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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침공

last modified: 2014-11-19 16:25:48 by Contributors

Contents

1. 배경: 위기의 유고슬라비아
2. 개전, 그리고 항복
3. 평가


1. 배경: 위기의 유고슬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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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노르웨이 침공에서의 승리 후 독일군이 한창 승승장구하던 1941년, 발칸 반도 서부의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의 위협적인 기세를 불안스레 보고 있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1934년 국왕 알렉산다르 1세가 프랑스에서 암살당한 후, 어린 왕 페타르 2세의 삼촌뻘 되는 파블레 왕자가 국왕 대리로 섭정을 해오고 있었다.

파블레 왕자는 추축국(주로 독일군)의 위협적인 기세에 기가 눌렸고, 유고슬라비아는 자신의 주변 국가들(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추축국 가입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다. 이런 여러가지 요인에 의거해 파블레 왕자는 유고슬라비아의 안전은 추축국과의 제휴에서 나올 수 있다고 판단하였고, 1941년 3월 25일 비엔나에서 독일의 군사동맹에 가입한다는 문서에 서명을 하게된다.

하지만 문제는 유고슬라비아 본국 내에서 터져 나왔다. 당시 독일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던 유고슬라비아의 국민들은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고, 동맹 가입후 삼일도 지나지 않은 3월 27일, 페타르 2세는 연합군의 지원을 받은 친미, 친영파 장교단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여기까지 보면 페타르 2세가 개념찬 인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도 무능한 건 똑같았다. 무능이라기엔 그가 당시 18살(1923년생)에 불과했던 건 감안해야 한다. 무슨 이고깽물도 아니고 동맹의 배신으로 유고슬라비아는 히틀러의 코털을 뽑은 셈이되었고, 당연히 히틀러는 분노하여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당장 자신들을 도와야 할 영국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병력을 파견할 여건이 전혀 안되었고, 자국 내에 군사력으로는 모든 면에 포위된 상태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정부 인사들의 조언에 따라, 페타르 2세는 해외로 도주하여 망명정부를 세우고 연합국에 지원을 요청한다는 무책임한 결정을 내린다.

2. 개전, 그리고 항복

유고슬라비아의 지도를 보면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인접하고, 동쪽으로는 루마니아불가리아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여기에 서쪽으로는 아드리아해를 경계선으로 해서 이탈리아와 마주보고 있고, 남서쪽에는 알바니아가 있다. 그리고 남쪽 끝 일부만 그리스와 국경선을 마주댄다. 문제는 그리스 빼고 다 추축국이거나 추축국의 점령지라는 것이고, 그리스와 영국도 제 코가 석자라서 유고슬라비아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면초가.

설상가상으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는 얼마 안가서 시작될 예정인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독일 제12군이 배치된 상태며,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는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발진한 독일군 항공기가 한 시간이면 넉넉잡고 올 정도로 가깝다. 즉 만일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기로 결심한다면 유고슬라비아는 순식간에 사방에서 집중공격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결국 1941년 4월 6일,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우선 루프트바페가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기습적으로 폭격해서 잿더미로 만듬과 동시에 4,000명 이상의 시민을 사망하게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독일 제12군은 유고슬라비아 동부와 그리스 북부를 향해 침공을 개시했고, 독일군 뿐 아니라 헝가리군도 그 뒤를 따랐다. 여기에 이탈리아도 이탈리아 본토와 점령지인 알바니아에서 군대를 보내서 유고슬라비아를 협격했다.

이에 대응하는 유고슬라비아의 전략과 전술은 사실상 없었다. 애초에 국가방위계획이라는 것 자체가 형식상으로만 존재하는데다가, 이것도 실현성이 거의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유고슬라비아의 군대가 막강해서 임기응변적 대처가 가능한것도 아닌것이, 일단 숫자는 70만명이지만, 이중 50만명은 방금 징집돼서 훈련도 못마친 병력이며, 제대로 된 중장비도 없어서 대부분의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오로지 보병, 그것도 소총 숫자도 부족한 알보병에 불과했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기갑부대, 해군, 공군이 있었으나, 기갑부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개발된 전차로 해당 시점에서는 그냥 구식이며, 수량도 몇 대 안되는 르노 FT-17 전차가 전력의 전부였고, 해군은 구식 구축함 3척이 사실상의 전력 전부였다. 공군의 경우에는 앞서 언급한 파블레 왕자와의 우호친선을 위해 히틀러가 공급한 Bf109 전투기를 몇 대 보유하고 있었지만, 인도받은 지 얼마 안되는데다가 부품 및 소모품도 부족하고, 조종사의 실력도 절망적이어서 별 도움이 안되었다.

