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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last modified: 2015-04-06 07:35:15 by Contributors


尹伊桑 (로마자 표기는 Isang Yun), 한국 출신의 작곡가. 국제 윤이상 협회 홈페이지
1917.9.17~1995.11.3

Contents

1. 생애
1.1. 한국에서
1.2. 유럽에서
2. 주요 작품들
2.1. 교향곡
2.2. 관현악곡
2.3. 협주곡
2.4. 실내악
2.5. 독주곡
2.6. 성악곡
2.7. 합창곡
2.8. 오페라
3. 수상 경력
4. 창작 성향
5. 사생활
6. 정치적 논란
6.1. 오길남 논란


1. 생애

1.1. 한국에서

일제강점기인 1917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다. 흔히 통영이 윤이상의 고향으로 언급되지만, 호적 기록에 따르면 산청으로 되어 있다. 단, 통영도 윤이상이 오랫동안 자라난 고장이라 '제2의 고향' 정도로는 언급할 수 있을 듯. 생후 3년 뒤 가족들과 함께 충무(현재 통영)로 이주했고, 서당과 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

신식 학교에 다니면서 음악실에 비치된 을 접하고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하며, 서양 음악의 기초 이론을 배우는 한편 사당패나 판소리 명창의 공연에 열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음악가가 배고프고 불행한 직업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음악 공부를 금지했고, 상업학교로 아들을 진학시켰다.

하지만 입학 후 2년 뒤에 가족들의 뜻을 거스르고 서울로 올라갔고, 옛 대한제국 소속의 군악대였던 시위연대 출신의 연주가로부터 화성학을 배웠다. 1935년에는 상업 공부를 하면서 음악을 배워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오사카로 유학했고, 첼로와 작곡, 음악이론 등을 오사카 음악학원에서 배웠다.

귀국 후 잠시 보통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39년에 다시 도쿄로 유학했고, 프랑스 근대 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에게 작곡을 배웠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작곡 활동을 틈틈이 하는 한편 항일 지하조직에 가담해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사를 일으킬 틈도 없이 경찰에 체포되었고,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2개월의 단기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경찰의 감시를 피해 서울로 올라가 인쇄소 식자공 등으로 겨우겨우 연명했고, 그 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다시 통영으로 돌아가 통영여고, 부산사범학교, 부산고 등에서 음악교사 생활을 했으나, 투옥과 오랜 도피 생활로 얻은 결핵이 악화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는 투병 경력 때문에 징집에서 제외되었고, 계속 음악교사로 일하면서 전시작곡가협회와 그 뒤를 이은 한국작곡가협회에 입회했다.

휴전 후 가족들과 다시 서울로 올라갔고, 작곡 교사로 활동하면서 잡지나 신문에 음악 관련 기고문을 발표하거나 실내악 작품을 쓰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55년에 현악 4중주 제1번과 피아노 3중주 두 작품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상금과 기타 여비를 더해 이듬해 프랑스파리 국립음악원에 유학했다.

1.2. 유럽에서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기대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고, 1957년에 다시 서독서베를린으로 옮겨 베를린 고등음악학교(현 베를린 음악대학)에 입학해 음악이론과 12음 기법, 작곡을 배웠다. 이 때 스승들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실링과 요제프 루퍼, 보리스 블라허가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1959년에 졸업한 직후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 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을 발표했고, 특히 후자는 현대음악 작곡가의 등용문으로 유명한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1] 이 성공으로 귀국 계획을 보류하고 계속 서독에 남아 작곡 활동을 진행했고, 동아시아 음악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정 형편은 늘 좋지 않았고, 프라이부르크쾰른을 거쳐 1964년에 미국의 포드 재단에서 진행하는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의 수혜 대상으로 선정되어 다시 서베를린에 이주했다. 쾰른 정주 시절에는 월북 음악가였던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는데, 이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는 떡밥으로 작용했다.[2] 실제로 윤이상은 북한에서 조선국립교향악단콘트라베이스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 친구를 만났지만, 냉전으로 인한 서로 간의 입장 차를 좁힐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강서고분에서 사신도 벽화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며, '영상' 같은 작품의 창작 동기가 되기도 했다.

