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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last modified: 2015-04-13 21:34:28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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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敎 (Confucianism, 공자주의[1]

Contents

1. 개요
2. 중국에서의 발전
2.1. 주나라의 종교
2.2. 춘추시대
2.3. 전국시대
2.4. 진한시대
2.5. 위진남북조 시대와 당송 시대
2.6. 명청시대
3. 한국에서의 발전
3.1. 조선 중기 이전
3.2. 조선 중기
3.3. 조선 후기
4. 일본에서의 유교
5. 베트남에서의 유교
6. 종교? 철학?
6.1. 천명(天命)
6.2. 제사(祭祀)
6.3. 인문화의 역사
7. 비판
8. 경전
9. 교육
10. 유명한 유학자
10.1. 중국
10.2. 한국
10.3. 일본
10.4. 베트남
11. 기타 관련 항목

1. 개요

춘추시대 태동한 제자백가의 한 분파이자, 공자가 이전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정리한 것을 공자학파의 사상가들이 계승하여 체계화한 중국 사상의 한 조류. 최초로 중국 전토를 '안정적으로' 지배한 한나라의 지배 이념으로 채택된 덕에 춘추시대부터 경쟁했던 쟁쟁한 사상들을 누르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이후 후학들의 많은 보완 혹은 변용을 거치기도 했으며, 19세기까지 정치, 제도, 철학, 종교 등에 넓게 걸쳐 있으면서 동아시아 세계의 근간으로 작용했다. 19세기 이후에는 서양 세력의 진입과 자체적인 비판에 부딪치면서 국가 이념으로서의 의미는 퇴색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사회규범이나 문화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실 원래 '유교'는 유학(儒學), 정학(正學), 도학(道學) 등으로 많이 불렸고, 유교(儒敎)라는 표현은 '유학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20세기 이후 교(敎)라는 글자가 종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례가 한정되어 버린 이후에는 유교라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으니 주의를 필요로 한다. 단, 유교 자체도 내세에 대해 일정한 기준점이 있어서 다른 종교와 동시에 행하기는 어렵다는 점 탓에 종교적 성격이 있다고 보기도 하며, 특히 그리스도교 계열 종교들이 유교적 제례인 제사 참여를 허용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식의 쟁점은 심심하면 등장하는 주된 종교적 떡밥 중 하나이다. 그래도 지금 어르신들은 물론 젊은 세대까지도 '조상님께 제사드리는 종교'로 인식하는 것은 사실이다.

후대의 유가는 자신들의 사상적인 연원을 삼황오제 시대로까지 올려 잡는 경우도 있으나, 논어를 보면 공자는 하은주 삼대를 기준으로 잡고 있고 그 중에서도 하나라은나라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삼황오제가 본격적으로 언급된 건 공자 이후 전국시대 때부터.

후대의 유가에서 말하는 주나라도 실제 주나라는 아니다. 예를 들어 『주례』는 주나라의 명의를 빙자한 이상국가의 제도로써 구성된 것이고, 맹자정전제도 주나라의 법이 아니라 맹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금 제도였다. 당연히 공자가 말하는 주나라도 실제 주나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공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 질서를 의미한다. 맹자를 보면 맹자 본인이 "주나라의 제도는 많이 손실되어서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경, 서경, 춘추 등의 경전도 어떤 확실한 원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판본으로 계승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맹자를 보면 서로 다른 판본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후대에도 고대경전의 진위 여부를 가지고 논쟁을 자주 벌였다.

논어에서 공자는 시(詩)에 대해 "시 300편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詩三百、一言以蔽之思無邪)'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건 노래(詩)에서 표현하고 있는 생각이 삐뚤어진 데가 없다는 뜻이지, 사특한 내용을 추려냈다는 뜻이 아니다. 시가 본래 3,000여 편이었다가 300여 편으로 추려졌다는 표현은 매우 후대의 정통주의적인 발상이므로 공자 본인이 추렸다고 보는 건 억지다. 논어를 보면 공자는 항상 "옛날 자료가 손실되어서 자료 수집이 잘 안 된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3,000여 편이나 되는 귀중한 자료를 자기 구미에 안 맞는다고 90%를 잘라낸다는 건 헛소리. 시경이라는 문헌 자체가 그렇게 거룩하고 올바른 문헌이 아니다. 현재 시경을 봐도 매우 에로틱한 내용이 많다. 애초에 시(詩)라는 건 거룩한 말씀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동네 민요가 대부분이다. 동네민요를 정(正)과 사(邪)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유교에 대해서 아는 척 좀 하고 싶으면 1차 자료인 유교문헌부터 이해하고 썰을 풀자.

공자주나라 전성기의 이상적인 질서를 중심하여 패악질이 난무하는 춘추시대의 사회 질서의 재건을 시도했으며, 이를 위해 사(士)라고 불리는 계층을 교육하는 데 노력했다. 흔히 이 글자의 뜻은 선비로 알려져 있지만, 사는 주 대의 하층 귀족이었다가 춘추전국시대 들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유력 인사들이 유입되어 형성된 계층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무질서로 인해 이들 중에는 문적 교양이 전혀 갖추어지지 못한 인물들이 많았고, 공자는 이들을 교육해 바로잡으려 한 것.

단순한 부국강병이나 패도의 결과주의에 안주하지 않고 도덕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덕목들을 규정하여 후에 유(儒)로 불리게 될 학문적인 집단을 구축했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귀족사회에서 능력주의 전국시대로 이행하는 사회의 흐름에 맞추어 사회와 국정 경영을 위해 필요한 덕목과 실력을 교육하여, 학파에 따른 인재 육성과 등용을 처음으로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유가의 학문적인 성과는 유가뿐만 아니라 묵가, 법가 등 여러 유파의 형성이나 사상적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전국시대 말기에 유가는 정치 경영 이념으로 법가에 밀리게 되었고, 중국 통일 이후에는 유교와 법가가 뒤섞이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한나라의 국정 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다른 그 어떤 동양 사상보다 굳건히 중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유교가 일시적으로 쇠락해 불교도교에게 자리를 많이 내주었고, 당나라 때까지도 사회의 중심적 지위는 불교도교에 비해 미약한 편이었으나, 이들 종교들도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유교적 통치질서를 뒤바꿔놓지는 못했다.

이후 당나라 후기부터 송나라 때까지 유교와 불교적 신비주의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성리학이라는 유교의 재해석이 일어나 이후 명나라, 청나라, 조선 등에서 과거시험의 과목이 됨으로써 국가 이념으로 존속했다. 물론 중국에서는 명학, 증학 등이 대두되었으나, 이때도 과거 과목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일본베트남에도 유입되어 사상의 한 조류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서양의 침공과 근대의 충격으로 기존의 유교질서는 상당히 붕괴하고, 20세기 초반에는 탈유교 혹은 반유교적인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으나, 현재에도 종법적 질서, 연공 중시, 상급자에 대한 복종, 조상 숭배, 가부장제 등과 같은 유교적인 관습과 정서는 사회에 계속해서 잔재로 남아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에서 '유교'라고 하면 구시대의 악습을 모조리 뒤집어 쓴 이미지라서 인식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며, 유교 이념 자체보다는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라는 파행적 현상 자체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유교는 단순한 사상이나 개인적 철학일 뿐 아니라 국가제도와 법질서를 모두 포괄하기 때문에 적어도 중국과 한반도에서 유교는 여러 사상 중 하나가 아니라, 아예 동아시아 문명 그 자체나 다름없는 양상이었다. 한자의 기본어휘 중 상당수가 유교 경전에서 비롯되기 때문. 한국, 베트남, 일본도 모두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인데 그 중에서도 한국은 조선 시대의 영향으로 그 어떤 나라보다 유교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유림은 고려말부터 정치세력화하여 조선왕조 500년을 지배한 세력이었으나 조선왕조 말부터 크게 쇠락하기 시작하면서 대원군 실각 이후에 정치세력으로서의 구실을 거의 잃었고 1919년 파리 장서 사건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향력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유교 종단 측에서는 자체집계 통계로 신자가 1,000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종교 센서스에서는 10만 명 정도로만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 유교의 위세를 나타내는 해석이 될 수는 없는데, 유교를 서양식의 종교 개념이 아닌 생활 사상이나 정치 철학, 순수 철학 등으로 파악하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 즉 애초에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프레임 자체가 굉장히 다르다. 이는 불교도교[2]가 서양식의 종교 개념에 의해 빠르게 정의된 것과는 다른, 동양 사상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 때문에 '나는 유학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도 '유학적 삶의 형태'는 많이 따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유학 자체의 본질이나 학문적 성격관 거리가 멀고, 말 그대로 유학에서 파생된 부수적인 관습과 사고(소위 질된 유학적 전통을 포함하는 관습)를 따른다고 보아야 한다.

2. 중국에서의 발전

2.1. 주나라의 종교

유교의 사상적인 기초는 공자가 이상화한 '공 단'으로서 상징되는, 주나라의 종교이자 종법질서 이다.

공자는 이를 주공단이 만든 것으로 보았으며, 역사적으로 주나라의 종법 질서는 왕위 계승 분쟁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서히 만들어졌다. 찬란한 문명을 가진 주나라는 다양한 문헌을 만들었는데, 이 가운데 유교에서 채택된 것이 바로 '삼경'으로서 이는 시(詩), 역(易), 서(書)이다.

삼경 역시 순수하게 주나라 만의 문헌은 아니며, 주나라 시기에 기반을 두고 춘추시대에 점진적으로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2.2. 춘추시대

유교는 다른 학파보다 더 중국의 이전 시대의 역사 전통을 보전하고 계승하려는 태도를 강하게 보였다. 이는 공자가 패자들이 날뛰는 춘추시대에 살면서 주나라의 이상적인 질서를 회복하려는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이 때 공자가 제시한 원칙이 바로 정명(正名)이었다. 그리고 공자 스스로는 춘추를 통해 주 귀족들의 파행적 행태를 지적하면서 자기 직분의 훼손을 지탄하고, 주 대에 형성된 천하 질서[3]의 수호를 시도했다. 예를 들어 왕이 제 역할을 못하거나 제후가 참람하면 지위를 깎아내려 기록하는 식이다.

이 정명 사상을 설명할 때 명분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본래적 의미가 오히려 전달이 안 되는 측면이 있는데, 명분이라는 말을 그냥 '자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다해야 할 원칙'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4]. 쉽게 말해서 왕은 왕으로서 신하를 의롭게 대하고, 신하는 신하로서 왕을 진심으로 보좌해야 한다는 것. 단순히 수직 관계적으로 닥치고 충성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왕이 불의를 자행하고, 신하가 사익에 눈이 멀어서 세상이 어지러워졌으니 똑바로 하라는 뜻이다. 아버지면 아버지답게, 아들이면 아들답게라는 말도 마찬가지 맥락이며, 그냥 아비에게 두들겨맞아도 복종하라는 수준의 소리가 아니다. 기존의 귀족 질서가 상명하달식의 질서에 가까웠다면 공자는 '위에서 똑바로 안 하면 그것도 당연히 지탄받아야 한다' 식의 의문을 제기하고 실천에 옮긴 것. (정작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면서는 지배자의 권위를 공고화하는 쪽으로 변질되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정명 사상에 따라 '사람도 사람다워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었고 이 '사람답다'는 말을 '인(仁)'이라고 하며, 이것이 사람에게 내재된 '도(道)'이다. 이 시점에서 유가는 인간의 차원을 넘어 온 세상을 운행하며 모든 것을 계속해서 바꾸어놓는 천도(天道)에서 제 역할을 찾는 도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물론 유가에게도 천도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5] 유가는 도가와는 달리 천도의 실현을 개인과 개인에게 주어진 직분에게서 찾는다. 초기 유가가 도가와 달리 신비주의를 거세하고 현실 학문으로 방향을 튼 것이 이 지점이다.

그런데 사람이 가져야 할 자기 직분은 개인 스스로가 만들 수 없고, 사회가 형성되어 자기 일을 나누어 받으면서 형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가는 자연히 인적인 관계를 중시하게 되고, 내적인 인(仁)을 외부로 표현하며 형성되는 제반 사회 관계의 통칭이 '예(禮)'이다. 흔히 예를 설명하면서 단순한 '예절, 에티켓'뿐만 아니라 유교 사회에서 형성되는 거의 모든 사회 활동을 포괄하게 된다는 설명이 많이 등장하는데, 크게 어려운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인을 외부로 잘 실현하는 것 그 자체가 예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상을 찾아내는 출구가 바로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성인의 모범이고, 이를 모방하여 익혀나가는 것, 즉 학(學)이 또다른 유가의 축이다[6] 이를 통해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기 사회 직분에 맞추어 인과 예를 잘 실천하게 되면,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사회는 조화롭게 잘 운영되게 된다(和而不同).

