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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술

袁術(155 ~ 199)

후한 말의 군벌이자 삼국지의 인물. 자는 공로(公路).

Contents

1. 젊은 시절
2. 영제 사후
3. 남양 점거
4. 원소와의 대립
5. 패배와 재기
6. 말년꿀물황제
7. 원술 사후
8. 기타
9. 미디어 믹스


1. 젊은 시절

사공 원봉의 삼남. 4대에 걸쳐 삼공의 직위에 오른 원가의 후예이다. 원소와는 사촌관계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소가 원성의 대를 잇기 위해 입적된 원봉의 서자라는 기록이 있어 호적상의 사촌관계일 뿐 실제로는 이복형제였다.

본래 원술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거칠고 난폭했으며 고관의 자제들과 패거리를 짓고 다니며 매와 개를 이용한 사냥 같은 놀이에 열중하는 우두머리 격이었다고 한다. [1] 보통 사서에 전기를 남기는 인물들을 보면 소년기를 착실한 모범생으로 지내거나 자수성가한 유형이 즐비한데 원술은 대놓고 부유층 일진출신인 것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네임드 중에 이런 유형은 몇 없다. [2]

훗날 어느 정도 장성하자 태도를 고쳐 양아치짓을 그만뒀다고 한다. 아마 주위의 평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당연하게도(?) 효렴[3]으로 천거되었고, 중앙과 지방의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고 하나 이때의 구체적인 행적은 불분명하며 이복형제인 원소와 관련해서 단편적인 기록이 흩어져 있다.

삼국지 순유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장번의 한기에 따르면 원술은 당대의 호걸로 이름을 떨치며 원소와 명성을 두고 대립하는 관계였는데 하옹이 원소를 매우 높게 평가한 반면 원술은 사람됨에 꾸밈이 많다고 여겼기에 원한을 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후한서 원소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영웅기에 따르면 원소가 시어사를 지낼 당시 마침 앙숙이었던 원술이 상서가 되었으며 하도 갈궈대서 원소가 사직했다고 한다(...)[4] 뭔가 트집을 잡아 갈구기엔 딱 좋은 위치였던 것. ???:에라이 씨발 그냥 관두고 말지..

원소의 분주지우였던 허유를 음란하고 불순하며 탐욕스러운 자라며 깠다는 기록도 있다. 이때 도구홍은 원술이 지적한 허유의 단점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위난을 극복하기 위해 진흙탕을 걷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인물이라며 나름대로 호평해줬다.

보통 원술은 하면 무능하면서 가문의 힘으로만 출세했다는 인상이 강하고 실제로 원술의 소년기는 거칠고 난폭해 답이 없어 보였지만, 출사할 무렵부터 태도를 고쳤다고 하며 이후로는 오히려 호걸, 협객 같은 평가를 받으며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나름대로 갱생에 성공한 뒤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케이스에 가깝다. 아 물론 말년에는 막장.

물론 호협이란 단어의 뉘앙스를 생각했을때 소년기의 호전성이 아주 사라지진 않은 것으로 보이나 영제 치하의 후한사회는 관의 횡포가 워낙 막장스러웠기에 유협을 숭상하는 풍조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원술의 드센 기질도 상황에 따라서는 고평가받기 좋은 환경이었던 것.

몇 안되는 젊은시절의 기록이 죄다 원소와 안 좋게 엮이는 식인 것을 보면 당시 6년상 등으로 전국적으로 명성을 높이던 원소를 질시하는 한편 은근히 경쟁 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훗날 나타나는 원술 본인의 발언을 봤을때 적통인 자신이 노비 소생의 얼자에게 뒤쳐질 수 없다는 자존심 문제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원소가 6년상으로 명성을 떨쳤을 때 그 모친상[5] 의 대상이 원술의 친어머니였다는 기록을 보면 [6] 노비의 자식이 자기 어머니 이름 팔며 효자 행세하니 고깝다는 심리가 작용했을 가능성도 높다.


2. 영제 사후


이후 영제가 죽고 하진이 정권을 잡아 고자십상시와 대립할 무렵에는 호분중랑장으로 황실의 근위대를 지휘하고 있었으나 하진에게 포섭된다. 이보다 앞서 당시 중군교위였던 원소는 하진에게 접근해 건석과 대립을 부추기며 점차 발언력을 확대하고 있었는데, 선비들을 다루는데 도통한 원소와 의협을 숭상해 협명이 높은 원술이 하진에게 가세하니 하진은 뛰어난 인재들을 충분히 뽑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원소가 하진에게 접근한 시점에서 하진이 원술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은 다소 의외의 상황인데, 이전에도 나빴고 이후에도 나빴던 둘의 사이가 이때는 의외로 괜찮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 서원군의 수장으로 군권을 틀어쥐고 하진과 대립하던 건석이 실각한다면 이후 서원군의 해체에는 형식상 서원군의 2인자였던 원소의 역할이 중요해질 가능성이 높기에, 이에 따른 원소의 발언력 확대를 견제한 하진의 포석[7] 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원술의 가세로 하진의 입지가 강해지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원술의 존재가 이후 원소의 독주를 막는데 큰 효과를 보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십상시의 난 당시 하진의 피살 사실을 알자마자 하진의 부곡장인 오광과 함께 황궁을 공격하며 청쇄문에 불을 지르는 등 가장 먼저 무력행사에 나선 인물이기도 하다. 이 외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당시 장양 등 십상시들은 황궁을 수비하며 시간을 끄는 한편 군권 장악을 위해 하남윤과 사례교위 등의 요직을 자파 인물들로 교체한 상황이었다.

원소가 선수를 쳐 이들을 제거하고 주요 기관을 장악한 뒤 황궁에 돌입하면서 십상시 측의 패배를 결정지었기 때문에 원술의 판단은 원소에게 이로움을 줬을 뿐 별로 괜찮은 선택이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결국 원소도 남 좋은 일만 시켜줬던 것이 이때 어찌어찌 하다보니 운 좋게도(...) 황제의 신변을 확보한 동탁이 허장성세를 통해 자신의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자 하진 사후 어디에 줄을 서야 될지 감을 못 잡고 있던 낙양의 군사들은 죄다 동탁에게 붙어버렸고, 정원마저 제거하면서 견제세력이 없어진 동탁이 정권을 잡게 된다.



