군의 북부에 있는 녹장산에서 우독을 5일동안 포위 공격하여 1만명을 죽였고 우독과 호수 등도 참수하여 업을 탈환한 뒤 좌자장팔의 무리를 전멸시켰으며 나머지 일곱 두령들도 모두 격파하여 위군 내의 흑산적을 완전히 박멸시킨다.

이후로도 흑산적과의 전투는 계속되었는데 이 무렵 장안에서 이각, 곽사에게 패하여 쫓겨난 여포가 원술과 장양을 거치며 원소에게 의탁해 왔다. 원소는 여포에게 부장으로 종군해 흑산과의 싸움에 합류할 것을 명했으며 이듬해인 194년, 상산에서 장연의 본대와 직접 접전을 벌여 승리했다. 장연은 많은 군사를 잃고 도주했으나 원소 또한 오랜 전쟁으로 군사들의 피로가 극에 달했기에 장연을 추격해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한 채로 군사를 물렸다고 한다. 한편 여포는 공적을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며 마음대로 사병을 늘리고 원소의 영토에서 약탈을 일삼았던 데다 결정적으로 자신이 장안 조정에서 삼공에 준하는 관직을 받았다는 것으로 원소가 임의대로 내리는 관직을 받은 원소의 제장들을 무시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20] 원소 휘하에서 숙청되고 기주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원소와 장연의 전쟁에 관련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장연과 연합하고 있던 오환흉노는 이 무렵부터 원소와 연합하기 시작했으며 원소의 조카인 고간이 병주자사로 임명되어 부임했고 장연은 결국 패하여 무리가 흩어졌다고 한다. 상산 전투 이후로도 집요한 군사, 외교적 공격을 받으며 서서히 세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공손찬은 원소와 장연이 싸우는 사이 다시 기주를 침공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으나 이 무렵 유우와도 싸움을 벌였기 때문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공손찬은 전쟁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유우와 그 관속들을 모조리 처형한 것을 시작으로 급격히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유주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지만 반란이 끊이지 않는 등 심각한 내상에 시달렸다. 또한 오로지 군사적인 이점만 중요시하는 공손찬 본인의 과격한 성격에 더해 여론 형성의 중심이 되는 기존의 사대부와 식자층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고 역술인이나 말장사꾼 같은 낮은 계층의 인물들을 관료로 중용하는 등의 기이한 행동을 벌였는데 이 또한 민심의 불만을 더더욱 조장했다.

변경에서의 전투로 잔뼈가 굵었고 또한 학문에도 능하며 매사가 논리적인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 공손찬이었으니 어쩌면 예를 중시하는 당대의 유가적 가치관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고 그랬기에 실무에 능한 사람을 기용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공손찬 휘하 관리들의 대부분은 사대부 출신이 아니라 상인이나 역술인 같은 부류였고 이들의 실무적 능력이 뛰어났는지 무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효재와 청렴을 미덕으로 삼지 않던 이들의 부정부패와 치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런 문제로 공손찬이 극심한 소화불량을 겪고 있는 사이, 194년 말엽부터 원소는 공손찬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하는데 국의를 파견해 공손찬을 공격하는 한편 공손찬과 오랜 적대관계였던 오환, 선비와 연합했으며 유우의 아들인 유화를 전면에 내세워 선전공세에 활용하는 등 공손찬의 반대 여론을 선동한다. 원소의 선동공작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어 대군, 광양군, 상곡군, 우북평군 등 4개의 군이 각기 공손찬이 임명한 관리들을 죽이고 호응[21]했고 염유, 선우보, 부환 등 수 만 명의 무리가 원소군에 합류하여 총 10만의 군세가 일제히 연합해 공손찬을 공격했으며 195년 12월, 포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공손찬군은 2만명의 전사자를 내며 참패한다.
또한 각 주에 자사로 파견했던 부하들도 모두 이 무렵을 전후로 모두 원소의 수하들에게 패하여 공손찬의 세력은 극도로 곤궁해진다.[22]

포구 전투에서 패한 이후 공손찬은 이전부터 축조하고 있던 거대요새 역경성에 틀어박혀 우주방어를 시작했고 국의는 1년에 걸쳐서 이를 공격하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공손찬의 우회공격에 패하여 귀환했다.

195년 무렵 공손찬과 장연은 여전히 당대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군벌들이었으나 이는 거듭된 패배로 안팎으로 기반이 불안해진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력 증강에 극도로 집착해 영지를 무제한적으로 수탈한 결과로[23] 표면상 전력은 엇비슷할지 몰라도 전형적인 막장테크에 가까운 수준이라 당시 영향력이 기주 전체와 청주의 대부분. 병주, 유주의 일부에 미치고 특히 기주는 내적으로도 통치가 안정화되는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한 원소와는 급격히 격차가 벌어져 가고 있었다.

이후 공손찬, 장연을 멸망시키고 하북 4주를 평정했지만 상대적인 전력으로는 이때가 가장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관서의 이각, 곽사 또한 그들 나름대로의 자멸테크를 타고 있었고, 하남의 조조여포와 겨우 연주 하나를 두고 처절하게 싸우는 수준이었으며, 도겸에게서 서주목을 양도받은 유비는 공손찬을 버리고 원소에게 허리를 굽혔다. 형주의 유표는 비록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여전히 원소를 맹주로 받들었다. 원술 정도가 회남에 세력을 다시 형성하며 재기하는 듯 했으나 그 역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었다.

1.2. 이후

1.2.1. 협천자 논쟁

195년, 조정에서는 원소를 우장군에 임명했으며 원소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이전까지 원소는 장안 조정을 괴뢰정권으로 규정해 정통성을 부정했으며 조정과의 연락을 끊고 수하들 중 장안 조정을 따르는 자는 죽여서 본보기를 보이는 등[24]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는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안에서 파견된 태복 조기의 중재를 명분삼아 공손찬과 휴전을 하는 등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는데 본인이 직접 황제가 내리는 장군직을 수여받는 것으로 일정수준 타협을 짓고 마무리를 보았던 것 같다.

장안의 황실은 190년 이후로 사실상 고립되어 있었으나, 관동 지역의 관리들에게 뚜렷한 명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지방에 부임한 관리들이 각 주군에서 왕과 같았으나, 황제만이 유일한 정치주체로 군림하던 당대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충성의 대상은 여전히 황제였고 제각기 군현에 부임해 있던 지방관들의 지배는 황제의 이름을 통해 정당화되었다.

이는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의 기록을 봤을 때 '표를 올려' 자기 사람을 천거했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원소, 원술, 공손찬 등의 유력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제각기 자기 사람들을 장군, 태수, 현령 등으로 임명했는데 동탁 등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들은 반란군이었고, 반란군 수괴의 하나가 자기 사람을 천거하는 표를 올렸다고 해서 어떤 직을 하사할 리가 없었으니 처음부터 승인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표를 올려 추천하는 형식을 취한 것은 아무리 유력자라고 그들이 황제가 아닌 이상 일개 하급 속관도 아닌 2천석 이상의 고관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하등의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정한 세력권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합법화된 체계가 필요했고, 최소한 합법을 가장한 방식에 의해 관직을 수여하고 관원을 임명할 필요가 있었으며 실력에 따른 지배만으로서는 이러한 권위를 인정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 상주하고 황제의 승인을 얻어야 했던 것인데, 조정과는 적대적인 관계였던 만큼 이러한 임용행위가 승인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엄연히 황제가 존재하는데 자기 임의로 관직을 하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반역자로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기반이 확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행보는 매우 위험한 짓이었다. 그래서 상표하는 형식을 빌려 벼슬을 주는 것이었고, 황제의 승인이 떨어지기 전에 임시로 취임해 업무를 담당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물론 이 표는 형식적인 것으로 조정에는 전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미봉책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워진 것이 중망있는 황족인 유우의 추대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실패했고, 가장 적합한 인물로 보였던 유우는 193년 겨울, 공손찬에게 살해되었기에 원소는 별다른 대응책을 찾지 못한 끝에 황실과 타협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해 겨울, 장안에서는 이각, 곽사가 내전을 벌이고 헌제는 장안을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황제는 이각, 곽사에게 추격당하며 수차례 교전한 끝에 크게 패했으나 결국 이들의 손을 벗어나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때 저수 등은 원소에게 황제를 옹립할 것을 권했으나 원소는 헌제의 즉위 과정을 문제삼으며 이를 거절했다. 바로 같은 해에 황제가 내리는 벼슬을 받아들이고 화해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다시 정통성 문제를 거론하며 태도를 바꾼 것이다.

장안을 탈출한 헌제의 여정 과정을 살펴보면 이, 곽의 거듭된 추격으로 궁핍해진 끝에 수많은 대신이 굶어죽고, 황제가 도보로 걸어다니며 길에서 노숙하고, 심지어는 일개 백성에게 사례교위가 구타당하는 등 극도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헌제가 안읍에 체류하고 있을 때, 도적떼 두목들인 한섬, 이락, 호재 등에게 의지하고 있었고, 이들의 사병을 제외하면 헌제가 거느린 병력은 우림, 호분을 합쳐 일 백 명을 넘지 못했다. 조정 백관들의 수도 불과 십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조정의 힘은 주, 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개 현은 물론, 군벌화한 향리의 일개 종수나 호족[25] 세력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전의 역사를 통틀어 봐도 황제가 어려서 권신이 권력을 농단한 경우는 있었지만, 그래도 조정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권력은 다른 사람의 수중에 있었어도 황제의 권위는 지켜졌고 조정의 권력은 변함없이 유지되었었다. 동탁의 집권 초기 시점까지만 해도 조정은 권위와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동탁이 황제를 갈아치운 것에 대한 반발로 대부분의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적어도 관중 일대에서만큼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각, 곽사에게서 벗어나면서 황제와 조정은 아무런 실력과 권위도 없는 무력한 존재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천자와 조정의 권위는 도둑떼나 백성들에게까지 조소당할 정도로 말 그대로 희화화되었다. 반면에 각 주, 군에서는 제각기 군대를 소집해 스스로를 지키며 사실상 자립했고, 각 주목이나 군태수들은 수 천, 수 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관할구역 내의 치안을 유지하며 사실상 군주의 역할을 대행했다. 어느 모로 보나 백성과 영토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은 군벌들에게 있었지 황실에 있지 않았다.