1966년에 다름슈타트 음악제에 버금가는 현대음악제인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관현악 '예악' 이 초연되었고,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유럽의 신예 현대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납치되었고,[3] 다른 독일 주요 교포 인사들과 함께 고문을 당한 뒤 북한의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불법적인 체포 과정과 혐의 사실의 날조 혹은 과장, 국제 사회의 여론 악화 등으로 2심과 3심을 거쳐 10년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투옥 중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을 완성했고, 악보가 독일로 보내져 초연되면서 구명 운동을 위한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후 건강 악화로 서울대학교 종합병원에 입원했고, 투병 중에도 계속 작곡을 하는 한편 석희 같은 젊은 작곡학도들을 비공식적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1969년에 한국 정부가 특별 석방 조치를 내려 독일로 돌아갔고, 2년 뒤 가족들과 함께 서독 국적을 취득했다.[4]

1972년에 모교 서베를린 음악대학의 작곡과 명예 교수가 되었고, 뮌헨 올림픽 기념 문화행사를 위해 오페라 '심청' 을 작곡해 초연했다. 서독 외에도 미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 작품이 연주되었고, 1977년에는 서베를린 예술대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고, 이듬해 '광주여 영원히!' 라는 관현악 작품을 발표했다.[5]

1982년부터 남북한 양측에서 윤이상 음악의 공연이 개최되기 시작했고,[6] 1983년부터 87년까지는 매년 교향곡을 한 곡씩 발표했다. 1987년에는 70회 생일 기념으로 서독 각지에서 기념 행사와 음악회가 개최되었으나, 지병인 당뇨병의 악화로 인해 점차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휴전선상에서 남북 음악가들이 공동으로 공연하는 아이디어를 남북 양측에 제의했으나, 양측의 이견이 너무 커 무산되었다. 그 대신 1990년에 남북의 예술인들이 예술단을 구성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가며 공연했고, 분단 이후 개최된 남북 간의 첫 교환 공연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당뇨 합병증이 악화되어 폐렴 등의 추가 질환이 발생했고, 산소호흡기와 휠체어 없이 생활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1994년에 예음문화재단 주최로 남한에서 '윤이상 음악축제' 가 개최되었는데, 이 때 남한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한국 정부와 갈등이 계속 되어 귀국 계획을 접어야 했다. 한국 정부 외에도 몇몇 과격 운동권 인사들이 베를린에서 벌인 행각-'정치적 논란' 항목에 따로 기술한다-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모든 정치 활동에서 손을 떼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해 마지막 작품이 된 '화염 속의 천사' 를 완성하고 이듬해에 도쿄에서 초연했다.

그러나 병세 악화는 계속 진행됐고, 폐렴 재발로 인해 1995년 11월 3일에 베를린에서 타계했다. 장례는 유언에 따라 불교 의식으로 진행되었고, 유해는 베를린 가토우의 지방 묘역(Landschaftsfriedhof Gatow)에 안장되었다.[7]

2. 주요 작품들

2.1. 교향곡

교향곡 제1번 (1983)
교향곡 제2번 (1984)
교향곡 제3번 (1985)
교향곡 제4번 '어둠 속에서 노래하다' (1986)
교향곡 제5번 (1987)

실내 교향곡 제1번 (1987)
실내 교향곡 제2번 '자유에 바침' (1989)

2.2. 관현악곡

바라 (1960)
교착적 음향 (1961)
유동 (1964)
예악 (1966)
차원 (1971)
협주적 음형들 (1972)
서곡 (1973)
무악 (1978)
서주와 추상 (1979)
광주여 영원히! (1981)
인상 (1986)
윤곽 (1990)
신라 (1992)
화염 속의 천사 (1994. 뒤이어 소규모 기악 합주와 여성 합창, 소프라노 독창으로 연주되는 '에필로그' 가 따라나오도록 되어 있다)