3. 남양 점거


동탁이 정권을 장악한 직후 원소와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다 결국 원소가 실각해 하북으로 달아난 것과 대조적으로 동탁은 원술을 고위 장군직인 후장군으로 삼으려 하는 등 처음부터 상당히 호의적인 제스쳐로 접근했다.

호분중랑장 시절 황궁을 직접 불태운 원술은 결과적으로 당시 뜸들이고 있던 동탁이 진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동탁 자신이 원소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한 반면 원술은 애당초 권력다툼에서 원소한테 밀려난 쪽에 가까워서(...)이라 동탁으로서는 포섭 가치가 상당했다. 하지만 원술은 동탁의 영입 제의도 무시하고 남양으로 달아난다.[8]

이후 원소를 중심으로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이에 가세하는데, 당시 원술의 처지가 상당히 안습한 것이 동탁이 정권을 잡은 직후 원소와 대립해 원소를 쫓아내고는 다시 발해태수로 삼아 회유한 것과 달리 원술은 처음엔 쫓겨나지도 않고 후장군으로 임명되는 등 우대받다가 원소가 발해태수로 임명될 무렵에서야 남양으로 달아난 상황이었기에 남양에서 아무런 공권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비슷한 케이스로 조조가 있었는데 [9] 조조와 차이점이 있었다면 고향으로 달아나 사재를 털어 거병한 조조와 달리 원술은 남양으로 달아났다는 것인데, 원술이 남양으로 간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신의 한 수가 된다.

당시 장사태수 손견은 동탁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임지를 벗어나 낙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원한관계와 조인의 부추김에 휘둘려 형주자사 왕예를 죽인다. 손견의 왕예 살해는 하극상에 가까웠을 뿐 아니라 가뜩이나 왕예는 반동탁연합에 참가하고 있던 관리였기 때문에 손견은 중앙에 거스르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관리들은 물론 중앙에 반기를 든 관리들에게서도 고립되는 형세에 놓일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임지인 장사군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손견은 자력으로 보급을 해결할 능력이 전무했기에 군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자멸하거나 도적떼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10]

이때 원술은 손견을 중랑장으로 삼으며 접선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데[11], 원술의 제의를 받아들인 손견은 곧 군량 조달에 비협조적이라는 트집을 잡아 남양태수 장자를 죽였고[12] 노양에서 원술을 만나 그의 휘하로 귀부하면서 원술이 남양을 실질적으로 점거하게 한다. 이렇게 손견이 막나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동탁이 반군의 맹주가 된 원소에게 본보기를 보인답시고 낙양의 원씨 일족을 몰살시킨 것이 오히려 동정론이 지배적인 추세가 되면서 각 지방의 이탈이 더욱 가속화되었고, 원씨의 복수를 명분삼아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매우 흔했기 때문.

원술은 원씨의 종가[13]이자 대표였기에 손견의 불법행위에 대한 반대 여론을 간단히 무마시킬 수 있었으며, 임지를 버리고 고립된 이상 유력 패권주자인 원술의 형주 장악에 기여하고 그에게 후원을 받는 편이 본인에게도 안전하다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왕예의 후임으로 파견된 형주자사 유표는 원술을 남양태수로 인정하도록 상주하는 표문을 올리며 원술의 남양 지배를 묵인했고[14], 본격적인 군벌의 반열에 들어간 원술은 손견을 예주자사로 삼으며 동탁과 맞서도록 한다.

당시 연합군의 맹주였던 원소는 동탁이 세운 유협을 괴뢰정부로 규정했으므로 대신 유우를 옹립함으로서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고자 했으나, 원술은 동탁은 역적이지만 유협은 정통 황제라는 논리를 내세워 반대하고 원소와 대립했다. 여론은 대체로 원소를 지지하였으므로 유우의 옹립이 결정되었으나, 이를 유우 본인이 완강히 거절한 것도 모자라 흉노땅으로 들어가 버리자 원소는 대단히 난감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원술은 계속 서진을 주장했고 손견을 선봉으로 내세워 마침내는 동탁을 격파하고 낙양을 수복하기에 이르러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기록을 보면 동탁 진영에서도 반동탁 연합군의 맹주가 원소, 원술 중 누구인지 헷갈렸는지 아예 원씨로 묶어서 칭하고 있다.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된 오서와 산양공재기 등에 따르면 손견은 동탁을 무찌르고 낙양을 수복한 뒤 동탁이 불을 지른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옥새를 발견했고. 이에 원술은 손견의 아내를 인질로 삼아서 옥새를 강탈해갔다고 하나 전부 기록의 출처가 모두 오나라의 책들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이 있어 주석을 달았던 배송지는 자신들의 시조인 손견을 미화하기 위해 날조한 기사로 여겼다.

원술의 남양 통치는 다스림에 있어 세금을 마음대로 걷었고 사치스러워 백만 호가 넘던 남양군이 순식간에(...) 피폐해졌다고 기록되지만, 이 경우는 신세력인 원술이 동탁군과 싸우기 위해 짧은 기간에 최대한으로 남양을 쥐어짰던 반증이라고 보는 편에 가까워 보인다. 상식적으로 손견이 동탁군과 싸울 수 있었던 군사나 무기, 군량등의 전비가 어디서 나왔을까? [15]

하지만 남양에서의 지나친 수탈과 학정으로 반대세력도 만만찮게 생겨났는데, 특히 단양태수 주흔은 원술과 격렬히 대립했으며 원소 또한 주흔을 포섭함과 동시에 주흔의 동생인 주앙, 주우등을 관리로 임명하며 원술을 견제했다. 원소에게서 예주자사가 된 주앙은 낙양에 있던 손견의 배후를 공격해 사예지역과 남양을 잇는 중간거점인 양성을 빼앗았고, 손견과 원술은 여러차례 반격했지만 이를 만회하는 데 실패하고 주씨 삼형제와 수년간 난전을 벌이게 됐다. 원소 또한 유우 옹립에 실패함으로서 결국 반동탁 연합군은 흐지부지 해산된다.

