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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last modified: 2015-04-06 20:20:39 by Contributors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구상도

1895년 음력 8월 20일 양력 10월 8일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한 사건. 명성황후 살해사건이라고도 한다. 이후 단발령등의 문제와 함께 미의병도화선이 되었다.

간혹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멸칭이 을미사변인 걸로 아는 사람이 있는데, 아니다. 끔찍한 사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변") 일종의 관습으로 '을미의 변', '을미사변'이라 부른 것으로, 당대에 쓴 표현이다.

Contents

1. 사건 이전
2. 사건의 개요
3. 사건 이후
4. 흥선대원군의 참여 여부
5. 명성황후의 능욕 여부
6. 명성황후는 죽지 않았다?
7. 기타

1. 사건 이전

1894년 일어났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랴오둥 반도를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위협을 느끼고서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랴오둥을 에 반환할것을 요구했고, 결국 일본은 하릴없이 따라야 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 한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창 물이 올라 있던 일본은, 이로 인해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었다. 이를 지켜본 명성황후 민씨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소위 '인아거일(러시아와 가까이 하고 일본을 멀리한다)'의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세력들이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조정에 대한 대대적 개편이 일어난다. 어윤중친일 성향의 관료들이 축출되고 이완용[1]을 중심으로 한 친러시아 성향의 관료들이 중용되었으며, 김홍집과 함께 친일 성향의 내각을 구성하여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내무대신 박영효명성황후 살해 음모사건으로 인해 반역혐의로 수배한 상황이었다.

이런 조선 조정의 급변은 일본으로선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자칫 다된 밥을 날로 먹으려는 러시아에게 조선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본명성황후를 죽임으로서 국면을 전환하고자 했다. 일본명성황후를 죽이려고 한 이유는 그녀와 그녀의 일가인 민씨 세력이 조선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성황후를 죽이면 민씨 세력이 자연히 약해질 것이고, 다시 친일 성향의 관료들을 앞세워 조선 식민지화를 앞당기려고 한데서 나왔다고 볼수 있다.

2. 사건의 개요

이에 따라 일본은 치밀한 준비를 진행했다. 가장 먼저 진행한 것은 고종명성황후의 경계심을 푸는 일이었다. 박은식의 저술 <한국통사>에 의하면,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직접 입궐하여 고종명성황후에게 상당한 거액의 선물을 바치고, 일본조선 왕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대한계년사>와 매천야록에서는, "일본인 고무라의 딸이 명성황후양녀로 들어갔는데 이는 명성황후를 살해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고, 궁중 가무를 맡은 자 하나를 은밀히 포섭하여 명성황후의 얼굴을 그리게 하여 낭인들이 알아보기 쉽도록 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9월 1일(음력 7월 15일), 이노우에를 대신해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가 새로운 조선주재 일본 공사로 부임했다. 육군 장성 출신을 공사로 부임시켰다는 점에서, 미우라가 모종의 특수한 임무를 받고 부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우라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척 연기를 하면서, 염주를 돌리고 불경을 외며 문불출하여 염불 공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조선 왕실의 경계를 돌리려는 위장술이었다.

10월 3일(음력 8월 15일), 일본 공사관 지하실에서 명성황후 살해계획이 구체적으로 짜여졌다. 흥선대원군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일본 공사관 무관인 카모토 류노스케 대위가 흥선대원군의 협력을 받아, 흥선대원군이 그를 데리고 경복궁에 들어가기로 했다.

낭인들은 주로 일본민간인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친일신문인 <한성신보>의 사장인 아다치 겐조를 비롯해 편집장과 기자들, 그리고 구마모토 출신 인사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도쿄대 출신의 극우 엘리트 학생들이었다. 민간인들로 중심을 삼은 것은, 혹 나중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일본 정부와는 무관한 일로 발뺌하기 위한 속셈이었다[2]. 또한 사건을 조선인들 간의 분쟁에 의한 결과로 만들려는 속셈에 따라, 해산될 예정이었던 련대를 끌어들였다. 우범선이 이렇게 포섭된 인물로, 우범선은 민씨 세력을 축출해야만 조선이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훈련대 해산에 대한 불만도 있었기 때문에 가담하게 되었다.

