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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

last modified: 2014-12-28 10:41:03 by Contributors

목차

1. 육조시대 유송의 네번째 황제 유준(劉駿)
2. 육조시대 유송의 마지막 황제 유준(劉準)
3. 육조시대 유송의 황족

1. 육조시대 유송의 네번째 황제 유준(劉駿)

유송의 역대 황제
3대 태조 문황제 유의륭 4대 세조 효무제 유준 5대 전폐제 유자업

묘호 세조(世祖)
시호 효무황제(孝武皇帝)
연호 효건(孝建, 454년 ~ 456녀)
대명(大明, 457년~ 464년)
유(劉)
준(駿)
휴룡(休龍)
생몰기간 430년 9월 19일 ~ 464년 7월 12일
재위기간 453년 5월 20일 ~ 464년 7월 12일

유준(劉駿, 430년 ~ 464년, 재위 453~464)

중국 육조시대 유송의 네번째 황제. 유의륭의 셋째로 아버지가 큰형 유소(劉劭), 둘째형 유준(劉濬)에게 죽음을 당하자 그들을 주살하고 즉위했다. 세조라는 묘호답게 과연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왕권강화를 위해 황족들을 대부분 주살하고 막장으로 살았다. 하지만 뒤의 막장 릴레이를 생각하면 그도 평범한 편이었다.

초기 3년간 효건孝建을, 후기 8년간 대명大明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그의 앞에 큰형 유소가 태초太初라는 연호를 453년 계사년 음력 2월부터 4월까지 3개월 사용했는데 문제는 유소의 치세가 흑역사가 됐기 때문에...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효무제(孝武帝).

원가 7년(430년) 8월에 유의륭과 노혜남 사이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휴룡(休龍), 아명은 도민으로 둘째 형 시흥왕 유준과는 동명이인이다. 원래 무릉왕, 옹주자사로 있으면서 양양을 수비했고 안북장군과 서주자사로 임명되어 팽성을 수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양 전투에서 패전해서 진군장군으로 좌천되었다가 북중랑장으로 복귀했다가 강주자사로 임명되엇다. 유준은 총명하여 독서를 할때 한번에 7줄을 함께 읽었고진정한 속독 문재가 매우 훌륭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이처럼 유준은 문무에 모두 재능이 있는 엄친아였다.

그러나 아버지 유의륭의 사랑을 받지 못해 팽성을 수비했다. 그런데 큰형 태자 유소가 453년 2월 유의륭을 시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면서 그의 인생이 급변한다. 유소는 보병교위 심경지를 시켜 그를 죽이라는 밀명을 내렸지만 오히려 심경지는 유준과 함께 유소를 공격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여기에 이복 동생이자 유의륭의 육남 경릉왕 유탄, 유유의 여섯번째 아들로 유준의 숙부인 형주자사 남군왕 유의선, 옹주자사 장질, 사주자사 노상 등과 함께 유소 토벌에 나섰다. 결국 유준은 4월에 신정에서 유소를 격파하고 황제에 즉위했으며 5월에는 건강을 점령하고 유소와 형 시흥왕 유준을 죽이고 그들의 시체를 거리에 내걸었다. 또 그들의 가솔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그 상처에 를 부어 모두 멸족시켰다.[1] 이 때 유소의 부인, 즉 유준의 형수 은씨가 한 말이 걸작이다.

은씨: 싸움은 니들끼리 했으면서 나는 왜 죽여?
효무제 유준: 넌 아비 죽인 역적놈의 계집이니까.

또 아비를 죽인 천하의 개쌍놈들이라는 뜻에서 유소, 유준 형제의 집을 허물고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그들의 일당과 무당 엄도육 일당을 멸족하고 시신을 모두 불태웠다. 그런데 유준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었는지, 아님 막장 황제들의 왕조라서 그런지 황제가 된 후에는 아주 엉망이었다. 유의선과 장질은 유소와 시흥왕 유준의 토벌 공로가 크다고 자랑하며 매우 교만하고 횡포했는데 일을 대부분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했다. 사실 장질의 공을 잘 아는 유준은 장질이 해달라는 것을 들어주었고, 유의선은 10년 동안 형주에 있으면서 재산을 축적하고 정예 병력을 훈련시키면서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그런데 유준은 유의선의 딸들, 즉 자기들의 사촌동생들을 숙의로 삼고 은씨와 사씨로 고친 다음 계속 끼고 살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누설했다가 죽은 자가 많았다.