4. 원소와의 대립


원술은 평소부터 천출인 원소가 두각을 나타내고 명성이나 지명도가 자신보다 앞서는 것을 고깝게 보고 있었기에 원소를 자주 비방하고 헐뜯었는데[16] 이 무렵에는 더욱 사이가 험악해져 원소의 태생이 본래 원씨가 아니며 출생이 불분명한 사생아라는 비방을 하는 지경이었고 이는 당시 동탁에게 원씨 일족이 몰살당하자 가문의 복수를 명분삼으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왔던 원소에게는 치명적인 공격이었고[17] 원소도 여기에 대노하면서 마침내 원소와 원술은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사이가 되었다.

원술은 원소, 유우와 사이가 나쁘던 공손찬 등과 연합해 원소를 견제했고, 원소 역시 형주자사 왕예의 후임이 된 유표와 연합해 원술을 견제했다. 좋게 봐준다면 진나라나 몽골이 했던 원교근공책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진수는 이를 두고 형제간에 화합치 못하고 먼 사람들과 어울렸다며 비판했다.

원소와 연합한 형주목 유표는 본래 남양을 점거하고 버티고 있던 원술이 두려워 자사의 치소가 있던 무릉으로는 감히 내려가지도 못하고 양양에 머무르며 원술을 남양태수로 인정하는 등 저자세로 일관하고 있었으나, 채씨, 괴씨 등 양양의 유력 호족들을 포섭하고 이들의 지원에 힘입어 방해가 되는 호족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무리를 겸병하면서 세력권을 확보해 원술에게 반기를 든 상태였다. 원술은 북쪽의 예주에서는 주씨 형제의 견제로 전선을 유지하기 어려워졌으며, 남쪽의 형주에서는 유표의 저항에 부딫히며 북방의 문제를 타개하기는 커녕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고, 그 배후에는 원소가 있었다.

원술은 양성 일대에서 주씨 형제와 치받고 있던 손견을 불러들여 유표를 치게 했고, 손견은 서전을 유리하게 이끌며 양양에서 농성하는 유표를 포위한다. 하지만 손견은 유표가 별동대[18]를 성 밖으로 내보내 기각지세를 시도하는 것을 저지하려다 너무 깊이 추격한 끝에 화살을 맞고 전사한다.

원정군의 수장이었던 손견이 끔살당하자 전세는 뒤집혔고, 원술의 침입을 격퇴한 유표는 한수 이남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굳히게 된다.


5. 패배와 재기


이 시점에서 원술의 상황은 다소 암울했다. 사예방면 진출이 좌절된데다 군비조달을 위한 지나친 수탈과 학정으로 민심을 잃어 예주에서는 주씨 형제라는 적이 생겼으며, 형주 또한 유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초기에는 손견의 활약에 힘입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끄는 듯 했으나 손견이 전사하면서 전황 자체가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한편 북쪽의 공손찬 또한 원소에게 연이어 발리면서 원소의 영향력이 미친듯이 확대되고 있었다. 원술은 서주목 도겸을 끌어들여 발간(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하게 해 원소를 압박하게 하면서 공손찬을 지원했고 공손찬 또한 이에 호응해 유비를 고당에 선경을 평원에 주둔시키며 원소를 압박했으나 원소는 조조와 함께 이들을 모조리 발라버린다. 원술은 다시 방향을 돌려 흑산의 장연, 어부라와 연합하고[19] 원소계 군벌이었던 조조의 근거지인 진류를 공격했다.

그동안 군사적으로는 주로 손견에게 의존해 오던 원술이 처음으로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친 것이고, 그것도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형주 방면을 정리하자마자 감행하는 매우 모험적인 행동이었는데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원소계 군벌인 조조가 연주를 기반으로 황하 이남에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원술과 공손찬에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연주에서 조조의 기반이 아직 취약한 틈을 타 조조를 공략하는 것이 유리했다. 또한 원소에게 밀리고 있던 공손찬을 지원하고 조조를 몰아낸다면 흑산, 흉노와 힘을 합치고 공손찬과 함께 남북으로 원소를 압박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해 흔들리고 있는 자신의 세력기반을 재정돈하고 연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의 핵심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긴다는 측면도 있다. 이미 원술은 무분별한 수탈로 민심을 잃어 예주에서는 주씨 형제라는 적이 생겼고, 손견이 죽은 뒤로 남쪽에서 유표의 압박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상당히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나 원술의 영향력은 형&예주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양주까지 미치고 있었다. 연주를 장악한 뒤 이를 기반으로 내부를 공고히 정돈한다면 사실상 황하 이남 전역을 아우를 수 있었다.

이에 더해 원소가 마음대로 임명한 짭퉁(...) 연주자사 조조에 의해 임지에 부임하지도 못하고 쫓겨난 정식 연주자사 금상이 원술에게 망명했던 사건은 원술에게 매우 중요한 개입 명분을 제공했다.

193년 초, 원대한 전략을 구상한 원술은 마침내 진류로 북진해 올라갔다. 조조가 도겸과 싸우며 견성에 주둔하는 틈을 타 배후를 치는 등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했던 듯 하지만 결과적으론 조조-원소 연합군에게 완전히 참패하고 만다(...).

이후 이어지는 조조의 추격전에서 탈탈 털리고 타격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 아예 남양을 버리고 양주 일대로 옮겨 도망갔다.[20] 도망가면서 계속해서 털려버렸다.

양주로 도망가서는 양주자사 진우를 내쫒는다. 원래 양주자사는 진온이었는데 그는 조조가 형양에서 동탁의 서영을 맞이하여 동시에 병사를 물리고 나서 양주병을 흡수하기 위해 내려오자 4천 병력을 내주며 지원하기도 하였다. 진온이 병으로 죽고 양주 일대에 정치적 공백이 생기자 원술은 진온의 동생 진우를 보내 양주자사로 삼았다. 원술이 패퇴하자 진우는 과거 신세졌던 원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나 원술이 공격하자 하비로 달아났다.[21] 그 뒤 일대의 유력 군벌인 장훈, 교유 등을 흡수해 회남 일대를 장악했다.

당시 이각, 곽사가 정권을 잡았는데 이들은 원술과 손잡을 생각을 하여 태부 마일제를 보내 좌장군과 양적후의 벼슬을 내리려 하였다.[22] 하지만 원술은 마일제를 억류한 뒤 부절을 빼앗고 자신의 부하들을 천거하라고 협박했다.[23] 마일제는 유명한 학자인 마융의 후손으로 덕망이 높은 대신이었는데, 원술에게 수치를 겪는 것에 걱정하고 성내다가 얼마 안 있어 죽는다.