어쨌건 이러한 유가의 이상을 잘 실현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표현으로 성인이라고 하고, 공자가 자신을 군자라고 칭하면서 군자라고도 하고, 맹자 대에 대인이라는 표현도 나타나고 뭐 기타 다양한 표현이 많지만, 유교를 따르는 이들의 정체성이 된 표현은 말 그대로 '유(儒)'이다[7]. 본래 유(儒)는 제사를 치르는 사회 신분을 의미하는 말인데, 주 대에 종묘를 비롯한 시조 제사 등의 여러 제사가 확립되면서 인문주의적이고 신분 질서에 입각한 제사가 보편화되었다. 이후 유가에서 이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들을 규정하는 말로 정의하였고, 후대에 계속해서 전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공자가 세운 유교의 기본 교리는 (유토피아인) 주나라의 천하 질서를 회복하고, 자신의 직분에 따라(正名) 사람다움(仁)을 실현함으로써 예(禮)를 회복하여,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조화로운 사회(和而不同)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용옥 등을 중심으로 이 시대의 유가가 도가와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는데, 물론 선입견을 깨는데 이러한 비판이 중요하기는 하나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논어의 첫 구절부터가 "배우고 또 때가 날 때마다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인 반면, 노자 48장에서는 "배움을 행하면 날마다 더해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진다. 덜고 또 덜어내면 하는 것이 없는 것(무위)에 이른다. 하는 것이 없으면 하지 않는 것이 없다(爲學日益、爲道日損、損之又損、以至於無爲、無爲而無不爲)."고 했다. 애초에 노자 1장에서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항구적인 이름이 아니다(名可名、非常名)."고 하여 유가의 기본적인 정명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8].

2.3. 전국시대

전국시대는 특히 혼란한 시대를 바로잡고 인간이 해야 하는 도리를 퍼뜨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던 시기이다. 대부분 학자들은 일생을 제후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하거나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쏟아부었다. 당시 시대에 데카당트해서 지배계층의 도덕관은 상당히 아스트랄한 편이기도 했다. 근친상간을 저지른 제나라의 군주 제양공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춘추시대에는 그나마 나았지만, 전국시대가 되면서 국가나 사상이나 여러모로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고, 이 과정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의 체계가 잡혔다. 사실 제자백가 상당수가 공자의 제자들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인물 중 하나가 맹자인데, 사실 송나라 이전까지는 잘 조명받지 못했다.

맹자에 들어서면 시대 상황에 따라 더욱 날카로워진다. 맹자 시대에는 이미 주나라의 질서가 갈 데까지 간 상황이라, 주 천자를 중심으로 천하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맹자는 새로운 천자가 될 인물을 찾아다녔는데, 이를 주나라 대부터 전해지던 '천명(天命)' 이론을 통해 정당화한다. 옛날에는 공자춘추를 써서 왕과 제후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자극을 줄 수 있는 시대였다지만, 맹자 시대에는 그런 게 씨알도 안 먹히는 전국시대였으니, 아예 천도를 따르지 않는 군주나 제후는 천에 의해 갈려버린다(革命)는 게 맹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맹자의 시대에는 이제 새 천자가 나올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나마 주나라 시기에 봉건된 제후들의 가문 혈통이 유지되고 있던 춘추시대와는 달리 전국시대에는 봉건 제후들의 가문이 단절되는 사태가 왕왕 벌어졌다. 본래 진(晉)의 신하였던 위(魏), 조(趙), 한(韓)의 삼진에 의한 진(晉)의 분할, 제나라 강씨(姜氏)의 신하였던 전씨(田氏)에 의한 제(齊)의 찬탈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 외 수없이 많은 소국이 병탄되어 아예 소멸해버렸고, 강력해진 공후(公侯)들은 감히 주나라 천자만이 자칭할 수 있었던 왕(王)을 칭하기 시작하여 각지에 왕이 난립하게 되었다. 주나라 왕실 자체마저도 분열과 대립하는 시대였으니, 주 천자의 권위는 커녕 현실 중국에 어떤 통합된 권위란 것이 존재하는 지도 불확실하게 보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이러한 현실에서 '혁명'을 주장한 것도 당연히 나타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명은 세계 질서에 가깝다. 인격신으로 보는 시각은 현대 유학보다는 보다 고대 주나라 종교의 시각에 가깝다.[9] 그렇다고 백성들을 천이라고 보는 것은 오히려 동학에 가깝다. 물론 어느 정도 의인화되어 인격신적으로 서술되는 면모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맹자의 서술은 일관적으로 '천도를 거스르면 저절로 백성이 떠나가고, 저절로 왕조가 망하게 된다'는 개념에 의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격신보다는 일종의 법칙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나 일반 인민들 사이에선 차별없는 사랑 즉 겸애(謙愛)를 주장하고 쓸데없는 전쟁을 반대한 묵가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유가의 눈에는 3년상을 폐지하여 기본적인 인도를 저버리고 음악을 폐지하여 예악을 중시하던 공자의 기본을 뒤흔드는 묵가가 좋게 보일 리 없었고, 맹자양주와 함께 묵자를 실컷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혁명 사상'만을 들어 맹자의 유학이 기존에 유가가 중시하던 격식을 완전히 저버리려 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맹자주자로 대표되는 송대 성리학 이전에는 유가 사상의 주류를 차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주자 이전엔 순자공자의 적통으로 인정받는 경향도 있었다. 순자는 인간은 타고나면서 탐욕을 타고났다는 악설을 주창했으며, 따라서 군주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여 예(禮)를 확립하여 인민을 교화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주장하여 결과적으로 전체주의를 옹호하였는데, 이는 후술하듯 군현제로 인해 군주권이 급격히 상승한 전국시대의 기풍을 탔기 때문이다. 순자는 후에 이사, 한비자 등을 가르쳐 법가에도 영향을 주었다. 다만 법가는 이미 기원전 4세기 경 존재한 사상으로, 기원전 3세기의 인물인 순자에 의해 만들어진 사상은 아니다.

2.4. 진한시대

전국시대 이후 유가는 당시 유력하게 대두되던 법가와 충돌했다. 전국시대에는 기존에 유가가 숭상하던 주의 질서가 한껏 파괴되고, 주의 질서에 의거한 신분제가 하극상에 의해 나날이 뒤집어지며, 한편으로 법가의 변법(變法)에 의해 새로운 제도가 들어섰다.

변법의 여러 내용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봉건제에서 군현제로의 전환'이다. 이는 제후, 경, 대부 등의 중간 권력 계층이 사라지고 일원적 권력의 전국 직할 통치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 법가는 세습적 봉건 제후들을 완전히 소거시키고, 그 자리에 철저히 법(法)에 의거해 국가 행정을 처리할 일종의 행정 관료를 채워 넣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결과 신권은 하락하고 군권은 급속히 상승한다. 중국은 이를 통해 제국의 시대로 나아가지만, 지식인 계층의 역할을 강조하던 유가 입장에서 이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이자 완전한 군현제 국가를 이룩한 법가 제국 의 시대에 유학자들과 법가 국가가 분서갱유라는 충돌을 낳게 된 것은 진시황 개인의 폭정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필연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급격한 제국 질서의 구축과 광대해진 영토로 인한 법가 통치의 비효율[10]로 인해 진은 멸망하고, 이 들어섰다. 하지만 이미 역사학계에서 한이 한동안 진의 통치 체계를 계승했음은 잘 알려진 바이다. 실제로 흔히 유교가 지배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는 한무제 대, 아니 이후의 후한 시대까지 하더라도 법가의 유풍은 계속해서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한편 한 대에는 고학이 발전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많은 문헌이 파괴되고 전승이 끊어졌기 때문에, 필사본이나 암기를 통한 구전으로 퍼져있는 유교 경전을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암송에 의해 정리된 경전을 금문경전, 필사본 및 분서당시 숨겨놓은 원본(글자체를 기준으로 한대와 진대의 경전을 구분)의 발굴로 인해 정리된 것이 훈고경전이었다. 이 둘은 시대의 주류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으나 당시에 주류를 차지한 것은 금문이었다. 그러나 후의 대세가 된 것은 고문이며, 금문경전은 『춘추』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더 자세한 것은 문학금문학을 참조.[11]

고학은 사실상 동양권 지학의 뿌리라고 인식되는 학문이며,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졌다. 증학과 유사점이 많아, 서지적 연구가 중시되는 고학증학을 한데 묶어서 '한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사회적으로 법제 등의 차원에서는 진을 많이 계승했으나, 한 초의 과진론(진의 과실을 논하는 담론)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실패의 경험을 갖고 있는 법가 통치의 대안으로 유가적인 통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법에 의한 철저한 지방 통제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호족 세력이 유학을 학습하고 향거리선제 등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면서는 황제권 - 법가와 신권 - 유가의 대립이 두드러진다. 다만 예외적으로 왕망은 오히려 근본주의적인 유교를 도입하여 호족을 억누르려 했으나 철저히 실패하고, 호족의 지지를 받으며 들어선 후한 정권은 이들을 거스르는 통치를 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역사를 거치며 법가적 통치에 유가적 질서가 포용되는 상황이 무제중서의 유교 확립을 통해서 서서히 유가적 명분이 법가적 도구를 통해 실현되는 상황으로 전환된다. 특히 전한 시대 중기를 넘어서면서 유가는 기(氣) 철학, 천재지변을 왕의 통치를 나타내는 지표로 파악하는 천인상관설(재이설), 오행설 등을 받아들여 사상의 폭을 넓혀나간다.

2.5. 위진남북조 시대와 당송 시대

이민족의 중국 유입과 혼란한 사회상, 그리고 이를 통제하기 위한 막부 체제의 형성 등으로 정적인 사회에서 많이 받아들여진 유교는 쇠퇴하였다. 대신 그 자리는 불교도교가 차지했으며, 엄종, 태종, 현학 등의 철학적 발전은 후에 성리학에서도 받아들일 정도로 체계적으로 발전하였다.

당대에도 불교도교는 황실의 지원을 받으며 크게 성장하였으나, 안사의 난 이후에는 외래 이념에 대한 대대적인 거부감으로 인해 불교가 회창폐불 등의 사상 탄압을 당하고, 노자의 본성이 이(李) 씨라는 점과 당의 국성이 이(李) 씨라는 점에서 도교를 많이 지원해주었던 당 황실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유교가 두드러지게 되었는데, 고유 이념의 복원과 중국 고문의 계승 등을 주장한 , 이고 등의 고문 운동이 유교의 부활에 불씨를 지폈다.

이후 태극, 이[12] 등의 개념을 받아들여 기(氣)의 개념과 결합시키는 성리학의 조류가 당 후기부터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송나라 대의 주희(후에 주자라 불림)가 종합하여 성리학을 완성했다(이 때문에 성리학은 '주자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외에 성리학은 정주학,[13] 신유학이라고도 불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의 모습(이기론, 심성론)은 이때 다 만들어졌다. 이전까지의 유교는 현실적 도덕과 삶의 규범을 제시하는 매우 상식적인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영역은 별 관심이 없었으나, 이것으로는 사후세계나 인간의 지각, 영혼, 형이상, 세계관의 문제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한 불교도교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그네들의 방대한 우주론 및 개인적인 심성론을 흡수하면서 크게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성리학은 기존의 소박한 유교에 불교의 세계관과 도교의 음양사상에 영향을 받아 우주론적 해석을 적용한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자는 사서집주를 만들면서 사실상 사서를 자기 스타일로 변형시켰다. 공자유교주자의 성리학이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음에도 일정한 간극을 두고 보아야 하는 점은 이 때문이며,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던 유교가 조상 숭배 현상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갖은 신비적 요소를 도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원나라 대에는 일시적으로 유학자들이 천대받으면서 쇠퇴하였으나[14] 원 말에는 중단되었던 과거를 재시행하는 등 성리학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성리학이 한반도로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도 이 시기로, 충선왕이 원의 유학자들과 교류하고 안향원나라에 유학을 가면서 들여온 것이다. 이후 성리학사대부 계층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이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참고로 이 문서에서는 명청시대 단락에서 성리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성리학에 기반을 두고 일어난 명청시대 유학을 성리학과 대비하여 설명함으로 보다 손쉽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2.6. 명청시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명청시대에도 관학은 여전히 성리학이었다. 다만 과거가 장기화되고 명청시대의 급격한 인구 증가로 경쟁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는 양식이 완전히 고정되었는데 이를 팔고문(八股文)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제국의 이념은 한층 통일되었고 신사 계층이 확고해졌으나, 과거의 형식화를 불러오는 폐해를 낳았다.

명나라 후기에는 사회 혼란이 심해지면서 각지에서 자체적인 개혁론이 일어나는데, 왕양명으로 알려진 수인이 특히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수인과 십가패법 보급을 통해 혼란스러워진 사회에 대한 통제와 질서의 회복을 꾀하였다. 그는 심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명학으로도 통칭되는데, 이는 왕수인의 이름에서 따온 물건으로, 주자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은 주자학과 동일한 맥락하에 이름지어진 것이다.

명학은 지행합일, 심즉리설 등을 주요 사상으로 삼았으며, 그에 따르면, 누구나 마음 안에 세상의 이치가 있음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려 노력하면 성인군자의 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기존의 성리학과 별 차이가 없다. 기존의 성리학 역시 사람 안에는 '리', 즉 세상의 이치가 있음을 설파했기 때문이다. 명학주자학의 차이라면 주자학은 '리'를 형이상으로 치고 '기', 그러니까 대강 뭉뚱그려 말하면 사람의 기질이나 마음을 형이하로 간주했다. 이 형이상과 형이하의 사이에 선악의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데, 형이상 쪽은 순전한 선이며, 형이하는 선일 수도 있고, 선이 아닐 수도 있다. 즉 재언하면, '리'는 형이상학적인 이치로 절대선이며 개개인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다 사람이 악하고 방종해지는 이유는 '리'라는 불변의 보석이 진흙 속에 묻힌 것처럼 형이하학적이고 동요되기 쉬운 기질이나 마음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선해지고 현명해지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내재된 '리'를 밝혀내야 한다.

