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출생부터 임진왜란 전야까지 ¶
1.2. 임진왜란 때부터 말년까지 ¶
2. 평가 ¶
1. 윤두수는 어가가 몽진을 하면서 평양에 있을 때 홍순언 등의 명나라에 대한 구원병 파병요청 주장을 반대하고 평양성의 사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평양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유군에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쳐발렸다. 물론 이 항목은 능력이 안 되고 여건이 안 되니까 그나마 이해는 간다. 그러나 2번 항목부터는 도저히 실드를 칠 수가 없다. 2. 원균이 제안한 장문포 해전을 자신의 권한으로 입안, 시행시켰다. 결과는, 항목을 참고하면 잘 알겠지만 망했어요. 게다가 이 전투는 훗날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는 상소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3. 평소에도 원균을 단순히 두둔하는 정도가 아니라 고금에 둘도 없는 명장이라는 헛소리를 하기도 하고, 조정에서 이순신을 못마땅 해하는 선조에게 편승하여, 전시에는 지휘관을 바꾸면 안 되나 이순신은 반드시 체직시켜야 한다는 미친 지X까지 한다. 더군다나 그 근거라고 내밀었다는 게 김응서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계략에 넘어가서 길길이 날뛰며 말하는 것을 기반으로 했으며 그 자신이 직접 진상조사조차 하지도 않았다. 4.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자신의 주장대로 이순신이 실각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칠천량 해전이 벌어졌고, 조선 수군이 싹 증발했다는 기절 초풍할 비보를 접한 상황에서의 어전 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각지의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는 정신나간 주장을 했다. 조선 육군이 개전 초 일본에 탈탈 털린 원인이 어디 있는지를 생각하면 이 사람이 과연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람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이건 까놓고 말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하기 싫으니 단일한 지휘관을 임관시키기를 포기하고 병력을 분산시켜 왜 수군의 대병력에 각개격파 당하자라는 소리나 진배 없다. 그의 주장대로 했다면 하삼도의 백성들은 무방비 상태로 왜군에게 도륙당했을 것이고[10], 제해권을 확보한 왜 수군은 물길을 따라 한양까지 사흘이면 주파가 가능했을 것이다. 거기에 강화협상 중에는 명군의 지원도 받지 않고 왜성을 공략해야 한다고 쌩쑈를 해서 선조가 마지못해 들어주었는데 병력도 부족하고 식량도 없어서 자살에 가까운 작전이었으나 왜군이 대응하지 않아 소득없이 끝나는 수준에 그쳤다. 만약 왜군이 강하게 대응했으면 막대한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이때 윤두수의 논리가 이기면 좋고 실패해도 조상님들에게 노력은 했다고 큰소리는 칠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5. 종합하자면, 무능력하고[11], 뇌물이나 받아 처먹고[12], 나라와 백성보다는 임금의 눈치나 살살 보며 자기 붕당의 이익부터 꾀한[13]데다가 자신의 직무조차 무성의하게 임했던, 전형적인 정치인이다. |
3. 현대 창작물에서 ¶
- [1] 그래서 이 사람의 후손이 해평 윤씨의 여러 분파 중 하나인 오음공파이다. 즉 오음공파 사람들에게 윤두수는 중시조.
- [2] 그나마 여기서 잘한 것이라고는 노약자들을 신속히 대피시킨 정도이다.
- [3]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 어전 회의 관련 기록을 보면 아주 잘 나와 있다.
- [4] 원균이 서인이면서, 친척관계였던 윤두수 형제의 지지를 받고 있었음은 사실이다. 서인이었던 그는 임진왜란 당시 동인의 지지를 받는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친척인 원균을 비호하며 그를 삼도 통제사에 앉히는데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상 칠천량 해전의 주역.
- [5] 역시 출처는 선조실록
- [6]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자신이 이순신을 추천했기 떄문에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표현때문에 서인이 동인의 보호를 받는 이순신을 공격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당시에는 서인vs 동인의 당쟁이 아닌 서인vs 북인의 당쟁으로 정쟁이 마무리 될즘에는 서인이 몰락하고 북인이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북인이 남인인 류성룡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류성룡이 말한 자신을 싫어한 사람들은 서인이 아니라 북인이다.
- [7] 물론, 매국유산문제를 청산하지 않은 친일파 후손은 예외로 어느 정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 경우라도 조상과 동급은 아니다.
- [8] 환빠나 원균 명장론을 주장하는 이들과 비슷한 패턴이다.
- [9] 현대 역사가들의 평가도 선조가 의병 지휘관이나 관군의 유능한 인재들에게 포상을 제대로 안 해서 욕을 먹어야 하는 거지, 피난 시기 선조와 함께한 자들의 공신 책봉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쪽이다. 전근대 시대에 왕은 곧 국가였음을 명심하자.
- [10] 애시당초 의병은 주전력이 아니었다. 주전력이 아닌 병력을 주전력처럼 굴리다가 병사들을 어육으로 만든 사례가 임진왜란 초기에 수없이 벌어졌고, 결국 그 꼴을 보다 못한 관군이 그럭저럭 전선이 안정된 전쟁 중반 이후 직접 지휘를 하게 된다. 물론 병력도 2~3만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조리 집으로 보내버렸다.
- [11] 평양성 전투, 장문포 해전, 칠천량 이후의 대책이랍시고 내놓는 것들.
- [12] 실록을 참조하시라.
- [13] 이순신을 디스하고,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와해되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