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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

last modified: 2015-02-27 04:56:20 by Contributors

柳子光,1439~1512

Contents

1. 소개
2. 일생
2.1. 초기 일생
2.2. 남이의 옥
2.3. 무오사화
2.4. 중종반정
2.5. 말년과 최후
3. 평가
3.1. 정말로 간신배인가
4. 사극에서의 유자광

1. 소개

조선 세조~연산군 때의 관료. 전라남도 영광 출신. 어머니는 전라북도 남원에 있었고, 유배지로 조금 있기도 했다.

상당히 파란만장한 경력의 소유자로, 남이의 옥, 무오사화, 중종반정 등을 비롯한 조선 초기의 온갖 굵직한 정치적 사건에 관여했던 인물이다.

예로부터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간신들 가운데 한 명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현대에 와서는 간신이 맞았다는 의견과 역사의 승리자에 의해서 간신으로 이미지가 덧씌워졌다는 불행한 인물이었다는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지만 동시대의 남이나 구성군은 저리가라 할 정도의 파격적인 최고속 승진 속도를 자랑한 인물이다.

2. 일생

2.1. 초기 일생

유자광은 중추부지사 유규의 서자로 태어났다. 야사에 따르면 유규가 백호꿈을 꾸고 난 뒤 부인과 동침하려 했다가 거절당하자 부인의 몸종과 동침하여 유자광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데 이 말대로면 유자광은 그냥 서자도 아니고 홍길동처럼 얼자였다는 이야기.[1]

이후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었으나 무술에 일가견이 있었는지 건춘문을 지키는 갑사(甲士)가 되었다가 1467년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공을 세울 기회를 줄 것을 청했고 그를 만나보고 크게 마음에 들어한 세조 덕에 연락관에 임명되어 남이의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다. 난이 평정된 이후로는 세조에게 공을 인정받고는 큰 총애를 받아 그 벼슬이 정 5품인 병조정랑에까지 이르었는데 이 모든 과정이 단 3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벼락 출세.

세조의 유자광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며, 다음해는 유자광으로 하여금 온양별시문과를 치르게 하였다. 신숙주는 유자광의 답안을 '고어(古語)를 전용(全用)하고 문법이 소홀하다.'는 이유로 낙방시켰지만 세조가 '묻는 본의(本意)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자광을 장원 급제로 삼았다. 그 해 유자광은 정3품 병조에 올랐는데 갑사신분에서 체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오늘날로 치면 거의 준사관이나 소위가 단박에 장관, 차관 다음인 국방부의 국장이 된 기세다. 그것도 서른도 안 된 서자가! 그해 적개 공신(敵愾功臣) 2등에도 녹훈되었다. 대간이 천한 서자에게 말도 안되는 특혜라고 반발하자 "니들이 유자광 발끝이라도 따라가냐? 난 절세의 인물을 얻었다고 본다!"라고 화를 내며 반발을 모조리 잠재워 버렸다.

세조가 이토록 유자광을 밀어 주었던 것은 아무래도 재위 기간 동안에 지나칠 정도로 세력이 커져버린 구 공신세력들을 견재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특히 이시애의 난을 치르는 동안에 한명회 등이 역모를 꾀한다는 유언비어를 듣고는 한명회를 잠시나마 옥에 가둬버렸던 사실을 보면 비록 세조가 공신들을 아끼기는 했으나 그 세력이 비대해지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경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