주자는 이를 위한 수련방법으로 격물치지를 천명했다. 물론 주자가 처음 한 말은 아니고 경전에 있는 말이다. 즉 악의적으로 말하면 주자가 일종의 견강부회를 했다고 할 수도 있다. 격물, 사물의 이치를 궁리해서, 치지, 깨달음에 다다른다는 얘기이다.[15]

왜 이게 가능한가? 주자에게 있어 '리'라는 것은 불변하는 천성적 선으로, 사람뿐 아니라 온갖 사물에 다 깃들어 있는 일종의 절대이치이기 때문이다. '리'가 나무에 깃들어 나무의 '리'가 발현되어 나무라는 실재 사물, 그러니까 기로 형성이 되고, 기왓장의 '리'는 기왓장에 깃들어 기왓장이라는 실재 사물이 나타나는 원리이며,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리'가 깃들어 하나의 인간 개체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리'라는 건 조약돌에 깃들어 있는 '리'도, 풀때기에 깃들어 있는 '리'도, 인간에게 깃들어 있는 리도 다 똑같은 '리'다. 모든 사물에 깃든 '리'가 똑같지만 사물이 제각기 다른 이유는 그 '리'가 형이하학의 기로. 구체적인 사물로 발현되는 방식 또한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사물에 깃들어 있는 '리'는 모두 동일하다. 여러 사물들에 차이가 있는 건 '리'가 발현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종류라 할지라도 개체마다 성격에 차이가 있는 건 그 개체마다의 '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리'는 천지만물에 깃들어 있으므로 학문을 이루기 위해 하나의 사물을 깊이 살펴서, 그러니까 격물함으로, 그 사물에 깃들어 있는 '리'를 파악한다. 한 사물의 '리'를 파악함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앞마당의 대나무의 '리'를 파악하고, 하늘에 떠가는 구름의 '리'를 파악하고, 하여튼 이런저런 '리'를 다 파악하면 어느새 치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 때 결코 서두르면 될 것도 안 되고, 될 때까지 차근차근 모든 사물의 '리'를 하나하나 파악해야 된다!

왕양명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런 요식적 행위는 뜬구름 잡는 짓이다. 내가 우리집 앞마당의 대나무를 몇 달 몇 년을 보고 있었는데 '리'가 파악되기는커녕 머리만 아프고 우울증만 더해졌을 뿐. 사물을 파악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내면이나 제대로 파악하고, 밑도 끝도 없이 형이상학을 궁구할 시간이면 실천적인 행동에 나서라! "

주자의 성즉리를 왕양명의 심즉리와 대비시켜 볼 때 그 요지는, 리, 그러니까 하늘의 이치는 형이상학적인 성이며 형이하학적이고 갈대와 같은 우리의 마음과는 다른 물건이란 얘기다. 반면 왕양명은 그냥 우리 마음인 심이 즉 하늘의 이치인 '리'이니 양지(良知)하기만,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을 그것을 올바르게 알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치양지(致良知), 양지에 다다름이다.

그 수련법은 다르나, 똑같이 마음 속에 그 이치가 구비되어 있다는 점에 관해선 둘이 같아 보일지 모른다. 사실 크게 보면 별 차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세히 구별해 보면, 주자는 우리의 마음을 기로 여기고 절대선이자 이치라 할 수 있는 리와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 마음 속에 또 내재되어 있는 성을 '리'로 여기고 구체적 현상인 마음 자체에 대해선 경계했다. 왕양명은 구체적 사물인 '기'가 있다면 그 이치인 리가 없을 수는 없지만 구체적 사물인 '기' 없이는 이치인 리가 나타날 길이 없으니 리가 형이상의 세계에 고고하게 실존한다는 건 뜬구름 잡는 얘기이고 사실상 기와 리는 다를 바가 없으며 그러므로 기의 발현인 우리의 마음이 곧 리라 할 수 있다. 또한 리라 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을 제쳐놓고 외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해 봤자 우리의 마음과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의 외물이란 것도 뜬구름 잡는 얘기다.[16]

왕양명은 제자들에게도 항상 외물을 살피는 것과 같은 개수작은 관두고 니 마음이 곧 리니까 그것을 잘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설파했다. 즉 치지, 먼저 깨닫고 나서 격물하라고 했는데 격물은 주자의 해석과 달리 했다. 주자는 격물을 사물을 바라보고 연구하라는 뜻으로 해석했으나 왕양명은 격물의 격자를 바르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물자를 사물이 아니라 활동, 사건 등으로 해석하였으니 간단히 말하면 일 잘하라는 뜻이다. 즉 왕양명이 논한 치지격물은 격물치지, 거경궁리나 독서 등을 중시하는 성리학과는 달리 수행자에게 그 행동을 촉구하는 바가 있다.

여기서 성리학과 양명학의 신분관에 차이가 생긴다. 성리학은 격물치지와 성즉리의 실행방법으로 선지후행(先知後行)을 내놓았다. 선지후행 자체는 도덕적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도덕상의 사리를 완전히 알아야만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결론은 도덕(≒정치)의 주체가 성리학을 배우는 귀족계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양명학은 심즉리와 치양지의 실행방법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들었다. 성리학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의 주신 본성(혹은 천명)이 리가 아니라, 마음이 곧 리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행동을 함에 앞서서 도덕을 배울 필요는 없고, 행위는 양지를 실현시키는 존재로만 보는 것이다. 결국엔 도덕의 주체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다는 것.

결국엔 양명학은 신분제의 붕괴에 기여했다는 의미를 가졌다. 그 후엔 급진 세력과 온건 세력으로 나누어져 사회상에 대한 담론을 논하고 서민 계층에게까지 스며드는 등 명 후기 번성하였으나 명의 멸망 이후에는 쇠퇴하였다. 따라서 청조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잊혀졌으나 신해혁명이 벌어진 직후에는 육왕학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부활하여 공양학과 함께 전통 유교 시대의 끝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최후의 유학자"라고 불리는 양수명이 육왕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88년 사망)

명나라 멸망 이후 양명학이 쇠퇴한 것은 양명학이라는 이단 학문이 퍼진 것이 명나라의 약체화를 불러왔다는 해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양명학은 말하자면 어느정도 인기를 얻은 일종의 이단이었던 셈이었는데, 이는 심학이 흔히 양명학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이 깊다. 성리학에서는 정호, 정이 형제나 주돈이 등 주희 이전의 고명한 사상가들도 많았으며, 불교가 위태롭고 유교가 흥성하려는 시절에 나타난 성리학과 큰 상관이 없는 유학자들도 재빨리 성리학의 계보에 갖다 붙였다. 주자도 당대 자신과 대립하던 심학 계열의 거두 육상산이 죽자 그를 조문하고 나서 고자가 죽었다면서[17] 강렬한 오럴 어택을 가했다. 더구나 왕양명의 후계자들 역시 사상적으로는 변변치가 못해 불교나 도교의 논설을 끌어다 쓰거나 유불도 일치점 따위의 학설을 논했으니 당시엔 핫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이단이란 공격을 받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왕양명의 학문적 업적 역시 주자에 비해 밀렸다. 주자는 당시까지의 유교사상을 거의 집대성해서 자신의 철학사상을 이루었으며 온갖 경전에 대한 주석을 다는 등 업적이 다대했으나 왕양명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청에서 양명학자가 어느정도 관리로 뽑혔지만 주로 성리학자가 뽑혔으며, 그 양명학도 고증학에 밀려 쇠퇴하였다.

또한 청대에 양명학이 쇠퇴한 이유 중의 하나는 청나라가 이민족에 의해 세워졌다는 약점에서 비롯한 측면에 있다. 이민족에 의해 세워진 왕조라는 이유에서 정통성에서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한족보다도 더 굳건한 전통파 유교에 집착해던 것이다. 청나라는 왕조 초기부터 정통 주자학을 강조하며 청나라 황실은 유교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였다. "이민족이건 한족이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화문명의 핵심인 유교 정신에 누가 더 가깝냐 만주족이 세운 왕조이긴 하지만 한족보다도 훨씬 유교와 학문에 밝으면 우리야 말로 중화문명의 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따라서 청나라에서는 양명학과 같이 자유로운 해석을 허용하는 학문을 이단으로 탄압하였던 것이다.

대에는 정부에서 문자옥 등으로 유학자들을 탄압하고 정치에 대한 담론을 가로막으면서 자유로운 학설 연구가 위축되자 고대 경전을 다시 연구하여 고증하는 학문이 발달하게 된다. 극단적이 되면, 고대의 기록을 깡그리 부정해버리는 의고학파로 이어지게 된다. 양명학이 논리적인 측면에서 성리학을 공격했다면, 고증학은 더욱 근본적인 면에서 성리학의 각을 떳다. 간단히 말하면 "너네들이 공자의 말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데, 공자가 정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기나 할까?"

이기론의 성리학과 심즉리설의 양명학의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면에 집착한다는 점을 공격하며, 고전을 꼼꼼이 연구하여 '실사구시'와 '경세치용'를 구현하고자 한 학문이다. 실사구시, 경세치용이라는 측면은 조선 후기 실학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근기학파는 경세치용을 기치로 내세워 많은 현실 개혁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고전의 철저한 검증이라는 측면은 고전의 검증에만 매달릴 경우 현실과는 동떨어진다는 모순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청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문제점이 부각된다. 이것은 고증학이 실용성을 구현하려 했다는 데에 반해, 한편으론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지적이 공존하는 이유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국이 유학을 관학 삼은지 2000년이 넘었고 그 기간 동안 닦아진 유교의 헤게모니가 보통 공고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정책을 펴거나 사상을 주장하려면 옛 성인의 어록에서 그 근거를 채집할 수밖에 없었기에 실사구시나 경세치용을 주장하면서도 성리학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결국 주자보다 끗발 좋은 성현의 말씀을 찾아 옛 경전과 경전의 업데이트 기록을 뒤적거릴 수밖에 없고 그러자니 또 현실과는 자연히 멀어지는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청 후기에는 드디어 유학의 마지막 흐름이라 할 수 있는 공양학이 등장했다. 청 대의 고증학이 형식에 치우치며 고증에만 치빠져 현실과 동떨어지자 이를 비판하며 등장했으나, 공양학이 등장하게 된 가장 커다란 계기는 서양 "오랑캐"들의 침공일 것이다. 이제껏 중국이 수많은 오랑캐들의 침략을 받았고, 현재 청 왕조도 오랑캐 왕조고, 오랑캐가 힘이 강하다면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서양 오랑캐들의 침략은 이제까지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던 것이, 지금까지는 설사 창칼로는 지더라도 기술 문물로 미개한 오랑캐들을 압도한 이후 다시 새로운 정신 승리 체계를 짜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서양 오랑캐들은 기술문명은 중화문명의 기술문명을 압도했고, 그것을 따라잡으려는 노력이 사상적인 면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말이 기술문명에 대한 선망이었지, 실질은 압도적 군사력에 대한 열등감과 다른 말이 아니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개항기의 비극적 역사이다. 이 맥락에서 조금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기술문명의 추적이 생사의 문제가 되었으니, 자극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강력한 기술 문명의 기원으로서 서양 사상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점점더 제국주의 압박은 강해지기만 하여왔고, 중국인들 스스로 모든 방면에서 뒤떨어진 오랑캐로 스스로를 폄하하는 중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에 이르렀다.

이렇게 기존 사회가 뿌리째 흔들리자, 기존 사회의 이념이었던 성리학적 이치의 사회적 효용이 크게 공격당하게 된다. 이에 공양학파는 성리학과 같은 기존 학설들을 과감하고도 거부한 후, 유교의 뿌리인 공자의 흔적을 더듬어 '춘추공양전'을 더듬어냈다. 그들은 춘추공양전의 해석을 중심으로 학설을 수립, 발전 사관을 제시하여 변법자강 운동 당시 유웨이량치차오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 같은 변혁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공양학파의 시절까지도 유교의 거대한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힘들었을 만큼 유교는 중국 사상의 근간이었다. 중세의 신학에 비견할 수 있다.

이들에게 반대해서 '중학위체, 서학위용'을 제시한 자강파 장지동의 사상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격변의 시대를 겪고 있던 조선에게도 지침이 되었다. 동도서기론이 이 계통이다. 그런데 '중학위체, 서학위용'은 사실 조리가 맞지 않았다. 중국의 철학에서 사용되는 체와 용의 개념은 단일한 실재의 상호 관련된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적인 가치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서양의 학문을 단순한 도구라고 헐뜯을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교의 변양은 사회변혁을 온전히 감당해낼 역량을 지니지는 못했다. 공양학자들이 사회의 근간 사상을 새롭게 발기해 보려고 고심하는 사이, 서구의 사상은 급속도로 들어왔다. 중국의 서양학자들은 공양학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나날이 더욱 격렬하고 더욱 빠르게 '문명국'이 '후진국'을 점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제국주의적 사회진화론'을 전파했다. 또한 실증으로 이룩한 과학과 논리술에 바탕한 철학이야 말로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중국만의 상황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더욱 주효했다.

이러한 상황의 영향은 과학기술뿐 아니라 정신문명에도 해당한다. 그 나름대로 복잡한 전개가 있지만 공산혁명도 서구 사상의 전파의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결국 젊은 시절 공양학파였던 캉유웨이나 량치차오 같은 거목들마저 유교와 멀어지면서 유교가 국가의 기반 이념으로 존재하던 역사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벗어난 지금 동양에서는 유교를 비롯한 동양의 사상들을 재독하기도 한다. 서구의 문명사 사상사에 대한 이른바 유럽중심주의적 함몰에서 벗어나는 주요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사고에서이다.