원소의 정확한 심중을 알 수는 없지만 헌제의 영접을 거부할만한 몇 가지 이유는 추측할 수 있는데. 우선 동탁이 소제를 폐립하고 헌제를 세울 때 가장 크게 반발하며 이미 이를 빌미로 맹주의 지위를 차지하며 막대한 실리를 얻은 것이 원소였고, 당대 군벌들 중 가장 강력하고 안정적인 기반을 막 이루었는데 이 영향력을 이미 아무런 힘도 없어진 황실과 반분하여 행정, 절차적인 소모를 가중시키고 자신의 세력권 안에서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 황제의 사람을 자처하는 파벌이 생겨날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을 것이다

원소는 본인의 청류파로서의 명성과 상표하는 형식을 통한 영직을 남발하여 호족들을 끌어들였고, 이들은 원소의 고리에 해당하니 원소에게 충성을 바치겠지만 세력 내에 헌제를 맞아들였는데 헌제가 직접 자기 사람들에게 관직을 내리며 포섭한다면 이들은 더이상 원소의 사람이 아니라 황제의 사람을 자처할 가능성이 높고 원소는 명분상 이런 자들을 제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원소는 예주출신으로 세력의 수장이면서도 정작 본거지인 기주에서 지역적 기반이 없는 외부인이었기에 이 대립관계에서 기주 출신 인사들이 황제를 등에 업고 기어오른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며, 실제로 유표의 경우에도 동정을 살펴오라고 부하를 보내니 오히려 황제에게 작위를 잔뜩 받고 돌아와서 개긴 사례가 있다. 게다가 훗날 원소와 같은 하남출신이자 원소의 최측근인 곽도, 봉기와 기주의 호족 출신인 저수, 전풍 등의 대립이 심각하게 불거져 나오는 걸 보면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조조는 이런 측면에서는 원소보다 유리했다. 친족 인재를 거의 다 원술에게 빼앗긴 걸로 추측되어 직계 자식(과 조카 고간)을 제외하면 친족 인재가 거의 없는 원소와는 달리, 조조에게는 깊이 신뢰할 수 있는 조씨 집안과 하후씨 집안의 친족 형제들로 장군직을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친족 인재가 풍부했으며 근거지인 예주도 고향에 가까워서 '친위 세력'의 구심력을 높이기 쉬웠다.

조조 역시 초창기 세력 형성에 기여하며 세력 내의 지분을 주장할 법한 호족들이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 진궁, 장막의 반란 당시 싸그리 갈려나가면서 조씨,하후씨를 비롯 고향인 패국 출신의 인사들과 예주 출신의 순욱 피라미드로 대표되는 친위세력들이 이들의 위치를 손쉽게 대체할 수 있었다는 전화위복적인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조조 역시 강력한 친위 세력을 바탕으로 근황을 명분으로 내세운 반발을 억누르는데 성공했을 뿐, 근황이 요인이 된 반발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어려웠다.

그에 반해 원소는 광범위한 선비들의 지지는 받았지만, 친족과 동향인을 중심으로 한 '핵심 인재'는 애초에 인재풀이 너무 협소하여 능력도 부족했고, 광범위하게 펼쳐놓기에는 숫자도 적었다. 원소가 헌제를 받아들였을 때, '원소의 막부'와 '헌제의 조정'이 양립하는 모순적인 정치 상황에서 오는 마찰을 이겨내기에는 원소 집단의 응집력은 상당히 약했을 것이다. 유우처럼 원소 자신이 명망 있는 황족을 옹립한다면 이 약점을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지만, 유우처럼 '명망만 높고 정치적, 군사적으로 무능력한 황족'은 그리 쉽게 찾기 어려워 유우가 제위를 거부하자 다른 대안이 없었다.

원소가 협천자를 거부한 것에는 이런 이유에 더해 슬슬 장차 황제에 오를 생각을 품던 본인의 야심 또한 어느 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황실이 처참할 정도로 몰락해 있었기에, 이를 방치하여 헌제가 혼란 속에서 살해당하거나 객사하는 것이 원소에게는 가장 유리한 상황이었다. 헌제가 어딘가에서 조용히 묻혀준다면, 원소는 아무 유씨나 골라서 황제로 새로 옹립하든, 자기 자신이 황제가 되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1.2.2. 조조와의 대립

195년, 천자가 장안을 탈출하자 저수 등이 원소에게 천자를 옹립할 것을 권하나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조조는 재빨리 헌제를 옹립하면서 자신의 세력권인 허현으로 천도하여 조정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헌제는 원소가 강병을 거느리면서도 왕실을 구할 마음은 없고 자신의 도당을 키우기에만 힘쓴다며 원소를 꾸짖는 내용의 조서를 보낸다.

이 조서의 배후에는 조조가 있었고, 조정의 위상을 통해 그동안 갑을관계에 가까웠던 원소와의 제휴관계를 뒤집고 재설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원소는 장문의 상소문을 쓰며 자신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헌제와 그 측근(조조 등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들의 무능함을 강하게 비난하는 등 격렬히 반발했지만 끝내 천자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인하진 못했고, 조조는 이에 만족했는지 조정에 상표하여 원소를 태위로 삼고 자신은 대장군의 지위를 차지한다.

천자를 옹립하기 전까지 조조는 원소의 부하에 가까웠다. 조조를 동군에 자리 잡게 한 것도 원소였으며, 연주목으로 승인해준 것도 원소였고, 원소가 공손찬과 싸울 때 조조는 원소에 의해 동원되었다. 원술을 막을때도 원소의 지원을 받았으며, 도겸을 칠때도 원소의 지원을 받았다. 여포에게 연주를 뺏긴 것도 장막이 조조가 원소의 지시를 받아 그를 해칠까봐 두려워 선수를 친 것이었고, 여포,장막과의 싸움에서는 원소의 원군이 아니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태위는 군사상의 최고위직이었지만 명예직에 가까웠고 실권은 대장군에게 있었다. 조조가 대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는 이에 "조조가 번번히 패할때마다 나는 그를 구해줬는데, 이제는 천자를 끼고 나에게 명령하고 있다."고 크게 분노했다고 하며 병을 핑계로 태위의 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조는 원소의 반응을 듣고는 크게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이는 마침 협천자에 실패한 원술이 헌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스스로 천자를 자칭하여 조조와의 대립 의사를 확고히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예주의 허현 일대를 도읍으로 삼으면서 인접한 유표와의 대립도 표면화되고 있었기에 원소를 지나치게 자극하여 적으로 돌릴 경우 적대세력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형국이 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에는 실리적인 조조가 허울뿐인 관직에 집착하는 원소를 가지고 놀았다는 해석이 많지만, 그랬다면 조조가 관직을 독식하는 것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군벌 시대였다지만 군사력만으론 권력을 유지할 수 없고 후한의 사회체계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관직=권한=정치적 명분이기에 합법적인 지배체계를 통해 효율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관직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조조는 원소에게 대장군의 지위를 양보한 것에 더해 하북 4주의 도독을 겸하도록 하고 구석의 일부를 내리는 등 파격적인 특권을 내렸는데, 이는 황제의 이름으로 원소가 황제 다음가는 최대의 실력자임을 공인함은 물론이며 관할 구역 내에서의 초법적인 권력 행사를 보장한 것이다.(197년 3월.)

뿐만 아니라 원소 최대의 주홍글씨(...) 인 유우 추대의 이력은 자연스럽게 흑역사로 묻혀졌으며, 오히려 원소의 유우 추대 전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원소의 최대 경쟁자 공손찬을 역적으로 선포해 공식적으로 목에 현상금까지 거는 등, 의외로 조조의 협천자는 원소에게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조조 입장에서도 이는 원소가 좋아서 줬던 게 아니라 사세상 원소와의 전면적인 대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부득이하게 굴복하면서 원소에게 내줄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미 조조가 협천자와 동시에 원소에게 이빨을 드러냈던 것은 명확했고 양자의 대립은 필연적이었다.

원소는 더 나아가 허도의 지반이 낮고 습해 침수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며 수도를 자신의 세력권과 인접한 견성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조도 이런 요구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이 당시 원소는 상황이 점차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서 황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하는데, 비록 황제와 조정을 통해 세력기반 내에서의 확고한 권력을 공인받게 되었다곤 하나 중앙조정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속하며 파격적인 권위를 부여받는 모양새는 중앙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에게 섣부른 공세를 펼치지 못하도록 강제했고, 세력 외부에서의 입지 또한 조정을 장악한 조조에 비해 불리해지면서 조조의 급성장을 견제하지 못하고 방치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전풍은 원소에게 조조가 남양에서 유표와 대치하는 틈을 타 배후를 치고 허도를 장악할 것을 권하였으나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26], 역경성에 틀어박혀 배후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던 공손찬을 정리하기 위해 출병한다.

1.2.3. 관도대전

199년 3월, 1년이 넘는 공성 끝에 역경성을 함락시키고 공손찬의 무리를 병합해 하북 4주를 평정한 원소는 수십만의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교만해져 조정에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이때 조조는 공손찬과 은밀히 연합을 체결하고 원소의 수부인 업을 치며 역경성의 포위를 풀고 원소를 견제하고자 하내군에 북상했으나 공손찬이 예상보다 일찍 패망하면서 원소가 조조의 의도를 파악하자 다시 황하를 건너 철수했다.[27]

이 무렵 원소의 위세가 절정에 달하자 원술은 원소에게 제호를 바치며 투항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원소는 여기에 답하지는 않았지만 은밀히 원술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고 하며 배송지 주로 인용된 전략에 따르면 이때 원소가 참칭할 뜻을 품고 주부 경포를 시켜 제위를 칭할 것을 간하도록 말을 맞춰 자작극을 벌였으나 다른 부하들이 요사스러운 말을 한 경포를 죽여야 한다고 하자 즉시 경포를 죽이며 의혹을 풀었다고 한다.