2.3. 협주곡

첼로 협주곡 (1975~76)
플루트 협주곡 (1977)
오보에와 하프를 위한 2중 협주곡 (1977)
클라리넷 협주곡 (1981)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1981)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1983/86)
하프와 현을 위한 '공후' (1984)
오보에 협주곡 (1990)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 (1992)

2.4. 실내악

피아노 3중주 (1954)
현악 4중주 제1번 (1955)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 (1959)
현악 4중주 제3번 (1959)
실내 합주를 위한 '낙양' (1962)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영상' (1968)
플루트, 오보에와 바이올린을 위한 3중주 (1972~73)
피아노 3중주 (1972/75)
8중주 (1978)
오보에, 하프와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 (1979)
아코디언과 현악 4중주를 위한 소협주곡 (1983)
클라리넷 5중주 제1번 (1984)
플루트 5중주 (1986)
현을 위한 '융단' (1987)
목관 5중주와 현악 5중주를 위한 '거리' (1988)
현악 4중주 제4번 (1988)
현악 4중주 제5번 (1990)
목관 5중주 (1991)
현악 4중주 제6번 (1992)
목관 8중주 (1993)
클라리넷 5중주 제2번 (1994)

2.5. 독주곡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 (1958)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 (1963)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 (1963)
하프시코드 독주 '소양음' (1966)
오르간 독주 '음관들' (1967)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 (1968)
첼로 독주 '활주' (1970)
오보에 독주 '피리' (1971)
플루트를 위한 다섯 개의 연습곡 (1974)
바이올린 독주 '대왕의 주제' (1976)
피아노 독주 '간주곡 A' (1982)
바이올린을 위한 다섯 개의 소품 '리나가 정원에서' (1984~85)
하프 독주 '균형을 위하여' (1987)
플루트 독주 '소리' (1988)
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투게더' (1989)
리코더(혹은 플루트)를 위한 모음곡 '중국의 그림' (1993)

2.6. 성악곡

가곡집 '달무리' (고풍의상, 달무리, 충무가, 그네, 편지, 나그네 여섯 곡. 1941/47/48)[8]
세 명의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나모' (1971)
기타, 타악과 목소리를 위한 '가곡' (1972)
소프라노와 실내 합주를 위한 '밤이여 나뉘어라' (1980)

2.7. 합창곡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 (1964)
칸타타 '사선에서' (1975)
칸타타 '현자' (1977)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1986~87)

2.8. 오페라

류퉁의 꿈 (1965)
나비의 미망인 (1968)
유령의 사랑 (1969~70)
심청 (1971~72)

3. 수상 경력

서울시 문화상 (1955. 작곡가로서 수상한 최초의 사례다)
눌원문화상 (1960)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회원 (1968)
킬(Kiel) 시 문화상 (1971)
서베를린 예술원 회원 (1974)
튀빙엔 대학교 명예 박사학위 (1985)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1987)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공로상 (1992)
괴테 메달 (1995)

4. 창작 성향

유년기 때부터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을 골고루 들을 수 있었던 환경 때문인지, 이후 독일로 옮겨가서도 이러한 양상을 계속 유지했다. 초기 작품들에서는 뚜렷한 민요나 전통음악 풍의 선율을 들을 수 있으며, 동시에 쇤베르크르토크의 현대적인 기법을 절충시키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독일에서 발표한 첫 작품들은 12음 기법 등 서구 현대음악 기법의 강한 영향력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동양의 전통음악들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음의 떨림이나 호흡이 길고 음의 움직임이 적은 선율, 이를 표현하기 위한 비일상적인 특수 연주법 등을 가미해 나름대로 독자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 초기 작품은 너무 연주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종종 연주자들로부터 불만을 듣거나 심지어 공연을 거부당하는 일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교착적 음향' 의 경우, 초연 연습 때 악단원들이 윤이상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온갖 욕을 했을 정도였다. 지휘자가 나서서 달래보았지만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는데, 결국 윤이상이 무대 위로 올라가 첼로 파트의 어려운 대목을 직접 연주해 보이자 버로우탔다(...). 가까스로 공연이 개최되기는 했지만, 청중석에서도 야유와 환호가 뒤섞여 나올 정도로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이는 단순한 기교의 과시 문제가 아니었고, 실제로 윤이상은 여타 현대음악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성악가들과 기악 연주가, 지휘자들과 여러 차례 토론하면서 작곡을 진행했다. 윤이상과 친분을 맺었던 음악인들 중에는 각기 해당 악기의 본좌로 손꼽히는 하인츠 홀리거(오보에), 오렐 니콜레(플루트), 에두아르트 브루너(클라리넷), 지크프리트 팔름(첼로), 한스하인츠 슈네베르거(바이올린), 우어줄라 홀리거(하프) 등이 있었다. 이런 괴수대가들을 위한 곡이다 보니, 기교적으로 넘사벽에 가까운 난이도가 될 수밖에.