2.2. 남이의 옥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유자광은 세조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전에 존재했던 공신 세력과 이시애의 난 이후로 생겨난 신진 무신 세력의 싸움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신진 무신 세력의 대표주자였던 남이는 세조 시절부터 자신들을 견제해오던 공신 세력들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던 중에 세력을 규합하여 공신 세력과 권력을 두고 한바탕 권력 다툼을 벌일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남이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유자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유자광은 오히려 공신 세력에 붙어서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유자광은 남이는 유자광을 찾아와 정변을 일으켜 한명회, 신숙주를 비롯한 대신들을 제거하자고 설득했다고 진술하였던 것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남이와 강순 등을 비롯한 신진 무신 세력은 역모 혐의를 받아 대부분이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며, 25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유자광은 역모를 막은 공을 인정받아 익대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남이가 살던 집을 받고, 무령군 자헌대부에 봉해졌다. 또한, 예종의 신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실세였던 공신 세력의 눈에 띄게 되어 정치적인 입지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이 '남이의 옥' 사건에는 유자광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었다는 설이 있다. 일단 유자광은 출신부터가 한미한데다가, 세조가 죽은 이후로는 자신을 지지해줄만한 세력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공신세력과 신흥세력의 갈등을 철저하게 이용하여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다.[3]

야사에 따르면 유자광이 함께 싸우며 같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높은 벼슬을 얻은 남이질투한 나머지 남이를 모함하여 죽였다고 한다.

2.3. 무오사화

비록 남이의 옥 사건으로 유자광은 탄탄대로에 올랐으나,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한 탓인지 예종이 사망한 후 즉위한 성종 대에는 괜히 한명회에게 개겼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동래(부산)으로 유배되는 굴욕을 겪었다. 다만 이 과정이 성종의 눈에 들기 위한 정치적 모험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각설하고 가뜩이나 서자 출신인데 세조의 총애 덕에 과분한 출세를 했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대신들에게도 사림 출신 대간들에게도 미움을 받아 사간의 탄압을 받기도 했고, 1478년에는 부정부패 사건이 터져서 조정을 더렵혔다 하여 공신적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4] 이때부터 까칠하고 다혈질인 대간 석규가 왕 앞에서 팔을 걷어붙인 일을 가지고 임사홍 등과 함께 "그 새끼 막나가는 거 아니야? 완전 소인이구만"하고 몇마디 씹었는게 화근이 되어 임사홍과 같이 나란히 쫓겨났다가 다시 관직이 제수되어 종1품 숭정대부 겸 도총관이 되었다가 임사홍과 함께 공신에서 물러나 삭탈되는 등 다사다난한 시기가 성종때였다.

이때 사림의 우두머리이자 당대의 대학자였던 김종직함양군수로 부임하던 중에 유자광이 써놓은 현판을 보고는 이를 불태워버리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유자광이 상관격인 경상 관찰사(지금의 도지사)였음에도! [5] 이후부터 유자광은 김종직과 사림들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었으나, 김종직이 워낙에 네임드였던 인물인지라 해코지하지 못하였다. 이후로 성종사림들을 대거 기용하자 사림들과 대립하는 훈구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차에 평소에 사림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이극돈이 김종직이 썼던 조의제문이 실린 사초가 있다는 사실을 유자광에게 알리게 되었다. 좋은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한 유자광은 조의제문에 세조계유정난을 비판하는 등 반체제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연산군에게 고변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연산군는 아버지와는 달리 왕의 권위를 대단히 중요시하는 성품의 소유자로, 왕권에 도전하는 사림들을 고깝게 여기고 있었다[6]. 그렇지 않아도 어떤 식으로 사림들을 말려 죽일까 고민하던 참에 연산군의 손에 굴러들어온 조의제문은 그야말로 엄청난 정치적 무기였다.

연산군은 조의제문의 반체제적인 내용을 빌미로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조의제문을 썼던 김종직은 이미 죽은 몸이었기에 부관참시당하였고, 그의 제자들이었던 수많은 사림들도 이에 연루되어 처벌받았다. 유자광은 앞장서서 사림파들을 때려 잡았으며,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유자광은 또다시 공을 인정받아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수많은 목숨을 자신의 권력과 맞바꾼 셈이었다.[7]

여담으로 무오사화를 주도한 사람이 유자광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진정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연산군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연산군 역시 조의제문을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철저히 이용해 먹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무오사화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2.4. 중종반정

훗날 성희안,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쫒아내고 중종을 옹립할 때 이에 참여하여 공신으로 책봉된다.[8] 연산군에 붙어 권세를 누리다 다시 성공한 쿠데타에 참여하는 뛰어난 처세술을 부린 셈.