194년, 손책을 보내 강동을 평정했으며 그동안 골머리를 썩였던 주씨 삼형제도 이 무렵 모두 절딴냈다. 원술은 다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해 재기에 성공하나 싶었지만...슬슬 맛탱이가 가기 시작한다. 서주백(伯)을 자칭하며 동맹이었던 서주의 도겸에게도 찝적대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서주의 여론을 친원소 라인으로 돌아서게 만드는데 일조했고, 유비가 서주를 물려받자 이를 공격했지만 결국 서주를 차지하는데도 실패한다.[24]

원술은 패국을 탐냈는데 패국의 상은[25] 진규로 그는 원술과 어린 시절부터 친했다. 원술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에게 붙으라고 권했으나 진규는 이를 거절하였다.

원술이 유비와 싸우는 틈을 타 여포가 서주를 차지하자 원술은 여포와 연합하여 조조-원소 연합에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이 외교전은 여포의 변덕이 워낙 극심해 뜻대로 되지 않았다.

6. 말년꿀물황제

195년, 헌제 유협이 장안을 탈출하여 이각, 곽사의 무리에게 핍박받자 이로서 황실이 완전히 몰락했다고 판단해 원씨 적통의 위광을 믿고 참칭할 마음을 먹었으나 부하들이 만류하자 그만두었다. 하지만 197년, 예언서의 내용을 이유로 결국 천자를 자칭했다. 국호는 중(仲)중국?[26] 원술 일생일대, 최대의 병크. 당연히 부하들은 반대하였으나 원술은 우격다짐으로 강행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천자를 자칭할 명분과 근거가 부족하였고 원술이 근거로 든 것도 시중에 나도는 검증되지 않은 예언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헌제는 조조에게 옹립됨으로써 오히려 (표면상) 굳건해졌고, 결과적으로 황실의 위세는 더 높아졌다. 조조는 말할 것도 없이 원소조차 헌제가 내린 대장군의 직위를 받아들임으로써 그가 헌제의 권위를 인정함을 보여주었다. 원소는 그 때까지 헌제를 괴뢰로 규정해 부정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이것으로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또한 원술의 휘하 세력인 손책 역시 완전히 독립하여 떨어져 나갔는데 이것으로 원술은 사방에 적을 두게 되었다.

다만 이에 대해선 원술도 협천자를 시도했다는 주장이 있다. 조진전의 주석에 따르면 조조가 협천자를 위해 낙양으로 향할 무렵 원술과 치열하게 싸웠고 이때 조진의 부친인 진소가 조조 대신 죽었다고 한다. 무제기에서도 또한 낙양으로 향하면서 예주에서 원술이 임명한 진국상 원사를 항복시켰다는 기록이 있기에 상당한 충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때 여남 일대의 황건적 잔당인 하의, 유벽, 황소, 하만 등을 격파했는데 이들은 원술과 연합하고 있었고, 특히 유벽은 이후 관도전에서도 원소에게 호응해 후방을 공략하는 등 원가와 관계가 밀접했다. 이에 더해 유협의 측근들도 원술과 상당부분 연계되어 있었다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조홍전에 따르면 거기장군 동승은 원술과 연합해 조조의 협천자를 저지했으며, 조조가 황실을 장악하면서 쫓겨난 한섬, 양봉은 원술에게 의탁했다. 양표 또한 원술의 인척이며 조조가 훗날 양표를 실각시키는 표면적인 이유도 원술과 내통했다는 죄목이었다. 게다가 원술은 참칭 이전까지는 분명 유협의 정통성을 옹위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행동의 앞뒤가 맞는다. 또 이전까지 자신이 내세운 명분과 입지를 강화하고 대립세력인 원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명쾌한 방법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도 없다.

하지만 결국 조조에게 패하면서 황실은 조조가 장악하게 됐고, 앞서 언급된 마일제 능욕(...) 사건도 충분히 책잡힐 일인데 황실을 자신이 장악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적대세력인 조조가 장악하게 됐으니 어차피 그때까지 고수해 왔던 충신 이미지 무너지고 역적 되는 거 한순간인 상황이었다. 이왕 그렇게 될 거 아예 황제를 자칭하고 명문 원씨의 적통이라는 브랜드 네임으로 관직을 보증해 지지세력을 단결시키는 방책은 엄청난 모험수이긴 하지만 전혀 일리가 없는 행동이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원술이 칭제로 단결시켜려 했을 주요 지지세력중의 하나인 손책은 어이없게도 원술이 칭제하자마자 독립해버렸다.(...)[27]

원술은 서주를 장악하고 있었던 여포와 자식간의 정략결혼을 통한 동맹을 맺음으로써 우군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원술의 기본방침은 원소, 조조 연합의 견제였고 진궁장막의 휘하에 속하던 연주의 호족들 또한 이들을 긍정적으로 보아 혼담이 성사되는 듯 했으나 진규가 이를 방해했고, 여포 자신도 이전에 원술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을 원망했기 때문에[28] 기병대를 급파해서 이미 보냈던 딸을 되찾아오고 원술의 사신인 한윤은 조조에게로 보낸다. 조조는 한윤을 참수했고 완전히 체면을 구긴 원술은 마침내 군을 움직여 서주를 친다.

이때 여포는 두려움에 떨며 진규를 책망했지만 진규는 원술의 부장인 한섬, 양봉이 원술에게 붙은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전리품을 모두 그들에게 준다는 약속을 하면 넘어올 것이라고 여포를 설득했다. 이에 원술군과 여포군과 불과 100보 거리에 다다랐을 무렵 진규의 회유공작에 넘어가 있던 한섬과 양봉이 배신해 일제히 원술군을 공격했으므로 원술군은 철저히 괴멸당하고 망신만 당하게 된다. 한섬과 양봉이 배신하게 된 동기 또한 원술이 참칭한 것이 원인이었는데 이들은 헌제의 수레를 호송하는데 공을 세운 자들로 한실에 협력한 충신들인데 천자를 자칭한 원술에게 붙어 역적의 누명을 써서야 되겠는가라는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것이었다.