3.1. 조선 중기 이전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유학의 기본 개념이 수용되었으나, 불교가 중심이 된 귀족 사회를 뒤흔들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통일신라 대부터 고려 중기까지는 서서히 유교를 중심으로 한 학습 기관의 비중이 높아지며 9세기의 독서삼품과를 거쳐 고려 광종과거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과거는 대개 귀족들에 의해 독점되어 문벌귀족이 형성되었으며, 문벌귀족은 철학적으로 유교를 연구하기보다는 문학을 즐기는 데 치중했다.

한편으로 고려 중기에는 최충 등에 의한 사립 학교의 건립, 그리고 이에 맞서기 위한 정부 차원의 국자감 지원과 도서관 성립 등으로 문생들의 수효는 증가했으며, 향교의 건립도 이루어졌다.

무신정변으로 문신들이 몰살 당하면서 타격을 입기는 하였지만 곧 이들이 없으면 국가 운영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무신집정자들에 의해 등용되거나 무신 유력가문과 혼인동맹을 통해 예전의 세력을 회복한다.[18]

최우가 등용한 사대부들은 신진사대부들이 아니며 이들은 최충헌 사후 잠시동안의 권력 공백기간 동안 최우에게 반기를 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최우가 등용한 세력이었다.[19]

이들은 어디까지나 최씨 무신정권의 옹호하에 형성된 집단이었으므로 김준의 쿠데타로 인해 최씨정권이 붕괴하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무신정권의 붕괴와 함께 원 간섭기가 시작되어 권문세족들이 발호하기 시작하자 완전히 몰락해 버린다.

그후 충선왕이 원나라로 나포되었을 때, 북경에서 만권당을 개설한 후 안향에게 파견 명령을 내린다. 이 안향에 의해 성리학이 수입되어 최씨정권때와는 다른 사대부 계층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공민왕의 사회 재건 시책에 따라 이색, 정몽주 등은 성균관의 재정비와 각지에서 향교의 재건이 이루어졌으나[20][21] 정작 이들은 공민왕이 결국 실패하여 완전히 멘붕해버려 그야말로 몰락하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도 공민왕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이를 조롱하였을 뿐이다.[22]

공민왕이 살해 당한 후,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등에 의해 잠시동안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으나 이때 우왕의 밀명을 받은 최영, 이성계등에 의해 이들이 숙청되었고 최영에 의한 신군부 정권이 들어선다.[23]

하지만 당시 신진사대부들은 이러한 정국을 두고볼수가 없었던게 아무리 최영이 권력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일단은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군인이 되어버린데다가 불과 백년도 안된 시점에 무신정권이라는 악몽을 경험한 그들로서는 최영의 집권을 절대로 묵과할수가 없었고 결국 그들이 찾아낸 것은 또 다른 신군부의 한 축인 이성계였다.[24]

마침내 위화도 회군을 통해 최영 정권이 붕괴되고 이성계의 신군부가 들어서게 되었으나 여기서 또 이들의 분열이 이루어지는데 고려라는 체제를 유지하면서 성리학의 국가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성계를 그 매개채로 삼자고 주장한 정몽주를 위시한 신진사대부와 고려 대신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여 성리학 국가를 만들어 나가자고 주장한 정도전의 신진사대부로 분열되어 버렸고 결국 승리한 쪽은 정도전의 신진사대부 세력.[25]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신진사대부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설하면서 국가 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했고, 전국의 부, 목, 군, 현마다 1개의 향교를 건설하여 유교 이념의 전국적인 보급을 꾀했다. 독자적인 철학의 발전은 여전히 미미했으나, 전국에 양반 계층이 자리 잡은 것은 후대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강고히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조선 초기의 성리학은 그야말로 정치의 수단이었고, 그 자체로 목적으로 전도되지는 않았다. 유교적 제도를 기록한 '주례'를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다[26]. 성리학의 생활화(소학, 주자가례)는 양반 가문에서만 한정되었다. 그 외에는 자주적 성향을 띄어 단군을 숭배하고 부국강병을 꾀하는 등, 이때 관학파들은 조선 초기의 문물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정도전이 불교를 혐오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성계의 최측근 중 무학대사가 있었고 세종이나 세조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을 정도로, 그리고 세종의 형 효령대군처럼 왕실의 종친이 기꺼이 승려가 되어 출가하는 사례가 나올 정도로 불교와 나름대로 융통성 있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의 부족한 면을 메꾸기도 했다(물리적 통치술은 유교, 정신적 수양은 불교라는 식으로). 다만 여기서 정몽주, 길재 등의 온건 사대부들은 정계 주류에서 쫓겨나가, 사림파를 현성하게 되었다. 다만 이때 사림파들은 성종 이후에서야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했었고, 그 이전엔 아주 소수만 등용되었다.

3.2. 조선 중기

사대부 계층이 세운 조선에 이르러 성리학이 지배하게 되었고, 관학파(세조 이후로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쟁 끝에 선조 시기때 훈구파 잔여세력이 사림파에 흡수되면서[27], 사림파의 세상이 되었다.

이는 간단히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로서의 우열보다는 쪽수에서 밀린 것이다. 관학파는 원래 기존 양반가문이나 양인계급에서 과거→성균관, 집현전 테크를 탔기 때문에 그 수가 한정되어 있지만, 사림파는 서원에서 능력있는 재목이다 싶으면 무한대로 뽑아올 수 있기 때문. 게다가 훈구파의 부정부패, 방납과 대농장의 폐단 탓도 있다.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등용되기 시작하고, 중종때에 들어 반정공신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가 등용되었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도학정치(道學政治)[28]를 펼쳤는데, 그 정도가 너무나 강경했으며, 독선적이고 부패하였다. 뇌물 비리는 없었지만 현량과의 공정성은 0에 수렴했으며, 유능하고 청렴해도 훈구파였으면 조광조 일파가 삼사를 동원해 파면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조광조는 이러한 부정부패를 군자-소인론으로 어물쩡 합리화해버렸다. 결국 훈구파는 물론이고, 중종에게마저 미움을 사 조광조 일파는 기묘사화로 제거되고 말았다. 이러한 조광조의 죽음은 모든 사림파들에게 화두를 던져주었고, 그것이 이기론의 발달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결국 이기론의 학문적 해석 차이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로 나뉘게 된다.

국사를 배울 때,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하는 말로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원래 성리학은 퇴계학파부터 율곡학파까지 전부 주리론이다. 성리학 자체가 리를 중요시 하는 학문이기 때문. 하지만 여기서 기를 천시할 것인가, 기의 중요성도 인정할 것인가에 따라 리론, 기론으로 나뉘게 된다. 이는 한국 고유의 이기론 연구이자 성리학의 형성으로, 주자도 리와 기의 발동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퇴계학파는 흔히 주리론적 경향으로 알려진 것으로, 이황조식을 한 데 묶기도 하지만, 이 둘은 차이가 있다. 조식은 좀 더 불교적 성향이 강하며, 노장사상까지 포용했기 때문에 딱히 성리학자도 아니였다. 이황은 주자대전을 최초로 읽은 인물. 사실상 성리학이 제대로 자리잡은 이황 때부터다. 영남지방을 중심이 되며, 동인→남인 테크를 탄다.

퇴계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제시했는데, 사실 성리학적으로도 매우 이상한 주장이다. 원래 성리학에서 리(理)는 발동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 그러나 퇴계는 인간의 순선한 도덕성이 곧바로 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기 때문에 주위의 논란을 무릅쓰고 이 주장을 밀어붙였다.

퇴계의 말에 따르자면 리는 정신과 관념을 의미하여, 사단[29]으로 표현된 절대 선이며, 기는 환경과 기질을 의미하여, 칠정[30]으로 이루어진 가선가악(可善可惡)한 것이기도 하다. (사단칠정논변)여기서 적절한 학문 수행으로 리로써 기를 누르고 도덕적인 생활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말. 예를 들어 퇴계는 조광조의 죽음을, 아직 조광조가 학문이 미숙하고 성정을 제대로 닦지 못했기 때문에, 말인 즉슨 리로써 기를 못눌러 자주 어그로를 끌다 죽었다고 까기도 했다.

이러한 강렬한 도덕주의는 남인으로 하여금 근왕주의적인 성향을 띄게 해주었다. 신분이 높을수록 리가 더 높다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예송논쟁에서 보여주었고, 후에는 의병운동이나 위정척사 운동의 주축이 되었으며, 이 계열에서 그리스도교가 수용되기도 한다. 리의 주체가 왕 대신에 하느님으로 대체된 것.

그리고 이 계열에서 일본 성리학에 영향을 미쳤는데. 임진왜란의 관료이자 의병장이었던 강항이 그 주인공이다. 강항은 이황의 제자 강준의 동생으로, 자기 형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므로 엄연히 퇴계학파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의병장으로 왜군과 싸우다 포로로 잡혀, 쿄토로 끌려가서 승려와 학자들에게 이황학파 계열 성리학을 전파하였다. 강항의 대표적인 제자가 일본 유학의 시조인 후지와라 세이카[31].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32] 이후로 퇴계학파가 도쿠가와 막부의 주류 학문이 되었는데, 퇴계학파 특유의 근왕주의가 쇼군의 통치에 도움이 되었기에 통신사로 율곡학파의 학문이 전달되어도 주류 자리에서 놓치지 않았다. 다만 결국 퇴계학파의 근왕주의는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덴노 중심의 통일국가 체제로 변하게 하였다. 근왕주의의 주체가 덴노를 받드는 쇼군이 아닌 덴노 그 자체가 된 것.

율곡학파는 주기론으로 알려져 있는 학파로, 기대승을 거쳐 이이로 대표되는 기호지방(경기도와 충청도를 가리키는 말) 중심으로 전개된 학파. 기대승은 퇴계의 학설에 반대하여 퇴계와 논쟁을 벌인 학자다. 이후 율곡 이이가 퇴계를 비판하면서 기발리승(氣發理乘)을 주장한다. 기만 발동하고 리는 기에 올라타기만 한다는 것. 따라서 순선한 마음이 따로 발동되는 게 아니라, 잘 발동된 감정이 순선한 마음이라는 주장이 된다. 그리고 주자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을 계승하여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하는데, 이는 모두에게 통용되는 보편적 근원이며, 기는 국한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율곡학파는 서인 → 노론으로 테크를 탄다.

기의 중요성을 인정한 율곡학파는 환경과 제도의 개선을 중요시 여겨, 민생안정에 중요성을 설파했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이의 대동수미법과 십만양병설. 다만 이러한 민생안정론은 북벌론에서 제대로 악용하기도 했었다. 대표적으로 군사력 갖추고 북벌을 하려 한다면 민생이 파탄난다고 반대한 것이라든가. 실상은 서인들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기에 괜히 처들어가다 군사가 박살나고, 왕권에 밀려 권력을 잃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청나라가 건재하긴 건재했었고. 그리고 율곡학파의 입장에선 리는 보편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퇴계학파가 말하는 것처럼 신분이 차이가 리의 차이가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학풍은 예송논쟁에서 보여주었고, 여기서 사회계약설과 흡사한 성향을 보였다.

우계학파는 율곡학파와 같이 성혼으로 대표되는 서인의 한 축으로, 성혼학파라고도 한다. 성혼은 율곡과 퇴계의 학문을 일부 비판하면서도 절충하였다. 이 우계학파가 서인 → 소론으로 테크를 타면서 소론이 성리학을 탄력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한편 조선 중기부터 양명학의 도입 시도가 있었으나 성리학의 교조화가 진행되면서 그 세력이 더욱 약해졌다(그렇다고 대놓고 탄압한 것은 아니다). 사실 성리학이 교조화되기 한참 전에 양명학의 도입이 시도된 바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황이 저서 '전습록변론'(왕양명의 저서인 <전습록>을 연구, 비판한 저서)에서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유교에 맞지 않다며 맹렬한 비판을 가해 뿌리를 내리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양명학이 평등을 주장하고 신분제를 부정하는 면이 있기에 조선사회가 무너지는 꼴을 볼수 없었기도 하다.

3.3. 조선 후기

17세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중국보다 더 유교화된 사회로 평가받는 교조화된 성리학 천하를 달성하게 된다. 그 여파로 주자가례의 보급과 강요로 여권이 하락하거나 장자 상속이 이루어지는 등의 모습이 나타난 것도 이 때였으며, 전국에서는 향약이 시행되어 유교적인 사회 통제를 강화하였다. 통치의 차원에서는 유교 학파에 따른 논쟁이 활발히 벌어져 예송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전국 각지에는 서원이 설립되어 자신들의 학파를 고수하였다. 흔히 '18세기 서민 문화의 성숙'을 이전의 양반 성리학 문화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가례의 보급과 제사의 수행 등 개인 혹은 향촌 사회에서 성리학의 보급은 조선 후기에 오히려 큰 진전을 보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남인은 경기도 남인인 근기학파와, 경상도 남인인 영남학파로 갈라지게 된다. 근기학파는 경세치용을 기치로 내세운 중농학파로 토지재분배를 위한 자영농 육성을 주장했고, 영남학파는 서원과 향약을 강화하여[33] 위정척사파의 뿌리가 되었다.

