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유현상

last modified: 2014-09-29 02:23:29 by Contributors

c0139854_51434c23f1d5d.png
[PNG image (84.51 KB)]
이름 유현상
출생 1954년 1월 30일
그룹 백두산
소속 백두산엔터테인먼트 (대표)
학력 광운대학교경영대학원 석사
데뷔 1976년 재즈 록밴드 사계절
가족 2남 1녀 중 셋째
홈페이지, 팬카페

대한민국의 가수. 1954년생으로 2011년 현재는 락밴드 백두산의 리드보컬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원로 개그맨이기도 하다

그 또래 음악인들이 대개 그러했듯 미8군 무대 출신이다. 1970년대 중반 그룹 '라스트 찬스' (후기) 로 데뷔를 했었으며[1] 사계절이라는 그룹에도 몸 담은 적이 있다.[2] 사랑과 평화가 대마초파동으로 방송이 금지되어 나이트클럽을 뛰던 시기의 멤버였으며[3], 문화방송 전속 관현악단의 기타리스트로도 활동했다. 그 덕분인지 현재에도 기타 실력은 매우 수준급으로, 당대의 대가들의 평가까진 아니라도 기타 리스트로서의 유현상의 재능도 뛰어나다. 작사작곡에도 참여하고 있는데, 백두산 곡의 상당수도 그와 김도균의 합작품이다.

1986년 KBS2 TV의 인기 프로그램 음의 행진에서 백두산의 리드 보컬 겸 리듬 기타로 본격 데뷔했는데, 당시 부른 노래는 어둠 속에서이다. 부활, 시나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방송에 얼굴을 내밀면서 대한민국에 일종의 열풍을 몰고 왔는데, 후발주자인 백두산은 사운드 자체로는 가장 하드하지만, 멜로디 라인은 뽕끼가 섞인 묘한 한국적 메탈 사운드로 팬층을 확보하였다. 물론 이것은 활동 초기때의 이야기이고 2집때는 주다스 프리스트 카피 보컬로 다른 의미에서 묘한 괴작으로 알려진 백두산 2집을 발표한다.

목소리는 거칠고 터프한 매력이 있는 반면 음역대는 그리 높지 않았는데, 이를 특유의 샤우팅으로 보완했다. 이를 전문용어로 스크리밍 창법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서구의 스크리밍 창법(딥 퍼플의 이언 길런이나 아이언 메이든의 브루스 디킨슨이 그것)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세계 락보컬 에서도 매우 매우 희귀하고 컬트적인 창법이다. 1980년대 중반 쇳소리의 가성을 방송에서 들은 당시 시청자들은 당연히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백두산 시나위 부활로 처음 헤비메탈 사운드를 접한 당시 한국 청소년들에겐 무척이나 환영 받는 창법이었겠지만, 70,80년대 서구의 헤비메탈 사운드를 이미 접한 다수의 헤비메탈 마니아들에게 유현상의 스크리밍 뒤의 묘한 뽕끼가 남아있는 보컬엔 도저히 몰입을 할수가 없었다. 웃기는 건 그 당시 전자가 훨씬 많았다는 것, 그리하여 유현상은 계속 이 창법을 유지한다. 지금까지도... 사실 굉장히 목에 무리가 많이 갈 것 같은데도 50세를 넘긴 나이에 그 목소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대단한 자기관리라고 할 수 있다. 백두산,시나위 재결성후 유현상의 보컬을 접한 한국 어린 리스너들은 유현상을 한국의 롭 핼포드라고 별명 붙였다(Before the Dawn 과 Breaking the law 이 두곡은 들어봤으니까...)

현대에 들어와서 본좌로 불리는 임재범은 오히려 당시 매니아들에게 너무 외국인의 목소리를 따라하는거 같다는 평가를 받기 일쑤였고[4], 부활은 헤비메탈이 아니라는 평가를 얻었고, 레드제플린이나 러쉬를 잘 모르던 무식한 국내 헤비메탈 마니아들은 김종서는 동요라고 까기도 했다.

평가야 어찌 됐건 당시 유현상의 보컬은 백두산 그 자체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재미있는건 2000년대 초반까지는 유현상의 창법은 TV프로나 쇼 프로에서 그저 개그 코드로 많이 쓰이곤 했는데(특히 탁재훈) 2000년대 후반부터 김구라의 추천으로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맹활약한 유현상은 스스로를 락의 전설로 부르기 시작한다. 불과 10년전의 사실도 왜곡되는 세상에서 20여년전에 본인이 그랬다고 하면 현재의 중고딩들은 그런가 보다 할수 밖에...

