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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이사금

last modified: 2014-09-13 01:01:45 by Contributors

신라의 역대국왕
2대 남해 차차웅 박유 3대 유리 이사금 박유리 4대 탈해 이사금 석탈해

시호 유리 이사금(儒理 尼師今) / 노례이사금(弩禮尼師今)/
세리지 니사금(世里智 尼師今)
박(朴)
유리(儒理) / 치리(治理) / 치리(齒理)
생몰년도 음력 ? ~ 57년 10월
재위기간 음력 24년 ~ 57년 10월 (33년)
고구려유리명왕과는 관계없다.[1]

Contents

1. 소개
2. 일생
3. 삼국사기 기록

1. 소개

신라의 3대 왕. 남해 차차웅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운제(雲帝) 부인이다. 박혁거세의 손자. 다른 이름으로는 치리(治理) 또는 치리(齒理)가 있다. 유리왕(儒理王), 노례이사금(弩禮尼師今)이라고도 한다.

왕후는 일지 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혹은 허루 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박씨, 또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지만, 일지 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다.

2. 일생

남해 차차웅이 죽자 덕망이 높은 매제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하다가, 군신(群臣)들의 추대로 24년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에 기록을 보면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금(尼師今)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고 하였다. 그 후에 김씨 성이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2]

  • 역사 기록
    • 25년 2월에 친히 시조묘(始祖廟 = 박혁거세묘)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 28년 11월에 왕이 나라 안 곳곳을 둘러보다가 나이 많은 할머니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거의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보잘것 없는 몸으로 왕위에 올라서 제대로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고 노인과 어린이로 하여금 이처럼 어려움을 겪게 했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겠소." 하며, 왕은 옷을 벗어 노인을 덮어주고 음식을 배불리 먹게 하였다. 그리고는 관리에게 명하여 곳곳에 있는 홀아비, 홀어미, 고아, 아들없는 사람들을 위문 하고, 먹고 마실 것을 주어 살아가게 하였다. 그러자 이웃나라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많이 찾아오게 되었다. 이 해에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니, 왕이 도솔가(兜率歌) 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 32년 양산촌은 양부(梁部)로 고치고 성은 이(李)씨, 고허촌은 사량부(沙梁部)로 고치고 성은 최(崔)씨, 대수촌은 점량부(漸梁部)로 고치고 성은 손(孫)씨, 진지촌은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성은 정(鄭)씨, 가리촌은 한기부(漢祈部)로 고치고 성은 배(裵)씨, 명활촌은 습비부(習比部)로 고치고 성은 설(薛)씨로 하였다. 또한 관계(官階)를 17관등으로 제정하는 등 국가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왕은 이들 6부(部)를 두 패로 나누어, 공주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6촌의 부녀자 들을 거느리게 편을 짜고, 음력 7월 16일경부터 날마다 아침 일찍 6부의 마당에 모여 밤 늦게까지 길쌈을 겨루게 하였다. 그리고 음력 8월 15일이 되면 길편을 대접하고, 온갖 노래와 춤과 놀이를 펼치니, 이를 가배(한가위)라고 하였다. 이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해 말하기를 "회소 회소(會蘇)"라고 하였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 아름다워 후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서 노래를 지어 부른 노래가 《회소곡(會蘇曲)》이다.
    • 34년 서울(京都)에 땅이 갈라져 이 솟았다. 6월에 홍수가 났다.
    • 36년 8월에 낙랑(樂浪)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37년 낙랑(樂浪)이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망하여 유민(流民) 5,000여명이 넘어오자, 이를 받아들여 6부(部)에 배치하여 살게 하였다.
    • 40년 화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인 거수(渠帥)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 42년 8월에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얻은 짐승을 바쳤다.
    • 54년 2월에 살별(혜성의 옛 이름)이 자궁(紫宮)(별자리 이름. 미궁)에 나타났다.
    • 56년 4월에 용이 금성(金城)의 우물에서 나타났는데, 조금 있다가 폭우가 서북쪽에서부터 몰려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
    • 57년 9월에 왕이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탈해(脫解)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功名)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4]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10월에 왕이 죽어 사릉(蛇陵)에 묻혔다. 그 뒤를 이어 왕의 인 탈해(脫解)가 왕이 되었다.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의 전통문화를 만든 이외에는 참 별거 없는 무난한 왕이었다(...). 단, 42년 이후 역사기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왕인 탈해 이사금 항목을 참조할 것.

그 외에 가족관계를 살펴보자면 둘째 아들이 파사 이사금(婆娑王, ? - 112년, 신라의 5대 국왕), 첫째 아들이 일성 이사금(逸聖王, ? - 154년, 신라의 7대 국왕)이다(그 외에 아들 둘이 더 있으며 딸은 각각 석탈해와 상장군 김명옥(金鳴玉)에게 출가했다 함). 다만 첫째아들의 나이를 따지면 늦둥이라도 조금 괴랄하긴 하다. 일본의 역사에 남아있는 천일창 왕자 이야기와 관련하여, 첫째 아들인 일성 이사금이 바로 그 천일창 왕자였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3.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九月 유리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五年冬十一月 진휼을 실시하다
九年春三月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17관등을 두다
十一年夏五月 서울에서 땅이 갈라지다
十一年夏六月 홍수가 나다
十三年秋八月 낙랑이 타산성을 함락시키다
十四年 낙랑인들이 항복해 오다
十七年秋九月 맥국과 우호를 맺다
十九年秋八月 맥의 우두머리가 사냥한 짐승을 바치다
三十一年春二月 살별이 자궁에 나타나다
三十三年夏四月 용이 나타나다
三十三年夏五月 바람이 강하게 불다
三十四年秋九月 탈해가 후계를 잇도록 유언하다
三十四年冬十月 왕이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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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만 이름이 같은 '누리'의 음차자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 [2] 또 다른 해석으로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가 많은 사람이 덕망이 높다는 얘기에 따라, 서로 을 물어보어 잇자국이 가장 많은 유리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질금 즉 이사금 이라는 칭호 또한 여기(잇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3] 불길한 징조를 의미한다.
  • [4] 파사 이사금이 여기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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