이에 분노한 유의선은 장질과 함께 효건 원년(454년) 2월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호응자는 자가 매우 적었고 계획이 허접해서 금방 격파당하고 6월에 그들은 죽음을 당했으며 동시에 멸족되었다. 이 때부터 유준은 종실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온 정력과 역량을 집중했는데 이 때부터 황족들간에 살육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유준은 형주, 양주, 강주를 분할하여 동양주와 영주를 설치하고 인구를 분산시켜 세력을 약화시켰다. 또 인사권을 쥐고 있던 이부상서를 두 사람으로 이원화시키고 따로 대신을 임명하지 않고 중서, 통사, 사인이 정사를 토의하게 했다. 그의 악랄한 황족 사냥은 유의륭의 여섯번째 아들인 남서주자사 경릉왕 유탄을 제거하면서 절정을 달렸다.[2]

유탄은 성격이 관대하고 예절이 밝았으며 유소, 시흥왕 유준, 유의선, 장질 등 유준의 적들을 쳐부수는데 공을 세워 인심을 얻었다. 또 유탄의 세력이 강했으므로 유준은 그를 꺼려했고 대명 3년(459년) 4월에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군대를 보내 기습했다. 하지만 오히려 역관광당하고 패배했으며 이에 빡친 유준은 유탄을 치기 전에 건강에 있던 유탄의 일당 1천여명을 주살하여 내부 호응 세력이 될 수도 있는 자들을 모조리 처결했다. 결국 광릉을 쳐서 함락시키고 유탄과 그의 일족을 모두 멸하고 동시에 광릉 주민들을 잔인하게 몰살시켰다.

앞서 언급한 대로 유준은 성욕이 심했는데, 심지어 자기 어머니와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을 정도였다. 이는 유준이 자기 어머니에게 들러 밤새도록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사촌동생과 성관계를 맺은 것과 달리, 이 경우는 말 그대로 소문이기 때문에 진짜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유송왕조에 미친인간이 워낙 많은데다, 유준 이 양반의 행적이 워낙 막장인지라, 소문이 진짜라고 해도 그리 이상하진 않을 수준이다(...).

설상가상으로 할아버지 유유가 만든 농기구 관을 탐방했을 때는 거기에 있던 유유의 초상화를 삿대질하며 저런 못생기고 미천한 영감이 황제였다고 부끄럽다며 패드립을 날렸다. 애초에 효무제는 원가 7년, 즉 유의륭이 즉위한지 7년 후, 유유가 죽은지 10년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미 고인이 된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실 유유 이후로 송나라가 망할 때까지 그나마 유의륭 외에는 정상인 황제가 없었으므로 유유의 박물관도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유준은 인재 선발에 부당하여 자기의 비위를 맞추는 자들을 중용하고 좋아했다. 태재 강하왕 유의공은 매번 겸손한 척 하면서 살아남았으나 나중에 그의 아들 유자업을 폐위하려다가 네 아들과 함께 눈과 혀를 뽑히고 손발다리를 모두 잘리고 꿀에 담궈져 귀신 눈깔떡(귀목종)이라는 이름으로 참혹하게 멸족당한다.

유준은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고 아부를 떠는 간신들을 총애했다. 시중 안사백은 유준과 도박을 해서 일부러 한번에 백만냥을 잃고 환심을 얻어 심복이 되었다. 또 유준은 은귀비가 죽자 진군 태수 유덕원에게 우리 부인이 죽었는데 님이 곡하는 실력을 보고 상벌을 내릴 거임라고 말하자 유덕원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비통하게 울면서 눈물을 짜냈다. 이에 유준은 기뻐하며 유덕원을 예주 자사에 임명했는데 세설신어에 따르면 마침 그 날이 유덕원이 사별한 부인의 제삿날이었다고 한다(...).

