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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욱

last modified: 2014-12-24 00:23:24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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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조시대 유송의 여섯번째 황제-대(大) 유욱(劉彧)
2. 육조시대 유송의 일곱번째 황제-소(小)유욱(劉昱)


1. 육조시대 유송의 여섯번째 황제-대(大) 유욱(劉彧)

유송의 역대 황제
5대 전폐제 유자업 6대 태종 명황제 유욱 7대 후폐제 유욱

묘호 태종(太宗)
시호 명황제(明皇帝)
연호 태시(泰始, 465년 12월 ~ 471년)
태예(泰豫, 472년)
유(劉)
욱(彧)
생몰기간 439년 12월 9일 ~ 472년 5월 10일
재위기간 466년 1월 9일 ~ 472년 5월 10일

유욱(劉彧, 439년~472년, 재위 465~472)

중국 육조시대 유송의 제6대 황제로 장남인 싸이코패스 후폐제 유욱과 발음이 같아서 대(大) 유욱으로 부르기도 한다.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명황제(明皇帝).

재위 7년 동안은 태시(泰始), 마지막 1년 동안에는 경화(景和)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무제 유유, 효무제 유준과 더불어 천수를 누린 황제다.

원가 16년(439년) 10월 유의륭과 심용희 사이에서 11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이 일찍 죽어 유준의 어머니인 계모 노혜남이 유욱을 키웠다. 유욱은 원가 29년 상동왕이 되었고 유준이 즉위하자 진군장군, 옹주 자사가 되었다. 유욱은 바둑과 문학, 서예를 좋아했고 비록 뚱뚱햇지만 풍채가 단아해서매치가 안된다 아버지 유의륭의 사랑을 받았다.

유욱은 이전에 조카 유자업에 능욕을 당하다가 주의 원전부, 내감 왕도륭, 환관 수적지 등 11명과 유자업을 폐하기로 밀모했다. 영광 원년(465년) 11월 29일 밤, 유자업이 죽림당에서 귀신을 잡으러 다니는 것을 보고 수적지가 들어가서 칼로 유자업을 죽였다. 그리고 유욱은 12월에 태극전전에서 즉위했는데 장사 등완 등이 유자업의 아우이자 유준의 셋째 아들이었던 8살 진안왕 유자훈을 받들어 심양에서 황제에 즉위시키고 건강을 공격했다. 게다가 전체 274군 가운데 단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유자훈을 황제로 인정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유욱은 이부상서 채흥종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자업의 폭정을 일소하고 관대한 정치로 인심을 안정시켰다. 또 반란군들을 설득시키고 건강에 있던 그들의 가족을 후하게 대우했다. 동시에 사도 유휴인, 보국장군 심유지, 어사 오회 등을 장수에 임명하고 이듬해 8월에 유자훈을 주살하고 그 일당을 제거했다.

그러나 유욱도 황제가 되자 잔인해졌고 곧 자신의 은인이었던 유휴인을 포함한 자신의 형제들과 그 후손들을 도륙내기 시작했다. 결국 유의륭의 아들들은 이전에 북위에 투항한 유창과 유욱 본인, 계양왕 유휴범 외에는 모두 죽었다.[1] 이래서 이복형이었던 유준의 자손은 아예 없어졌는데 그래서 내린 조치가 형의 자손들이 죽었으니 선심쓴다고 양자를 삼아줬다. 이건 뭐(...)