그리고 초연 후에는 기악과나 성악과 학생들의 수업을 함께 지도하면서 '결코 연주 불가능한 곡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강조했고, 1980년대에는 꾸준한 연습과 교육의 결과 학생들도 연주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2000년대 들어서는 독일 음대 관현악단도 윤이상 관현악곡을 연주하고 있을 정도.

동백림 사건 이후에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이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 등을 작품에 반영하게 되었고, 작품의 메시지가 강해지는 대신 음악의 어려움이 경감되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 가사가 들어가는 곡들의 경우, 노자의 도덕경이나 성경 등 동서양 종교/철학서의 인용 외에 넬리 작스나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 같이 나치에 의해 탄압당한 유대인/반체제 인사의 시를 사용해 그러한 메시지를 강화했다.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의 경우 독일 유학 후 최초로 한국어 가사를 택했는데, 이 곡에서는 기완이나 고은, 병란, 봉우, 두진, 양성우, 김남주 등의 재야/민족계 문학가들의 시를 주로 사용했다.

1980년대부터는 신낭만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듯 작품이 더 유순해지고 받아들이기 한결 편한 곡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렇다고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령 마지막 작품인 '화염 속의 천사' 의 경우, 1980년대에 분신 자살한 학생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한 곡이라고 분명히 발표했다. 표제에 반영되던 아니건 간에, 윤이상 자신의 악곡 해설문을 보면 핵전쟁의 위협이나 종 차별, 인권유린, 환경오염 등의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다는 내용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부터는 실험성이나 전위적인 면이 줄고 작품의 구조가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하는 등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판도 있다.

시대 별로, 그리고 작품 별로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동서양의 기법을 모두 받아들여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창조한 업적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거의 없다. 지금도 독일에서 활동한 동양인 현대 작곡가들 중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고, 유럽 현대음악계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호소카와 토시오를 비롯한 많은 후학들도 그의 어법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1996년에는 독일을 거점으로 하는 '국제 윤이상 협회' 가 만들어졌고, 지금도 윤이상 작품의 보급과 연구, 연주, 녹음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5. 사생활

윤이상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약 다섯 달 전에 결혼했는데, 상대는 부산사범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던 이수자였다. 중매가 아닌 연애 결혼이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데, 처음에는 윤이상이 결핵 환자였다고 해서 이수자 집안의 반대가 대단히 심했다고 한다. 결혼 직후 딸인 윤정이 태어났고, 아들인 윤우경은 1954년에 태어났다.

한국에서는 상당한 애처가였고 가정적인 인물이었지만, 독일로 옮겨간 후 서구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진 탓이었는지 아내와 아이들이 1961년과 1964년에 각각 독일에 와서 합류한 후에는 종종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가족 관계가 회복되자마자 터진 동백림 사건은 윤이상에게 지울 수 없는 육체적/정신적인 상처를 남겼고, 이 때를 전후해 당뇨병을 비롯한 여러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성격은 다소 신경질적이고 엄격했다고 전해지는데, 특히 작곡할 때는 절대 정숙을 요했기 때문에 번잡한 주택가에서 살 때는 자주 짜증을 냈다고 한다. 교육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는지, 제자들도 '엄한 서당 훈장만큼 무서웠다' 고 회고할 정도. 하지만 사제 관계를 떠나 학생들에게 유학 과정에서 겪게 되는 개인적인 문제에 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대인배 기질도 있었다고 하고, 특히 동양인 유학생들에게 큰 관심을 쏟았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항구 도시에서 살았던 것 때문인지 생선이나 조개 등 해산물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하는데, 식욕도 왕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담배는 결핵과 당뇨병으로 인해 거의 손대지 않았고, 감자를 싫어해 독일 유학 초기에 굉장히 고생했다고 한다. 2차대전 후 독일에서는 구황 작물로서 감자를 대량으로 재배하고 섭취했는데, 처럼 매일 식탁에 감자가 올랐을테니...지못미.