반대로 자신에게 간언을 마주 날리는 충신에게는 잔혹하게 대했다. 단양윤 안준은 여러 차례 사치와 음란 행위에 대해 간언을 올렸는데 결국 유탄과 한패라는 죄를 씌워 다리를 자르고 죽였다. 또 노릉내사 주랑도 날카로운 직언을 하자 미워하여 어머니의 장례를 성의있게 하지 않았다면서 불효자라는 이유로 죽였다. 유준은 대규모로 궁전을 짓고 나무에 비단을 입혔으며 애첩과 총애하는 간신들에게 자주 상을 내려 국고가 비었다. 은귀비의 장례식에는 수십리의 산굴을 파서 거대한 묘를 만들었는데 그 부역에 죽은 백성들이 많았다.

유준은 재물을 탐내 자사 또는 2천석 이상의 녹봉을 받는 관리들에게 재물을 바치라고 명령하여 강제로 바치게 했고 바치지 않으면 파직하거나 죄를 씌워 죽였다. 바친 자들도 반드시 그와 도박을 해야 했는데 돈을 뺏고 결국 모든 재산까지 날려먹게 한 후에야 판을 그만뒀다. 종일 술만 먹고 취해서 대신들을 대취하게 하고 서로 희롱하게 하는 것으로 재미를 삼았다. 시중 심회문이 술을 마시지 않고 농담을 하지 않자 건방지다는 이유로 자살하라고 명령하고 그의 세 아들도 죽였다. 그 외에 대신들을 모욕했는데 황문시랑 종령수는 몸이 비대하여 절을 올리는 것이 힘들었는데 일부러 그에게 많은 것을 하사하여 그가 사례의 절을 올리게 만들어 힘들게 절을 하며 끙끙대는 그를 웃음거리로 삼았다. 또 심심하면 자신의 노비에게 곤장으로 대신들을 치게 했는데 상서령 이하의 관원은 곤장을 피할 수 없었다.

유준은 키가 크고 작은 것, 몸이 비대하고 여윈것에 따라 대신들에게 별명을 달아주었는데 평상시에는 대신들의 관직이나 이름을 부르는게 아니라 별명으로 불렀다. 이처럼 유준은 부패하고 기강이 없는 막장 황제였는데 그래도 이 정도는 이 왕조 황제들 중에서 그나마 양반이다. 왜냐면은 적어도 막장의 진수라고 평가되는 두 폐제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유준이 다스리는 이 나라가 즉시 멸망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 적국이었던 북위가 유연과의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해 침략하지 않아 국경이 비교적 평화로웠고 유준이 과감하고 민첩해 술에 만취해 있다가도 신하들이 들어오면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취한 척을 하지 않는 등 본인의 운빨과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준은 음란했고 총애하던 은귀비가 죽자 술만 퍼먹다가 그대로 병을 얻어 대명 8년(464년) 윤5월, 재위 12년만에 35세의 나이로 건강 옥촉전에서 사망했다. 7월에 경녕릉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아들 유자업이 뒤를 이었는데 막장 짓 하다가 폐위되고 결국 11번째 동생인 유욱이 뒤를 이었다.

2. 육조시대 유송의 마지막 황제 유준(劉準)

유송의 역대 황제
7대 후폐제 유욱 8대 순제 유준 황조 멸망

묘호 -
시호 순황제(順皇帝)
연호 승명(昇明, 477년 7월 ~ 479년 4월)
유(劉)
준(準)
중모(仲謀)
생몰기간 469년 8월 8일 ~ 479년 6월 23일
재위기간 477년 8월 5일 ~ 479년 5월 27일

유준(劉準, 463년~477년, 재위 477~479)

중국 육조시대 유송의 마지막 황제. 마지막 황제였고 혼란기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황제다.

재위 기간 내내 승명(昇明)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묘호는 없고 시호는 순황제(順皇帝)[3].