유욱은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유준의 아들 10명을 모두 죽였고 결국 유준의 대는 끊기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잘못 처리한게 있다면 유자훈을 인정했던 서주 자사 설안도, 익도 태수 소혜개, 양주 자사 유원호, 연주 자사 필중경, 예장 태수 은부, 여남 태수 상진기 등이 모두 항복을 구걸하지만 이걸 거절한 것이다. 정확히는 유욱이 이미 난을 평정하자 이들은 괘씸한 놈들이라면서 5만의 군대로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하자 결국 이들과 청주 자사 심문수, 기주 자사 최도고 등은 모두 북위에 투항한다. 그리고 귀신을 지나치게 믿어 해로운 글자는 말하지도, 쓰지도 못하게 했고 이를 어기면 즉시 죽였다. 또 침대를 옮기고 벽을 장식할 때도 토지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더구나 유욱의 판단 실수로 서주, 청주, 기주 3주가 북위로 넘어가면서 송나라는 촉 지역과 장강 이남, 장강 이북 극소수의 영토로 크게 줄어들었다. 이에 황제의 위엄도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유욱도 이전 황제들 못지 않게 음란하고 사치스러워 궁 안에서 황실의 부녀자들을 알몸으로 발가벗기고 웃고 즐기는 잔치를 벌이는 것을 좋아했다. 왕황후(왕정풍)가 이를 보고 낯뜨거워하며 부채로 얼굴을 가리자 유욱은 너희 친정은 한문[2]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런 잔치를 함께 즐기자는데 왜 보지 않는가?라며 벌컥 화를 냈다. 그러자 왕황후는 '즐기는 방법은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어찌 시어머니와 자매들이 서로 모여 앉아 아낙의 몸을 벗겨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겠습니까? 우리 친정은 비록 한문이나, 이런 일은 실로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유욱은 크게 노했다. 유욱은 어느날 갑자기 심영고자가 되자(...) 일부러 종친들의 첩 가운데 임산부가 있으면 데리고 와서 아들을 낳으면 생모를 죽이고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유욱은 말년에 매우 부패해져서 관리들의 봉급을 중단하고 축재한 재산을 숨기기 위해 상궁사라는 절을 짓고 그 절 아래에 재산을 숨겼다. 태예 원년(472년) 3월에 예주 자사 유음이 반역을 저지른다고 꿈속에서 누군가 알려주자 일어나서 즉시 유음을 죽였다. 4월, 유욱은 경복전에서 43세의 나이로 죽었고 5월에 고녕릉에 안장되었다.

2. 육조시대 유송의 일곱번째 황제-소(小)유욱(劉昱)

유송의 역대 황제
6대 태종 명황제 유욱 7대 후폐제 유욱 8대 순황제 유준

묘호 -
시호 창오왕(蒼梧王)
연호 원휘(元徽, 473년 ~ 477년 7월)
유(劉)
욱(昱)
생몰기간 463년 3월 1일 ~ 477년 8월 1일
재위기간 472년 5월 11일 ~ 477년 8월 1일

유욱(劉昱, 463년~477년, 재위 472~477)

중국 육조시대 유송의 제7대 황제. 대(大) 유욱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이름과 발음이 같기 때문에 소(小) 유욱이라 부른다. 폐위당한 황제라서 묘호는 없고 시호는 후폐제(後廢帝).

재위 기간 내내 원휘(元徽)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전폐제 유자업보다 명성이 상대적으로 낮지만 실제 저지른 짓은 더 악질이다. 유자업도 개막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냥 색욕에 미쳤다는 수준이지만, 유욱은 그냥 사이코패스에 정신질환자로 볼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대명 7년(463년) 정월, 아버지 유욱(대 유욱)과 어머니 진묘등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유욱은 총명해서 의복을 재단하거나 모자를 만드는 것을 한번만 보고도 곧장 만들었고 한번도 불어본 적이 없는 악기도 금방 배워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어서 높은 장대나 천막 기둥에 기어 올라가길 좋아해서 밥 먹을 때가 되어서야 내려왔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 나이대에 흔한, 모험심이 강한 개구쟁이처럼 보이겠지만, 어느 날부터 자신의 재능을 남용해서 연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총동원해서 심혈을 기울여 집게, 끌, 송곳, 망치, 톱 등을 만들어 소중히 다루고 직접 하나하나 이름까지 붙여줬다. 여기까지만 해도 천계제같이 평범히 미니어쳐를 좋아하는 암군으로 끝날 수 있었는데 유욱은 연장으로 나무나 돌을 깎은게 아니라 사람을 썰고, 분해하며 놀았다.!! 쏘우의 대스승, 카오스 스페이스 마린

유욱은 사람을 톱으로 썰고 그걸 구경하며 즐거워하는 등 머리가 뭐가 들어있나 의문일 정도의 짓을 많이 했다. 심발이라는 자가 보물이 많다고 하자 뺏기 위해 협박했으나, 도리어 싸닥션을 맞고 욕을 처먹었다. 이에 심발을 연장들로 조각조각 인수분해해버렸고 차하르족 입에서 마늘 냄새가 나자 배를 갈라 확인하기도 했고 스님을 묶어서 해체하고 언제 죽나 기다리기도 했다. 이처럼 하루라도 살인하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돋아 아예 반역자를 직접 자신이 조각조각 잘라 죽이기도 했고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대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시종들과 창을 들고 민가와 거리를 습격해 사람과 가축, 야생동물 등을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사실 유욱은 아버지 유욱의 장남이라고 하나 따지고 보면 아버지 유욱이 심영어느 순간 고자가 되어 불임이 됐기 때문에 친자식이 아니었다. 왠지 아버지 유욱은 부인이었던 진묘등을 총애하는 심복 이도아에게 하사했다가 임신하자 나중에 돌려받은 다음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3] 그래서 항간에서는 이도아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실제로 유욱은 즉위한 후 짐은 이장군(李將軍)이다!이라고 자칭함으로써 떳떳하게 이씨의 혈통임을 스스로 커밍아웃했다. 왕조에서 제왕이 자신이 왕실의 혈통이 아니라고 밝히는 것은 난 제왕의 자격이 없으니 빨리 를 죽여봐라라는 의미인데 무슨 배짱으로 이런 소리를 했는지(...) 이미 개념을 상실하고 헛바람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 계양왕 유휴범의 난이 일어났는데 사실 유휴범은 유욱의 정통성을 따지며 난을 일으킨게 아니라 스스로 무능한 주제에 재상으로 임명해주지 않는다면서 앙심을 품고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 유휴범은 자신이 유일하게 남은 숙부라면서 재상으로 임명해달라고 유욱을 꼬셨으나, 말을 듣지 않자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위장군 소도성이 거짓 투항으로 유휴범을 안심시키고 유휴범을 죽인 뒤 난을 평정했다.