6. 정치적 논란

한편, 윤이상의 정치 행적을 두고 좌익과 우익 인사들은 종북 관련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일부 우익 인사들 중에는 윤이상의 정치적인 행적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다. 초기 윤이상은 반일 활동을 벌일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지만, 해방 후 진행된 좌우 간의 대립은 그리 깊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9] 사실 이런 점은 당시 윤이상과 동갑인 유명한 작곡가 김순남(1917~1983)[10]도 마찬가지였는데 김순남은 미군정에서 그의 음악성을 발견한 미군 장교[11]가 지속적으로 도와주고 미국 유학까지 주선했음에도 서북청년단에게 빨갱이로 인증받아서 잔인한 처우를 받고 월북의 길을 택한다.[12] 이것은 그가 해방 전후에 잠시 들었던 단체때문이기도하다. 윤이상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후 행적에서 볼수 있듯이 정치와 예술간의 괴리가 해방과 분단에서는 때로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실지로 윤이상도 한국전쟁 중에는 피난지가 된 부산에서 반공을 주제로 한 노래도 만든 바 있었고, 종전 후에는 육군 장교들과 함께 전쟁 고아들을 위한 위문품이나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독일로 활동 거점을 옮긴 뒤의 행적이었는데, 특히 1963년에 북한을 방문한 것이 가장 쟁점이 되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윤이상의 북한행에 대해서는 그를 납치하려고 독일에 온 정보부 요원들조차 몰랐고,[13] 이것이 남한 언론에 퍼진 것은 재판 과정의 보도 때였다. 이승만 정권 이상으로 반공주의가 강화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무슨 목적이었건 북한에 갔다는 사실 만으로 좌빨 인증을 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반공' 을 위해 각종 국제법마저 쌩깐 중앙정보부의 활동이 되레 외국에 안좋은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고,[14] 윤이상 구명을 위한 서명 운동에는 심지어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같은 거물급 인사들까지 참가할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왔다.[15]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인 여론은 대부분 사전검열로 인해 한국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고, 윤이상이 독일로 돌아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16]

박정희 정권 말기였던 1970년대 후반에는 특히 반 윤이상 조류가 극에 달했는데, 지휘자 임원식이 독일에 초청받았을 때 '무악' 을 지휘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모 음악잡지에서 유명 필진들을 대거 동원해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을 정도였다. 이로 인해 임원식은 한국 음악계에서 급작스럽게 스캔들의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사상 검증' 논란에 휘말렸다.[17]

1982년에 대한민국 음악제를 통해 윤이상 작품만으로 꾸며진 연주회가 두 차례 열리면서 해금 기회를 맞았지만, 여전히 윤이상 작품이 수록된 음반과 악보는 수입 금지 혹은 제한 품목으로 묶여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오히려 윤이상 음악의 평가와 연주, 연구에 열을 올린 쪽은 북한이었고,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는 평양에서 초연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음악 사조를 '부르주아 반동적' 이라고 규정한 사회주의 정권에서 이렇게 지원을 한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윤이상의 현대음악에 대한 업적 보다는, 통일운동가로서의 업적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매년 가을마다 윤이상 음악회를 열고 있고, 윤이상 음악연구소와 연구소 부속 관현악단윤이상관현악단까지 꾸려가고 있다는 점에서 음악적인 영향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실지로 북한은 유명한 현대사 괴작 영화 족과 운명에서는 윤석민이라는 가명으로 두번에 걸쳐서 영화화 할 정도로 대단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18]