유자광이 갑작스럽게 연산군을 배반한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유자광이 믿을 것은 오직 연산군 뿐이었는데, 연산군은 이극균과의 교분을 비롯해서 여러 차례 유자광을 겁주고, 의금부에서 형량을 정해오면 짐짓 이를 용서하는 척하면서 유자광을 길들였다. 비빌 언덕이 하나 뿐인데 이렇게 불안감을 조성했으니 유자광도 새로운 비빌 언덕을 만들 수 밖에. 심지어 갑자사화 중에는 "너는 뭐했냐?"라고 죽일 듯 화를 내며 옥에까지 가뒀다가 풀어주기도 했다.

2.5. 말년과 최후

어쨌거나 중종반정에도 앞장선 덕에 그는 다시 공신이 되어 녹을 받아먹으면서 어느 정도 큰소리를 쳤는데 연산군의 축출과 함께 조정에 대거 진출한 사림은 바로 유자광의 철천지 원수들이었으니 그의 벼슬길이 순탄할리 만무했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김공저 등이 박원종과 함께 유자광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민 일도 있었으며 중종은 관련자들을 대충 처벌하면서 삼대장과 유자광을 매우 불만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창녕과 고창의 수령이 탐오하다는 이유로 벌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중종이 구언의 언지를 내리자 유자광은 그들에게 로비라도 받았는지 "창녕과 고창 사람들이 자기네 수령들이 자기들을 잘 다스렸는데 대체 뭘 잘못해서 쫓겨났는지 모르겠다네요."라는 말을 올렸다가 사림의 타깃이 된다. 사림들로 가득한 대간들은 유자광이가 폐주에게 빌붙어서 무오년에 그 많은 사림을 죽여놓고도 정신못차리고 청탁이나 받는다고 비난했으며 유자광은 궁지에 몰린다.

유자광은 이것에 대해 적극 항변하고 박원종을 찾아가 지금 자신이 공격받는 것은 무신 출신이기 때문이며 자신이 쫓겨나면 역시 무신인 박원종도 위험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도움을 청했으나 박원종은 "무오년에 댁이 한 일 때문에 사림이 이를 간 걸 모르고 하는 말이냐?"라고 비웃었고 누구도 옹호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결국은 공신위를 박탈당하고 귀양을 당하는 신세가 된고 말았다. 늘그막에는 병환까지 앓는 바람에 장님이 되었다고 하며, 결국 귀양간 지 5년만에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야사에 의하면 귀양간지 얼마 안 돼 꿈에서 남이의 혼령이 나타나 그의 눈을 벤 뒤부터 유자광이 장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나중에는 시체도 부관참시당하고 두 아들도 참형당했다고 하지만, 실록에 따르면 오히려 중종은 대간들이 몽땅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었음에도 유자광이 죽자 공신녹훈도 두 아들에게 돌려줘 복권시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루도록 배려하며 자기의 뜻을 관철했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많아 시체조차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보고 자신을 닮은 거지 노인을 발견해 시체를 대역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유배당한 죄인으로서 이렇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에 죽어서도 간사한 이미지로 전해오는 야사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설로 MBC 드라마 조선왕조 5백년풍란에서는 자신이 부관참시 당할 걸 예측하고[9] 자신의 무덤은 작게, 하인의 무덤은 크게 만들어 부관참시를 면했다페이크다 이 ㅂㅅ아!!!라는 야사를 인용했다.