또한 '아들들에게 한 주씩 맡겨 능력을 살펴보고자 한다'는 이유로 원담은 청주자사로, 원희는 유주자사로, 외조카인 고간을 병주자사로 삼아 원씨 일족 중심의 독재 체제를 확고히 했으며, 대군을 일으켜 조조를 공격할 것을 준비한다.

이때 감군 저수는 연이은 원정으로 창고가 비어 황폐하고, 전쟁의 성패는 당장의 강약에 있지 않으며, 중앙정부를 장악한 조조와 싸우는 것은 천자를 적대하는 것이니 의롭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조조와의 단기 결전을 반대하고 지구전을 주장했으나, 곽도심배등은 하삭의 강역을 차지한 자군의 역량이 조조의 몇 배에 달하고, 지금 조조를 치지 않으면 훗날 도모하기 어렵고, 병력은 천자와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역적 조조와 그 일파에게 향할 뿐이라며 반박하고는 저수의 말은 패배주의적 발언이며 저수가 번번히 군주와 뜻이 충돌하는데 그가 맡고 있는 감군의 권력은 지나치게 강하니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원소는 감군을 폐하고 삼도독을 세워 기존 저수의 권력을 곽도,순우경과 삼분하도록 했다.

한편 유비차주를 죽이고 서주를 점거하자 원소는 유비와 연합하여 기병을 보내 지원했다. 조조가 유비를 치자 전풍은 조조의 배후를 칠 것을 진언했으나 원소는 아들의 병을 핑계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우금전에 따르면 조조가 유비를 치는 사이 우금이 2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연진을 지키며 조조의 부재를 틈타 내려온 원소를 막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기존 통설과 상충되나, 원소전에서는 아들의 병을 핑계로, 곽가전과 무제기에서는 원소가 의심이 많아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원소 본대의 전면적인 남하가 아닌 소수 병력을 통한 견제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조조에게 패한 유비가 망명해 오자 원소는 업성에서 2백리 밖까지 마중나와 성대히 환영하며 남정을 시작하려 하나 전풍이 재차 지구전을 주장하자 전풍이 군의 사기를 꺾으려 한다며 크게 분노해 형구에 채워 가뒀다.

원소는 유비를 세력 내로 영입한 직후 남하를 시작했고, 신참자인 유비를 극도로 후대함은 물론 관도전투에서도 전면에 내세웠는데, 헌제의 친위 쿠데타였던 동승사건에 가담한 유일한 생존자가 유비였기에 유비의 망명을 받아들이면서 헌제를 옹립하고 있던 조조를 역적으로 규정할 개전 명분으로 삼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원소는 여양에 주둔하며 안량, 곽도, 순우경을 선발대로 보내 동군을 공격케 했다. [28]

조조는 순유의 조언을 따라 연진에 군세를 보내 연진에서 원소의 측면을 공격할 태세를 취해 원소의 연진 도하를 유도했고, 원소가 연진으로 출병한 사이 백마를 공격해 안량을 격파하고 그를 참수한다. 안량을 참수한 조조는 연진으로 향했으나 원소가 이미 연진 도하에 성공한 상태였기에 동군을 거점으로 한 방어를 포기하고 관도 일대로 방어선을 후퇴시킨다. 원소는 문추와 유비를 보내 보내 조조를 추격하게 했으나 문추는 조조의 계략에 걸려 전사한다.

원소군은 비록 황하 일대의 도하거점을 확보하고, 조조의 방어선을 후퇴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명장으로 이름난 안량,문추가 전사하면서 사기가 크게 흔들렸다. 이때 저수는 연진에 머물면서 관도에 따로 진영을 구축하여 관도에서 패배할 때를 대비해 지구전을 펼쳐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원소는 이를 무시하고 관도에 전력을 집중했으며, 진언이 무시당한 저수가 군중에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퍼뜨리자 진노하여 저수의 군권을 더욱 축소시킨다.

군세를 전진시킨 원소는 양무에 본진을 두고 조조와 대치했으며 양군은 제각기 수십리에 걸쳐 진지를 구축한다. 원소는 회전을 벌여 조조를 격파했으나 후퇴한 조조가 진지를 지켜내는 것에 성공하면서 전황이 장기화된다.

원소는 조조의 관도 본진에 맹공을 가하는 한편 조조의 후방인 예주에서의 반란을 선동했으며 이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주도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유비를 파견한다. 유비는 유벽등과 연합해 허도를 공격하려다 은강에서 조인에게 격파되어 원소에게 돌아갔으나, 예주는 이통이 다스리는 양안군을 전 지역에서 원소에게 호응한 세력들이 강세를 이뤘고, 이에 원소는 재차 유비를 여남으로 파견한다.

조조가 원소군의 공격을 버티면서 군량을 습격해 수 천 대를 불사르는 일이 있었다. 이때 추가 군량이 호송되자 원소는 순우경에게 1만을 주어 호송케 하였다. 이때 저수가 원소에게 장기를 따로 파견해 바깥에서 추가로 엄호하여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원소는 듣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원소는 조조를 관도에 몰아붙여 전세를 매우 유리하게 이끌고 있었던 상황이었으나 원소 세력 내부의 정쟁과 장기화된 전선에 대한 의견대립의 결과 허유가 조조에게 투항해 순우경군의 배치 등 주요 기밀들을 누설하면서 오소에서 숙영하던 순우경군은 조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호송되던 군량 또한 불타게 된다.

오소의 습격 사실을 파악한 원소는 오히려 주전력이 빠져나간 조조의 본진에 주력군을 배치해 공세를 강화하고, 오소의 순우경군은 기병대만을 파견하여 구원하도록 했다. 순우경군이 전열을 유지하며 버텨내는 사이 기병으로 조조군의 후열을 공격해 무너뜨린다는 계산에서 나온 결정으로 보이나 원소군 기병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순우경군은 붕괴되었고, 조조는 전열을 재정비해 막 도착한 기병대까지 격파한다.

순우경군의 전멸과 운반중이던 군량의 전소로 원소군 수뇌부는 혼란에 빠졌으며 책임 소재를 두고 분쟁이 일어나자 주력군을 이끌고 조조의 본진을 공격했던 장합, 고람은 도리어 아군을 공격하고 진영을 불지르며 조조에게 투항했다. 장합,고람의 배신으로 군이 대혼란에 빠지자 원소는 전선을 버리고 단기로 달아났으며, 총사령관의 생사까지 불분명해진 원소군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장합,고람의 투항을 받아들여 상황을 파악한 조조가 반격에 나서자 원소군은 완전히 붕괴되어 대다수가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저수같은 핵심 간부도 달아나다가 포로로 잡히게 된다.

원소는 조조의 추격을 피해 황하를 건너 여양으로 달아나는데 성공했고, 여양을 지키고 있던 장의거에게 지휘권을 넘겨받아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알리고 패잔병을 수습해 상당수의 병사를 모았으나, 돌아가지 못하고 조조군에 포로로 잡힌 병사들은 모조리 학살당했다.[29]

1.2.4. 말년

원소가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가 참패하자 기주의 수많은 군현들이 조조에게 투항하는 등 원소의 위상은 심각하게 흔들렸으며, 조조 역시 새삼스럽게 원소가 과거 황제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던 전력이 있는 역적임을 선언했다.

원소가 관도에서 참패하자 원소의 남정을 반대하던 전풍과 저수가 돋보였는데 저수의 경우 조조에게 붙잡혔으므로 전풍의 거취만이 문제가 되었다. 어떤 이는 원소가 패하고 돌아오자 전풍에게 당신의 말의 맞았으니 중용될 것이라고 했으나 전풍은 "우리 군이 승리했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겠지만, 패하였으니 반드시 죽을 것이다"며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고, 원소는 측근들에게 "전풍의 말을 듣지 않았더니 과연 웃음거리가 되었다." 며 그대로 전풍을 죽였다고 한다.

선현행장에 따르면 원소의 병사들은 가슴을 치면서 전풍의 말대로 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울부짖었고, 원소도 전풍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으나 전풍과 사이가 나쁜 봉기가 "전풍은 장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뼉을 치며 자신의 말이 맞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라고 참언하자 원소가 전풍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손성은 이를 평하여 저수와 전풍을 보니 그들의 계책을 씀은 진평과 장량에 뒤지지 않으나 다만 어두운 임금을 만나 이렇게 되었으니 애석하다라고 하였다.

연의에서는 원소가 전풍을 죽인 동기로 이 설을 채용하며 전풍이 자신의 죽음을 예측했다는 삼국지의 기록을 취합해 원소의 암군포스와 전풍의 폭풍간지를 강조하나, 엄청난 공을 들인 원정의 참패로 대규모 반란이 이어지는 등 자신의 권력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대표적인 반전파였던 전풍의 입지 강화가 위험하다고 판단, 적당한 핑계를 붙여 숙청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듯. 후배격으로는 북벌에 참패하고 돌아와서는 오히려 대숙청을 벌인 제갈각의 케이스가 있다.

군사를 수습하고 하북으로 돌아간 원소는 201년, 반기를 든 군현들을 모조리 쳐서 제압하며 다시 세력 기반을 굳건히 했으며 재차 원정에 나서 조조를 칠 것을 계획[30]하지만, 이듬해 5월 병이 들어 피를 토하고 사망[31]. 관도 2년 후인 202년이었다.

다량의 피를 토하고 죽었고, 유언조차 남기지 못해 심배가 원소의 유명을 조작했다는 기록을 봤을때 원소의 죽음은 급사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며, 소화기 계열의 급성 출혈로 인한 쇼크사로 보인다. '군이 패한 이후 병을 얻어 건안 7년(202년)에 근심으로 죽었다(憂死)' 는 삼국지의 기록을 따르면 발병 원인은 스트레스로 추정.