노론 사이에서는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같느냐 다르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간을 중심으로 인물성동론(경기도 중심 낙론)이, 한원진을 중심으로 인물성이론(충청도 중심 호론)이 펼쳐졌다. 이를 호락논쟁이라 한다. 근데 이 논쟁의 본질은 리가 기에 제약되냐 안 되냐를 논쟁한 것이다. 말하자면 물(物)에도 리가 있느냐 없느냐 이런 논쟁이다. 인과 물의 성(리)이 다르다는 건, 인간과 사물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내재된 리도 다르다는 논리. 이것이 율곡학파의 주기론적 정통이다. 근데 인간과 사물의 성이 같다고 하면 뭐가 되었던 리는 제약되지 않고 보편적 성질을 띤다는 뜻이 된다. 인물성동론은 퇴계의 주리론적 경향을 많이 받은 사상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호락논쟁은 오랑캐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것이다. 당시엔 오랑캐는 사람 취급을 안하기에 물(物)에 들어가는데, 인물성이론과 인물성동론 자체는 오랑캐와 거리가 먼 이론이지만, 낙론의 논리는 인간이나 짐승이나 똑같이 리가 있으니 오랑캐도 리가 있으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것이고, 호론의 논리는 오랑캐는 짐승과 같아 리가 없으니 그들의 문화를 받으면 짐승처럼 된다는 것이다. 결국 호론이 대세가 되어서 낙론은 정계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데. 결국 낙론은 이용후생을 기치로 내세운 북학파의 뿌리가 되었고, 호론은 영남학파와 같이 위정척사파의 뿌리가 되었다. 19세기 제국주의계를 강타한 사회진화론의 대선배

다만 이때 남인은 대체적으로 호론에 동의하였다. 퇴계학파의 이기호발설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인물성이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원론적인 차원에 가깝고. 남인의 인물성이론은 '인간에게만 오로지 리가 있고, 오랑캐에게도 사람이니 리가 있다.'는 것 정도다. 한마디로 인물성이론에서 호론과 남인의 차이는 오랑캐를 사람으로 보나 안보냐의 차이. 예를 들어 남인계 실학자 정약용의 「기예론」에서는 인물성이론이 얼마나 잘 나타나 있는지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기 우계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갑술환국 이후로 남인의 처리문제에 대해 온건한 주장을 하면서 송시열과 키배를 벌였던 윤증이 있다.[34] 그리고 양명학을 집대성한 강화학파의 거두 정제두가 있으며, 이것이 한말때「유교구신론」으로 성리학을 비판하고 양명학을 주장한 박은식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우계학파가 양명학을 신봉하는 학파는 아니고 애초부터 성혼은 양명학과 거리가 있던 선비였지만, 양명학이 주자학과는 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이념적 기반으로서 우계학파의 전통으로 이어졌었다.

한편 제두를 비롯한 소론학자들을 중심으로 명학이 명맥을 이어갔으며, 개화기 박은식은 유교 구신론을 펼치면서 그 근거를 양명학에 두기도 했다.

조선 말기 안동 김씨 세도가문은 고증학을 밀어주었는데, 당시 고증학은 고전 연구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현실 개혁에는 정작 도움이 되지 않았다.[35] 또한 고증학에 영향을 받은 실학자들은 성리학을 부정한 게 아니라 고증학을 통해 성리학의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한 선비들이었다. 그러니까 고증학 = 실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증학이라는 것이 사실 사상이기 보단 학문적인 연구 방법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어쨌든 이 고증학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한반도에서 유행하면서 백과사전류 저서나 문헌 고증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예를 들어 한백겸의「동서지리지」는 고대지명을 새롭게 밝히어 고구려의 발상지가 평안도가 아닌 만주라고 고증했으며, 한치윤의「해동역사」는 중국부터 일본까지 540여의 서적을 참고하여 한민족과 중국 및 일본, 여진에 대한 문화 교류를 상세히 기록했고, 추사 김정희는「금석과안록」에서 북한산비를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히어 당시 신라의 강역을 고증하였다.

4. 일본에서의 유교

일본에서 유교는 6세기에 들어왔다. 백제 출신의 도래인인 오경박사(五経博士)가 531년에 전파했다. 왕인논어를 들고 왔다는 얘기도 있어 5세기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에선 종교적 색채가 엷었고 지배층을 위한 제왕학에 가까웠다.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령제가 쓰이자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유교 교육이 도입되었으나 일단 일본에는 과거시험이 없었고 불교가 융성하면서 존재감을 상실했다.

가마쿠라 막부에는 주자학이 전파되었다. 15세기에 이르면 오닌의 난이 일어나고 수도인 교토가 황폐화되면서 유학자들은 각 지방으로 들어갔으며 승려가 유학을 연구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에도 막부가 들어서자 불교와 유교를 분리하여 유교를 제왕학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에도 막부의 쇼군들 중엔 도쿠가와 츠나요시 같이 유학을 장려한 인물들이 있었다. 무사층을 관료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고 사농공상의 마인드는 일본에서도 나타났다. 명학이나 주자학이 기본이 되었으나 자기들 자체적으로 고전을 해석하는 식으로 일본 유학은 독자연구 독자발전하였고 무사 계층에서 발전하였다. 그리고 유학의 존왕양이 사상은 메이지 유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메이지 같은 경우엔 상당히 유교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교육칙어 등에서 유교적인 배경이 잘 나타난다. 다만 무사층을 제외한 일반 상민이나 평민들 사이에서 유학은 듣보잡이었다. 그때문에 현대 일본에서도 연구자를 빼면 유교를 아는 사람은 잘 없다.

다만 유교라고 직접적으로 강조하지 않았을 뿐이지, 에도 시대부터 유유서 등의 종법질서 법칙을 무가제법도 등에 적용하면서 실제 일본 문화에서 유교의 영향은 상당히 크게 나타났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유교 도덕을 '수신' 등의 교과서 과목에 집어넣어 교육하면서 극단적인 충(忠)을 강조하는 등의 영향이 생겨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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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의 공자묘.

5. 베트남에서의 유교

베트남어로 유교는 'Nho giáo'라고 부른다. 한나라때 중국의 지배를 받을때 유교가 베트남에 처음 들어오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유교가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리 왕조(李朝, 1009년 – 1225년)[36]때로 하노이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가 건설되고 과거 제도가 시행되었다. 후 레 왕조(1428년 - 1788년) 시기에 국가의 주요 이데올로기가 되서 베트남의 유교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37]. 이 시기에는 불교와의 갈등도 있었다. 다만 베트남의 유교 수용은 중국의 영향을 받던 북부지역에서 이루어졌고 베트남과 민족과 문화가 다른 참파[38]는 유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불교와 더불어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종교가 바로 유교.

6. 종교? 철학?

"유교를 종교로 보아야 하는가? 철학으로 보아야 하는가?"하는 논란이다. 논란을 벌이기 전에 먼저 종교철학이 뭔 소리인지 해당항목을 보고 정확히 알아보자.

막스 베버의 종교 사회학에 따르면 유교는 종교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일단 합리적인 체계와 교단이란 것이 존재하고, 게다가 그 교리를 꾸준히 재생산해내는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 거기다 이를 믿는 이들의 연결 고리 또한 존재하기도 하는데다 그게 신이든 아니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회 내에서 공유되는 하나의 인식체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막스 베버의 기본 관점이기 때문.

그러나 막스 베버가 동양을 이해하는 수준이 매우 피상적이었고, 현재로서는 별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유교의 집단은 교단이라기보다는 학파에 가까운데, 이런 학파도 교단 취급하면 칸트 학파, 헤겔 학파도 종교로 분류되어야 된다.

그런데 '종교'와 '철학'이라는 틀은 서양인들 특유의 헤브라이즘(그리스도교)과 헬레니즘(그리스철학)의 분리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러한 분리는 서양 이외의 세계관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게다가 서양의 철학도 그 기원은 종교이기 때문에 알고 보면 서양에서도 종교와 철학은 분리가 안 된다. 서양철학의 근원에 해당하는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의 신앙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사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예 제1원인(순수형상)을 신이라고 말한다.

불교는 워낙 다양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윤회라고 하는 사후세계를 중시하고 아미타불이나 미륵불처럼 신이나 다름없는 것들이 언급이 된다. 정작 석가모니는 전혀 종교적인 인물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불교라는 종교는 그런 식으로만 전개되지가 않았다.

도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멀쩡히 사원이랑 성직자가 다 있고 헌금도 받는다. 부적 만들어서 파는 거의 원조가 도교다. 도교하고 도가철학은 다르다. 영어로 둘 다 Taoism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헷갈리지 말자.

힌두교의 경우도 '인도철학사를 보면 인도에서는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지 않는다'라고 서론에서부터 언급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인도철학에서 이 세상의 모든 현상 아우르는 하나의 본체적 원리를 말하는데, 이 원리는 동아시아의 도(道)와 같은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는 본체/현상의 이원론 자체가 없다. 특히 유교에서 언급되는 도는 그냥 상식적인 삶의 원리 같은 것이지 우주를 아우르는 대단한 원리 같은 게 아니다.

종교라는 것을 시공간을 초월하는 생각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유교는 당연히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이데아나 물자체 같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개념들을 자주 운운하는 서양철학마저 종교로 분류되어 버릴 수 있다.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를 따지려면 종교를 어떻게 정의 내릴 건지부터 명확히 해야 되는데 그거부터가 애매하다. 서양철학자 중에도 그리스도인이 많았고 과학자 중에도 그리스도인이 많은데 그렇다고 철학과 과학을 그리스도교와 섞어서 생각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철학을 분리한다는 것 자체가 "철학은 반종교적이어야 한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는 말인데 막상 유교의 경전들을 보면 딱히 종교적 성향을 근대서양사상처럼 거부하려고 애쓰지 않고 있으며, 서양에서는 그리스도교와 근대사상이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지만 동양에서는 그런 게 없었다고 보아서, 유교를 종교로 판단할 수도 있다. 더구나 불교를 통해 신비철학을 흠뻑 받아들여 본래의 유교에서 일신한 것이 성리학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유학을 종교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무시할 수 없는 사항들이 다시 제기된다. 서양 근대 사상에서는 예수를 중심으로하는 신앙이 종교였고 이에 대한 거부반응이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려는 시도들이었을 텐데,이렇게 보면, 유학도 불교에 대한 일련의 거부 반응이 있었다. 조선 유학을 노정한 자인 정도전의 씨잡변과 같은 책을 비롯하여, 조선조 내내 이루어진 유억불정책도 어찌보면, 종교적 성향과 거리를 두려는 유학의 거부반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성리학이 불교를 흡수하여 이루어진 전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흐름의 핵심에 있었던 성리학자들도 불교에 대해서는 내내 적극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피타고리안 종단, 오르페우스 밀교단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여, 그를 종교인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처럼, 유학, 특히 성리학에 대해서도 핵심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철학의 반종교적인 특성을 강조해온 것 자체의 역사도 복잡미묘하다. 이것은 근대철학의 탄생의 주문이다. 중세의 신학의 하위처럼 취급되던 철학이, 근대에 와서야 전세를 역전시켜서, 철학의 하위로 신학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것은 종교적 인간관과는 다른 실존적 인간관을 묘사하려는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학자들의 분투가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근대 철학자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학문을 비롯하여, 철학으로서 연구하는 어떤 분야를 종교와는 다른 것으로 내세우려는 성향이 생긴 것이다.

명칭에 대한 이러한 문제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단어를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른 말도 있고, 같은 현상을 나타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어가 달라져서 뉘앙스가 달라지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분류할 때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분류하고자 할 때는 그 사람의 강조점이 드러난다. 유학이냐 유교나, 철학이냐 종교냐 문제는 고찰자가 유학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지를 알 수 있는 주요한 지표이다.

6.1. 천명(天命)


천(天)은 사람 위에 있는 공간을 기호화 한 것으로, 처음에는 순수하게 천공을 의미하는 표현이었는데, 주나라가 패권을 장악할 때부터 하늘 처럼 인간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힘의 기호로서 부각된 말이다. 초기에는 뚜렷한 인격신 개념은 없었고, 또한 주나라의 지역신은 아니다. 그러다가 천이라는 표현은 은나라에 와서 상제(上帝)와 거의 겹쳐지는데, 갑골문에서 보이는 종교성은 춘추전국시대가 되면 점차 사라진다.

춘추좌씨전 같은 것만 봐도 춘추시대에 중국에서 종교색이 약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나라가 잘 될 때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라가 망해가면 신의 말에 귀를 이울인다"는 표현까지 나온다. 공자가 등장할 때 쯤에는 천명을 인문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세계관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시대에도 여전히 종교적 색채는 함께 보인다. 원래 21세기인 지금도 성모마리아가 피눈물을 흘렸다는 걸로 난리치는 게 인간이다. 종교성은 지금도 공존하고 있다.

천명(天命)론은 천이 인간에게 물리적인 힘을 넘어 또 다른 힘을 가할 수 있는 주체임을 분명히 한 게 아니다. 천은 주체가 없다. 맹자도 천은 백성들의 귀로 듣고 백성들의 입으로 말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민심이 천이라는 뜻이지 천이 인간들을 조종한다는 그리스도교적인 말이 아니다.

맹자는 천명을 혁명과 결부시켜서 이전까지 위정자의 덕만이 천명과 결부되던 것을 사상적으로 전환시켜 '민심'과 '천심'이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일반민(民)과 신적인 힘(天)은 '민심 = 천심'이라는 소통로를 통해 연결되는 것이고, 이 시점에서 천은 일종의 '세계 원리'로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천의 종교성은 상당히 사라졌고, 실제로 맹자의 사상도 현실성이 매우 강하다.