재밌는 것은 절친노트에서 유현상이 밝힌 바에 따르면, 원래 보컬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 유현상의 시작은 기타리스트였다.그러나 보컬을 모집하다가 안돼서 자신이 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는 서라벌 레코드사의 음반기획부장으로 활동하다가 헤비메탈 붐이 일자 사비를 털어 기타리스트 김도균을 스카웃하고 백두산을 결성하게 된 것.

급조된 밴드였기에 초기 5인조에서 음반 발표 당시 김도균 유현상을 제외하고 모두 교체 되고 1집은 가요도 아니고 락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앨범이 되었다. 하지만 80년대를 살던 사람들의 평가로도 연주력은 최고로 쳐줬다. 특히 나이트클럽 경험이 많았던 리듬섹션 멤버들 (한춘근, 김창식(고인돌), 2집의 김주현) 의 영향으로 늘상 꽉 짜여진 사운드가 나올수 있었다. 분명 유현상이 리더인 백두산이지만 유현상의 보컬이 들어가지 않은 2집의 연주곡 Revelation을 들을때마다 여러가지로 복잡한 생각이 든다.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3관왕,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수영 2관왕인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5]와 결혼해서 다시 한번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6] 나이 차이도 꽤 나는 편인데, 행복하게 잘 사는 듯 하다. 얼마전 아침 방송에서 나온 내용이지만 자식들이 바라보기에는 오히려 최윤희가 유현상을 더 사랑한다.라고 한다. 뭔가 부럽다.

1987년 부활의 김태원대마초로 잡혀갈때 신군부가 한국 록 씬에 철퇴를 내리면서 유현상 역시 잡혀들어갔다. 자신은 대마초는 커녕 술담배도 하지 않지만 '너는 대마초를 피웠으니까 자백하라'고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당연히 밴드활동 금지에 리더 유현상이 수감되어 백두산 활동을 못하자 버틸수 없던 기타리스트 김도균이 탈퇴하면서 자연스레 밴드 백두산은 와해된다. 이후 풀려난 유현상은 기획사 사장님으로 변신하여 여성 아이돌의 원조라고 볼수 있는 전설적인 가수인 이지연의 매니저로 활동한다. 또한 시나위에서 탈퇴한 김종서를 영입해 카리스마라는 밴드를 만들어 자신이 못다한꿈을 이루고자 했지만 결과는 시망이였고 카리스마는 이지연의 백밴드를 하는둥 결국 막막해진 김종서도 솔로로 나오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김종서가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이때의 앙금이 아직도 있는지 유현상이 나올때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유현상은 진심으로 미안해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야차(..)[7]와 같은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나오는 아이돌을 키우는 둥 여러가지를 시도했지만 이지연의 돌연 은퇴선언[8] 등으로 이 일도 접게 된다.

그리고 90년대 초 결국 그는 머리를 자르고 트로트 가수로 변신 여자야를 발표해서 락 음악 후배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음악 잘모르는평론가 진모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가혹하고 충격적인 변신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그 여파나 충격이 심했는데, 트로트 가수로 성공한 후에도 일요일 일요일 밤에나 다른 쇼 프로에서도 유현상의 리즈시절을 농담 따먹기 식으로 이야기 했다. 사실 가족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면서 부양의 문제가 생겼고 결국 그는 돈을 벌어야 했다고 후에 기술했다. 하지만 트로트를 한걸 후회하진 않는다고, 실제로 남진이나 나훈아를 존경한다고 하기도 했으며, 백두산으로 복귀한 지금도 개그의 소재나, 음악 프로에서 이런걸 했었다고 자랑스럽게 부르는거보면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여자야 외에도 갈테면 가라지같은 곡을 히트 시켰다. 사실 밴드 결성 전에 솔로 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시절에 이미 버젓한 성인가요 앨범을 낸 바가 있으니 딱히 변절이라기도 뭣하긴 하다.
하지만 이런 행동의 반작용으로 여자야를 부르던중 백두산의 팬들이 그에게 실망하여 유현상을 질타하며 물병을 투척하거나, 얼마 줄테니깐 백두산 노래 부르라고 하는 둥 개인적으로 수난도 상당했다고 한다.
원래 유현상의 뿌리는 나이트클럽이므로 트로트, 디스코, 락 장르 구분이 없다고 할수 있다.