1.2.5. 사후

본디 원소는 장남 원담을 미워해 폐출시키고 자신의 뒤를 잇지 못하도록 못박았으며, 총애하던 막내아들 원상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원상은 나이가 어렸던 데다 원소의 급사로 전혀 후계 기반이 갖춰져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결국 나이가 많고 경력도 있는 원담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 원소의 세력은 분열되게 된다.

원소 세력의 핵심을 이어받은, 기주의 원상을 지지하는 세력과 청주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원담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분열되고 말았던 것이다. 게다가 원주의 조카로서 병주를 다스리던 고간마저 사실상 독자행보를 걷고 할거하는 행동을 보이면서 원소 세력은 여러 갈래로 분열하여 자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원소가 사망할 당시만 해도 원소의 세력 자체는 조조보다 강대하였으나, 원상과 원담 간의 집안 싸움과 조조의 개입 속에서 점차 소모되어 원담과 원상은 각각 조조에게 각개격파당하고 원담은 살해, 원상은 유주의 원희에게 망명하지만 원희도 곧 토벌당해서 도주한다. 원상과 원희는 원소의 사위[32]오환의 왕 답돈에게 망명하여 재기를 노리지만, 조조의 정벌로 오환이 패망하고 답돈도 죽음을 맞는다. 이 와중에 병주의 고간은 조조에게 항복한 뒤 배신을 하려다가 토벌당해서 역시 패망했다.

최종적으로 원상은 잔존 병력을 이끌고 요동의 공손강에게 몸을 의탁하면서 동시에 공손강을 살해하고 요동을 기반으로 삼을 음모를 꾸몄으나, 공손강에게 살해당하면서 원소의 잔당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원소의 죽음(202년)에서 원상의 죽음(207년)까지 고작 5년 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강대한 원소 세력은 원소가 죽자마자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어이없이 무너진 셈이다.

그렇게 원씨 세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3. 평가

삼국지에서 원소는 동탁,원술,유표와 나란히 역적 열전에 올랐고,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원소를 유표와 비슷한 부류의 인물로 평가했는데, 그 평은 다음과 같다.

동탁은 사람이 비뚤어져 계통이 없고 잔인하고 포학하며 비정했으니, 문자로 역사를 기록한 이래로 이와 같은 자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자하고 음탕하였으므로, 자신의 일생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은 자업자득이다.

원소와 유표는 위엄과 무용이 있었고 도량과 식견이 있었기에 당시 명성을 떨쳤다.
유표는 한강 남쪽을 지배하고, 원소는 황하 북쪽에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관대했지만 속으로는 질시하고, 모략을 좋아하였으며, 결단력이 없고, 인재가 있어도 등용하지 않고, 좋은 말을 듣고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적자를 내쫓고 서자를 세우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므로, 후계자의 시대에 이르러서 고통을 당하고 사직이 엎어졌어도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다.

초나라 항우는 범증(范增)의 계략을 듣지 않아 왕업을 잃었는데, 원소가 전풍을 죽인 것은 항우의 실책보다 더한 것이다.


본전도 그렇지만 긍정적인 내용은 거의 없다(...)
후한서의 저자 범엽은 동탁과 원술의 열전을 분리하고 원소와 유표를 같은 열전에 배치했는데 그 평은 다음과 같다.


원소는 본디 호협을 숭상하여 무리를 얻었으며, 마침내는 웅패할 계책을 세웠는데
당시 천하에 날랜 병사를 일으킨 사람들 중 원소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동탁 집권 당시 전국의 궐기를 의미)

전장에 임해서는 과감히 결단하며 맞섰기에, 용맹한 무인들이 앞다투며 목숨을 바치게 했고,
깊은 꾀와 빼어난 의론으로 지혜있는 선비들의 마음을 기울게 했다. 참으로 성대하구나!

하지만 한비자에 이르길, 군주가 모질고 비뚤어져 아랫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고, 강포함이 지나쳐 굴복시키기만 좋아하며,
적자를 가벼이 여기고 서자를 중하게 여기는 것은 멸망의 징조라고 한다.(= 한비자 망징편의 말로 원소는 여기에 딱 들어맞기에 실패했다는 뜻.)

유표의 도리는 이를 넘어서지는 않았으나(= 원소처럼 모질고 강포하진 않았다는 의미)
단지 편하게 누워 천운을 거두길 바라고, 천하가 삼분된다 헤아렸으니 나무인형과 같은 인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원소의 용모가 준수하고 유표 또한 학자다운 풍모가 있어
원소가 황하 이북에서 영웅이라 칭하고, 유표는 장강 이남을 마음대로 하니
한수의 물고기떼와 같은 것은 (형주의) 군선들이고, 구름처럼 모인 것이 기주의 군마들이라.

원소는 참위로서 왕위를 넘보았고(=199년의 참칭미수사건), 유표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동시기의 교천제),
성패는 이미 하늘께서 정하신 일이라고도 일컫지만 또한 사람이 벌이는 일이기도 하다.

원소처럼 스스로의 강인함만을 믿는 자가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며, 유표같이 좌담만 즐기는 자에게선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적자와 총아를 두고 방황하니, 몸은 무너지고 사업은 망하였구나.



범엽은 원소의 재주가 매우 대단하다며 감탄하면서도 한비자의 말을 인용해 원소를 비판했고, 스스로의 강인함에만 의존해서 성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덧붙이는데, 범엽이 평가하는 원소는 유능하고 강인하지만 타인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건을 이끄는 독선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원소유표열전은 긍정적인 기록이 없다시피 한 진수의 전기와 달리 긍정적인 기사와 부정적인 기사가 적당한 비율로 나오는 편이고, 사평 또한 나름대로 거물다운 무게감은 인정하는 편. 다만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유표의 사평은 그저 지못미다.

둘 다 미남이었다는 점(...)과 한 지역의 강자로 오랬동안 군림해 해당 지역에서는 사실상 황제에 가까운 위세를 떨쳤다는 점, 장자를 배척한 결과 훗날 창업자의 사후 후계 분쟁으로 세력이 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두고 비슷한 인물로 평가한 것으로 보이나, 장단점을 하나로 묶어버린 진수와 달리 원소는 과단성이 있지만 비정하고, 유표는 원소처럼 모질지는 않았으나 그에 비례해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부족했다는 차이점도 강조하고 있다.

1.4. 현대의 평가

젊은 시절의 정치적 행보나 하북 평정 과정은 한 두줄로 간략히 언급한 채 관도대전 무렵의 삽질을 부정적으로 조명하는 것에 분량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사평도 찌질이에 가깝게 평가한 진수의 삼국지와 달리 평가와 달리 후대에 쓰여진 범엽의 기술은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편이나...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이 작정하고 꼴통화시키면서 안습으로 전락했으며 현대에 들어와 조조가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한 지도자로 부각되면서 라이벌인 원소는 수구꼴통 기믹을 맡게 되었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어리석고 용렬한 소인배처럼 여겨졌던 데다가 글쟁이들이 옳다쿠나 신나서 덤벼들어 되도 않는 분석하기 좋을 '명문가' 타이틀도 지니고 있으니... 여러 가지로 그런 이미지에 잘 들어맞았던 듯.

그래서 원소는 '귀족주의에 쩌들고 사람을 명성과 신분으로만 판단하며 귀가 얇고 판단력이 흐린 암군' 정도로 흔히 평가된다. 물론 실제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원술의 인물평이라면 또 모를까... 그 원술도 황제 즉위 등 병크 터지기 전까지는 호걸로써의 명성을 가졌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원소를 보기 위해 몰려든 행렬로 거리가 마비되었다는 영웅기의 기록이나, 지혜있는 선비들은 원소의 계책과 의론에 매료되었으며, 용맹한 무사들은 원소의 과감성에 목숨 바치기를 서로 다퉜다는 범엽의 평,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계층에서 원소를 흠모했다는 헌제춘추의 기록 등을 보면 쇼맨쉽에 대단히 능했고, 개인적으로는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년상 등의 자기 학대에 가까운 고행으로 야권세력인 청류파의 아이돌(...)로 군림했던 초반의 행적을 통해 유교적 가치관에 얽매이는 보수적인 이미지로 여겨지기도 하나,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계모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양부의 삼년상을 단 한차례의 실수조차 없이 연이어 지내면서 그 누구도 원소가 효자임을 부정할 수 없도록 만들었던 원소는 훗날 반동탁연합 당시 황제의 칙사를 죽여 조리돌린 자신의 행보를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합리화했고, 이 때문에 친어머니를 누이를 포함한 일족 50인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주살된 것에 대해서는 '충과 효가 양립할 수 없는 징험'이라는 논리로 정당화하며[33] 일족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정확히는 원소 자신이 유교적 가치관에 얽메었다기보다는, 영제의 금권정치와 당고의 금으로 대표되는 철권통치에 대한 반발로 호족사회 내에서 원리주의적이고 교조적인 도그마에 가깝게 변질되어 있던 충효의 개념을 자신의 정치적 영달이라는 목적에 맞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철저하게 이용한 것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청류파 인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던 만큼, 영제 사후 십상시를 위시한 환관세력들에 대한 원소의 공세는 그야말로 광기에 가까운 수준이었는데, 하태후가 십상시를 비호하는 상황에서 1)보정대신 하진은 직접적으로 하태후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2)하태후는 십상시의 파직을 동의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목적 아래 정원을 시켜 수도의 요지인 맹진에서 학살을 저질렀으며 정보를 통제해 이를 흑산적의 소행으로 위장하며 북풍(北風) 떡밥을 조작, 영제와 십상시가 주도한 대 흑산적 유화정책을 탄핵했다.

동탁 등 지방의 장군들을 소집한 것은 이들로 '흑산적의 위협'이라는 음모론을 조작하고, 계엄령에 가까운 공포 분위기를 유지하며 정보를 통제하는 한편 십상시의 축출이 성공한 뒤 동탁 등과 합세해 흑산적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로 불만여론을 환기시키려는 포석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불행히도(?) 하진이 암살당하고 정국이 요동치면서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가루가 되도록 까여야 마땅한 부분이나 씁슬하게도 훗날 공손찬이 찬표소죄상을 쓸때 이 일을 간단히 언급하며 원소를 비난한 것 외에는 의외로 당대에 비난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그러거나 말거나 원소의 지지층은 더욱 결집했으며, 원소 스스로도 십상시를 척결한 것을 자신의 주요 업적으로 선전했다(…).