윤이상은 작품 활동 외에도 빌리 브란트 같은 정치계의 거물들과 만나 한국의 민주화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고, 한민통이나 범민련 등 재야 운동가들의 조직에서도 회장이나 위원을 맡는 등 민주화/통일 운동에 참가한 경력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들을 모두 '반국가/친북한 세력' 으로 규정하고 있던 한국에서는 그의 이러한 활동 정보만으로도 가루가 되도록 깔 수 있는 떡밥을 보유한 셈이었다. 후술하겠지만 재독 유학생들 포섭 의혹도 지속적으로 제기 된 바 있다.

정치적인 논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던 이런 사실과 별도로, 1980년대 후반에 월북 문학/예술인 작품의 해금과 함께 윤이상 음악에 대한 해금도 같이 진행되었다. 그와 함께 까기 일변도였던 국내의 윤이상 음악에 대한 평가도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고, 윤이상에게 직접 배웠던 강석희와 백병동, 김정길 등이 한국 작곡계의 거물급 인사가 되면서 간접적으로도 공적이 언급되는 등 많이 호의적인 쪽으로 선회했다. 한국 출신으로서 가장 세계적인 위치에 있는 지휘자인 정명훈도 교향곡 제3번의 세계초연을 비롯해 여러 무대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윤이상의 관현악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하지만 예술계의 평가와 다르게, 정치계에서는 여전히 윤이상의 행적에 대해 친북인지 아닌지를 놓고 논란을 벌이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문민정부' 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민주화를 이룩한 조국에 쉽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윤이상은 결국 '지난 과오에 대한 사과' 를 정부로부터 요구받자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윤이상의 한국행을 '정권에 대한 굴복' 으로 멋대로 해석한 일부 운동권 인사들은 베를린의 윤이상 자택에까지 찾아가 "선생께서 한국에 가신다면 우리는 분신자살하겠습니다." 라고 협박해 덩달아 병크를 터뜨리고 말았다.[19]

하여간 윤이상 개인으로도 김영삼 정권하에서 귀국 논쟁은 결국 자신을 잡아가고 고문했던 권력자들 뿐 아니라, 자신이 믿고 지원했던 재야 인사들까지 등을 돌리는 상황이 된 셈이었다. 이는 결국 건강 악화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낳았고, 결국 정치 활동 포기 선언을 한 뒤 고향땅을 영영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윤이상 사후 11년이 된 2006년에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실규명 위원회에서 '동백림 사건이 부정선거로 악화된 국민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확대되고 과장되었다' 는 발표가 나왔고, 이듬해인 2007년에는 이수자가 1969년 이후 처음으로 남한을 방문했다.

통영시에서는 해마다 윤이상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통영국제음악제가 개최되고 있고, 윤이상의 이름을 딴 국제 음악 콩쿠르나 작곡 경연도 열리는 등 예술적인 차원에서는 거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남북을 아우르고 통일을 이루고자 했다는 정치적인 입장과 행각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고, 남북 간의 대립이 계속되는 한 그치지 않을 것 같다.

6.1. 오길남 논란


이 사건 이후로 윤이상이나 몇몇 인사들에 대한 비판 기사가 월간조선에 실리기도 했다. 윤이상의 친북행위나 발언에 대한 비판은 별도로 하더라도 서울대학교 출신이었다가 유학 생활중 가족을 데리고 월북, 북한 공작원으로 일하다 남한으로 귀순한 오길남 박사의 수필이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윤이상과 두율[20]이 오길남을 포섭하고 독일에서 교민들을 상대로 공작을 수행하며 오길남의 가족[21]을 수용소에 보내는데 앞장 서서 일하는 것으로 나왔다.[22] 특히 오길남의 수기에서 묘사하는 윤이상은 천하의 개쌍놈이자. 희대의 인간쓰레기로 나오는데.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2011년 인터뷰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는데 참조.반면 윤이상의 오길남에 관한 글 '오길남 사건과 나'에서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펴고 있다.#