또한 황제를 자칭한 이후로 원술의 사치는 끊이지 않았다. 그는 후궁을 수백 명을 두었으며 황제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경비로 상당한 돈을 낭비하였다. 원술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원술의 후궁에 대한 일화를 소개한다. 풍씨는 원술의 후궁 중에서도 미모가 뛰어나 원술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이때 다른 후궁들이 이를 시기하여 풍씨보고 지조와 절개가 있음을 보이면 원술의 총애를 더 받을 수 있으니 원술앞에서 항상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라라고 권유하니 풍씨는 원술만 만나면 눈물을 흘렸고 원술은 이를 가련히 여겼다. 그 뒤 얼마 안있어 후궁들이 풍씨를 목졸라 죽이고 기둥 위에 목매달아 놓았더니 원술은 그녀가 항상 슬퍼하는 모습을 보아온 지라 슬픔에 못이겨 자결한 것으로 여겼다고 하였다.

원술은 세력이 끊임없이 약해지자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진(陳)국을 쳐서 점령하고 진왕 유총을 죽였지만, 그 직후 조조의 공격을 받아 본진인 수춘이 함락되며 몰락하게 된다.(...) 이 무렵 어떻게 꼬드겼는지 다시 여포와 연합해서 다시 조조를 견제하는 등 발악을 하는데 여포나 원술이나 서로 싸우는 탓에[29] 이미 힘이 다 빠진 상태라서 강해진 조조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원술은 직접 여포를 구원하러 출병했지만 오히려 조조에게 탈탈 털려서 역러시나 겨우겨우 막아내며 다시는 구원군을 못 보내는 수준이었고 여포도 농성하다가 붙잡혀 처형당한다.

참고로 이때 원술이 직접 나가면서 이끈 병력이 기병 1천 기 정도였다고 하는데 아무리 급파된 병력이라곤 해도 여포랑 싸울때 수만 명씩 동원하던 것과 비교하면 참 안습하기 짝이 없다. 황제가 '직접' 친정을 하는데 병력이 고작 기병 천여 명이었다면 그 세력이 전성기 때에 비해 얼마나 몰락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일종의 자포자기였는지 그 사치와 무도함이 극에 달하여 그가 다스리던 강회(양자강, 회남 일대)에서는 굶주린 백성들끼리 서로 잡아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원술의 부하로 있던 패국상(相=태수) 서소라는 사람은 굶주리던 백성들을 보다못해 원술이 군량미로 쓰려고 비축해둔 쌀 10만 섬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했다. 당연히 원술은 격노하여 군사들을 시켜 서소를 붙잡고 참수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때 서소는 원술에게 "한 사람의 명을 바쳐 수많은 백성을 도탄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라고 원술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에 원술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대는 어찌 그런 아름다운 이름을 혼자서만 남기려 하는가, 나와는 함께 누릴 수 없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이런 일화를 보더라도 원술 스스로도 실패를 어느정도 예견하고 있었던 듯 하다.

어쨌든 원술의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대부분 고향을 버리고 도망갔고,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세금도 걷지 못해 결국 관료와 병사들도 먹여 살릴 수 없게 됐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군사들이 차츰차츰 달아나니 그토록 의지하던 군사력까지 믿을 수 없게 된 상황(...)

궁여지책으로 궁을 불사른 뒤 남은 무리를 이끌고 휘하세력인 진란, 뇌박 등에게 의지하려고 했으나 진란 등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주군이랍시고 뜬금없이 와서 자기들이 힘들게 모은 쌀을 축내는 격이니 달가울 리가 없었다. 또한 원술을 받아들였다간 조조, 손책 등 주변 제후의 미움을 살 것이 분명하므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원술이 강했을 때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힘도 다 빠져서 만만하기도 하겠다. 병력을 동원해 성을 지키며 원술에게 저항하자 분노한 원술은 성 밖에서 진을 치고 주둔했지만 군량이 없어서 성을 공략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3일만에 그냥 돌아가야 했다(...)

사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원술의 부하인 진란과 뇌박이 원술을 거부했다는 것은 다른 부하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원술이 군주로서의 권위를 완전히 상실하여 세력이 공중분해되는 것을 뜻한다. 이 이후로 원술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한다. [30]

갈 곳이 없어진 원술은 결국 자존심 다 버리고 원소에게 황위를 바치며 투항하기로 마음먹고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한나라가 천하를 잃은지 오래되어, 천자는 손에 끌려 다니며, 정사(政事)는 권신들의 집안에 있고, 호걸 영웅들은 각축하며 강토를 나눠 찢으니, 이것은 주나라 말기에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세력을 나눴던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끝내는 강한 자가 겸병하게 될 뿐입니다. 더하여 원씨는 천명에 의해 왕이 된다는 상서로운 조짐이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군(=원소)께서는 (하북)4주를 옹유하며 백성들의 호구는 백만이요, 강한 것으로는 이보다 더 큰 것으로는 비할 바가 없으며, 덕을 논하자면 이보다 더 높은 것으로는 비할 바가 없습니다. 조조는 쇠퇴하고 미약한 한실을 붙잡고 돕고 있다지만, 어찌 끊어진 천명을 잇고 이미 멸망한 것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원소는 공식적으로는 답을 하지 않았지만 내심 이말이 옳다고 여겼다고 전해지고 또한 이때 원소 끗발이 장난이 아니었던 터라[31] 이에 혹해서 한번 여론을 떠 보기도 했다. 결과는 영 시원찮아 애꿎은 신하만 척살(...)[32] 천하가 원씨의 것이 될 것이라는 설레발만 빼면 한나라의 운명을 정확히 꿰뚫고 있긴 했다.

원소의 태도는 여전히 한실의 충신을 자처하고 원술을 역적으로 규탄하는 등 다소 모호한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원술의 공작이 성과가 있긴 있었는지 청주를 다스리던 원담은 사람을 보내 원술을 맞이하려고 했다.

원술은 청주로 향하지만 조조와 유비의 방해로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서(吳書)에서는 원술이 수춘을 빠져나와 강정에 머물 적에 주방에는 기껏 보리 부스러기가 30곡(약 10말) 정도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더위가 극심하여 꿀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emiya mulzomdao 꿀이 없자 난간에 걸터 앉아 한참 동안이나 탄식하더니 '이 원술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하고 피를 한 말이나 토해내고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때 한 모금의 꿀물만 있었더라도 천하의 판세는 크게 뒤바뀌었을 것이다.