현대에서도 보통 동탁의 집권을 불러온 어리석은 계책 정도로만 평가할 뿐, 원소가 외부의 장군들을 소집했던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하태후를 압박하는 것이 되며 그 과정에서 원소가 보였던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극단적인 추진력(…)과 광기에 가까운 패륜성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 편. 어떤 의미로는 후한말 호족사회의 위선성과 영제가 벌인 폐정의 결과를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나쁘게 보면 시대가 낳은 괴물이며, 좋게 보면 시대의 풍운아.그야 서주대학살 벌인 조조도 영웅이라 칭송받는 판이니까

동탁과 정원으로 대표되는 지방 군벌을 불러온 것 조차도, 사실 궁극적으로 원소에게는 그리 큰 손해는 아니었다. 하진이 암살당한 이후 정국이 몇차례나 시소를 탄 끝에 어쩌다보니 운 좋게 황제의 신변을 확보한(...)동탁이 중앙군을 흡수해 권력을 잡게 되는 상황까지는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지지기반 없이 권력만 잡은 동탁이 권력 독점을 위해 연이은 무리수를 던져 중앙이 개판이 되는 난세는 자신의 명망을 이용하여 엄청난 세력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동탁에게 너만 칼이 있느냐고 호통치던 패기는 결코 허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원소는 자신이 나서면 동탁의 허수아비 정부 쯤은 압도할 만한 전력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을 것이며 이는 실제로 드러났다. 그 과정에서 후한은 사실상 멸망해버렸지만.

십상시→동탁→한복→공손찬→조조로 이어지는 라이벌 구도에서 대의명분을 가지고 노는 수준으로 상대방의 정치적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집요하게 공격하던 모습은 특기할 만 하다. 여기서 조조를 제외하면 모두가 철저히 능욕당했고, 비록 원소 본인은 조조에게 패하고 세력이 사라졌으나, 관도대전 당시 원소가 정립한 '조조 = 천자를 겁박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간신'의 프레임은 끈질기게 남아 유비가 충실히 계승한다. 과거 한헌제의 정통성을 대놓고 부정했고, 한때 스스로 칭제를 계획했던 원소 본인의 이력이야 어쨌든간에 이 논리에 따르면 원소는 한의 대장군으로 '간적 조조'와 싸우다 죽었으니 마지막까지 '충신'으로 남은 샘. 이런 식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야 사실상 눈가리고 아웅에 가깝지만 훗날 다 털린 원상이 오환으로 달아날 당시에 10만호가 따르고, 유비 또한 원소의 논리를 계승,발전시키며 유용하게 써먹은 것에서 볼 수 있듯 최소한 지지세력의 결집에는 유효했고, 중앙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와 맞서려면 어떤 논리로 대응해야 하는지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34]

유비서주에서 조조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원소가 아들의 병을 핑게대며 지원을 늦게 해주는 바람에 유비가 패망했다는 점을 들어 고작 가족의 병 때문에 거병하지 않은 원소의 전략적 안목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원소는 기본적으로 자기 감정을 곧이 곧대로 드러내는 인간이 아니며, 따라서 '자식이 아프다'는 구차한 핑계는 그야말로 군대를 일으키기 싫어서 대놓은 변변찮은 핑계에 가깝다. 게다가 원소는 과거 원씨 일족이 동탁에게 몰살당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국가에 대한 충성이 우선이다.'고 주장할 정도로 혈족의 목숨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당시 시점에서 보자면, 원소는 서주와 유비의 지원에 그리 크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 원소는 기주, 유주, 병주, 청주의 4개 주를 차지하고 있었고, 조조 세력은 연주와 예주, 사예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유비는 서주를 보유하고 있고, 후방에는 형주의 유표도 있다. 즉, 원소(4), 조조(2.5), 유비(1), 유표(1) 이라는 세력비이다.

전력비를 보면 원소의 우위는 거의 절대적이다. 게다가 설사 조조가 유비를 물리치고 서주를 차지한다고 해도, 이미 조조는 서주대학살을 벌인 전력이 있어 서주에서 조조의 지배가 확고하게 굳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즉, 원소는 조조가 유비를 멸망시킨다고 해도 불리해지는 것이 전혀 없다.

원소가 유비를 홀대해야 할 이유는 오히려 '전후처리'에서 찾을 수 있다.

조조에게 승리를 거둔 이후, 조조를 적대하는 유비가 세력을 유지하고 살아남으면 자기 세력을 이끌고 조조와 직접 교전한 공적이 있는 유비의 정치적 발언력은 크게 올라간다. 조조와 직접 교전한 공적은 유비에게 돌아가며, 원소는 그저 유비를 지원한 것으로 격하될 위험이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 주를 지배하는 유력 군벌로서 유비가 응당 받아야 할 정치적 댓가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원소는 '전후처리'에서 유비에게도 어느 정도 지분을 보장하지 않을 수 없고, 거기다 조조 패망이 확실해지면 유표까지 끼어들 것이 분명하여 원소는 '승리의 과실'을 독점할 수 없게 된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해서 이기면 유비, 유표에게도 상당한 관직을 앉혀주고 원소도 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궁극적으로 '원소가 주도하는 국가'를 만드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원소 입장에서 보자면, 충분히 자세력만으로도 조조를 압도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유비'따위'를 동맹으로 끼워서 '승리의 과실'을 나눠줄 필요성은 없다고 판단내리는 것이 무리수는 아니다. 원소는 충분히 유비의 1은 조조에게 일단 줘버리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세력 4로 조조의 세력 3.5를 전부 삼키는 전략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전략은 반 정도는 맞았다. 결국 조조에게 패망한 유비는 겨우 몸만 도망쳐 나와서 원소에게 '명분'을 가져다 바치는 존재로 전락했다. 원소로서는 아주 잘 풀린 셈인데 서주를 차지한 유비는 존중해줘야 할 대상이지만 객장에 불과한 유비는 그저 실권은 전혀 주지 않아도 상관없기 때문. 사실 원소 입장에서는 유비가 조조에게 죽어버려도 '명분'은 이미 얻었으니 상관없었을 것이고, 어쩌면 살아있는 유비 보다는 죽은 유비가 나중에 귀찮지 않으니까 그쪽을 더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위선자라는 평가는 이미 당대에도 범람하고 있었지만, 그의 온후관대한 겉모습 때문에 당대에 원소를 추종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원소는 당대에 보편적인 모범으로 여겨지던 유교적 가치관에 더해 현인에게는 지식을 무인에게는 과감성을 무기로 추종되었듯 여러 계층에 따라 제각기 다른 미덕을 보이고 인정받으며 광범위한 추종자를 얻었으나, '희노의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고 평해지듯 진심을 보이는 일이 없었으며, 실제 행적으로도 단물이 빠지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는 표리부동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른 미덕을 보인다는 것이 말이야 쉽지만 원소가 어떤 식으로 6년상을 지내며 효자임을 인정받았는지 생각해보면 무서울 정도로 섬짓한 인간성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괴물'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로 정치력 만렙(...) 판읽기와 언플능력만큼은 경지에 달했다.

원소의 통치는 특정한 정책을 펼쳤다는 기록은 없어 구체적인 상을 그리기는 어려운데, 전반적인 분위기를 보자면 문제를 지적하는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영토 통치는 상당히 잘 했던 것으로 보인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원소의 정치는 관후하여 크게 존경을 받았고, 원소의 통치가 미치는 하북 4주의 지체 높은 사대부로부터 비천한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을 막론하고 원소를 흠모해 불평하는 목소리가 없었으며, 원소가 죽었을 때는 온 도시의 저자가 통곡과 비탄으로 마비되었으며 심지어 그의 죽음을 두고 부모상을 치르는 백성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조조는 원소의 잔재를 없애려 했는지 원소의 본거지 업군의 인구를 대규모로 타지로 이주시키고[35] 자신을 따르는 측근 호족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키는 '수도 조성 사업'을 감행했다.

삼국지의 부정적인 기록을 부풀리고 재해석한 삼국지연의의 묘사에 다시 이런저런 살이 붙으며 수구꼴통 혹은 암군 이미지로 폄하되었다. 하지만 이를 걷어내고 보더라도 (기존의 인식과 궤는 다르지만) 명암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여러 가지 의미로 문제적인 인물. 어떻게 보면 연의에서 조조가 가진 '간웅'이라는 인물상이 더 잘 어울리기도 한다.

1.5. 기타

중노동에 가까운 년상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것도 연이어 지냈던 걸 보면 체력이 어지간히도 좋았던 모양이다.

후한서에서는 원소의 자모를 언급하며 훤칠하다고 하고 동탁 진영에서도 원소를 멀대 같은 놈이라고 비하하는 언급이 있는데 정욱이나 제갈량, 유표같이 시대를 초월한 위너는 아니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상당한 장신이었던 듯.