천이라는 말 자체가 고대의 신성 개념부터 후대의 천지자연적 개념까지 모두 축적된 표현이다. 공자나 맹자나 천을 신처럼 묘사하는 말을 한다. '민심이 천심이다',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왕조가 교체되어야 한다'라는 것은 요즘 철학용어로 말하자면 당위에 해당되는 것이다. 사실 맹자의 성선론이라는 것도 본성을 논했다기보다는 당위를 논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맹자의 주장을 '맹자가 제시한 신적 권위를 따르는 종교'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이 선하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칸트는 빼도박도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유교는 은나라의 종교를 완전히 타파하겠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유교경전을 봐도 항상 하은주 3대를 함께 말한다. 따라서 유교가 종교성을 띠고 있었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사후세계라든가 하느님이 결정한 운명이라든가 우주를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 같은 현상에 대비되는 본체적 개념은 없다. 물론 종교가 꼭 본체적 개념을 포함해야 되는 건 아니다.

6.2. 제사(祭祀)

제사에서 다뤄지는 혼백은 본래 한 단어가 아니다. 유교를 창시한 공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괴력난신을 입에 담지 않는다고 강조했으나, 유교와 별개로 도교를 비롯한 애니미즘적인 동양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氣)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데, 대충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기의 영혼적 부분을 혼(魂)이라 하고, 육체적 부분을 백(魄)이라고 한다. 혼과 백은 각각 천(하늘)과 지(땅)에서 온 것이고,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되어 각각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 후대 유교(혹은 성리학)은 다분히 초기 유교와 불교, 그리고 애니미즘을 일정량 섞어 결합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천과 지는 그냥 공기와 흙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천지라는 유기체의 두 측면을 가리키는 특수한 표현이다. 대충 세상도 천과 지로 구성되어 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만물도 모두 천과 지를 포함한다고 생각하는 것.

따라서 혼과 백은 '초자연적 신'이 아니다. 동양인에게는 신적 힘이나 영혼도 만물과 마찬가지로 기(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의 모든 현상은 기의 움직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이나 산천이나 죽은 자에게 제사지내는 것이 초자연적 신을 숭배하는 모습과 외관상 똑같아 보이지만, 그 내부의 근거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기가 니미즘 같은 순수 그 자체의 자연력은 아니고, 특히 한국에서는 풍수지리까지 끼얹으면서 다분히 기복신앙적인 면과 조상 숭배의 형태를 띄게 되었지만 말이다[39].

물론 혼과 백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현실의 인간 사회에 힘을 못 미친다는 소리는 아니다. 세계적으로 봐도 초자연적 신보다는 자연신이 많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본다면 혼과 백은 당연히 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제사라는 것이 있지도 않은 것을 섬기는 종교적 모습으로 보이기 충분하다. 사실 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한데, 반드시 인격신만을 신으로 여기지 않는 종교도 드물지 않으며, 불교도 기복적 성격으로 변질되었을 뿐 본래 신을 숭배하는 종교는 결코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18세기부터 청나라의 제사를 바라본 타자인 가톨릭 계에서 논의가 존재했으며, 현재에도 유가 밖에 있는 타자가 보기에는 충분히 논란거리로 삼을 대상이 된다. 이것이 단순한 '조상을 공경하는 사회적 관습'인지 '종교적 행사'인지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평가가 다를 수 있으며, 사실 둘 다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사실 조선 이후 제사법은 주자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신분에 따른 차등을 강조했던 주자는 3품 이상이 되는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고조까지의 조상을 기릴 자격이 있다고 보았으며, 그 아래 사람들은 부모의 제사만을 치르도록 가르쳤다. 즉 주자에게 조부 윗대의 조상들은 그렇게 예를 차릴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애초에 몇 세대 터울 지는 윗세대에게 효성을 느낄 여지 자체가 적기도 하거니와 일반인들이 감당하기에 그 부담 또한 막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와전된 조선에서는 벼슬이 없는 사람까지도 '효'를 4대 이전의 알지도 못하는 조상에게까지 소급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어쩌면 주자 본인은 정말 공경하는 마음도 없이 맹목적으로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행위가 자칫 허례허식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했을런지도 모른다.

6.3. 인문화의 역사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라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인격신, 영원불멸한 사후세계를 가리키는 것인데, 물론 이는 종교를 정의하는데 있어 하나의 단선적인 기준일 뿐이고 실제 종교라는 것이 갖는 스펙트럼은 생각 이상으로 넓다. 긴말할 것 없이 사이언톨로지 같은 것도 종교 취급되는 현실을 상기해보자. 어쨌든 중기 이후의 유교는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천(天)이나 혼 따위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언급하는 편인데 이는 유교의 제사 예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지 죽은 자에 대한 예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천주교의 관점에서 제사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논어의 신종추원이라는 표현에서도 이미 언급되는 말이다. 죽은 자의 영혼에게 기(氣)를 북돋아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원래 유교의 제사는 4대만 하게 되어있다. 즉 4대가 지나면 혼이 흩어져 없어진다는 것이다. 기를 북돋고 자시고 할 게 없다. 조선말기에 천주교가 유행할 때 유학자들이 천주교를 반대한 대표적 이유 중 하나가, "불교처럼 천당과 지옥을 말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일정량 길흉에 관계된다는 미신적 측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자기 부모님을 잘 모시냐 안 모시냐의 문제였다. 제사를 제대로 안 지낸다는 건 부모님을 내팽겨치는 불효막심한 놈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유교는 길흉화복을 비는 종교와는 거리가 있다. 그보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불효자로 낙인 찍는 사회적 규약을 지탱하던 이론이었고, 이러한 면에서 윤리 수칙을 강제하는 종교적 측면이 있었다.

논어에 역(易)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물론 기본적으로는 점술(占術)을 의미하지만, 사실 오늘날 주역을 살펴봐도 알 수 있지만, 주역의 핵심은 점술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易)에 대한 논리다. 역이라는 문헌 자체가 점술로 출발해서 철학적 내용이 점점 증보된 책이다. 하지만 역(易)의 경우도 본질은 은나라 이전의 점복(占卜)에 두고 있으며, 이후 시대에서도 진지하게 믿는 건 아니었지만 역경의 사용 목적 중 하나가 점복술이었다 것은 분명하다.

성리학이 불교를 배척했던 것은 그것이 외래적인 종교였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성리학은 외래종교를 타파하고 중국 고유의 종교를 되살리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그리스도교이슬람교 같은 종교는 아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서 인문을 되살리려는 운동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것이 경직되어 성인을 절대시하거나 현실을 도외시하고 형이상학에 집착하게 되면 종교와 별 차이가 없게 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리학의 폐단이지 본질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성리학이 정확히 뭔지 알고 싶으면 해당 항목을 참조.

물론 성리학 이후에도 양명학이 등장했기 때문에 성리학이 곧 유교라고 할 수는 없다.

7. 비판

조선 멸망에 즈음하여 성리학은 발전의 걸림돌인 족쇄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서양문명과 그리스도교의 보급에 의해 생활면에서도 많은 자리를 양보해줘야 했다.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기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유학자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하였다. 또한 오늘날 대한민국국가나 한국 사회의문제점에 대해서 직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차별,전체주의,노슬아치, 슬아치,직업의 귀천,남아선호사상,똥군기,호주제,가부장제,나이를 내세우거나 들먹이는 문화,갑의 횡포등의 악습이 뿌리내리는 것을 조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해방 이후에도 제사, 성차별에 대한 개혁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결과 해방 후 여성들의 개신교 개종을 가속화 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애당초 공자가 주장한 3년상은 당시 시점에서 봐도 묵자 등에 의해 허례허식이라고 까이는 경우가 있었다. [40]

그러나 오늘날에도 유교사상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종가나 종친의 경우 현대화가 된 지금도 유교사상을 따르고 있으며 종가 및 종친 출신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 가족 및 종친들이 모두 모여서 명절이나 조상 기일 때 집단으로 제사 및 차례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지금도 일부 종가 및 종친쪽에서 차례를 지내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유교 방식 그대로를 따르고 있으며 일부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생소한 제사 방식이 남아있다. 대부분의 일반가정에서는 제사상이나 차례상을 직접 만들거나 차리기도 귀찮다며 주로 온라인 등에서 배달 서비스로 대신하는 경우가 있지만 종가 및 종친에서는 조선 중대 이후 확립된 이 '의식'을 아직까지도 고수하고 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퍼도 이 곳에서는 반드시 유교 사상의 전통에 따라 모든 종친들이 수제로 한 차례 및 제사음식을 차려야 한다.

유교의 제사는 현대에는 비판 받는 대상이지만, 최초로 유교식 제사 의식이 주창된 춘추시대에서는 분명 어느 정도 가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춘추시대의 혼란 기에는 아직 후대의 도교처럼 엄밀한 종교의 체계는 갖추지 못했으나 지역마다 등의 잡다한 신(神)을 섬기는 신앙이 상당히 번성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숭배 의식이 무당의 지도를 받아 상당히 폐해를 끼치고 있엇다는 점이다. 개 중에는 (실제로 춘추시대 이전의 풍속이 잔재한 것일수도, 새롭게 나타난 것일수도 있지만) 상나라의 풍속처럼 사람을 신에게 바치는 인신공양을 하는 숭배 의식마저 있었다. 예를 들어 황하하백에게 바치는 제사는 사람을 강에다 던져버리는 인신공양 의식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유교에서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제사를 '음사(淫祀)', 즉 사악한 제사이며 복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배척하고 (주나라의 의식에 기초를 둔) '올바른 제사'를 강조했다. 결국 전근대 시대에 유교의 제사 의식은 신을 빗대어서 벌이는 사이비 종교 풍속에 어느 정도는 제동장치가 되어주기는 했다.

특히 조선왕조 때부터 불교를 억제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때문에 불교계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애초에 조선시대에는 사상적으로 근친관계인 양명학을 비롯해 그 어떤 학문/사상/종교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나마 다른 사상은 싹이 틀 때부터 철저하게 짓밟은 반면 이미 성리학보다 앞서 존재했기에 일정 세력이 갖춰져 있던 불교는 확실히 척결하지 못했다. 조선의 유교계에서는 이미 망해버린 옛 고려의 흔적을 지우고 유림에 대한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이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고려왕조 때까지만 해도 국교(國敎)로 지정되었던 불교를 자신들의 유교로 바꾸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지위강화의 목적만 있던 것이 아니라 건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을 유교를 통해 통제하려는 목적과 불교계가 가지고 있던 막대한 재산을 국고로 흡수하기 위한 실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높은 신분과 지위를 받았던 승려들도 아예 신분제도상에서 천민으로 격하편입시킴에 따라 조선왕조 때는 승려들도 천민 신분이기 때문에 일반 천민들과 함께 막노동에 동원되거나 투입되기도 하였다[41].

근대 때부터 전래되어 온 개신교천주교 등과도 갈등 관계. 특히 서양에서 건너온 이교(異敎)라고 규정하여 '서학(西學)'으로 불렸던 시절 조선 내에서의 개신교 및 천주교도 탄압과 병인양요신미양요까지 발발하면서 조선 유림계의 반양(反洋)과 반(反) 기독, 반(反) 천주 성향이 더욱 짙어지기도 하였다. 사실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에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었다. 일단 부인부터가 천주교 신자였으니까. 하지만 어른의 사정과 유림들의 거센 반발 앞에 대원군도 머리를 숙였고, 그렇게 해서 병인박해 등이 일어나 많은 외국인 신부와 국내의 천주교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중국은 공산당 집권 후 유교의 폐해가 사뭇 크다고 진단하며 문화대혁명 시기 유교를 봉건시대의 악습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유교의 경전과 유물들을 파괴했다. 이 탓에 중국에서는 80년대 후반에 유교 복원을 위해 한국의 성균관을 방문하여 종묘제례악을 비롯하여 유교식 예법, 제사법 등을 역수입해가기도 했다. (물론 이는 일종의 문화 복원 차원일 뿐, 유교 정신으로 회귀하자거나 하는 적극적인 복고운동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를 도입한 북한 역시 유교의 잔재를 악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한편, 가부장주의 같은 유교의 부정적인 면만 뽑아다 주체사상이란걸 만들어버렸다.

논어 양화편을 보면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 하면 버릇없이 굴고, 멀리하면 원망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몇몇 옹호론자들은 이 구절이 앞뒤맥락없이 나오며, 누구나 마음대로 글을 집어넣고 뺄 수 있었던 시대상황, 그리고 공자의 태도들 볼 때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주장을 하나 근거가 희박한 것이 논어란 책 자체가 공자 자신이 저술한 것이 아닌 공자의 제자 중 하나였던 증자의 제자가 중심이 되어 각자 적어두었던 문서들을 편집해서 만든 공동저술이었고 진의 천하통일 후 진시황이 대대적으로 법가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백가들을 탄압한 휴유증[42]으로 전한 때 사람들의 전승 및 몰래 숨겨두었다가 다시 찾은 문서들을 바탕으로 복원했던 역사 때문에 현존하는 논어는 전체적으로 앞뒤 문맥이 매끄럽지 못하며 비문이 꽤 있다.[43] 그리고 공자가 2500여년전 사람인 것을 생각해보자. 가부장적인 남성우월주의 문화가 '상식'이었고, 사방이 전란이었던 그 시대에 육체적으로 연약한 여자를 동등한 인간으로서 취급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또한 공자가 직접 그 말을 했든 아니 했든 유교의 폐해를 얘기할 때 이 구절을 빼놓을 수는 없다. 조선시대 원문검색 사이트에서 이 말의 한문 구절인 '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만 검색해도 지겹도록 튀어나오며 조광조, 정철, 권근 등등 대표적인 유학자들이 잘만 써먹어왔다. 유교가 사실 공자만의 학문이 아니고 맹자,순자,중서같은 후세의 수많은 유학자들이 참여한 일종의 공동철학이기 때문에 유교와 남녀 차별이 밀접하게 관련 있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양화편의 진위 여부를 구실 삼아 사실 유교는 남녀차별적 학문이 아니라고 둘러대는 건 유교가 관학으로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기나긴 역사에 비추어 보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태임 역시 분명하다. 뭐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화목함이 어쩌고 하는 경지를 운운하더라도 성의 차이를 근거 삼아 개인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별적인 사상이다.당장 칠거지악같은 악폐습을 보자.[44]

반론자들은 유교 외에도 이런 차별이 내재된 사상이나 종교가 많다면서 문제점을 희석시키려 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이는 논리적으로 피장파장의 오류 이며 이미 그런 의식이 크게 희석된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한 변호라고 할 수도 없다. 즉 전근대에 세계적으로 남녀차별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 영향을 현대에 조금이라도 소급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예컨대 호주제와 같은 불합리하고 시대착오적인 제도에 대해 유교적 전통을 근거 삼아 옹호하는 논리(게다가 호주제는 일제 때 도입된 제도다!)는 '옛날엔 됐는데 왜 지금은 안 돼냐' 같은 변명에 불과하다. 유교가 긴 시간 동안 한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 한국의 근대화는 늦게 이루어진 점을 감안하면 한국에서는 남녀평등에 있어서 특별한 악적으로 유교를 다뤄도 무방할 것이다.