7. 원술 사후

원술이 죽자 원윤원요 등 그의 가솔들은 과거 원술이 임명해 놓은 여강태수 유훈에게 의지했는데[33], 원술의 무리를 받아들인게 화근이 되어 유훈도 결국 손책에게 망한다.(...) 원술의 무리를 받아들인 유훈은 군량 부족으로 예장태수 화흠에게 군량을 요청했고 화흠은 이를 위해 자신의 관할 영지의 일족들의 우두머리들에게 3만 섬을 얻어낸다.

유훈은 이 곡식을 거두러 자신이 군을 이끌고 떠났는데 이때 마침 손책이 황조와 싸우기 위해 군을 거느리고 인근에 있었다. 손책은 유훈이 환성을 비웠다는 소식을 듣자 주유와 함께 2만 명을 직접 거느리고 환성을 쳐서 점령한 뒤 유훈, 원술의 처자식을 모두 사로잡는다. 한편 그의 종제 원윤과 그의 아들 원요도 손책에게 끌려갔다. 이 후 원윤의 행방은 묘연하지만 원요는 낭중령이 되고 원요의 여동생이자 원술의 딸은 손권의 후궁에 들어가 원부인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원요의 딸이자 원술의 손녀는 손권의 오남 손분의 아내가 된다. 한 때 손견을 부하로 삼았던 원술은 자손들이 손견의 자손들의 부하와 첩이 되었다. 지하에 든 원술로서는 굴욕적인 자손들의 몰락.

그 뒤 그는 사로잡은 무리들을 모두 동쪽의 오군으로 보내고 부하였던 이술을 여강태수로 삼아 3천 명과 함께 주둔케 한 뒤 자신은 전군을 이끌고 유훈에게로 가서 그를 격파한다. 유훈은 결국 모든 것을 손책에게 빼앗긴 뒤 조조에게로 달아난다.

8. 기타

나름대로 머리는 굴리는 것 같지만 하는 결과마다 소탐대실(...)이다. 동탁은 헛소리나마 개혁자라는 소리도 나오는데 원술은 그딴 것도 없다. 그나마 쥐꼬리만큼 얻은 것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강동맹호라 불릴 정도로 용맹무쌍했던 명장 손견이 혼자 다 만들어 준것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손견이 원술의 입에 밥숟가락으로 떠먹여준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한마디로 손견이 없었으면 완전히 개털인 위인에 불과한 게 원술이다. 짧게 말하자면 아무 생각없이 동탁 조조 원소 여포 유비 손견 등 삼국지의 메인들만 건드리다 털려버리는 멍청한 놈.

연의에서도 정사의 최후를 그대로 옮겨왔는데, 각색본들에서는 한 술 씩 더 뜨는 것이 특징.[34][35]

정사 삼국지 오서 비빈전에 따르면 딸이 손권에게 시집가서 원부인으로 불리고 있다.(반부인전에 등장) 정실은 아니지만 아무튼 손권의 장인인 셈.

원소와는 호적상의 사촌관계로 사실은 배다른 형제라는 설이 유력한데, 노비의 자식인 원소가 두각을 드러내 정실의 자식인 자신을 제치고 주위의 신망을 얻자, 이로 인한 컴플렉스로 비뚤어졌던 것으로 추측해 봄직도 하다.[36]

보통 그 안습 행보가 병크 취급을 받는 수준을 넘어 희화화되기까지 하지만 사실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원씨 가문 안에서는 원소 다음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상당한 엘리트였다. 삼국지 순유전에 주석으로 남아있는 장번의 '한기'(현재는 유실)부분을 살펴보면 젊은 시절의 원술은 당대의 호걸(!!!)로 이름을 떨쳤으며 원소와 나란히 명망을 다투었다고 한다.

물론 이 주석의 전모는 당대의 명사 하옹[37]이 원소를 굉장히 높게 평가한 반면 원술은 높게 평가하지 않아서 원술의 원한을 샀다는 내용인데다 원소와 나란히 다투었다곤 해도 실제로는 지명도 차이가 상당했기에 격 자체는 훨씬 떨어지게 취급되었던 듯 하다.

후한서 하진전에도 왠지 원소에 종속 되는 듯한 인상이기는 하지만, 하진이 의협으로 유명한 원술을 기용해서 많은 호걸들을 얻을 수 있었다는 구절이 있다. 훗날 군웅할거가 시작될 무렵 원술의 정치적인 입지나 발언력을 생각해본다면 원술이 그냥 그 위치까지 올라간 것은 아닌 듯하다.

물론 천출에다 양자라는 이중의 신분제약을 뛰어넘은 원소와 비교하면 가문의 후광을 뒤집어쓴 도련님 수준이고 실제로 그런 식으로 평가되었던 듯 하긴 한데[38]...그래도 원술 측 진영 중에는 원씨 가문 출신으로 보이는 인물이 여럿 보이고 어느 정도 활약을 보이는 반면, 원소 측 진영에는 원소의 직계자손 외에는 원씨가문 출신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또한 평소 원씨 문중과 원소가 대립했던 것으로 봐서는 원씨 문중에서는 대체로 원술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수는 동이원유전의 말미에서 "원술은 사치음란하며 방자하여 영광을 끝까지 누릴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지만 배송지는 여기에 주석을 달아 원술의 거대한 악행을 단지 '사치스럽고 음란하다.' 정도로 간단히 평가하는건 말이 안된다고 가열차게 깠다. 안습. 그런데 그 배송지는 손견에 대해서는 반대로 '한 마지막 충신이자 최고의 용맹을 지닌 장수로 충무라는 시호가 잘어울리는 최고의 충의지사'라고 가열차게 빨았다.(...) 동업자인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리 극과 극을 달리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사실 원술의 평가 이후에 원소의 평가가 이어지는데, 원술의 실책에 대해선 간단하게 평한 반면 원소는 칼같이 재단하고 물어뜯으면서 거의 거품물고 까는(...) 수준이라 다른 기록 제껴 놓고 진수의 평만 읽어보면 원술보다 원소가 더 막장같이 보이기에 좀 형평성 문제가 있긴 하다. 진수가 원소까

훈훈한 일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어린 육적이 부모에게 주려고 을 품에 숨겨서 가져가는 것을 보고 귤을 더 퍼주었다는 육적회귤의 고사가 있다. 근데 이건 주로 육적의 효심을 강조하는 쪽이 많고 원술의 훈훈함은 별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사실 연도나 시기를 보면 육적회귤 일화 직후에 육적의 아버지인 육강을 공격해서 죽여버렸으니 원술이 좋게 평가받기는 어렵다. 잘해야 가식적이라는 말만 들을듯. 이후 육적은 오나라의 참모가 되고, 제갈량이 오나라에 왔을 때 설전배틀에서 무참히 깨지는 역할(...)로 재등장.