덤으로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민족이 혼합된 국가이며, 내부에 독립적인 국가가 다수 존재하는 연합국가다. 게다가 내부에서도 최대숫자를 자랑하는 세르비아가 자국과 자국민족만 우선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종교, 민족, 국가가 다른 크로아티아등은 크게 반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들 국가는 패권국인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 국가체제가 흔들리기만 하면 분리독립할 생각이었으므로 안그래도 다민족성을 가진 유고슬라비아 군대가 통일성을 가지고 운용된다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덕분에 개전하자마자 1주일도 되기 전에 유고슬라비아의 대도시 2개가 함락되고, 크로아티아등은 분리독립선언을 한 다음, 독일군 편에 가담하였다. 따라서 안그래도 방어전 준비가 안돼있던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총붕괴했고, 독일군은 하루에 150km 이상의 맹진격을 거듭했다. 이는 독일군 뿐 아니라 그동안 제대로 된 활약을 못했던 이탈리아군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니 이 시점에서 유고슬라비아는 그냥 무방비였다고 보면 된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개전 11일째인 1941년 4월 17일에 독일군에게 항복한다. 유고슬라비아 국왕인 페타르는 그리스로 이미 도망간 후였고, 항복을 거부한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들어가서 후에 파르티잔이 된다. 이들은 훗날 독일에게 매우 피곤한 존재가 되지만, 적어도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될 때까지는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처지라 유고슬라비아는 당장은 평안했다. 게다가 이렇게 유고슬라비아가 항복할 때까지 독일군이 입은 피해는 전사자가 고작 151명. 한마디로 말해 거의 무혈입성에 성공한 셈이라서 히틀러가 "그것 봐. 주먹을 쳐들기만 하면 단 한방에 끝난단 말이야..."란 말을 남길 정도로 성공적인 침공을 달성하였다.

유고슬라비아를 석권한 이후 전쟁은 동시에 진행된 그리스 침공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전개되었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의 유고슬라비아의 게릴라전에 대해서는 고슬라비아 파르티잔 게릴라전을 참고하길 바란다.

3. 평가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유고슬라비아 쪽을 칭찬해줄 것은 단 한가지로, 독일에 맞서서 싸울 의기를 보였다는 점 하나다. 그 외의 것은 차마 전쟁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추태와 붕괴 그 자체다.

물론 사실상 악의 축인 추축군에 대항해서 싸우겠다는 생각은 좋았지만, 싸울 준비도 안해놓고, 내부의 국가 사정도 조율하지 않고, 사방에 적이 둘러싸인 가운데 무모한 행동을 보인 것은 그냥 바보 취급당할 뿐이다.

게다가 폴란드 침공당시 폴란드군처럼 상황이 불리하더라도 한번이라도 용감하게 싸워보지도 않고 사실상 전투를 포기하여 국가가 썩은 나무가 넘어지듯이 일거에 망한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불리한 조건을 감안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만일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가열찬 파르티잔 게릴라전이 없었다면 그냥 바보나 멍청이란 것으로 평가가 종료되었을 정도로 유고슬라비아의 졸전은 문제가 많다.

설상가상으로 너무 빨리 국가가 붕괴되는 바람에 이웃 우방인 그리스의 방어전 준비에도 악영향을 주었다. 물론 그리스의 전략이 잘못돼서 여러 개의 방어선의 연결점을 오직 타국이라는 이유로 유고슬라비아 국경선에 연결하는 대실수를 하긴 했지만, 유고슬라비아가 토담 무너지듯이 붕괴되지만 않았어도 자신들의 실수를 교정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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