당초 계획으로는 10월 10일에 거사를 진행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훈련대가 급작스럽게 해산되는 바람에 거사일을 10월 8일로 앞당겼다. 변경된 거사 일자는 10월 8일 새벽 4시였지만, 이것 역시 틀어져 버렸다. 계획대로라면 흥선대원군은 적어도 새벽 3시에는 경복궁에 들어와 있어야 했지만, 흥선대원군이 늑장을 부렸는지 아니면 강제로 끌고 오느라고 늦어졌는지는 몰라도 새벽 3시에야 공덕리(지금의 공덕동) 아소정(애오개역 부근)을 출발한 것이다. 흥선대원군경복궁에 도달한 것은 새벽 5시가 넘어서였고, 일본 낭인들과 훈련대 등은 그제서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아침이 가까운 시간이 되어버린 탓에, 예정과는 달리 많은 목격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치밀했던 사전 계획과는 달리, 사건은 상당히 엉성하게 진행되었다. 흥선대원군을 기다리는 사이에 일본 공사관 수비대 1중대는 장소를 착각해(…), 낭인들과 우범선이 지휘하는 훈련대 제2대대와의 합류가 늦어졌다. 이들은 겨우 춘생문 앞에 집결한 뒤, 명성황후가 거처하는 건청궁을 향해 돌격했다.

오전 4시가 되자 일본 공사관 수비대와 훈련대등은 춘생문과 추성문 등을 포위했다. 이런 소란 통에 고종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명성황후도 건청궁에서 벗어나 은신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고종범진을 보내 미국, 러시아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하게 했다. 범진은 4~5m나 되는 궁궐의 담장을 뛰어넘은 뒤(!) 먼저 미국 공사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이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4시 30분, 일본 공사관 수비대와 훈련대 병력은 광화문으로 돌격했다. 시위대가 윌리엄 다이 미국 지휘관의 지휘를 받으며 맞섰지만, 시위대의 무기가 빈약했던 탓에 밀리고 말았다[3]. 이때 훈련대장 홍계훈이 달려와 드라마와 달리 훈련대 병사들을 꾸짖고 제지하다가 일본군에게 사살당했다.

시위대를 몰아낸 뒤, 훈련대는 흥선대원군이 대기하고 있는(혹은 감금된) 건녕전 앞 뜰에서 대기하고, 낭인들은 건청궁으로 몰려가서 명성황후를 찾으며,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잡아 행방을 캐물으며 머리채를 쥐어잡고 마구 구타를 가했다.

결국 건청궁 곤녕합에서 낭인들은 명성황후를 찾아냈다. 궁내부 대신 경직이 낭인들을 가로막았지만 권총에 맞았고, 이어 낭인들의 칼에 두 팔이 잘려나가는 참극이 벌어졌다. 2005년에 발견된 에조 보고서에 의하면, 명성황후궁녀들 사이에 있다가 낭인들에게 끌려나온 뒤 낭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칼로 내리쳐 몇 군데 상해를 입혔고, 이후 절명시켰다고 한다. 대체로 그 시각은 새벽 5시 50분에서 6시, 6시 정각 직후 등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에 명성황후의 신원을 어떻게 확인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들의 설명이 제각각 엇갈린다. 《매천야록》은 명성황후양녀가 된 고무라의 딸이 그 얼굴을 확인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처음부터 초상화 혹은 사진을 들고 와서 궁녀들의 얼굴과 대조했을 것이라는 설, 혹은 마마 자국을 보고 확인했다는 설도 있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우범선의 진술을 기록한 《우범선 최후사》에서는, 낭인들이 우범선을 데려와서 명성황후의 얼굴을 확인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일설에는 명성황후와 주위에 있던 명성황후로 의심되는 궁녀들의 을 모두 벗겨 임신했던 흔적을 찾아 확인했다고 한다.[4][5] 아래에 나온 에조 보고서의 항목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 볼수 있겠다.