오길남 사건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는데 일각에선 윤이상 유가족들의 행보 때문에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오길남이 자신의 가족을 돌아오게 힘써줄수 있느냐는 말에 윤이상 딸이 미쳤다라고 했다라는가 하면[23]#
윤이상의 아내는 김정일이 사준 집에서 살면서 김일성이 죽자 비통해 했다# 라는 것. 그러나 보수 언론인 조선일보의 보도인 만큼 다른 시각의 보도도 참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길남측의 증언과는 반대로 윤이상의 유족들은 앞서 언급한 '오길남 사건과 나'의 연장선상에서 증언을 펴고 있는데, 윤이상과 오길남은 그렇게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고 오길남이 탈출한 뒤 자신들은 북한측의 인맥을 이용해서 북에 남은 가족들의 사진을 얻어다 주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오길남 본인이 가족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자 분노해서 내쫓았다고 증언하고 있다.#[24]

다른쪽에서는 오길남에게 정녕 아무 문제도 없는가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실제로 오길남의 부인이 북한행을 반대했음에도 본인이 강행해놓고 이제와서 윤이상 탓을 하는게 우습다는 지적이 있으며 조용히 살고 싶다라고 하던 사람이 왜 이제와서 가족을 구하겠냐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지적도 있다. 류승완 감독의 다큐멘터리 "간첩"에 출연해서는 자신이 간첩에 대해서 잘 안다는 식으로 류승완 감독과 주진우 기자를 낚았다는 비난도 있다. 심지어 같은 보수쪽에서도 종북짓을 하던 인간이 가족 구해달라고 할 자격이나 있나 # 라고 하기도 한다. 물론 저 글의 말미에 대한민국이 구해주면 감사해서 충성할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대충 의견은 오길남이 괘씸하지만 윤이상을 죽이려면 오길남을 이용해야 한다라고 하니 판단은 알아서.