여담으로, 유우가 죽을 당시 헌제의 명을 받아 그에게 가던 아들 유화를 붙잡아 억류한 적이 있는데, 이게 오히려 유화에게 득이 되어서 유우가 일가친척과 같이 죽을 때 혼자 살아남았다(..)

9.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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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농경민족인 중국의 특성상 기마 상태에서의 단체행동이나 마상 궁술 등을 익히는 모의전투훈련의 성격도 있었으나 유목국가에서나 가능할 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성해서 하는 일이니만큼 기본적으론 매우 사치스러운 유흥으로 취급되었다.
  • [2] 사실 원술과 거의 비슷한 소년기를 보낸 케이스가 하나 있긴 하다. 바로 조조(...)
  • [3] 본래 청렴하고 효성스러운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인데, 추천제였기에 권문 자제들의 일반적인 출세 루트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예 대놓고 방탕했다고 기록된 조조가 20세가 되자마자 효렴에 천거된 것이 대표적인 예인데, 효렴 동기들의 나이는 대부분 조조의 아버지뻘이었다고 하며 원술 또한 조조와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 [4] 당시 상서대는 6조로 나뉘어 있었고 원술이 어사대 소속의 원소와 관련되었다면 상시조 혹은 민조의 담당자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우 원소가 사무를 처리하려면 원술의 결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 [5] 천첩인 원소의 어머니는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되지 않았기에 모친상의 대상은 적모였다.
  • [6] 황보밀 일사전
  • [7] 근위대를 장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협명이 높고 상당한 추종자들을 거느려 나름의 자체적인 입지가 있었으며, 원소와는 최악의 관계였다.
  • [8] 동탁의 포악함을 알았기에 혹은 동탁과 엮이면서 화가 닥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동탁의 권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직감한 것으로 보인다.
  • [9] 이 무렵까지의 행적에 한하면 조조와 원술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 [10] 장사군이라는 임지를 가지고 있었으니 손견이 두려울 게 없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손견이 주둔하던 노양과 장사군의 거리상 직접적인 보급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으며, 설령 가능했더라도 장사군의 입장에서는 고작 1년 남짓 장사군을 다스린 외지인인 손견에게 협력할 의리도 없었고 애초에 지방의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중앙을 치러 나간 시점에서 이미 임무를 방치하고 임지를 벗어난 것이니 태수직이 소멸됨은 물론이며 정국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역모죄로까지 엮일 수 있는 상황이라 굳이 손견에게 협조할 명분도 없었다.
  • [11] 헌제춘추
  • [12] 원술에게 임명을 받은 직후 장자를 죽였는데, 왕예의 살해는 우발적으로 휘말린 쪽에 가깝지만, 이 시점에선 대놓고 막나가는 지경이라 원술의 사주에 가깝다.
  • [13] 원봉의 장남은 원기였으나 이때 동탁에게 살해되었고, 차남 원소는 얼자라는 태생 때문인지 원성의 후사로 입적되면서 원봉의 가계에선 배제되었다. 집안의 큰어른이었던 원외도 동탁에게 죽었기에, 원씨의 대표는 원술이 되는 것이 맞다.
  • [14] 후한서 원술전
  • [15] 다만 원술도 막강한 손견에게 퍼다주는 게 조금 꺼림칙했는지 참소하는 말을 듣고 잠시 군량 공급을 중지한 바 있는데, 이때 손견이 부리나케 달려와 설득한 덕분에 별탈없이 해결된 바 있다. 이것이 연의에서는 손견이 동탁에게 패배한 원인인 것으로 과장되어 묘사된다.
  • [16] 심심하면 천출인 원소를 집안의 노비(家奴)라고 칭했다.
  • [17] 원소는 원씨 내에서의 입지는 낮았으나 6년상이나 불출사, 원씨일가 멸족 사건 등, 원씨 가문의 일원이라는 점을 대외에 어필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혹은 악용)하며 이익을 얻은 사례가 꽤 있다. 원술의 주장에 따르면 원소는 사실은 노비의 자식으로 아비가 불분명한 사생아였고 원씨 가문에서 자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원씨의 일원인 척 약을 팔았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원소는 천하의 둘도 없는 개쌍놈, 패륜아이며 그때까지의 모든 행동이 위선이었음을 강제 커밍아웃(...) 당하는 셈이고, 설령 사생아 설이 사실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때까지 원소의 행적에 정말 진정성이 있었는지를 재고하는 음모론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원소의 태생에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의혹이 증폭되었는데, 원씨 내부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도 아니라 사도 원봉의 적자인 원술이 사생아라고 발표해버렸기에 원소 입장에서는 치명타가 될 만도 하다.
  • [18] 보통 황조로 알려져 있고 이 설이 우세하나 기록에 따라 여공이라는 이설도 있다.
  • [19] 당시 장연, 어부라 모두 원술과 마찬가지로 원소와 대립하고 있었다.
  • [20] 버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원술의 전략은 좋게 보면 지금까지의 열세를 만회해 자신이 황하이남 전역을 아우르고 서쪽으로는 장연과 어부라가, 북쪽으론 공손찬이, 서쪽으로는 도겸이 제각기 원소를 사방에서 완전히 포위하고 압박할 수 있게 되는 원대한 계획이라 볼 수도 있지만, 잘 안되면 오히려 쓸데없이 전선만 넓어져서 양&예주에서는 주씨 삼형제, 형주에서는 유표, 연주에서는 조조 식으로 원소계 군벌들에게 완전히 역포위, 역관광을 타는 형국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성이 컸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 [21] 진수가 작성한 원술전에서는 진온이 원술에게 죽음을 당한 것으로 나오나 왕찬이 작성한 영웅기에서는 위의 내용이 적혀있다. 배송지는 그의 저서에서 위의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왕찬이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기록의 신뢰성을 더 높이 산 것 같다.