이어 일어난 건평왕 유경소의 난도 평정하는 등 소도성은 잇따른 난들을 진압하면서 점점 명성을 높이고 친위군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그래서인지 유욱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 바로 친위군 장수이자 당시 명성이 높던 소도성이었다. 그래서 나무로 소도성을 조각해 자신과 시종들이 활을 쐈으며 심지어는 한여름 더운 낮에 낮잠을 자고 있는 소도성의 막사에 몰래 들어가 윗통을 벗은 뚱뚱한 소도성의 배에 자는 동안 과녁을 그려놓고 화살로 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주변 내관들의 간언 덕에 죽이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화살촉이 없는 화살로 배를 쏘면서 자신의 활솜씨를 자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는데 구석에 몰려 있는 고양이를 물듯이 상대방에게 생명의 위협을 주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결국 생명의 위협을 느낀 소도성은 월기교위 왕경칙과 힘을 합쳐 양옥부, 양만년 등 유욱의 심복 10여 명과 비밀리에 손을 잡았다.

7월 7일 칠석날 밤, 변복을 하고 절간에 가서 를 훔쳐 삶아 과 함께 먹고 궁궐에 돌아온 유욱은 양옥부에게 "너는 오늘 밤 견우직녀은하수를 건너는 것을 보면 당장 보고하라. 하지만 보고하지 못하면 내일 죽을 것이니라" 라고 으름장을 놓고 잠들었다. 양옥부는 결국 유욱이 깊이 잠들자 유욱이 아끼던 수제 살인도구를 꺼내 목을 베어 죽였는데 죽었을 때의 나이는 고작 14세였다.

이렇게 유욱이 암살되자 양옥부는 그 머리를 왕경칙에게 바쳤으며 왕경칙은 머리를 가지고 소도성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소도성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후폐제의 머리를 연못에 씻고 확인하니 과연 맞았다. 이에 소도성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황궁을 점령한 다음 정권을 장악했다. 왕경칙은 소도성에게 바로 황제에 즉위하라고 했다. 그러나 무관이라도 유학자 뇌차종에게서 학문을 어느 정도 배운 소도성은 선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일단 선양의 선배들처럼 바로 황제가 되지 않았다. 소도성은 진태후를 협박해 유욱을 창오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정변을 인정하게 했다.[4] 하지만 선양은 더더욱 막장극이었다

유욱이 죽자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외쳤고(...) 단양 말릉현 남교단 서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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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나마 계양왕 유휴범은 무능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나 이후 대(大) 유욱의 '아들 소(小) 유욱'이 즉위한 뒤 사소한 문제로 난을 일으켰다가 죽는다.
  • [2] 寒門. 별 볼일 없는 한미한 가문을 말한다. 그런데 유욱의 할아버지 유유도 한문 출신
  • [3] 아마 고자라서 아들을 얻기 위해 일종의 씨내리로 사용했던 것 같다.
  • [4] 여담으로 왕경칙은 남제를 세운 사실상 공신으로 고제 소도성-무제 소색-울림왕 소소업-해릉왕 소소문을 거쳐 명제 소란 시대까지 살아 있었다. 왕경칙은 당시에는 회계 태수로 있었는데 불안한 마음에 반란을 일으켰다. 명제는 수도를 황태자 소보권에게 맡기고 토벌에 나섰는데 왕경칙이란 '삼십육계 주위상(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니 너희 부자는 달아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네'라면서 깝죽대다가 결국 죽었다(...) 여기서 단공이란 유유의 부하로 유의륭때 반간게에 걸려 죽은 명장 단도제로 단도제가 싸움에서 불리하면 자주 퇴각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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