3. 평가

유자광은 본래 출신이 한미한데다가, 벼슬도 무관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세조 이후에 공신 집단이 형성한 관료층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하여 일개 갑사에서 정5품 병조정랑으로 벼락 출세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삼정승 바로 다음 고관인, 문과에 급제한 양반들도 오르기 어려운 종1품 숭정대부까지 역임했다.[10]

이렇게 유자광은 그야말로 벼락 출세의 표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리 밝지 못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밑바닥 인생에서 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높은 자리를 오가는 등 성품이나 업적 등을 떠나서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조선 시대 당시에는 유자광이 사림을 탄압했던 일 덕분에 희대의 간신이라 하여 두고두고 까였지만 이런 인생 역경 덕분인지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간신이라기 보다는 당대 정치판의 풍운아라고 일컫는 경우도 있다.

3.1. 정말로 간신배인가

보통 그를 간신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남이의 옥사와 무오사화인데, 전자는 이시애의 난에서 과감하고도 타고난 무재로 공을 세운 남이에 대한 세조의 총애를 시기하여 세조 사후 예종에게 남이를 무고해 극형에 처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고, 후자는 사초에 기록된 김종직이 자기 시를 불태워버리자 앙심을 품고 김종직 사후 조의제문을 이용하여 그 유명한 무오사화를 일으켰다는 것.

남이의 난에 대해서는 보통 유자광이 이시애 난 이후 정5품 밖에 승진하지 못해서 앙심을 품었다는 설도 존재하지만, 갑사(甲士)라는 한미한 직책과 서자라는 출신적 배경에 억매여 있던 그로서는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출세였다. 때문에 사실은 벼락출세 이후 더이상 승진하지 못하거나 밀려난 것을 우려했다는 것에 가깝다.

남이의 옥의 진정한 원인은 오히려 남이 자신의 형편없고 오만한 처신이 크게 한몫했다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예종의 의심을 받고 있던 처지[11]라 아직 든든한 기반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신 세력에게 도전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남이의 큰 실책이었다는 것이다. 유자광으로서는 무리하게 공신들과 힘싸움을 벌이려는 남이를 지지하기 보다는 공신들을 지지하는 편이 더욱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일을 벌인 것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무오사화에 대해서도 유자광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기는 하다. 남곤의 유자광전에는 유자광이 조의제문을 발췌하여 연산에게 보고한 주체라고 기록했지만 사실 조의제문은 그 전부터 훨씬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물론 유자광이 연산군의 마음을 읽고 판을 키운 것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유자광의 악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보자면 되려 연산군에게 이용당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실 유자광은 권력은 얻었으니 본질적으로는 진정한 훈구파도, 진정한 사림파도 될 수 없는 박쥐였으며, 끝없는 배신자였다.일명 조선판 이광수

훈구파의 기원은 세조의 계유정난과 구공신 집단인데, 유자광은 세조가 구공신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이시애의 난에서 활약한 젊은이들을 밀어올리면서 나타난 신공신 집단에 들어가는 편이었다. 유자광의 배신으로 신공신은 와해되고 말았으나, 그렇다고 구공신들이 유자광을 진심으로 자기들과 한 패거리로 받아줄까? 물론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하면서 청렴결백함을 내세우는 사림 세력에게는 그야말로 소인 간신배로 찍혔다. 거기다가 본래는 이런 자리에 오를 수가 없는 비천한 출신 성분이라는 약점까지 있었다.

결국 유자광은 당연히 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며 왕의 권위에 기대어 벼슬과 권력을 유지하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권신이었지만 실제 그의 권력 기반은 극도로 취약했으며 오직 역대 왕들의 총애에만 기대어 있었다. 세조, 예종, 연산군, 마지막에는 중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왕들이 유자광에게 권력의 대가로 요구한 것은 다른 신하들. 공신의 영애와 문벌, 좋은 출신가문, 맑고 깨끗한 선비의 명성을 가진 신하들이 감히 할 생각을 내지 않는 더러운 일들이었다. 처음부터 유자광은 세조에게 아첨하여 눈에 뛰었고 남이를 제거하고 싶어한 예종을 위해서 남이를 숙청했으며, 젊은 대간들을 숙청하고 싶어한 연산군을 위해서 무오사화에 가담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중종에게 붙어 연산군을 배신했다. 당연히 이런 일에 나서면 나설수록 원한을 샀기에 모두들 유자광을 더욱 더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었다.