  • [22] 특이하게도 동탁쪽 사람들은 원술에게 호의적이었다. 원소가 동탁의 제실(전 황제인 소제를 시해하고 진류왕 유협을 마음대로 옹립.)을 괴뢰정권으로 규정해 완전히 무시했던 반면 원술은 어쨌든 유협을 정통으로 인정했으므로 어느 정도의 타협이 가능하고 원술의 도움으로 관동지역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술은 관직만 받았을 뿐 오히려 사절로 파견된 태부 마일제를 억류하고 협박해 삥을 뜯었다.
  • [23] 군웅할거의 시대였다지만 실제적으로 영지를 다스리고 호족들을 포섭하는데 있어 관직은 매우 중요한 명분이었다. 하지만 당시 황제와 동탁 정권은 장안에 고립되어 있었고 정통성 측면에서도 최악이었기에 군벌들에게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시당하는 상황이었다. 각지의 군벌들은 일단 관직을 임명하고 (형식상으로는)조정에 보고한다는 형태를 취해서 관직을 남발했다.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관직임명이 일상적이었는데 원술이 마일제를 구금하고 부절을 빼앗는다면 태부의 권한으로 자기 부하들을 천거하게 하거나 태부의 부절을 이용해서 자신의 부하들을 삼공부의 연속으로 임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이로서 내적으로는 관직으로 부하들의 충성심을 얻을 수 있는데다 외적으로도 영직이나 가짜 칙령으로 임명한 관직이 아니라 태부가 임명한 정품이라 다른 세력들보다 강한 명분을 가질 수가 있게 된다. 이각, 곽사에게서 관직만 받고 쌩깠을 뿐만 아니라 마일제를 구금해서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켰으니 이 시점에서만 보면 이각, 곽사는 원술에게 능욕(...)당하고 원술은 실리를 챙긴 셈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결과적으론 나중에 조조가 유협을 옹립하고 제실의 권위가 강해지면서 원술에게 황실능욕의 죄목역관광이 덧붙여진다(...).
  • [24] 이것도 잘 생각해보면 보통 병크가 아닌 게, 원술은 원소를 견제하느라 공손찬과 연계하는 입장이었는데 유비는 공손찬 밑에 있던 사람이다. 물론 유비는 도겸에게 4천의 군사를 받으면서 공손찬 진영에서 도겸 진영으로 떨어져 나갔고, 이후에도 서주목 자리를 맡을 때 원소에게 허락을 구하고 공손찬은 쌩까는 등의 행보를 보였기에 원술-공손찬 라인과 아예 관계 정리를 했다고 볼 수도 있다.
  • [25] 본래 한나라는 군국제를 시행하여 유씨의 일족을 왕으로 봉해 봉토를 다스리게 하였다. 하지만 유씨 일족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 이후 군국제를 유명무실화 하기 위해 봉토의 실권을 정부에서 임명한 관리인 국상이 갖도록 하였다. 여기서 나오는 패국 역시 왕이 다스리는 봉토였는데 그 실권은 국상인 진규에게 있었다.
  • [26]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에서는 충(沖)으로 나오고 삼국지연의에서 성(成)으로 나온다.
  • [27] 연의에서는 이를 약간 비틀어서 손책이 전국옥새를 대가로 병사를 빌려 동오로 떠났다고 서술했다. 이 대목은 손책의 야망을 나타내는 동시에 원술이 황제를 자칭하여 몰락하게 된 계기를 나타내고 있다.
  • [28] 여포는 이각, 곽사한테 패하고 도망쳤을때 원술에게 의탁했었다. 이때 막 손견이 죽었을 때라 원술은 여포를 매우 후대했다. 하지만 여포가 노략질을 일삼으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자 통제불가라고 여겼는지 결국 내쫓아버렸다. 여포도 여포 나름대로 뒤끝이 쩔어서(...) 그대로 원술과 견원지간인 원소에게 가서 투항해버린다.
  • [29] 연의에서는 여포가 도와주겠다/도와달라며 사신을 보냈지만 원술이 "딸을 보내면 지원해줄게"라고 나와서 협상이 결렬됐다.
  • [30] 일반적으로 공성을 하는데 최소 서너 달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는 걸 감안하면 원술에게는 석달치 식량조차 없었다는 말이 된다.
  • [31] 공손찬의 세력을 흡수하여 하북을 막 평정했을 때이다.
  • [32] 주부(主簿) 경포(耿苞)로 하여금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칭제하라고 권하도록 자작극을 꾸몄는데, 막상 해보니 신하들이 흥분하며 경포를 죽이라고 하자 바로 죽이고는 입을 싹 닦았다.
  • [33] 오서 손책전에서는 양홍, 장훈이 원술의 가솔들을 이끌고 손책에게 귀의하려 했지만 유훈이 군을 이끌고 습격해 탈취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원술전에서는 원술이 아마 죽기 직전 유훈에게 의탁하게 한 것으로 나온다. 손책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붙인 강표전에서도 원윤, 환윤 등이 원술의 관을 둘러매고 자발적으로 유훈에게로 간 것으로 나온다. 또한 외교적인 정황으로 볼 때 원술과 절교했던 손책보다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유훈에게 가려 했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 오서는 오나라 측의 기록이므로 손책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 [34] 김홍신 평역판 연의에서는 이를 좀 더 극적으로 서술했다. 원술이 남의 집에 도착해서는 무턱대고 "짐에게 꿀물을 다오!!"라고 소리쳤는데 그 집주인이 썩소냉소를 지으며 "꿀물? 있다면 핏물밖에 없소."라고 응수하자 "저런 무례한 놈이-"라고 소리치자 피를 토하고 죽었다.
  • [35] 근데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핏물 일화의 주인공을 원소로 그리고 있다. 안습
  • [36] 실제로 원술은 원소를 '노비의 새끼'라고 공공연히 부르고 다녔고, 원소가 사실 원가의 씨가 아닌 사생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 [37] 무명 시절의 조조순욱의 재능을 간파것으로 유명하다.
  • [38] 도겸이 유비한테 서주목의 지위를 양도하려 할때 유비가 사양하며 명문으로 성망이 높은 원술에게 넘기라고 하자 공융은 원술을 일컬어 "무덤 속의 뼈다귀(사세삼공을 지낸 스켈레톤원술의 조상들)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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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0-25 13: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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