조조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라이벌 플래그를 만들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2차 창작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일방적으로 조조에게 열폭하는 모습을 보이나, 원소에 대한 기록이나 원소 자신이 남긴 글을 보면 원소 자신은 동탁이나 원술, 공손찬을 의식하는 느낌이 강하다. 오히려 조조가 젊은시절의 원소를 장차 역적의 우두머리가 될 자라고 평가했다던가(황보밀 일사전),원소의 편지 한 통에 흥분해 히스테리 증세를 보였다던가(삼국지 순욱전), 조조의 책사들이 원소를 의식하는 조조에게 양자의 개인적인 재능 차이를 비교하며 조조를 격려하는 하는 기록이 수두룩해서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듯... 원소가 그렇게 조조를 의식했다면 애초에 동군태수로 임명하며 후원해 후방을 지켜줄 파트너로 간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비가 조조에게 공격당했을 때는 어린 아들(=원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음.)이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출병하지 않았으나, 공격을 했지만 막혔다, 의심이 많아 움직이지 않았다. 등으로 기록이 갈리는 데다. 원소 자신 또한 일가족이 적에게 인질로 잡히거나 살해당하는 위험을 무시하고 일을 감행한 경력이 몇 차례나 보이기 때문에 아들의 병을 이유로 출병하지 않은 것은 단지 표면상의 핑계 정도로 보는 견해도 많다. 특히 후사 문제에 있어선 막내 원상을 후계자로 지목했으면서도 승계기반을 만들어 주지 못한 채로 죽어버려서 내분의 불씨를 남겨놓기도 했다.[36]

군사적 커리어는 매우 화려한 편. 4개 주에 영향력을 떨치던 명장 공손찬을 불리한 상황에서도 수 차례 무찔렀고, 관도대전에서도 오소 이전까지 확실한 우위를 점하며 전략적으로 조조를 완전히 몰아넣은 상황이었다. 다만 사람들이 오소 습격 이후의 모습만을 기억하는 평이라 안습. 사실 관도대전의 패배 역시도, 전투에서의 지휘통솔 능력 부재라기보다는 그의 독선적 성격으로 인해 유발된 휘하 인물들의 충성심이 하락하는 용인술 문제가 크다. 고작 기습으로 무너진 것이니 능력을 확신할 수 없다는 축도 있지만 애초에 장합, 고람이 이끌던 군이 조조의 최후 거점인 관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것을 볼 때 그 규모가 작았다고 판단할 수 없고, 경계가 이루어지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의 갑작스러운 반란이라는 점, 혼란을 지속시키기 위해 영채에 불을 지르고 조조 측에 투항했다는 점 등을 볼 때, 오히려 이걸 멀쩡히 수습하는 쪽이 세기의 명장이지 수습 못한 원소가 무능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전술가 중 하나로 꼽히는 조조[37] 역시도 원소에게 패배한 정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더더욱.

군사적 능력 자체는 대단히 우수한 편에 속하지만 최소한 관도대전 당시에는 성질 급한 모습을 곧잘 보여주고 주의력이 부족했던 측면이 있다.

일례로 원소는 연진으로 향한 조조의 의군에 낚여 본대의 도하 장소를 연진으로 설정하며 안량 등을 고립시켰는데, 원소가 왜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에 대해 기록에서 명시되어 있진 않으나, 당시 선봉의 포진은 안량,곽도,순우경 등의 올스타 멤버로 구성되어 있었고 숫자상으로도 1만 이상의 대군이었으며, 지도를 살펴보면 연진에서 백마로 향하면서 조조를 포위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를 살펴보면 원소의 구상은 안량 등의 선봉대가 쉽게 무너질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그 사이 연진을 확실히 점거함으로서 혹시 모르는 배후 공략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백마의 안량과 합류하며 안량을 치러 들어간 조조를 역포위할 수 있으니 오히려 조조의 의도에 낚여주는 척 일타쌍피를 노린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안량이 쓸데없이 전방에서 지휘하다 원턴킬 나면서 결과는 시궁창(...)

관도대전의 명운을 가른 오소전투 당시에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오소가 넘어갈 경우 보급에 치명타를 받는 게 뻔한 상황임에도 오히려 승리를 확신하고 본진의 공세를 강화했으며 오소의 원군으로는 기병대만을 파견했다. 이 역시 기동성을 중시한 포진으로 조조가 순우경과 싸우는 사이 조조 본대의 후열을 박살내고 주력군이 빠진 조조군 본진도 정리하는 일타쌍피를 노린 전략으로 볼 수 있고, 이번에도 조조가 순우경군을 먼저 박살내면서 결과는 시궁창(...) 그나마 순우경의 경우 쓸데없이 전방에서 지휘하다 원턴킬 났던 안량과 달리 간발의 차로 지긴 했다.

이런 행보에 대해서는 정규군 10만을 동원한 장거리 원정이라는 군벌시대 당시로서는 유래 없던 일을 벌였던 데다, 내부적으로는 전풍,저수 등 반대파들을 투옥,좌천시키는 초강수를 두며 거창하게 원정을 시작했던 만큼 전쟁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상황이었다는 분석도 존재. 이에 따르면 전선을 끝까지 지켜내며 변화를 기다리자는 순욱의 진언 또한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원소군 지휘부의 내분 요소를 순욱이 간파한 것이며 결과적으로 전략상의 대립+정치적 문제 등으로 허유가 이탈하면서 예측이 맞아떨어진 것으로 본다.

또한 저수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다고도 하나 황하 도강 이후 저수의 헌책들은 특별히 대단하다기 보단 세심하게 수비와 경계를 보강한다던가, 혹은 안정적으로 공세 전략을 유지하는 상식선의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원소는 이런 충고들을 모두 거부했는데 그 또한 많은 전쟁을 겪어온 사령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만 가지고 외부 경계를 강화하자는 상식선의 조치들을 무시했다고 보긴 어렵다. 이 경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일종의 방심이라고 보는게 더 타당할 듯[38]

사실 계교 전투에서도 본대와 떨어져서 앞서나가다가 다 이긴 판을 공손찬군의 역습으로 죽을 뻔한 전력이 있다. 공손찬 상대로는 특유의 뚝심과 과감한 역습으로 위기를 헤쳐나왔지만 관도에서는 그렇게 되지 못했고 이것이 질래야 질 수 없었던 관도의 패전으로 이어졌다. 사실 조조가 오소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굳이 본진을 공격할 이유도 없었고 조조의 오소 습격만 확실하게 막아내고 전세만 유지했어도 충분히 이기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성급하게 본진 공격을 지시하면서 사태가 꼬이기 시작했고 여기에 세력 내부의 인사,정치적인 문제가 터지면서 1선 사령관들의 이반으로 이어진다.

1.6. 조조 시점에서의 원소

첫판왕 동탁중간보스에 해당하는 여포, 원술에 이은 최종보스.[39]

삼국지 무제기에서는 원가에 관련된 서술이 지면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관도에서 시작되는 전쟁은 매우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원소전보다 무제기에 실린 내용이 더 풍부해 보이기도 한다. 본격 조조 vs 원소 일대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무제기의 인물평[40][41]에도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는 등 여러가지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원소는 막강한 세력을 구축해 한때는 조조조차 그에게 투항하려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고, 관도대전 이전에는 명실공히 중국의 1인자였다. 사람을 끄는 힘이 있어 뛰어난 인재들을 여럿 모았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원소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 원소에게 찍혀 감옥에 가 있던 모사 저수는 조조의 포로가 됐을 때 자신을 중용하겠다던 조조의 제안도 마다하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 죽는다.

훗날의 역시 강한 세력이었으나 각각 산맥과 강이라는 지형적인 장벽을 두고 오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반면 원소는 황하를 두고 허도의 바로 북쪽에 강대한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조조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안요소였을 것이다. 실제로 무제기에서는 유비나 손권보다도 원상, 원담과의 싸움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고, 위서 유이열전에서는 오와 촉의 신하들은 (원소시절) 기주의 병사들에 미치지 못하고 손권과 유비 역시 원소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건 유비의 한중왕 선언으로 조조가 제대로 엿먹기 이전의 평가였지만...

유주를 점령한 조조가 원소의 아들들을 쫓지 않고 허도로 돌아가려 했을 때 곽가(郭嘉)가 '원소는 정치를 개떡같이 했기 때문에 민심이 어렵다. 아들들을 쫓아 후환을 없앤 후 어진 정치를 펴 민심을 달래야 한다.'라고 말했다.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백성들이 싫어하는 원소를 내쫓은 조조에게 자연히 민심이 돌아올 것이지 않은가. 실은 원소가 어진 정치를 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사례로 '원소가 정치를 잘해 민심이 원씨에게 쏠려 있으니 이참에 씨를 말려 재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여러가지 단점도 있었지만 곽가의 인물평은 일방적으로 치우쳐진 것이며 실제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던 점도 많았다. 이 말에 근거를 둔 후대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1.7. 재평가

많은 사람들이 원소는 명가의 지위를 등에 업고 처음부터 강한 세력을 자랑했으리라 생각하지만, 비록 명문 출신이지만 원소는 천출로서 원씨의 브랜드를 능력으로 흡수한 것에 가까우며 따지고 보면 오히려 원소보다는 조조가 가문빨로 출세한 것에 가깝다. (조등 항목 참고)

원소는 십대 때부터 자신의 평판과 커리어, 인맥의 관리에 대단한 노력을 쏟았으며 첩출인 원소가 삼공부에서 천거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노력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조조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며 학업을 게을리해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며-심지어 그를 중심으로 대단히 미화하는 진수 등의 기록에서까지-, 조조는 이렇듯 평판이 좋지 않았음에도 20세에 효렴(孝廉; 음서와 비슷한 개념)으로 추거되어 순조로운 관직 임용의 절차를 밟았다. 이것은 원술도 마찬가지다. 대단한 노력을 쏟았다고 평가된 원소와 비교되는 대목인 것이다.

원가에서 원소와 원술의 입지라는 측면에서 정사 삼국지를 분석하면 한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원술의 세력에는 정사의 기록에서 원씨 동족 인사가 의외로 자주 발견되지만, 원소 세력의 명단에서는 원소 자신과 그의 직계 자손을 제외하면 원씨 동족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여기에서 정작 원씨 가문 내에서 지지를 받은 쪽은 원소보다는 오히려 원술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 원인은 아마도 원소의 미심쩍은 혈통, 그리고 가문의 본래 근거인 하남, 남양 지역과는 거리가 먼 기주에 자리잡은 불리함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조조의 진영에도 친족이 매우 많고, 조조가 친족을 대단히 중시했다는 점과도 상당히 대비된다. 조조 역시 자신의 고향에 가까운 연주에서 세력을 일으켰으며, 조씨와 하후씨 친족을 다수 진영에 끌어들였으며 조조의 조씨와 하후씨 친척 형제들, 조카들은 모두 군의 핵심 직책을 맡았다. 다만 원소는 동계 친족에게는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직계 친족은 그 역량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귀중하게 쓰는 모습을 불합리한 보여주었는데, 이는 친족의 영향이 큰 후한 말기라는 사회상에서 원소에게 신뢰할 수 있는 친족은 그 자신의 어린 직계 자식들 밖에 없었다는 문제에서 나온 한계였을 것이다.