연장자와 연소자의 관계에 관련해서도 '유교 때문'이라는 여론이 강한데, 조선시대 기록을 살펴보면 4, 5살 차이나도 친구하던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심지어 15년 차가 나도 친구했던 사례도 있다[45]는 것을 들어 유교에서도 생각보다 연장자 - 연소자 관계가 유연했고, 연장자 존중은 세계적으로 흔한 일이며, 지금처럼 연장자 - 연소자 관계가 강고해진 것은 태평양 전쟁 패망 이전의 일본군 탓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허나 정작 그 일본군을 낳은 일본도 한국처럼 연배를 심각하게 따지고 들지 않는 사실을 보면, 모든 병폐를 일본 탓으로 책임지우는 것도 지나친 비약이다.

분명 유교의 장유유서 개념은 나이가 벼슬로 기능하는 데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일제시기는 오히려 그 이전까지 어린 소년 소녀에 대한 대우가 너무나 열악한 사실을 걱정한 천도교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라는 용어를 보급해 커다란 인권 신장의 전기를 마련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떤 관계든 격의 없이 친해진다는 전제가 있다면 나이 차이가 위처럼 희석되는 것은 당연하며, 실제 생활에서 나이 차가 문제가 되는 상황은 이런 친분 관계가 아니라 사무적 관계, 혹은 초면이거나 분쟁을 빚는 경우, 선후배 관계 같은 경우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장유유서'와 '효'가 사상의 근본이자 국가 이념까지 고착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동례를 찾기 어렵다. 애초에 유교는 강한 가족적, 사회적 질서를 통해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념이었으며, 성리학이 서민층에게까지 보급되면서는 종법적 질서로까지 확장되었다. 이는 굉장히 안정적인 정착 사회의 기틀을 마련해주었고 건전한 사회 관습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지만, 서양의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도입된 현재에는 과거 유교같이 국가 차원에서 강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농공상 등 계급차별을 조장해 이가 문과 우대와 이공계 천시문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았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도 '화이트 컬러', 즉 지식을 상당히 요하는 전문 직종은 학부모들의 절대적인 지향점이 되는 반면 공부를 상당히 하더라도 몸 굴리는 과학, 기술 관련 직종은 천시를 받는다.

이 또한 물론 시대의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현대 사회의 윤리로 보자면 기본적으로 모든 직업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지만, 전통 시대의 동아시아에서는 자급자족의 경제구조가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농업은 '천하의 근본'이 되는 직업이며, 공업은 자급자족을 위한 농기구 정도를 보조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고, 상업은 중간에서 이익을 갈취하는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농공상의 관계는 '상업을 통해 부족한 물건을 충당하게 한다'는 개념 이전에 중앙 집권적 국가가 완성되어 '국가에 의해 필요한 물건을 배당하고 빈민을 구휼한다'는 개념이 확립된 동아시아 문화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근대와는 거리가 멀어졌고, 더구나 정작 농업 생산량에 획기적 전환을 이룩한 계기는 형식적인 농민 우대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발명한 질소 비료였다. 이런 결과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서구권에 역전당하면서 '실패한 이념'이라는 딱지를 떼기 힘들어졌다.[46]

사(士)의 경우, 즉 관료 및 공무원 계층은 국가를 총괄하는 마스터플래너이자 기득권층이므로 어느 사회에서나 우대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文)적 자질을 지닌 지식인층을 공고화된 학습 체계를 통해 재생산하며, 결과적으로 실용 지식과 거리가 멀어지는 현상은 유교 문화권에서 강하게 나타난 현상이다. 유교의 영향으로 빠르게 이루어진 교육 시설의 보급과 학습 체계의 형성은 선진적이었다고 할 만하지만, 그 내용 차원에서는 신분제 및 안정된 사회와 결합하면서 기존 질서의 유지와 실용 지식과의 괴리를 불러왔으므로 복합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편 전통 시대 다른 지역의 대다수 지배층들은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하여 그 과정에서 피지배층들에게 피해를 준 반면, 상대적으로 유교 문화권에서는 학문에 권위를 둠으로써 동시대 어느지역보다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통치를 가능케 했고 지배층 내부의 갈등에 의한 사회적 피해를 최소화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유교 이념 내부에 존재한 빈자에 대한 구휼, 약자에 대한 보호 등의 순기능적 이념은 사회 안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유교 국가들 역시 피지배층의 불만을 공포로 잠재우기 위해 능지형, 거열형, 오체분시 같은 가혹한 형벌을 실시했으며, 말 안 듣는 노비를 때려죽이는 등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책임을 면죄받는 지배층도 존재했다. 애초에 동아시아에서 명분은 유교에서 취했지만, 그 내용 면에서는 법가에서 빌려와 채워넣은 것도 많았으며, 엄밀하게 따지자면 껍데기는 유교, 알맹이는 법가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본문에서 일관적으로 강조한 것은 현대의 시각으로 전통 사회에 걸려 있던 여러 가지 제약을 무시하고, 다른 문화권과의 공정한 비교 없이 전통 사회에 유교가 남긴 영향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지만 그것 못지 않게 전근대의 유교 이념을 무작정 '아름다운 전통' 운운하며 현재의 악습을 정당화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다룬 여권 문제, 연장자-연소자 관계 문제, 직업 간의 귀천 문제 등은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해소되어야 하는 문제점이다. 애초에 어느 사회에서나 다른 이념을 수용할 때는 엄정한 비판 하에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은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상식이다.

유교는 현대적 정치 이념과 거리가 멀고, 그러한 정치이념 안에서 가정되는 보편성을 갖추지 못했다. 인간 본성론의 보편주의가 정치 영역에서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고, 애초의 그 인간 본성론 자체가 현대와는 들어맞지 않다. 현대의 정치이념은 고정된 형태의 인간 본성을 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의 구조와 당시 사회에 걸려 있던 여러 가지 제약에 대한 이해 없이 현대의 기준만으로 유교를 평가하는 것은 금물이지만, 무작정 유교의 이념 가운데 현대의 민주주의, 평등과 인권 사상과 유사한 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납득하기 힘들다. [47]

이러한 비판이 한국인의 정신문화에 있어서 몹시도 중요한 까닭은 아직도 유교적 헤게모니가 한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현대적 정치 이념과 유리되어 있음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사실상 우리 세대까지도 유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 게 옳다. 제사 등의 풍습에서 장유유서 등의 사회문화를 거쳐 하극상이나 효도 등의 일상언어에 이르기까지 떨쳐내기 어려울 정도로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단순히 유교에서 벗어나려기보단 조금이라도 더 정확히 유교와 현대사회 간의 괴리를 파악해내 좋은 영향은 현대 사회에 맞는 뱡항으로 잘 순화해서 보존하고, 유교가 끼치는 악영향을 떼어내되 무엇보다도 그 악영향의 빈 자리를 한국 사회와 잘 들어맞는 올바른 사상으로 메꾸면서 또한 이러한 것을 사회 일선에서 실천해 나가도록 시민사회 등과 연계해 나가는 것이 한국 유학에서 몹시도 시급,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8. 경전

예전에는 5경이라고도 했으나, 송나라 이후 맹자를 포함하여 13경이 정립된다. 그전까지는 12경으로 통용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서삼경은 성리학에서 다이제스트판을 낸 것이다. 정작 중국인들에게는 사서삼경이라는 표현이 생소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성리학이 강하게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서(書) - 상서, 서경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문서를 모은 것.
  • 시(詩) - 시경이라고도 한다. 황하유역에 유행한 노래들의 가사를 모은 것.
  • 역(易) - 주역, 역경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세상의 변화의 이치를 논하고 있다.
  • 춘추좌씨전 - 역사서 춘추에 좌구명이 전을 더한 것.
  • 춘추공양전 - 춘추에 공양자가 전을 더한 것.
  • 춘추곡량전 - 춘추에 곡량숙이 전을 더한 것.
  • 논어 -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어록. 사서 중 하나.
  • 효경 - 효에 대해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것.
  • 예기 - 예에 대한 논문집. 여기에 사서에 속하는 대학과 중용이 들어있다.
  • 의례 - 국가의 각종 의례규범을 제시한 책.
  • 주례 - 주나라의 명의를 빌려 이상적 국가체제에 대하여 논한 책.
  • 이아 - 일종의 경전 어휘사전.
  • 맹자 - 맹자의 논변을 기록한 책. 송나라 때 재발굴. 사서 중 하나.

9. 교육

한국에서 배울수 있는 곳은 많다. 전국의 향교, 서원에서 배울 수 있고, 동네 어르신들도 대학, 논어등의 경전을 읽으시고 서로 학습하는 스터디(?)가 있다. 하지만 과거와 같이 체계화된 학습이라기 보다는 사설 교습의 형태이고, 향교에서의 교육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다.

성균관대학교에는 전공과목으로 개설되어 학습이 가능하다.[48] 과거 조선을 지배하던 사상인 것치고는 안습한 현재의 모습. 전공명도 '유학과', '유교과'가 아니다. 유학동양학과[49]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어 있는데, '유교'만 배운 다기 보다는 동아시아의 역사, 철학, 정치, 미학, 문화, 사회 등등 을 배우는 '지역학'의 형태가 되어버렸다. 물론 대학, 중용, 맹자, 논어와 같이 패기 넘치는 과목도 있지만 중요성과 인기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한자 자격증이 있으면 눈감고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그런전형은 없다. 과거에 한자자격증, 한국사자격증, 또는 몇몇 내신 성적 평균 2등급 이상일 경우 지원할 수 있는 수시 전형이 있었지만,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이 마저도 당시에 자격은 정통성을 위해 내거는 것이고, 사실은 내신으로 자르는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면 국사 전학년 평균이 2등급이면 지원할 수 있었는데. 이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전국에 차고넘친다. 게다가 당시에는 수시 전형을 100개를 지원하던 1000개를 지원하던 제약이 없었다. 이렇다보니 적성을 살린 인재선발이라는 명제는 허울에 지나지 않고, 실체는 내신자르기라는 것. 어쨋든 지금은 폐지되어서 사라진지 오래인 전형이다. 수시는 남아 있지만 다른과 같은 전형이다. 정시로 입학할경우, '인문과학계열'로 입학한 다음에 2학년 대 전공진입을 하면된다.