미우라 고로 공사는 아침에 경복궁에 들어와 직접 명성황후시체를 확인한 뒤, 낭인들에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시체를 불태워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낭인들은 경복궁 뒤편 건청궁 동쪽 녹원으로 가서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워버렸다. 남은 은 훈련대에 소속된 윤석우가 몰래 빼돌려 산속에 묻었다가, 나중에 다시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

3. 사건 이후

미우라 고로는 이후 고종을 만나 협박을 가하여, 김홍집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게 했다. 그리고 <한성신보>는 흥선대원군이 입궐했다는 대문짝만한 기사를 내서, 간밤의 사건이 흥선대원군명성황후 사이의 알력으로 벌어진 것으로 유도하려 했다. 또한 미우라 고로는 조선 외부와 군부에게 이번 사건에 일본은 관여하지 않았다는 증명을 요구해, 이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김홍집은 자기가 서명하고 고종의 명의로 명성황후를 폐서인한다는 조칙을 발표했지만, 이것이 되레 역풍을 불러 일으킨다

이후 김홍집 내각은 을미개혁을 추진하다가 아관파천으로 무너지고 김홍집, 어윤중 등은 끔살, 유길준,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왕세자(훗날의 순종)는 서인 조칙에 반발하며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거세게 항의했고, 이에 놀란 김홍집은 폐서인 조치를 바꿔서 명성황후으로 승격시킨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민심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러시아 공사 를 베베르를 중심으로 서양 각국도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여, 국제 여론도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때 일본은 책임을 추궁하자 "조선인 말을 어찌 믿냐"고 반박했지만 "이건 조선인이 말한게 아니라 서양인이 본 거다!"라고 재반박당했다. 목격자가 좀 많았어야지(…).

결국 명성황후 살해를 조선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속이려 했던 일본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미우라 고로 등 사건 가담자 47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고 재판에 회부했으나, 일본 법정은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주장했고 이완용을 비롯한 친미파 관료들과 서구의 선교사, 외교관이 대거 개입된 고종 탈출작전인 춘생문 사건이 터지자 "봐라, 구미도 조선에 개입하는데 왜 우리라고 개입 못하냐?"라는 희대의 개드립을 치면서 사건 가담자 전원을 석방했다. 석방된 이들은 일본에서 애국자로 칭송받았고 이후에 출세 가도를 달리며 승승장구했는데, 이를 보더라도 명성황후 살해의 배후에는 일본 정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맹꽁이서당 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이런 이유로 일본은 아직도 국제 사회에서 못 믿을 국가 취급을 받는다' 라고 깟다.

4. 흥선대원군의 참여 여부

일본인들이 명목상 흥선대원군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흥선대원군이 관여된 것 자체는 부정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을미사변 전, 8월 16일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카모토 류노스케는 공덕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을 방문했다. 그는 별장 사랑에서 흥선대원군에게 "거사 후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이준용을 3년 기한으로 일본 유학을 보내라는 등 4가지 조건의 굴욕적인 각서를 제시하고, 자필 확인을 받아냈다. 거사일자는 적당한 날을 택해 흥선대원군에게 통보해 주기로 했다.

일본은 출발에 앞서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거사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게 하였고, 그것을 서울 시내에 붙이도록 지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일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도에 폐지하고 5백년 종사도 하루가 급하게 위기에 처해 있으니, 나는 종친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고종)를 보익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년 종사를 지키려 하니, 너희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만일 너희 백성과 군사 가운데 나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니 너희들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을미사변 동안, 흥선대원군경복궁 내 강령전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태의 진전을 보고 있었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한 명성황후를 싫어하여 을미사변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고, 실제 실행 역시 일본인들이 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분 면에서 도움을 준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인 선교사외교관이었던 호머 헐버트는 '한국의 죽음(The Passing of Korea, 1906)'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이런 까닭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조선에서 맨 먼저 상의하고자 했던 사람이 전임 섭정(흥선대원군)이었다는 사정은 이해하기 쉽고, 흥선대원군은 문제 해결에 대해 단 한 마디밖에 할 말이 없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20년 동안의 그(흥선대원군)의 경험은, 공사가 겨냥한 목표를 이루는 길은 하나뿐임을 그는 확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미우라 고로 자작은 당연히 그 방법을 택하는 것을 꺼렸지만, 그도 마침내 그것이 유일한 현실적 계획임을 확신하게 된듯하다.

그리고 1896년 1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판결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0월 8일 새벽3시,' 장사(壯士)들을 포함하는 일본인 대집단이 조선인 몇 사람들과 함게 한강에 가까운 흥선대원군의 거소로 가서 그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그들이 출발할 때, 그들의 우두머리가 사정에 따라 '여우'를 처리하라고 그들을 독려했다. 그 말의 분명한 뜻은, 왕비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이 틀 무렵, 그 무리는 광화문을 통해 궁궐에 들어갔고, 바로 의 거처로 향했다.