진수는 원소를 결단력 없는 인물이라 평가했고, 조조를 비롯해 조조 진영의 여러 참모들도 원소를 일컬어 "계책을 잘 꾸미나 결단력이 없고..."라든가 "뜻이 크나 사세를 살피는 데 더디고..." 같은 식의 평가를 내리는 부분이 곳곳에 눈에 띄는데 이것도 일방적인 폄하다. 조조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조금이라도 승기가 보인다 싶음 앞뒤 안 재보고 그대로 달려들어 승리를 쟁취하는 과감성이 있었고(ex:관도전), 낙양에 갓 입성한 동탁을 치지 않고나 유비를 치던 조조의 배후를 습격하지 않는 등 원소가 어느 정도 승기를 보면서도 불확실하다 싶으면 오히려 더욱 사리던 경향이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 절대적인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이 그 '과감한' 조조가 지나치게 객기부리다가 형양에서 개털되고, 명사들 잡아죽이고 학살이나 하면서 쓸데없이 적을 늘려 사방에 적대세력을 두며 고전하고 있을 때 '결단력없는' 원소는 항상 명분을 세워 적국에 대한 대대적인 선동공세를 펼치고 동맹국을 이용해 적국을 견제하는 등 차도살인을 통해 순조롭게 세력과 성망을 키워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관도전 당시 원소가 망조를 보이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런 류의 모략만큼은 상당히 돋보였고, 이건 조조에게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장점이었다. 이런 점만 단편적으로 놓고 보면 조조는 저돌적이고 단순무식하며 원소는 치밀하고 사려가 깊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관도전 당시 원소군의 격문에선 조조를 일컬어 '어리석고 경박하며 지략이 짧아 전투에 임해서도 가볍게 나아섰다가 쉽게 물러서고 결국 번번히 군사를 잃고 패하기만 거듭한다'고 비난하는 부분이 있는데 애초에 진수나 조조 진영에서 원소를 결단력 없다고 까는 게 딱 저런 수준이다.

나관중은 이런 평가에서 부정적인 면모만을 더욱 강화시켜서 원소를 귀가 얇고 주관이 부족한 우유부단의 전형으로 묘사했는데, 사실 "계책을 잘 꾸미나 결단이 늦고, 뜻이 크지만 사세를 살피는데 더디다."는 평가는 제갈량도 똑같이 받았다. 따지고 본다면 원소와 제갈량은 인물상에서 겹치는 부분이 은근히 많은데, 그럼에도 제갈량이 우유부단하게 묘사된 경우는 없다.

또한 원소의 일대기를 보면 중요한 위기가 닥쳤을 때는 오히려 과감한 결단력으로 이를 극복해 나가는 모습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십상시를 말살하기 위해 외부 군대를 끌어들여 결과적으로 동탁의 집권을 불러온 것은 자주 비판되는 부분이지만 애초에 원소는 하진이 건석(십상시의 일원이며 중앙군을 장악하고 있었다.)을 축출했을 때 '이제 당신이 전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군사력으로 십상시를 서둘러 말살하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조언했다. 환관들의 뇌물 공세와 태후의 반대에 발목을 잡힌 하진이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을 설득하고 설득하다 못해 차선책으로 제시한 것이 지방 군대의 소집이었는데 당시는 군웅할거시대와 달리 중앙정부의 권위가 분명히 유지되고 있었고, 하진이 암살되는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원소의 지휘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십상시를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후한서 하진열전을 보면 하진은 원소가 다 차려논 밥상을 몇 차례나 엎어버린다. 본디 환관과 결탁해서 출세한 배경도 있었기 때문에 십상시 문제에 대한 하진의 우유부단함은 정말 가관이었다...

또한 십상시에게 하진이 암살된 상황은, 자칫하면 원소를 비롯하여 하진을 따르던 무리가 모두 역적으로 몰려서 제거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 원소는 하진이 암살되자 재빨리 수 십 명의 가병만을 이끌고 나와 겁에 질린 병사와 관료들을 질책했으며 선수를 쳐서 도성 장악을 위해 파견된 십상시 내각의 관료들을 살해하고 도성의 군사들을 장악하는 등 환관세력의 모든 반격 여지를 봉쇄한 뒤 궁정에 돌입해 환관세력을 주멸했다.

이런 치밀함과 과감함을 겸비한 원소의 행동은 겁에 질려 행동을 취하지 못하던 다른 관료들과 차별되었던 것으로 분노에 눈이 뒤집혀 하진 암살의 소식을 전해들은 즉시 궁정에 돌입해 닥치고 불부터 지르고 보던 원술, 오광(吳匡)과도 크게 달랐다. 비록 동탁의 난입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 상황에서는 생존과 권력을 동시에 노릴 수 있는 최선의 결단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공손찬과 싸우던 중 장연(張燕)의 뒷치기로 본진인 업(?)이 함락되어 지휘부가 패닉상황에 빠져 "우린 안될거야. 아마..." 같이 기분잡치는 소리나 하고 있을 때도 혼자 여유를 잃지 않으며 혼란을 수습하고 역공을 감행해 대승을 거두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원소는 대체로 위기상황에서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지나치게 독선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것이 바로 원소의 몰락을 가져왔다.

1.8. 기타 창작물에서의 원소

1.9. 원소는 투구를 쓰지 않았는가?

《부자(傅子)》의 기록에 따르면, 나름대로 멋을 부리는 경향도 있었는지 전투에 나설 때도 항상 투구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당대 사대부들 사이에서 점잖은 패션아이템 정도로 여겨지던 모자나 따위를 썼다고... 이는 원소뿐만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까지 그랬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삼국지 8삼국무쌍 3이래 노란색 투구 캐릭으로 변신한, 심지어 삼국지 영걸전 시리즈에서도 시종일관 투구를 씌워 놓은 KOEI의 작화는 고증의 에러 측면이 있다.

정사의 기록(원소전)에 공손찬에게 쫓길 때 "전풍이 원소를 끼고서 퇴각하여 빈 담 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원소가 두무 兜鍪(흔히 투구로 번역)를 땅에 벗어두고 말하길 “대장부가 적 앞에 당하여 죽게 되어서 담장 틈으로 들어왔으니, 어찌 살아날 수 있겠소?” 라 했다."는 구절이 있어, 부자의 주석과 달리 투구를 쓴 것 아니냐는 말도 있으나, 이 뜻은 본래 "가마"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투구 외에도 관이나 두건의 윗 부분으로도 볼 수 있다. (당장 두무의 두兜가 두건의 두다) 고로 원소가 투구를 썼다는 근거가 정사에 있다는 해석은 분명치 않다. 관을 벗어던졌으면 레알 투혼인데

이렇듯 전쟁과 동떨어진 듯한 복장을 한 것은 원소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군벌이 날뛰던 세기말에 역설적으로 신사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선전술의 일환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현대적인 감성으로 보통 아프리카,중남미의 군사독재자 하면 후줄근한 군복에 선글라스 낀(...)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세련된 외모에 말끔한 정장차림으로 나오는 듯한 효과를 고려했다는 것. 김정은 외모가 돼지가 아니라 원빈급이었다면 사람들이 받을 인상이 지금과 달랐으리라 생각하면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

원소는 대중 선동에 나름의 경지(?)를 구축한 인물이었고, 원소 자신만이 아니라 부하들까지 비슷한 스타일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받는 분석.

2. 爰邵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처음에는 간리를 지냈고 263년 5월에 조환이 칙령을 내려 촉한의 정벌이 시작되면서 등애제갈서에게 각기 3만여 명을 이끌게 했다가 제갈서는 종회의 모함으로 제갈서의 병력은 종회가 거느리게 되었고 촉 정벌에 등애 휘하에서 진로호군으로 종군했다.

등애가 산 위에 앉아있는데 흐르는 물이 있는 꿈을 꾸면서 등애가 해몽에 대해 묻자 원소는 주역의 궤를 통해 등애가 가서 공을 세우지만 그 길이 다하기 때문에 촉을 이길 것은 분명하지만 돌아올 수 없다고 대답했으며, 이를 들은 등애는 크게 낙심하고 허탈해하면서 기뻐하지 않았다.