트로트 가수로써의 유현상도 독특했는데 상상플러스에서 에서 김영호는 '백두산에서 하던대로 부르는 거 같다'라고 평할 정도로 일반적인 트로트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포크에 가깝다 봐야했는데, 유현상의 트로트는 기교 없이 담백하게 읊조리는 보컬에 가까운 타입으로 백두산 시절 쇳소리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오히려 굳이 장르를 붙이자면 본인 스스로 말하는 '트로트가 아니라 미디움템포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트로트를 한 것도 그리 후회하지 않는 듯.

그리고 2008년 김도균 등과 동두천 락 페스티벌에서 백두산을 오리지널 멤버로 재결성히여 활동하고 있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지만 아직도 쌩쌩히 활동하고 있다. 트로트 가수로 변신한 시절에도 헤비메탈이 하고 싶어 술, 담배를 일절 대지 않고 목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이 덕인지 예전 곡들을 무리 없이 소화해낸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유현상의 열린 음악회라는 바를 운영중이다. 백두산 공연이나 팬미팅을 이곳에서 하고 있다고. 장사도 잘되며, 주중에 유현상이 직접 기타를 연주하거나, 사람들이 노래하는 무대도 설치해놨다. 또 실제로는 상당히 젠틀하며 자상하다고 한다. 매너도 좋고.

세바퀴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그 외에도 케이블 프로같은 데서 망가지는 것도 불사하는 탓에, 유현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공연장에서의 카리스마에 놀라는 경우가 적지않다(...).

나는 가수다 2에 백두산 이름을 걸고 밴드로 출연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졸지에 좀 더 젊은 층의 밴드 가수들이 나올거라 예상했던 사람들에게 훼이크를 날린 셈이 되었다. 아쉽게도 보컬의 호불호로 첫 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 저력을 보여주는데에는 충분했다. 현재는 백두산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제작자로 다시 부활하였다.

----
  • [1] 백두산 커리어가 아닌 개인 커리어로 치면 나는 가수다 2의 최고참. 1978년 데뷔인 인순이도 유현상 앞에선 그저 버로우(...) 참고로 유현상과 인순이는 어릴적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심지어 놀러와에 함께 출연해 '야 인순아' 라고 부르는 기염을 토하기도...ㄷㄷㄷ
  • [2] 당시 같은 팀에 있던 가수가 윤시내.
  • [3] 이 시기에는 유현상 말고도 수많은 멤버들이 거쳐갔다.
  • [4] 특히 임재범이 시나위를 나와 솔로로 활동하던 초창기 때 '한국의 마이클 볼튼'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 [5] 대한민국에서의 당시 위상은 박태환+김연아급. 대한민국 원조 국민 여동생이다.
  • [6] 실제로 납치를 했다는 루머도 있었으며, 결혼식도 비밀리에 절에서 진행했었다. 이날 이후 방송국 PD들은 유현상의 판을 깨뜨리며 절대 방송 출연이나 음악을 틀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충격과 공포.
  • [7] 일본 그룹 히카루GENJI의 컨셉을 모방한 그룹. 뒤에 ZAM에서 리더를 맡는 조진수가 팀의 리더였고, '맨발의 청춘'이라는 곡으로 유명한 듀엣 에서 활동하는 김병수도 이 때의 멤버였다. 이들이 발표한 '애타는 마음'은 원래 '백두산'의 음반에 실린 곡이었다.
  • [8] 이지연이 사랑에 빠진게 원인이었다고 한다. 이지연의 갑작스러운 미국행과 현지에서의 결혼, 그리고 일방적인 은퇴선언은 매니저로서 당시까지 이지연의 활동에 거의 지원과 투자만 하고 이렇다 할 수익도 가져보지 못한 유현상에게는 인간적 배신감과 함께 금전적 손실도 컸던 사건이었다. 또한 세간에서는 당시 미혼으로 노총각 매니저였던 유현상이 이지연을 짝사랑 하는 맘으로 애지중지 키우다가 배신당했다라는 식의 조롱거리로 회자되기도 했으나 얼마후 유현상은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와 결혼함으로써 범국민적 패닉을 부르며 질시와 부러움과 저주를 한 몸에 받는 대한민국 남성들의 공공의 적 자리에 올랐다. 실연한 친구를 위로 할 때 흔히 하는 말인 X차 가고 벤츠 온다..는 그저 위로의 말인줄 알았거늘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4-09-29 02:23:29
Processing time 0.1462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