맹꽁이 서당이나 고우영의 한오백년 만화, 신동우의 만화 한국사에,김삼의 야사 만화 등에서도 한결같이 간사한 악역으로 나온다.

이렇게 욕을 먹었어도 노비 출신인 어머니를 서울로 올라와 봉양하던 효자였다고 한다. 현대사를 보자면 곽영주, 차지철이나 임화수가 연상되는 인물로, 미천하고 한미한 출신 성분이나 절대권력자(왕, 대통령)의 요구에 호응하여 더러운 짓을 했다는 점, 주변에서 간신으로 욕을 많이 먹었다는 점 등에서 이들과 유사점이 많다. 여담으로 차지철, 임화수도 어머니에게만은 극진한 효자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인물의 심리상태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4. 사극에서의 유자광

MBC 조선왕조 500년에서는 배우 변희봉이 유자광을 연기하였다. 이 때 변희봉의 대사 내 손안에 있소이다가 유행어가 되었다.

KBS 한명회 에서는 호균이 유자광을 연기하였다. 조선왕조 500년을 쓴 작가와 동일인이라서 그런지 인물상이 조선왕조 500년과 비슷하게 표현 되었다.

KBS 장녹수 에서는 인철이 유자광을 연기하여 전형적인 간신, 천하의 개쌍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KBS 왕과 비에서는 임병기가 유자광을 연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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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뭉쳐서 서얼이라고 부르지만, 서얼도 양인 첩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서자와 천인 첩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얼자로 나뉜다. 더구나 후자는 일천즉천이거나 노비종모법이건 간에 모조리 천민으로 대우를 받았다. 이들이 종살이를 대놓고 하지 않는 경우는, 부친이 이런 저런 형태로 노비에서 제외시켜 주기 때문이다. 금성출판사에서 낸 故신동우 화백이 그린 한국 역사만화에선 중인 출신이라고 그의 출생을 소개한 바 있다.
  • [2] 유자광을 비롯하여 난을 진압한 귀성군 이준이나 남이도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것을 보면 세조는 공신들과 이들의 측근을 중심으로 기존 공신세력과 대립하는 세력을 만들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 [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 [4] 그러나 1481년에 다시 되찾았다.
  • [5] 물론 나이는 벼락출세한 유자광이 8살 어렸고 출사시기도 9년 늦었다. 이런 늦둥이가 비교적 승진이 빠른 신진이었던 김종직을 앞질렀으니 김종직이 고까워할 만도 하다.
  • [6] 세조는 기존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남이나 이준과 같은 종친들을 등용했지만, 이건 성종대에 공신사환금지법으로 완전히 막혀버린 상태였다. 이에 성종은 사림을 동원해서 공신들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사림이 너무 커서 기존 공신보다 더 왕권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 늑대를 쫓으려다 호랑이를 들인 꼴이었다.
  • [7] 사실 사림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위험하긴 했겠지만 말이다(...).
  • [8] 성희안은 문신이었고 무술은 뛰어났지만 실전 경험이 없었던 박원종에게 있어서 이시애의 난 토벌과 여진정벌 등 실전경험이 풍부했던 유자광의 합세는 반정 성공에 있어서 큰 힘이 되었다.
  • [9] 이전 시리즈인 설중매 때부터 무술에 능하고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다고 묘사되었다.그럴 능력이 있으면 부관참시 당할 짓을 하지 말아야지
  • [10] 중국전국시대 나라 인물 조사를 인용한 상소가 대표적이었다
  • [11] 남이는 지극히 오만하고 돌출적 성격이라 종친이면서도 예종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처신에 밝았던 귀성군 이준은 남이보다 오히려 고위 관직에 있었으면서도 예종이나 황후가 극구 두둔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혈연의 엹고 짙음을 고려해도 좀 차이가 많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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