캐나다 출신의 영국인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는,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서 흥선대원군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드러냈다.

그들의 죄에 더해서, 일본인들은 그들의 입 노릇을 한 흥선대원군을 통해 살해된 왕비의 기억을 더럽히고 낮추기 위해 온갖 짓들을 다했다.

5. 명성황후의 능욕 여부

일본의 '에조 보고서'에 명성황후강간하는 장면이 묘사된 내용이 있다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하지만 해당 문구는 <여우사냥>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작가 김진명이 자작한 것이다. 실제 '에조 보고서'의 표현은 이와 다르며, 상식적으로 보고서에서 강간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에조 보고서'의 실제 문구에서도 '국부 검사'를 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시간이나 강간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강간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보고서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의 코와 귀를 자른뒤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위에 나와있는 것처럼, 단순히 임신 여부를 살펴보기 위해 을 벗겼을지도 모른다.

6. 명성황후는 죽지 않았다?

잔기가 있었습니다

2013년 7월 1일,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명성황후가 을미사변 때 죽지 않고 탈출했다라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생존" 외교문서 발견

정 교수가 발견한 문서는 1896년 2월 6일, 러시아 주재 독일 공사 후고 라돌린이 총리 앞으로 보낸 암호문서 해독문인데, 이 문서에 의하면 "러시아 외교부 장관 로바노프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한국왕비가 아직 살아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는, 왕비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1명의 한국인으로부터 매우 비밀리에 요청받았다고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가 보낸 문서도 발견했는데, 이 문서에는 "과 왕세자(순종)은 피살을 모면한 것 같다. 그리고 왕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말하지 않고 있다"라고 했다는것. 힐리어는 을미사변 직후 작성한 문서에서도 "일본인들이 궁녀 서너명을 죽였으며, 왕비는 사라졌는데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으며, 이후 힐리어는 베베르의 방문을 받았는데 베베르가 명성황후의 생존 가능성이 있음을 말했다는 보고서도 작성했다고 한다.

과연 정 교수가 발견한 문서가 실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는 의문부호가 달리기는 한다. 만약 명성황후가 탈출했다면, 왜 이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는지 쉽게 납득하기는 힘들다. 명성황후가 살아있었다면 오히려 자신의 생존을 이후에라도 드러내서 일본을 궁지로 몰수도 있었는데, 왜 고종이나 명성황후가 그런 카드를 활용하지 않았을까? 또한 일각에서는 일본외교가에 역선전을 살포한 걸, 독일영국이 착각한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정 교수와 일부에서는, "당대 최강대국인 독일영국일본의 역선전을 아무 확인도 않고 덜컥 믿고 본국에 보고했겠느냐??", "명성황후일본의 재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 숨어 살다가 곧 사망했을 것이다"라는 반론도 나온다. 결국 구체적인 사료가 더 발굴되지 않는 한, 쉽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그나마 명성황후일본에게 죽었으니까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데, 도망가서 숨어 살았다면 이제 실드쳐 줄 꺼리도 없어진다

7. 기타

명성황후를 살해한 48명의 낭인 중의 1명인 토우 카츠아키(藤勝顯)는, 명성황후를 2번째로 베어 마지막 숨을 끊었노라고 스스로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현재 일본 후쿠오카 구시다(櫛田) 신사에 그가 사용한 칼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칼의 나무 칼집에는 그가 직접 새겨 넣은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는 문구가 그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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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이완용은 친일행각만 벌인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친러행각도 벌인고 친미행각도 벌였다.
  • [2] 그리고 살해의 주범들은 전부 치외법권으로 인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갔다.
  • [3] 그 전해의 경복궁 점령 당시, 경복궁을 장악한 일본군은 궁궐을 지키는 조선군의 무기, 을 죄다 원정 연못에 처넣었다. 이 총들이 아직도 정비가 안 된 상태였다. 화력덕후고종이 모았던 통일성 없던 막대한 무기들은 이때 모두 맛이 가버렸고, 경복궁은 이후로도 몇 차례나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 [4] 궁녀들은 평생 처녀로 지내야 하고, 임신 경험이 있는 건 중전뿐이기 때문이다.
  • [5] 명성황후의 용모가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여, 유방의 처짐으로 확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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