이렇다보니, 대학에서 '유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계열'에 일단 입학을 하거나, 유학동양학부에 편입을 하거나 복수전공을 해야한다.. 둘다 쉽지 않은 방법. 따라서 대학교에서 유학을 배우고 싶다면 대학원 진학을 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50]


10. 유명한 유학자

10.1. 중국

10.3. 일본

  • 야시 라잔
  • 츠나가 세키고
  • 리 교안
  • 토 진사이
  • 토 도카이
  • 리 게이잔
  • 에다 아키나리
  • 지와라 세이카
  • 노시타 준안
  • 라이 하쿠세키
  • 나미무라 바이켄
  • 마자키 안사이
  • 나카 켄잔
  • 카에 토주 - 위의 인물들과 달리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유학자다.
  • 마자와 반잔
  • 마가 소코
  • 오규 소라이
  • 자이 슈다이

10.4. 베트남

11. 기타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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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번역은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서양인들의 번역. 유학은 공자교가 아니다. 공자교라고 해도 '공자의 가르침'이지 '공자주의'로 번역될 수가 없다.하지만 유교에서 공자를 몹시 신성시하는 점만을 떼놓고 보면서 추단한다면 서양인들에게는 공자를 떠받드는 무리로 보였을지도?
  • [2] 물론 이쪽은 도가와의 관계 문제도 있긴 하지만
  • [3] 공자 스스로는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고 여러 별들이 이를 받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爲政以德、譬如北辰居其所而衆星共之). 즉 왕은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하고, 제후들은 이를 잘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4] 정명론을 서양의 운명론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동양에는 서양에서 말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운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 [5] 애초에 천도라는 개념 자체가 제자백가가 형성되기 이전인 주나라 시대부터 전해져온 개념이다. 주나라의 신은 천(天)이었고, 이 천이 주는 운명이자 사명을 천명(天命), 그리고 이를 실행해 나가는 바람직한 '길'을 천도(天道)라고 한다. 이 개념은 제자백가 거의 모두가 공유했다. 문제는 천이 정해준 바람직한 길이 무엇이냐는 것이고, 법가 수준에 이르면 천의 역할을 거의 부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 [6] 가끔 이렇게 공자가 유가의 모범을 과거에서 찾았다고 하여 유가의 연원이 과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식의 이해라면 르네상스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당연히 르네상스는 그 시대의 사회상에 맞게 고대의 사상을 취합한 것이므로 이러한 설명은 부당하다. 유가 사상도 과거의 '모범적인' 기틀을 춘추시대 당시의 기준에 맞게 이용한 것이므로 유가 사상이 확립된 것은 춘추시대, 특히 공자에 의해서라고 말하는 것이 맞다.
  • [7] '공자는 공자교가 아니고 유교이므로 공자 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유가만의 주장에 가깝다. 이슬람교가 '무함마드교'가 아니라고 해서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되었음을 부정할 수 있는가? 공자무함마드는 당대에 인간의 이상적인 상이 되는 '유(儒)'와 '이슬람'의 개념을 창조한 것이므로 타자에게서는 무리 없이 유교/이슬람교를 '창시했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 [8] 물론 노자의 판본 같은 경우에도 곽점묘 죽간본과 마왕퇴묘 백서본의 출토로 후대의 첨가 및 윤색이 뚜렷함이 확인되었으나, 위에서 인용한 노자의 문구는 현재 통용되는 왕필본 - 죽간본 - 백서본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문구이다.
  • [9] 본래 天이라는 문자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영락없이 사람 형상이다.
  • [10] 법가 통치는 철저히 중앙의 일원적 질서(이는 법으로 나타난다)에 의거한 전국의 직할 통치가 이루어져야 실행할 수 있는 체계이다. 이를 위해 진시황이 전국에 도로를 깔고 수레의 바퀴 규격까지 하나로 통일했던 것이다. 하지만 광대해진 제국의 영토는 자연히 지방과 중앙의 연결을 약화시키면서 법가의 통치 효율을 떨어뜨렸다.
  • [11] 덕분에 고대에 사용되던 언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 이때부터 원시적인 자전도 나왔다.
  • [12] 理, 본래 불법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이나 많은 중국식 불교 용어가 그러하듯 본래 중국에 존재하는 단어나 개념 등을 차용한 사례이기 때문에 오히려 유교 측에서 역수입이 가능했다.
  • [13] 뒤의 주자는 주희, 즉 흔히 알려져 있는 주자를 가리키고, 앞의 정자는 이정(二程), 즉 주희보다 선대의 성리학자인 정호, 정이 형제를 가리킨다.
  • [14] 원나라는 신분제를 인종따라, 직업따라 나뉘었는데 남송인이 가장 천대받았으며, 그 중에 성리학자는 완전히 천 취급이었다. 허나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 중심으로만 이 정책이 유지되었을 뿐이지 중국 전역에 이 정책이 시행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몽골 제국은 정복은 해도 다스리지는 못하는 제국이었다.
  • [15] 흥미롭게도 '과학'이란 말이 일제시기에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 science의 다른 번역어로 '격물학'이라는 말과 경쟁했다. 승리한 말이 무엇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16] 그러나 서로간의 다름을 변별하려는 이 노력 또한 조금은 뜬구름처럼 보이는 게, 결국 구체적 행동이나 수양원리에 있어 둘의 동일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심즉리라 하여 마음이 곧 이치라면,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가는 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한다면 삼척동자라도 비웃을 터이다. 결국 왕양명도 심즉리라 하나 우리의 마음이 진정 원하는 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등등을 운운하는데 이 부분에 이르러선 주자의 리와 기를 둘로 나눈 주자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고 아주 같은 건 아니지만...
  • [17] 심영 말고 전국 시대의 사상가 고자. 즉 심학 계열은 공자의 정통이 아니고 고자와 일맥상통하는 이단적 학파란 얘기다.
  • [18] 심지어 무신정권 전반기 최고의 풍운아인 이의민 조차도 이들과의 연대가 매우 중요함을 알고있었다
  • [19]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사대부와는 달리 훈고학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 최우가 등용한 사대부들이다
  • [20] 원 간섭기때 부터 고려 후기대에 이르기까지 사대부들이 중앙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적은 거의 없다. 유일한 시기가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이성계의 신군부가 들어서고 난 다음부터의 시기
  • [21]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정책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다름아닌 그들과 그들의 후손격인 조선의 사대부들까지 무한대로 씹어댄 신돈이었다. 결국 신돈이 숙청 당한 후 원상복귀
  • [22] 이는 당시 신진사대부들의 상황과 연계를 해야 하는데 이들은 신돈의 옹호하에 성장한 세력이지만 결국 신돈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마침내 신돈이 숙청 당하고 다시 등장한 권문세족들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 옹호 세력이라고는 없는 상황에서 공민왕만을 바라보던 신진사대부 입장에선 공민왕에 대한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듯
  • [23] 하지만 최영은 이전의 무신정권 집정자들과는 달리 도평의사사를 비롯한 정부 기관을 깔아뭉개며 권력을 유지하지는 않았기에 무신정권 집정자들과는 다른 평가를 받는다
  • [24] 신진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이성계는 개경에 안정된 기반을 마련하고 있던 최영과는 달리 동북면이라는 깡촌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있는데다가 믿을 것이라고는 사병을 위시한 군사력에 불과해 충분히 자신들이 컨트롤 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기꺼이 이성계를 지원했다.
  • [25] 이것이 이성계의 한계였다. 분명 본인도 막연한 야심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이를 실행할 방법을 몰랐으며 이를 받쳐줄 세력또한 없었다. 그의 입장에선 분열된 사대부들의 논쟁을 그저 지켜보는 방법밖엔 없었다. 여기서 변수로 작용한게 이방원.
  • [26] 정도전이 주례를 참고하여 조선경국전을 만들었으며, 그것이 경국대전의 근간이 되었다.
  • [27] 대표적으로 서인의 창시자인 심의겸. 그는 명종의 처남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외척세력이자 '훈구파'라 불리게 되는 집단 소속이다. 다만 원래부터 친사림적 성향으로, 명종의 명령으로 율곡학파를 끌어모았기 때문에 사림파로 취급받은 것.
  • [28] 여기서 道는 도교의 의미가 아니라 사림파 스타일의 성리학이다.
  • [29]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
  • [30] 희, 노, 애, 락, 애, 오, 욕.
  • [31] 원래는 승려로, 강항의 가르침을 받고 성리학자로 전직을 했다. 이 사람의 초상화를 보면 완전히 이황 코스프레다. 흠좀무
  • [32] 정작 세이카는 관직 진출을 아예 하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야에스가 그에게 관직에 나설 것을 종용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자기 제자인 라잔을 보낸 것. 말하자면 조선 후기의 산림과 비슷한 행보라 할 수 있다.
  • [33] 이는 이유가 간단한데, 조광조 일파가 향약을 널리 보급하여 서원과 함께 사림파의 기반을 단단히 하여 결국 사림파의 세상으로 만들었듯, 자신들도 조광조 시절의 사림들을 따라해 향약과 서원을 강화하여 훗날 남인의 세상이 되는걸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향쟁(鄕爭)이 벌어지는 것과, 사원을 남설하는데 원인이 되었다. 물론 조선 후기부터 향청이 수령이 지배하게 되어 수탈자문기구로 변하면서 구향(舊鄕)의 향촌지배력이 약화된 탓도 있다.
  • [34] 원래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이긴 하지만, 아버지부터 송시열과 학문적 대립이 있어왔던 윤선거였으며. 윤선거의 아버지가 성혼의 제자 윤황이었기에 윤증은 율곡학파의 가르침을 받은 우계학파인 셈이다. 물론 윤증은 송시열과 키배도 있지만 그가 윤선거의 묘갈(墓碣)을 대충대충 쓴 것 때문에 제대로 어그로를 끌어 사제관계가 완전히 끊겼다. 참고로 윤증의 본가인 파평 윤씨는 고려시대때 지체높은 문벌귀족이었다.
  • [35] 국정 국사 교과서에도 보면 세도가문이 고증학에 치우쳐 현실 개혁 의지를 잃어버렸다는 구절이 나온다.
  • [36] 고려 시대때 한국에 정착한 이용상이 리 왕조의 황손.
  • [37] 개국공신인 완채(응우옌 짜이)가 저명한 유학자였다.
  • [38] 한자문화권인 베트남과 달리 참파는 인도 문화권.
  • [39] 실제로 제사 지내는 과정에서 읊는 발주문은 혼백을 마치 인격체처럼 대하면서 후손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성격이 강하다. 이쯤 되면 순수한 기라기보다는 독자적인 의지와 행사력을 갖는 혼령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 49제 같은 풍습도 불교의 영향으로 내세관을 도입한 결과라 할 수 있다.
  • [40] 위 글에서 언급된 문제 중 일부는 조선왕조 혹은 현대 대한민국의 문제점이다. 열거된 문제를 모두 유교의 문제로 귀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한 예로 직업의 귀천 항목을 보아도 사농공상은 단지 직업의 구분이었을 뿐 신분의 상하관계를 정한 게 아니었는데 조선시대에 왜곡 된 것이다. 박지원조차 중국 선비들을 만나 사농공상이 직업의 구분에 불과하냐고 물었을 정도. 또한 호주제, 똥군기 등 명백히 일본 식민통치와 군국주의의 잔재까지 유교의 폐단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
  • [41] 일단 승려들의 공식적 신분은 정해지지 않았다. 천민취급도 사회적으로 규정된 팔반사천(八般私賤)중 하나로서 동급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허나 승려들에 대한 강제 부역이나 도첩제 등 여러가지 심각한 불이익 때문에 사실상 천민 취급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조선 당시에도 부역의 노동환경은 극악에 가까워 사망확률이 꽤 높았다.
  • [42] 분서갱유는 후대 유학자들이 왜곡한 거지만 실제로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 [43] 공자의 일상생활을 설명한 10장 향당(鄕堂)편 맨 마지막 구절이 대표적인 예인데, 수레를 탈 때의 자세를 적은 구절 뒤로 뜬금없이 '사람 기척을 느낀 꿩들이 곧 날아 올라 빙빙 돌더니 다시 내려 앉았다. 공자가 말했다. "산마루의 꿩들이 때를 만났구나, 때를 만났어!" 자로가 꿩들을 향해 두 손을 모으자 꿩들은 다시 힘차게 날개짓을 하고 가버렸다.'라는 아무 부연설명도 없고 장의 전체 내용과 맞지도 않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을 두고 수많은 유학자들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현재는 이 구절의 앞뒤에 무엇인가 내용이 있었는데 사라져 버리고 이 구절 역시 오자 등으로 변질되어 원래의 의미파악이 힘들어졌다고 본다.
  • [44] 증자는 사람들이 "칠거지악에 속하지 않는다" 라고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밥을 설익게 지어 계모에게 봉양한 죄로 아내를 내쫓은 경력까지 있다.당시 유학자들에게 여성차별은 이미 뿌리깊게 박혀있었다.증자 자신은 "난 그렇게 생각안함" 이라고 변명했지만 밥 설익게 지었다고 쫓아내다니 흠좀무
  • [45]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2, 3년차는 그냥 친구뻘이다. 실제로 나이가 한 살 많은 중국사람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썼더니 오히려 부담스러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46] 애초에 국가운영의 기본 논리가 서구와 동아시아 지역은 달랐다. 서구 국가들이 '유동자본의 통제'를 목표로 국가를 운영하였기에 적극적인 해외진출과 사업확장이 가능했다면, 중국과 같은 동아시아 영토국가는 '인민과 영역의 통제'가 국가를 운영하는 최우선 기준이었기에 현상 유지와 대내적 반발 수습에 급급했다.
  • [47] 이는 공자 역시도 피해갈 수 없는 비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공자 역시 여성에 대해 차별적인 발언을 했다는 점 (공자항목 참조), 자신의 애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안회가 사망할 당시 신분이 낮았다는 이유로 낮은 등급의 제사를 지내줬다는 점 등은 봉건시대의 한계성을 드러낸 부분이다.
  • [48] 그러나 대부분의 성균관대 학생들 사이에서 유교에 대한 취급은 더도 덜도 아니고 딱 2학점짜리 졸업 필수 교양과목이다.
  • [49] 다만 과거에는 유학과가 있었다. 2002년 학과 통폐합 과정에서 한국철학과, 중국철학과, 유학과가 합쳐져서 현재의 유학동양학과로 편제
  • [50] 성대의 경우 일반대학원에는 옛 편제가 남아 있어서 유학과, 한국철학과, 중국철학과로 나뉘어져 있고, 특수대학원으로서 유학대학원도 있다. 다만 진짜 학문을 하려면 일반대학원을 가야한다. 특수대학원은 학문을 한다기보다는 교양과정의 업그레이드 수준에 머무는지라.....
  • [51] 추사체로 유명한 그 분 맞다. 학자 자격의 업적은 뚜렷하지 않으나 실사구시 학파(김정희는 금석고증학 중심)의 대표격으로 기재한다.
  • [52] 베트남 최초로 베트남과 중국 양국의 과거에 동시에 합격했다. 덕분에 원나라에서 양국장원(兩國壯元)으로 불렸고 고려 사신들과 친분이 있었기에 고려를 방문하기도 했다.
  • [53] 유학자인 동시에 중국의 지베에 저항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결국 명나라를 몰아내고 레 왕조((後 黎朝, 1428년 - 1788년)를 만든 개국공신이 되었다. 난후도곤산감작(亂後到崑山感作)이라는 한시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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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3 21:3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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