2011년에 통영에서 위에 언급된 오길남 박사의 가족들을 북한에서 구출하자는 시민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들의 주장 중에 통영국제음악제 등 윤이상 기념사업들의 즉각 철폐가 있다. 하지만 이미 세계구급 작곡가가 된 인물의 기념사업을 철폐한다는 것은 정부로서도 부담스러운 문제라서, 실현될 가능성이 있을지 의문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2012년 유족들에 대해 극우단체를 중심으로 한 공격이 거세지자 유족들은 오길남과 극우단체에 대해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여 결국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당사자 중 하나인 윤이상이 이미 사망한 데다가 증거, 증인 부족으로 인하여 진실 규명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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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작품 출품은 하지 않았지만 1958년에도 참가했는데, 이 때 훗날 전위예술가이자 비디오 아티스트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백남준을 만나기도 했다.
  • [2] 여담으로 1950년대에 유학을 간 사람들은 박정희의 군사정권이 들어서기 전의 한국에서 서양으로 넘어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국토 분단에 대한 개념도 별로 없었고 좌익이든 우익이든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게다가 지식인들이었으므로). 지금은 전쟁도 했고 대립도 하고 있지만 짧게는 수년 뒤, 길게는 10여년 뒤에는 통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대부분이어서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 죄가 되는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동백림 사건으로 잡혀간 사람들 중에서는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북한에 왜 갔다왔냐?"라고 묻자 "넹? 갔다오면 안되염?"이라고 답한 사람도 있었다고...
  • [3] 동백림사건 관련자들이 대부분 부적절한 방법으로 국내에 압송되었다. 정부기관에서 유학생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상을 주겠다라는 말에 속아서 귀국한 경우도 있고, 억지로 협박해서 끌고 간 경우도 있었다. 이는 분명 국제법 위반이다.
  • [4] 독일은 미국과 같은 이민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당시 외국인, 특히 동양인이 독일인과 결혼도 하지 않고 독일 국적을 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서독 정부가 윤이상의 입지와 명예를 인정했다는 것과 동시에, 한국 정부의 재차 납치 계획 등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맞물려 있었다.
  • [5]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작품 이전에도 같은 재독 작곡가였던 박영희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관현악곡인 '소리' 를 1980년에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발표한 바 있다.
  • [6] 엄밀히 하자면, 남한에서는 '재개' 되었다고 해야 한다. 동백림 사건 이후에도 '낙양' 을 비롯한 작품들이 서울에서 이따금 공연되었던 기록도 있다.
  • [7] 슈판다우 지구에 묻혀있다는 말도 있지만, 슈판다우는 윤이상이 타계한 병원이 있던 곳이고 묘지 소재지는 가토우 지구가 맞다. 혹시 성묘가려는 사람이라면 참조.
  • [8] 많은 문헌과 재발매 악보에는 '충무가' 가 빠진 다섯 곡만이 언급되어 있지만,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초판본 악보에는 분명히 여섯 곡이 수록되어 있다.
  • [9] 루이제 린저가 구술한 '상처입은 용' 을 보면, 해방 직후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문화예술 쪽에서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아 실망하고 탈당했다는 내용이 있다.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보니 자본주의가 분명하군!
  • [10] 성우 겸 DJ 김세원의 아버지
  • [11] 김순남은 고마움의 표시로 그에게 그가 작곡한 미발표 곡 하나를 선물한다.
  • [12] 김순남은 월북후 소련 유학까지 갔지만 강제 귀국후 행방불명되었다가 90년대 중후반에서야 1983년에 사망했음이 드러났다.
  • [13] 실제로 서울 압송 전, 독일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사전 심문을 하던 요원들이 윤이상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놀랐다고 한다.
  • [14] 1960년에 홀로코스트 핵심 인물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검거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보 기관인 모사드가 행한 작전이 비판을 받은 것도, 국제법을 무시한 절차 때문이었다.
  • [15] 서명 운동에 참가한 다른 음악계 명사들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토 클렘페러, 스 베르너 헨체, 볼프강 포르트너, 보리스 블라허 등 약 150여 명에 달했다.
  • [16] 실제로 동백림 사건 수사 종결 후, 윤이상의 음악 뿐 아니라 윤이상이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꽤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 장학생들을 받아들여 가르치거나, 외국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단편적인 소식 정도는 간혹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 [17] 아이러니한 것은, 이 여론을 주도한 잡지의 발행인이 윤이상과 부산사범학교 시절 음악교사로 함께 일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임원식은 동백림 사건 때도 윤이상의 무고를 주장한 증인으로 재판에 출석했기 때문에, 이미 예전부터 쿨타임을 노리는 반대파가 형성되어 있었다.
  • [18] 하나의 시리즈는 앞에서 설명한 동백림 사건 묘사, 다른 하나는 사실은 윤이상 윤석민에게 남한에 숨겨 놓은 사생아 아들이 있었는데 북한 공작원들이 손써서 북한의 품으로 데리고 온다는 이야기이다. 후자는 사실상 전두환 비난이 주요한 주제이지만
  • [19] 이 증언은 윤이상의 미망인 이수자가 낸 책에 나와 있지만, 운동권 인사들의 이름은 무슨 이유인지 언급되지 않고 있다.
  • [20] 소위 김철수 논쟁 및 경계인 논쟁으로 파문이 났던 바로 그 사람 맞다.
  • [21] 부인은 재독 간호사 출신으로 남편이 북한으로 가겠다고 하자. 자기 눈을 찔러서라도 후회할 일이 있을것이라고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역시 남편을 잘못 만나면 인생을 망친다
  • [22] 요덕 수용소 출신의 강철환의 증언에 따르면 오길남의 가족은 요덕에서 분신자살까지 기도했다고 한다.
  • [23] 그런데 이 기사는 아무리 읽어봐도 자기집에 불쑥 나타나서 인터뷰를 끈질기게 요구하는 기자에게 욕을 한것 이상으로는 안 보인다...
  • [24] 사실 이것도 나름대로 모순된다는 의견이 있다. '그렇게 친밀한 관계도 아니라 월북을 종용한 적이 없다'더니, 오길남의 가족들이 수용소에 가자 갑자기 그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했고 사진까지 얻어다줬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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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6 07: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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