후에는 벼슬을 위위까지 지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역에 밝다는 서술과 함께 등애가 주역의 건괘에 나오는 말들을 줄줄 외우는 사람 앞에서 등애는 의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서글퍼했다고 서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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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전 버전에서의 해석이 애매하게 되어 있었는데, 후계자인 원상이 요동에서 죽은 것을 의미. 원소 자체는 병사했으며 조조가 업을 점령한 뒤 조의를 표하는 등 상대적으로 대접이 나은 편이었고, '두로(=머리)가 천리 밖으로 간다'는 표현 자체가 공손강이 원상을 죽이면서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 [2] 삼공 이상 고관의 속관으로 대장군연의 정원은 29명이다.
  • [3] 결국 원외의 생각은 들어맞았다.
  • [4] 관리의 비리를 감찰,탄핵하는 직책으로 현대의 검사와 비슷하다.
  • [5] 시어사는 상서의 결재를 받는다.
  • [6] 사례교위는 수도를 통치하는 장관이며 관리의 감사권도 가지는 관직이다. 원소는 소제-하진 정권의 실력자였고 또 동탁이 이끄는 새로운 제실(유협)을 유명무실한 동탁의 괴뢰로 보며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에 전 정권의 정통성을 대표한다는 의미가 있고, 뒤에 언급될 정통성 분쟁과도 연관되는 부분이 있다.
  • [7] 한복이 이러한 행보를 보인 것은, 종사 유자혜(劉子惠)가 연합에 나서지 말 것을 권하였기 때문이다.
  • [8] 한대의 태수나 자사는 사실상 그 지역의 임금에 해당하였고 고관에게 징소되어 정계에 진출한 고리와 문생들은 제후와 신하의 관계처럼 얽혀졌다. 고리와 속관은 자사와 태수를 (사실상) 주군으로 섬겨 충성을 바치고, 자사와 태수는 다시 황제를 구심점으로 삼았었다. 동탁은 단경에게 천거되고 사도 원외가 벽소하여 속관으로 삼았으니 원가의 고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소가 관동에서 기의하자 원외와 그 일가를 모조리 도륙했다. 한대의 법률에는 아무리 큰 죄를 저지른다 해도 어린아이와 늙은이에게 까지는 연좌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동탁은 노인과 어린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인 것도 모자라 몰래 파묻어 묘소조차 세울 수 없게 만들었다. 문생과 고리가 온 천하에 가득한 원씨였으니, 그들 모두의 분노를 산 것도, 원소가 동탁을 치려고 군사를 일으키자 관동지역 전체가 호응한 것도 그저 까닭 없는 일은 아니었다.
  • [9] 원소가 아무리 명성을 드높였다곤 하나 실제적인 관위는 태수에 불과했다. 반면 후한의 대주인 기주의 목이었던 한복은 당연 원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자금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관위상으로도 원소를 통제하는 상관이 된다. 애초에 동탁은 어사중승(감찰부의 수장)이던 한복을 원소의 감시역으로 파견한 것이다. 원소와 동탁 사이에서의 이득을 저울질하던 한복의 태도로 봤을때 원소의 거병을 승인한 것은 어느정도 원소를 통제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계산이 있었고 이후 원소에 대한 지지가 너무 강해지자 통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원소가 쓴 글에서도 한복이 자신과 동탁 사이에서의 득실을 계산하며 계략을 꾸몄다고 적고 있다.
  • [10] 무제기에 따르면 필유(畢瑜)를, 후한서에 따르면 장기(張岐)를 유우에게 보내 추대를 권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 [11] 진수는 포훈전에서 이 무렵의 원소에 대해 '원소의 무리가 최고로 성했던 시기'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단순히 세력적으로만 봤을 때 당시 원소의 힘은 미약하여 공손찬은커녕 한복에게도 전혀 저항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훗날 원소가 경쟁하던 군벌들을 모두 격파하여 하북 4주를 통일하고 호구는 수백만에 수십만명의 군사를 거느리며 명실상부한 당대 최강의 세력을 형성했을 때도 저만한 표현을 쓰진 않았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
  • [12] 원소가 국의와 서로 힘을 합쳐도 한복과 대적하기에는 후달렸다. 하지만 한복 이상으로 강력한 외부 군벌 공손찬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결국 공손찬에게 온 정신이 팔린 한복은 원소의 주위세력 병합을 저지하지 못했으며 이 계책이 성사되자 원소는 봉기를 더더욱 극진히 아끼고 친근히 대하며 신임했다고 한다.
  • [13] 기주의 강노병은 유주의 돌기와 함께 후한의 최정예 병력으로 명성이 높았다.
  • [14] 그 외에 조부, 정환, 이력 등도 모두 원소에게 숙청되었다고 한다.
  • [15] 이 사건에 대해 공손찬에게 보냈다는 원소의 편지가 주석으로 남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자신이 족제(=공손찬의 사촌동생인 공손범)에게 발해태수를 양도했지만 공손찬은 오히려 우호를 져버리고 예주를 공격했고 그러다 아우(=다른 사촌동생 공손월)가 죽자 자기 탓을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사건의 순서가 원소 기주목 취임→발해태수 양도→공손찬의 예주공격→공손월 사망→ 계교전투로 이어지므로 기존의 기록과 다르다. 비록 원소가 기주목이 되었지만 당시 공손찬은 세력적으로도 원소보다 훨씬 강했고, 한복을 친 것도 어느 정도는 원소의 부추김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원소는 보상을 주며 타협할 필요가 있었고 실제로 자신이 기주목이 되자 발해군을 양도하겠다고 약조했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원소의 주장과 다르게 다른 기록들은 모두 공손월 사망 이후에 원소가 발해군을 넘겼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원소가 약속을 하고서도 실제적인 양도를 계속 미루며 시간을 끌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노한 공손찬이 공손월을 예주로 보내 원술과 연합하는 등 견제하다가 공손월이 죽으면서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자 허겁지겁 발해군을 넘기고 저자세로 나왔다고 보면 앞뒤가 맞는다.
  • [16] 실제로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던 것 같다. 요격하여 3만의 수급을 취하고 수 만 수레의 물자를 노획, 재차 추격하여 강을 건너 달아나는 것을 반쯤 건넜을 때 습격해 완파했다. 이때 수 만 명을 베었는데 이들의 피로 강이 붉어졌으며 포로가 7만명에 노획한 무기와 식량은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고 위광을 온 나라에 떨쳤다고 한다.
  • [17] 당시 동탁 정권은 여포, 왕윤 등 병주계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이에 따른 병주계의 회유책으로 보임.
  • [18] 기주목의 치소인 업이 위군에 있었고, 동군태수 왕굉은 원소와 우호적인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장연이 이를 격파한다면 하남으로 진출하며 원소를 견제할 수 있었다.
  • [19] 한진춘추에 인용된 원소의 편지에 따르면 '휴전을 요청해 놓고서는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북쪽에서 침입을 알리는 급보가 끊이질 않아 근심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원소와 공손찬의 휴전은 193년 1월에 있었고 장연이 업을 함락시킨 때는 193년 3월이므로 원소의 위기를 틈타 휴전을 파기했다고 보면 들어맞는다. 후한서 유우열전에서도 유우와 공손찬의 대립이 격화되는 계기로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하기만 거듭하면서도 계속 원소를 친답시고 백성들을 거덜내는 것을 못마땅히 여겼던 것을 들고 있는데 이 시기가 193년 무렵이기 때문에 공손찬이 원소에 대한 군사작전을 재개했을 가능성이 높다.
  • [20] 원소는 장안 조정을 동탁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했으며 이전 소제 정권의 실세였던 자신에게 그 정통성이 어느 정도 이어짐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장안 조정에서 받은 관직이 정품이고 원소가 내린 관직은 짭퉁이라며 얕보는 태도는 원소의 자존심을 직격으로 건드는 행위였다.
  • [21] 유주는 총 11개 군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중 요동, 낙랑, 현도의 3군 일대는 요동 공손씨 정권의 영역이었고 유주에서 공손찬은 8개 군을 점유했다. 단순하게 말했을 경우 유주 내의 공손찬 세력권 중 절반이 원소에게 붙은 거다.
  • [22] 기주자사 엄강은 이미 한참전에 사망, 청주자사 전해는 원담에게 패하여 세력을 잃고 공손찬에게 돌아갔고, 병주의 추단은 어느 사이에 세력을 잃었는지 194년엔 어양태수가 되어 있다가 선우보, 염유에게 패하여 살해당했으며 연주의 선경은 기록이 없지만 정황상 다른 원소의 수하, 혹은 조조에게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 [23] 문자 그대로 풀 한 포기 남아나지 않았다고 함.
  • [24] 위서 장홍전에 따르면 장홍은 원소 휘하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던 장도가 장안으로 가서 천자를 알현하고 작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원소에게서 본인은 물론, 일족까지 모조리 주살당해 대가 끊긴 사건을 비난하고 있다.
  • [25] 각각 향당(享黨)과 종적(種賊)으로 불림. 정도가 심한 곳은 각 마을마다 제각기 민병대로 무장하여 세력을 갖추고 관리의 통제를 거부했다는 말이다.
  • [26] 198년 5월의 일로 당시 유표와 반년째 대치하고 있던 조조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싸움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당장은 원소가 거절했다고 하나 대치가 더 길어질 경우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고 판단한 듯.
  • [27] 헌제춘추
  • [28] 원소전에는 저수가 안량의 무모한 성격을 근거로 안량의 단독 투입을 반대했고, 원소가 이를 거부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이는 다른 기록과 상충된다.
  • [29] 그 숫자는 기록에 따라 다른데, 진수의 기록에서는 병사들이 거짓항복해서 '모두' 파묻어 죽였다고만 하고, 장번의 한기에서는 포로로 잡아 파묻어 죽인 것만 8만명이라 하나 헌제기거주에서는 앞뒤로 참한 것이(=전사자를 포함한 관도대전 전체의 원소군 총 사망자가) 7만이라고 하며 후한서에서도 앞뒤로 8만이 죽었다고 한다. (사망자 중 포로로 잡혔다가 살해당한 비율이 높긴 하지만) 살아 돌아가지 못한 병사가 7,8만에 가까웠다는 게 사실에 가까울 듯.
  • [30] 순욱전에서 확인
  • [31] 위지
  • [32] 양녀를 시집보낸 것이지만
  • [33] 197년에 원소가 쓴 상주문에서 원소 자신이 직접 언급했다.
  • [34] 원술은 여기에 칭제로 맞대응하다가 거하게 말아먹었고, 유표는 외왕내제식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결과적으론 내부 호족들과의 주도권 경쟁 끝에 식물군주로 전락했다.
  • [35] 이렇게 강제 이주당한 백성들은 사실상 하층민으로 전락했다.
  • [36] 만들려는 노력은 한 것으로 보인는데 너무 일찍 죽어서 완성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원담의 호적을 파내서 후계자로서의 명분을 없앤 것만 해도(...) 근데 원담은 이를 무시하고 그냥 후계자로 사칭했지
  • [37] 전략가로 표기되어 있는데 조조는 거국적인 관점에서 대전략을 유지하는 쪽 보다는 국지적인 전투에서 우위를 보이는 야전 지휘관에 가깝다.
  • [38] 조조도 말년에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39] 원소를 잡기 전에는 조조가 주인공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원소를 잡은 후에는 조조 자신이 최종보스가 된다.
  • [40] 타인의 기전의 인물평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케이스이다.
  • [41] 또 하나의 예는 유비의 인물평에 언급된 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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