태시 5년(469년) 7월에 태어났으며 명제 유욱의 삼남으로 의모는 진씨[4]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계양왕 유휴범의 아들이었다. 소도성은 소(小)유욱의 동생이자 대(大)유욱의 셋째 아들이었던 안성왕, 양주자사, 표기장군이자 효무제 유준과 동명이인인 유준을 옹립했다. 유준은 용모가 단아하고 눈썹이 마치 그린 것처럼 멋이 있었는데 문제는 표기대장군, 사공, 녹상서사였던 소도성의 허수아비이자 꼭두각시였고 소도성은 제공에 올라 구석을 하사받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제왕이 되었다. 중서감 원찬과 상서령 유병은 소도성이 권력을 장악하자 거사를 하려다가 패전하여 자살했다. 이렇게 소도성에게 맞서는 세력은 없어졌으며 승명 3년(479년) 4월에 강압에 의해 선양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결국 선양하던 날 불상 아래에 숨어 있다가 결국 수색당하자 결국 나왔다. 유준은 "나를 죽일 건가?"라고 물었는데 군대를 인솔하던 직각장군 왕경칙은 "죽이진 않을 겁니다. 사실 폐하의 조상(유유)도 사마씨(동진)에게 이러지 않았습니까?"라고 했다. 그러니까 선양 된 뒤에 죽겠지요란 의미다! 이에 순제는 "내세에는 제왕의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하니 궁중 사람들이 슬프게 울었다.[5] 결국 선양한 다음 여음왕으로 강등되어 단양궁에 유폐되었다가 1달도 안되어 11세에 살해당했다. 비록 7월에 황제의 예로 수녕릉에 안장되었으나 나라는 쫄랑 망하고 제(齊)나라로 이어진다. 하지만 초대 임금 빼고는 죄다 제명에 산 사람이 없다는 아름다운(?) 전통은 그대로 이어져버렸다.

3. 육조시대 유송의 황족

劉濬

정확히는 1번 항목 유준의 작은형이다.

429~453

유송의 3대 황제 문제 유의륭과 숙비(淑妃) 반씨(潘氏)의 차남이다. 아명은 호두(虎頭), 는 휴명(休明)이다. 시흥왕에 봉해졌으나, 과실이 많아 유의륭의 미움을 사서 태자 유소는 폐하고 그는 죽이려고 했다. 거기다가 무당 엄도육을 시켜 옥으로 유의륭의 모습을 새겨 함장전에 묻고 저주를 했던 것이 발각되어 유의륭은 대단히 노했다. 그러나 유의륭은 그들을 처리할 것을 차일피일 미루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생모 반씨가 이 사실을 알리는 바람에 유소와 유준은 이를 알게 되었고 의기투합하여 결국 유의륭을 죽였다. 그런데 이 혼란에 정작 반씨는 휘말려 죽음을 당했다(...).

형 유소가 황제가 되었으며 유소가 보병교위 심경지를 시켜 무릉왕 유준(劉駿)을 죽이려고 했으나, 심경지는 도리어 유준을 도왔고 무릉왕 유준은 유탄, 유의선 등의 도움을 받아 유소를 공격했다. 유소는 신정에서 대패했고 유준의 군대는 건강에 입성하여 결국 유소와 시흥왕 유준은 함께 처형되어 건강에 시체가 내걸렸다. 동시에 그의 세 아들 유장문(劉長文), 유장인(劉長仁), 유장도(劉長道)역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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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유소의 자는 휴원(休遠)으로 부인으로는 은씨(은옥영)와 왕씨(왕앵무)가 있었다. 은씨는 남편 유소가 잠시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남편이 일찍 퇴갤해서 망했어요. 은씨, 왕씨, 그리고 유소의 네 아들 유위지, 유적지, 유빈지, 신원미상의 아들, 딸 하나까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시흥왕 유준의 자는 휴명(休明)으로 그의 부인, 그의 세 아들 유장문, 유장인, 유장도 역시 모두 죽음을 당했다.
  • [2] 유탄의 자는 휴문으로 유의륭과 은씨(은수화) 사이에서 태어난 유의륭의 6남이었다.
  • [3] 반항하거나 유혈사태없이 평화적으로 순순히 선양해줬다는 의미이지만 결과는 안습.
  • [4] 이름은 진법용
  • [5]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원나라 호삼성은 이때부터 선양한 임금이 천수를 누린 사례는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사실 정확히는 유준의 증조할아버지 유유가 동진 공제를 죽인 것부터 봐야 된다. 물론 이 문장은 길게 봐서는 틀린 문장이다. 송나라의 예가 있었으니까. 후주의 공제 시종훈은 단명했으나, 남송이 망하는 날까지 그의 후손은 후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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